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2015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2강 본문
녹취:한윤범 2015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2강 (강의:이근호 목사)
민수기 2장에 보게 되면, 회막이 있고 회막 주변에 열두 지파가 포위돼있습니다. 중간에는 레위지파가 있지요. 열세 지파에서 레위지파가 중앙에 하나님의 거룩을 보존시킵니다. 열두 지파는 이 거룩을 지향하게 돼있어요. 왜냐하면 거룩이 이스라엘을 만들었기 때문에 나에게서 나온 행위는 나에게 소환됩니다. 거룩에서 나온 것은 거룩으로 소환되게 돼있어요.
여기에 아셀지파가 있는데, 제가 A:라헬, b:빌하, B:레아, b:실바, 라고 정했습니다. 원래 야곱이 라헬과 결혼하고 싶어 했는데 삼촌이 야곱을 속였지요. 우리 동네에서는 1+1이라 해서 언니를 덤으로 가져가라 했는데 언니는 못 생기고 시력이 안 좋고 여동생은 예뻤습니다. 남자가 되서 예쁜 것 취하는 건 당연한 거고. 그래서 이걸 끼워 팔기라는 거예요(허니버터칩에 끼워 팔기 한다고). 끼워 팔기하면서 레아를 넣지요.
그렇다면 여기 아셀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Bb가 돼요. 단은 라헬의 여종에서 나와서 Aa. 그 다음에 납달리는 역시 Aa. 라헬이 아기 못 낳습니다. 빌하한테 넘기지요. 그러니까 네 명의 여인이 한 사람 야곱의 자식을 낳게 되면서 하나가 자식을 낳게 되면 나머지는 스톱이 돼요. 스톱이 되면서 거기에 나오는 표현형들은 순전히 주님의 계획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들의 집합이 돼요. 이스라엘이.
그 다음에 베냐민지파는 마지막 때 라헬이 야곱의 자식이 되어서 AA. 그 다음에 에브라임은 원래 요셉지파는 하나인데 레위지파가 중앙에 대표로 하면서 요셉지파가 둘로 나눠졌어요. 므낫세와 에브라임으로. 요셉지파니까 라헬 계통이죠. AA. 그 다음에 므낫세지파도 AA. 그 다음에 잇사갈은 BB, 그 다음에 유다는 BB, 스블론도 BB. 그 다음에 갓지파는 Bb. 그 다음에 르우벤지파는 BB, 시므온지파도 BB.
이렇게 해서 진행방향이 동쪽으로 진행하면서 정실부인 중심으로 배치하고 뒤에는 종으로 배치해서 이미 레위지파가 특수한 지파로 대표로 있는 이상 레위지파가 갖고 있는 위상, 레위지파가 품고 있는 거룩과 비-거룩의 접촉적인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파는 헤쳐 모이되 종이냐, 정실이냐, 라헬 계통이냐, 레아 계통이냐, 그 표현형을 보여주는 데서 전개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러한 전략, 이러한 모든 구조는 순전히 하나님께 숨겨진 비밀이지 개인적으로 손들고, “구원받고 싶습니다.” “손 내려!” 그런 식의 구원은 없어요. 성경에 나오는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제가 아까 했잖아요. 예수 믿는다는 것은 결국 예수 믿는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하나님 앞에 어림도 없는 통하지 않는 거예요. 예수 믿는 것도 우상이니까.
제가 아까 예를 들었지요. “여보, 이제부터 당신을 믿겠습니다.” 이건 오히려 “수상하다. 왜 갑자기 왜 믿는다고 해.” “아버지, 오늘도 잘 주무셨습니까? 전 아버지를 믿습니다.” 하면 좋아할 줄 압니까? “미쳤나. 아는 사이에 갑자기 왜 구분 해.” 이렇게 나온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따로 어떤 종교적인 어떤 티를 내겠다는 말은 사실은 그걸 빌미로 해서 나만의 영역을 구축하겠다는 얄팍한 수에 지나지 않아요. 드릴 것 드릴 테니까 내 것은 잘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거래 같은 정신이 있어요.
종과 정실부인의 배치는 나중에 약속의 땅에 가서 그리심 산과 에발 산, 높이가 900미터 쯤 되는 두 산에서 정실부인 쪽은 그리심 산 쪽에 서고, 에발 산에는 종 출신의 잡종의 표현형들이 섭니다. 그래서 이쪽은 축복을 선포하고 저쪽은 저주를 선포하는데 축복과 저주, 거룩과 비-거룩을 유지시키고 연결시키는 가운데 뭐가 있느냐? 바로 법궤가 있어요. 레위지파가 있다니까. 한 지파가 땅도 없이, 부재의 존재지요. 땅 있는 동네에 땅이 없다니까 이상하죠. 땅 없는 곳에 가서 너희들이 이 땅에서 사는 그것이 그냥 생존 차원이 아니고 거룩 차원으로 재편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레위지파가 개입돼야 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예수님은 레위지파에서 왔느냐고 묻고 싶을 거예요. 아니요. 예수님은 유다지파입니다. 그럼 처음부터 유다지파를 대표로 내세우지 레위지파를 내세웁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레위지파의 제사행위마저 죄가 돼요. 아, 이것 결정타입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 다니는 것이 죄가 돼요. 하나님 섬긴 게 죄가 돼요. 기도한 게 죄가 되고, 헌금한 게 죄가 되고, 전도한 게 죄가 되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 확장하겠다고 설쳐대는 게 죄가 되는 겁니다.
처음에 말씀드렸지요. 하나님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모든 손이 빠지길 원합니다. 관여하지 않길 원합니다. 전부 다 주님에 의해서 구원이 돼야지 우리가 협조했습니다, 동조했습니다. 동업했습니다, 도와드렸습니다, 우리가 애를 썼으니까 하늘나라 확장되는데 효과적이었지요, 하는 모든 이야기들은 전부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게 아니에요. 다 빼는 겁니다. 빼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구원의 실패자가 되지요. 그게 바로 정답이에요. 구원에 우리가 실패가 될 때 비로소 구원이 되는 것은 나로 인해서가 아니라 실패자마저 구원시켜주는 그분에 의해서 이뤄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레위지파가 결국 유다지파에게 물려준다면 레위지파는 어디에 속하느냐? 레위지파는 열두 개 속에 포함이 돼버리고 이 안에는 누가 있느냐? 그야말로 부재, 유다지파에서 온 임금님이 오심으로써 완전히 새 성전이 완료가 되는데 이것이 에스겔 48장에 나오는 새 성전의 구조입니다. 새 성전의 구조에서 레위 문, 유다 문, 르우벤 문, 요셉 문, 베냐민 문, 단 문, 납달리, 아셀, 갓, 스블론, 잇사갈, 시므온, 이렇게 해서 유다지파 중심으로 재편성하면서 지금의 민수기는 이동하지만 완성된 고정된 배치에서는 유다지파로 완료하는 겁니다.
그러면 유다지파가 왜 레위지파를 대신해서, 스블론 해도 되고 아셀 해도 되는데 왜 유다지파가 그게 되느냐 하면, 먼저 레위지파가 등장하게 된 것은 레위지파 BB잖아요. 레위가 누가 자식이냐 하면 레아지요. 야곱이 누굴 사랑했는가? 라헬을 사랑했어요. 야곱의 본처가 먼저 결혼했다고 레아가 본처가 아닙니다. 라헬의 본처에요. 그게 마태복음 2장에 나옵니다. 베들레헴에서 헤롯 왕이 동방박사 못 잡고 난 뒤에 화가 나서 베들레헴 얘들 다 죽였어요.
오늘 오후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거기에 보면 송일국 아들 세 명도 있고 이휘재 아들 두 명도 있고 추사랑도 있고. 자기 보기에 예쁘다 하는 얘들 다 죽었어요. 누가 우느냐? 레아가 우는 게 아니고 라헬이 울지요. 라헬이 이스라엘의 본처입니다. 이스라엘의 통곡소리지요. 이스라엘은 라헬 중심으로 성립한 겁니다. 남편인 야곱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새로운 이스라엘은 주님으로 인해서 고난에 합세된 자가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로 탄생한다는 이야기지요.
헤롯 왕이 베들레헴 얘들 다 죽였는데 예레미야에서는 그걸 미리 예언한 거예요. 예고한 거예요.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헤롯으로 하여금 베들레헴에 있는 귀한 자식들 죽게 한 것은 주님이 의도한 작품이에요. 왜 그렇게 하느냐? 새로운 이스라엘로 하여금 예수님 외에는 어떤 기쁨을 못 갖게 하기 위해서. 주님 잔인하지요. 예수님 빙자해서 예쁜 딸, 예쁜 아들, 일체 성질나서 못 봅니다. 그리스도에게 갈 그 기쁨을 절대로 주께서 남한테 빼앗기지 않아요. 왜냐하면 해안선, 경계선이니까.
경계선은 뭔 뜻이냐 하면, 누구도 거기에 경계선에 폭이 없기 때문에 디딜 수 없어요. 지옥 갈 사람 에서도 디딜 수 없고 야곱도 디딜 수 없고. 따로 다른 분에 의해서 발생되는 선이 경계선입니다. 따라서 경계선에서 솟구쳐 나오는 그분이 우주의 본주인공이에요. 우리는 피조물로써 무대 중앙에 등장할 그분을 위하여 잠시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난 거예요. 우리는 박수 칠 준비가 돼있어야 돼요. 심지어 지옥 갈 사람까지도. 우린 천국에서 치고 저기는 지옥에서 치고. 주가 주 되심을. 땅이 갈라지면서 인물 등장하게 되면 우린 박수치면 되는 거예요. 그게 찬양이라는 겁니다. 주에 대한 찬양.
그런데 그 자리를 사랑하는 내 딸과 내 아들이 차지하고 있으면 솟구쳐 올라오시는 분의 머리에 뭔가 받치거든. 이것 뭐야. 보니까 추사랑이라. 뭐 이런 게 다 있어. 치고 올라오면 그 얘는 난데없이 죽어야 돼요. 그래서 주님에 의해서 받쳐죽는 자는 복된 자입니다. 성경에서. 성경은 희한해요. 살아있다는 것은 슬픈 소식이고 죽었다는 것은 기쁜 소식이고 성경은 모든 게 뒤바뀌어있어요.
“주여, 살았습니다.” 그러면 주께서는 “아직도 살았나? 다른 사람은 낙원에 가 있는데. 뭐 하려고 네가 살아있노, 뭐 하려고 니가 아직 살아있노. (아주 랩을 해.) 뭐 하려고 살아있노. 우짤라고 살아있노.” “그렇지 않아도 주님 만나려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야지. 그렇게 이야기해야지.” 어떻게 살았습니다가 아니라 주님 덕분에 이만큼 살았습니다. 랍스타 뜯으면서 주께서 주셔서 살았습니다. 랍스타 사달라는 이야기 아니에요. 전혀 아닙니다. 모든 일에 범사에 감사하란 말이요. 이것이 주님의 표현형을 드러내기 위해서 오늘날 이같은 상황으로 몰아세운 겁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너희들에게 믿음을 준 것은 세상을 눈에 있어서 즐겁게 주님과 함께 고난 받기 위해서 믿음을 줬다는 겁니다. 그래서 환란 중에 기뻐하라. 환란이 뭐냐? 그 예를 방금 들었습니다. 랍스타 뜯는 것. 이빨이 얼마나 아프겠어요. 환란이에요. 그리고 유럽여행가는 것, 얼마나 피곤한 줄 압니까? 지금 서 목사님 사모님 고생 많아요. 죄수도 아닌데 노예선 타는 것처럼 힘들어요. 유럽여행, 스위스여행 얼마나 피곤한지 몰라요. 자식 결혼해서 잘 사는 것, 더 잘 살아야 할 건데. 김장 해주고 다 퍼주는데 아직도 모자라. 더 퍼주고 싶어. 환란이에요. 네가 이렇게 사니까 더 해주고 싶잖아. 못 해주는 그 갭만큼 아파. 집 사줄까? 집 사줘도 안 돼. 왜? 더 좋은 집 못 사줘서 가슴 아파요. 안 사주고 그런 소리 못할 입장입니다만.
지금까지 첫째 시간, 둘째 시간 이야기한 것이 부자不在의 존재가 간격을 만들고 튀어나온다. 이게 끝이에요. 부재, 이 땅에 없는 존재가 간격, 틈을 만들고 균열을 만들어서 그 틈새로 뛰쳐나오는 거예요. 어떻게 뛰쳐나오는가? 죽음의 모습으로, 피 흘리는 모습으로 튀어나오는 겁니다. 따라서 부재의 원칙을 위해서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먼저 시간적으로 앞서서 있음을 드러내게 해요. 있음을 마음껏 보이게 해놓고 있음을 차버립니다. 이것 아니거든. 이스마엘? 아니거든.
여러분, 제사를 최초로 드린 인물이 누굽니까? 가인입니까, 아벨입니까? 가인이죠. 요새 같으면 최초로 예배드린 사람이죠. 예배드리고 그 예배를 주께서는 안 받으시잖아요. 왜냐하면 있음은 하나님과 접촉이 되지 못합니다. 이유가 뭐냐? 있는 존재를 주께서는 추방했기 때문에 그래요. 너는 에덴동산에 살지 말고 이 땅에서 나가버려라. 나갔다면 쫓겨나간 거죠. 쫓겨나갔다는 말은 가짜란 이야기입니다. 안 받아준다는 이야기에요. 받아줄 속성이 있다면 받아주지요. 그런데 쫓아냈다는 말은 그것도 혹시 들어올까 싶어서 아예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시켜버렸지요. 이것은 주님의 단호함입니다. “오지 마!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오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추방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되느냐? 있는 데서 천국 가기 위해서 시도를 합니다. 자꾸 들이밀어요. “하나님, 예배드릴까요? 하나님, 호박고구마 좀 드세요.” “갖고 오지 마.” “주님, 십일조.” “십일조? 너나 써.” 하나님은 돈을 안 받거든요. 왜 안 받느냐? 더러워서 안 받아요. 창녀의 돈을 안 받듯이 더러워서 안 받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전세를 내라 했잖아요. 성전세는 내게 해요. 내면서 낼 자격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인간은 뭔가 행하게 되면 행함으로 뭐가 발생된다 했습니까? 그 행함에 따라서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순환구조가 새롭게 발생 되지요. 쟤는 안 했는데 저는 했거든요, 라고 어떤 선이, 거미줄이 형성돼요. 그래서 되돌아보면 옛날에 내가 어느 교회에 다녔고 부교역자 생활 멋지게 했고, 전도사 생활 신나게 했고, 부흥사로 한 것을 자랑스런 영웅처럼 했고. 그게 거미줄처럼 하나의 역사가 형성돼요. 그것 안 받습니다. 받질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부재지만 주님 보시기에 누가 부재입니까? 누가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있으나마나한 존재지요. 그래서 베드로가 하는 말이,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아무 보탬이 안 되는 종입니다. 어떤 여인네가 향수를 모아놨어요. 그 향수를 주님 발 앞에 깼습니다. 왜 깹니까? 두 가지의 의미가 있어요. 하나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향수보다 더 귀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향수>란 영화가 있지요. 그 영화는 인간의 향기가 어느 정도까지 심오할 수 있는지 얻기 위해서 처자의 피부를 벗겨서 거기에 있는 냄새를 수집합니다. 살인자지요. 하지만 그는 살인자라는 것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완벽한 향수를 얻기 위해서 어떤 것도 허용돼야 된다고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 사람이 향수를 잃었을 때 내 피부 내놓으라고 죽여 버립니다.
인간이 자기에게 되돌아오는 사슬을 일시 빌려줄 수 있고 양보할 수 있지만 영원히 스스로 자기를 부정할 능력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그걸 아시고 이렇게 했지요.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오너라. 이에 가장 합당한 제자가 있었으니 그 제자가 누구냐? 베드로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체포할 때 어떻게 했습니다.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세 번씩 이야기했지요. 바로 그 과정이 자기를 부인하는 그 간격, 경계선, 해안선에 가장 가까이 있을 때 가장 인간은 자기만 아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지금 베드로는 제일 가까이 간 거예요. 누구보다도 가까이 간 거예요. 예수님을 가장 싫어하고 미워한 그 순간이 바로 주님의 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순간이 온 거예요.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셨습니까, 라는 외침이 나올 순간이 그 순간이에요.
그러니까 십자가마을 사람은 아직 멀었어, 멀었어. 이렇게 착하고 점잖아서는 멀었다니까. 주님이 내 앞에 무슨 일을 도와줬다고? 주님을 왜 믿는데 옛날 과거 인물을 나는 이순신 장군도 안 믿는데 이천 년 전에 죽은 인물을 왜 믿는데, 라고 생각하고 살아가주시길 바랍니다. 천국, 지옥 가본 놈 있나.
모든 눈에 보이는 것은 내가 나를 위한 현실에 재료로 다 수집이 돼요. 히틀러의 부하가 이런 이야기했어요. 당신은 왜 유대인들 오백만을 학살했느냐고 하니까 저는 시키는 대로 했어요. 저는 공무원입니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저의 임무입니다.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그 사람은 가정적으로 굉장히 훌륭한 가장이었고 부모한테 효도한 사람이에요. 이웃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예의바르고 점잖은 사람이고 성질 더러운 것 하나도 없어요. 자기 임무가 뭐냐 하면, 유대인들 학살하는 것이 임무였고 그는 그 임무를 공직자로 충실히 한 겁니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어디서 잘못됐지요? 오백만이 학살됐는데 유대인이 죽었는데 거기에 대해서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지요. 왜? 시킨 대로 했기 때문에. 뭐가 잘못됐지요? 이것 모른다면 복음을 현실에 적용한다는 것이 이렇게 막힐 줄이야 저는 몰랐습니다.
전쟁 끝나고 군사재판 받는데 그렇게 변명했을 때 사람들이 당신의 행동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아파하는 걸 모르냐고 하니까 하는 말이, 지금까지 살아온 나는 내가 한 일에 내가 책임지는 거죠. 내가 만약에 구제사업을 했다든지 평소에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을 했다면 유대인을 죽이지 않았지요. 내가 하는 일은, 꾸준히 승진할 때마다 계속 쌓아온 일은 내가 뭘 하지, 오늘 뭘 하지? 이것만 쌓았을 뿐이고 거기에 한 일이 유대인 오백만 학살한 일이었어요. 따라서 같은 인간으로서 그 사람을 추궁할 수 있는 어떤 죄목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죄 있는 자가 돌로 쳐라. 부재자가 아니면 존재하는 자를 심판할 수 있는 자격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히틀러의 부하는 사실은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오백 만까지는 안 죽였지만 개미 오백 마리는 죽였거든요. 에프킬라로 모기 오백 마리는 죽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것은 나한테 정당하니까 정당한 거예요.
유대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돌로 치려고 할 때는 자기만 생각한 것이 아니고 국가체제질서를 생각한 겁니다. 만약에 이걸 용납해버리면 국가전체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거든요. 율법에 돌로 치라는 것은, 하나님이 세운 이스라엘을 유지하기 위해서 최소한 법적인 조치를 취해야 된다고 해석한 겁니다.
그런데 제가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던가요? 이스라엘 멸망한 이유가 뭐라고 했던가요? 다 잊어버렸지요. 이스라엘은 뭘 위해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했기 때문에 율법에 대한 오해입니다. 율법은 전체 현실, 오실 메시아의 현실로 보여주는 표현형으로 율법이 있는데 사람들은 율법을 가짐으로써 내가 소속돼있는 이 현실이 보다 행복하고 안정된 현실을 유지하고자 율법을 사용한 거예요. 주의 거룩한 말씀을 차용한 거예요.
오늘 오후에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만 성도란 특징이 뭐냐 하면, 모든 면에서 굉장히 예민해져요. 전에는 술 마시고 담배 피워야 죈데 그게 아니고 헌금 하는 것도 죄라는 감각이 와요. 성령께서 그렇게 와요. 아무렇지도 않는데 전부 다 죄처럼 느껴지는 것.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면, 그래야 뭘 보기 때문에? 간격. 나 같은 인간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나로 인한 일이 아니라는 것. 그럼 누구에 의해서 그렇게 했지? 없는 나로 하여금 나로 보지 않고 나를 누구, 누구의 표현형으로 사용하시는 그분 덕분으로 내가 그분 안에서 그분 작업 속에 내가 참여됨으로써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면 저는 여러분들이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하갈은 지옥 가고 정실부인 사라는 천국 가면, 내가 만약에 표현형이 종의 자녀라면 이 코너 끝나는 게 아닙니까? 이러다가 내가 지옥 가는 게 아닙니까?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게 바로 제 말에 대해서 엄청난 오해하신 거예요. 이 오해를 풀어야 돼요. 오늘 참석 안 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풀어야 돼요.
야곱과 에서가 어떻게 태어나느냐 하면 부재에서 태어나요. 이삭의 부인 리브가가 아기를 못 낳아요. 아기 없는데 하나님께서 계시에 의해서 아기 둘을 나타나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아기 둘이죠. 하나님께서 해설을 붙였어요. 아기 둘이 아니라는 겁니다. 두 민족이라는 거예요. 두 민족이라면 잘 됐네. 서로 남북화합하면 되겠네. 정상회담하고. 아니에요. 두 민족이 그냥 두 민족이 아니고 이게 싸워야 돼요. 싸워야 경계선이 만들어지니까. 왜 싸우느냐? 놀라운 사실은 싸울 이유를 본인들이 모른다는 겁니다.
두 사람이 있습니다. 너 같은 인간이 지옥 가는 거야. 아니야. 네가 지옥 가. 이렇게 싸우면 이건 둘 다 틀렸든지, 둘 다 맞는 게 돼요. 왜? 이쪽 입장에서는 이쪽 말이 맞고, 저쪽 입장에서는 저쪽 말이 맞아요. 처음에 야곱과 에서가 팥죽 갖고 싸울 때 둘 다 스스로 자기가 맞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누가 먼저 눈치 챘느냐 하면, 경계선에서 올라오신 분만 의롭고 우리 둘은 그분 앞에서 비-거룩하고 죄인이란 사실을 야곱이 알았으니까 구원받았고 그걸 몰랐으니까 에서는 지옥 간 겁니다.
이 말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원리가 있습니다. 정리해봅시다. 아브라함에서 복은 없는 자식이 구원된다는 거죠. 이삭에게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야곱에서는 아들이 열두 명이죠. 다 굶어죽을 판에 누가 나서서 이들을 구원합니까? 그중에 요셉이 나서서 요셉의 희생 덕분에 다른 사람이 살지요. 본인은 고생하고 남이 사는 원칙, 아브라함은 없는 자식이 구원받는다. 이삭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세 번째는 죽은 자식이 다른 사람을 살린다. 이 세 가지 원칙이 나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전부 합체가 돼요. 독수리 오형제처럼. 원리가 합체가 돼요.
없는 자식이 구원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없는 분이죠. 하늘에서 오신 분이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선언 받았지요. 죄인으로 선고한 그 판사를 죄인이 나중에 재판해버렸지요. 누구야? 너, 나와. 네가 죄인이야. 죄인으로 받은 분이 오히려 의인이고, 죄인으로 규정한 그들이 도리어 죄인 되고. 세 번째는 주님께서는 누가 잘났나, 못 났나가 아니고 다같이 못난 입장에서 나 혼자 희생해서 내 덕을 봐라. 내 덕분에 네가 구원되라는 것이 세 번째 야곱의 언약의 원리가 되는 겁니다.
이 세 가지의 원리를 적용시킬 때 재미있는 것은 이런 세 가지 원리를 이것을 처음부터 말씀으로 주십니다만 이 말씀을 주실 때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없었는데 나중에는 깨닫게 하시지요. 그건 뭐냐 하면, 이러한 예고, 이러한 예언, 미리 주는 예상문제, 이런 것은 인간이 준수할 일이 아니고 지킬 일이 아니고 말씀 주신 당사자가 이 땅에서 현실화시켜 만들어버리죠.
이걸 여러분이 아신다 치고 여러분에게 문제를 내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주신 십계명은 어떻게 됩니까? 다시 할게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우리에게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말씀을 주신 본인이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해나감으로써 혜택을 우리에게 공짜로 주시는 거예요. 그냥 덤으로 참여시키는 거예요.
그렇다면 주께서 주시는 십계명이라는 것, 그리고 제사법, 뭘 하지 말라는 민수기에 나오는 법령은 지켜야 됩니까,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리고 사도 바울의 권면 같은 것,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던 것, 술 취하지 말고 분 내도 해지도록 품지 말라는 것, 용서하라는 이야기,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는 이야기, 무시로 기도하라는 그런 이야기, 말씀으로 무장해서 마귀를 이기라는 그런 이야기,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 그런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지켜야 된다는 겁니까, 지키지 말라는 이야기입니까? 디모데전서에서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줄로 족한 줄 알라는 이야기,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이야기.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지금 이 시대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예언대로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놓는 지평이라고 했지요. 만들어놓는 판때기에요.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이스라엘이 멸망했잖아요. 멸망했다는 말은, 이 세상에 모든 인간이 전부 다 애쓰고 전부 다 하갈의 자식 이스마엘이고, 요셉 빼놓고 다른 형제들, 꿈꿨다고 구박하고 너만 잘났냐고 욕하고 꿈꾸는 놈 온다고 죽여 버리자고 질투하고 미워하는 한결같이 모든 인간이 이런 판에 있습니다.
이런 판에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말씀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노선을 새롭게 만들어낼 필요가 있는 거예요. 만들어낼 때는 바로 네가 주의 말씀대로 꼭 반대로 살아가는 요소를 너는 모르지만 나는 아는데 네 안에 반대되는 요소가 들어있는 거예요. 들어있어서 뛰기만 해도 출렁출렁해요. 돈을 사랑해야지, 돈을 사랑해야지. 이게 막 나온다니까. 날 미워하면 가만 안 둘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이게 막 나와요. 남을 욕하는 것은 살인죄라 하지요. 나한테 걸리기만 해봐. 가만두는가 봐.
오후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우리 어머니 같은 경우에 너무나 그야말로 별명이 천심, 하늘의 마음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치매 걸리고 난 뒤에 욕이 막 나와요. 무슨 천심이 욕이 나와. 깜짝 놀랐어요. 너무 신기해서 동영상으로 담아놨어요. 아하, 인간이 죄를 짓는 게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는 다 죄가 들어있는데 그동안 발현이 안 됐어요. 만개가 안 된 거예요. 꽃이 늦게 폈어요. 욕하는 꽃이 늦게 피었어요. 다른 분은 일찍 폈는데 우리 어머니는 늦게 폈어요.
모든 사람은 아담의 자손으로서 똑같아요.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말하기를 인간 되는 것은 70%가 환경 탓이고 30%가 유전 탓이라 하거든요. 이 말은 사람이 환경만 좋으면 괜찮게 되는 것이 아니고 잠복기에 들어가죠. 좋은 가정, 다복한 가정에서는 욕도 모르고 하다가 그 집에 갑자기 부도가 낫다. 그 다음부터 욕판, 술판 집구석이 되는 거예요. 수녀원에 가면 되겠지. 수녀원에 가면 거기에 다른 차원의 욕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못 배웠다고 욕하고 동작 늦게 한다고 욕하고. 그때 때리지는 않지요. 같은 여자니까 꼬집고. 어떤 단체든 간에 단체 자체를 위해서 욕쟁이들이 배치돼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착하다, 안 착하다는 사실은 삭제돼야 돼요.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활용하느냐? 욕쟁이 같으면 욕으로 활용하면 할 수 없어요. 어떻게 활용하더라도 표현형이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그런 고백이 나온다면, 그것이 바로 성도인 겁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 듣고 머리 막 돌아가. 나도 나쁜 짓 다 해놓고 주께서 하셨다는 멘트만 뒤에 붙이겠다고 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야곱과 이삭과 요셉 같은 경우에는 어떤 멘트를 날릴 때 한 순간에 시험 치듯 날린 게 아니고 평생에 나그네 길을 살면서 완전히 진득하니 사골 우려내듯이 한평생 우려나면서 저는 나그네 인생입니다. “형이여, 걱정하지 마소서. 형이 날 미워한 게 아니고 형을 살리기 위해서 나를 총리대신이 되게 하신 것이니까 날 팔아먹었다고 형한테 절대로 조금도 감정 없습니다.” 이게 점잖은 멘트로 하는 것이 아니고 평생을 살아가면서 나오지요.
왜 그렇습니까? 타인이 날 조지는 게 아니고 남이 모르는 주님이 개인적으로 나를 짓밟아놨어요. “앞으로 네가 남한테 복된 일하더라도 네 공로로 하면 안 돼.” “알겠습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앞으로 힘들 일 시킬 텐데 그때 니 자랑할 거야?” “어데예, 언제예. 그럴 리 있습니까. 나는 죄인인데요.” “그래야지, 그래.” 완전히 조져놨어요.
“베드로야, 너 날 부인했지?” “죄송합니다. 자꾸 미안한 이야기를 하지 마시고.” “네가 나중에 앉은뱅이를 낫게 할 거야. 네 자랑할 거야?” “어데예. 내 자랑 아닙니다.” 앉은뱅이를 낫게 했을 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베드로와 요한의 능력으로 했다니까 왜 저 보고 이야기합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나를 다루시는 주께서 지금 앉은뱅이를 일으켰고 앉은뱅이나 나나 다 주님께 소속돼있다는 그 표현형만 드러낼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받으면 예수의 증인되는 겁니다.
그냥 사세요. 아~ 정말. 그냥 살던 대로 사세요. 때가 되면 교회 가게 하시고 때가 되면 기부금 낼 수도 있고 안 낼 수도 있고 낸 것 도로 달라고 할 수도 있고. 모든 어떤 머리카락과 발걸음도 주님이 알아서 하시니까 어떤 마음으로 뭘 해도 죄라고 각오하시고 살면 돼요. 점잖은 티낸다고 점잖은 사람 되는 게 아니에요. 점잖은 체하는 그 자체가 고단수 죄가 되는 거예요.
왜 자꾸 그런 짓을 하느냐 하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환경에서 나와요. 이건 상식인데요. 문명이요? 인간의 노력? 아닙니다. 문명은 어디에 달렸느냐? 아주 단출해요. 기후 조건입니다. 기후가 바뀌면 각박한 세상 되는 것이고, 환경이 봄여름가을겨울 제대로 돌아가면 사람 인심 좋습니다. 옛날 조선시대, 고래시대 때 인심이 좋았던 것은 스모그 현상이 덜 일어나서 그래요. 매연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열대야가 일어나지 않아서 그래요. 각박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사는 것이 환경이 똑같이 밥 못 먹고 사는 시대기 때문에 정도 그렇게 많았어요. 지금은 드라마에 보면 재벌 3세 아니면 결혼 상대자도 아니고 전부 재벌 3세 되서 모였다 하면 썰고 비싼 커피 먹고 노는 동네가 그 동네야. 집에서 잘 때 명품 옷 입고 자고. 도대체 드라마 연출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 전부 다 간접광고 때문에 그런 줄 아는데.
그게 우리 인식이에요. 저렇게 살아야 인간처럼 산다는 것. 그냥 비키니 옷장(젊은 사람들 알아요?)으로 얼마나 행복했었습니까? 물론 계속 비키니 옷장으로 있는 건 아니지만 나중에 허물어졌지만. 비키니 옷장에 둘이 단칸방에 살아도 얼마든지 행복했어요. 어딜 집 사달라고? 지 집 지가 사지 남 보고 사달라고 하는지. 집 사주면 사실 부모가 월세 받아야 돼요. 천만 원 보증금에 45만원씩.
사람은 환경이 나를 만드는 줄 모르고 지가 착해서 착한 줄 알고 선해서 선한지 압니다. 북한에서 살아보지요. 그것도 나름대로 천국이에요. 어버이 수령님의 은혜로 이렇게 오늘도 한 달 만에 고기국밥을 먹게 됐으니 다 수령님 은혜가 아니고 뭐야. 얼마나 심적으로 행복한지 몰라요. 너무너무 행복한 거예요. 여기는 보리밥 먹고, 현미만 골라먹고, 쌀밥 다 치우고 고기도 가려내고 그저 건강식, 다이어트 한다고 하지만 저쪽은 쌀밥에 고깃국 먹고 싶어 환장하고 있단 말이죠.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데 어떻게 만드는가? 자기예찬. 인생예찬으로 바꿔요. 이 대표적인 영화가 지금도 상영하고 있는 <국제시장>. 인간이 이 정도로 자기 스스로 극복하게 되면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 그 마지막 장면을 제가 이야기했습니다만 아버지 이름으로 사는 거예요. 지 이름이 아니고 돌아가신 아버지 이름으로 하면서 “아버지여, 참 나 잘 살았지요. 아버지여, 힘들었거든요.” 그걸 왜 돌아가신 아버지 보고 이야기했습니까? 자기 인생이 아니고 아버지라는 폐쇄된 환경 속에서 주체가 만들어요. 자기를 죽었으면서도 주목하고 주시하고 있는 아버지 유령, 아버지 귀신, 그것이 자기 태어난 환경에서 인간은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다른 분들은 유튜브에 꽃꽂이 한 것 올리고 연주하는 것 올려놨는데 전 목사님은 맨 손으로 바위 탄 걸 올려놨다고요. 등산에 관심 없는 사람은 이걸 왜 올렸는지 몰라요. 하지만 세상에 어떻게 저런 기술이? 나이 오십이 넘었는데 어떻게 저런 정력이. 그것 보고 깜짝 놀란 사람 있어요. 그러니까 그쪽끼리 동호회. 우리 십자가마을은 우리가 암장 타는 것 찍지 마시고 내가 막 산다는 걸 찍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죄인에 불과하다는 것,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고 주께서 그저 죄인을 의인 되게 했던 십자가라는 그 경계선
마지막으로 이것하고 마치겠습니다. 이게 어려운데요. 십자가가 하나에 물체로 돼있으면 소지하면 그만인데 십자가가 물체가 아니고 이게 반복된 사건이거든요. 반복된 사건이란 말을 어떻게 소지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십자가 사건이 의인으로서 죄인을 용서하신 사건이잖아요. 그러면 우리 주체 안에 레위기가 들어와요. 우리 안에 십자가가 들어오게 되면, 너는 레위인 아니었으면 죽었어, 라는 그러한 경계선, 우리 마음속에 경계선 짓는 거룩과 비-거룩을 양산하는 일이 벌어지면 우리 속에 십자가 들어온 거예요.
이게 지금 옛날 구약 이야기한 것 같지요. 아닙니다. 이것이 구약 전체가 주체로써 성령을 통해서 우리한테 주어집니다. 그럼 우리 주체가 뭐냐? 민수기가 되고 레위기가 되는 거예요. 율법 줘놓고 율법 지켰다고 덤벼들 때 잠복돼있는 우리 죄가 하나님의 율법은 그리스도를 위한 율법인데 우리는 이 율법을 지킨 내가 얼마나 위대하고 잘난 존재인가를 증명하는 그걸 증빙해주는 재료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덥석 집은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잠복돼있던 죄일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그래. 너 잘났구나. 너, 가인해라. 네가 알아서 제사 드리고 다 해라. 이스라엘이 반복된 제사가 결국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것은 그들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잠복된 자기의 죄가 노출된 것이고 다른 민족은 아직 잠복돼있는 것이고 그들은 노골적으로 먼저 노출된 거예요.
노출된 가장 극한의 지점이 메시아를 죽여 버렸다는 것. 왜 죽였느냐? 우리가 생각한 율법의 반영과 너무 다른 소리를 하니까 너 같은 인간은 모세 율법에 의해서 너를 처단하노라, 해서 사형시킨 겁니다. 사형시키고 난 뒤에 일이 끝났으면 괜찮은데 그 죽으신 분을 하나님이 나서서 사람들이 몰매 던진 그분을 사흘 만에 살려냄으로 말미암아 누가 이분을 죽였는지 다시 그 죄과를 되묻는 사건이 주님의 재림사건이에요. 온 우주가 재림 앞에서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창을 찌른 자도 볼 것이요. 요한계시록 1장 7절. 사람 잘못 봤다는 겁니다.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주님이 먼저 욕했으니까 욕했지요. 네가 욕 얻어먹을만하니까 욕한 거예요. 우리는 주님을 상대한 자체가 잘못이에요. 상대할 분이 아닙니다. 그냥 야곱처럼 한 대 얻어맞고 자기 힘 다 빠지고 발목 잡고, “제가 몰라봤습니다. 살려주세요.” 이럴 대상이 주님이지 주님, 얼마나 하면 착할 일해서 복 받겠습니까? 이렇게 같이 흥정하고 맞상대할 대상이 아니에요. 주님이. 그걸 구약에서부터 이미 준 겁니다.
야곱이 얍복 강에서 주의 사자를 만날 때 자기는 에서인 줄 알았어요. 아직도 에서를 이겨야 야곱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주님의 사자가 왔을 때 에서와 야곱을 갈라내는 경계선에서 출현한 분이 밤중에 나타난 주님이십니다. 어두운 밤이 낮을 주관해요. 그래서 천사는, “날 샌다. 빨리 가야 된다. 놔라, 놔. 낮에는 니 마음대로 활동하고 밤에는 내 세계다. 좀 놔둬라.” “안 됩니다. 축복, 살려줘야 가십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 장소 이름을 브니엘, 하나님을 만났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보세요. 그냥 살았다가 아니고 앞에 단서가 죽어야 되는데 완전히 땡 잡았다는 거예요. 나는 사람과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와 상대했다? 나를 심판할 그분과 만났고 그분이 날 살려주셨대. 용서한다고. 그래 살려줄게.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야곱은 더 이상 이 세상에 바랄 것은 없어라. 화낼 자격도 없고 걱정이나 고민할 권한도 우리한테 없습니다. 그냥 잘 주무시면 돼요.
마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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