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2015겨울수련회 5강 본문

십자가마을 수련회/15겨울(민수기)

2015겨울수련회 5강

정인순 2015. 1. 17. 14:05

 

 

 음성5

 

녹취:오용익

 

2015겨울수련회 5강

 

 

시작하겠습니다. 이 시간에는 율법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 자는 죽는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죽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율법을 안 지킬 경우에만 죽어야 되는데 민수기에는 율법과 상관없이 죽는 일들이 있어요. 율법 바깥에서 죽는 일들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 안에서 죽음을 규명하려고 “율법 지키면 안 죽지요? 율법 안 지키면 죽으니까 율법 지키면 안 죽지요?”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율법 외의 어떤 상황을 줘버리면 율법과 상관없는데 죽는 일이 벌어지고 마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봤던 고라 자손이 모세에게 대들다가 땅이 갈라져서 죽는 그 죽음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죽는다는 것을 율법에서만 하지 말고 율법 바깥에서도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왜 죽고 사느냐 하는 그 문제를 율법 안에서만 거론했느냐 하면, 이 율법이 바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전환시키는 기능으로 작용하거든요. 제사법도 율법에 포함되니까 이 제사법에서 죽을 자가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이 범위가 어디까지냐 하면, 율법 바깥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율법 바깥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걸 살릴 수 있다는 그 기능이 율법 안에 들어 있어요.

 

그런데 왜 사람들은 율법을 가지고 율법 지키면 살고 율법 안 지키면 죽는다고 왜 그렇게 좁게 생각했는가? 그것은 율법은 말씀에 의해서 율법을 줬는데 사람들은 뭘 보느냐 하면, 율법을 ‘말’로 본 겁니다. 말씀이 아니고 말로 본 거예요. 뭐냐 하면, 지시와 명령으로 본 겁니다. 이것은 오해를 한 거예요. 지시와 명령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따르면 안 죽고 안 따르면 죽겠지’라고 생각한 겁니다. 말씀의 범위는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는……, 이것을 언어로 번역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말로 번역하는 순간 인간이 이미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말씀의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말의 세계를 능가해요. 죽고 사는 것이 내 손에 달렸다는 것을 하나님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네 손에 달린 것이 아니고 너는 원래 죽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혹시 네가 죽는 일이 있더라도 말은 너를 살리지 못하지만 말씀은 너를 살려주는 겁니다. 죽고 사는 그 기능을 하는 지파가 레위지파고 레위지파의 중심은 거기 누가 있는가? 제사장이 거기 있습니다.

 

자, 방금 이야기한 율법의 기능을 말로 이해하는데, 지시로 이해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한다. ‘그러면 말씀으로 이해하는 그 범위까지 우리가 우리말로써 파악하면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게 파악이 될 것 같으면 말이 되지 그것이 말씀이 아니거든요. 그렇잖아요. 우리 인간이 파악한다는 그 한계, 우리는 말씀의 영역까지 갈 수가 없어요. 우리가 말의 영역을 넓혀서 아무리 말씀까지 도달해도 말씀은 또 하나의 우리가 지키고 안 지키고의 범위를 넘어서는 새로운 상황을 유발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껏해야 말 속에 갇혀 있지 말씀에까지 진척할 수가 없어요.

 

이게 언어가 갖고 있는 한계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해안선이 없는데 해안선을 지도에 그리면 그걸 가위로 오려올 수 있다고요. 그만큼 우리는 곡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말이 아니고 말씀 밖에서 일어난 죽음 사건이 어떤 사건이 있는지를 민수기 25장을 봅시다. “목사님은 강의하면서 1장부터 차근차근 해야지 붕붕 뛰고 그러십니까?” 하는데 1장부터 차근차근 하면 1시간만 하면 끝나요. 중요한 것은 백날 봐도 이런 깊이를 모르면 성경을 우리가 말씀이 아니고 말로 곡해하는 이상은 소용없는 거거든요.

 

1절부터 보니까,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그래서 9절에 보니까,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명이었더라.” 2만 4천명이 죽었어요. 이것은 바로 바깥에서, 율법 말고 바깥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어요. 자기들이 어떤 장벽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모른 겁니다.

 

그 장벽이 뭐냐 하면, 보호해주는 장벽입니다. 이 장벽은 바로 제사장중심, 제사장제도지요. 제사중심의 제도입니다. 죽어 마땅한 것을 제사제도로 말미암아 매일같이 반복해서 살려내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장벽은 눈에 안 보이니까 바깥의, 이 장벽을 거쳐서 이 바깥에 있는 우상 숭배하는 여인들과 음행을 했어요. 이것은 그 사람들이 무엇을 그냥 비켜간 것이 돼요? 그동안 우리를 지켜주는 장벽, 제사장제도가 유명무실하다는 식으로 행동을 한 거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음행을 했구나.”하고 죽이면 되는데 그렇지 않고 이 죽음을 다시 장벽 안으로 끌어 당겨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영역이 네가 생각한 죄를 더 넘어선 죄까지 처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해놓고 ‘아, 죄를 지었구나. 용서받기 위해서 뭘 하지?’ 두리번거린다는 자체가 이것이 그 자체 안에 갇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제가 전 시간 끝날 즈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이 아무리 죄를 지어도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했지요. 인간이 아무리 죄를 지어도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죄라는 것은 십자가와 1:1이 될 때 그게 죄인데 십자가의 용서를 충분히 드러내는 죄는 십자가의 저주를 받는 그 상황밖에 없어요. 예수님만이 죄를 알고 예수님만이 용서를 알아요.

 

그런데 우리는 본인이 이걸 죄라고 여기고 뭘 갖다 대느냐 하면, 십자가를 갖다 대는데 이것은 낭비가 너무 심합니다. 뷔페에서 음식을 너무 많이 가져왔어요. 내 죄지은 것보다 용서가 남아돌아. 그래서 이왕 죄 지은 것 좀 더 짓고 싶어. 왜, 맞추려고. 아니 아니되오. 그럴 수 없거든요. 아무리 죄를 지어도 우리가 용서의 양만큼 채울 수 없습니다. 그것이 로마서에서 우리를 의인되게 했다는 의의 분량이에요. 죄 지은 것 보다 의가 더 많아요. 차량 사고 한 대 났는데 견인차가 열대가 오는 거예요. 차량 사고가 열 대가 난 것이 아닌데도 견인차는 열대나 오는 겁니다. 과잉보호입니다.

 

이 과잉보호가 우리한테는 좀 귀찮고 낭비라는 생각도 들지만 이 과잉보호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이 마지막 요한계시록에서 세상이 불바다 될 때 그 때는 딴 소리 해요. “주님, 너무 심한 것이 아닙니까?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유황불까지 내려치십니까? 지옥을 만들었더라도 한 5년간 가두었다가 ‘이제 정신 차렸지?’ 하고 빼주면 되는데 영원한 지옥, 한 번 가면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는 영원한 지옥에 넣어버리면 너무 심한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것은 심한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차라리 심한 것이 있다면 우리가 죄 지은 것보다 더 많은 용서를 해주신 그것도 우리는 심하다고 이야기를 해줘야 돼요. “주여, 넘치는 용서를 주셨습니다. 이 넘치는 용서를 모르는 사람은 이 용서에 합치되는, 그 용서에 대해서 모독하는데 대한 징벌을 내려도 마땅합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그것이 히브리서에 나오는데요. 어린양의 피를 밟고 모독한 죄는 천지가 흔들려도 모자란다(히 10:29)고 되어 있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모독한 죄. 이건희 회장이 어떻고 정주영회장이 어떻고 해도 예수 사랑하지 않고 예수 안 믿는 죄는 그들의 많은 재산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복 받은 줄 아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예상하지 않은 다른 사건을 통해서 율법과 관련 없는 죽음 사건을 만들어놓고 다시 그 안으로 들여놓는 것은 이 제사장제도의 보호의 취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이라는 것은 죄를 방지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죄를 더 양산시킴으로 말미암아 보호책이 얼마나 넉넉한 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네가 어떤 보호책 속에 놓여 있는 가의 은혜를 날마다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죄를 지어서 죽음이 아니고 그 자체가 죽음이 되거든요. 그러면 죽음이 뭐냐 하면, 죽음이 필연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 제도의 보호에 의해서 살게 되지요. 이렇게 살게 되면 이 삶은 우연이 돼요. 우리가 산다는 것이 우연입니다. 그걸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죽어 마땅한데 용서해줬다.”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그 말 맞아요. 이 사는 게 우연의 산물이에요. 그냥 보내셔도 되는데 또 살려주시고, 또 살려주시고. 이것은 우리가 살았다는 것을 자랑할게 아니라 어떤 원리에 의해서 계속 죽어 마땅한 것이 계속 살려 내심의 은혜를 받는가를 늘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 보호 장치를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렇다면 죽어야 마땅한데……, 왜냐하면 하나님 만나면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면 죽습니다. 제가 내린 공식이 아니에요. 제가 내린 원리가 아니고 성경의 원리에요. 누구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면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사는 것처럼 야곱의 후손들도 제사제도에 의해서 사는 거예요. 누구하나 대신 반복적으로 죽어나감으로서 사는 겁니다. 그러면 죽음이 필연이고 삶이 우연이라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뭐냐 하면, 율법을 주신 이유가 이 공식을 확대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율법에서 우리를 존재로 만들어놓고 이걸 개방해 버려요.

 

개방이란 말은 현대 윤리학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타인을 향하여 개방된 의식을 가져라.” 하지요. 그 개방을 말하는 겁니다. 율법을 이야기하면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해서 그 다음부터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이웃이 등장합니다. 그러 의미에서 모든 범죄는 혼자서 짓는 범죄가 아니고 타인과의 연관성에서 범죄가 발생되는 거지요. 타인과의 연관성에서. 도둑질 하지 말라는 것에서 혼자서 지갑 꿍치는 연습 한다고 해서 도둑질이 아니거든요. 뭡니까? 남의 지갑, 남의 재산을 취할 때 도둑질이 되지요. 살인죄가 타인을 죽일 때 되거든요.

 

그러면 타인에게 자신을 개방하게 돼요. 그 때부터 존재기 때문에 드디어 존재의 발작을 시작합니다. 말씀을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 말로, 지시로 이해해요. 그러면 타인이 왔을 때 우리는 동정심을 발휘하고 속에 장착되어 있는 모든 양심적인 것을 다 발휘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여, 이 정도로 내가 저 사람을 동정하고 구제했습니다.” 소위 바리새인처럼, 내가 어떻게 했습니다, 도와줬습니다, 없는 돈 내서 저 사람의 사업자금 댔습니다, 30억 부도나서 지금 쫓겨 다니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할 수 있는 것을 다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연에서 도로 필연으로 돌아가면서 사람은 ‘내가 여기 존재가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내가 착한 일로 해서 다시 나는 살아도 마땅하고 더 살고 싶다. 나는 살아 있는 나니까 살아 있는 나를 내가 책임져서 더 살고 싶다.’ 하면서 여기서 무엇을 놓치고 무엇이 빠져 있는가를 보게 하는 겁니다. 사람이 율법대로 바르게 살게 되면 죽고 싶어요, 살고 싶어요? ‘아, 이렇게 착하다니. 난 이제 죽어야 해.’ 이런 생각이 듭니까? ‘그래, 이 땅에서 쓸모 있는 인간은 나 밖에 없어.’ 점점 더 살아야 된다는 근거가 자꾸 마련되잖아요. 근거가 마련된다고요.

 

코미디에 이런 게 있어요. 형하고 동생하고 싸우는데 형은 백수고 동생은 집안 일으켜 보려고 그렇게 애를 써요. 형은 자꾸 말썽을 일으키거든요. 병든 아버지는 침상에 누워있고. 동생이 화가 나서 “형, 자꾸 놀고먹기나 하려거든 형은 차라리 죽어버려! 그래야 가정 꼴이 된다.” 동생이 화가 나서 그 말을 하고 나가니까 형이 “아버지, 나갑시다.” 아버지보고 이야기한 것이 아닌데. 어쨌든지 붙들고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뭘 놓쳤습니까? 너 같은 인간, 너 같은 죄인을 내가 살려준다는 그것을 우리가 율법이 개방되고부터 “야, 나도 율법 지킬 수 있네,”라는 가능성을 발휘하는 거예요. 윤리 도덕을 발휘하게 됩니다. 바리새인처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일부러 이렇게 율법을 줘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존재의 가치를 유지하려고 하게 하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어요. 그 의도를 설명하기 위해서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이건 결혼한 사람에게는 아주 쉬운 예에요. 뭐냐 하면, 들어보면 이해됩니다. 부부싸움을 하는데 사소한 일 가지고 싸우지요. 싸우다보면 점점 말이 격해져요. “당신 시가(媤家)는 다 그렇더라.” 가만있는 시가집까지 이야기 나오니까 남자가 화가 나서 홧김에 좀 쳤다 합시다. 성질나서 한 방 그냥 툭 친 거예요.

 

그때부터 부부싸움의 화제가 어떤 문제꺼리가 화제가 아니고 “왜 때리는데?”부터 시작해요. 주제가 바뀌어요. 왜 때리는데? 이게 왜 때리느냐에 대한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나를 때려서 죽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그런 뜻이거든요. “아니, 그게 아니고. 당신이…….” 그래도 여자는 듣지도 않아요. “왜 때렸는데?” “그게 아니고 앞에 그 일이…….” 앞은 필요 없어요. 왜 때렸느냐고. 내가 네 손에 죽을 인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은 이상하게 자살하고 싶어도요 물에 빠져 죽는 경우는 있지만 강도에게 맞아죽고 싶어서 그런 방법을 쓰는 경우는 없어요.

 

자기 죽음에 고이 가치를 부여하려고 해요. 자기 죽음조차도. 죽어도 내가 죽는데 네가 뭔데 나를 죽이느냐는 그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진짜 때렸다고 하고 한 방 더 때렸어요. 그 때부터 그 여자는 묵언수행의 도를 닦습니다. 묵언수행의 도를 닦아요. 말을 안 해버려요. 보따리 싸서 집 나가버려요. 도인 되는 거지요. 여자들이 도 닦는 방법은 쉬워요. 한 두 방만 맞으면 돼요. 말이 안 된다니까요.

 

아무리 바르게 설득하고 해도 죽음 앞에서 인간은 화내게 되어 있습니다. 남편이 자기를 때렸지요. 만약에 율법 앞에서는 주님이 자기를 때렸더라도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묵언수행에 들어갑니다. “주님이 나를 때렸어요? 나는 주님 안 믿어요.” 이렇게 되어버리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면서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얼굴을 도려내버립니다. 타인의 얼굴을 도려내요. 여러분이 관광지에 가보면 얼굴이 파인채로 사진 찍으라고 만들어놓은 마도로스가 폼 잡고 있는 형상들이 있지요. 날개달린 천사도 있어서 거기 서서 사진 찍으면 천사처럼 나오잖아요. 통영에 가면 그게 있어요.

 

율법에서 내가 저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고 보지 말고 그 사람의 얼굴을 도려내게 되면 얼굴 없는 그 분이 바로 주님이에요. 이게 마태복음 25장에 나옵니다. “누가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는가?” 할 때 주님이 주신 거예요. 우리는 봉사를 하고 돕더라도 골라잡아서 도와요. 캠퍼스에서 대학생들이 전도를 해도 꼭 예쁜 여자만 골라서 전도해요. 못생긴 아가씨는 전도대상에서 누락이 되어버립니다. 왜? 못생긴 것은 천국 갈 자격도 안 된다는 말입니까?

 

주님이 생각하는 그 말씀의 범위를 모르고 꼭 말로, 내가 할 수 있다는 것, 내가 착해질 수 있고 선해질 수 있고 성령 받았으니까 말씀 지킬 수 있다는 자기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조치를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얼굴 없는 실재로 등장하지요. 그렇게 해서 그 얼굴 없는 실재를 통해서 너의 모든 윤리가 결국은 너의 윤리성에 의해서 소외된 자가 바로 나라는 겁니다. 너의 선택에 의해서 선택받지 못하고 간택 받지 못하는 대상으로 쫓겨난 대상이 바로 주님이에요.

 

그렇다면 율법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잃어버린 것을 찾아야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제사장중심의 제사제도지요. 그러면 그 점을 살피기 위해서 민수기 6장을 보겠습니다. 민수기 5장 16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에 율법이 주어진 이유가 등장해요. 먼저 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만일 어떤 사람의 아내가 실행하여 남편에게 범죄하여 타인과 정교를 하였으나 그 남편의 눈에 숨겨 드러나지 아니하였고 그 여자의 더러워진 일에 증인도 없고 그가 잡히지도 아니하였어도.” 라고 하는데 흔히 말하는 음행이지요. 이어서 16절을 보면, “제사장은 그 여인으로 가까이 오게 하여 여호와 앞에 세우고 토기에 거룩한 물을 담고 성막 바닥의 티끌을 취하여 물에 넣고 여인을 여호와 앞에 세우고 그 머리를 풀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소제물 곧 의심의 소제물을 그 두 손에 두고 제사장은 저주가 되게 할 쓴 물을 자기 손에 들고.” 계속 복잡하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이게 뭐냐 하면, 제사장이 보는 앞에서 제사장의 가치를 회복하는 조로 율법이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아까 민수기 25장에서 음행한 것은 그들이 음행하지 않아야 될 자리에서 음행한 거예요. 제사장 바깥에서, 보호벽 바깥에서……,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죽음조차 이기는 그 보호막이 있거든요. 인간의 윤리도덕으로 나가버리면 그 보호막이 필요가 없어요. 그렇잖아요. 그러면 바리새인처럼 실컷 착한일 하고 어디로 갑니까? 지옥 가는 거예요. ‘나는 이 말씀 지킬 수 있어. 나는 음행 안할 수 있고, 거짓말도 안 할 수 있고, 살인도 안 할 수가 있어.’ 이렇게 되어버리거든요.

 

그러면 뭐가 빠집니까? 제사장 필요 없네요. 보호막이 필요 없네요. 장벽이 필요 없네요. 자기가 그렇게 착한 일을 한다는 것은 장벽에 낙서하는 거예요. 장벽에 낙서하지 마세요. 주님의 피에다 낙서하는 게 아니에요. “이번 일을 통해서 내가 전적으로 죄인입니다.” 그렇게 아는 것이지 나의 착함을 거기에 기입하는 것이 아니에요. ‘1월 12일, 나는 드디어 착한 일을 했다.’ 거기에다 일기장 쓰는 것이 아닙니다. 집에서 일기 쓰는 분들은 나중에 소설 내려면 쓰든지 안 그러면 쓸 필요 없어요. 그건 자기예찬이 되거든요.

 

여인에게 일어난 모든 것은 제사장이 보는 앞에서 그것이 정화가 돼요. 네 죄가 아니고 내가 감당할 죄를 네가 저지른 게 돼요. 그리고 성경을 보면 희한한 것이, 여자가 범죄한 것은 문제를 삼아도 남자가 범죄한 것은 문제 안 삼아요. 왜냐하면 남자는 일단 결혼하면 되니까. 그 이유가 레위기 20장에 나옵니다. 11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누구든지 그 계모와 동침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둘 다 반드시 죽일찌니.” 12절에, “누구든지 그 자부와 동침하거든 둘 다 반드시 죽일찌니.”

 

이 20장 대목을 보면 갑자기 애들에게는 보여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막 들어요. 너무 외설적이죠.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찌니.” 동성애자는 죽이라는 말이거든요. “남자가 짐승과 교합하면 반드시 죽이고 너희는 그 짐승도 죽일 것이며 여자가 짐승에게 가까이 하여 교합하거든 너는 여자와 짐승을 죽이되 이들을 반드시 죽일찌니.” 미쳤어요. 짐승과 왜 하는지. “누구든지 그 자매 곧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을 취하여 그 여자의 하체를 보고 여자는 그 남자의 하체를 보면 부끄러운 일이라.”(17) 여기 죽 나오거든요. “누구든지 백숙모와 동침하면 그 백숙부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이 그 죄를 당하여 무자히 죽으리라.”(20) 백숙모, 이젠 족보까지 계산해야 돼요.

 

이게 뭐냐 하면, ‘무자히 죽으리라.’ 하는데 여인의 임무는 자식생산에 있습니다. 성경은 바람 피우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에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바람피운 것을 문제 삼지 않아요. 자식생산을 하나님이 지켜보는데서 해야 되지 그 바깥에서 하게 되면 그 자식이 죄악 된 자식인 것을 평가를 내릴 수가 없다는 이야기에요. 지금 무슨 말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말이 앞뒤가 잘 안 맞는 것 같지요? 모든 이스라엘 자식은 육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자체가 범죄에서 태어난 거예요. 범죄에서 태어났다는 규정을 받아야 제사에 의한 보호를 받고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하체를 보지 말라는 말은 자식생산이라는 그 체제에 대해서 네가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여인은 자식 낳는 기계지요. 여인을 통해서 뭘 낳아야 돼요? 자식을 낳아야 되겠지요. 그러면 그 자식은 어떤 자식입니까? 죄악된 자식이지요. 그런데 죄악된 자식을 제사장 보는 앞에서, 율법 앞에서 낳아줘야 그게 율법 안에서 죄악이기 때문에 그 바쳐진 율법에 의해서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 전환되는 거예요. 그래서 ‘무자하다’고 되어 있어요. 이거 참 어려운 것인데 해 봅시다.

 

부부간에 음행을 하지 말라고 할 때 ‘아, 다른 유부녀 사이에서 자식을 낳지 말라, 는 뜻이구나.’ 예, 그런 뜻 맞습니다. 맞는데 그렇게 자식을 낳아버리면 자식의 계보가 혼란스러워요. 종을 뭐로 바꾼다고 했습니까? 정실 아들로 바꿔야 되잖아요. 종의 자식은 지옥가고 정실 자식만 구원받기 때문에 여기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없는 자식만이 구원받거든요. 종의 자식은 뭘 통과해야 돼요? 종의 자식이 없는 것을 통과해서 그야말로 구원되는 자식이 되는 겁니다. 이해가 되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저 혼자 해 볼게요.

 

종의 자식이 정실부인 될 때는 반드시 아브라함처럼, 이삭처럼 없는 자식이 있어서 그래야 구원받는 겁니다. 없는 자식이 되려면 없음을 있음으로 바꾸는 레위지파의 제사제도가 필수적이라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레위지파는 그들의 저주를 대신 대변해주는 담당반, 전문분야기 때문에 그래요. 거룩과 비거룩 사이에서 하나의 선으로 있으니까. 그런데 이 구조가 있으려면 자식이 종이냐 아니냐, 종이냐 정실이냐, 그걸 따지는 범위 내에 있어야 되는데 음행이란 그 범위 밖에 있으니까 이것은 구원받을 수 있는 그 자체가 잘라져버린 거예요.

 

“백숙모와 성관계 하지 말라.” 이 말은 백숙모의 남편이 따로 있거든요. 누굽니까? 백숙부잖아요. 쉽지요. 백숙모와 백숙부 사이에서 누가 나와요? 자식이 나오고 그 자식이 필히 어떤 자식이다? 죽어야 마땅한 죄인이 될 때 비록 죄인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체제 안에서 이루어진 자식이기 때문에 어디로 옮겨갑니까? 죄가 제사에 의해서 영생을 얻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모든 자식은 육에 속했기 때문에 다 죽어요. 이것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일반 민족도 마찬가지인데 이스라엘 백성은 특혜가 있어요.

 

아까 말한 장벽, 보호막이 있어요. 너희들 자식은 내가 책임지고 어떻게 한다? ‘영생 줄게.’ 하고 보장한 것이 있어요. 그게 율법 안에 있는 제사제도입니다. 그러면 물어봅시다. 어떤 부부가 있는데 부부 사이에 관계를 했다. 그러면 부부사이에 관계가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음행이 돼요. 부부사이의 관계가 간음이 된다니까요? 왜 그런가하면, 부부사이라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전부 간음, 음행이 된다고요. “목사님, 그건 너무 심하다. 참고 참다보니 너무 심한데 한 소리 해야겠습니다. 부부사이에서 무슨 간음? 부부사이에서 서로 사랑해서 자식 낳았으면 예쁜 자식인데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합니까?” 하시는데 여러분이 레위기를 보세요.

 

아들이든 딸이든, 아들을 낳으면 33일 동안 더럽고 딸을 낳으면 66일 동안 더러워요.(레 12:4,5) 죄악 된 자식이에요. “아니, 부부가 사랑해서 낳았는데요?” 부부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사랑이 없어요. 사랑이라는 것은 어떤 경우를 사랑이라고 한다? 다 잊어버렸지요. 다시 일깨워드립니다. 사랑이란, (♬사랑이란, 사랑이란) 사랑이란, 죄를 알 때만 사랑입니다. 그 금에서 나와요. 좋아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전부 연세들이 어느 정도 되었고 또 아예 어린애들이 있고 그 중간쯤은 없으니까 마음 놓고 19금 이야기를 하겠습니다만.

 

일일이 조사는 안 해봤습니다만 3년 동안 애를 낳고 그 동안 임신을 핑계로 각방 쓰던 버릇이 있어서 그 다음부터는 각방 써요. 왜냐하면 사랑해 봤자 하나가 안 됨을 알기 때문에, 사랑 해봤자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알아요. 그냥 우연히 잠을 자다가 우연히 아내의 손이 스쳐도 남편은 아주 민감한 반응을 일으켜서 홱 돌아섭니다. 젊을 때는 사랑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성관계를 안 하고 또 늙어서는 힘이 없어서 못해. 그걸 가지고 경상도 말로 “디다.” 이게 뭐냐 하면, 그냥 못 헤어져서 사는 거예요. 사랑이 아니고 우정의 무대, 우정으로 사는 거예요.

 

언제 사랑이냐 하면, 주님의 십자가를 경유하면서, 그러니까 제사장의 장벽을 통과하면서 “주여, 세상에, 이런 아내(남편)를 주셨다니.” 그때 감사하지요. 감사하는데 상대방이 그걸 또 오해해요. ‘네가 나한테 감사하는구나.’ 너한테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한테 감사해요, 주님한테. 둘 다가 하나 될 수 없다는 말은 각자 자기 현실을 따로 챙기면서 그냥 동거하는 거예요. 이게 팩트에요. 이게 현실입니다. 이건 뭘 의미하느냐 하면, 어떤 경우라도 사랑이라 하는 것이 주님의 장벽 없이 나의 존재를 가지고 주님의 원하는 사랑과 소망을 끄집어 낼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자식을 낳았잖아요. 자식은 하나님이 손대지 아니하면 그 자식 구원 못 받습니다. 그 원인자가 누구냐? 바로 우리 자신이 원인자에요. 그런데 고마운 것은 바로 사랑도 소망도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작업, 구원 작업에 우리를 집어넣어줬다는 사실이에요. 집어넣어 준 거예요. 못났기 때문에,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자기 욕구와 욕망만 챙기는 그것 때문에 우리를 집어넣어주니까 이게 감사한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비로소 사랑이라 하고 이것을 가지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너는 지금 누구와 만나고 있고 누구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가를 묻는 거예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제가 신학교 다니면서 들었던 게 뭐냐 하면, 특히 ‘새 가정 만들기’ ‘좋은 아버지 되기’ 그런 사기에 말려들고 속아 넘어가기 때문에 그래요. 좋은 아버지는 없습니다. 그저 회개하는 죄인뿐이지. 최고 좋은 아버지는 날마다 주 앞에서 회개하고 자식들에게, 가족들에게 감사하는 아버지, 그게 최고의 아버지입니다. 기대는 하지 마세요. 그것은 주께서 하실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가진 자식을 맡는 하나의 통과용으로 하나의 인큐베이터로 우리를 사용하고 우리를 하나의 과정 속으로 집어넣는 것, 그럴 때 이스라엘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 그 보호하는 것이, 율법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겁니다.

 

그들은 그것도 모르고 율법을 뭘 로 봤습니까? 말로 이해한 거예요. 자기가 이참에 말씀 지키는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뽐내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새로운 상황이 주어지게 되면,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뭔가가 보호하고 있다는 것, 용서라는 이름의 보호가 있는데 그 보호막은 우리가 죄짓는 것 이상의 하나님의 과도한 용서로 이미 주어진 겁니다. 여인에게 향수병은 소중하지만 그 향수병마저 주님 발 앞에 깰 때 그 과잉되는 용서를 그 옆에 있는 바리새인들은 몰랐던 거예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예수님, 몇 번 용서하면 됩니까?” 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점점 늘여버려요.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 “일흔 번의 일곱 번 용서하라.” 그러면 다 합해서 몇 번이에요? 490번. 베드로는 악착같이 해서 490번 용서했을 거예요. “또 몇 번 용서하면 됩니까?” “일흔 번의 일흔 번의 일곱 번” 네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하나님의 용서가 넘쳐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생을 살아도 그 은혜를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깨닫지를 못해요.

 

율법이라는 것, 그것은 딱 한 가지만 아세요. 율법이라는 것은 ‘내가 나가 되는데 실패하게 만드는 것’이 율법입니다. ‘내가 율법 지키고 난 뒤에 내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 될까?’라는 것을 상상한 그것이 실패로 끝나게 하시는 것이 율법이에요. 율법 안에 뭐가 있습니까? 과잉된 제사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제사에 의해서 우리는 졸지에 보호받지 아니하면, 용서받지 않으면 구원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레위기 20장 같은 경우에는 설교하기가 정말 곤란해요. 본문 읽는 것조차 애들 앞에서는 숨기고 싶어요. 주께서 너무 심한, 선데이 서울 기사를 써도 너무 심하게 이야기했다 싶을 정도입니다. 그것은 아직도 우리에게 뭐가 남이 있느냐 하면, 우리 속에, ‘저는 점잖은 것만 보고 착한 것만 보고 그냥 이슬이나 먹고, ‘아침 이슬’ 말고 이슬만 먹고 사는 그 정도 되는 수준입니다.’라는 것을 아직도 견지하기 때문에 우리의 밑바닥까지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강력한 저지를 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주께서 말씀을 줄 때는요, 우리가 십자가로 말미암아 용서받는 그 죄인을 겨냥해서 말씀을 줬는데 우리는 그 십자가 안에 있지 않고 점잖은 나에게 주면서 “백숙모의 하체를 보지 말라.”고 하니까 “이것은 저에게는 너무나 심한 욕설 같습니다.” 이렇게 반기를 드는 그것, 그것은 자기 자리 아닙니다. 더 떨어져야 돼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했지요. 그 날개가 대한항공 날개지요? 날개 믿다가 계속 떨어지는 거예요. 날개를 잘라버리면 떨어질 것도 없는데. 우리는 계속 가능성, 내가 더 착해질 수 있는 가능성의 날개를 다니까 주께서는 날개를 자꾸 불에 태워버리는 거예요.

 

제발 도 닦지 마세요. 도 닦을 생각도 하지 마세요. 처음부터 여러분들은 이미 과잉으로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이미 우리가 산다는 것은 필연이 아니고 이것은 우연입니다. 하나님은 그 우연한 것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피에 주목하라고 우리를 아직도 매일같이 살게 하시는 겁니다. 진짜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를 살린 그 무엇, 더러운 인간을 구원받게 해주신 그 것이 우리 안에 장착되어 있는 겁니다. 레위지파의 제사장제도, 그것이 우리 안에 있을 때 그것이 예수 안에서의 새로운 주체가 되는 겁니다.

 

이제는 백숙모가 되었든 백숙부가 되었든 뭐든지 율법은 다 오세요. 다 받아주세요. 모든 말씀을 자유롭게 다 받으시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과잉으로 주신, 너무 넘치게 주신,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지요, 넘치게 주신 그 은혜의 풍성함 속에서 헤엄치시기 바랍니다. ‘이만큼 잘못했는데 이런 큰 은혜를 주셨구나.’

 

이제 교재를 봅시다. 어떤 분이 “목사님, 교재는 언제 합니까?” 하는데 벌써 많이 했어요. 이 교재의 내용이요, 처음에는 좀 알 것도 같지요? ‘진리와 몰인식’(p1) 하면 좀 어렵지요? 그 다음에 ‘3. 두 가지 시선이 만나는 곳에 진리는 있음’(p2) 하면 이것은 포기를 해버립니다. 무슨 말인지를 모르지요. 저 뒤에 가면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두 가지 시선이 만나는 곳에 진리가 있다는 이게 뭐냐 하면, 딱 하나만 알고 있으면 돼요. 내가 누굴 지켜보기 전에 먼저 그분이 나를 지켜본다는 응시, 그 분의 응시만 알면 돼요.

 

내가 그분을 관찰하기 전에 먼저 그 분이 관찰한 거예요.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그분을 관찰하게 된 이유는 그분이 나를 관찰해 왔기 때문에 비로소 그 결과로서 내가 그분을 관찰하게 된 겁니다. ‘주님이 누구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할 때에 사도바울의 주체가 바뀌는 대목입니다. 사도바울의 주체가 어떻게 바뀌느냐 하면, 예수님이 나타났지요. 그러면 사도바울은 내가 여기 있으니까 존재잖아요. 존재 앞에 누가 등장했습니까? 예수님의 존재가 등장하지요. 존재가 등장하면, 사람은 자기 앞에 누가 있으면 응시하고 그 다음에 관찰하고 그 다음에 뭐합니까? 분석하고 그 다음에 사귈 것인지 말 것인지, 뒤돌아 설 것인지 계속해서 말을 걸 것인지 결정하잖아요. 이게 존재가 갖고 있는 특징이거든요.

 

그런데 “주여,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어요. 응시하고 관찰한 거예요. “주여, 누구십니까?(너의 정체를 밝혀라)” 이것은 평소에 사울이라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했던 이야기거든요. 아까 이야기한 것 다시 합시다. 존재가 되면 율법을 통해서 존재가 어떻게 된다? 개방되지요. 개방이란 우리말로 뭡니까? 열림이지요. 타인에게 자기 자신을 열어서 그걸 가지고 소통하라, 작년부터인가 그 말이 유행이 되어서 그 말을 들으면 저는 소통, 소통, 굴뚝같은 느낌이 들어요. 소통하라, 소통하면 뭐가 됩니까?

 

서로가 차이는 있을망정 뭐는 없다? 차별은 없다는 거예요. 개코같은 소리 하고 있네. 무슨 차이와 차별을 따져가지고 말장난을 하고 있어요. 일반 윤리에서. 차별이나 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자본주의 사회란 뭐냐? 자본주의 사회란 자본이 스스로 자가 증식하는 그 체제가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자가 증식이에요. 자가 증식이라는 것은 가만있는 것이 아니에요. 계속해서 돈을 벌지 아니하면 자본은 다른 노선으로 빠지는 것이 자가 증식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이 참 고생 많이 했다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젊은 분들이 그 때보다 훨씬 고생을 많이 해요.

 

여러분, 고생이라는 것은 육체가 힘들다고 해서 고생이 아니에요. 고생은 경쟁만 있으면 무조건 고생이에요. 경쟁 없으면 고생 없어요. 다 같이 못살면 견딜 만 해요. 그런데 하나가 뛰쳐나가면 그 다음에는 다 죽었어요. 뒤 따라간다고.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미생>이란 드라마에서 우리 김종인 권사님이 예리한 것을 포착했어요. 평소에도 예리하시지만. 그 드라마에서 안영이라는 직원이 러시아말로 통화할 때 김종인 권사님은 뭘 봤느냐 하면, 그 드라마 속에서 그 여자가 연봉이 얼마인지를 찾아내는 거예요.

 

연봉이 5천이에요. 연봉이 5천입니다. 미생이니 뭐니 해도 중소기업 사원들이 보면 기가 찬 거예요. 5천이 저 정도 우울하면 그럼 나는? 연봉 2천 4백인, 2천 4백도 많다, 연봉 1천 8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존재는 없어요. 없고 일단 돈으로 환원해서 돈의 가치가 평등한 세계를 만든 겁니다. 그러니까 네가 석사를 나왔느냐, 박사를 나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백 원은 백 원이고 천원은 천원이에요. 누구 손에 있든지 간에. 세상에 이보다 더 평등한 사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얼마나 평등합니까? 인격은 날라 가고 없어요. 인격 같은 것은 없는 거예요. 돈 있으면 무조건 되는 거예요. 돈만 있으면. 우리가 지금 이런 사회에 살고 있어요. 자본이 스스로 증식되고 거기에 참여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사회에 살고 있어요. 국민소득 3만 불이라 하지만 그것은 내외간에 다 벌어서 그런 거예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아내가 돈 벌면 나는 집에서 살림하지.” 하는데 도무지 그런 세계가 아니에요. 말 잘못 꺼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내가 직장 나가면 살림 한다면서 “나 설거지 잘해.” 하거든요. 그 잘하는 설거지와 빨래를 자기 집에서 하지 말고 남의 집에 가서 해서 돈을 가져와야 돼요. 왜? 자본은 자기 증식이니까. 가정주부를 하되 남의 집에 가서 가정주부를 해서 그래서 돈을 가져와야 돼요. 그냥 집에서는 뭘 해도 그걸 백수라 하지 전업주부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 그런 사회에 살고 있어요. 존재가 개방된다? 말은 좋지요.

 

사도바울에게 주님이 말합니다. “네 존재, 요새 말로는 자본주의, 그 당시는 봉건사회지요, 빠져나올 수 없는 거기서 네 존재를 빼내줄게.” 빼내주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나는……, 관찰하거든요. 관찰하고 주목하거든요.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내가 남을 핍박하다니.” 나는 스스로 살려고 애를 썼는데, 스스로 의롭고 착하고 말씀대로 살고 여호와 잘 믿는다고 장담하고 살았는데 누구도 나를 보고 ‘네가 예수를 핍박한다.’는 주님의 낯선 응시, 내가 주님을 보는 것은 착하고 어진 분이거든요, 그래서 낯선 응시……, 전에 이야기했지요, 2미터 50쯤 공중에 떠 있으면 누구나 예수 믿는다고요. 그런데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와버리면 아무도 안 믿지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이미 우리는 핍박하는 그것을 우리 죄에 장착하고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이 땅에 태어나기를. 사도바울은 땡 잡았어요. 그걸 남에게 알려주지 않고 우연히 자기를 찾아온 거예요. 왜냐, 평소에 응시하고 있었어요. 처음부터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왜? 창세전에 예정된 자이기 때문에. 그게 디모데전서에 나옵니다. 디모데전서에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창세전에 하나님의 은혜로 택정함을 받았기에 나는 ‘네가 죄인 중에 괴수’(딤 전 1:15)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공식 이상하지요? 창세전에 택했기 때문에 내가 이 땅에 살면서 할 수 있는 내 말은,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나 같은 인간도 긍휼을 입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더 이상 우리가 내 쪽에서 주님을 관찰한다든지 판단한다든지 어떻게 다뤄볼까 하는 것은 다 끝났지요. 주님이 주체가 되고 나는 주님이 내 안에 주체가 되는 거예요. 이거 하고 십분 쉽시다.

 

원래 십자가가 우리 바깥에서 일어난 사건이거든요. 그런데 주님이 찾아오고 난 뒤에 내 바깥에 있는 십자가가 드디어 내 안에 꽂혀버린 십자가가 된 겁니다. 꽂힐 때의 그 과정이 어떤가? 그것은 정확하게 십분 뒤에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