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2015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3강 본문
녹취:한윤범 2015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3강 (강의:이근호 목사)
우리가 강의하는 것이 행함 없는 구원을 실시하는 거예요. 아무 행하지 않았는데 구원이 되는 것. 행함 없는 구원히 되려면 조건은 딱 한 가지에요. 나는 나중에 등장하는 거예요. 내가 제일 나중에 등장해요. 나중에 등장하는 나는 하나님의 작품이 되는 겁니다. 이게 행함 없는 구원이에요. 나를 앞장세우면 앞장세운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무수한 행함을 여기다 집어넣어야 돼요. 그것이 성공하느냐? 성공하느냐 여부를 떠나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입장에서 기대할 것은 자기밖에 없고 자기를 다시 천국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여기서 어려운 게 어제는 피곤하다고 제가 쉬운 것 이야기했고 오늘은 열시에 시작했으니까 열시 반 되면 다 주무시거든요. 10시 30분되기 전에 중요한 것 이야기해야 돼요. 제일 중요한 게 뭐냐? 나를 뒤에 등장하는 거예요. 에덴동산에서 나오고 난 뒤에 그걸 실낙원이라고 하는데 실낙원은 되는데 복원이 안 돼요. 낙원에 가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럼 이러면 돼요. 안 가면 돼요. 천국을 안 가면 되거든요.
여기서 인간의 딜레마가 뭐냐 하면, 안 가려고 하니까 안 가고 싶어도 나 바깥에 뭔가 좋은 게 있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어서 환장하는 거예요. 그걸 지워버린 사람을 정박아 또는 정신병자, 이러면 없어요. 이게 전부가 아니야. 뭔가 있을 거야. 죽으면 끝? 아니야. 죽고 난 뒤에 분명히 좋은 나라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자기에게 큰 짐이 되는 겁니다. 이걸 지우면 되는데.
옛날 삼십 년에 라디오에서 들었던 촌에서 와서 초등학교밖에 안 나왔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검정고시해서 이야기가 어디서 끝나느냐 하면, 9급 공무원에 합격했습니다. 끝. 이걸로 끝나는 거예요. 드라마, 실화가. 이런 장한 청년도 다 있다. 못 배웠지만 공무원에 합격했다. 끝인데 실제로 삼십 년 지나서 그 사람을 찾아가서 옛날 삼십년 전에 9급 공무원 합격했다던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9급입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 있는 거잖아요. 라디오는 9급으로 끝났는데 실제로 그 사람은 9급 되고 난 뒤에 7급, 6급, 5급, 계속해서 이것 말고 더 요구하게 되면 그것은 본인한테 스트레스가 되는 겁니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둘 다 죽는다는 점에서 동일해요. 동물은 태어나면서 그것이 끝이에요. 9급 공무원이에요. 태어나서 늙어 죽으면 되는데 인간은 이상스럽게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수는 없어. 영원히 불멸해야 돼. 이대로 죽을 수 없어. 너무 허무해. 이렇게 하는 순간 인간은 죽음에 저항하게 돼있어요. 죽는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 아버지 돌아가신 걸 아는데 죽는 것이 우리 미래인 것을 아는데 그걸 받아들이는 저항요소가 우리 속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떻게 하든 하늘이 주신 정보를 입수해서 그 정보에 나의 행함을 가미해서 주님이 시킨 대로 했으니 천국 내달라는 요구를 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게 기독교라는 거예요. 우상이죠. 그게 천주교고 우상입니다. 그게 아니거든요. 내가 먼저 있고 나를 불멸하겠다. 그렇게 되면 여기서 뭐가 탈락하게 되느냐 하면,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킨 취지 자체를 거부해버리죠.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는데 그 정보는 안 받아들이고 어떻게 살 수 있는 정보만 받아들인 거예요.
살 수 있는 정보 중에 하나님과 그를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니라. 요한복음 17장 3절. 영생으로 돌아가는 수가 있네. 다시 낙원으로 가는 수가 여기 있구나. 아이고, 고마워라. 그렇지 하나님이 우리를 섭섭하게 하실 분이 아니야. 자비로우니까. 가는 길을 주셨구나.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면 되거든요. 문제는 그 아는 자세 자체가 이미 망가졌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고 하늘과 중간 쯤 지상 2.5미터 상공에 천사처럼 있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알면 영생되는데 그 보내신 자가 실제로 인간들과 함께 합숙훈련 해버리면 우리는 그 사람을 너는 아니라고 죽여 버린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이 십자가 사건이거든요. 십자가 사건을 성령을 통해서 반복해서 우리에게 들이댄다는 말은 영생 가는 길을 줘도 못 먹네. 영생 가는 길을 줬지만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와봐야 또 죽이니까 영생 가는 길을 줘도 못 먹어요.
뭐가 문제냐? 나를 앞장세운 거예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르고 우리를 아시는 분은 나보다 나를 더 아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거든요.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천국 백성 만드는 그 작업에 나서는데 우리는 성급하게 나를 앞장세워서 내가 나한테 어떤 일을 가미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발상의 전환이 일어나야 돼요.
오늘 아침에 이런 방송을 했어요. “십자가마을에 오신 여러분은 아침식사가 준비되었사오니 식사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마을에 오신 분들은~ 마을에, 라는 것은 장소란 의미가 방송하는 사람이 ‘~에’라고 장소적 조사를 붙이는 것은 그 사람들의 언어적 습관에서 당연한 거예요. 십자가마을에 오신 분은 식사하시기 바랍니다. 잠들기 전에 빨리 이야기해야 되는데.
십자가마을이란 장소가 아니고 마을로서 오는 거예요. 우리는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백성으로 가는 거예요. 천국으로써 가는 거예요. 천국을 우리 안에서 만들어내는 겁니다. 왜? 죽었던 것이 우리를 위해서 죽은 것이기 때문에 죽은 자리에서 죽은 자를 통해서 주님이 주 되기 위해서 죽은 자들 안에 주님의 성소를 만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네가 범죄자지? 예. 기다려. 네 속에 천국을 만들겠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죄를 안 짓고 반듯한 바른 생각해서 천국 가고자 하는데 그게 아니고 죄를 지었다는 것이 천국 만드는 유일한 재료가 되는 겁니다. 왜? 그래야 우리가 주님을 몰라봤고 그럼에도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100%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 그러한 상태가 천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첫째, 둘째 시간에 이야기한 이 모든 잘못이 어디서 나왔는가? 현실 말고 따로 우리가 독자적인 현실을 만들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 만든 독자적인 현실을 존재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하나님마저 내 존재를 키우기 위해서 달라는 거예요. 교회 와서 기도한다. 왜? 현재 있는 나만을 위한 현실을 키우기 위해서 신이 도와주신다면 저도 신한테 섭섭지 않게 헌금해드리겠다. 이런 식으로 거래에 나서는 거예요. 내 자식 키워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존재의 문제점은 민수기 1장에 보면 나옵니다. 이번에 민수기 하면서 성경책 처음 들춥니다. 민수기 1장 10절, 이 정도는 수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다 할 테니까. 안 읽어본 것 다 아니까. 갈수록 점점 심해. 읽어보더니만.
1장 20절에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 장자, 먼저 태어난 사람. 그 다음에 시므온, 세 번째가 레위, 네 번째가 유다. BB라 했지요. 성경에서 정실부인, 하녀 출신 한 것은 이미 아브라함이 하녀 출신은 탈락이에요. 하녀 출신은 지옥 가야 됩니다. 정실부인만 천국 가요. 천국과 지옥은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위치에 있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 내부에 있거든요. 아브라함언약 속에 응축된 언약 속에 천국, 지옥이 있으니까 그 정보가 거기에 들어있어요. 그것이 아브라함 자식을 통해서 펼쳐져요. 아브라함을 통해서 펼쳐지면 그것이 아브라함의 원리원칙이 이삭에게 전달됩니다.
이삭도 아기를 못 낳는다 했지요. 이삭은 자식이 없어요. 그리고 야곱의 정실부인 라헬도 자식이 없어요. 자식이 없는데 있다는 말은, 이미 우리가 이걸 존재라 했으니까 주께서 반대로 부재, 부재의 뜻이 뭐냐 하면, 없는 듯이 있는 거예요. 없는데서 있어서 현재 네가 있다는 것은 네 작품이지 내 작품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천국은 내가 만들기 때문에 내 안에 들어오려고 네 작품 되지 않고 나의 작품으로 거기에 가담돼야 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는 지옥, 천국의 정보를 입력했고 그 입력이, 정실부인과 자식이 없는 쪽은 천국 가고 자식이 있는 쪽은 지옥 간다는 겁니다. 그게 하녀와 본처의 차이거든요. 그러면 하녀 쪽은 우리 생각에는 없어야 하는데 야곱에 있어서 하녀들, 빌하, 실바를 계속 투입이 돼요. 하녀 출신은 잡종이 되서 이러다가 우리 코너 끝나는 게 아닙니까? 지옥 가는 게 아닌지 걱정이 늘어질 거예요.
잠들기 전에 설명해야 되는데 창덕궁이나 경복궁에 보면 옛날 건물이 되어서 빗살무늬 창살이 있어요. 여기에 창덕궁 바깥에 해가 비추면 창덕궁 마루에 얼룩진 빗살무늬의 그림자가 있겠지요. 우리가 여기 있다고 봅시다. 내가 여기 있으니까 존재가 되고 5미터 떨어져 있어요. 저는 하얀 옷을 입었습니다. 5미터, 3미터, 1미터 해서 여기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 몸에 빗살무늬가 띠겠지요. 이게 구원이에요. 여러분들이 빗살무늬 비추면 간지럽습니까? 두드러기 나요? 갑자기 무게를 느낍니까? 아파요? 아무렇지 않지요. 이게 주님이 만드는 현실이고 존재는 나의 독자적인 현실이 있어요.
행함이 없는 구원을 설명하는 겁니다. 행함 없이 영생 얻는 걸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인간은 독자적인 영생을 얻기 위해서 신의 말씀을 도입해서 지키겠다고 하는데 이것이 점점 가까이 가서 어느 날 하나님의 현실의 무늬에 들어선 순간 전혀 달라진 게 없어요. 그걸 저는 막 살라고 하는데 예수 믿는다고 전혀 달라질 게 없는데 특징은 나의 현실과 주님의 현실이 중첩이 되는 거예요. 중첩이 되면서 빗살무늬의 내용이 이거에요. 정실부인 출신과 하녀 출신, 이러한 낯선 정보가 내 옷에 장식하는 겁니다. 이게 뭐지? 벌써 아브라함의 그림자가 드리워졌구나, 하는 거예요.
우리는 아브라함이 계시 받았다고 하니까 혼자 은혜 받은 줄 아는데 혼자 은혜 받은 게 아니에요. 아브라함이 받은 계시는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 내렸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주님의 현실이 진짜배기 현실이라는 거예요. 특히 젊은 분들이 독자적인 현실을 추구하는데 빨리 아버지, 엄마 품을 떠나는 것, 그 외에는 아무 생각 없거든요. 문제는 예수님 재림하게 되면 독자적인 현실이 완전히 불바다 된다는 사실이에요. 불바다 되면 불바다 된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게 어디서 왔지? 보니까 아브라함 언약의 약속대로 온 거예요. 진작 알지. 진작 그 현실에 다가서서 완전히 호피무늬, 얼룩무늬로 하면 되는데 혼자 나는 나중에 늙어 죽을 때 교회 갈 거라고 자기 혼자 독자적인 현실을 구축하는 겁니다.
민수기 1장 20절에 르우벤이 분명히 장자에요. 이건 혈통적으로 장자 맞지요. 3장을 봅시다. 이 수고는 해주셔야 돼요. 3장 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10절에 보면,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세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이 말이 뭔 뜻이냐 하면, 내가 제일 먼저 태어났다. 두 번째는 시므온이고 세 번째가 레위고 네 번째가 유다다. 그래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육적인 출생 순서가 하나님의 거룩 앞에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 말이죠. 아무 소용없잖아요. 지금 하나님의 정보가 그거에요. 나는 먼저 태어나서 장자거든. 에서는 장자고. 약 올라. 나는 왜 두 번째 태어났을까? 먼저 날 잡아당기지. 똑같이 손잡았는데 형은 잡아당기고 나는 두 번째로 나오고 한 번의 순간이 평생을 좌우하는구나. 이렇게 고민, 고민하는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왜? 먼저 태어나나 나중 태어나나 육은 육이고 주님 앞에 죽음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 말이죠.
그래서 레위지파가 왜 있느냐 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아무 행함도 없이 그림자만 잠시 드리울 뿐인데 그 그림자가 합류된 주님의 현실로 인하여 죽음에서 영생으로 바뀌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이야기를 놔두고 교회들이 뭘 하고 있습니까, 지금.
레위지파가 왜 있느냐? 레위지파가 주도권을 쥔 것은 제 생각인데요. 시내 산 밑에서 돌판 깨질 때 누가 나서서 우상숭배자를 죽일꼬 할 때 레위인이 헌신해서 나섰다는 그 대목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모세와 아론이 레위지파라서 그런지 그건 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만 아마 시내 산 밑에서 헌신한 그 이유가 강력한 것 같아요. 왜냐하면 시내 산 자체가 과거 에피소드가 아니고 시내 산 자체를 모세가 그걸 업고 시내 산 사건을 계속 되풀이해서 반복시키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거기서 레위지파가 했던 헌신적인 노력이 계속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거예요. 주도권을 쥔다는 것이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존재가 되어라. 하지만 너희는 부재의 존재, 없는 존재가 되란 말이죠.
그런데 어제 시간부터 목사님이 뭔가 자꾸 우리한테 천국은 이러니까 이렇게 하라 하면 그만인데 부재라는 어려운 말을 일부러 쓰는 것 같고, 왜 그렇게 어렵게 몰고 가십니까? 그게 불만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요. 나만 그런가?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천국은 이러합니다, 하면 우리 존재는 그걸 소유해버려요. 그걸 내 것 만들어요. 내 것을 만들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요.
존재는 뭐냐 하면, 전체는 예외가 있습니다. 전체가 예외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유치원에서 산수 문제를 해봅시다. 바구니에 사과가 세 개가 있습니다. 바구니 바깥에 사과 하나가 있습니다. 자, 전체 사과는 몇 개? 라는 질문을 했어요. 바구니에 세 개 들어있고 바깥에 한 개 있으니까 예외지요. 전체가 네 개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네 개 외에는 사과가 없으니까 전체가 예외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네 개가 되는 순간 테두리가 늘어나요. 네 개까지 확장해버려요. 이걸 전체라고 합니다. 그럼 모두(all)라고 해요.
그러면 모두라고 보는 경계선을 포함하려면 우리 눈이 어디에 가 있느냐 하면 바깥에 가 있어요. 바깥에서 보게 되면 전체가 소유가 되는 겁니다. 전체가 소유가 되게 되면 내가 전체라고 보는 그 시점이 되려면 나 바깥에 다른 눈이 있어야 돼요. 다른 눈을 의식에서 나는 전부를 가졌다고 내가 다른 쪽에 서서 바라봐야 되는데 이미 전체를 테두리 친 이상 테두리 바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예외가 있는 겁니다.
내가 이번 달부터 담배를 끊는다고,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했단 말이죠. 하나님, 이번에 술, 담배 끊었습니다. 착하지요? 할 때 그 사람이 생각하는 전체는 뭐냐 하면, 전에는 술, 담배가 자기 착함 바깥에 있었어요. 하나님이여, 내가 착한 일 많이 할 테니까 술, 담배는 허락해주옵소서, 하다가 이제는 나이도 많고 담배 냄새도 그렇고 담배 값도 이천 원 올랐겠다, 이제 끊어버리자. 해서 담배, 술 끊어버리고 착하다고 할 때 그걸로 전부입니까? 착함의 전부일까요? 살아보니까 더 착해질 수 있는데 내가 너무 소탐대실이라 하죠. 너무 작은 것만 전체로 봤는데 지금 착함의 요소가 저 바깥에서 나를 손짓하고 있는 그것마저 노려버리면 나는 덜 착한 게 되잖아요. 내가 전체라고 이 정도하면 만족하다.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한 공무원 9급으로 인생 행복 시작, 불행 끝이라 여겼는데 막상 9급 생활 해보세요. 다른 사람은 7급인데. 저 혼자 9급인데 저는 커피 타야 하는데. 거기서 자기는 완성이 아니고 미생 돼버리고. 그러면 7급 되면 끝입니까? 5급이 끝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천국이 이렇습니다. 알았지요? 예, 믿습니다. 믿는다는 말은 소유한다는 뜻이거든요. 내 것 만들어서 전체를 가지겠습니다. 이러면 해결이 안 돼요. 주님 이것뿐입니까, 더 없습니까? 이렇게 나오게 돼있어요. 인간은 그 바깥을.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전체가 되지 말고 비-전체가 돼. 전체가 뭐냐 하면, 전체가 어느 정도고 부분이 어디 놓여 있느냐, 하는 사고방식이라면 비-전체는 아예 전체가 날아가 버린 겁니다. 이게 없는 거예요. 비-전체란 말이, 뭐가 전부냐, 뭐가 한계냐는 자체가 생각 들지 않는 거예요.
남성들한테는 이런 이야기가 어려운데 여성들한테는 쉬워요. 라캉이란 정신분석학자가 말하기를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남성성과 여성성의 차이를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남성성은 뭔가 하나를 잡으면 그 바깥에 뭐가 있을까 본다는 겁니다. 그게 흔히 말하는 대의명분, 조국이 날 부른다, 이런 것. 예술가라든지 깊은 과학자라든지 또는 종교인이라든지. 내 존재의 가치가 여기서 머물 수 없어. 나는 조국을 위해서 살아야 돼. 세계평화를 위해서 해야 돼. 조국이 날 부른다고 하면, 아내가 음식쓰레기나 치워라.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그런데 여성은 어떠냐 하면, 전체 부분의 개념이 없어요. 여성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사기꾼의 아내가 되면 같이 사기를 쳐요. 농사지면 무조건 농사져요. 그리고 남편이 치킨집하면 같이 치킨집해요. 사기 치면 같이 사기치고, 조폭 되면 같이 조폭하고. 뭐 없어. 현재 마당이 전부에요. 그 바깥에 뭐가 있는지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번에 참석하려다가 바빠서 참석 못한 김중우 집사님이 하는 말이, 여자직원은 일을 하면 잘 하는데 여자직원은 회사의 대의명분에서는 전혀 보탬이 안 된다는 겁니다. 저희끼리 싸워요. 저희끼리 시기하고 질투하고. 일은 충실한데 남자가 보기에 되지도 않은 사소한 일 때문에 삐져서 사표 낸다니까요. 그러니까 회사에서 여자직원을 뽑을 리가 있습니까. 맨날 삐지고 그런데. 저희끼리 싸우는데.
표현형을 내가 종이냐, 여성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건 하나의 무늬지요. 하나님의 정보가 임하게 되면 그 소유는 전체가 되고 전체는 반드시 뭘 남긴다 했습니까? 예외가 있지요. 전체에 만족하지 않아요. 욕망에는 대상이 없다는 유명한 말이 있지요. 욕망은 대상을 자꾸 바꾸기 때문에. 욕망은 그 대상에 멈추지 않아요. 욕망은 뭘 욕망하느냐? 욕망 자체를 욕망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그러니까 욕망의 대상이 없어서 자살하는 게 아니고 더할 욕망이 없을 때 자살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말이 있잖아요. 희망이 없는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성취 되더라도 희망을 성취시키면 안 돼요. 반드시 희망은 미완의 것으로 남아 있어야 돼요. 아버지 원수 죽이겠다고 금강산에서 무술 닦다가 중국집에서 만났는데 자기 손으로 죽어야 될 희망으로 평생을 원수 찾아 다녔는데 지가 미끄러져 죽어 버리면 도대체 내 존재의 의미가 없다니까요.
육십 넘은 부부가 평소에 싸우면서 죽으라, 죽으라고 하다가 한쪽이 막상 죽어 버리면 남은 배우자가 살 희망이 없다니까요. 죽는 것도 허락 맡아야 돼. 왜 허락도 없이 죽어. 남자, 여자가 사귀다가 여자가 헤어지자고 일방 통보하니까 남자가 미치는 거예요. 왜? 나는 정리도 안 됐는데 일방적으로 통보하면 닭 좇던 개가 되어 멍하니 있는 거예요. 내 쪽이 정리가 안 되네. 그래서 이혼한 전처 집에 가서 불 지르고 죽고 난리 치잖아요. 네가 없으면 내가 없는데. 저쪽에선 미쳤나, 하고.
그래서 틈을 보는 거예요. 존재를 분열시킨 예외가 전체를 갈라버려요. 그래서 전체는 분열의 형식이다. 또 어려운 것 나온다. 통일되었다는 것은 깨질 준비하라 이 말입니다. 뭔가 알았다 싶거든 깨질 준비하란 말이죠. 뭔가 분열의 조짐이 있어요. 분열의 조짐을 두 번째 시간에 뭐라고 했던가요? 해안선이지요.
해운대 가봤습니까? 바닷가에 가봤지요. 아들아, 해안선 5미터 끊어오너라. 해안선 5미터 끊어올 수 있습니까? 해안선인데. 그런데 지도에서는 끊어져요. 5미터, 5센티도 나온다니까요.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과 현실이 이렇게 차이나요. 인간은 기껏 눈에 보이는 것을 현실화시킬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지만 눈에 보이는 그것이 현실을 가리는 현실을 못 보게 만드는 장애물로 작용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보는 나를 만족함이지 현실에 합치된 건 아니에요.
사과가 세 개 있는데 사과 하나가 더 있어요. 그럼 사과 네 개 되겠지요. 에디슨은 어릴 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천재입니다. 선생님이, 바구니에 사과가 세 개 있어요. 바깥에 하나 있는데 전체가 몇 개지요? 보통 학생들은, 네 개. 참 잘했어요. 도장 찍히잖아요. 에디슨 같으면 한 마디 했을 거예요. 사과 3+1=4개인데 선생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말을 어른이 되어서 다시 깊이를 더한다면 인간의 모든 의미라는 것은 인간 본인을 만족하기 위함이지 현실 그 자체가 아닌 겁니다. 해안선을 지도에서 칼로 오려서 가져올 수 있어요. 그러나 현실에서 해안선을 내 소유용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천국도 이와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이 눈에 보이는 그걸 의미라 하는데, 이런 이야기까지 안 하려고 했는데 참.
여러분, 의미와 뜻이 달라요. meaning과 sense가 달라요. 의미는 이미 조직화된 나만의 독자적인 현실 속에서 의미를 찾지만 뜻은 그것을 파괴하는 기능으로 돌발적으로 뛰어들 때 그게 뜻이라고 하는 겁니다. 뜻을 알 때는 반드시 뜻을 미리 알지 못하고 이미 벌어지고 난 뒤에 돌아서서 차후에 터지고 난 뒤에 의미라 하는 거예요.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 1미터는 별 지장 없습니다. 같이 살면 되니까. 대구에 있는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 1미터 간격, 대구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 의미 없어요. 그냥 아파트 1미터 떨어져도 괜찮아요. 그런데 의정부는 달라요. 의정부의 아파트의 1미터는 옆집 불나면 같이 불타게 돼있어요. 4명 죽고, 10명은 아슬아슬하고 백여 명은 중상이라 하잖아요.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 그때 좀 띠울 걸. 항상 사건화 되는 거예요. 그 사건이 해안선이에요. 지옥 가고 난 뒤에 그때 행하지 말지. 부자가 이미 지옥 가고 난 뒤에 그때 나도 거지 나사로 될 걸 괜히 부자 되어 지옥 갔다. 이미 사건은 터지고 난 뒤에 하는 거예요.
그런데 부자가 거지 나사로처럼 될 수 있을까요? 되려면 자기의 존재를 포기해야 되는데. 존재를 포기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쪽 존재와 저쪽 존재를 가르는 선, 해안선을 만들었어요. 해안선은 폭이 없습니다. 레위지파는 폭이 없어요. 그래서 레위지파를 부재의 존재라고 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땅도 없어요. 그런데 레위지파가 망하게 되는데 언제 망하느냐? 레위지파가 폭을 가질 때 권력을 추구할 때 이미 레위지파는 기울어지기 시작합니다.
공직자는 의미가 뭐냐? 봉사하는 자죠. 그런데 봉사하는 자가 언제 망합니까? 봉사하는 검사가 언제 망하죠? 자체적인 독자적인 현실을 가질 때 그게 권력 되거든요. 검사가 자체적인 권력을 가질 때 처음에는 국민을 위해서 봉사하는 취지가 날아갈 때 그건 마피아가 돼요. 레위지파가 그래서 망한 겁니다. 주께서 레위지파로 하여금 죽음과 함께 있고 따라서 죽음을 처리하는 거예요. 종의 출신, 저주받은 출신을 창덕궁의 창살 무늬 때문에 어떻게 종의 저주가 어떻게 해서 정실부인이 받은 축복에 합류할 수 있는지 그 기능을 보여주는 폭 없는 해안선 역할 하라고 레위지파를 내세운 겁니다. 그래서 먼저 태어났다고 해서 그건 육에 속한 거기 때문에 의미 없는 거예요.
제가 어제 이런 이야기했지요. 아주 짧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이해할 사람 없을 건데 레위지파가 몰락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요셉지파와 유다지파가 알력이 생겼다고 이야기했잖아요. 이것은 원래 창세기 끝에 보면 야곱이 미래를 예언 대목이 있습니다. 축구에서 말하는 투톱이에요. 장신 공격수 두 명 세우는 거예요. 막상막하에요. 창세기 마지막에.
보시고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창세기 49장 9절, 야곱이 축복한 것으로 돼있는데 예언한 것으로 보면 돼요. 내용이 축복답지를 않아요. 막 저주가 나와요. 망해죽으라, 이런 게 나오기 때문에 예언한 것으로 보면 돼요. 기존에 사적 존재 중심의 축복관 아닙니다. 하도 교회가 이상하니까 전부 바꾸려고 하니까 내가 힘들어요.
9절, “유다는 사자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여기 야곱이 열두 지파 축복한 것이 완전히 동물의 농장이에요. 전부 동물 이야기에요. 이걸 전쟁하는 기계로 봅니다. 기계는 기능만 중요하지 존재는 중요하지 않아요. 네가 뭘 할 것인지가 중요하지 네가 어느 대학 나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천국의 기능에 어떻게 합치해서 하나의 부속품으로 맞물려 돌아가는지가 중요한 겁니다.
10절에 보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실로는 장소 이름인데 인물화 되어 다가온다는 거예요. 저벅저벅. 실로는 법궤가 있는 곳이거든요.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 저벅저벅 다가오는데 너를 통해서 다가온다고 돼있어요.
질문은 남아있어요. 질문은 제가 하고요. 24절 봅시다.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자, 질문 들어갑니다. 이 투톱 가운데 누가 중심입니까? 막상막하인데. 어떤 사람이 음악가한테 이런 질문했어요. 이 세상에 베토벤과 모차르트 가운데 누가 최고입니까, 하고 물으니까, 답변이 멋진 답변이었어요. 베토벤보다 더 뛰어난 음악가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모차르트는? 모차르트는 유일합니다. 이게 전체와 비-전체의 관계거든요. 비교대상이 있는 것은 아직 전체거든요. 그런데 모차르트는 비교대상이 없는 거예요. 그런 논리로 모차르트를 이야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것은 오늘날 60년대, 70년대 살았던 지금 50대, 60대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남진이 좋습니까, 나훈아가 좋습니까? 남진패, 나훈아패, 배호패 막 싸우는 거예요. <국제시장>에서는 남진이 등장합니다. 남진이 우세한 거예요. 주인공은 남진을 욕하면 화내요. 자기가 남진한테 목숨을 받았기 때문에. 거기 남진, 이만기 다 나와요. 제 아내에게 <국제시장> 보라고 하니까 650만 들어가서 안 본다는 거예요. 이건 무슨 비-전체에요. 천만 이상 들어가면 절대 안 본다는 겁니다. 이게 유일자 같아.
독보적인 존재가 존재라고 하니까 존재가 아닌 사람을 내세운 것이 레위지파입니다. 레위지파는 모든 인간들의 순서와 등급과 계급과 성공실패를 전부 죽음 하나로 무산시켜버려요. 죽어가면서 좀비끼리 인물 잘났다고 해. 레위지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다 죽어요. 레위지파가 작동하는 그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합니다. 레위지파가 가동된 체제, 시스템을 모세언약이라고 해요. 레위지파가 몰락한 것은 그들이 자기의 분수, 봉사를 놓쳐버리고 폭이 없는데 해안선에 불과한데 자기는 거룩과 비-거룩의 접점 지점으로 끝나면 되는데 이것이 자기가 십일조를 받아 챙기니까 받아도 되는 줄 알고 있어요.
구약에서 십일조를 낼 수가 있었어요. 왜냐하면 십일조 내는 제물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낼 수가 있어요. 그 땅의 소산물로 십일조를 내기 때문에 하나님 자체 내에서 순환이 되게 합니다. 펌프 순환하듯이. 주님 주신 것 중에서 십분의 일, 주님 주신 일부를 주는 거예요. 주면서 우리는 공짜로 십분의 구를 받았다는 감각을 갖고 사는 거예요. 원래 십일조가.
그런데 십일조 하던 그 땅이 어디로 올라가느냐? 골로새서 3장에 보면, 하늘로 올라갔어요.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땅에서 십일조가 없어요. 정 하고 십일조 하고 싶으면 사다리 타고 하늘에 올라가서 하세요. 거기에 보면, 틈이라 했고 해안선이라 했는데 간격이라 하면 폭을 이야기고, 간극이라 한다면 선 자체를 이야기해요. 갈라진 균열선을 이야기해요. 거룩과 비-거룩이 만날 때 죽음이 있거든요. 이 죽음을 죽지 않고 저주받지 않고 레위지파 하나가 등장해서 온 사람이 다 거룩한 백성이 되는 모세언약 시스템을 확정시키기 위해서 모세언약을 하나님께서 가동시킨 겁니다.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지파가 그냥 르우벤이 장자인 시대에서는 육의 순서기 때문에 그냥 모세가 나서서 지팡이 들고 설치다가 이제는 법궤 주변에 누가 있느냐가 그쪽이 장자기 돼요. 법궤 주변에 있는 지파가 어느 지파입니까? 레위지파거든요. 그 외에는 나머지 지파는 유다지파가 있더라도 의미 없어요. 레위지파 때문에 덤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레위지파가 제대로 가동이 되면 살고 안 되면 못 사는 거예요. 이것은 간극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선 때문에 그런 겁니다. 왜 선을 이야기했는지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천국이 어떤 세계입니까? 예수님이 소개하기를 천국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했어요. 십자가마을이 어딥니까? 묻는 것이 십자가마을에서는 이상하게 느껴지잖아요. 묻는 사람은 당연히 십자가마을이 어디 있느냐? 십자가마을이 뭐 있는 모양이다. 인터넷 찾아보니까 십자가마을이 있어요. 어떤 장소가. 천국이 어디 있느냐, 할 때는 어느 곳에 있기만 하면 고정돼있으면 가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이렇게 이야기해버렸어요. 이건 포도원 비유입니다. 아침 열 시에 온 사람, 열두 시에 온 사람, 세 시에 온 사람, 마지막에 다섯 시에 온 사람들.
천국이 어디 있느냐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천국이 어디 있는지 묻는 발상이 뭐냐 하면, 나라는 존재를 거기 집어넣기 위해서 묻는 거예요. 답변하기를 어떤 존재가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나라는 존재밖에 모르는 우리로 뭔가 활용하는 거예요. 활용하면 나타나는 게 있어요. 제가 어릴 때 솜사탕 만드는 것 보고 참 신기했어요. 솜사탕 만들 때 재료가 설탕과 둥그런 통이 있고 발판밖에 없어요. 분명히 없는데 아저씨가 설탕을 집어넣고 밟으니까 뭔가 없는 데서 있음이 발생되면서 허연 연기 같은 것이 끼는 거예요. 계속 밟고 있고. 지는 나무젓가락 들고 있고. 없다고 여겼는데 분명히 뭔가 생기기 시작하니까 그걸 흩으니까 솜사탕 된 거예요.
설탕이 뭐냐 하면 우리들이에요. 존재에요. 존재로 주께서 하니까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하다 보니까 이게 천국이에요. 없는 데서 부재의 존재가 존재를 살려주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누가 지적질하고 누가 추궁하고 근본 자체가 잘못된 것을 지적해줄 때 그 지적해주시는 분의 관계가 천국에 입성한 사람입니다. 잔소리 좀 들어야 돼요.
포도원 질문하면서 같은 질문인데요. 여러분이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돈은 왜 내지요? 식당에서 돈 내는 이유가 뭐죠? 식당에서 음식 만드는 것은 먹으라고 한 거잖아요. 그럼 먹어줬잖아요. 그런데 돈은 왜 내요? 이상하잖아요. 먹으라고 빵 만든 것을 그 취지를 살려서 먹었는데 돈을 왜 냅니까? 돈을 내야 인간사회에서 독자적인 현실 세계에서 사람값을 해요. 만약 돈을 안 내면 그 사람은 인간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이 현실 속에 존재로 인정하지 않아요.
그런데 주님은 뭐냐?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 세계거든요. 값을 치러야 사람 노릇한다는 그러한 현실에서 다른 현실이 해안선을 만든 겁니다. 여기에서 이리로 넘어가지 아니하면 구원을 못 받아요. 영생을 못 받아요. 우리가 아는 예수 아닙니다. 사람 노릇을 하고 사람값을 해야 돼, 라는 여기에 선을 그어버립니다. 분열을 일으켜요. 찢어버리는 거예요.
찢게 하는 방법은 소유로부터 존재로부터 출발하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천국을 방해하는, 그러니까 구원을 누가 방해해요? 구원받고자 하는 내가 방해하는 거예요. 우리가 구원받고자 시도하는 율법 지켜서 구원받고자 시도하는 순간 우리는 벌써 죄가 생산되는 겁니다. 내가 천국 못 가는 이유가 내 안에 정립이 돼요. 만들어져요. 내가 나를 천국 못 가게 만드는 주범입니다. 주범은 아니고 이게 양아치에요. 그리고 뒤에 주범인 마귀가 악마가 따로 있어요.
우리는 악마라는 것을 얼굴 돌아가는 꼬마인형, 괴물 같은 척키 같은 그런 것만 악마라고 하는데 그걸 누가 만들었겠어요? 인간에게서 나왔지요. 일그러진 모습, 아무도 흠모할 게 없는 인간이 악마로 여기는 그 모습을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으로 가져온 거예요. 그게 가면효과인데, 자기의 가면으로 써버렸어요. 인간의 힘으로 벗겨낼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된 거죠. 인간이 왜 주님 앞에 버림받는가? 인간은 자기 존재의 건전함과 의로움을 따로 구축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추방당함으로 말미암아 레위지파가 관리했던 의로운 죽음을 추방한 인간 속에 중심에 하나님께서 레위지파를 집어넣는데 그걸 어제 끝나는 시간에 뭐라고 했지요?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주체에요. 예수 안에 있는 성도다운 새로운 주체를 레위지파의 구조로, 모세언약의 구조로 우리 속에 집어넣으면 성도의 특징은 매일같이 분열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돌아서면 소유, 돌아서면 내가 잘 돼야지, 하다가 다시 보게 되면 그 경계선에서 뭔가 선이 찌그러지면서 그 속에서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하시는 그러한 기능으로 작동할 때 우리가 움직이는 하나님의 성소입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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