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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6장 31절 / 의미있는 영생 / 150319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6장 31절 / 의미있는 영생 / 150319

정인순 2015. 3. 20. 14:38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이한례

가락-요한복음6장31(의미있는 영생)

150319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6장 31절 하겠습니다.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이 표현에서 만나를 먹어버리니까 만나는 어디 속에 들어가 있어요? 사람 속에 들어가겠죠. 그러면 만나는 속에 들어가자마자 사라질 것이고, 나타난 것은 사람들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죠.

그런데 그렇게 돼 버리면 뭐가 되느냐 하면 흐른다 하는 것이 깨어져 버리고 굳어지죠. 굳어짐으로 흐름에서 굳어짐으로 바뀌었습니다. 만나를 주는 것은 만나를 계속해서 주고, 주고, 주고 하면서 약속의 땅으로 서서히 유도하는 기능이 있는데 만나는 매일 오잖아요. 매일 오니까 이 전체가 하나의 흐름이죠. 어제와 오늘이 이어지고 오늘과 내일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인데, 인간은 흐름을 생각 못하고 자기 몸만 생각하잖아요.

‘오늘도 만나를 먹었습니다. 만나를 쏙 집어넣었습니다. 만나 없습니다. 또 주세요.’ 이렇게 되는 거죠. 예를 들면 사료는 개한테 사료줄 때 사료를 위함입니까? 개를 위함입니까? 개를 위함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만나를 사료 정도로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주인공이고 만나는 나를 하나님께서 먹이는 하나의 사료다. 이렇게 생각하는데요.

성경은 그게 아니고 만나가 그리스도에요. 인간들이 정말 주객이 바뀌었다 볼 수밖에 없어요. 나를 위해서 만나를 준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가 만나를 먹었나이다.’ 그 사고방식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만나에 이끌렸습니다.‘ 이러면 얼마나 좋아요? 같은 상황이라도. 만나가 이끄는 대로 가겠습니다. 왜 가다보면 약속의 땅에 도착하니까.

만나의 의미를 위해서 만나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그 증인으로서 미리 만나를 먹었나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별로 없고요. 우리에게 만나를 줬기 때문에 그만큼 우리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실은 하나님은 만나가 더 중요한데 자기가 중요하다 하니까 이게 바뀌었으니까 예수님이 그들 곁에 와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한테 뭐 해줄 거요?’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기가 차고 코가 찰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데리고 자기 나라에 넣어주려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굳어지면 안 되고, 우리는 주님의 흐름에 따라가 줘야 돼요. 따라가게 되면 굳어짐이 해체가 되겠죠. 흐물흐물하게 되겠죠. 흐물흐물해도 괜찮아요. 왜냐 하면 그 흐름 안에 그리스도가 점점 굳어져 있으니까 내가 굳어져서 좋아서 주님을 믿는 게 아니고 만나 안에 그리스도가 굳어져 있는 거예요. 굳어진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가 그걸 증거 하라고 우리 자신의 인생은 요리사들이 도마에다 파든지 자를 때 아주 타다다닥 잘라버리죠. 완전히 해체시켜버리잖아요. 그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매일같이 잘라버리는 겁니다. 자르게 되면 그 토막 난 사이사이에 뭐가 들어갑니까? ‘주님 없이는 못 삽니다.’라는 게 들어가겠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주기도문에 보면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루치 밖에 주지 않는 거예요. 왜, 하루 살았으면 많이 사는 거예요. 그 다음은 우리 소관 아닙니다. 내일 눈 뜰지 안 뜰지는 내가 걱정할 바가 안 돼요. 왜냐 하면 우리는 주님을 주님 되게 하는 사료니까. 자리를 바꿔야 돼요. 우리가 사료고, 우리가 사료가 되어서 우리를 먹으시고 주님 몸집이 커지면서 굳어지겠죠. 이걸 바꾸어 생각하니까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남은 문제는 뭐냐 어떻게 바꾸느냐 하는 문제죠.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가 있는데 우리는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 사고방식을 어떤 식으로 바꿔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바꾸느냐 그것은 주님께 맡겨진 일입니다.

그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이제 요한복음 6장31절 이후를 계속 보시면서 같이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 보기 전에 창세기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기에 제 다섯 째 날이 뭐냐 하면 바다에는 고기 있고 공중에는 새가 있죠. 여섯 째 날에는 땅에는 짐승들이 있고 사람 만들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맞을 건데, “하늘에는 새가 날고 그리고 물에는 고기가 있고” 자, 거기서 제가 한번 물어볼게요. 새와 물고기와 사람들의 그 환경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르죠. 같지 않은 상이한 환경을 갖고 있죠. 사람하고 새나 물고기하고 다르죠.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꾸느냐, 바꾸는 문제거든요. 날 위한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한 우리를 어떻게 바꾸느냐 하면, 환경을 바꾸어서 인간은 환경에 의존해서 바꾸어지는 방법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왜냐 하면 요한복음 6장에서의 모든 환경은 사람들이 곡해하기를 이걸 누굴 위한 환경이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신이 우리 자신을 생존하기 위해서 주신 환경 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사실 이거는 창세기 3장하고 틀리죠. 하나님께서 아담보고 에덴동산에서 추방한 것은 아담을 살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죽이는 조건으로 던져준 거예요. 그래서 어제 수요설교에서 그걸 저주의 조건이라 했잖아요.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저주 받는 자임을 확인하기 위해서 주어진 조건이 바로 이 삶의 조건인 겁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환경은 우리가 저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환경. 그런데 인간은 사단에 의해서 잘못된, 엉터리 같은 인간이 돼서 내가 기어이 독자적으로 살아야 되겠다는 것을 고집하는 그런 정신. 그러니까 주어진 환경과 거기서 살려고 버티는 우리와 이게 안 맞죠. 안 맞으니까 자연적으로 우리 사는 게 힘들 수밖에 없는 겁니다. 생로병사가 어떠니, 해탈이 어떠니, 이런 되도 않는 아이디어가 자꾸 나오는 것은 별로 사는 게 만만치 않다는 뜻 이예요. 힘들다는 뜻입니다. 많이 가져도 문제고.

그래서 저는 오늘 이걸 쉽게 하기 위해서 이 환경이란 말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이걸로 바꾸겠습니다. 세트장이라고. 세트장! 어제 후딱 지나가면서 드라마를 이렇게 봤는데 배우가 아주 통곡을 하면서 옆에 세트로 돼 있는 커텐을 잡아당겨서 찢어놨어요. 드라마에. 너무 분통이 터져서, 뭣 때문에 분통이 났느냐 하면 잘 나가는 화가인 아들이 자기가 맘에 드는 색시 감하고 결혼하는 게 아니고 애 하나 있는 과부하고 결혼하니까 그게 속상해서 거기 있는 엄마가 속이 상해서 커텐을 뜯는 그 장면을 후딱 봤어요. 그러니 우리가 보통 집에서는 커텐이 얼마나 아깝습니까? 그런데 그 세트에서는 그걸 뜯어내라고 세트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환경이 있다는 것은 환경을 통해서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그걸 알려주는 그런 암시조로 현재 이 세상에 모든 것이 하나의 세트장처럼 돌아가서 내가 세트장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우리가 주변에 있는 것은 ‘너에게 문제 있는 거야.’라고 일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의도적으로 설치해 놓은 그런 세트장 같은 기능을 하라고 환경을 우리가 갖고 있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선악과는 따먹었죠. 그러니까 자기는 잘났죠. 눈을 떴죠. 그러니까 자기가 실제로 눈 떴으니까 설치게 되는데 신처럼 행세하려는 아담에게 그러한 환경들, 저주스런 환경을 준 것은 바로 그러한 자세가 그게 원래 네 모습이 아니고 문제가 크다. 이미 네가 망가졌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 환경은 우리를 죽게 만드는 환경, 같이 파괴되는 환경을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그걸 제가 어제 수요일 날 저주의 조건이라 한 거예요. 우리의 주어진 삶이라 하는 것은 저주의 조건입니다. 저주 받으라고 준 환경입니다. 거기서 어떻게 행복할까? 하는 것은 그건 자기 주제 파악이 안 되니까 그런 소리 나온 거예요. ‘하나님, 어떻게 하면 내 문제가 해결됩니까?’라는 그런 질문 같은 것도 해서는 안 될 질문 이예요. ‘그 입 다물라. 쉿’ 해야 될 질문 이예요.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우리는 답이 뭐냐를 찾는 사람이 돼서는 안 되고, 왜 이런 답이 나왔는지 문제를 발견하는 사람이 돼야 돼요. 왜 내가 요 모양 요 꼴로 사는 게 하나님 보시기에 정답인가를 이제부터 거기에 합치된 문제를 우리가 찾아내야 돼요. 그 문제 찾는 건 쉬워요. 내가 죄 지었기에 이만한 것도 과분하고 오감타. 그럼 그게 해답이 되는 거죠. 그게 질문이 되는 거예요. ‘주여 저한테는 이런 것도 과분합니다.’ ‘그래, 그걸 알려주기 위해서 이런 환경을 집어넣어준 거야.’ 그러면 질문하고 답이 딱 들어맞잖아요.

그저 교회 가서 베껴서 답만 냅다 외웠는데 그 답 외워서 천국에서 불합격자죠. ‘어떻게 해서 이런 답이 나왔지?’ 하면 ‘모르겠습니다.’ 이러면 되겠어요? ‘예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습니다.’ 큰 소리 쳤는데 주님께서 “예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고? 그런데 메시야가 왜 피를 흘려야 되지?‘ ’그건 처음 들어봅니다. 그냥 피만 찍어 바르라 해서 찍어 바르고 왔는데 그 질문 처음 들어봅니다.‘ 그렇게 되면 ”이게 어디서 있는 척 해?“ 하면 대번 추방시킬 거예요. ”네가 피를 모독한 자다.” 이렇게 될 겁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이미 흘렀으니 이게 복음이요, 답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생활, 네 자, 신앙생활과 같다는 거예요.

왜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가? 그 질문 찾아내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정답 모르겠다. 하잖아요. 정답은 이미 챙겼어요. 정답을 꽉 쥐고 하루하루 살면서 ‘이게 정답 맞구나.‘ 예수님의 피라 하는 것은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예수님의 희생 이예요. 예수님이 희생해야만 될 정도로 내가 그렇게 문제성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더 깊이 있게 더 넓게 우리가 알아가는 그때 우리는 주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요한복음 6장 31절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보면 “우리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그 다음에 뭐라 했습니까? “먹었나이다.” 하는 자체가 문제성이 있다 했죠? 만나를 먹으면 안 되는 거예요. 우리가 만나한테 먹혀야 되는 겁니다. 우리를 위해서 만나를 준 게 아니고 만나를 위해서 거기 있었다는 사실, 만나의 가치를 위해서.

만나가 누구냐? 그 뒤에 나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위해서인데 우리는 마치 만나를 사료로 보고 우리, 자기를 개로 봐서 개한테 사료 주는 줄 알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주시옵소서.’ 하지 마시고 질문을 바꾸세요. ‘왜 주셔야 됩니까?’라고 바꾸세요. ‘살려주세요.’라고 하지 마시고 ‘왜 꼭 내가 살아야 됩니까?’ 그렇게 하세요. 질문을 그렇게 바꿔야 돼요. ‘유학 간 애 때문에 살아야 된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좀 살아야 애도 공부시키고‘ 이러면 안 돼요. 왜, 무엇을 본받기 위해서? 희생이니까. ’이미 다 가졌느냐?‘ ’예‘ ’그러면 나눠줘도 괜찮겠네.‘ 이렇게 나옵니다. 이미 죄 용서 받았으면 그 사랑 나눠줘도 괜찮아. 이렇게 하는 거예요.

32절에 보면 이제 슬슬 내가 어렵게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어렵게 하시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어렵게 할 수밖에 없는데요. 32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자, 여기에 뭐 별로 어렵지 않아 보이는데 목사님은 왜 어렵다 합니까? 라고 했을 때 저는 이렇게 합니다. 이게 어렵습니다. 왜냐 하면 빈 공간이 있다고 치면 빈 공간은 아무 의미 없죠. 바다에 비가 온다. 뭐 무슨 의미 있겠어요? 황무지에 비 내린다. 뭐 의미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황무지에 내가 들어가서 집을 짓고 산다. 이러면 그 황무지가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의미라 하는 것은 나와 관련 있을 때만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게 돼 있습니다. 나한테 관련 있을 때만. 나한테 관련 없을 때는 아무 의미 없어요. 내가 너를 꽃이라고 이름을 붙여줬을 때 비로소 꽃은 나에게 들어와서 하나의 의미가 되고 하나의 몸짓이 되는 겁니다. 이게 김춘수가 그런 시를 할 때 몸짓이라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몸짓이라 하는 것은 뭐냐, 상대역, 연극에서 상대, 나와 상대하는 거예요. 상대한다는 것은 이제부터 나는 너에게 의미를 주는 동시에 너는 나에게 내 소유가 되는 겁니다.

요러한 것은 아담이 곧잘 했어요.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이름을 붙여주는 동시에 그 이름 붙여준 그것은 아담의 통솔 에 들어가는 갑니다. 다스리고 정복하는 대상으로, 항목으로 들어가게 돼 있어요.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이여, 하나님 이름이 무엇입니까?” 물을 때 하나님이 이름을 안 가르쳐 준 거예요. 이름을 만약에 부르게 되면 그 모세의 하나님이 모세가 다룰 수 있는 하나님이 돼 버려요. 그렇게 되면 이거는 모세는 구원이 안 되는 겁니다. 왜냐 하면 구원이란 자기의 자리를 부정해 버리고 자기도 모르는 자리로 이동하는 게 구원인데, 그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 초청해 버리면 그 자리는 꿈쩍도 안 하잖아요. 그러면 구출이란 것이 성립이 안 돼 버려요.

교회 와서 뭐 달라, 달라 하는 것은 지금 ‘나 구원 안 받겠습니다.’와 똑같은 소리에요. ‘저를 이렇게 기도하게 하지 마시고 아예 딴 데로 보내주소서’ 이렇게 나와야죠. ‘주여 내가 있는 자리 말고 주님 있는 곳에 가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해야 돼요. 그렇게 하려면 주님이 이 땅에서 겪었던 것을 같이 겪어야 되는데 그 말은 뭐냐, 그건 ‘밉상 받고 죽어도 좋습니다.‘ 하는 소리거든요. 우리가 주님과 할 때 우리가 죽어야 되듯이 주님을 부를 때 그냥 못 불러요. 주님도 또 죽어서 또 죽음을 거쳐서 또 와야 되니까 주님은 두 번 죽을 수 없잖아요. 그리고 우리를 죽여서 주님과 합류하는 방법밖에 없죠. 어떻게 주님을 또 죽입니까? 십자가에서 단번에 끝났는데. 왜 또 죽이십니까? 어디 주님 부르는 걸 대리 운전사 부르듯이 막 불러대요. 술만 먹으면 무조건 불러.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날 위한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 위한 내가 되려면 환경 자체가 주인이 바뀌어야 되고, 주인 바뀌면 의미가 바뀌는 겁니다. 여기서 빈 공간에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있었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스라엘은 큰 오산 이예요. 빈 공간에 이스라엘이 들어와 버리면 이 빈 공간은 이스라엘에게만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뭐로 보느냐 하면 모세가 너희에게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셨다. 이렇게 돼 있거든요. 여기 32절에. 모세가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셨다. 이랬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이 빈 공간의 의미는 너희들의 눈에 보이는 모세와 너희들이 결정한 것이 아니고, 이 빈 공간에 만나라는 형식의 모세가 만나를 주는 게 아니고 모세는 만나가 온다고 이야기했지, 만나가 내리는 것은 모세 권한 밖의 문제입니다. 모세가 새벽 4시부터 나가서 모세가 한 자루 만나를 자고 있을 때 뿌린 게 아니에요. 모세는 만나의 권한 밖에 있는 겁니다. 모세는 자기도 만나 먹어야 살아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보이는 것들은 환경에다 의미를 주고 이름을 붙이지만 만약에 그들 가운데 보이지 않는 분이 있어서 그분에 의해서 이런 환경이 조성된다면 이 공간의 명칭은 누가 붙여야 돼요? 보이지 않는 그분이 붙여야 되겠죠. 그러면 그 공간의 의미가 붙여진다면 이 공간에 대해서 보이진 않지만 이미 이 공간을 지배하는 존재자가 누가 있다. 이 말이잖아요. 그 존재자가 여기 하나님이라 돼 있고 더 나아가면 예수님 자신을 가지고 만나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만나라는 것을 뭔 뜻이냐 하면 이 공간은 너희들이 활용하거나 너희들 생존에 유리한 쪽으로 해석대상이 안 된다는 겁니다. 오늘날 이 광야란 이름의 공간, 지금 광야에서 만나 이야기하잖아요. 이 광야라는 이 공간이 오늘날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한테 의미 없는 거예요. 왜, 우리는 이미 죽은 자니까. 우리는 이미 어린양과 함께 죽은 자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있는 이 서울이라는 거, 어제는 비 약간 왔고, 그리고 오늘 날씨가 덥다는 이 모든 의미는 예수님에게 속한 문제지, 예수님에게 의미가 있고 예수님이 하신 일에 의미가 있지, 내가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그러한 대 자연의 혜택은 아닙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모든 것이. 내가 좋으라고 움직이고 운영하는 게 아니에요.

그 이유는 제가 아까 이야기했는데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말씀드리면 그 이유는 우리는 흐름이 어떻게? 굳히면 된다 했죠. 그들이 만나를 먹은 순간 만나는 그들 뱃속에서 소화되어서 사라져 버리죠. 그럼 나타나는 건 뭡니까? 자기들 존재만 그대로 굳어져 있죠. 이러면 이 자리가 곧 고정된 자리가 되고 말아요. 왜냐 하면 광야라 하는 것은 지금 빨리 흘러가야 되는데 사람들은 자꾸 고정된 거, 자기 자신에게 집착과 미련을 계속 갖고 있는 거예요. 그 흐름에 따라줘야 되는데 흐름에 따르지를 못하고 ‘다음에는 또 뭐 주시렵니까? 아이쿠, 만나만 줘요? 아이, 지겹다. 이제 고기 좀 주세요.’ 맨날 자기 굳힘에다 몰두하고 집착하는 거예요.

따라서 이것은 만나는 며칠 치입니까? 보통 하루치잖아요. 그러면 이 굳힘이 하루를 통해서 이걸 완전히 잘라져야 된다. 하루, 하루치를. 오늘 염려는 오늘로 끝나버려요. 그냥 하루치만 생명을 부여받는 겁니다. 그런데 하루치는 우리 살라고 하루치가 아니고, 만나가 하루, 일용할 양식이기 때문에 만나에 맞춰서 우리는 하루만 살아야 돼요. 만나가 일회용이니까.

병원에 가니까 약을 주는데 일주일 분을 줬다.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일주일 살고 죽으세요.‘ 물론 그런 뜻은 아니겠지만 하나님께서 만약 약을 주시면 그렇게 주시는 거예요. 일주일 줬다는 것은 일주일 살고 그 다음부터는 죽으라, 이 말 이예요. 만나를 하루치 줬다는 것은 너의 굳어짐을 내가 아주 하루를 단위로 해서 잘라버리겠다 이 말이죠. 그러면 잘라버리면, 그러면 하루 밖에 못 살면 하루살이냐? 그 하루살이가 일주일 살이로 바뀌어요. 그게 만나가 그 다음 한 주간 되게 되면 보너스를 주게 돼 있거든요. 사흘 치를 줘요. 토, 일, 월까지. 사흘 치를 주면서 이게 뭐가 바뀌느냐 하면 요 광야에 합당한 새로운 의미가 부여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날 위한 환경이 아니고, 다른 보이지 않는 분, 동행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일방적으로 그분을 위한 환경 속에 자기는 놓여있다면 이제는 그 의미가 날 위한 상황이 아닌 것을 변화가 일어나게 되겠죠.

지금까지 강의한 걸 다시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만나줬는데 사람들은 그걸 자기가 주인공으로 여겨서 나를 먹여 살리려고 내가 개고 주님께서 사료 주듯이 개 먹여 살리려고 사료 주듯이 만나를 줬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만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주의 뜻이었다.

문제는 이게 바뀌어져야 되는데 어떻게 바뀌느냐? 그거는 환경을 가지고 바꾼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환경을 바꾸느냐 하면 빈 공간은 그게 자기가 존재를 느끼면 그 들어선 존재 때문에 환경은 들어선 존재가 일방적으로 나한테 유효하다고 일방적으로 의미를 갖다 붙이니까 그 의미를 주님의 의미로 바꿔치기 하는 방법으로 이 공간의 주인공은 네가 아니고 너는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우치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걸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서 세상에서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라고 해서 여기서 생명이라는 말이 나오죠. 이 생명이란 말을 아까 김 중우 집사님이 잘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내가 다시 말씀드릴게요. 생명을 어디 있느냐? 생명은 죽음 안에만 들어있어요. 따라서 죽음이란 이 호수, 이 저수지, 여기에 뛰어 들어가야 되는데 안 들어가고 주변에 돌아다니면 거기에 생명이 없어요.

인간은 이 죽음에 뛰어들어서 생명을 건져야 되는데 죽음에 뛰어들 생각을 안 갖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죽음에 뛰어들면 죽음 속에서 건질 생명의 주인공이 사라져요. 왜, 뛰어든 순간 누가 사라지기 때문에? 뭔가 사람이 생명을 원한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그 생명이 내 소유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따라서 그렇게 되면 생명이 중합니까? 내가 중요한 거예요? 내가 중하죠. 나한테 도움 되는 생명이거든요. 이것을 하나님께서 처음에 아담에게 허락을 안 했어요. 생명나무 그 가는 길을 막아서 네가 먹지 말라 했다 말이죠. 먹지 말라 하면 안 먹으면 돼요. 그런데 인간은 지독하게 말을 안 들어요. 먹지 말라 한 그것에 기어이 그걸 고대하고 있어요. ‘아휴, 언제 생명나무 따먹노. 주여 주시옵소서. 생명나무’ 젊을 때는 90만 살면 많이 살았다 했는데 막상 90 되고 나니까 더 살고 싶은 거예요. ‘아이고, 내가 죽는다 생각하니까 기가 차요. 천년, 만년 살고 싶어.’

그러니까 인간에게 누락돼 있고 결핍된 게 뭐가 있느냐 하면 생명의 자리가 누락돼 있으니까 살아도 이게 산 게 아니에요. 그 누락이 너무 컸어요. 누락된 요소가 너무 강렬해서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이건 죽기 전부터 이미 팍 기죽어 있어요. 죽기 전부터 이미 죽어있어요. 그게 괴로우니까 인간은 범죄하고 발악하고 그걸 프로이드는 죽음의 충동이라고 하는데, 살고 싶어서 죽음의 충동이 살고 싶어 하는 걸 죽음의 충동이라 해요. 누가 죽으라 하지도 않았는데 혹시나 더 살까 싶어서 돈을 훔치고, 왜, 돈이 있어야 사니까. 또 뭐도 하고 하죠.

심지어 드라마 같은데 보면 ‘내 새끼 건드리면 다 죽인다.’ 하는 대사가 나오는데, 그건 폭풍의 여자, ‘내 새끼 건드리면 다 죽인다.’ 하거든요. 왜 그러한 악담을 합니까? 그만큼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성도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죽으면 죽지.’ 에스더는 그랬잖아요. “죽으면 죽으리라” 죽으면 죽지. 그럼 그 소리 듣고 다른 사람은 뭐라 합니까? ‘죽으면 너만 손해야.’ 그러면 우리는 뭐라 합니까? ‘왜 그렇게 너만 손해라고 생각을 하지?’ 그건 너라는 걸 제일 중요시하니까 너는 안 죽고 싶으니까 네가 죽는다는 말은 마치 자기한테 손해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왜 자꾸 너밖에 생각할 줄 모르냐. 진짜 머리 돌아가는 게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이러면 나한테 손해일까. 이러면 나한테 이익일까. 이익이면 행복하고 손해나면 내 인생은 이 모양 이 꼴이라고 또 자책하고.

인간이 기대하는 생명이라는 것은 선악과 따먹은 상태에서 계속 오래 사는 것을 생명이라 하거든요. 그 생명 없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것은 고칠 생각 안 하고 ‘그냥 그런 건 하나님 묻지도 마시고 그저 오래, 오래 살게 해주세요.’ 오래 살게 해달라고 신방 간다면 그건 욕이죠. 질을 바꿔야 되는데 질 바꿀 이야기를 안 하고 그냥 오래 살게 해달라고 하면 그건 노인 욕보이는 겁니다. 이 말 이예요. 지금 몇 년 복역했습니까? 80년 복역했습니다. 100년 복역하세요. 이 말과 똑같은 소리에요. 이게 뭐에요? 욕 돌리는 거지. ‘어이 군바리, 몇 개월 됐나?’ ‘예, 18개월 됐습니다.’ ‘말뚝 박아라.’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생명나무를 못 따먹게 하는 게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선악과로 이미 질을 버려놨거든요. 본래 인간이 아니에요. 생명나무는 단독으로서 사는 생명은 없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면 그게 생명입니다. 그런데 그런 선악과 따먹은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했잖아요. 주님께서 분명히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덜렁 따먹은 인간이 ‘같이 살아줘요.’ 이렇게 나오면 같이 살 수가 없죠. 왜, 주님의 말씀은 ‘따먹지 말라‘인데 ’따먹으면 어때‘ 이런 행패 부리는 거와 같이 살 수가 있겠어요?

아내가 남편 보고 ‘술 처먹으려면 집에 들어오지 마. 나 술 먹으면 안살아.’ 이러는데 ‘같이 살아.’ 해서 벌겋게 술 취해 들어오면 같이 살겠어요? 못 살지. 조건이 뭡니까? 술 먹지 않은 상태에서 살겠다는데, 술 벌개서 한 사발 먹고 난 뒤에 ‘같이 살자.’ 이거는 여자들이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도 허용 안 해요. ‘술 깨거든 오너라.’ 이렇게 되겠죠. “너 선악과 따먹은 거 빼고 오너라.“ 뺄 수가 있습니까? 마귀가 집어넣었는데. 선악과 아는 그것에 눈 떴잖아요. 눈 뜬 상태를 마귀는 그게 ‘아이구, 잘 빠졌네.’ 고게 정상이라고 이미 다 온 세계를 그런 사고방식으로 완전히 다 그렇게 유행시켜버렸어요. 오히려 그게 아닌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하죠. 눈 뜨고 이성적으로 똑똑한 그걸 정상적 인간으로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마귀는 좋아하겠지만 하나님은 접수 안 합니다. 서류 접수부터 안 돼요. 바꿔서 오라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아까 이야기한 성령님하고 세세토록 같이 사시면 되겠네요. 뭐 인간들은 다 타락하고 범죄 했으니까 다 지옥 보내고 하나님 자기들끼리만 살면 되겠네. 그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뭐냐 하면 목적이 있어요. 성경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쓴 거예요.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위하여 성경이 있는 게 아니고 주되심이에요.

예수님이 주되심이 되려면 예수님께서 필히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되는 겁니다. 왜냐 하면 주개념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죄를 대신 씻어주는 역할이 포함돼 있어요. 그게 어디 있느냐, 에베소서 1장 7절에 나옵니다. 피 흘림이 있어줘야 주님이 주가 돼요. 피 흘림이 없으면 그냥 하나님 되지, 주가 안 돼요. 어렵죠? 하나님이지만 주는 아니라니까. 예수님이 처음부터 하나님 맞아요. 하지만 주는 아니에요. 주가 되려면 반드시 뭔가 경유를 해야 돼요. 이 땅에 와서 경유를 해야 되고, 그거 경유하는 환경을 위해서 ‘죽으리라’ 한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계속 새끼, 자식을 낳게 한 겁니다. 인간을 계속 낳게 했죠. 그게 저주의 조건 이예요.

그래서 이걸 이렇게 정리해 봅시다. 빈 공간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주셔서 아담이 빈 공간을 보면서 자기 세상이라 여기겠죠. 거기서 나온 게 뭐냐 하면 뭘 끌어당기느냐, 역사를 끌어당깁니다.

역사를 끌어당겨서 이 빈 공간을 아담의 역사로 전부 다 전환시켜 버립니다. 이 공간을 성경에서는 동그랗게 보지 않고 네모로 봐요. 네모로 보고 여기서 뭐냐 하면 동, 서, 남, 북으로 하나님은 그렇게 규격을 정했습니다. 에덴동산도 이렇게 동쪽 남쪽이 있어요. 동, 서, 남, 북으로 해놓고 스가랴에 보면 이 동쪽, 서쪽, 남쪽, 북쪽까지 누굴 보내느냐 하면 천사를 보냅니다. 뭘 가지고 보내느냐, 납을 가지고 보내요. 납이라 하는 것은 놋, 납, 같은 물질인데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구석까지 빈틈없이 깨끗하게 심판해 버립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저주의 조건 이예요.

“정녕 죽으리라” 하는 것을 주님께서 계속 유지시켜 나가는 겁니다. 왜, 생명은 어디서 있느냐? 하늘에서 주는 게 아니고 바로 생명은 죽음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음 안에 있어요. 생명은 죽음 안에 있어요. 그래서 죽으면 생명을 얻겠네요. 소리를 하지 마세요. 죽는 순간 이제는 생명을 얻을 주인공 자체가 죽음 속에 같이 다 물에 물 탄 듯이 다 날라 가 버려요. 그래서 생명의 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아닙니다. 생명의 주는 따로 계세요. 그것은 하나님이 생명의 주가 되십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이 생명을 포기하고 포기된 생명을 하나님 손으로 건져냄으로써 자기가 다시 회수를 하면서 뭘 거기다 얹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 아들 예수님, 독생자를 주로 만드는 작업을 거기다 얻어내는 효과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회수를 해버립니다.

그래서 생명의 주요, 하는 말을 아마 백성 같으면 다 오해할 거예요. 생명의 주가 뭐냐 하면 ‘내가 생명을 얻고 싶은데 주님 갖고 있지? 주세요.’ 이런 식으로 오해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너를 지워버리는 것’ 없애면서 너의 자리를 뭐로 하느냐 하면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으로 바꿔놓고, 바꿔놓고 예수님에게만 생명을 부여하는 겁니다. 참 잘했다. 내 모든 말씀대로 잘 지켰으니까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라“ 거기에다가 모든 생명은 거기서 나오게 돼 있어요.

그래서 죽음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베드로가 그걸 잡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 죽음은 베드로의 죽음이 아니고 누구냐, 예수님의 죽음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에서 베드로가 자기의 목숨을 걸고 따라 가겠다 할 때 ‘오지 말라’ 했거든요. 그러니까 베드로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에 같이 이렇게 섞일 수가 없어요. 베드로가 섞일 수 없다는 말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목숨 바쳐서 한다 해도 안 돼요. 죽도록 충성해봐야 생명 못 얻습니다.

생명이라 하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것이지, 내가 목숨 바친다고 그걸 대가로 생명 주시지는 않아요. 그렇게 되면 행함이 돼 버려요. 이걸 여러분들이 야고보서에 보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죠” 언젠가 지난번에 설명했는지 모르겠는데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이 말을 행함이 믿음을 대체한다고 이해하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행함이 믿음을 대체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원하지, 행함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을 믿음답게 하는 행함은 우리가 믿음과 연결된 행함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행함을 할 수가 없어요. 그것은 믿음의 주가 되시는 분이 우리에게 집어넣었다는 내가 한 게 아니고, 위에서 생명을 주셨잖아요. 오늘 하늘에서 주신다 했잖아요. ‘주신 행함이 이겁니다.‘ 내놓는 거, 그걸 내놓아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아브라함에게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행함, 그러니까 아버지를 위해서 아들이 죽는 행함을 아브라함이 미리 땅겨서 자기 아들을 잡음으로써 미리 땅겨서 보여준 거예요. 그게 바로 야고보서 2장에 나오는 행함 있는 믿음의 대표적 사례가 그거에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바친 것.

또 그리고 사라가 임신을 못했는데 임신 한 것, 이게 행함 없는 믿음입니다. 임신도 행함 이예요. 누가 이렇게 일을 벌려 놨습니까? 하나님이 일을 벌렸잖아요. ‘하나님이 일을 벌렸습니다.‘라고 자랑할 때 그 행함을 가져오란 말이죠. ’값없이 주는 은혜가 이겁니다.’라고 내놓으란 말이죠.

그러면 그 행함이라 하는 것은 결국 우리 몸 전체를 늘 주님 앞에 내놓고 맡기는 그것이 바로 행함 있는 믿음입니다. 따로 할 필요 없어요. 그냥 매사를 드리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행함 없는 믿음하고 이거하고 비교해 보세요. 믿음 없는 믿음, 믿음 없는 믿음이 뭐냐 하면 이게 바로 불신자들 이예요. 믿음도 없으면서 믿는 척하고 있는 거예요. 믿음도 없으면서 믿음도 없는데 믿고는 싶고 이런 거예요. 안 믿어지는데 믿고는 싶은 거예요. 솔직하지를 못해요. 안 믿어지면 안 믿으면 되는데, 안 믿으면서 믿는 척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한 믿음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믿음 이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그래서 반대로 믿음이 있는 믿음이라면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다 빼야 돼요. 예를 들어서 우연히 멋도 모르고 농약을 마셨는데 멀쩡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게 뭡니까? 하나님의 은혜죠. 그 다음에 ‘또 마셔볼까?’ 요 순간 고거는 믿음이 없는 거예요. 분명히 하나님이 해줬으면 믿음으로 됐잖아요. 그런데 왜 믿음을 확인하려고 해요? 믿음이 없기 때문에 믿음을 확인하려고 또 한 번 시도하다 속 다 타 죽죠.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잖아요. 베드로가 바다만 보고 호수만 보면 막 뛰어갔습니까? 혹시나 또 그럴 수 있는가 싶어서 막 했습니까? 두 번 다시 안 했죠. 베드로가 배 오른편에 던져서 고기가 많이 잡혔죠. 그러면 그 다음부터 무조건 배 오른편에 던지면 고기 잡힙니까? 예수님 계실 때 물고기 벌리니까 성전 세 나왔죠. 그러면 제자들이 물고기 걸리기만 하면 전부 다 아가리 벌려서 혹시 있는가. 다 열어봅니까? 그게 바로 믿음 없는 행동 이예요.

대표적인 믿음 없는 행동이 방언이나 하는 거예요.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그걸 하려고 연습을 하겠어요? 그래. 그게 무슨 관계있어요? 아무 관계없거든요. 그 말은 지금 주어진 환경이 우리가 죽음에 못 들어가요. 왜, 살고 싶은데 미쳤다고 죽어요? 안 죽고 싶은데 주께서는 우리를 죽음으로 밀어 넣는 조건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일상생활이고, 요 모양 요 꼴의 우리 인생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우리를 죽음으로 밀어 넣는 그 행동은 내 죽음으로 죽는 죽음이 아니고 주님의 죽음에 참여해서, 그 주님의 죽음 안에 들어있는 생명을 우리가 참여되기 위해서 그렇게 몰아세우는 겁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겁니다. 모든 것이 아니요, 가 아니고 다~ 잘 되라고 한 거예요. 모든 일이 아니요, 가 될 수가 없어요. 모든 것이 오케이고, 전부 다 오케이 싸인 난 거예요. 카메라 감독 다 찍고 난 뒤에 ‘어떻습니까?’ ‘오케이’ 딱 나오잖아요.

이거는 여담입니다마는 폴 싸이먼과 가펑클이 불렀던 박스라는 노래 녹음할 때 그 녹음 제일 끝에 자세히 들어보면 ‘오케이’하는 게 나와요. 녹음 잘 됐다. 이 말이거든요. 이거는 여담입니다. 옛날 20대 때 다방에 앉아서 들었던 거예요. 지금도 보면 그게 나와요.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힘들어합니까? 그것은 빈 공간에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나의 역사를 거기다가 가꾸었고 거기 주변에 나의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을 붙인 그 중에 대상자 하나가 예수님이 걸려든 거예요. ‘예수님, 저한테 뭘 해줬다고 큰소리칩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광야라 하는 곳은 바로 그런 인간들을 하루치로, 일회용으로 전부 다 조각, 조각내서 하루와 단절, 단절, 단절, 단절, 단절, 단절로 이어져 가는 겁니다. 돔배기를 너무 잘라서 단절할 때는 제발 너라는 인생으로 새로 역사를 이렇게 뭉텅이로 만들지 말라 말이죠. 이걸 가지고 야고보서 4장에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우리는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나니 다만 우리는 안개에 불과하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항상 내일 것이 걱정이잖아요. 오늘 걱정 아니고 내일 걱정 이예요. 내일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하지 마라. 그날에 족했다는 말을 한 걸 봐서 내일 것에 대해서 염려하고 걱정하고 근심하지 말라 말이죠.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근심 안 하면 되는 겁니까? 뭐 해야 돼요? 그 나라 의를 구하면 돼요. 그 나라 의는 확정적입니다. 우리는 유동적이고 우리는 변화무쌍하고, 따라서 이 공간을 변화무쌍으로 하려면 네 중심으로 해라. 하지만 이 공간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공간이라고 한다면 그 나라 의로 이 공간이 꽉 채워져 있다는 것을 믿어라. 너는 그 속에서 유연하게 헤엄치고 있는 그런 어항 속의 괜찮은 물고기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정리하고 쉬겠습니다. 이 광야라는 공간은 뭐로 채웁니까? 이스라엘로 채워지는 게 아니고 만나로 채워지고, 나중에 만나가 광야가, 광야의 소임을 다할 때 뭐도 같이 날라 가죠? 더 이상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32절에 보면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했죠. 아까 제가 말씀드렸죠. 그러면 제가 분명히 했어요. 모세가 아니라면 또 누가 있단 말입니까? 우리와 동행하는 누가 또 있단 말입니까? 그 모세가 함께 있을 때도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있었잖아요. 같은 기둥입니다마는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했는데, 모세는 어디로 갈 지를 몰라요. 도대체 어느 길로 가야 될지. 모세가 자진해서 ‘40년 고생하겠습니다.‘ 이렇게 안 나왔거든요. 그냥 땡땡이 돈 것은 모세 뜻이 아니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그렇게 유도해서 그렇게 된 겁니다. 또 만나가 계속 왔고.

그러면 그 말은 뭔 뜻입니까? 모세도 아무것도 아니요, 이스라엘 백성도 아무것도 아니라면 어떤 그냥 정체 모를 누구야? 이름을 밝혀? 이런 정체 모를 분이 지금 그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를 완전히 그 안에 가둬놓은 셈이 되죠. 바로 그런 환경에서 비로소 만나라는 것은 단순히 떡이 아니고, 생명 그 자체, 생명 그 자체에요.

우리가 애굽에서 어떻게 살 것 같으면 하루 가계부 쓸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치 않는, 우리가 기대하지 않는, 하나님이 만들어진 광야에서는 우리가 어떤 계산기 두드리고 어떻게 가계부 쓴다고 살 수가 없는 거예요. 살 수 없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그냥 막 사세요. 어차피 어떤 수단을 써도 우리를 살려내는 세상은 아닙니다. 열심히 기도한다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기도 안 한다고 해서 곧장 캭하고 죽는 세상도 아니에요. 어차피 다른 분의 어떤 기로 꽉 차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만 의식하면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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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요한복음6장31절(의미있는 영생)

150319b-이 근호 목사

6장34절에 봅시다.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아주 정신을 못 차렸어요. 자꾸 내가 먹는 게 아니고 니가 소멸되어야 되고 주님이 오히려 그들을 잡아먹는데 자꾸 저희들이 자기 것을 고정시키고 고정된 나를 유지시키려고 뭘 자꾸 달라고 하는 거예요. 결국 이들이 다 떠나버립니다. 이런 주관적 태도 때문에 예수님의 주고받는 대화가운데 전혀 그들은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주님의 행동에 객체 대상이 되어야 되는데, 자꾸 주인공으로 행세하니까 주님께서 이렇게 친절하게 이야기해도 그게 먹혀들지를 않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에 복음 전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자기가 주인공인데 복음 전해도 못 알아듣지요. 2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보세요. 주님이여 주소서, 하니까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너희들이 오라, 너희들이 나에게 오라, 너희들이. 그런데 이 이야기할 동안에 누가 오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지금 코앞에 이야기하고 있는데 오고 자시고 할 게 없잖아요. 이 온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나하고 같이 죽자는 뜻이에요. 내가 가는 그 쪽으로 니가 합류하라는 뜻입니다. 제자들도 합류 안했는데, 이들이 합류할 수 있습니까? 안되지요.

생명을 줄 테니까 주께서 길 닦는 거예요. 내가 지금 길 닦고 가니까 너희는 니 길을 버리고 내 길 닦는 곳에 합류하게 되면 거기에 바로 생명이 있다. 아까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죽음 속에 생명이 있어요. 그런데 이 죽음은 누구 죽음인가 하면, 주님의 죽음입니다. 이 주님의 죽음을 요한복음1장에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 했지요. 이걸 히브리서에서는 뭐냐 하면, 새 언약의 죽음이라, 언약 완성으로서의 죽음이라는 거예요. 살아남이 완성이 아니고 죽음이 완성이에요. 그런 말이 참, 어렵다.

예수님의 살아남이 완성이 아닙니다. 약속의 완성이 아니에요. 대부분의 목사들이 이걸 몰라요. 부활이 완성이다. 부활이 완성 아닙니다. 죽으심이 완성이에요. 부활이 완성이 아니고 피가 완성이에요. 피. 피가 완성이라니까요. 부활로 살리는 게 아닙니다. 피로 살리지. 자꾸 부활로 살린다 하니까 사람들은 열매만 따먹으려 해요. “아이고, 좋겠다. 고 살게 한 능력 우리한테 주시옵소서.” 또 주시옵소서. 맨 날 주시옵소서. 하는 거예요.

죽어야 산다, 하니까 사람들은 죽는체하고 살려 해요. 죽어야 산다 하니까. 죽었다~ 살렸다~ 지가 알아서 해요. 그래서 사람이 죽었다가 살았다는 말은 소생이며, 소생은 죽은 당사자가 사는 걸 소생이라 해요.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뭐냐 하면, 인간은 죽음으로 그걸로 끝났어요. 지 드라마로 다 끝났어요. 지 소설은 끝나버리고 이제 사는 것은 예수님만이 살아요. 그 살려준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자기가 원하는 자를 살려내게 되면 고 생명은 죽기 전에 자기 생명이 아니고 예수님이 죽었다 살아난 그 생명의 본인이 능력을 받아서 합류하는 것이지, 옛날 살아있을 때 죽었다 살아난다, 그 부활이란 생명을 지가 짐작하고 예상한 생명을 부여받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달란트 비유도 다시 생각해야 되고 모든 비유를 다시 해석해야 돼요. 전부 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미래에서 미래의 확정된 것에 합류하는 식이기 때문에 그 중간에서 내 것을 버려야 돼요. 내가 생각한 내 구원, 내 영생, 내 천국, 내 예수, 내가 아는 삼위일체, 다 버려야 돼요. 우리 전부 다 다 버려야 돼요. 왜냐, 거기에 누가 끼기 때문에? 내가 껴있거든요. 내가 납득이 되고 내가 이해되는 구원, 이거 다 버려야 돼요. 박영선 목사 설교는 처음부터 잘못된 거예요. “여러분, 이렇게 하면 구원받습니다.” 할 때 그 구원은 내가 짐작하고 있는 구원이기 때문에 아니에요.

우리의 구원은 짐작도 못한 구원이에요. 이건 뭐냐 하면, 우리를 빼놓고, 우리를 배제시켜 놓고 오직 아들, 예수님하고 아버지만 아는 그 구원을,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는 나의 구원을 지독하게 기다린 거기에 낯선 구원이 침투해 버려요. 마태복음5장 한 번 봅시다. 설교시간에 했는데 대목에서 중요하기 때문에 마태복음5장3절 보겠어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사람들은 이 대목을 보면서 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면 천국 줍니까?” 이리 나와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심령이 가난한 것도 내가 짐작하고 심령이 가난했다고 쳤을 때, 내게 주어질 수 있는 내가 원하는 천국을 내가 보장받을 수 있느냐, 이리 되는 거예요.

그것은 이 순재 보험입니다. 내가 돈을 달 달이 얼마나 넣잖아요. 나중에 암 걸린다든지 뭔가 이리 있으면 내가 준 그 돈을 받아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한 그 천국을 주께서 주시는 게 아닙니다. 이미 천로 노선이 바뀌었어요. 그럼 뭐냐, 심령이 가난한 그 자체가 천국이에요. 그게 복이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희 것이다, 이미 네가 천국에 영향권이 있기 때문에 니가 안 되는 심령 가난함이 나로 인하여 이미 되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 제일 마지막 복은 나로 인하여 너희를 욕하거든 나를 인하여. 천국, 천국이야기 하다가 그 천국의 구체화가 누굽니까? 우리가 생각한 잘사는 동네가 아니고 나, 예수님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 예수님이 왔음이 이미 천국이 온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보고 자기가 생각한 천국은 따로 생각해 놓고 요 예수라는 이 작자를 이용해 가지고 내가 원하는 천국에 들어가려하는 겁니다. 세상에 그런 사기가 또 있겠어요? 이건 엄청난 사기입니다. 큰 낭패를 당할 사기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천국 가겠다는 자체가 심령이 가난한 게 아니에요. 그건 욕심쟁이 우후~ 욕심쟁이에요. 욕심쟁이. 세상에 죄를 지어놓고 어디를 가요? 거기에 가면 또 거기서 자기 부서 만들어놓고 또 지 자랑할 건데. 그래서 산상설교는 아무도 못 지키는 겁니다. 복은 맞는데, 너희들이 생각한 그 복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다시 요한복음 36절 돌아와서 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했잖아요.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한테 이끌려간 사람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요. 그러면 그 답변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44절에 나와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라 했지요. 그럼 사람들은 “가면 되지.” 하잖아요. 갈 수는 없다는 겁니다. 갈 수가 없어요.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느냐, 이렇게 되어있어요. 지금 길이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세상이 어두우니까 사람들이 분간을 못했는데 예수님은 지금 여기에 서서 이렇게 내려다보고 이야기하고, 사방이 어둡다 치고 인간은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둡다 치니까 예수님이 위에 계시는데 사람들은 자기하고 마주보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내게 오라, 하니까 가면 되지, 하거든요. 가보세요. 거기에 예수 없는 곳이지. 그럼 위로 가면 되지. 위로 갈 수 없다니까요. 요한복음3장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이 아니면 위로 갈 수가 없다니까요.

그래서 요한복음3장에서 너희들은 다시 태어나도 올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지금 이 땅에서 활동했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주제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너희들은 올 수 없다. 그래서 그걸 저주의 조건이에요. 너희들이 사는 이 상황은 광야고 너희들은 거기서 반드시 죽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너희의 죽음을 그냥 너희만 죽도록 했다면 너희는 그걸로 끝났는데 너희의 죽음 속에 예수님이 합류가 되어있으니까 자신의 죽음 속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합류된 자는 그리스도 죽음 안에서 생명을 거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요한복음8장에 나오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그 간음현장을 잡힌 게 복이에요. 왜냐 하면, 간음현장 걸렸다는 말은 곧 그 당시 율법에 의하면 돌에 쳐 죽임을 당하거든요. 들키면 곧 죽는 순간이에요. 죽는 순간에 누가 등장했습니까? 예수님한테 끌려왔잖아요. 따라서 그 여자는 이미 죽은 자로서 끌려왔기 때문에 손해될 게 없지요.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그런데 주께서 일방적으로 용서해 줘버리니까 자기는 멋도 모르고 영생을 얻어버렸네요. 이런 무슨 횡재가 다 있습니까.

보통 횡재가 아니지요. 로또도 이런 로또 없어요. 자기가 돈 주고 사서 기다린 것도 아니에요. 명동에 갔다가 두 바퀴 날리다가 얼굴에 딱 붙어서 보니까 누가 산 복권이 남아가지고 남아있는 복권이 날려가지고 이건 뭐야, 하고 보니까 로또다 말이지요.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토요일에 맞춰보니까 20억이다. 왜 그리 바람에 날리느냐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게 성령의 바람이라는 거예요. 성령의 바람이 불어 얼굴에 턱 갔다대니까 영생 돼버렸어요.

그게 아버지께서 영생 주라고 했기 때문에 내가 너한테 영생을 준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이 아버지와 아들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니까요. 제주도에서 람보르기니 이태리스포츠카가 있는데 누가 그걸 범퍼를 박았는데, 범퍼 값이 1억4천 나왔답니다. 아이고, 그 박은 사람 참 재수 없다. 큰일 났다 싶었는데 저녁에 뉴스를 보니까 둘 다 짜고 치고 한 거예요. 보험사기 해먹으로고 둘 다 짜고 치고 한 거예요.

이 세상이 아버지와 아들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것을 그것에서 우리가 피조물 입장에서 섭섭해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전혀 섭섭해 하지 마세요. 마치 창세기 죄 짓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와 가지고. 둘이 그렇게 하신다면 저는 OK입니다. 이렇게 되어야지. “저의 구원을 저한테 일임하지 않으시면 저의 자유의지는 어떻게 됩니까?” 라고 따지면 안돼요. 언젠가 그런 강의를 했지요. 아벨이 제사를 드릴 때, 기름과 몸체부분을 분리시킨 거예요. 아벨이. 이는 몸체 속에서 기름이 중요하다는 것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 방법을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용하시는 거예요.

오라, 너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너 속에 우리가 집어넣어준 것을 도로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구원받은 너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고, 너에게 그걸 집어넣어준 죄 많은 너도 구원될 수 있는, 죄도 용서할 수 있는 그 요소를 끄집어내서 우리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쪽으로 이 자연세계는 창조된 겁니다.

그래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한테는 모든 게 기뻐하심이에요. 그것은 우리의 행동보고 기뻐하는 게 아니고 우리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이 집어넣은 것을 가지고 기뻐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아가야에서는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솔로몬 왕이 그 여자를 좋아하니까 그 여자는 또 오해한 거예요. 뭐라고 오해하는가 하면, 자기 좋아하는 줄 아는데. 자기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 속에 집어넣은 사랑을 찾으려하는데, 여자는 자기가 예쁜 줄 알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내거 돌려 달라. 내거. 내가 집어넣은 사랑을. 니가 죽어도 끄집어낼 거야. 사랑은 죽음보다 세니까. 이걸 향유 깬 마리아는 알잖아요.

그래서 남들이 뭐라고 흉보던 관계없어요. “자, 주님 거 여기 있습니다.” 하고 아낌없이 자기 걸 바칩니다. 내가 갖고 있는 향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용서 많이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언급한 겁니다. 절대로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자기 때문에 자기로 인하여 좌절하지 마세요. 마지막 적은 나입니다. 집안의 원수보다 더 적은 내가 바로 나의 원수가 돼요. 왜냐 하면, 내가 나를 훼방 자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 나를 두 개 놓지 마세요. 나라는 자리에다가 예수님이 나라고 하는 예수님을 넣어버려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걸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하지 말고 내 속을 들여다보면서 이야기해야 돼요. 내 속에 바로 나를 나 되게 하신 분이 계시니까. 내 속을 보면서 그 이야기를 해줘야 돼요.

그렇게 될 때에 그 사람은 바로 51절에 보면,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예수님의 살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이 살려내는 살이 예수님의 살이에요. 그건 뭐냐 하면, 우리 살점이지요. 우리 살점이지만, 우리 살점이라 되려면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와가지고, 찾아오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우리의 살과 피 대신 흘려 놓고 그 다음에 죄 많은 우리를 자신의 살점으로 일방적으로 가져가버리는 거예요. 가지고 가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폐기처분 업자에요. 쓰레기 처분하는 쓰레기처분업자에요. 쓰레기인데, 쓰레기 가져가고 영생 만들어 내는 거예요. 분명히 우리 살이지만, 주님께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그게 니 살이 아니고 내 살이라. 값을 주고 산 내 살이라.” 이제부터. 내 머리카락, 내 손톱, 내 발톱, 다 내거라는 겁니다. 그렇게 가져가는 겁니다.

자, 그 다음에 36절 봅시다.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게 뭐냐 하면, 보고 있기 때문에 믿음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이 말입니다. 보고 있기 때문에. ‘아, 나는 주님이 안 보이시지만 잘 믿어야지.’ 그런데 그 안 보이던 주님이 등장할 때는 어떻게 됩니까? 내가 믿음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지요. 안 보일 때는 아, 좋은 관계하다가 막상 나타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안 믿어지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런 게 있어요. 보고 싶은 사람 만나보고 싶어 해서 기다려요. 일주일만 기다리면 만난다, 만난다 하는데 막상 딱 보고 난 뒤에는 아무 말도 안 해. 그냥 안 본 체 해. 또 헤어지게 되면 또 보고 싶어서 말을 해야 될 긴데. 자식들 같으면 ‘지금 공부하랴 얼마나 애 먹겠노. 지금 애가 잠 올 시간인데. 지금 마지막 시간이 영어시간인데 공부 잘해야 될 긴데.’ 그러다가 집에 돌아와서 보면 반갑다는 소리보다도 잔소리부터 늘어지는 수가 있어요. 운동화 씻었나? 양말 그리 거꾸로 벗으면 안 되지. 부터해서 그 다음부터는 잔소리 거리만 찾아내는 거예요. 살피면서. 그것은 왜 그러느냐 하면, 자기한테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모든 것이 자기한테 의미가 있어서 그래요. 아무리 예수 믿는다 해도 나한테 의미를 갖고 있는 한 보고 있어도 안 믿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 말은 뭐냐 주님께서의 믿음이란, 너 중심이라는 것을 폐기처분된 상태를 믿음이라고 나만 간주하겠다, 이리 되는 겁니다. 니 중심 아닌 상태를 믿음이라고 하지, 니 중심으로 믿음 하는 것은 나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 강한 의미로 여기에 담겨있습니다.

37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내게 주시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내게 주신 자는 없습니다. 왜 없습니까? 지금까지 강의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알아들어야 되는데 제가 또 친절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빈 공간에 자기가 있는 존재라는 순간 그 의미는 자기 의미가 돼버려요. 따라서 아버지가 주신 자는 없어요. 왜? 있더라도 이 의미가 이 현실을 보는 관점이 내가 나를 지키고, 내가 나를 구원해야 될 관점이기 때문에 내가 나를 신경 쓰고 내가 나를 귀하다는 관점에서 주님이 내가 원하는 내 구원을 주께서 이뤄줘 보세요,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어떤 누구도 아버지가 보낸 자가 아니고 내가 나를 아버지한테 갔다 붙인 나지, “주님, 참 좋으신 분이지요? 그럼 저를 부탁하겠습니다.” 이런 나지 아버지가 보낸 자는 아니에요.

아버지가 보낸 게 아니고 내가 내 운명에 대해서 내 미래에 대해서 내가 이미 관여된 상태의 나기 때문에 주께서는 그런 자를 끝까지 살리지를 않습니다. 그럼 이것과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가 하면, 예정론과 관련되어 있겠지요.

언젠가 제가 예정론을 한 게 기억나는데요. 다 잊어버렸지요? 성경에 나오는 예정론을 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은 주님의 예정은 예수님만 예정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됩니다. 우리를 예정한 게 아니고 예수님만 예정했어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할 때, 우리라는 그 이전에 반드시 예수 안에 있는 우리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는 말입니까? 아니오. 예수 안에는 우리에 해당되는 사람이 따로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그 우리가 우리잖아요. 그 우리가 우리라는 게 성경에는 없어요. 내가 그 안에 들어있다고 증명해줄 성경구절은 없어요.

예수님 안에 아브라함도 있고, 이삭도 있고, 야곱도 있고, 엘리야도 있고 구원 받은 사람이 있어요. 있는데, 그게 나라고 하는 인간이 거기에 끼었다고 보장해주는 성경구절은 없다니까요. 왜 그렇습니까? 물으신다면, 내가 있다가 아버지께서 보내서 예수 안에 들어가면 이 나는 없지요. 이 나는 없어지고 예수님 만든 우리 안에 합류가 되면서 나의 의미 자체가 지워져버린다니까요.

내가 생각한 우리의 의미가 내 중심에서 나온 의미기 때문에 이게 삭제가 돼버린다니까요. 그러면 이 땅에 오실 때 미리 삭제하면 안 되겠습니까? 미리 삭제하라고 성령이 오셨잖아요. 성령이 오시게 되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해서 나의 몽땅 책임자는 예수님이지 내가 아닙니다. 미리 벌써 우리라는 것이 주님 책임 하에 우리지 내 책임 하에 내가 유지해야 될 우리가 아닌 거예요. 그러니 자기 신앙을 자기가 책임지고 유지하겠다는 것은 그것보다 더 큰 불신앙은 없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자기 믿음을 믿겠다는 것이지 그건 예수를 믿겠다는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가졌습니다. 이삭을 가질 때, 아브라함이 어떤 상태일 때 이삭을 가졌는가 하면 자기도 알아요. 아기 낳지 못한 아내가 임신했거든요. 그러면 그 때부터 약속이라는 게 뭐냐, 우리는 하지 못했다. 우리는 하지 못했다. 우리는 할 수 없었다. 그게 믿음의 조상이잖아요. 그럼 그걸 우리한테 적용시켜 봅시다. “나는 이 물 컵이 있어도 물이 없어서 못 먹었다.” 나는 뭘 하지 못했다. 나는 된 게 없다. 그런 식인 거예요. 그래서 심지어 극단적으로 나왔어요. 극단적인 말씀이 나오지만, 나는 내 머리카락을 한 자나 더, 내 키를 한 자 더 자라게 할 수 없다. 그리고 내 발걸음을 내 임의로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없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니까.

내 머리카락이나 내 키나 내 발걸음이나 이런 것까지 숨 쉬는 것까지 내가 할 수 없다. 이게 평소에 하고 있는 자기 부인이에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이게 자기 삭제에요. 자기 의미 삭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게 하는 그러한 사태가 일어나요. 그걸 제가 사태라고 사건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이걸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사고가 일어나야 돼요. 사고가. 무슨 사고가 일어나야 우리는 한꺼번에 ‘아, 살아온 것이 내 뜻이 아니구나!’ 깨닫는 것이 되지요.

그래서 여기에 37절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이 말씀은 나를 믿을 생각하지 마라, 이 말입니다. 니가 너 자신을 구원하고자 따라 온 이상은 여전히 너는 너에게 하나의 의미고 네가 최 마지막 의미가 너 자신밖에 안 된 입장에서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다. 하지만, 너희들이 그렇게 나온다 해도 나는 아버지의 뜻을 너희들이 방해해서 못한다는 법은 없고 필히 반드시 내 아버지가 주신 자는 내가 반드시 살려내고야 말리라, 니가 안 믿는다 할지라도. 너희가 못 믿는다 할지라도 기어이 믿는 자는 내가 만들게 되어있고 반드시 그들만은 구원하게 되어있다 이 말입니다.

이걸 선교사나 목회자가 믿자, 이 말이죠. 여러분들도 같이 믿자, 말이죠. 이걸 믿어버리면 선교라든지 목회라든지 이게 그렇게 무거운 짐이 아니지요. 무슨 무거운 짐이 되겠습니까. 내 일이 아닌데요. 목회 이런 것이 중요하다마는 그게 목회에다 내 의미, 내 존재 의미를 가미해버리니까 목회 잘 해야 되는데, 선교지해야 되는데, 맨 날 선교지에서 흑인들 몇 명 건졌습니까? 그거 자꾸 장로님이 전화로 물어대지 선교 비는 타내야 되겠지, 아마존강 몇 명 더 전도했으니까..., 아이고, 그러면 그게 하나의 실적돼가지고 갑질한테 당하는 을이 되어버렸잖아요. 그렇게 심적으로 부담되는 선교 전도가 어디 있어요? 그게. 그게 성령으로 되는 겁니까? 육으로 하는 거지.

목회도 마찬가지고. 목회는 주님이 하시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목회자가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38절에 방금 한 것이 나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했지요. 누가요? 예수님이 단독으로 하지요.

그럼 우리는?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알아야 하지요. 아버지도 모르지요. 하나님도 모르지요. 아버지의 뜻도 모르지요. 아버지의 뜻을 우리가 몰라요. 왜 모르느냐 하면, 십계명해가지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뜻이 나오게 되면 그 듣는 순간 우리가 무엇으로 바뀝니까? 우리가 그걸 보는 게 되지요. 그냥 우리는 보고도 못 믿는 의미체제 안에 우리가 만들고 있기 때문에 부모 공경하라는 말을 딴에는 지킨다고 지킨 그것이 바로 부모공경 아닌 게 작품으로 나와요. 어떤 말씀이던 간에. 성경에 눈 감고 아무 말씀도 다 마찬가지에요. 어떤 말씀이던지 간에 절대로 우리가 지켜서 지켜지는 말씀은 한군데도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의미를 내가 만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하고 어긋나지요.

‘그러면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면 내가 손해 아니겠습니까? 그럼 나만 지옥가면 손해잖아요?’ 라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데 본인이 지옥 가는 게 왜 손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 자체가 벌써 수상하잖아요. 주님이 지옥 가는 게 뜻이라면 지옥 가드리는 것이 주님한테 효도하는 거잖아요. “그것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아버지 뜻이 지옥 가는 거라면 흔쾌히 지옥 가겠나이다.” 이렇게 나와 줘야 되지요.

그러면 뭐가 바뀌었지요? 내 중심의 의미에서 주님의 중심의 의미로 바뀌었지요. 그걸 가지고 신자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로마서9장에서 내가 주의 저주에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하고 자신만만하게 하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조차 주의 뜻이라면 그렇게 하시옵소서. 라고 맡길 수 있는 거예요. 왜? 자기는 이미 자기 것이 아니고 주께서 다루시는 주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런 대범한 자신감으로 살아갑시다.

내 뜻은 주의 뜻을 방해할 용도로 우리 뜻이 자꾸 나오는 건 맞아요. 하지만, 그 방해받는다고 해서 주께서 방해받을 분은 아니고 다만, 우리만 죄인이라고 지적받고 그 다음에 뜻은 우리하고 상관없이 자기 뜻대로 다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어내십니다. 좀 밀어주세요. 그 분은 갑이고 우리는 을이잖아요. 갑을 믿어야지 을을 믿어야 되겠어요? 우리 자신을 믿어야 되겠습니까? 나도 내 자신을 모르는데 뭘 믿어요. 주님을 믿는다는 말은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자기는 믿을 게 없어요. 성경의 말씀대로 그대로 예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밀어붙입니다.

39절을 봅시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되어있지요. 그러면 내 인생을 나한테 맡기면 잃어버리겠습니까? 안 잃어버리겠습니까? 100% 잃어버리지요. 왜 그러느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이 갖고 있는 게 천국인데, 우리는 여기서 상상하고 있는 거예요. 상상하고 어둠 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백날 헤매봐야 40년 광야생활 뱅뱅이 도는 것밖에 안돼요. 뱅뱅 돌다 늙어죽는 거죠.

죽어가는 인간은 곧 죽어간다는 말은 인간이 해낼 수 있는 능력은 아무것도 애초부터 없었다는 뜻이에요. 인간이 성사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겁니다. 성사될 수 있으면 아예 안 죽이지요. 죽였다는 말은 니가 백날 해봐야 니가 애썼던 것 다 끌어 모으면 그것이 바로 니가 죽어 마땅함으로 마지막에 최종 회개처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실컷 살았어요? 고생했어요? 자식 잘 키웠어요? 교회 잘 다니고? 죽어라! 이리요.

전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마트에서 물건 사고 난 뒤에 마지막에 계산한다고요. 마지막에 계산하듯이 우리의 죽음은 우리의 살았던 이 세상의 총 가격의 합입니다. 결국 우리의 죽음으로 옵니다. 처음부터 그랬어요. 이것은 도중에 나쁜 게 온 게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죽도록 되어있어요. 그걸 미리 당겨서 아는 사람은 이미 주인이 바뀌어서 그래요. 이걸 미리 당겨서 안다는 것은 나의 의미에서 주님의 의미로 바뀐 거예요.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주한테 가져가면 그게 영생으로 바뀌어요. 희한해요. 우리는 쓰레기지만, 그 쓰레기가 주님 품안에서는 보석이 나온다니까요. 보석이. 요한계시록22장보세요. 온 천지가 보석 덩어리에요. 번쩍 번쩍해요. 빛이 막 나오고 있어요. 황금 보석이 전부 다 사람이에요. 성도들이에요. 보석 같은 성도들이 전체가 하나의 예루살렘 성을 이룹니다. 그 전체가 마치 뭐와 같으냐, 신부가 드레스 입은 거 같아요.

이번에 김성령이라는 탤런트가 연기하면서 입은 드레스가 가격이 있는데, 가격을 먹일 수 없는 게 크리스탈을 삼천 개 박았다는 거예요. 새 수목드라마에서. 그런데 가격을 치를 수 없고 대여비가 소형차1대 값이라는 겁니다. 대여하는데. 그만큼 비싸지요. 그것보다 우리가 더 비쌉니다. 천국 가는 게 그것보다. 그런데 그 빛난 신부의 드레스와 합쳐서 신부가 되는 겁니다. 합쳐서 신부의 화려한 드레스가 되는데. 그 영광스럽게 드레스를 입는 신부들이 행한 건 뭡니까? 얼마치를 행했습니까? 요한계시록22장에 보면. 돈 한 푼 안 들이고 값없이 드레스입고. 이건 웬 수지 잡는 장사잖소. 이런 횡재 어디 있어요? 돈 한 푼 안 들이고 드레스입고.

그러니까 성경은 어렵다하지만, 사실은 아브라함 같은 마음만 가지면 쉬워요. 자식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생긴 그 자식이 자기를 살려버렸으니까. 예수님 오라고 언제 우리가 기도한 적 있어요? 예수 오라고 하지도 않았어요. 예수님이 알아서 왔고, 내 죄를 좀 해결해주세요, 하지도 않았고 묻지도 않고 따지기도 전에 이미 우리 죄 대신 피를 흘려버렸고 그 피가 성령에 담겨서 우리에게 죽을 수밖에 없는 내부에 와버렸으니까 우리의 죽음은 주와 합세한 죽음이 되고 그 합세한 죽음 속에서 예수의 피의 효과로서 거기서 도저히 따먹을 수 없는 생명나무 그 생명을 얻었으니 우리는 매사에 주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신천지 따라가서 합숙훈련 할 필요 없어요. 아무 필요 없어요. 십일조 같은 거 필요 없다니까요. 주일성수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선교, 전도 필요 없어요. 사는 게 전도인데, 선교인데 그게 뭐가 필요 있겠어요.

주님께서 이렇게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 뜻은 내가 이룬다. 니는 손 떼라. 했는데도 불구하고 기어이 지가 하겠다고 나서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미래의 실적에다가 자기 행함을 여기다가 집어넣는 방식으로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게 습관이 돼서 그래요. 미래의 어떤 결과에 대해서 내가 얼마쯤 기여했는가를 그 안에 자기 기여도가 조금이라도 있어줄 때 나는 미래까지 살 보람과 어떤 가치의 의미를 갖게 되게 되어있어요. 인간이. 마귀가 그렇게 인간을 엉망진창 만들어놨지요. 마귀가.

니를 포기하지 마라. 니한테 니가 제일 중요하다. 니 아니면 니 보다 니를 사랑하는 사람 없다. 이걸 계속해서 우리한테 세뇌 교육시켜 온 거예요. 거기다가 예수님 오셔가지고 아무것도 아니 된다. 내가 할게. 하니까 기분 좋기도 하지만, 듣는 오빠 기분 되게 나쁜 거예요. “나는 뭐고?” “니는 쓰레기지.” “오, 나보고 쓰레기래. 나는 이제 안 믿어.” “그러니까 니는 내게 오신 자 속에 포함이 안 된 거야.” 또 이러니까 걱정이 돼가지고 포함시켜주세요, 이리 또 하는 거예요.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했는데, 여기서 파생된 것이 있는데 가룟유다에요. 가룟유다가 상당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왜 중요한가 하면, 가룟유다가 탈락함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구원 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탈락당한자하고 자기들하고 차이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가룟유다가 탈락했잖아요. 우리도 탈락해야 돼요. 마땅히 탈락해야 됩니다. 왜? 같이 행동하기 때문에. 똑같은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차이가 없거든요. 차이가 없는데, 가룟유다가 탈락했다.

탈락했다는 말은 우리한테 무슨 소리입니까? 예를 들어서 입사시험을 치는데 점수를 알았어요. 요번에 100점 만점에 80점 이하 실패입니다. 하고 통보가 왔어요. 내 친구도 80점이고 나도 80점인데. 친구가 80점이라니까 죄송합니다. 다음 기회에... 하면서 회사에서 불합격해가지고 왔다, 말이죠. 그러면 우편배달부가 그 집에 갔다가 우리 집에 올 건데 전달할건데, 점수80점 다 아는 사실인데 불합격 당연한 거죠. “에이씨, 딴 데 내봐야지.” 하는데 합격했습니다! 하고 왔을 때 얼마나 놀랐겠어요. 점수가 똑같은데 왜 친구는 불합격이고 나는 합격입니까? 혹시 사무 착오 아닙니까? 전화해보지요.

“예, 인사부입니다.” “제가 수험번호26, 누구, 누구인데 주민번호입니다.” “합격입니다.” “아니, 점수는요?” “점수 80점인데요. 합격했습니다.” “그럼 내 친구는요?” “친구 분은 불합격입니다.” “그럼 나는 왜 합격시켜주고 친구는 왜 불합격시킵니까?” “예, 우리 회장님 마음대로입니다.” 오야 마음대로에요. 그럼 회장님이라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그러니까 회장님이지. 그러니까 주님이지요.

아까 했잖아요. 성경은 이 세상은 예수님을 뭐한다? 주님이 주되게 하시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사람을 탈락도 시키고 내가 원하는 사람을 뽑아내는 그런 인사권 정도 있어줘야 주가 주님이 되지요. 인사권도 없는 게 주님이 되겠어요? 바로 이런 이야기가 선악과 이미 따먹은 인간한테는 먹혀들지를 않는 거예요. 이게 먹혀들지를 않는 거예요.

인간은 눈 떠있고 선악을 아는데 분명히 하나님은 선하시다면 선은 많이 행한 쪽으로 합격이고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은 불합격이다. 이미 익히 아는 바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을 에서와 야곱이 선악을 행하지도 않은 것 관계없이 모든 것을 상관없이 불합격, 합격으로 내려버릴 경우에 도대체 우리 인간은 뭡니까? 하고 짜증내면 불합격이고, “감사합니다.” 하면 합격이고. 그런데 의외로 짜증내는 사람이 대부분이에요.

자, 40절 다시 한 번 봅시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되어있는데, 여기서 ‘마지막 날’이라 하는 의미가 중요해요.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린다. 마지막 날이 어디 있느냐 할 때, 정답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예수님에게 누구는 살리고, 누구는 죽일 권리가 있음이 드러났을 때, 마지막 날이에요. 마지막 때에요. 마지막 때.

그 때가 뭐냐, 주님이 주님으로서 자기의 모습을 드러낼 때, 그게 바로 십자가 죽고 부활했을 때, 또는 더 나아가서 부활, 승천 했을 때, 더 나아가서 재림했을 때, 전부 마지막 날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이 언제인가 하면,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날이 마지막 날이다. 이게 정답이에요. 주가 되신다는 말은 내가 구원할 자, 구원 안 할 자, 임의대로 마음대로 정할 자격이 있음이 드러났을 때. 그 자격자가 있다는 것은 누구만 압니까? 예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만 “주님한테 그 자격이 온전하게 다 있습니다.” 라고 고마워하면서 믿게 되지요.

그런 믿는 자한테는 이 세상에 두렵거나 무섭거나 쫓기거나 벌벌 떨 일은 전혀 생겨나지를 않습니다. 만약에 회사가 부도났다. 이것도 살리는 방식 중에 하나에요. 마지막 날, 주님이 살리기 위해서 부도까지 내면서 살려내 주기 위해서 부도를 내게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에 의해서 일어난 일을, 만약에 주님을 믿는 척이나 했다면 “나, 이제 주님 안 믿어.” 이렇게 삐져가지고 “빨리 빨리 나가. 안 올 건 빨리 빨리 나가. 괜히 니 안 올 것이 자꾸 천당 간다고 착각하면 내가 혼란스러워. 구조 조정한다. 나가! 나가!” 내보내기 위해서 환란과 핍박을 줘버려요. 빨리 나가라고. 가짜가 얼쩡거리지 말라고. 그리고 환란과 핍박 가운데서 도리어 감사하면서 오는 사람이 있어요. 그것은 그런 식으로 또 뽑아내는 방법이고.

그래서12제자가운데 11제자는 바로 하나님께서 마지막 살리는 쪽에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수난과 고난과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군소리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주의 일을 다 했지요. 그들이 한 주의 일은 사실은 없어요. 다 주님의 일이지, 그들이 한 일은 없습니다.

문장 보세요. ‘그들이 한 주의 일’ 했잖아요. 주님이 주의 일, 뒤에 있는 게 주체잖아요. 주체가 그들을 사용한 겁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 걸을 때, 누가 했어요? 그들 속에 주님이 했지 그들이 한 게 아니란 말이죠. 그래서 내가 하지 않고 주님이 했다고, 주님만 증거 하게 되지요. 왜, 마지막 날 살려낼 사람들이 그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은 이미 살림을 받았어요. 구원을 이미 영생을 받고 난 뒤에 배부른 상태에서 그들은 마음껏 고난의 길을 간 겁니다. 합격통지서 붙이고 난 뒤에 불합격 가는 길을 가는 거예요. 얼마나 신났겠어요. 왜? 불합격해도 합격이니까. 그래서 그들은 맨 날 실수하고 실패할 때마다 기분은 더욱 더 업 되지요. 왜, “아이고, 큰 일 날 뻔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돈을 사랑하게 되어있고 항상 뭐 조금만 일어나도 불평하게 되어있고 주님 사랑한다 하지만, 나 먼저 사랑하게 되어있지요. 그걸 소급해서 자꾸 “땠지.” 합격통지서 앞에서 그걸 자꾸 하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뭐하는가 하면, 남을 맨 날 속이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속이는 성도는 속이는 건 좋아요. 계속 속이세요. 하지만, 그걸 십자가 앞에서 속이세요. 그게 성도고. 남들은 남 앞에서 속이고. 그게 불신자 그렇죠.

끝으로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41절에 보면,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자, 이거 보세요.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했잖아요. 이것은 어디서 이야기했습니까? 떡이라 한 것이 35절에 나오지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 했지요. 지금 보세요. 35절 초반에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 하고 35절 후반 없고, 36절, 37절, 38절, 39절, 40절까지 몽땅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하늘의 떡이라고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이해가 되겠는데, 분명히 떡이라 해놓고 앞에 죽 설명을 했잖아요. 그런데 설명이 그들에게 먹혀들었어요? 안 먹혔어요? 이게 들으나 마나 하나도 안 먹혀들었어.

그 사람들에게 뭐가 필요하냐 하면, “니는 누구냐?” 가 필요한 거예요. 그들은 광야에서 모세가 우리에게 떡을 주듯이 당신도 우리에게 계속 떡 주면 당신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떡 안 주면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지금 관심사가 누구한테 있어요? 어떻게 영생의 떡을 얻어먹고 사느냐에 관심 있지, 예수 당신은 누구냐 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관심을 뭐로 봅니까? “떡 줄게.”가 아니라 “내가 누구냐?” 고 이야기해요. 내가 누구냐. 그들은 ‘나는 이러해야 된다.’ 자기 의미만 갖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맞받아쳐버렸습니다. 너희들은 너로부터 출발하는데 질문을 나는 내부터 출발할게. “나는 떡이다.” 하고 “나한테 뭐해줄래?” 하고 나가 두 개 되어버렸어요.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 들어도 뭐가 포기 안 되면 안 된다? 나를 포기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무슨 이야기를 해도 이게 들어갈 자리가 여지가 전혀 없어요. 튕겨버립니다.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42,43절입니다.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자, 부모가 요셉이지요. 그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들이 자기를 의미할 때, 우리 아버지는 누구십니다. 우리 아버지 존함은 박씨, 김씨 이렇게 하잖아요. 그들이 평소에 자기 세계, 자기 의미를 채우고 나는 아랫동네사는 김 첨지라 하옵니다. 할 때, 그 하는 방법을 그대로 누구한테 적용시킵니까? 이게 예수님에게 적용시키는 거예요. 그럴 줄 알고 예수님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내가 하늘에서 왔다는 거예요. 하늘은 그런 족보 따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하늘에서 왔다고 이야기를 안 듣고 그냥 그들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치고 거기다가 하늘을 붙이니까 “무슨 땅의 사람인데, 하늘에서 와?”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사람으로 왔다는 말은 그들로 하여금 믿음 없다는 것을 보여줘야 그들이 믿음 없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왜? 보고도 못 믿으니까.

보고도 못 믿는데 안 보고야 더욱 더 안 믿지요. 이래나 저래나 믿는 사람들 아니에요. 믿는 사람들 아니면서 계속 율법 지키고 여호와 지키고 메시아 기다리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날과 똑같아요. “예수님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은사 봤다는데. 키가 180Cm고 머리가 이만큼 되고 수염 기르고, 그러면 예수님 이발은 누가 해준데? 가룟유다가 해주는가? 도포 쓰고 하는데. 그렇게 꾸며서 본 것도 본거잖아요.

그런데 정작 구원은 뭐냐 하면, 내가 내 의미 갖는 이것이 저주 받을 짓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그 말씀의 능력이 주님의 촉입니다. 주님의 촉각이에요. 주께서 우리에게 성령이 찾아오게 되면 내가 내 의미로 갔다는 것은 내가 망할 인간이라는 사실을 화들짝 놀라게 하는 겁니다.

우리 애가 공부를 잘해서 1등을 했다. 화들짝 놀라는 거예요. 내 애가 어디 있어? 주께서 공부시켰는데. 화들짝 놀라는 거예요. ‘아, 주께서 공부케 하시는구나!’ ‘나는 도와라고 하는구나!’ 다시 주님을 경유해서 말씀을 경유해서 애를 다시 한 번 바라보는 것. 내 의미가 아니라 주님의 의미로서 남편이나 자식에게 다가가는 것. 이게 바로 성도지요. “내 자식 키워줘서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헌금내면 교회만 돈 받아 좋겠지만. 그게 아니에요. 내 의미를 순간, 순간 사건이 일어나서 내 의미를 찢어버리고 니는 이미 죽은 자야. 내가 살려주니까 살았다는 것을 매일같이 느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떡 이야기 들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떡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주님의 양식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