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2015겨울수련회 4강 본문
녹취:오용익
2015겨울수련회 4강
민수기 13장에 보면 정탐꾼을 보냅니다. 아 참, 지난 시간 말미에 했던 그 질문에 답변을 해야 되지요. 창세기 49장의 예언에서 유다지파하고 요셉지파가 막상 막하라고 했지요. 누가 장차 주도권을 쥘 것 같아요? 그 예언대로 한다면? 창세기의 그 상황에서는 알 수가 없지요. 한쪽에서는 이스라엘의 기초가 나온다고 하고 한쪽은 지도자가 나온다고 하니까 모차르트와 베토벤 중에서 누가 더 위대하냐는 식이지요. ‘요셉지파와 유다지파 중에서 누가 더 위대하냐?’라고 헷갈리게 하고 누군가를 더 기대하게 만들지요.
그렇게 기대하게 만드는 그 전략이, 너희들이 아직 존재에 묶여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제시해버린 겁니다. 아홉 지파를 요셉지파가 가져가고 남쪽 이스라엘은 베냐민 지파하고 유다지파만 달랑 가져갔을 때 이것은 민주주의원리에 의하면 어느 것이 진리에 가가까우냐 하면 다수의 의견이 진리에 가깝다고 보지요. 이스라엘이 둘로 쪼개져야 될 이유가 쪼개질 때 그 금이 생기잖아요. 그 금에서 다윗언약이 나와요. 부재자가 나와요. 갈라지는 것은 솔로몬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지키기 위해서 쏟아놓는 모든 정책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갈라지게 만듭니다. 우상숭배를 하게 만들어요.
뭔가 통합된 것, 통일된 것을 의도할 때 이미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는 겁니다. 금이라는 말이 적당한데 선, 해안선, 그 선을 긋는데 그 금이라는 것은 폭을 가지면 안 되잖아요. 그 금이 나중에 권력을 가지면 뭐가 되지요? 폭이 되지요. 폭이 되니까 주님께서 가만두지 않고 이 폭을 어떻게 합니까? 폭을 다시 분열시키기 위해서, 폭이라 하는 것은 ‘이래서 우리는 단단한 통일체가 되자.’ 하는 것을 추구하잖아요. 추구할 때 여기서 통일 자체가 무엇에 형식이다? 분열의 형식, 그래서 또 하나의 분열이 일어나죠. 그러면 금이 생기지요.
금이 생기면 “우리는 금이야.”라고 등장하면서 금끼리 모아지고 해서 하나의 교단이 되지요. 하나의 집단이 되겠지요? 꼭 지방교회처럼. “거듭난 사람 다 모여.” 해놓고 자기들만의 집단을 만드는 것처럼. 그러면 그걸 또 분열시켜 버리지요. 금에서 하나의 통일체가 된다면 여기서 또 분열이 일어나고, 그런 식으로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할 때 모세와 아론이 갖고 있던 주도권이 점차 레위지파가 아닌, 참고로 모세와 아론은 레위지파입니다, 레위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로 이동하면서 반드시 이러한 실패의 상황이 벌어질 때 주도권이 넘어가는데 요셉지파의 정탐꾼이 누구냐 하면 여호수아에요.
에브라임지파니까 여호수아가 등장하고 유다지파의 정탐꾼이 누구냐 하면 갈렙이에요. 그러면 월드컵 결승전에 누가 올라간 거예요? 다른 열 지파는 다 탈락해버리고 제대로 된 믿음의 여호수아와 갈렙만 달랑 남아요. 그 때부터 땅을 차지하는데 요셉지파는 넓은 땅을 차지하고 유다지파는 중요한 땅을 차지해요. 넓은 땅이 좋습니까, 중요한 땅이 좋습니까? 중요한 땅이라고요? 여기는 모차르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에요. 베토벤이 아니고.
유일한 것, 오늘 ‘유일자’가 오셨어야 하는데, 하여튼 유일한 것이 승리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겁니다. 그런데 유일하다고 하게 되면 자체적으로 뭐가 돼요? 이게 하나의 폭을 가지고 면적을 가지지요. 그렇게 되면 이것이 금으로 바뀌기 위해서 유일한 것 속에서 “유일하기에 우리는 통일돼야 돼.”라는 그 이데올로기, 사상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진짜 유일자가, 그 금이 새롭게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 역사가 그렇게 진척되는 거예요. 그걸 전부 다 추적해 내야 됩니다.
그렇게 추적하는 그 용어를 사도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남은 자’라고 했습니다. 남은자의 기능은 행함으로 남겠다는 것을 부정하는 기능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남은 자 앞에 뭐가 붙는가? 그냥 남은 자가 아니고 ‘은혜로 남은 자’지요.(롬 11:5) 은혜로 남은 자가 등장함으로써 졸지에 그 주변의 은혜로 남은 자에 가담되지 않는 자는 무슨 자로 규정됩니까?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모습들이 다시 균열을 일으키면서 남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민수기에게 따질 것은 “이런 남은 자가 될 때의 기준, 어떤 기준이 동원됩니까?”하는 이것이 중요하거든요. “어떤 기준이 일관된 기준입니까?” 제가 대략적인 이야기를 했지요. 뭐냐 하면, “종과 정실부인사이에서 저주받는 자도 금에 의해서, 부재자의 활동에 의해서 영생을 얻게 합니다.” 아까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서 본인들은 폭이 없이 그냥 선으로 존재하는 겁니다. “없는 자가 있는 자를 살리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결과를 낳고 결국 이것은 하나의 희생이 없이는 성취될 수 없는 일입니다.”라는 그 내용을 폭과 금, 금과 폭의 기능을 해야 될 사람들이 보여줘야 되지요.
그렇게 되면 땅을 차지하든 뭘 하더라도 항상 우리는 어디에 매여 있습니까? 항상 부재자가 보여주는 그 기능에 종속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이스라엘답게 하는 기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할 때 여러분이 방금 뭘 놓친 게 되느냐 하면, 이걸 놓친 게 돼요. 반대하는 자, “반대하는 자는 어떻게 됩니까?”를 우리가 놓치면 안돼요. “반대하는 자, 반대하는 자는 무슨 기준에 의해서, 무슨 생각에 이해서 그걸 반대합니까?”라는 생각을 우리가 해 봐야 되지요.
반대할 때 나오는 제일 큰 사상이 민주주의겠지요. 민주주의. 이것이 민수기 16장인가에 나오는데요, 민수기 16장에 보면 레위지파 중에 고라자손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대듭니다. 그들의 주장은 이거예요. “홍해를 건너올 때 여호와 하나님 덕분으로 다 같이 건너왔다. 그래서 평등하다. 누가 누구 앞에 대장질을 할 수 있는 자격이 못된다. 그런데 네가 뭔데 왜 모든 일을 결정하느냐?”라고 했어요. 굉장히 존재의 세계에서는 정당하게 보이잖아요. 그런데 이 정당화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반 복음적이고 제일 지옥 갈 사고방식이 되는 겁니다.
아까 그 빵집 이야기를 다시 해 봅시다. 빵을 먹고 난 뒤에 돈을 지불하지요. “당신은 우리보고 먹으라고 빵을 만들었잖아요.” “아니요. 나는 돈 벌기 위해서 빵 만들었어요.” 그렇게 되거든요. 그러면 사람값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요? 돈을 지불하면 그 인간사회에서 사람값을 하지요. 그러면 방금 그 논리에 의하면 이렇게 됩니다. 돈 없으면 무슨 값을 못한다? 사람값을 못하는 거예요. 평등입니까? 돈의 이데올로기에요. 평등이에요? 우리가 추구하는 평등이 어디서 나왔는가? 이 자본주의 사회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뜻이 뭐냐 하면, 자본이 최고의 가치를 공급하는 것이 돈이 되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에요. 돈 앞에서는 어떤 인간도 우열이 없다는 겁니다. 조건이 있지요. ‘돈 앞에서는.’ 그러면 그 전에는 무슨 사회였습니까? 그 전에는 뭐냐 하면, ‘왕이나 귀족 없는 사회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계급사회’ ‘봉건사회’ ‘장원제도’라고 하는데 신이 내린 질서는 ‘나는 왕이 되어야 하고 너는 천민 되어야 한다.’는 것이 신이 내린 질서이기 때문에 이 질서에 어긋나는 것은 신의 질서에 도전하는 것이 된다는 그것으로 사회가 안정을 찾았던 거예요. 그것을 불평등으로 본 겁니다.
우리가 조선시대, 고려시대, 신라시대로 가봅시다. 신라시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지금 당신은 계급이 있지요?” “예, 귀족과 평민이 있습니다.” “불평등합니까?” “아니요. 너무나 평등하지요.” 너무나 평등한 거예요. 왜? 주어진 자리에 합치하는 것, 그러니까 그들이 말하는 불평등이 뭐냐 하면, 천민이 양반노릇 하는 것이 불평등 한 거예요. 감히 서자 출신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형을 형이라 부른 이것이 불평등 한 거예요. 딱 맞춤, 자리에 맞춰야 평등한 겁니다. 옷의 기장을 다 재놓고 큰 옷을 입으면 불평등하잖아요.
자신에게 맞는 옷은 따로 있어요. 팔자에 맞는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이것이 평등입니다. 그 당시의 사고방식은 그것이 평등이었어요. 세상이 어찌되려고 그렇게 돈 앞에 평등이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태어난 대로 살아가는 이것이 평등이었습니다. 따라서 평등이나 윤리나 도덕이라 하는 것은 시대에 따라서 변천 과정을 겪어요. 윤리 도덕도 마찬가지고. 예를 들겠습니다. 지금 배가 가는데 풍랑이 일어서 배가 다 깨졌습니다. 배가 깨졌는데 이것만 타면 든든하게 살 수 있는 그런 뱃조각이 하나 있어요.
그런데 지금 살아남은 사람은 두 사람이고 탈 수 있는 자리는 한 사람 몫밖에 없을 때 여기서 윤리적인 문제가 생기는데 한 사람밖에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싸울 수밖에 없지요. 그 싸움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당신은 그 때 양보 안하고 왜 그렇게 했어?”라고 윤리적 문제를 규정할 수 있습니까? 할 수가 없지요. 어제 한 질문을 다시 하겠습니다. 히틀러 부하가 되어서 유대인 5백만을 죽였잖아요. 그 때 그 죽인 사람을 재판하면서 “당신은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까?” 할 때 “나는 할 도리를 다 했습니다.” “당신은 남에게 준 피해를 생각하지 않습니까?” 할 때 정답이 뭐라 했습니까?
존재는 존재를 질책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존재 속에 뭐가 있는가 하면, 자기만의 독자적인 현실이 있기 때문에. 네가 나를 재판하는 것은 완전하고 초월적인 입장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속한 그 현실에서나 통하는 평등이나 자유라는 고상한 이념에 입각해서 지금 나를 범죄자로 몰아세우는 거거든요. 그러나 나는 윗사람이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그 현실에 입각해서 나는 할 도리를 다 했다는 거예요. 이것은 내가 죄인 되는 것이 아니고 단지 현실을 보는 차이일 뿐 나는 네가 그렇게 보는 범죄자는 아니라고 할 때 그것을 조정할 수 있는 제 삼의 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제 삼의 눈은 없어요. 문제는 그 존재 안에서 새롭게 현실의 폭을 가진다는 그게 문제거든요. 심판을 누구한테 했습니까? 이 땅에서 존재의 폭을 가지지 않고 주님의 기준으로 일방적인 선언을 하는 겁니다. 일방적인 선언이에요. 오늘 이 강의는 선택에 대해서 하겠는데요? 일방적인 선언입니다. 일방적인 선언을 할 때 그게 평등입니다. “너는 천국 가! 너는 지옥 가!” 이게 평등이에요. 이게 평등입니다. 왜냐? 둘 다의 존재가 서로를 질타할 수 없는 부실한 죄악된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민수기의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입을 막아버리고 누굴 질책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앞에 평등이 됨으로 말미암아 평등은 평등인데 돈 없으면 평등이 안 되는 거지요. 더 놀라운 사실은 인간 값을 한다는 것은 남의 노동에 대해서 값을 치러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천국은 뭡니까? 내가 노동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분이 노동했는데 그 값을 치러주는 거예요. 다시 돌아와서 아까 그 배 이야기 다시 해 봅시다. 배는 한 사람 밖에 탈 수가 없는데 두 사람이 그걸 두고 싸웠어요. 자,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여러분은 지금 머리가 좋아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목사님, 저 같으면 양보합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뭘 놓쳤느냐 하면, 둘 다 양보하는 싸움을 한다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완전히 농심이에요, 농심. 아우먼저 형님먼저. 둘이 멱살 쥐고 싸울 판이에요. “내가 양보한다잖아.” “아니 왜 형님이 양보를 해요? 제가 양보해야지요.” “네가 양보하려는 의도가 뭐냐?” “내가 살아 돌아가면 얼마나 욕을 하겠습니까?” 결국 네가 양보하는 이유는 자기 존재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그러면 내 현실의 의를 채우기 위해서, 내 현실을 위해서 나는 기꺼이 목숨까지 내 놓겠다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의 가치는 유지하겠다는, 나만의 현실은 절대로 손상을 입지 않게 하겠다는 그러한 논리거든요. 그러면 이 세상 윤리라는 것이 보는 눈에 따라서 백이면 백 다 달라요. 그렇잖아요. 그래서 옛날에는 임금이 재판을 했거든요. 임금이! 임금이 재판할 때 재판의 기준은 하나에요. “너는 왜 네 자리를 이탈했느냐?” 다시 말해서 “상놈이 왜 양반행세를 했느냐? 매를 맞아라.” 이것이에요.
지금은 뭡니까? 무전유죄, 유전무죄, 그 세상이라니까요. 인질범에게 “뭐? 돈이 있으면 죄가 없고 돈이 없으면 죄가 있다고? 그러면 너는 돈이 싫은가?” “아니요.” “니들도 마찬가지네.” 돈이 없어서 그런 소리 하지 돈이 있어버리면 그런 소리 안 하지요. 뭐 갑 질을 한다고요? 제가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사무장이 조현아에게 욕을 얻어먹고 비행기를 회항 당했다고요? 저는 이야기합니다. 사무장보고 “네가 항공사를 차려라. 네가 차리면 너도 갑 질 할 사람이다.” 지시를 누가 합니까? 상사에 대해서 왜 순종하느냐 하면,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순종하는 겁니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점이 거기에 있어요. 남성은 여성을 지배한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여성이 남성에게 복종은 해요. 그러나 모르는 것이 있어요. 극복을 시킬 수는 없어요. 시키는 대로는 하는데 다를 가질 수는 없어요. 그런데 못 다가진 것이 나중에 역전이 된다니까요? 소유가 ‘금’하고 싸울 때, 경계선하고 싸울 때 늘 패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자기가 ‘금’속에 들어가려면 자기도 축소되어야 돼요. 소유에서 압축이 되어가지고 들어와야 되는데 너무 압축이 되어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소유 자체가 날라 가버려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금(경계선) 속에 들어갔나니 이제는 나는 죽고 누가 있다? 경계선 안에서 그리스도라는 폭만 갖게 된다.’ 이렇게 고백하거든요. 그러면 그 말씀을 듣고 우리가 그걸 실천하려고 하면 조건이 뭡니까? 십자가 사건 앞에 우리가 응축이 되어야 하는데 스스로 응축이 되면 이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게 나중에 블랙홀 되어버려요. 그래서 폭발해 버려요. 별의 진화과정에서 응축이 되면 나중에 폭발한다고요. 막 누르면 누를수록 점점 더 나중에는 반발심이 세서 저항과 비저항의 물리적 법칙에 의해서 나중에 “그만 해라. 마이 묵었따!” 하고 튕겨져 버린다니까요.
바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게 그거예요. “이 정도까지, 목숨까지 바치면 되겠습니까?” 이렇게 나왔던 사람이 결국은 뭐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잖아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서 인간이 생각하는 그 실패, 인간에게 실패라는 것은 성사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자기 존재를 부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패가 아니지요. 단지 시련은 있을 뿐이지 인간에게는 뭐가 없습니까? 실패가 없습니다. 정 회장이 했던 유명한 이야기가 있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잠시 후퇴는 있어도 일부 후퇴가 이보 전진이 되게 하는 거예요. 양보는 하지만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아요. 인간은.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은 인간에게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인간은 알아먹지를 못하고 계속 저항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리와 창기 속에 천국을 만들어버리지요.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38년 된 병자, 그리고 소경된 자, 세리와 창기, 강도, 이것은 막장 인생이에요. 끝났어, 더 이상 저항할 용수철이 들어 있지 않아요. 그런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이것은 아주 대단한 사람들이에요. 권력을 쥐고 있어요. 폭이 넓은 사람들이에요. 자기가 가동할 수 있는 권력의 유도리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말 한마디면 쫒아낼 수 있는, 갑 질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천국은 어디 있느냐? 천국은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응축과 멀어져요. 소멸과 멀어져서 천국과 점점 더 멀어져 가요. 점점 멀어진다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선택을 해버립니다. 선택을 해서 구원하는 겁니다. 선택을 할 때 방법이 있습니다. 선택을 할 때 누굴 선택하느냐 하면, 가룟유다를 선택해 버려요. 이 대목이 어려운데요. 가룟유다를 선택해 버립니다. 옛날 6, 70년대쯤인가 저도 본 적이 있는데 얼마나 재미있던지. 지금도 꿈속에 막 나타나요. <나바론요새>라고 독일군대포가 나오는 영화인데 그 독일군 영화의 특징이 뭐냐? 첩자가 있어요.
내부첩자로 인하여 주변 인물들의 운명이 결정이 되어버립니다. 조직 자체가 와해돼요. 그것을 가지고 카드게임이라 하는 겁니다. 카드를 가지고 피라미드를 쌓게 되면 우리 계산에 의하면 한 사람당 힘을 십분의 일씩 가져간다고 생각하지요. 카드 게임의 특징이 뭐냐 하면, 십분의 일이 아니에요. 카드 한 개만 빼보세요. 10분의 9가 10분의 1보다 못한 역전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런 것 처음 알았지요? 9가 1보다 약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지요. 와르르 다 무너지는 거예요. 그런 요소. 그게 첩자 요소에요.
하나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가룟유다를 선택해버립니다. 어떻게? 무너뜨려 달라고. 이 제자들, 열 한 제자들이 상상하고 있는 멋있는 메시아 나라, “예수님! 하늘나라 갔을 때 우리 중에 누가 높은 사람 되겠습니까?” 라고 세상에서 살던 그 습관과 사고방식을 그대로 천국까지 이어나가려고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다 하고 있는 제자, 심지어 치맛바람까지 불어가지고 제자의 엄마가 와가지고 “얘는요, 예수님 우편에 앉게 해주시고 얘는 좌편에 앉게 하옵소서.” 또 “목사님이 식당에 올 때 이 사람은 우편에 앉게 해주시고 저 사람은 좌편에 앉도록 해주세요.” 이런 것. 자리에 앉는 것은 우연이었지요. 맞지요? 그 때 우연이었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물론 우연을 가장한 필연도 있을 수 있습니다만 우연이었어요. 첩자를 심어놓고 그 나머지 열한 제자가 ‘나는 주님 앞에 선택받았어.’라는 그것이 쓸데없이 다 무산되는 작전을 주께서 벌이시는 겁니다. 네가 생각한 선택론, 그것이 다 무의미하다는 말이지요. 이스라엘 교리의 특징이 뭐냐? 선택론이에요. “우리는 택한 백성이다.” 성경 한 두 곳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 보면 “너희는 택한 백성이다.” 그래서 그들은 앵무새처럼 따라 합니다. “우리는 택한 백성이다. 다른 민족은 다 조져도 우리 민족은 살린다.”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백부장을 불러다가 “얘가 천국가고 본 자손은 다 천국에서 쫓겨날 것이다.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웃기고 있네. 얘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야.” 혈통적 아브라함 자손은 다 날라 가는 거예요.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백부장 이야기를 집어넣고. 그러면 백부장 좋겠네? 질문을 던지면 여러분이 이해를 했는지 못했는지 알 수가 있어요. 백부장은 좋겠네요? “얼레리꼴레리, 너희들은 지옥가고 나는 천국 간다.” 백부장이 이렇게 나왔겠습니까, 아니면 백부장이 뭘 주목했겠습니까?
저 아브라함 자손과 나를 가르는 그 ‘금’에 주목하게 되면 그 사람은 천국 가는 사람이고 ‘나’라는 소유가 천국 간다고 우기면 그 사람은 땡, 탈락이에요. 또 하나의 금이 폭을 가지면 안돼요. 주님 때문에, 이 부재자의 존재, “없는데서 나온 존재가 저를 구원했습니다.” 이렇게 돼야 되지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백부장이 이렇게 나왔어요. “제 신하의 병 좀 낫게 해 주세요. 왜? 제가 구원받은 사람이 맞잖아요.” 이러면 땡, 탈락이에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이게 뭐냐 하면, 말씀이 새로 생산시키는 현실이에요. 그 말씀에다 뭘 집어넣는가? ‘금’, 경계선, 경계선이 새로 생산해 내는 현실을 위해서 백부장은 독자적인 자기소유의 현실은 그 현실에 앞서 을이 되고 이 말씀의 세계가 갑 질을 하도록 날마다 자기를 맡기는 겁니다.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눅 7:8) 군대용어로 “까라면 까겠습니다.” 제가 어제 이야기했잖아요. 고민하는 것도 허락을 맡아야 되고 화내는 것도 검사를 맡아야 된다고. 우리의 화나 고민 같은 것은 우리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현실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나름대로의 어떤 의로움과 윤리를 주장하게 되어 있어요. 독자적인 현실이 있으면 그 현실 속에서 이데올로기가 나오고 이념들이 나와요.
‘이것이 평등일거야. 이것이 선하고 이것이 축복일거야. 이것은 기적 받은 것이 맞아. 방언을 하니까 내가 성도인 것이 맞아. 내가 안수해서 병 나았으니까 나한테 믿음이 있는 것이 맞아.’ 나름대로의 자기 폭을 가지면서 그런 것 가지고 스스로 자기를 최면 시키는 겁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신자가 맞다.’ 지금 뭘 쳐다보는 거예요? 믿음의 대상이 뭡니까? 본이라니까요, 본인. 본인의 신앙의 연조, 연륜, 그것이 신앙의 내용으로 점점 차고 들어오니까 그것은 자기 세계지 그것은 천국이 아니에요. 주님의 세계가 아니에요. 그것은 아침 열시에 와서 일했던 사람입니다. 나중에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뭘 내세웠어요? 자본주의에서 배운 습관을 내세울 겁니다. “주님이여, 주님에게 노동한 것에 대해서 대가를 지불해 달라.” 하는 거예요. 내가 노동한 것에 대해서.
노동한 것에 대해서 돈을 지불해 달라고 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나온 더러운 버릇이거든요. 그런데 교회에서 밥 먹고 살기 위해서는 소비자가 왕이니까 소비자인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해줄 수밖에 없어요. 뭐냐 하면, “여러분들이 교회 봉사 하시면 상급에 차등이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고 농땡이를 부리면 나중에 여러분은 부끄러운 구원을 받습니다.” 여러분, 부끄러운 구원 외에는 다른 구원은 없어요. 천국 가면 주님 앞에서 전부 다 부끄러워요. (고개 푹 숙이고) “주여, 미안합니다.” 전부 다 부끄럽고 죄송해서 면류관도 반납해요. “나의 의로움이 아니고 값없이 구원 받았습니다.”
아마 상급을 줘도 그 상급도 되돌려줄걸요? “이 마일리지는 제가 받아서는 안 됩니다. 짜장면 먹고 모아놓은 이 마일리지, 탕수육 안 먹고 왔는데 이거 어떻게…….” 선택론에 대해서 저에게 가장 많이 나오는 질문이 뭐냐? “목사님, 저는 선택 받았어요?”라고 하는 거예요. 한 번 적어보겠어요. 이 질문이 얼마나 잘못된 질문인지 보겠습니다. “목사님…….” (가위표 치면서) 이건 지워버립시다. 이건 지워버리고, “제가 선택되었습니까?”라고 했어요. 선택에서 ‘나’라는 소유가 선택과 만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선택이라 하는 것은 일방성을 가지고요, 그 일방성의 주체자가 따로 있거든요. 주체자는 따로 있고 선택이라는 것은 기능으로 작용하라고 주님께서 선택한 겁니다. 따라서 선택할 때는 아까 말한 무늬, 처음에 이야기한 경복궁이나 창덕궁……, 한 번 가봐야 돼요. 말 나온 김에 서울 한번 가볼까? 그 빗살무늬가 마루에 비취듯이 그 무늬가 오게 되면 그 기능을 하게 되어 있어요. 가룟유다가 선택되었거든요. 그 기능이 뭐냐 하면, 가룟유다의 운명은 빼도 박도 못하고 그 고유기능을 해야 돼요.
어떤 기능을 해야 되느냐 하면, 첩자 노릇을 해야 됩니다. 왜 첩자노릇을 해야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 자체 내에 멸망하는 이유를 가룟유다를 통해서 설명해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를 팔아먹은 것은 가룟유다만 나쁘고 나머지 열 한 제자는 나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 열한 제자 속에 있는 모든 죄성을 전부 다 가룟유다에게 밀어서 가룟유다가 대표자로서 표출해 내는 거예요. 레위지파가 선으로 멈춰야 되는데 따로 폭을 가졌다는 말은 레위지파의 그 행동이 그 당시 모세를 따르던 모든 대중들의, 40만 이스라엘 전체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있는 겁니다.
“목사님은 무슨 근거에 의해서 그렇게 이야기합니까?” 근거를 댈게요. 근거를 대겠습니다. 민수기 16장에 보게 되면, 16장 41절, 이건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이튿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가로되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 예, 됐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이튿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가로되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고 되어 있지요. 민주주의의 사고방식입니다. 죽인 이유가 뭐냐 하면, 땅이 갈라져서 죽었잖아요.
땅이 갈라진 이유가 뭐냐? “너만 대장질을 하느냐?” 우리도 같은 레위지파고 십일조를 받는 입장이기 때문에 민주주의 사고방식에서 평등이거든요. 우리는 동등한 자격으로 홍해를 건너왔기 때문에 네가 한 5년쯤 하고, 단임제지요,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이 5년을 하든지 안 그러면 4년 재임하든지 그것은 새누리당에서 결정할 문제니까 우리가 관여하지 말고 비례대표제로 하든지 어쨌든지 혼자서 다 하지 말로 바꿔가면서 하자는 겁니다. 북 치고 장구치고 왜 너 혼자 다 해먹느냐 하는 거지요.
뭐가 누락되었느냐 하면, 중보자 의식이 누락되었지요. 그들의 생각은 이거예요. 우리가 일단 홍해는 건너왔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이미 구원받았다는 겁니다. 모세는 그것이 아니고 구원받았다고 되어버리면 이것이 통일이 되어버려요. 통일되면 안돼요. 반복해서 금이 갈라져야 되는데 한 번 되었으니까, 꿈에 그리던 구원이 되었으니까 구원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을 안 쓰겠다는 거예요. 아니 언제는 신경 써서 구원받았습니까? 참 내,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언제는 구원받고 싶어서 구원받았습니까?
그들을 구원시킬 때 얼마나 그들이 반대했습니까? 아까 구원의 훼방자가 누구라고 했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첩자에요. 우리 안에 있는 첩자. 엄마가 아침에 애들 깨우는 것도 참 힘들지요. 요새는 사춘기를 지나 20대가 되어도 깨우기가 힘들다는데. 그것보다 힘든 것이 뭐냐 하면, 속옷 갈아입으라고 할 때입니다. “엄마, 괜찮아.” 해도 자고 있는 애 강제로 팬티 벗기고 하잖아요. 극렬한 저항이 있지요. “아……악!” 그런 것 비디오로 찍어놔야 되는데. “싫어! 싫어! 싫다고!” 막 양말 벗기고 할 때, 강제로 그렇게 하잖아요.
왜 잘 돌아가고 있는 이 속옷을 왜 벗기느냐? 엄마의 안목은 뭐냐? 더럽다는 거예요. 하루만 지나면 더럽다는 거예요. 그런데 본인이 맡아도 냄새가 안나요. 본인한테는 그것이 평등이라. 이것이 정의로운 거예요. 고라자손이 모세한테 대들어서 하나님이 어떻게 했느냐 하면, 향로를 들고 있다가 향로의 불꽃이 나오고 그들은 땅이 갈라져서 다 죽었습니다. 그럴 때 누가 반대하느냐? 아까 민수기 16장 41절을 봤는데 누가 반대합니까? 백성들이 반대하는 겁니다. “당신이 우리 백성을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어째서 죽든지 상관없이 무조건 죽였다 하는 그 자체에 대해서 우리의 희망의 여지를 꺾어놓았기에 책임지라,”고 는 겁니다. 당신의 임무는 우리를 살리는 것이지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고 본 거예요.
그런데 모세와 아론은 뭐냐 하면, 살 자만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죽일 사람은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거예요. 사람이 자기가 살아 있을 때는 죽일 자는 죽인다는 말에 대해서 찬동하지만 막상 죽일 자 그룹에 자기가 아는 친척이나 올케나 시동생 시누이 자기 딸이나 아들이 있으면요, 갑자기 반대편에 서버려요.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내 자식을 왜 죽이느냐?”는 말이지요. 네가 뭔데? 우리 인간적 입장에서 ‘네가 뭔데’를 더 확장시켜 봅시다. “하나님, 네가 뭔데? 내 인생을 이렇게 꼬이게 만들어? 하나님 네가 뭔데?”
그럴 때 하나님의 대처방법은 간단합니다. “사랑하는 아들 바쳐라.” 이렇게 귀엽게 나오셔요. “사랑하는 아들 바쳐라.”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아들 바치는 대신 저는 예수를 믿겠습니다.” 이런 타협조로 나오지요. “아들 안 바치는 것은 예수 믿는 것도 거짓이고 엉터리다.” 이렇게 나올 때는 ‘아, 예수 믿기라는 것은 내가 행할 수 있는 것 중의 또 다른 하나가 아니고 나의 전부구나. 나의 전부를 요구하는구나. 그리고 내가 아들을 사랑해서 주님보다 내 아들을 더 사랑하는 것은 아들이 나의 죄 성을 폭로시키는 첩자로 주께서 심어줬다.’ 하는 겁니다.
내가 몰입하고 내 기쁨의 원천, ‘내가 저거 없으면 나는 살 의미가 없다는 것, 나는 저거 없으면 죽을 거야.’ 하는 그 무엇을 누가 심어줬다고요? 주께서 심어준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죄를 생산하시는 분입니다. 어떻게? 율법을 통해서.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 속을 죄의 공장으로 가동시키기 위함입니다. 죄의 공장을 가동시킵니다. 죄가 있는 곳에 뭐가 넘친다고 했습니까? 은혜를 넘치게 하는 겁니다.(롬 5:20)
제가 한 때, 물론 지금도 무식하지만 정말 무식할 때가 있었어요. 다방에 가니까 커피가 있고 그 옆에 액체로 된 크림이 있어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커피 맛이 쓰니까 커피는 그냥 놔두고 크림을 가지고 물을 타서 마시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크림이라는 것은 커피가 먼저 전제되고 난 뒤에 타 마시라고 준 것이지 그게 주가 되지는 않잖아요. 우리의 구원은 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속에 죄를 심어놓은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것이 주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걸 증거 하라고 덩달아 구원된 것이 우리의 구원이에요.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 소리 하라고 우리를 구원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누가 적당하냐? 세리와 강도와 창기가 적합한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이 “나는 십일조 하고 금식하고 구제했습니다.” 주께서 즉결 심판하는데 땡, 탈락이었어요. 전혀 구원과 멀어도 너무 먼 거예요. 자기 속에 뭐가 없어요? 죄가 없어요. 죄가 없는 곳에는 은혜가 없고 은혜가 없으면 천국을 만들 수가 없어요. 죄가 있어야 천국을 만드는데.
그래서 로마서 7장에서 율법이 주어진 것은 뭐를 생산하기 위함이라? 죄를 생산하기 위함이라. 여기서 뭐가 날아가 버립니까? 율법, 죄에서 뭐가 지금 빠져있습니까? 크게 쓸게요. 뭐가 빠져 있어요? ‘나’가 빠져있어요. 하나님은 우리하고 상대를 안 합니다. 우리의 착함, 우리의 재롱잔치를 절대로 보지를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을 율법과 죄의 생산이라는 여기 이 기계장치에다 걸어버려요. 그러면 이 축축한 오징어도 끝에 가면 무늬만 오징어지 완전히 바짝 눌려진 오징어포가 되어 있지요. (나란히 오징어포가 되어서 줄줄이) 이렇게 되어서 나오지요. 얼굴도 있고 팔도 있는 것 같은데 눌러 붙어서 이렇게 나오지요. 오징어포 생산이에요. 죄인이 생산되는 겁니다.
박수쳐야 돼요. 내가 교회 다녀서 잘 되려고 술 담배 끊고 인간답게 살고 인간 값을 하려고……, 인간 값을 하는 방법이 뭐라고 했습니까? 돈이 있어야 한다고 했지요. 교회 와서 기도하게 되면 주께서 뭘 주신다? 복을 주신다. 현찰을 주신다. 이런 것을 생각하고 교회 나왔다 이 말이지요. 왜? 돈이 있어야 인간 값을 하고 인간대우를 받으니까. 그런데 교회 가서 진짜 복음을 알고 보니까 뭡니까? 내가 죄인의 쥐포로서 나올 때 그 때……, 죄인포지요, 죄인포, 죄인포로 나올 때 비로소 우리는 내 의도가 주님의 의도의 재료가 된다는 사실에 놀라버린 거예요.
그러면 나는 주님의 현실에 무늬로서 창덕궁 그림자 속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그게 구원이에요. 그게 구원이라니까. 주님의 현실에 잠입된 거예요. 그 작업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첩자를 보냈고 그 첩자를 겨냥해서, 그게 마귀죠, 마귀를 심어놓고 마귀를 적출……, 이게 어려운 단어인데 뽑아내는 것, 화학공정에 나오는 용어인데 적출 또는 추출하는 거예요, 뽑아내는 과정에서 율법과 죄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도의 경우에 무슨 착한 일을 한다, 기도를 한다, 금식을 한다 할 때 우리를 어느 기계에 걸어버립니까? “주여, 금식을 하라고 해서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내가 지시하는 것이 그거였어? 아닌데?” 율법에 두 가지가 있어요.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정신 차려서 들으세요. 뭐냐 하면, “……하면 선하다.” 하는 것이 있고, “……하면 죄가 된다.”가 있지요. 둘 다 못 지켜요. 우리가 둘 다 못 지킵니다. 선을 못 지키기에 죄가 되고 제대로 죄에 대해서 죄지을 줄 몰라서 죄가 돼요.
이게 정말 어려운 거예요. 간음죄를 알려면 간음해서는 간음죄를 몰라요. 십자가를 알 때 평소에 밥 먹는 것도 간음죄와 엮여져 있다는 것을 파악해야 됩니다. 모든 것이 다 엮여져 있어요. 죄들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죄와 율법 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죄와 율법을 통해서 여기서 금이 가요. 금이 가게 되면 이 안에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 사랑이 와요. 용서가 온다고요. 그러면 정리해 봅시다. 죄란 뭐다? 사랑을 모르는 모든 것이 뭐가 됩니까? 죄가 되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 하면 여러분 머리가 팍팍 돌아간다고요. “그러면 목사님, 사랑을 알면 죄가 아니겠네요?” 이러거든요.
사랑은 죄를 가르고 돌출 될 때만 나오지 사랑을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욕망의 대상이에요. “나는 주님의 사랑을 갖고 싶어요.” 이것은 자기 욕망의 화신이 된 것이지 그런다고 사랑 주는 게 아닙니다. 사랑은……, 몰라, 몰라, 그냥 죄 지으세요. 죄 지으면, ‘아, 이게 죄구나.’ 느껴지면 그게 사랑이라니까요? 얼마나 사랑을 알았으면, “주여, 주님 앞에 죄인인 것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오겠어요? 사랑은 없어요. 없는데 죄를 깨닫는 순간 동반해서 사랑이 나오는 겁니다.
“이게 죄야.”라고 지적해 주는, 그걸 아무나 지적해주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기 때문에 지적해 주는 거예요. 귤 잡숫지요. 그거 죄거든요. 귤 가지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가보세요. 이게 왜 죄인지. ‘내가 여기서 박테리아를 묻혔나?’ 박테리아 전염병을 옮기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은 기존의 인간들의 민주주의제도 하에서 나온 이데올로기, 하나의 사상이거든요. 남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남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 이것만 하고 좀 쉬겠습니다.
하도 고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내가 지금 복잡한데요. “남한테 피해를 주면 안 됩니다.” “왜 안 됩니까?” “전염병이 일면 안 됩니다.” “전염병이 일면 왜 안 됩니까?” “그러면 그 사람이 죽습니다.” 그 다음이 문제에요. “왜 죽으면 안 되는데요?” 이 문제, 이 죽음문제 만큼은 인간들이 말하는 전체, 전체 내에서는 예외에 해당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 예외, 전체 바깥에 있는 요소를 인간의 의사를 묻지 않고 그 전체 중심에다 심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예수님을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인간의 죽음까지 포함해서 발언을 하는데 인간의 언어체계에서는 어쨌든지 저쨌든지 살고보자는 것이 진리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말을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십자가 지면 행복합니까?”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죽은 마당에 행복이 왜 있어요, 죽은 마당에. 차라리 이사야처럼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사 6:5) 이렇게 말해야 돼요. 이번 강의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물, 나를 앞에 두지 말고 어디에 두라? 나는 제일 마지막에 등장해요. 진짜 나,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 낸 작품의 나는 살아가면서 그게 마지막에 등장해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 15:10)라고. 내가 생각하는 나만의 세계는 사실은 자본주의 세계에서, 저쪽에서 요구하는 세계에요.
알튀세르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주체라 하는 것은 이 조직사회가 호명해 줄 때 비로소 내가 누구라는 것이 규정이 된다는 겁니다. 미생이라는 드라마에 장그래라는 사람이 있잖아요. 장그래 라는 사람이 바둑을 두지요. 바둑을 모르는 사람은 바둑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를 잘 모르는데 제가 바둑의 세계에 대해서 조금은 압니다. 바둑 둘 때 1초 만에 두기 때문에 조금은 알아요. 바둑세계의 특징이 뭐냐 하면, 처음에 한 수를 놓잖아요. 그 다음수를 놓을 때는 이미 놓아진 것과 연계체제에 들어갑니다. 체계가 잡혀서 놓아요.
그러면 처음 한 수의 가치와 두 번째 수의 가치가 달라져요. 세 번째 수를 놓게 되면 1번, 2번, 3번의 수를 포괄해서 놓는 겁니다. 마지막 수가 앞에 놓인 모든 수를 책임져야 될 게임이에요. 이 말을 조직사회로 전환시키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사적인 자기만의 독자적인 현실은 이것이 남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미생 드라마의 주제가 뭐냐 하면, “장그래야, 네가 소원이 무엇인고?” 오차장이 물을 때 이렇게 답변합니다. “저는 다른 것 바라지 않습니다. 정규직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같이 일할 수만 있다면.”
이게 무슨 사상이냐 하면, 이게 바로 ‘우리’ ‘우리교회’라고 할 때 그 ‘우리’에요. 이게 바로 레위지파가 폭을 가지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폭을 가지면 안 되거든요. 이스라엘은 쥐포가 되어야지 폭을 가지면 안돼요. 폭을 가지는 그것이 자기 구원을 방해하는 본인의 첩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열 두 제자의 운명은 베드로? 아니에요. 요한에게도 달린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달렸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친히 선택하신 가룟유다에게서 운명이 결정됩니다. 가룟유다가 배반하니까, 카드게임에서 카드 한 장 빼버리니까 예수님 세계가 다 무너지지요.
제자들은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주일 낮에 못 부르는 노래지만 그런 노래했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간다고 해놓고 막상 앞에 홍해가 있고 뒤에서는 애굽군대가 따라오니까 기껏 대안이 뭐냐? 다시 내 본래의 자리로, 애굽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민수기에 열 번 나옵니다. 이것이 중요한데 열 번이 나와요.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김광진이 부른 <편지>라는 노래의 앞대목이에요.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는 않겠소.” 그 다음 이런 내용이 막 나옵니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그걸로 끝나야 될 것인데 그 다음에 또 뭡니까? 자기가 돌아갈 자리가 또 따로 있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꼼수에요? 이게 무슨 꼼수입니까? 열 두 제자가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어디로 갔어요? 어디로 갔습니까? 그 간 장소가. 고기 잡으러 갔잖아요. 이게 무슨 꼼수입니까? 예수님 죽고 난 뒤에 제자들은 합창을 했겠지요.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주께서 부활하셔서 엠마오로 내려가면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지요. 웬 아저씨가 자꾸 기어 붙는기라. “와 아저씨가 자꾸 기어붙노?” 하니까 나중에 눈을 뜨는 거예요. 눈을 뜨는 것을 뭐라고 하지요? 한자말로 두 자로 눈 뜨는 것을 뭐라고 하지요? ‘개안(開眼)’이지요. 개안(開眼). 첩자가 나를 개안케 하는 겁니다. 내 속에서 죄가 비로소 속에서 나를 면제시키는 거예요. 주께서 내 죄를 지적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눈이 감긴 채 나만의 현실을 주장하면서 부질없는 지옥으로 갔을 거예요.
뒤늦게 부자가 지옥 가서 개안해 보니 뭐합니까? 뜨거운데. 너무나 안타까워서 동생들 걱정해 가지고 “동생 다섯이 아직 이곳에 안 왔는데 거지 나사로를 내 집에 보내시면 안 되겠습니까?”(눅 16:28) 말씀으로 개안되지 아니하면 개안된 그것이 또 자신의 폭이 되고 자기만의 독자적인 현실이 되기 때문에 그런 구원은 없는 것이거든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그것이 증명되었으니까 선지자의 말씀 그 앞에서 눈 뜨지 아니하면 그들은 구원 없다. 식사하러 갑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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