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2015겨울수련회 6강 본문
녹취:오용익
2015겨울수련회 6강
바깥에 있는 십자가가 내 안에 들어오면서 무엇이 붕괴하느냐 하면, 그동안 내가 나를 구축했던 체계가 깨어집니다. 깨어질 때 두 가지가 깨져요. 시간이 깨지고 공간이 깨집니다. 시간 공간 이야기를 꺼내놓고 제가 걱정이 먼저 늘어져요. 시간 공간만 하게 되면 추상개념이 되어서 설명하기가 굉장히 힘들지만 그걸 알기 때문에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공간개념에 있어서는 비어 있는 공간에 내가 있다는 이것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공간개념이에요. 여기 비어 있는 방이 있는데 우리들이 여기 모여 있다고 이렇게 보는 겁니다.
‘공간은 이미 정해져 있고 어떻게 우리가 채우는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가지고 뉴튼의 공간이론, 또는 칸트의 공간이론, 이렇게 설명하는 겁니다. 공간이 절대적으로 있다는 이것이 엉터리라는 것은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알려지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에 의해서 이것이 깨져버렸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상상이상으로 정말 희한한 논리가 성립돼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서 이 공간을 죽 이어보니까 저쪽에 나의 미래의 모습이 보인다는 겁니다. 이것을 강의할 때마다, 설명할 때마다 참 설명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데 마침 <인터스텔라>라는 영화가 나와서 ‘옳다구나’ 싶어서 그 영화를 일부러 평하면서 거기에 동원된 물리적 이론들을 같이 실어놓았어요. 그런데 그게 더 어려워요.
그 영화도 어렵지만 거기 동원된 논리도 어려운데 거기에 상대성이론들이 죽 나와요. 공간이 비어있고 그 빈 공간에 내가 있다는 이것이 상식이 아니고, 있는 내가 공간을 새롭게 만들어요. 이걸 ‘라이프니츠 공간론’이라고 하고 이게 ‘상대성이론’인데 내가 여기 있으면 공간이 새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공간이 휘어진다는 아주 희한한 이야기를 하는데 공간이 어떻게 휘어져요? 공간이 TV화면입니까, 휘어지게? 공간이 휘어진다는 겁니다. 그런 말을 제가 한 것이 아니고 현대물리학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요. 공간이 휘어진다고.
그리고 빛은 직진으로 가기 때문에 휘어진 공간을 따라서 빛은 직선이 아니고 곡선으로 되어 있다는 거예요. 직진한다며? 직진한다면 직선이어야 하는데 직진한다고 해 놓고 직진하기 때문에 빛이 완전히 직구가 아니고 커브가 되는 거예요. 하여튼 공간이라는 것은 내가 있으면 그 있는 내가 공간을 새로 만들어버립니다. 이 말을 성경 해석에 적용시켜 버리면 예수님 계심에 예수님의 공간이 새롭게 만들어집니다. 이것을 가지고 ‘예수 안’이라고 하고 이것이 바로 그동안 숨겨 놓았던 천국입니다.
천국은 있는데 숫자 채우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천국을 스스로 예수 중심으로 만들어갑니다. 그렇게 만들어지면서 예수님께서는 그 만들어진 흔적을 우리에게 남기지요. 그 흔적을 어디에 남기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시간, 공간에다가 그 흔적을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인터스텔라> 영화에 보면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 그리고 옛날에 나온 영화, <사랑과 영혼(ghost)>라는 영화에 보면 유령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애를 써서 알려주는지, 유령이 자꾸 애를 쓰니까 나중에 동전이 하나 움직였지요.
이것은 물리적 세계와 영적 세계의 그 접촉점을 물리적 현상으로서 설명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습니까? 성경에서는 그렇게 천사 있음을 “천사 있잖아! 천사 있다고!!” 하니까 천사가 있는 줄 알았어요? <인터스텔라>라는 그 영화에서는 서가의 책을 다른 차원에서 움직이니까 책이 툭 떨어지는 것으로 아하, 다른 차원, 5차원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물리학에서 인간은 따져보면 파동으로 되어 있고 세포내에도 파동이 있어서 저쪽 세계의 파동과 만남이 되면 그 파동이 우리에게 의식으로 전환되어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다고 논리를 펴거든요. 그것은 과학자들이 대부분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만 영화에서는 나왔어요.
예수님께서 천국이 있다는 그것을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남겼습니까? 흔적을 남길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물리적 환경이기 때문에 흔적을 줬지만 우리는 그것을 육으로서는 영의 세계를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미세한 소리, 바람 부는 것, 엘리야에게 온갖 것을 했지만 엘리야에게는 그 어디에도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에게 세미한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지요.(왕상 19:12) 음성이 들려오면서 엘리야는 파악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음성 들릴 때 엘리야 옆에 우리가 서 있다면 우리가 들었겠습니까, 못 들었겠습니까? 못 들어요. 왜? 새로운 주님의 공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사울이 말을 타고 다메섹으로 내려가다가 말에서 떨어졌지요. 다른 사람은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은 어떤 남성의 음성이 들린 것이 아니고 그냥 소리였다고 했지요. 우레 소리 다섯 표, 본인은 주님의 음성이었다고 한 표. 여기서 어느 것이 진리입니까? 다수가 진리지요. 그래서 물리는 진리가 될 수 없어요. 왜, 다수가 납득을 해야 된다는 조건이 붙어 있기 때문에 혼자 주장하면 그것은 미쳤다고 되는 거지요. 공간은 이렇게 쉬워요. 이것도 쉬운 것은 아니지만 주님이 만든 공간은 인간으로서는 그 음성,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사람에게만 알 수 있다, 둘이 교류가 된다.
그걸로 되었는데. 되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되었다고 치고, 그 다음에 시간론 같은 경우에는 더 심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시간론의 경우는 이렇게 보면 돼요. 과거에서 현재로 그 다음에 미래로, 이렇게 진행되는 시간론을 갖고 있습니다. 과거에서 현재,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고 미래는 앞으로 오지 않은 것이고 현재는 바로 지금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흘러간다. 이렇게 시간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이 시간의식은 깨집니다. 어떻게 깨지는가 하면, 이걸 가지고 공정이라는 말을 해요. 공정이 뭐냐 하면, 과거-현재-미래가 되면 항상 과거는 원인에 해당되고 현재는 그 결과가 되거든요.
내가 알고 있는 원인과 내가 알고 있는 결과를 연결시킬 때 나오는 이것이 시간이라는 겁니다. 이게 시간이에요. 시간은 다른 말로 하면 내 주체 때문에 생기는 것이 시간인데 이게 나한테는 역사가 되는 겁니다. 여기서 나온 것이 간증집회지요. 기도했더니만 응답받았다는 거예요. 대표적인 잘못된 시간관입니다. 제가 어느 설교 때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기도응답은 없다고요. 기도가 없다는 말은 안했어요. 기도 응답이 없다고 했지. 기도 응답이라는 것은 없어요. 왜냐하면 시간, 주님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기 때문에.
원인이 이쪽에 있어요. 원인이 미래에 있고 현재는 그 원인을 통해서 도출된 거지요. 그러면 이 전체가 뭐냐 하면, 이 전체가 그림자가 되는 겁니다. 그림자가 되고 모형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그 원인을 미래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게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지요. 그 때는 희미하게 봤다. 옛날에는 오늘날의 거울이 아니라 금속을 닦아서 희미했어요. 잡티도 많았고.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지만 그 때는 어떻게 본다고요? 그 때는 얼굴을 맞대는 것처럼 똑똑하게 볼 때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은 이미 그 미래에 의해서 다 주어진 거예요. 그런데 이걸로 끝나면 주님의 시간이 어려운 것이 없지요.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뭐가 있느냐 하면, 여기에 순간이 있습니다. 순간이 있어요. 순간이 있다는 말은 현재는 미래에서 주어진 것이라고 하고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순간이 순간으로 개입이 되어버리면 현재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도 쓸모없는 것이 아니고 그대로 유지가 되어야 되고 이것을 쪼그려내는 잠입으로 주께서 오십니다. 그러면 우리에게서 뭐가 날라 가느냐 하면, 과거-현재-미래라는 것은 순식간에 다 날라 가버려요. 과거가 반복되지는 않습니다. 과거는 반복되지 않는데, 같은 일은 반복되지 않는데 뭐는 반복되느냐 하면, 사건은 반복돼요.
사건이 올 때는 어떻게 옵니까? 순간으로 오겠지요. 순간으로 오면 어떻게 되는가? 알파요 오메가라, 이 전체가 순간 안에 담기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순간 속에 담긴 전체가 뭐냐 하면, 나를 있게 한 원인이 되지요.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생각하시고 신약의 사도바울의 편지들을 보시면 비로소 이해가 돼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고후 12:2) 그 모든 것은 천국이라는 것은 내가 만들고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잠입하고 내 눈을 띄우는 거예요. 나에게 자극을 주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얼굴이 천사같이 되었다. 주님이 나타나셨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로마로 갈 때 주님이 곁에 서서 하는 말이, “네가 이런 것으로 겁을 내지 말라. 너는 필히 로마 가이사 앞에 서리라.” 하는 언질을 받습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행 27:24)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가이사 앞에 선다는 이야기는 주께서 이미 아시잖아요. 주님의 계획이 이미 잡혀 있지요. 잡혀 있는데 왜 풍랑은 일어나서 사람 잡습니까? 지금 사도바울에게 가이사 앞에 서는 그것이 네 목적이 될 수는 없다는 거예요. 지금 네가 주님 앞에 서 있는 것이, 네가 가이사 앞에 서던 안 서던 관계없이 이미 너는 목적 속에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네가 목적을 달성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목적이 너를 달성한 채로 움직이고 있는데 네가 따로 “주여, 잘하겠습니다. 반듯하게 살겠습니다.”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어떤 환란이 있더라도 내가 능히 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 일에서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주님이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이걸 여러분 인생에다 적용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어떤 직업을 선택했습니까? 어떤 직장에 다닌다든지 어떤 일을 결정했으면 그것을 여러분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여러분은 시험에 든 거예요. 여러분은 그걸 절대로 견뎌낼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존심과 관련되어서. ‘실패하면 안 돼.’ 이런 식으로요.
앞에다 “하면 된다.” 하는 것을 걸든지,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래가지고. 무슨 다단계도 아니고 그런 것을 죽 붙여놓고 그렇게 되어버리면 이것은 여전히 본인의 시간관과 공간관을 유지하는 셈이 돼요. 인간의 시간은 뭐라고요? 과거가 원인이 되어서 필히 그 원인에 합당한 결과물을 내놓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내가 잘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잖아요. 사람이 늙으면 죽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죽는데 일찍부터 그걸 삽입해 버리면 이미 우리는 죽었다, 죽음을 필연으로 보고 우리가 산다는 것을 우연으로 보자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죽었다고 할 때 내가 늙어죽는 것을 걱정할 필요 없이 왜 죽어야 되며, 그 죽이시는 이유가 뭐냐를 알지요. 그게 뭐냐 하면, 살려주시기 위해서, 영생 주시기 위해서 죽이시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순간 속에 알맹이가 들어 있는 겁니다. 주님의 말씀이 오게 되면……, 자 구원파의 경우를 봅시다. 구원파의 경우를 보게 되면, “당신은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도를 아십니까?’ 그 소리하고 똑같은 소리인데 “당신은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나는 1986년도 7월 14일에 구원받았다.” 한다면 그 다음 7월 15일부터는 구원을 받았으면 할 게 없어요. 구원받았으면 다 됐잖아요. 유병언이나 섬기고 그래야 됩니까? 구원파에 돈 내서 사업자금 대줘야 합니까? 어떻게 됩니까?
“언제 구원 받았습니까?” 하고 말하는 자체가 뭐냐? 인간이 만든 시간관을 주님께서 긍정한다는 말밖에 안되거든요. “언제부터 당신이 당신의 시간을 완전히 접었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돼요. ‘언제부터 앞으로 내가 몇 년 더 살 것인가? 앞으로 5년 뒤에 뭘 할 것인가?’ “아이고, 의미 없어.” “그게 의미 없다는 것을 언제부터 알게 되었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받아야 되지요.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답변하지요. “네가 뭔데 내가 그걸 너한테 알려줘? 너는 알 것 없어. 너는 너대로 하세요. 나는 내 시간대로 할 테니까.” 이렇게.
“당신은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할 때 ‘언제’ 빼고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까?” 하고 묻는 자체가 존재가 존재한테 물을 질문이 아닙니다. 그런 질문을 해서는 안돼요. “너나 잘하세요.” 그렇게 해야 돼요. 구원이라는 것은 주님한테 소유되어 있지 이게 개인소유용이 아니잖아요. “당신은 언제부터 낚아 채였습니까?” 이런 식으로 묻는 것인데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십자가가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리면 사도바울은 언제부터 구원받았냐는 답변을 이렇게 합니다. “창세전부터 이미 예정되어서 구원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시간은 날라 가버리고 나의 시간은 주님의 시간의 일부로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미래라는 것은 내가 염려하거나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아까 이야기한 것을 다시 방금 이야기한 것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사도의 경우에 날마다 주님과 함께 동행 했는데 주님의 계획이 있어요. “너는 가이사 앞에 서리라.” 이게 목적이 되어버리면 그 목적 앞에서는 원인 결과가 그 안에 다 들어 있어요. 그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난 시간 끝에 뭐라고 했습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이라고 했지요. 리카도의 고전경제학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돈이라 하는 것은 노동의 대가로 보는 겁니다. 노동의 대가로. 돈을 번다는 것은 내가 노동한 만큼 돈을 번다는 것이 고전경제학인 반면에 마르크스의 경제학은 뭐냐 하면, 시장원리에 따라서 돈이 요구되는 노동을 해야 그게 돈이 돼요. 집에서 짚신 만든다고 하루 10시간씩 일해 봤자 시장에서 그걸 요구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것은 돈이 안돼요. 가치가 없는 겁니다. 사람들이 일을 오래 한다고 일 많이 한다고 하는데 여러분이 직장생활 하면서 일을 많이 합니까? 아니면 자영업을 하면서 일을 많이 하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직장생활에서는 꼬박꼬박 토요일과 일요일에 놉니다. 자영업 하면 본인이 노는 것이 용서가 안돼요. 교회고 뭐고 없어요. 본인이 용서가 안 된다니까.
그런데 마음고생은 어느 것이 심해요? 직장생활에서 미생이니 완생이니 그 따위 소리 하지만 자영업을 하면 고생해도 너무 좋아요. 돈이 들어오니까. 제가 자본주의 사회를 언급했습니다. 왜 언급했는가? 이번 시간에 하나님의 현실을 이야기해 봤자 이것만 이야기해버리면 우리는 그걸 어디에 집어넣느냐 하면, 자본주의 사회에 집어넣어서 ‘이런 식으로 내가 미래에 행복해야지.’ 이런 틀로 갈 가능성이 많아요. 그래서 두 개를 다 이야기한 겁니다. 이 세상은 이쪽의 세상과 도저히 소통이 되지를 않습니다. 전혀 섞일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시간은 뭐냐 하면, 중첩이에요. 서로 다른 질이 함께 섞이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롬 12:2)는 언질을 주시면서 주님의 세대와 이 세대가 같이 가도록, 병행하도록 조치하십니다. 그러면 그 조치한 것이 어디에 잠입되는가? 우리의 주체 내에 형성이 돼요. 형성이 되면 우리는 ‘주님 이용해서 내가 앞으로 이 세상에서 성공해야지’라고 하다가 다시 돌아서서 ‘아니야. 그럴 필요가 없어. 나는 주님만 있으면 돼. 오늘 밤에 죽으면 낙원에 가는 것이 좋아.’라고 하는 동시에 다시 돌아서서 ‘그래도 이왕 구원 받은 것 맛있는 것 사먹고 봐야지.’라고 생각하다가 ‘아이고, 재미있는 것도 다 시시하더라.’
우리 십자가마을분들 만나면요, 참 은혜로운 말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목사님, 재미있는 것이 없습니다.” 목사님 시키는 대로 드라마 봤는데 그것도 재미없고 청담동도 다 끝나버리고 세상에 재미있는 것이 없다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재미있는 것 생길 겁니다. 손자가 잘 되면 재미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지금 이한례 집사님은 그것도 아니랍니다. 세상에 재미있는 것이 하나도 없대요. “그러면 죽으실래요?” “아직 그것은 아니고.”
이렇게 보게 되면 이렇게 나옵니다. 시간은 뭐냐? 주님의 시간 속에 각기 다른 층들이 있다. 마치 시루떡처럼. 이 시간에는 다른 세대가 중첩되어 있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주체가 되어서 우리는 이 속에서 왔다 갔다, 왔다 갔다, 늘 이렇게 흔들리게 되어 있어요. “좀 더 고정되면 안 됩니까?” 고정될 수가 없어요. 흔들어줘야, 옛날의 도시락처럼 밥 넣고 고추장 넣고 흔들어줘야 맛있듯이 이렇게 해줘야 거기서 우리의 공로가 사라지고 주의 은혜로만 구원받지요.
그래서 여러분이 이 땅에 사시면서 저나 여러분이나 고생 좀 합시다. 그 고생이 딴 게 아니고 세상적인 성공과 희망을 우리 몸이 항상 방출하고 있어요. ‘네가 복음 안다고 치고 복음은 알면서 집에 돈은 떨어졌는데 네가 어떻게 할래? 복음이 돈 되는 것도 아닌데.’ 이런 생각이 자꾸 들게 만들어서 ‘그래. 가만있으면 안 돼. 뭐라도 해야지.’ 해서 하다가 사기 당해서 몇 천만 원 꼴아 박고 또 주님한테 따지고 ‘어째서 이렇게 하십니까?’ 혼자 따지다가 주님한테 얻어맞고 ‘주여! 이것으로 감사합니다.’ 하지만 돈 잃어버린 것은 3년 가고 감사는 5초 가는데 ‘그래도 아깝네. 어떻게 회복할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좋은 사람 있다고 소개해줘서 같은 집사라고 믿었다가 이번에는 6천만 원 사기 당했네요.
그제서 눈에 띄는 것이 “돈을 사랑하지 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딤전 6:10) 그런 구절이 막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런 일이 없었으면 그런 구절이 기억이 안날 텐데 갑자기 사기 당하고 난 뒤에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고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딤전 6:8)는 이게 그냥 들어오는 거예요. 이런 중첩된 시간관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사사기에도 나와요. 민수기에도 나와요. 민수기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는데요. 그 전에 사전정지작업을 해줘야 돼요.
사사기 같은 경우에는 이 세대에 푹 젖었어요. 너무 잘 먹고 잘 사니까. 그런데 이 세대가 자기 것을 야금야금 다 뺏어가네요. 뺏어가니까 이 세대가 주님 앞에 돌아서지를 않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역량대로 다 해요. 자존심이 있어가지고. 뇌물도 줘봤다가 뭘 어떻게 또 하다가. 결국은 다 털어먹고, 다 털어먹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주여! 도와주소서.”라고 하거든요. 자기는 하늘에서 천사라도 좀 보내줄 줄 알았지요. 도와준다고 내미는 그 대책이 뭐냐? 옆에 있는 평범한 이웃사람이 졸지에 구원자로서 등장하네요.
평소에 그 사람 다 알고 있거든요. 시시한 인간인데 시시한 인간이 등장해서 난데없이 승리를 낚아챕니다. 특히 이건 평범한 사람 정도가 아니에요. 아주 깡패, 입다 깡패가 갑자기 지도자가 되어서 민족을 살려내지요. 입다는 자기가 했다는 자화자찬을 하기 위해서 제일먼저 마중 나온 사람을 번제물로 잡겠다고 했어요. 개나 소나 이런 것이 나올 줄 알고 했는데 세상에 자기 딸이 나올 줄이야. 자기 딸이 나왔을 때 우리 같으면 “아, 그것은 취소합니다. 하나님, 이것은 아니지요.” 딸 대신 다른 것을 잡겠는데 입다는 자기 딸을 잡아버립니다.
그래서 딸은 죽습니다. 죽으면서 아버지를 원망하지요. 아버지의 되도 않는 객기 때문에 죽지요. 결국 구원자가 입다가 아니고 입다의 딸로 전환되는 시점으로 갑니다. 그 잘난체 때문에 핍박받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새롭게 발생시킨다는 거예요. 우리가 주님의 복음이 좋다고 하면서 다시 세상에 나갈 때 그만큼 다른 누가 희생될 요소들이 우리한테 있는 거예요. 다시 돌아오게 되면 그동안 내 눈에 띄지 않았던 희생된 것이 이렇게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값싼 돈으로 바꾸려고 그렇게 시도했건만, 은혜의 가치를 그렇게 모독했건만 그걸 통해서 은혜에 대해서 우리가 손해보고 욕했던 대목이 점점 더 많아졌다는 것을 우리가 느낍니다. 그래서 갈수록, 우리가 살면 살수록 결국 죄만 더 늘어나고 증가될 뿐입니다.
자, 민수기 6장을 봅시다. 민수기 6장을 생각하면서 갑자기 뉴저지가 생각나네요. 나실인 이야기입니다. 저는 나실인 하면 생각나는 것이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하는 어버이노래에요. “♬나실제 괴로움……” 할 때의 그 나실, 인. 나실인이라는 것은 바친다는 뜻입니다. 바쳤다. 드렸다. 바치면 되잖아요. 바치면 되는데 나실인은 바칠 때 새로운 시간관을 품고 바쳐집니다. 그것은 기존의 과거-현재의 시간관이 아니고 미래-현재-과거로 이어지는 장차 올 메시아를 품은 시간관을 품고 나실인이 바쳐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이스라엘 내에 두 개의 이질적인 시간층이 형성되지요.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살리느냐? 나실인이 만드는 시간이 나머지 사람들의 시간을 살려내는 겁니다. 나실인의 시간측정은 시계로 하는 것이 아니고 째깍째깍, 손목시계로 하는 것이 아니고 머리카락 가지고 해요. 머리카락의 길이가 시간의 길이를 말하는 겁니다. 머리카락의 길이요. 그러니까 부재하지요.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부재한 것이, 없는 것이 있는 것을 살려내기 위해서 나실인이 처음에는 머리카락이 짧아요. 없는 거예요. 없는 것이 점점 더 길어지면서 “어? 있네? 있네? 나실인 세대가 있네. 우리 속에 그게 함유되고 포함되어 있네.” 그 포함되어 있는 그것이 그 당시의 제사제도를 해체해버립니다.
죽은 짐승이 너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결국 살리는 것은 양이나 소가 아니고 너 대신 죽어야 될 사람이 너를 살린다는 거예요. 그 말이 뭐냐? 네 힘으로는 네가 살 가치가 있다, 없다? 없다는 겁니다. “내가 너를 살려줄게”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제일 큰 오해는 그겁니다. 주님이 우리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은 주님을 살려내시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은 주님만 구원이지 다른 사람은 구원되지를 못합니다. 목소리 크게 낸다고 알아먹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리스도의 몸만 구원된다는 이야기에요. 우리 몸은 구원 안돼요. 그게 나실인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나실인은 머리카락과 더불어서 삼종세트, 머리카락과 포도주와 그 다음에 자기 죽은 가족의 시체를 만져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아들의 도리를 하면 안 돼요. 집안 일가친척과 결별해야 됩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새로운 시간대에서는 오실 메시아는 이 땅의 어떤 부모와도 관계되지 않는, 엮이지 않는 분이 메시아로 오시는 거예요. 예수님의 어릴 적 행적이 일반적인 인간으로 볼 때는 참 되바라졌다는 내용이 나오지요. 아들을 사흘 동안 잃어버렸어요.(눅 2:46) 소문에 예수님이 성전에서 어른들과 함께 이야기를 한다고 했어요. 꼭 솔다 같아요. 어른들과 같이 말씀을 이야기하고 있던 거예요.
그러니까 나무라면서 “우리가 얼마나 널 찾는다고 애썼는지 아느냐?” “왜요?” “너는 우리 패밀리, 가족이잖아. 내 가족이잖아. 난 이런 아저씨가 아니야. 난 아버지야. 여긴 너의 엄마고. 얘가 왜 이래? 어디 가면 간다고 해야지 그냥 잃어버리면 우리가 얼마나 너를 찾겠느냐?” 거기서 예수님이 정말 되바라진 답변을 했지요. “우리 아버지 여기 있는데?” 우리아버지가 여기 있다는 거예요. 나실인은 죽은 친척들의 시체를 만지지 말라고 했지요. 예수님은 한술 더 뜹니다. 살아 있는데도 안 만져요. 살아 있는데도 관계 끊겠다고 작심하고 나서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어떤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너 따라 오너라.” 할 때 그 제자가 하는 말이, “예수님, 따라 가겠는데요. 마침 따르고자 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네요.” 예수님 뜻은 이거예요. 제자가 따라올 그 시점에 예수님께서 일부러 그 제자의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제자에게서 어떤 발언이 나오는지 보시기 위해서 죽였어요. 제자가 하는 말이, “따라가겠는데요.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따라가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할 때에 예수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답변하지요. 뭐라고 답변하십니까?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고 산자는 나를 따르라.”(마 8:22)고 해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네가 죽을래, 살래?” 그런 말이에요. “네가 지금 죽은 자에 속했느냐, 산자에 속했느냐?” 다른 말로 하면 “네가 이 세상의 죽은 세대에 속할래, 산 세대에 속할래?” 그런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바에 의하면 “네가 정실부인에 속할래, 아니면 하녀출신이고자 하느냐?”라고 묻는 겁니다. 글쎄 그 말 듣고 그 제자가 갔는지 안 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교회 좀 오래 다니고 특히 권사님들 보면 성경말씀 지킨다고 그렇게 애를 쓰고 또 선교단체들 많거든요. 성경말씀대로 산다고 애들 쓰고 하는데 이런 단체들이 자기가 지킬 것만 지키지 아버지 장례에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지내게 하라.”는 이런 단체는 아직까지 못 봤어요. 물론 돈 안 줄때는 아버지는 내 세대가 아니라고 하겠지만 돈 줄때는 문제는 달라지거든요.
우리가 성경말씀 지킬 때는 나는 이 세대에 속했다고 자부하고 한 번 말씀 지켜보세요. 다 실패로 끝나요. 이 세대에 속하는 것은 주님의 개입으로 되는 것이지, 이 말을 오늘 몇 번 하는지 몰라요, 주님의 개입으로 선이 그어져야 우리가 성도라고 인식을 하는 것이지 우리 자력으로 하게 되면 안돼요. 왜, 존재 안에는 우리의 과거가 들어있고 우리의 시간관이 들어있고 우리의 공간관이 들어 있기 때문에, 나만의 독자적인 현실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강의 처음부터 해볼까요?
강의 처음에 제가 무슨 이야기한지 알아요? 인간은 자기로부터 나간 행동은 절대로 자기 노선 바깥으로 못나간다고 했지요? 반드시 자기의미로 회수가 되고 환원되게 되어 있습니다. 뭘 지킨다고? 주의 말씀을 지킨다고요? 뭐 개방한다고? 율법으로 개방한다고요? 이웃이여 오라! 내가 사랑해주노라! 필요 없어요, 그거. 안돼요. 죄인을 보호하는 그 제사장의 장벽을 놓쳐버리면 다 놓친 것이 됩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우연이지 필연이 아니에요. 봐줘서 살리는 겁니다. 봐줘서.
흔히들 말하지요. 덤으로 산다고. 덤으로 산다는 그것도 성에 안차요. 덤으로 산다고 하니까 “주여,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내가 알아서 살겠습니다.” 꼭 그런 인상 같은데 그런 뜻이 아니에요. 덤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덤이 아예 없어요. 매일같이 살려줘요. 매일같이. 과거는 반복 안 되지만 뭐는 반복된다 했습니까? 사건은 반복되는 거예요. 왜, 사건은 우리의 과거-현재-미래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순간순간이기 때문에. 완전히 스카이 콩콩이라. 매일같이 순간이 오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저촉을 받기 때문에 매일같이 은혜를 받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우리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명자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실인에서 세 가지죠. 하나는 뭐냐 하면, 머리카락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없는 시간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거지요. 새로운 세대가 눈으로 보이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아까 한 이야기, “영과 육이 만났을 때 무엇이 보입니까?”라는 질문, 수능문제로 한 번 내볼까요? 목사고시로 내 볼까요? “영 쪽과 육이 만날 때 무엇이 보입니까?” 1번, 독을 마셔도 해롭지 않다. 2번. 손에 머리를 얹은 즉 병이 나았다. 지금 마가복음 16장의 이야기입니다. 3번, 방언을 한다. 4번. 갑자기 숭숭 빠진 머리카락이 다시 나왔다. 5번. 없다. 몇 번 입니까? ‘없다’가 정답이에요.
왜냐하면 그것을 응시하고 관찰할 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만 관찰하면 되지 내가 응시할 필요는 없어요. 주께서 우리에게 등장하게 된 나 자신, 그동안 내 시선으로 봤던 나가 주님의 성령으로 다시 나를 보게 하는 그것이 유일한 접촉되는 접촉점입니다.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내가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의 결과물로 나를 볼 수 있는 그런 안목이 생긴다면 그게 유일한 접촉점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가 배고플 때 밥을 주었느뇨? 누가 내게 목마를 때 물을 마시게 했지?” 조용할 때 관찰자가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관찰자이기 때문에. “바로 여러분!” 완전히 윤복희야. “내가 외로울 때 누가 위로해줬지? 바로 여러분!”인 거예요.
그 소리 듣고 누가 놀랍니까? “아이고, 놀래라.” 천국 간 사람이 놀라면서, 서로 돌아보면서 수군거리면서 “주여, 제가 언제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습니까?” 네가 한 것을 나한테 한 것으로 내가 원인과 결과를 바꾸어놓으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뭘 한 게 있어서가 아니라 한 게 있는 것으로 쳐주시는 주님의 배려하심, 그것이 주님의 과분한 용서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무심코 한 것마저도 주를 위한 일로 쳐주실 때 우리는 이미 육적의 차원이 아니고 영적으로 일방적으로 은혜를 받는 그런 대상자로서, 관찰의 대상자로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발 고민하지 마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화내지 마세요. 그런 허락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화내거나 고민하거나 분노하거나 근심할 것을 우리한테 허락해준 적이 없습니다. 화낸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시간을 고수하겠다는 것인데 자기가치를 유지한다는 그런 것은 주님한테 통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나실인의 한 가지는 뭐냐 하면, 포도주와 관련된 것은 일체 접근해서는 안돼요. 여기 보면 상품 종류가, 포도주, 독주, 그 다음에 독주의 초, 생포도, 건포도, 포도나무와 관련된 것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라는 것(민 6:3), 포도와 결별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포도 없는 몸이 되겠지요. 포도 없는 몸이니까 이 사람은 약속의 땅에서 태어나도 주님이 나실인이 되는 순간 어디 출신이냐 하면, 약속의 땅 들어가기 이 전의 약속의 땅 바깥에 포진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형제자매에서도 끊어졌어. 약속의 땅 하고도 끊어졌어. 단지 주어진 것은 뭐냐 하면, 자기 머리카락에 들어갈 하나님의 화목제물, 그것만 겨냥하고 있을 때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려우니까 이건 쓰지 맙시다. 그냥 쉬운 말로 합시다. 그냥 외부인사라고 보면 돼요. 외부인사.
외부인사 내부인사로 전환될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을 외부인사로 보지를 못하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금, 경계선은 뭐냐? 외부인사가 내부인사와 이질적인 것을 보여줄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의 주체 안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다른 이질적인 것이 여러분 속에 꿈틀거린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이 기쁜 소식을 이제서 전하게 되어서 참 죄송합니다만.
이질성이 느껴져요. 이것은 남한테 이야기할 필요 없어요. 본인만 알고 있으면 돼요. 부부간에도 이야기하지 마세요. 괜히 부부한테 이야기하면 아내라도 착각을 해서 “우리 남편 구원받았다.” 해서 간증하면서 돌아다녀서 짜증나요. 그냥 혼자만 알고 있으세요. 그냥 혼자만. 그리고 바깥에 이야기할 때는 “나는 구원받았다.”고 이야기하지 말고 “나는 죄인입니다.” 그렇게 하세요. 명함에 쓰세요. “나는 죄인.” “010-3511……, 나는 죄인.” 이렇게 죄인을 내미세요. 구원받았다고 내밀면 또 구원파가 달려들어서 안돼요. “언제 구원받았습니까?”라고들 하니 “나는 죄인입니다.”
약속의 땅 바깥에 있다는 말은 주님의 시간에 의하면 바깥에 있다, 가 아니라 미래에 있다, 가 돼요. 그 시대상 바깥에 있다는 말은 미래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미래에 구세주가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의 화목제물 되기 위해서, 화목제물을 완성하기 위해서 침투한 그 분이 바로 이 나실인의 최종완성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합니다. 누가복음에 나오지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눅 22:18)
이게 교재에 나오는데요. 8페이지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22:18절에는 예수님의 피를 나실인의 피로 여겨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도록 했다.” 여기서 성경 해석하는 사람들이 제일 크게 실수하는, 실수가 아니지요, 엉터리로 해석하는 것이 뭐냐? ‘……까지’에서 이 ‘까지’를 인간의 시간론에 의해서 해석해버립니다. 그게 아니에요. 침투에요. 인간의 시간론에서 ‘……까지’라는 말은 그 때까지 하고 그 뒤부터는 필요 없다는 말로 이해하는데 성경에서 ‘……까지’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했던 모든 것은 하나의 결과물이고 ‘까지’에서 주어진 그 상황이 처음부터 원인이었다는 거예요.
“너는 이제부터 사흘까지 숙제 해.”라는 말은 보통 무슨 뜻입니까? 사흘까지만 숙제하고 그 다음부터는 숙제 안 도 된다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성경적용어로 하게 되면 사흘까지 숙제하라는 말은 “이제 사흘 뒤부터 본격적으로 숙제를 더 많이 해.”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사흘 뒤에는 이제는 숙제 하라는 말도 필요 없이 자동적으로 숙제 하는 사람이 되어라.” 그런 뜻입니다. 휴, 진짜 설명하는 내가 힘들다. 성경에서 ‘까지’라는 말은요, ‘……까지만’ 그런 뜻이 아니고 지금까지는 네가 이 땅에서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그렇게 해 왔던 것을 자동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되었다는 겁니다.
‘천년이 차기까지’라는 요한계시록 이야기는 천년이 차고 나면 그 다음에는 대 환란이라는 되도 않는 소설이 막 나오는데 그런 뜻이 아니고 천년왕국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하늘나라 왕 노릇 한다는 뜻이에요. ‘까지’가 그런 내용이에요. 천년 후에 누구는 재림하고 나머지는 패자부활전을 해서 그 다음부터는 유대인을 조져서 유대인을 “회개 안 해?” 하고 목 졸라서 “주님을 욕보였습니다.” 하면 “이제야 회개하는구나.” 이렇게 달래서 온 이스라엘이 다 구원받는다? 여러분, 팬다고 믿습니까? 팬다고 믿을 것 같으면 진작 패지? 팬다고 믿을 성 싶으면 유대인에게 원자폭탄을 터뜨려버리지요. 그러면 다 믿을 건데? 권총 들고 협박한다고 믿을 것 같으면요. 교회는 나올 수 있어요. 그런데 믿는다는 것은 그런 식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은 이미 우리 손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믿지 말라는 이유가 우리가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우리한테 해버리면 우리는 거기서 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에 예수 믿지 말라는 이야기를 제가 하는 거예요. 예수 믿으라는 말은 미래에서 이미 믿게 된 자기 때문에, 예수 믿으라는 말은 이미 미래에서 믿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 믿음이 선물로 주어졌다는 이야기를 할 때,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너는 주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이미 창세전부터 확정되어 있고 미래에서 이미 확정되어 있어.” 그런 뜻으로 예수를 믿으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서 예수 믿으라 하는 것은 우리보고 호소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통해서 호소한 겁니다. 이미 성령 받은 사람에 한해서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사도행전 2장 보세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행 2:17) 죽 나오지요. 그게 성령에 휘감기니까 그 상태가 예수 믿는 상태가 된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 믿을 필요가 없지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이게 무슨 뜻입니까? 아직까지 예수 안 믿는다는 뜻이고 앞으로 예수 믿을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에요.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믿으라고 하니까 온갖 요령, 교회 다니면서 알게 된 모든 모방한 것들을 다 해내요. 예수 믿고 할렐루야, 손들고 나온다든지 갑자기 세례 받는다고 달려든다든지. “어머나! 왜 이래요? 갑자기. 너만 알고 있으면 돼, 너만 알고 있으면. 왜 자꾸 믿는 티를 내.” “우리 목사님이 시켜서 그랬습니다.” “그 목사나 잘하라고 해.” 정말 목사가 예수를 믿게 되면 교회라는 게 그 사람한테는 없어요. 왜냐하면 이미 교회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내 교회, 네 교회, 우리교회……, 우리교회가 있습니다만 이런 자체가 없어요. 예수 믿는 사람한테 무슨 믿으라는 말이 됩니까? “네가 믿고 있는 것은 주께서 주셨다.” 이렇게 돼야지요. 믿지 마세요, 예수.
나실인은 머리카락에 ‘댕기머리’ 죽죽 뿌리고 그러지 않습니다. ‘댕기머리’가 뭔지 아시지요? 머리카락 빠지지 말라고 쓰는 샴푸, 그게 히트상품이잖아요. ‘댕기머리’ 치지 않습니다. 왜냐? 주께서 기르시거든요. 뭘 로 사용합니까? “이스라엘아! 앞으로 너는 여기에 머물 것이 아니고 미래에 가야 될 세대”기 때문에 미래에 가기 위해서는 선도가 있어야 돼요, 선도. 군대에서 선도라 하는 것은 꼭 키가 큰 사람이 돼요. (젊은이를 향하여)군에 가야 하는데……. 군에 가야 선도가 돼요. 키가 1미터 80이 넘으니까.
선도는 다 보이는 곳이거든요. 그걸 보는 순간, 놋 뱀을 보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보지 않게 되는 겁니다. 설교 시간에 그런 예를 든 게 있는데 다시 하게 되면, 어떤 임금이 있었는데 자기가 쫓겨날까 싶어서 모든 것을 감시를 해요. 신하들의 발자국소리, 시녀들의 소리, 어떻게 하든 자기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감시하면서 예민하게 있는데 그 가운데 어떤 여인의 소프라노 음악소리가 들리는 순간 그 임금은 모든 근심걱정을 다 잊어버렸어요.
왜? 지금 내가 근심하는 것을 완전히 무산시키는, 더 아름다운 초과적인 은혜지요, 초과적인 아름다운 목소리에, “내가 임금 안 되도 그만이고 저 음성만 듣는다면 내가 거지라도 좋아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이사야 6장에 뭐라고 나옵니까?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주님이 하신 말씀이, “그런 이 험한 일을 위해서 누가 가지?” 기다렸다는 듯이 “저요!” 하고 손들지요. “제가 가겠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제가 기쁨으로 죽겠나이다.” 그런 뜻이에요. “기쁨으로 죽겠나이다.”
이 세상에 근심걱정이라 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자본주의사회에서 성공이라는 신화에,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몸이 묶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오직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성공 때문에 우리에 의해서 핍박받은 주님이 “네가 그렇게 세상 좋아하는 것이 원래 나실인으로서, 내가 너를 그렇게 죄인으로 사용했다.” 하는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이 주님의 전략에 우리가 말려들었다고 하는 순간, 더 이상 나의 일은 사라지게 되고 내가 하는 지금의 모든 일이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주님이 주인공인 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그 때부터 자유를 얻게 되는 겁니다.
내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내가 나를 벌주거나 채찍질 하고 나를 손들게 하지 않아요. 주님이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데 내가 정죄한다는 것은 정면으로 주님에 대한 모독이고 주님의 십자가를 훼손하는 훼방자밖에 안 되거든요. 이 시간 끝내면서 저녁 먹기 전에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더 이상 너무 책망하지 마세요. 책망하지 마시고 감사하세요. 그것보다 더 좋은 회개가 없습니다. 마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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