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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5:17 / 하나님의 관리 / 141120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5:17 / 하나님의 관리 / 141120

정인순 2014. 11. 21. 10:53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이한례

가락-요한복음 5장17(하나님의 관리)

141120a-이 근호 목사

17절부터 보면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예수님께서 일하시면 되는데 갑자기 여기 누굴 동원시키느냐 하면 아버지를 동원시켜 버리죠. 아버지를 동원시켜 버리면 사람들은 여기서 혼선을 빚게 되는 겁니다. 왜 빚게 되느냐 하면 여기 일을 한다 할 때 컵을 옮기는 것도 일이 되잖아요? 컵을 제가 손을 들고 옮깁니다.

그러면 이 컵 옮기는 일을 누가 했습니까? 제가 했잖아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하면서 “아버지께서 옮겼다.“ 하면 그 아버지께서 했다고 동원시킬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옮겼습니다.“ 이렇게 되면 일한 것은 하나인데, 주체가 두 명이 동원돼 버리죠. 두 명이 동원돼 버리면 여기서 서열 문제가 생겨버립니다.

누가 원인이 되어서 누가 결과를 했는가? 예를 들어서 예수님께서 일 하셔놓고 ‘이것은 아버지께서 일하셨다.‘고 아버지한테 모든 공로를 돌리시기 위해서 아버지를 언급했느냐? 아니면 실제로 하나님이 먼저 시켜서 그걸 시킨 분이 원인이 되고 거기 대해서 호응하듯이 또는 명령에 따르듯이 해서 예수님께서 일을 하셔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했는가.” 하는가? 따라서 두 가지 견해가 생겨버리죠.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꽃꽂이를 했을 때 꽃꽂이는 흔한 예고, 예를 들어서 누가 찬양을 했을 때 최 경순 소프라노가 찬양을 한다. 최 경순 소프라노 모르죠? 메트로폴리탄 우승하신 분인데 뉴저지에 있는 집사님 이예요. 같이 다니면서 이야기하면서, 그분이 찬양을 이렇게 해요. 유튜브 보면 그분 찬양이 나옵니다. 할 때 ‘아이구, 집사님 메트로폴리탄 우승하더니만 잘 하네요.’ 할 때 그분이 하는 말이 ‘아버지께서 하게 하셔서 하셨습니다.’ 보통 이렇게 하잖아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누굴 보겠어요? 아버지를 보겠어요? 아니면 노래하는 소프라노 하는 분을 보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건 소프라노 하는 분이 보이죠.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하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일이라는 개념을 설명해줘야 되는데, 일이라는 개념은 에너지 개념이거든요. 어떤 질량을 요 지역에서 요 공간만큼 이동시키는 걸 일이라 합니다. 물리학에서는 에너지의 변화를 일이라 해요.

그런데 일을 이렇게 하게 되면 누가 여기서 힘을 가해줘야 일이 돼요. 그런데 힘이 가하는 그 주체를 한분이 이렇게 일을 하게 되면 우리는 일을 했음에 대해서 그 주체에 쉽게 다가갈 수가 있습니다. 요게 뭐냐 하면 인간 쪽에서 인간을 바라볼 때 평가할 때 하는 방법 이예요. ‘아이쿠, 일을 많이 했네. 이 명박 일 많이 했네.’ 옛날 대통령 일 말고, 옛날 현대에 있을 때, 고속도로 할 때 ‘일 많이 했네.’ 이렇게 하잖아요.

인간이 인간을 할 때 또 수능 치면 ‘수능 좋은 점수 나오느라 공부 많이 했구나.’ 할 수 있는데 이 방법을 하나님께서 사용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생겨요. 이 방법을 하나님께서 사용해 버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너만 일할 수 있어? 나도 일해.’ 다시 말해서 너만 하나님 일을 하는 게 아니야, 나도 지금 하나님 일을 할 수 있어.‘ 그런 점에서 레벨이 같이 되죠.

그러면 누구하고 맞먹는데요? 예수님과 누굽니까? 자기와 일이 맞먹게 되죠. 그래야 예수 당신도 하나님 일해.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 일해. 내가 당신 하나님 일 하는 것 인정해줄 테니까 동시에 당신도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 일로 인정해 주면 우리는 샘샘이 되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 하느냐 하면 “아버지가 일하시니“라고 아버지란 말을 해버렸다 말이죠. 아버지를 말해버리면 어떤 경우가 생기느냐 하면 인간은 그 일, 아버지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이 일한 게 아니고 아버지가 일하잖아요? 그러면 유대 구약 적 전통적 신학에 보면 하나님이 아들과의 관계에서는 인간이 범접할 수가 있고 가미될 수 없는 독특한 일, 사람은 할 수 없되 하나님은 하신다 할 때 하나님과 아들을 저쪽에 같이 보는 거예요.

예를 들면 죄를 사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건 죄를 사한다는 것은 유대인 신학에서는 누구만 할 수 있느냐 하면 하나님만 할 수 있는 거예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와 아들은 같은 세계, 같은 하늘나라에 속하거든요. 어쨌든 간에 아버지든 아들이든 함께 있는 저쪽 패밀리, 저쪽 가정에서만 할 수 있는 게 죄 사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중풍 병 낫게 해놓고 뭐라 했습니까? “걸어서 가라.” 하지 않고 “네가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했죠. 그러면 이 중풍 병 고친 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도 병 고치는 걸 많이 했다 말이죠. 같은 성질이라고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깁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10가지 재앙이 있었죠?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재앙이 뭐냐 하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재앙을 누구도 할 수 있느냐 하면 애굽의 술객들이 따라 했잖아요. 네 번째 재앙에 대해서는 그들이 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첫 번째 재앙 할 때 지팡이가 뱀 되는 거, 사실은 그것도 하긴 했는데 차이점이 있어요. 지팡이가 뱀 되고 난 뒤에 모세가 한 뱀이 저쪽의 뱀을 잡아 먹어버리죠. 이렇게 레벨이 다른 거예요. 레벨이 다른데 하나님께서 애굽의 술객들이 하도록 했죠. 왜냐 하면 그래야 바로 왕이 강퍅해지니까.

교사가 애를 때릴 때 교사는 항상 한두 대 때리고 보낼 생각하는데 애가 맞으면서 반항하게 되면 한 대 맞을 거 더 맞는다고요. 그냥 점잖게 ‘잘못했습니다.’ 하면 되는데 갑자기 대들면 시계까지 풀고 ‘네 아버지 뭐하시노?’ 저 뒤에서 ‘조폭인데요.’ 조폭이라 하니 이래서 성질을 더 돋운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는 하나님 일 따로 있고 인간 일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인간의 모든 마귀의 움직임, 모든 움직임이 누구 일에 통솔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 일에 통솔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의 어떤 일을 할 때는 우리가 인간 대 인간에서는 요거는 네 일이고 요거는 내 일이고 딱 구분이 되듯이 구분 될 때 자기의 자아 성, 주체성, 정체성도 있고 또 그게 있어야 ‘하나님 저 어때요? 쟤는 기도 안했는데 저는 기도 했습니다. 쟤는 헌금 안 했는데 저는 헌금 했습니다.’ 자기의 자존심이 살잖아요. 그렇잖아요. 결국 신앙이라는 거, 종교라는 거, 격려라는 게, 결국은 다 어디로 돌아오느냐 하면 자기의 가치성의 확립돼서 되돌아 와버려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 한 적이 있어요. 인간이 반성하는 순간, 이게 얼마나 중요한 말인지 한번 적어볼게요. 인간이 반성하는 순간, 이게 다른 말로 회개죠. 인간이 반성하는 순간 그는 신이 된다. 충분히 일리 있는 소리에요. 내가 반성하는 순간 자기는 신이 돼요. 왜냐 하면 반성이라는 것은 누가 누굴 관리했다? 성경은 어떻게 돼요? “네 모든 것을 나한테 맡겨라“ 했죠? 맡기는 대신 반성해버리면 어떻게 돼요? 맡길 필요가 없잖아요. 내 인생관리, 인생 디자인, 나의 매니저가 누구냐 하면 내가 되는 거죠. 내 매니저가 내가 된다는 말은 분명히 내가 기대하는 모델이 있을 것이고, 그 모델과 현재 내가 간격이 벌어졌지만 내가 열심히 성경보고 기도하고 성경공부하고 이렇게 열심히 착한 일하게 되면 내가 원했던 그 모델과 현재 내가 일치가 된다면 나는 더 이상 신 앞에서도 흠집날 일이 없지 않습니까? 그걸 자기 완결성이라 해요. 자족성, 자기 완결성이 되니까.

그러면 교인들이 교회 와서 목사님 설교 듣는다는 말은 결국 자기 관리하는데 참고 사항을 듣는 셈이 되죠. 쉽게 말해서 도 닦는데 어느 레벨까지 도 닦으면 하나님이 영광 되는 그런 레벨이 될 수 있는가, 또 하나님께 이쁨 받는가, 이쁨 받는다면 어떤 것을 획득할 수 있느냐 하면 더 이상 내 인생 길에 주께서 벌 내린다든지 징벌 한다든지, 저주를 내리고 싶어도 완벽하니까 저주 대신 뭘 내리겠어요? 복, 행운이 찾아오겠죠. 그러면 이 땅에서 누가 성공해요? 본인이 본인 관리 잘하게 되면 본인이 저주 대신 징벌 대신 계속해서 남보다 더 업그레이드 된 복이 올 테니까 그 기회를 놓칠 필요가 없겠죠.

그래서 도 닦을 수 있는 새로운 신선한 아이디어를 계속 제공해주면 교인들은 그 목사 시키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자기는 뭐 자식 결혼도 해야 되고 취직도 있고 이러면 이건 부모의 도리가 뭡니까? 자식 장가보내고 시집보내고 취직시켜 주는데 뒤에서 뒷바라지 하는 어머니의 그 자식 사랑 있잖아요? 그것을 교회 와서 철야하면서 할 수 있는데 자기 잘 되고 자기 교회 이름 걸쳐놓은 자식도 잘 되고, 이게 바로 옛날 불교가 해왔던 그대로 똑같이 이어가는 겁니다. 껍데기만 교회고 껍데기만 불교일 뿐이지 내용은 똑같다 이 말이죠. 그래 놓고 하는 말이 평생에 하나님 일만 했다는 거예요. 하나님 일만 하면서 영광만 돌렸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끼리 노는 방식을 자기도 인간으로 보이니까 자기한테 그대로 적용시킨다는 그것을 뻔히 아시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너하고 급이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여기 18절 끝에 한번 봅시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이렇게 돼 있어요. 여기서 굉장히 난해한 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했으면 동등이 안 되잖아요?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이 동등이 됩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 뭐라 했어요? 아버지와 아들이라 하니까 동등 된다고 그렇게 간주한 겁니다.

도대체 유대인들이 어디에 근거해서 “내가 아버지 아들이다.” 이렇게 한 것이 동등이냐? 그게 어디에 근거해서 그렇게 됐냐 하면 그건 다윗 언약에 근거해서 그렇게 되거든요. 다윗의 자손이 오시면 메시야입니다. 당시에 봐서. 구약에 쓴 거 보면 다윗이 자손이 오게 돼 있죠? 에스겔 같은 경우에도. 다윗의 자손이 온다고 돼 있거든요.

만약에 우리 몸이 있는데 지금 8시가 안 됐는데 8시에 누가 온다고 하면 우리는 은근히 기다리잖아요? 그런데 오실 분이 별 오나가나 별 도움이 안 되는 사람 같으면 우리가 기다리지도 않는다 하는데, 성경에서 다윗의 자손은 사무엘하 7장에 보면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는데 다니엘에 보면 어떻게 오느냐 하면 구름 타고 와요. 이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사무엘하 끝에 다윗이 예언을 한 대목이 나옵니다. 예언에 의하면 다윗의 자손은 구름 타고 오게 돼 있어요. 구름 타고 올 때 작살냅니다. 혈통적으로 아브라함 족속이 아니면, 할례 받지 아니하면, 이스라엘 아니면, 완전히 사그리 다 저주, 심판을 해버려요. 누구만 남기느냐 하면 이스라엘과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복종한 유대인들만 남겨서 영원한 이 땅에 천국을 이루는 그런 예언이 있어요.

그런데 그 예언을 이룰 분이 다윗의 자손이거든요. 예수님 가실 때 문둥병자, 소경들이 뭐라 합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했잖아요?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다윗이 자손으로 여겼다는 그 다윗의 자손이 뭐냐, 하나님이 함께 계셨던 아드님이 오는 거예요. 그게 인자로 돼 있고 인자는 옛날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있었는데 그게 떨어져서 이 아드님이 심판하러 오시는 거예요. 어떻게? 구름 타고.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 보고 “구름 타고 왔어? 너 구름 타고 왔어?” 이렇게 묻는 거예요. 자기를 메시야라고 하니까. 구름 타고 왔느냐고 묻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조금 있다 타고 온다.” 하는 거예요. “내가 올라갔다 나중에 타고 온다.” 하니까 “죽여 버려라”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유대인들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저들은 글자 말씀 그대로 믿기 때문에 우리가 국어 교과서나 수학이나 사회 교과서 보면서 우리가 이해 안 된다 그런 거 없잖아요? 생물 보면서 이해 안 된다 없잖아요? 모르면 선생님한테 물으면 되니까. 생물 선생님 8번 문제 정답이 몇 개입니까? 물으면 되니까. 이해 안 될 게 없다 말이죠. 마찬가지로 성경을 줬다는 말은 이해가 된다고 전제를 깔고 성경을 줬다고 그들이 생각하는 거예요.

민수기 교제 봤죠? 이번에 ‘민수기 속의 그리스도‘ 1월 11일 수련회 할 교제를 미리 올려놨잖아요. 그 교제 보면 뭐로 돼 있어요? “성경은 얼룩이다.“ 돼 있잖아요? 얼룩이란 말은 뭐냐 하면 3D 사진 보면 얼룩덜룩 하게 무슨 그림인지 모르겠죠? 하지만 안경 쓰고 보면 선명하게 입체적으로 나오잖아요. 성경 자체가 이게 정보가 있긴 있는데 이 정보가 인간의 육적인 시선 가지고는 이게 안 보이게 돼 있어요. 예수님께서 그 점을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너희가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한다.“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뭐냐 하면 그런 생각하지 않고 십계명을 줬다? 이건 지킬 능력이 있고 그 명령이 뭔 뜻인지 알아먹기 때문에 줬을 것이다. 일단은 그 실체를 알려면 알아먹어야 되고 알아먹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능력이 있으니까 말씀을 준 거예요. 그러면 열심히 하고 정신 차리면 지키고 태만하고 딴 데 신경 쓰면 못 지키고, 그러면 제가 아까 처음에 강의할 때 뭐라 했습니까? 사람은 스스로 자기가 반성한 순간 뭐가 된다? 신이 되는 순간이 되는 겁니다. 신이 드디어 나한테 책망 못하는 그런 레벨에 내가 도달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 자질과 그런 능력을 하나님이 줬다는 겁니다. 지금 천주교도 마찬가지에요. 천주교가 가르치는 게 그겁니다. 인간이 범죄 했지만 사실은 범죄를 회복할 수 있는 그 씨앗은 아직도 범죄에 닫히지 않고 남아있다는 겁니다. 고걸 잘 개발하고 잘 물 줘서 양육시키면 점점 더 이 몸에서 선한 요소가 퍼지면서 악이 점령했던 지역을 선이 탈환이 가능하다고 본 겁니다.

그럼 어떻게? 성당 섬기고 헌금 많이 하고 전도 선교 많이 하고 교황 말 잘 듣고 신부 말 잘 들으면 그렇게 되죠. 그러면 교인들은 그 점에 대해서 굉장히 좋아들 하죠. 왜, 자기를 긍정적으로 보잖아요. 자기를 애초부터 싹을 자르는 게 아니잖아요? 하면 된다, 아닙니까? 희망을 주잖아요? 절망치 마라.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선다는 적극적 사고방식을 주니까. 희망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떤 통 밥으로 머리를 쓸 수 있느냐 하면 지금 사업하느라 바쁘잖아요? 지금 젊을 때는 세상 좀 즐기고 나중에 60 퇴직해서 별 볼일 없잖아요? 그럴 때 젊을 때 못 다한 그 싹 틔우기, 착한 싹 틔우기를 몰아서, 곧 죽기 때문에 시험 준비처럼 밤새움하는 거예요. 밤 새워서 몰아서 빡세게 하게 되면 천국 가는데 별 지장이 없다. 그런 계산도 하게 되겠죠. 인간들이.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무슨 개념이냐 하면 양적 윤리개념 이예요. 선과 악을 무게 달듯이 하는 거예요. 이거는 옛날 그리스의 철학에도 나오죠. 우리나라 전래동화에도 나오고, 저울 달아서. 그래서 법원에 뭐가 있습니까? 정의의 여신이 앞에 뭐 달고 있어요? 정의의 여신이 저울 달고 있죠.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이 저울을 들었죠. 법이라는 게 뭐냐 하면 악보다 선이 많으면 죽어서 좋은데 가게 돼 있고 악이 선보다 많으면 지옥 가게 되죠.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부기죠. 복식부기, 차변 대변 단기 순위 계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계산 잘하면 51% 나중에 배당금 받을 수 있어요. 보험에서 환급보장형이 될 수 있어요.

이 인간 보세요. 선악과 따먹고 선과 악을 양으로, 중량으로 계산할 수 있다는 이 생각, 이것이 아담의 족속이 다 마찬가지고 유대인도 마찬가지라니까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이 구름 타고 아들이 오거든요. 올 때 그들은 뭐만 하면 돼요? 아드님이 딴 데 안 가고 아들이 올 때 실망 안 되도록 자기는 아드님이 영접할 수 있는 모든 그 정보를 미리 알아서 ‘아들이다.’ 하면 반기면 되거든요. 이게 마태복음 25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신랑이 밤에 올 때, 유대인보고 이야기하거든요. 마태복음 25장의 유명한 비유가 기름 준비한 여자 비유도 나오지만 또 뭐가 나오느냐 하면 달란트 비유라는 게 있죠. 둘 다 같은 내용 이예요. 둘 다 유대인 치는 내용입니다. 메시야가 왔으되 못 알아보는, 그런 자의 절망감, 그런 자의 심판, 그걸 언급하거든요. 내가, 신랑이 왔으되 그들이 다 같이 자고 있어요. 이상현 목사님 교회 강의 녹취한 게 있잖아요. 거기 보면 비유 이야기를 다 올려놨습니다. 다 같이 잠을 자요. 다 자는데 잠을 누가 깨우느냐 하면 주님이 깨우죠. 주님이 깨우는데 그때 예수님과 결합이 가능했던 지혜로운 다섯 처녀의 특징은 뭐냐 하면 ‘신랑이 여기 있다.’고 여기고 잠을 잔거예요. 그런데 어리석은 처녀들은 신랑은 아직 자기와 함께 있지 않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구름 타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메시야는 지금 어디 대기돼 있느냐 하면 하늘나라 대기돼 있고 우리가 납득이 되도록, 알아보도록 오신다는 거죠. 오실 때 그때 영접하면 된다는 게 유대인의 사고방식입니다. 그걸 어리석은 다섯 처녀로 표현한 거예요.

그리고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나중에 성령을 받게 되면 주님이 성령을 통해서 함께 있음을 아는 거죠. 항상 함께 살아가는 거예요. 예수님도 요한복음 17장에서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그때 너희가 나와 하나가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제는 나의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가 된다. 그렇게 언급했어요. 요한복음 20장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이 말이거든요. 그럼 그전에는 내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가 됐다? 안 됐다? 안 되고 너희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아닌 거예요. 어떤 변화를 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 변화의 조치가 뭐냐 하면 성령을 받게 되면 그렇게 되는데 성령은 뭐냐 하면 이런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있는 그 자리를 누구한테 내주는 겁니까? 자기 사랑하는 자에게 내어줌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있는 방식이 예수님에게만 적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걸 확장시켜서 자기의 사랑하는 자에게도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사랑하는 자들이 함께 있는 그 자리가 무슨 자리냐. 그게 바로 성령의 자리, 그것이 보혜사 자리입니다.

그러면 제가 방금 이렇게 언급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것은 결국은 조건이 있죠? 조건은 무슨 조건이냐 하면 예수님과 아버지가 있던 그 자리가 확장돼야 될 우리한테까지 밀려와야 될 그러한 조건이 장착돼야 되고 그게 확립이 돼야 된다는 거죠. 구원이. 그러면 그 말은 다시 말해서 현재는 제자들이고 유대인들이고 전~혀 예수님과 아버지가 아는 그 자리를 알 수 있다? 없다? 알 수가 없는 겁니다.

5장 38절 한번 봅시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이렇게 돼 있어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라” 자,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뭔 뜻으로 이야기했는지 제가 물어봐서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일한다는데 어떤 일을 한다는 겁니까? 결국 일한다는 것은 너희들이 납득이 되는 일을 한다는 것이 아니고 납득 되지 않음을 확장시키는 일을 하는 거죠.

지금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이야기하잖아요? 하나님 아버지를 안다고 여기거든요. 조금 있으면 아들 되신 다윗의 자손이 올 것이고, 그러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했고. 이미 그 사상은 온 유대 나라에 다 퍼져있는 사상이죠. 이미 제자들도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그들은 하나님의 일이라 여겼다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일이라고 여기니까 예수님이 하는 일을 여기 38절에 보면 믿었습니까? 안 믿었습니까? 이미 자기가 하나님을 알고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분인지 안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기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주님 하는 일을 못 믿죠. 믿을 수가 없죠.

그러면 예수님과 유대인 사이에는 지금 못 믿는 관계, 못 믿는 철조망의 영역이 있죠. 그 못 믿는 영역을 끝까지 주님께서는 못 믿게 만드는 영역으로 계속해서 확장해 나가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 제자들도 믿는다? 못 믿는다? 그들도 못 믿죠.

지금 여러분들이 아까 제가 성령이란 언급을 했죠? 지금 성령이 안 온 상태에서 제자들이 공부 열심히 하면 예수님 믿어집니까? 안 믿어집니까? 안 믿어지죠. 그 이야기를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어떤 인간도 육이기 때문에 육으로 난 것은 그냥 육인 거예요.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안다? 모른다? 모르는 거예요. 성령이 와서 처소를 함께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끝까지 어떻게 하느냐? 끝까지 우리로 하여금 못 믿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되겠죠. 그 일이 뭐냐, 아버지의 일이 된다. 아버지의 일. 그게 아버지의 일 이예요.

그러면 아버지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는 유대인의 신학을 비켜가서는 안 되겠죠? 마주치면서 “안 믿어지지? 안 믿어지지? 못 믿겠지? 그게 바로 아버지 일이야.” 너희들 믿지 못하게 만드는 일이 아버지 일이고, 우리 능력으로, 우리 지혜로 예수님을 못 믿게 하는 것이 아버지 일입니다. 지금도 아버지 일이 길 바닥에, 차에 예수님이 일 많이 하고 있어요.

목회자가, 설교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못 믿게 하는 일 이예요. 믿지 말라는 이야깁니다. 지금. 자꾸 목사가 믿으라고 유도를 하니까 자꾸 손들고 나오니까 이게 골치 아픈 거예요. 성령 안 받은 상태에서 믿는다고 하니까 교회가 친목단체가 돼 버렸잖아요? 잘난 자들이 우두머리가 돼 버린 교회가 돼 버린 거예요. 그래서 물어보면 “어떻게 믿게 됐습니까?” “철야해서 믿게 되었습니다.” 무슨 철야해서 믿는 믿음이 어디 있어요? “어떻게 했습니까?” “찬송가 대로 어머니의 기도 때문에” 어머니 기도 때문에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어머니 기도 못 잊어 돌아온 게 아니에요.

안 믿어야 돼요. 안 믿는 게 하나님의 일 이예요. 믿습니까? 우리의 실력으로써 우리 인간이 타고난 아담의 속성을 우리가 동의하신다면 우리 조상이 아담 하나밖에 없다는 걸 동의하신다면 절대로 우리는 예수님을 안 믿어지는 것이 당연하고 그 일조차 주께서 하신 일에 포함이 돼 있습니다. 못 믿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내가 지난 낮에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여러분들이 성경은 헛소리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일 낮 설교 처음에. 성경은 헛소리고, 창세기 1장에 7일 만에 창조는 거짓말이고, 지구 나이는 45억년이고, 우주는 147억년이고, 그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거부터 시작합시다. 처음부터 새로 다시 시작합시다.

성경은 옛날에 지혜 자들이 자기 사적인 견해를 수집하고 편집된 역사책에 불과하고 이 시대 어울리지 않고 그러니까 도저히 아무리 봐도 믿을 수 없는 책입니다. 이걸 믿을 수 없는 책이기 때문에 이거 지켰다고 복이라는 것은 아예 애초부터 기대하지 마세요. 믿지도 않으면서 무슨 복을 받아요? 말이 안 되죠. 내 형편이 나아진다? 미래가 풀릴 것이다. 죽어서 좋은 천국 갈 것이다. 성경 자체에서 그런 걸 뽑아내면 안 돼요. 왜냐 하면 여기 39절의 말씀에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 영생을 성경에서 얻을 줄 알고 유대인이 생각하잖아요? 그게 거짓말인 거예요. 그거는 너무 일방적인 거예요.

이 성경은 누구에 대해 증거한 것이다? 내게 대하여 증거한 것이다. 나를 믿지 않는데 영생이 있다? 그건 말이 안 되죠. 그러나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유대인들은 구약을 볼 때 자기가 일단 납득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 했을 것이고, 두 번째 실천에 옮길 내용들이기 때문에 역시 빡세게 노력만 한다면 누구든지 게으르지만 않는다면 이걸 지켜서 지킨 만큼 이게 자기 의가 되죠. 그 의가 있으면 죄가 저주와 심판 불행이 피해가니까 자기는 복을 받을 것이고, 그 의가 양적으로 커지면 나중에 천국도 갈 수 있는 의가 마일리지 쌓이듯이 쌓인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이걸 누가 제일 잘했느냐 하면 바리새인이 제일 잘했잖아요. 그래서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바로 예수님 하신 말씀 보세요. 그들의 사상을 그대로 가져와요.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누구도 천국 못 간다.”고 했다 말이죠. 그 말을 바꿔 이야기하게 되면 이 예수님 빼놓고, 나 빼놓고 천국이라 하는 곳은 의가 있어야 간다는 조건과 그리고 의가 항상 앞서간 사람부터 정원제로 잘려서 간다는 거죠. 물론 의가 양이 적은 사람은 끄트머리 부끄러운 구원 받겠죠. 어쨌든 간에 넉넉하게 합격 커트라인보다 훨씬 점수를 많이 받은 사람은 바리새인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그 시대에 일곱 개 계급을 나누어서 자기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을 제일 위에 놓고 그 다음에 서기관들 놓고 그 밑에 줄줄이 일반인 사람들을 계급으로 해서 천국에 그런 식으로 간다고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 것은 자기 보기에 이것은 성경에 부합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마치 단테의 신곡처럼. 그리고 천로역정처럼.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천로역정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이것은 여러분들이 제가 한번 물을 테니까 답변 해보세요. 자, 천국 올라가는 사다리가 있다 칩시다. 사다리가 있는데 여기 1, 2, 사다리 3개, 4개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1에서부터 3으로 올라가요. 그러면 1에서 올라가는 본인하고 이 사람이 4까지 올라가서 4까지 올라간 본인하고 같은 인간입니까? 다른 인간입니까? 같은 인간이죠. 그러면 사다리 1에서 2까지 올라간 행동과 3에서 4까지 올라간 행동과 4에서 올라가는 행동이 다른 행동일까요? 같은 행동일까요? 같은 행동이죠. 그러면 이 사람은 4까지 올라갈 필요없이 1 반복해도 똑같은 행동을 하는 거죠. 그러니 제자리 뛰기 하고 있는 거예요. 제자리 뛰기.

이 계단이 7646개 올라갔다 합시다. 7646에서 7647 올라갈 때 어떻게 올라갑니까? 처음에 올라갔을 때처럼 똑같은 행동이고 인간도 전혀 달라진 게 없어요. 매달려 있는 바퀴벌레가 벽 올라갈 때 그 밑에 5센티 바퀴벌레나 10센티 바퀴벌레나 똑같은 바퀴벌레잖아요. 10센티 올라갔다고 수고했다고 안 잡습니까? ‘아이쿠, 고생했는데 잡으려니까 아깝다.’ 이런 게 있습니까? 없어요. 동일한 바퀴벌레는 더구나 천국에 못 가요. 이 계단을 얼마나 밟았든지 관계없이, 이 계단이 왜 기분 좋으냐 하면 주님 보시기에 관심이 없고 자기하고 타인하고 비교하니까 기분이 좋은 거예요. ‘그래 너는 세상에서 재물이나 돈 많이 벌어라. 나는 교회 와서 장로 됐다. 누가 천국 가는지 두고 보자.’ 둘 다 지옥 가지 뭐. 어떤 대리 만족 같은 거예요. 어떤 결핍에 대한 보상? 세상적으로 실패한 것 종교적으로 어떤 보상받으려는 심리적은 보상을 받으려는 거예요.

그래서 플라톤인지 아리스토텔레스인가 그런 이야기했죠. 사람은 결핍을 찾기 위해서 타인을 찾는다는. 자기의 모자란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타인을 찾아요. 외롭다는 핑계 대면서. 외롭긴 개 코가 외로워요? 그러면 외롭다 해서 집에 강도 오면 반갑겠네. 아니죠. 아니죠. 외롭다는 건 핑계고, 강도하고 술 한 잔 하고 밤새 놀면 재밌겠네. 왜, 그럼 되는데 아니죠. 외롭다는 건 핑계고 나의 결핍을 채워줄 사람일 때 좋은 거예요. 외롭다는 건 핑계고 나한테 빼먹지 말고 내 결핍을 보완해주는 사람, 그럴 때는 ‘너 외로운데 잘 됐다.’ 그렇게 이야기하죠.

요새 결혼요? 요샌 결혼 할 때도 문제지만 하고 나서도 자기 완결적이 아니에요. 언제 갈라질지 몰라요. 서로서로가 결혼하고 난 뒤에도 전쟁 끝나지 않았어요. 몰라, 결혼하고 오래 살면 더 좋아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옛날보다 못하면 서서히 발을 빼는 전략에 나서죠.

아, 참 이 본문으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거에요. “인간아, 네 주제나 알아라. 네 주제파악도 안 되면서 무슨 다윗의 자손이니, 뭐 하나님을 운운해? 네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네가 뭘 추구하고 있고 네가 얼마나 더러운가를 모르면서.” 생각해 보세요.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다윗은 어떤 인간이었습니까? 다윗은 모친의 죄에서 태어난 거죠.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난 자의 자손은 어떤 자식이겠어요? 저주를 받아도 최후의 저주를 받을 분이 태어나야 되겠죠. 그것이 십자가잖아요.

메시야는 바로 죄 범벅이로 온 거예요. 본인이 죄 짓지 않았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 뒤집어 쓴 게 완전히 시커먼 콜타르를 바케스로 뒤집어 써버렸어요. 그래서 죄를 뒤집어쓰니까 아버지한테 버림받고 당연하죠.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게 아버지 일 이예요. 이게 아버지 일이고 아버지가 일하시니 누가 일한다? 이게 아들의 일 이예요.

누구도 아버지 아들의 일에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너희가 하나님을 자기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동등 되게 여겼다 했지만 유대인들은 아들과 아버지의 동등 됨의 의미도 그들은 잘못 사용하고 있어요. 그들은 같은 하나님 쪽이라고 생각해서 다니엘서에 보면 아들이 보좌에 같이 있다가 구름 타고 내려와서 자기 바벨론 제국에 고난 받는 자기 백성을 태산을 이루어서 바꿔치기 해요. 하나님의 백성과 이쪽에 있는 걸 완전히 쳐부수고 그것을 누구한테? 하나님의 다윗의 백성한테 다 넘기는 것이 다니엘에 예언돼 있습니다.

그 예언된 것을 그들은 스스로 이해한다고 여겼습니까? 이해 못한다고 여겼습니까? 이해를 한다고 여긴 거예요. 이해를 한다고 하니까 누구를 못 믿어요?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 일을 못 믿어요. 아버지 일은 뭐라 했습니까? 죄를 말하고 저주를 보편화 시키는 거예요. 이 저주를 실제화 시키는 겁니다. 이 땅에서 심판과 저주를 실제화 시키는 거예요.

이걸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 세례요한이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해놓고 그 나라가 어떤 나라에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결국은 도끼 들고 설치는 나라 아닙니까? 그렇죠?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는 거예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타작마당 이예요. 심판 없는 하늘나라 없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죄 없는 인간은 없다는 뜻이고 모든 인간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 영광에 이르지를 못합니다. 모든 인간이 죄를 범했으매 영광에 이르지를 못해요. 끝 이예요. 끝. 교회 열군데, 스무 군데 세운다고 그게 영광 아니에요. 영광은 예수님 피를 믿음으로만 영광되지, 그 외 영광 되는 방법 없어요. 헌금 십일조 전도 안식일 선교, 어떤 것도, 어떤 순교를 해도 영광이 안 돼요. 오직 어떤 경우라고 예수님 피를 믿어야 영광 되는 겁니다.

그러면 자발적으로 헌금하라는 것은 뭔 뜻입니까? 헌금 해봐라. 헌금 해보면 거기서 비로소 자발적으로 헌금하면서 뭘 느끼겠어요? “주여 내가 죄인입니다.”를 느끼겠죠.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벌거벗은 채로 만들어서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 때 비록 죄인이 되게 하시는 그 작업이 하나님의 일이 돼요. 죄인으로 작업됨으로써 ‘어떤 경우도 우리는 믿을 수 없는 분인데 십자가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를 성령을 통해서 죄와 의가 만나서 그 결실물로 우리를 만들었다는 것을 확인케 하죠.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된다 이 말이죠.

제가 아까도 유튜브 동영상에서 이야기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함이지, 나를 위하여 살게 함이 아니잖아요? 여기 빌립보서 1장에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은혜를 주신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은혜를 자꾸 우리 소유화 시켜서 날 위해서 하나님이 도와준 걸로 오해한다 말이죠.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면 뭐는 달라져야 돼요? 날 위해서는 이미 날라 가 버렸어요. 더 이상 날 위해서는 없는 거예요. 영구만 없는 게 아닙니다. 나도 없어요. “날 위해서”라 하는 것은 은혜 받는 자에게는 더 이상 날 위해서는 없습니다. 30살 먹어서 죽든 25살 먹어서 죽든 19살 먹어서 물에 빠져 죽든 그거 전부 다 주께서 뜻이 있어서 죽게 한 거예요. 심지어는 누굽니까? 딸 결혼식도 못 보고 죽은 사람 있잖아요. 3월 달에 결혼하는데. 김 자옥 권사님, 딸 결혼식이 뭐 대단하다고. 우리 같은 인간 입장에서는 뭐로 보여요? 같은 인간이기에 같은 인간이 인간을 상대하는 방법을 가지고 그걸 그대로 하나님께 올려 보내면서 ‘너무 참 애석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아까 뭐라 했습니까? 이게 사다리에요. 백날 기어올라봐야 똑같은 바퀴벌레에요.

그러면 이것을 여러분 날 없애야 됩니까? 질문하겠죠. 없애야 된다는 말은 있다. 없다. 없다. 있다. 존재에 관한 문제잖아요? 날 없애야 됩니까? 하는데 주님께서는 있다. 없다. 의미 두지 말고 인식론으로 하는 거예요. 우리가 주님 생각할 때는 내 생각이 안 나잖아요? 그러면 되잖아요.

우리가 언제 고민 걱정이 없던가요? 어ᄄᅠᆫ 사태가 해결돼서 없어진 게 아니고 딴 생각할 때 없어져요. 예를 들어서 이렇게 손가락에 피가 나서 아! 과일 먹다가 손가락에 피가 났다 말이죠. 피가 나서 ‘요새는 왜 걸핏하면 피가 나는지 모르겠다.’ 하고 짜증을 내고 있는데 집에서 갑자기 현관에서 ‘엄마, 나 수능 올 100이야.’ 이렇게 나온다면 손가락 피 나는 게 문제가 돼요? 안 돼요? 이게 고민거리도 안 되죠. 전혀 걱정거리가 안 되죠. 딴 생각을 함으로써 딴 생각이 뭐냐 하면 누가 나를 관리한다는 생각에 몰두해 버리면 더 이상 내가 나를 관리할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누가 나를 관리할 자가 없으면 내 문제 누가 관리해야 돼요? 누가 매니저에요? 내가 내 관리 안 하면 아무도 관리해 줄 사람이 없잖아요. 좋든 싫든 내 인생 내가 죽기 살기로,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고 안 죽으려고 사는 거예요. 인간은 안 죽으려고 사는 거예요. 안 죽으려고. 사는 이유 없어요. 그냥 쫓아오니까. 인간이 개 물 일이 없는데 어떤 집에 갔는데 개한테 잘못 보여서 개가 따라올 때 우리는 왜 달려갑니까? 이유는 단 한 가지에요. 쫓아오기 때문에 달려가는 거예요.

우리는 죽음한테 물렸어요. 우리는 왜 자꾸 일해야 되고 움직여야 되는 겁니까? 설거지 왜 해야 되고 일 왜 해야 됩니까? 뒤에서 따라오는 게 있어요. 알 수 없는 공포가 따라와요. 자꾸 따라와요. 곰이 자꾸 따라오는 거예요. 곰. 곰을 피하는 방법은 간단해요. 죽은 척하면 되죠. 죽은 척하면 와서 혓바닥 몇 번 핥다가 죽었네, 하고 넘어가잖아요. 이게 유월절 아닙니까? 예수님 피로 말미암아 나는 죽었고 내 관리자는 주님이 관리한다고 누워있으면 유월절이 일어나요. 우리 피를 보고 그냥 저주가 넘어가요.

행운을 소유할 필요 없어요. 그냥 주님과 함께 있으면 그게 복 이예요.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자가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한 자가 저주 받죠. 새로운 복과 저주를 겨냥한 새로운 기준이 등장한 이상은 내가 내 복 받기 위해서 내가 나에게 어떤 변화 시킬 하등의 이유가 없다니까요. 내가 착한 마음먹는다고 복 오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내가 복의 기준이 돼 버려요. 예수님이 복의 기준이 된 이상은 예수님한테 신경 써버리면 수능 올 100에 관심 둬버리면 손가락 이렇게 다쳐도 이게 복 이예요. 항상 이 복이라 하는 것은 주께서 준비한 복은 어떻게 오느냐 하면 예상 밖으로 와요. 참, 예상 밖으로 와요. 정말.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애가 시험 쳤는데 성적이 오를 때 됐는데 하고 걱정하고 있을 때 아, 잘 쳤는가. 시험 치르고 난 뒤에 ‘아빠, 너무 잘 쳤어. 엄마 너무 잘 쳤어.‘ 이렇게 바라고 있는데 지금 뭐냐 하면 허리띠를 너무 조여서 잘 안 풀리는 거예요. 안 풀리는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고 애가 수능 쳤는데 점수가 고민이 돼 있을 때 갑자기 애가 ’엄마 걱정하지 마.‘ 하는 그 소리 듣는 순간 보니까 이것도 풀어졌어. 이거 풀려고 30분 동안 애썼는데 고장 나서 안 풀리더니만 딴 거 하다 보니 풀려버렸어요.

꼭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대하고 우리가 애쓰고 우리가 기도한 덕분으로 내가 잘 됐다는 소리를 못하게 하기 위해서. 왜냐 하면 우리는 그걸 믿거든요. 우리는 주님을 못 믿는 존재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나를 믿기 때문에 나는 믿는 것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고, 딴 거 생각하다 보니까 이게 절로 해결돼 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뭐라 하느냐 하면 ‘주님의 공로입니다.’라는 말이 나오도록 항상 일을 그런 식으로 이끌어 가요. 그런 식으로. 그래야 우리가 계속해서 못 믿는 자가 되고 믿지도 않으면서 복은 계속 받고 희한한 관계에요.

믿지도 않는데 복 받는다는 말은 뭡니까? 우리 믿음은 애초부터 이거는 예수님을 믿을 믿음이 아니고 예수 믿는다는 티를 내면서 나의 믿음을 내가 믿는 식의 믿음 밖에는 내가 내놓을 게 없어요. 이것은 누워서 침 뱉기라, 누워서 침 뱉으면 어디로 떨어집니까? 예수님 얼굴에 떨어집니까? 자기 얼굴에 떨어지죠. 교회 와서 열심 내는 거, 기도 하는 거, 다~ 그거 공짜 아닙니다. 40일 철야 했는데 이만큼은 내줘야죠. 다 공짜 아니에요. 다 요구조건이 있어요. 그러니까 주께서는 그 손을 때치 하잖아요. “어디서 수작이야? 어디 네 인생 네가 관리해?” 첫째 시간 마치면서 분명히 합시다. 우리 인생 더 이상 우리가 관리 하지 맙시다. 관리하지 않을 때 비로소 꾸준히 다룬 분이 나를 지금까지 관리해 왔음을 새삼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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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요한복음 5장17(하나님의 관리)

141120b-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은 약간 난해합니다. 난해한 게 뭐냐 하면 18절에 나오는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안식일에 관한 문제를 이제 하겠습니다. 물론 지난 시간도 언급을 했습니다마는 안식이라는 것을 왜 그렇게 유대인들이 강조를 하느냐, 이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목매고 있어요. 그런데 그 점을 누가 알고 있느냐, 예수님이 익히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안식일 날 일부러 “걸어가라”고 했죠.

제일 건드리지 말아야 될 것을 의도적으로 건드려 보는 겁니다. 화가 안 날 수가 없죠. 안식일을 요렇게 지켜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딱 틀이 잡힌 프레임이죠. 그 프레임을 짜놓은 그 프레임을 주께서는 완전히 개 무시 해버려요. 개 무시. “뭐 안식일 날 일하면 안 된다고? 아버지가 일하니 나도 일한다.” 그 일이 뭐냐, 안식일을 찢어버리는 일을 해요. 안식일을 찢어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안식일을 찢어버릴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보고 “당신과 당신이 병 고친 사람은 안식일을 모독했습니다.”라고 했잖아요. 주님께서는 이거에요. “이게 바로 안식일이야. 안식일을 찢는 게 안식일이야.” 율법을 위반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다. 이 말입니다. 얼~마나 도발적입니까? 이건 반전 정도가 아니에요. 완전히 도발 이예요. 이건 컵을 거꾸로 뒤집는 거와 똑같은 겁니다. 상 뒤집는 거와 같아요.

‘율법을 건드리지 말고 딴 길로 가라.‘가 아니라 율법을 정면 돌파하면서 율법을 찢으면서 율법 가운데 율법의 완성을 내버린다 말이죠. 찐빵 먹을 때 앙꼬 먹으려고 먹습니까? 밀가루 먹으려고 먹습니까? 팥 앙꼬 먹어야죠. 앙꼬는 어디 있습니까? 그 중심, 가운데 있죠. 가운데를 터뜨려야 제대로 호빵 먹은 거잖아요. 갑자기 호빵이 먹고 싶네. 안식일 속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 본인이 들어있는 거예요. 이 안식일을 누가 만들었다? 내가 만든 거예요. 내가. 내가 안식일 출제위원 이예요. 본인이 출제위원 이예요.

그런데 열쇠는 누가 있느냐, 해답은 누가 갖고 있느냐? 출제자가 해답을 갖고 있는 거예요. 수능 오류 있다고요? 나 같으면 오류 없어요. 왜, 출제위원 자기 맘 대로라. 내가 까라면, 내가 1번이라면 1번 해야 돼요. 이유가 없어요. 이유 따지지 마. 내가 1번이라면 1번이야. 예수님 식은 이 식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혼자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하고 의논해서 한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말 이예요. 이 말만 알게 되면 오늘 강의 다 알았다고 볼 수 있어요. 뭐냐 율법 이전에 예수님 있었어요. 그러면 율법은 왜 있는가? 예수님을 증거 하라고 있는 거예요. 정답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율법을 어떻게 다루든 그 전부가 예수님이 다뤘다는 이유 때문에 다 정답이 되는 겁니다.

자, 예를 들면은요,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두 번째 시간 어려워요. 뭐냐 하면 네가 맘속으로 간음한 것이 간음죄라 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그걸 지키려면 마음속으로 간음을 안 하면 되겠죠. 그러면 내가 질문하는 거예요. 수능입니다. 다음 중 간음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은? ⓵번, 마음속으로 간음하지 않은 사람. ⓶번, 간음해 놓고 예수 믿는 사람, 몇 번입니까? ⓶번이 정답이죠. 그게 뭐냐 하면 성경에 나오는 정답이죠. 사랑은 모든 율법을 다 이뤘느니라. 그 사랑이라 하는 것은 사랑을 주신 사랑 이예요. 내가 만든 사랑 말고. 내게 없는 사랑인데 찾아온 사랑, 그 찾아온 사랑 속에 있는 사람은 그 자체가 정답 이예요. 그 자체가 율법의 완성이라니까요. 우리 자체가 율법의 완성 이예요.

유리 세공할 때 전에 여러 번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마는 아저씨들이 뜨거운 용광로 액을 입으로 파이프를 불잖아요. 그러면 밑에 동그랗게 뭐가 등장합니까? 동그랗게 유리 봉 같은 유리그릇이 나오죠? 혹 불면. 요게 성도에요. 성도. 요 부는 게 율법이고, 율법을 혹 불면 뭐가 나온다? 성도 나오는 거예요. 율법은 율법을 통해서 제사법이 이뤄지거든요. 제사법이 이뤄지게 되면 죄 용서가 이뤄지죠. 그 죄 용서의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물방울처럼 나올 때 혹 불면서 나오는 요게 성도에요. 이게 그리스도의 몸이고 지체가 된다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들은 예수를 못 믿어요. 못 믿기 때문에 인간들은 어떻게 합니까? 이 율법을 자기가 지켜서 뭐가 생산되고? 자기 의가 생산되고, 로마서 10장의 말씀처럼. 자기 의를 만들어서 자기 의 가지고 자기가 상상한, 가짜 신이죠. 상상한 여호와 하나님.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이 가짜입니다. 이게 내가 이야기하니까 엉뚱한 소리 하는 것 같은데 이게 사울이란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 믿었잖아요? 그 사람 여호와 믿었잖아요? 여호와를 잘 섬기기 위해서 뭘 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였잖아요. 그가 생각한 여호와는 이게 가짜 여호와에요. 인간은 여호와를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왜, 숨어계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무도 몰라요. 다만 숨어있는 독생자가 나타날 뿐이지, 하나님은 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품에 있는 독생자가 나타났을 뿐 이예요. 그 독생자 나타나니까 사람들은 독생자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고수하다 보니까 독생자하고 등지게 돼 있던 거예요. 지금 일이 그렇게 된 겁니다.

십자가 사건이 왜 십자가냐 하면 이게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종교와 모든 신이 다 가짜인 것을 폭로당해서 그래서 생긴 사건이 십자가 사건 이예요. 인간들이 화가 나서. 인간이 예수님한테 삐져버렸어요. 인간은 예수님을 못 믿습니다. 못 믿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안 믿으면 되는 거죠. 안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냥 살면 돼요. 살게 되면 성령이 찾아오게 되면 구원 받고, 성령이 안 찾아오게 되면 그냥 살다 지옥 가고, 그게 인간의 팔자에요.

왜 그렇게 했는가? 우리 예수님이 한쪽을 누구는 미워하고 한쪽은 사랑할 권한이 오직 주님에게만 있고 그 주님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래요.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여기 요한복음 5장 21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자기가 원하는 자를 살려요.

안식일 하기 전에 로마서 14장 잠간 한번 봅시다. 로마서 14장 보고 안식일 봅시다.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고 이게 관련이 있어서 그래요. 이걸 설명을 해줘야 안식일 설명이 되니까. 14장 9절 보시고 제가 질문 한번 던져보겠습니다. 누가 읽어보세요.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왜 주께서 그냥 나타남 그 자체로 죽은 자와 산자가 왜 안 되는 겁니까? 왜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야 그 다음에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시는 이유가 뭐냐? 그게 참 희한하잖아요? 우리는 존재로 충분하잖아요. 내가 심판자잖아요. 판사가 피고 앞에서 재판하면서 자기가 재주를 넘는다든지 그럴 필요가 있어요?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 판결 내리면 그만이잖아요? 피고한테 판결 내리기 전에 세숫대야에 손 씻고 그런 행동합니까? 자기 아는 지식으로 판단하면 되잖아요.

주님은 뭡니까? 심판 주죠. 심판 주 같으면 뭘 안다? 우리의 행동을 다 알잖아요? 그러면 사람들 모아놓고 뭐하면 돼요? “야, 너 간음했잖아. 너 마음속으로 간음해서 너 지옥 가. 너 마음속으로 남 욕했잖아. 너 지옥 가.” 이렇게 판결하면 되잖아요. 본인이 심판 주가 왜 죽었다 살아날 이유가 뭐냐? 제 질문 요지는 그거에요. 보통 판사가 피고한테 판결할 때 폼만 잡고 옷 입고 한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왜 심판 주가 되면서 왜 본인이 죽었다 살아나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새로운 심판의 기준을 본인이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원 받은 사람하고 예수님하고 짜고 치는 고스톱을 치는 거예요. 남한테는 안 가르쳐줘요. “주여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면 됩니까?” “내가 죽었다 살아날 때 네 죄 때문에 죽고 네 의도 살아났다는 것을 너만 알려주는 거야. 쉿, 쉿, 딴 사람한테는 이야기하지 말고 내가 너한테만 알려주니까 내가 나중에 시험문제 낼 때 죽었다 살아나신 주가 되는 분은 누구? 할 때 네가 예수님이라 하면 내가 합격시켜 줄게.” 짜고 치는 고스톱 한 거예요. 이게 출제비리가 있어요.

아브라함의 믿음의 증거가 뭐라 했습니까? 이삭이 없다가 생겼고 또 이삭이 죽었다가 살아나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기 아들을 어떻게 합니까? 곱게 기르고 유치원 보내고 피아노 레슨 시킵니까? 어떻게 합니까? 아브라함이 아들을 같이 놀아주고 이뻐해주고 그게 아버지 역할이 아니고 정작 하나님의 믿음이라는 노선의 계열에 삽입되는 경우는 아브라함의 그 인생 가운데 딱 어떤 경우입니까? 자기 본향을 떠났다. 그거 아니에요. 애굽에서 마누라 팔아서 살았다. 그것도 아니고 뭡니까?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한 순간이죠.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돼 버린 거예요. 믿음의 조상이란 말은 아브라함 이후에 모든 같은 믿음의 계통에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어떤 경우를 당하게 된다? 죽음과 접촉하는 경우를 당하게 돼요. 죽었다가 살아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우리 다 데려가 한강에 가서 전부 다 빠져죽었다가 주님께서 미리 119 준비하는 그런 경험할까요? 이 죽음은 반드시 죽은 이유가 있어야 돼요. 뭣 때문에 죽느냐 하면 죄의 삯이 죽음이잖아요? 그러면 ‘너는 죽어 마땅해.’ 이 말은 다른 말로 하게 되면 우리가 늙어 죽기 전까지라도 뭐라고 해야 돼요? 나는 죄인이기에 마땅함이 되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뭐라 했습니까?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했죠.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죠.

그러니까 성도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 뭘 보느냐 하면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 인생 역사를 포기하고 예수님이 가신 길이 바로 내가 가는 길로 대체할 수 있는 안목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입혀주는 겁니다. 예수님 가신 길이 남의 일이 아니고 남의 인생이 아니고 바로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저런 길로 가야 마땅함을 보여주는 겁니다. 십자가 죽기까지. 물론 예수님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 일이면서도 자기 일 아니고 예수님 일인 줄 알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잠잤죠. 왜, 본인은 별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사실은 이게 누구 일입니까? 예수님 가는 길이 누구 일 이예요? 자기 인생을 결정할 일인데 자기 인생이 똑같거든요. 그런데 그건 예수님 일이지, 자기 일로 보지 않고 자기는 잠 잘 잤어요.

깨어서 기도하라 했는데 깰 이유가 있어야지. 주님 알아서 하는데 내가 왜 깨는데? 푹~ 잠잤죠. 주께서 일어나서 하시는 말씀이 “자,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 같이 가야지.” 뭐 했다고? 자꾸 주님이 우리를 대신함으로 말미암아 나의 대신한 주님을 통해서 나는 현재 뭘 포기하게 하느냐, 자기를 내가 다져온 내 인생을 지워 삭제해 버리고 주님 인생이 곧 진실로 진정한 나의 인생길인 것을 다시 채워야 될 문제가 생기죠. 채워야 될 사실을 우리는 추궁 받고 있는 겁니다. 성령을 통해서. 그 작업은 우리가 못하고 성령께서 그렇게 해요. 성령께서 자꾸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반복한 삶, 공생애의 반복한 삶으로 우리의 삶을 가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제자들 보라 하잖아요. 바로 우리가 성경 해석하지 말고 제자들 자리 앉아서 보라 말이죠. 제자들이 가는 인생길은 누가 정한 겁니까? 예수님이 인도했죠. 예수님이 인도하면서 그 길이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인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주께서 만든 인생길 속에 따로 자기 일을 따로 챙겨버립니다. “예수님 우리 가운데 누가 제일 높습니까?” 누가 제일 높으냐를 이걸 따로 챙기죠. 주께서 기도해서 마귀한테 넘어가지 않도록 주께서 베드로를 기도했는데 베드로 하는 말이 제자들보다 훨씬 낫습니다. “주여 제가 어떤 경우라고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죠.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네가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지금 마귀가 너를 청구하려고 청구서 들고 왔는데 그걸 내가 찢어버렸다. 내가 널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면 너는 안 된다. 내가 분명히 단언하노니 너는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래서 세 번 부인했잖아요. 베드로 인생 뭐 있습니까? 베드로 인생 없어요. 예수님이 베드로 되게 한 인생 따로 있죠. “네가 네 원대로 가지 못하고 이제는 내 원대로 띠 띠고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다툼이 성령 받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다툼이 계속 일어나요. 내가 고심하는 인생과 그 인생은 뭐냐,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의롭게 되어서 영광 돌려서 구원받겠다는 거. 그러면 아마 상급이 다른 사람보다 양적으로 배나 상급이 많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 그리고 그 생각 말고 주께서 모든 걸 포기하고 그냥 주님께서는 죄 없으면서 죄인의 길을 갔잖아요. 그 길이 우리 길 이예요. 이유도 없이 아무 영문도 모르는 채 우리는 죄의 길을 가야 되는 거예요. 왜냐 우리가 죄를 지어서 죄의 길을 가는 게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었기에 죄의 길을 가야만 하는 인생을 우리는 주님한테 부여받은 겁니다.

이야기 길게 했지만 간단하죠. 예수님으로 하여금 율법보다 먼저 예수님이 계시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거든요. 완성을 해야 주가 되시니까. 주되심이 먼저 있고 주되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율법이 나중에 있고 그 율법의 내용은 예수님의 주되심과 관련돼 있고 그 안의 내용은 제사법 들어있고 제사법은 뭐냐,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게 들어있다 말이죠. 그렇잖아요.

그렇다면 예수 믿어서 성도 돼야 될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게 아니고 율법의 완성된 그것이 우리에게 덮쳐 버리면 우리 인생은 예수님의 공생애에 어쩔 수없이 끌려가는 식으로 예수님의 공생애의 길을 가는데 그 길이 어떤 길이냐 하면 이유도 모르는 채 죄를 지어야 하고, 아이, 제가 즐겁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영문도 모르는 채 우리는 죄를 지어야 하고, 성질상, 모친의 죄에서 태어났으니까. 그 죄를 씻음 받아야 되고 그래서 영생 얻어야만 하는 존재로 주께서 우리를 사용해주시는 겁니다.

그 출발점이 뭐냐, 십자가 앞에서 네가 날 때부터 죄인이었다는 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작업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걸 사실은 구약부터 시작했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율법을 준 것은 이스라엘 망하라고 준 건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망하기 전까지는 너무나 그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라서 감히 받아줄 수가 없었습니다. 주께서 와서 안식일 날 유대인들에게 “이게 안식일이다.” 찢어버리죠. 이게 바로 안식일의 완성이다. 그 순간 그들은 뭐가 날라 가겠어요? 안식일 잘 지켰다는 자기 마일리지가 자기의 쿠폰이 짜장면 10그릇 먹으면 탕수육 하나 먹으려 했던 쿠폰이 날라 가 버려요. 이제 탕수육이 없어요. 쿠폰을 찢어버리는 거예요. 더 이상 이제는 전화 걸어서 중국집에 주문 안 해도 돼요. 왜, 이제는 짜장면 먹는 게 아니고 영생을 먹기 때문에. 우리가 좋아하는 짜장면, 애굽에서 좋아했던 피자 찢어버리고 이제는 영생의 생명나무를 먹는 존재로 일방적으로, 요게 중요해요. 일방적으로! 쉽게 말해서 예수님 자기 멋대로. 자기 멋대로 우리 인생을 영생 얻는 인생으로 탈바꿈 시켜버렸습니다.

그렇게 시켜놓고 그랬다고 뒤늦게 우리한테 통보를 해주는데 그 통보가 뭐냐, 너는 뭘 해도 죄가 된다는 통보! 그 통보를 해줍니다. 네가 마음이 약해서가 아니고 네가 유혹받아서가 아니라 원래 그래야 하기 때문에, 죄 지어야 하기 때문에 죄 짓는 거고, 그 죄 값으로 우리의 몸은 후패해야 되고 우리의 몸은 죄 값으로 늙어서 죽는 것이 침해 걸리든 뭘 하든 관계없어요. 침해 걸려도 오값다 생각해야 돼요. 침해 걸려 죽든 기관차에 깔려 죽든 그렇게 죽는 것을 아까워할 필요 없어요. 이제는 죽는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죽여주시는군요.’ 그렇게 죽여주시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데, 그게 뭐냐 하면 우리 코스가 아니고 원래 누구 코스입니까? 예수님의 자기 인생이거든요. 자기 인생을, 관은 예수님 관 짜놓고 맞지도 않는 우리를 예수님 관에다 집어넣으니까 그 관의 특징이 뭐냐, 죽은 자도 살려내는 관의 역사가 그 안에 전기가 흐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사는 거예요.

마르다 마리아 오빠처럼 나흘 만에, 예비군 군대 생활 마치고 쉬고 있는데 다시 동원 훈련 받아서 다시 끌려 나와서 이 땅에서 살다 또 죽는 거예요. 왜, 조교거든. 조교는 제대 못해, 한 번 제대하고 난 뒤에 다시 불려 와야 돼요. 마리아 마르다 오빠가 다시 불려 나와서 무슨 일 했겠습니까? 욕 얻어먹는 일 했죠. “너 그때 가짜로 죽은 거 아니지? 너 진짜 기절했지? 그렇지? 그때 너 돌무덤 딱 대기하고 있다가 자는 척하고 있다가 너 예수님하고 짰지? 딴 데 가 있다가 그 시간에 딱 있다가 ‘나사로야 나와라’ 하니까 네가 붕대로 감아서 풀고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나오기로 짰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합리적인 해답이 없으니까. 우리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다는 그 신기해하면서 안식일을 째는 것을 우리는 겁을 내고 있어요.

왜 그렇습니까? 왜 겁을 냅니까? 이미 우리가 바리새인들이기 때문에. 죄가 뭐냐, 물으신다면 착해지려는 게 죄에요. 주의 말씀 지켜서 의로워지려는 그게 바로 죕니다. 교회 와서 도 닦는 게 죄에요. 내 행동으로 영광 돌린다는 그게 바로 죕니다. 그리고 그걸 모르는 게 죄고, 그리고 그렇게 하겠다는 것은 딴 게 아니에요. 인간이 하나님을 믿어요? 진짜 개가 웃을 일 이예요. 절대 믿지 않습니다. 뭐냐 하면 이렇게 하게 되면 장차 올 재수 없는 것이 미리 차단되지 않겠느냐 하는 기대가 땅겨서 착한 일하게 되면 나쁘다고 벌 줄 일이 없을 게 아닙니까? 특히 딸 결혼식 앞두고 특히 수능 앞두고 바짝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거예요.

갑자기 고아원 방문 및 여러 가지 바짝 착한 일 해서 우리 애 입학시험에 액운이 끼지 않기 위해서, 갑자기 결혼 날에 우뢰가 친다든지 해서 돈 줄 손님이 안 온다든지 이런 일 없도록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 스위스 유학 가서 잘 지내라고 미리 사전에 착한 일로, 불교에서는 업을 쌓는다 하죠. 선업을 많이 쌓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불교 신자 욕할 거 없이 우리는 타고난 불교 신자에요. 에브리바디 모든 인간이 타고난 불교 신자에요. 바리새인도 불교 신자에요. 자기 행함만큼 복 받는다는 거. 네가 비록 안 알아줘도 신은 알아줘서 나중에 그것이 흘러, 흘러서 나한테 복으로 돌아온다는 이게 불교 교리입니다. 이게 기독교만 있는 줄 알아요?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라. 불교도 있어요. 전도서에 물 위에 뭘 던져라. 다시 돌아올 것이다. 물이 어디 뺑뺑이 돕니까? 포석정입니까? 빙빙 돌게. 그런 뜻이 아니거든요.

인간이 어떤 것을 행하면 반드시 업보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은 불교사상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하는 한계가 그거에요. 불교가 우리의 이해 한계입니다. 반드시 예수를 위해서 바른 일 하고 교회 착한 일하게 되면 비록 내 대에는 복은 못 받지만 내 후손, 나 자식들에게는 복을 받아서 국가와 교회와 민족을 위해서 큰일을 할 것이라는 그런 사례를 교회에서 찾아 갖고 있어요. 간증집회가 뭡니까? ‘여러분 할아버지가 헌신했던 이 교회 보세요. 이 교회 영락 교회가 이렇게 부흥됐잖아요. 이런 거. 아이구, 참 기가 찰 일이예요. 예수님은 말합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일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너희는 믿지 못한다.

19절 봅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은 방금 한 이야기가 뭡니까?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무산시켰잖아요. 지킬 안식일이 남아있습니까? 안 남아있습니까? 안식일이 없죠. 안식일이 없다 이 말이죠. 그렇게 되면 유대인은 무슨 하나님을 다시 조정해야 돼요? 안식일이 없으신 하나님으로 재조정해야 되거든요.

자, 다시 해봅시다. 아버지께서 소원이 뭐냐, 아들을 뭘 만드는 겁니까? 주로 만드는 거죠. 주를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의 주되심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뒤에 온 것이 율법이라 했죠. 율법 속에 뭐가 들어있죠? 안식일 들어있죠. 예수님이 아들로 왔기 때문에 예수님이 율법의 해답이기 때문에 율법의 안식일을 없애버리는 거예요. 왜냐 하면 예수님이 안식일이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이 곧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고 예수 믿는 것이 십일조 한 게 돼요. 예수 믿고 또 십일조 하고 무슨 그런 짓이 다 있어요? 아니 예수 믿는데 율법이 왜 필요하죠? 아니 구원받는데 있어서 예수님 믿고 또 십일조 하고 주일 지키는 게 또 들어가야 돼요?

예수 믿는다는 게 뭡니까? 히브리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제사를 드렸죠. 그러면 주께서 예수님 드린 제사로서 모자란다는 뜻이거든요. 만약에 안식일에 십일조가 있어야 된다면, 그러나 히브리서에 보면 더 이상 다른 제사가 있다? 없다? 더 이상 다른 제사가 없는 겁니다. 모든 십일조나 모든 헌금은 제사 하나를 위해서 있는 거예요. 제물 하나를 위해서 있는 겁니다. 보세요. 한국교회가 얼마나 사기를 치는 거예요? 이런 큰 사기도 돈 사기 같으면 말을 안 합니다. 사람 영혼을 가지고 노는 사기잖아요. 보이스 피싱은 그래도 점잖아요. 왜 돈만 뺏기면 되잖아요. 이거는 영원히 영생을 뺏어 가는 사기인데, 교회 안 다니면 지옥 간다고요? 어디 그런 게 있어요? 교회 안 다니면 지옥 가요? 뭐 칼빈이 했어요? 캘빈이 했어요? 캘빙이 있어요? 누가 했어요? 아유, 정말 그 칼빈이 한 이야기를 판단도 못할 정도로 다 같이 육적이잖아요.

성경은 이미 예수님을 믿지 않고 인간은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정리해 봅시다. 인간은 누구나 예수님을 믿지 못해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 확연해 버렸죠. 왜냐 하면 늘 믿게 하시는, 내가 믿어서 예수님 일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유리그릇처럼 혹 부는 것처럼 예수님이 하시는 아버지 일로 인하여 발생된 결과물이 바로 아무것도 예수님을 안 믿는 나만 믿는 나란 인간이 고개 끄덕하고 톡 튀어나온 거예요. 그게 죄인이거든요. 내가 온 것은 죄인을 얻고자 온 거예요. 죄인이 있어야 예수님이 주가 되신다 말이죠. 그 죄인을 쓰다듬어줍니까? 아니죠. 그 죄인을 어떻게 합니까? 죄인을 죽여 버리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믿으나 안 믿으나 뭐할 존재에요? 죽어야 될 존재에요. 무엇으로? 죄 값으로. 아이쿠, 늙을 때 죽습니다. 아니에요. 죄 값을 치를 때 죽는 거예요. 아니 목사님, 사람은 늙어서 죽는 겁니다. 글쎄 그거는 우리가 아는 이야기고 성경대로 합시다. 죄 값을 치를 때 죄 값은 죽음이다. 죄 값을 치를 때 죽는 거예요. 그 죄 값을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경험을 해버렸어요.

경험한 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고린도후서에 나옵니다. 성경 이야기하는데 사람들은 자꾸 세상 것 가지고 같이 엮으려 해요. 여기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말 잘못하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죠. 그러면 우리 몸은 누구 몸입니까? 주님이 자기 생명 드러내는 하나의 수단이 되겠죠. 하나의 기구가 되죠. 기구, 하나의 껍데기가 된다고요. 우리 껍데기를 통해서 누가 나타난다?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는 거예요.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누가 산다? 그리스도의 생명 때문에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발걸음도 세시고 머리카락 빠지는 것도 아시잖아요. 왜, 자기 생명이니까. ‘가만히 있어 보자, 내가 어제 잊어버렸다. 몇 개 빠졌는지 잊어버렸다.‘ 이게 아니고 주님이 자신의 몸이기 때문에 자기가 빠진 걸 다 아신다 말이죠. 발걸음을 세시고. 등산 가다 떨어진 것도 주께서 떨어지게 한 거예요.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또한 우리의 무슨 육체입니까? 그냥 육체가 아니고 무슨 육체입니까?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함이라. 진즉에 죽을 육체인데 우리가 지금 살고 있잖아요. 지금 살아가고 있잖아요. 누가 살려주신 거예요? 주께서 살려주고 있는 겁니다. 이 고백이 그냥 생명 연장 책이 아니고 죄와 관련해서 살려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령이 아니면 고백 못합니다. ‘아이구, 살다가 주께서 살려주시다가 죽겠지.‘가 아니라 죄인 같으면 지금 당장 죽어도 괜찮아요. 자는 잠에 가든지 강의하다 죽어도 나는 “왜 이러십니까?” 할 권리가 없어요. 죄 지은 자는 죽은 자니까 죽은 자인데 살려내는 것은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를 주님 증거 하라고 살려주신다 이 말이죠. 그것을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게 주님이 주신 성령이 주신 인식 론 이예요. 어려운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만 인식론이란 말은 뭐냐 하면 인식이라는 것은 뭔가 뒤늦게 안다는 것. 그걸 인식이라 해요. 우리는 주께서 미리 아시죠. 우리가 죽을 인간인데 내가 살린다는 것. 우리 인식은 뭡니까? 뒤늦게 알죠. 잘난 체 하다가 까불다가 “주여 나 같은 죄인도 살려주시네요.” 뒤늦게 주님의 인생인 것을 뒤늦게 알죠. 그럴 때 뒤늦게 알 때 그 인식론이 어디서 나온 거냐. 말씀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은 율법도 뭐가 됐어요? 율법도 복음이 돼 버렸어요. 레위기, 출애굽기에 십계명 나오죠? 그 해석을 그냥 하면 안 되고 어떻게 해석해야 되느냐 하면 그게 복음을 위한 율법으로 해석해서 복음 안에서 해석돼야 돼요. 모든 구약 창세기 1장 1절도 뭐로 해석돼야 되느냐 하면 복음의 관점에서 그리스도가 관여된 관점에서 해석이 돼야 돼요. 그리스도가 관여 안 되면 유대인 해석밖에 안 됩니다. 이슬람교 해석밖에 안 돼요. 이슬람교도 천지를 누가 만들었다? 신이 만들었다. 그들은 알라가 신이예요. 신이 만들었다 하거든요. 그럼 신이 만든 걸 알았으면 그럼 천국 가겠네. 뭐가 빠졌어요? 복음이 빠졌고 예수 그리스도가 빠졌죠.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오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 됐다는 그리스도가 빠졌죠.

그러니까 유대인들도 백날 창조를 믿어도 지옥 가고 이슬람교가 아무리 구약을 믿고 창조를 믿어도 지옥 가는 이유가 그들은 결국 뭘 안 믿어요? 품속에서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세기가 있다는 걸 모르고 우리가 존재한다는 모르는 겁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을까, 알라를 믿을까, 이렇게 하는데 그 선택할 자격이나 권한이 우리한테는 없어요. 처음부터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진 겁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미움 받기로 만들어졌고 어떤 사람은 사랑받기로 만들어졌지만 어쨌든 간에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 밖에서 만들어진 인간은 한 인간도 없어요. 그런 외계인도 없어요. 딴 나라에 외계인 있다면 외계인도 그리스도가 만들었어요. UFO도 그리스도가 만들었어요.

세상의 모든 권세 자들이나 천사들이나 모든 천사들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졌어요. 심지어 마귀도 누가 만들었습니까? 마귀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주로 만들어내는 그 청사진에 의해서 세상이, 모든 천지가 다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냥 살면 돼요. 그냥 사시면 되는 겁니다. 사시면서 뒤늦게 인식론 가지면 돼요. ‘아, 이래 살아도 구원되는구나. 오늘도 주께서 살려주셨네.’ 뒤늦게 하면 돼요. 왜, 뒤늦게냐? 우리는 자꾸 기존의 육이 있기 때문에 미리 예상을 하게 돼 있어요.

‘자, 복음 아니까 다음에 바이어 만나면 계약 잘될 거다. 빡세게 기도하고 가야지.‘ 기도해도 소용없다더니 뒤에서 차 박아버렸어요. 기도 한다고 교통사고 안 일어납니까? 여러분 기억해보면 기도해도 운전하면서 속도위반 걸린 적 있죠? 없어요? 있어야 되는데. 내가 관리하는 것, 주께서는 그거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관리 안 해도 되는데 자꾸 우리는 내가 관리를 해요. 관리해도 그냥 관리하면 괜찮죠. 꼭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이 따라오면서 관리를 하게 되니 요한일서에 보면 사랑 안에는 뭐가 없다? 사랑 안에는 분명히 두려움이 없다 했는데 그리고 데살로니가 전서 5장에 보면 항상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라 했는데 왜 우리가 생각하는 주님과의 교제와 주님과의 관계는 뭔가 끄집어내면 끄집어낼수록 뭔가 찝찝하고 걱정 근심이고 감사는 벌써 날라 가 버리고 ’주께서 한번 도와주나 보자.‘ 하고 씩씩 거리고 그걸 저는 뭐라 그러느냐 하면 평생을 찡찡거려요. 평생을. 장로 돼도 찡찡 거리고 목사 돼도 찡찡 거리고 집사 돼도 찡찡 거리고 평생을 찡찡대요. 감사했다 돌아서면 찡찡대고 이게 뭐고? 장학생 돼도 ’4년 전년 장학생 돼야지, 이게 뭐고.‘ 백날 불평이고 원망이고 찡찡대고 ’남들은 행복한데 난 뭐고.‘

그러니까 주께서 주님이 생애를 참여하게 하는 방법은 뭐냐, 우리로 하여금 죄인으로서 계속 죄 되게 하셔서 ‘너 같은 인간도 너는 고마운 줄 알아라.’ 나 때문에 살았다는 것을 같이 동행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지금 이 본문을 할 때는 그런 동행하기 이전에 설계도부터 쫙 깔아놓죠. 그게 뭐냐 하면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서만 하지, 아들을 통해서 일한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아들 말고 하나님 일 하는 사람 있었다? 없었다? 없었다. 아담 가운데 아무도 없었다. 아담 이후에 예수님 빼놓고 아버지 일 한 사람 아무도 없었습니다. ‘목사님, 노아 했잖아요? 목사님, 아브라함 했잖아요?’ 베드로전서 1장 보세요. 그 속에 누가 들어있는지 알아요? 예수님 영이 들어있었어요. 이미 선지자 속에 그리스도 영이 들었어요.

구약에 보면 그렇게 안 돼 있습니다. 선지자 속에 누가 들어있다? 성신이 들어있죠. 아니에요. 신약이 해답이기 때문에 선지자 속에 그리스도 영이 들어있었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일 안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엘리야하고 일 안하고 하나님은 모세하고 일 안하고 노아하고 일 안해요. 그리스도하고 일해요. 그리스도 영이 그들 속에 그리스도 때문에 그들이 있게 되었고 그들이 선지자이기 때문에 엘리야가 일해도 엘리야는 본인이 일한 것으로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엘리야도 그렇고 모세도 그렇고 변화 산에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셔서 별세하는 그 순간만 이야기하죠. “주여 언제 별세하십니까?“ 이 이야기를 해야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 받지, 엘리야가 뭐 제단에 물 부었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다녔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십일조 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받는 겁니다. 너무나 간단한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왜 복잡하게 이야기합니까? 성경 자체가 복잡하게 이야기해요. 왜 복잡하게 합니까? 인간은 이걸 자꾸 모방하고 흉내 내고 죄인이면서도 아닌 척하면서 예수님을 따라잡으려고 하기 때문에 주께서는 떨치기 위해서 ‘제발 네가 나를 모방해서 네 관리 좀 하지 마라.’ 제발 끝내기 위해서 주께서 분리시키는 겁니다. 그 분리가 바로 그겁니다. 21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자,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를 살린다 했는데 예수님이 살리려면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어야 살린다는 말이 성립이 됩니까? 죽을 때.

그러면 마리아 마르다 오빠 나사로를 죽은 자에서 살려냈잖아요. 그러면 마르다 마리아를 예수님이 찾아갈 때 어떤 안목으로 찾아간 거예요? 이미 죽은 자로 찾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리아 보고 뭐라 해요? 죽어서 날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을 한 거예요. 살아있는 자도 죽은 자로 만들어가야 되는 겁니다.

자,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런 이야기에요. 여기 마리아 있고 여기 예수님 있습니다. 여기에 마리아 있고 모세 있고 노아 있고 엘리야 있고 아브라함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만날 때 어떻게 만나냐 하면 “야, 너 나 일해라.” 구약에는 이렇게 만나는 것처럼 보이죠.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십자가 죽으시잖아요. 요 자리에서 자기 백성 노아, 아브라함, 이 사람을 요렇게 보내는 거예요. 그래서 모세가 지팡이가 두 번 쳤다 해서 모세를 어디 안 보냅니까? 세상에, 가나안 땅에 안 보냅니다. 모세만 안 보내는 게 아니에요. 모세 따르던 전체 이스라엘을 모세 따라 나왔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도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요. 아! 참 심하죠.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 우리 같으면 제가 설교할 때 이런 설교 했잖아요? 주일 오후 설교인가, 이렇게 지팡이 두 번 치는 게 나쁜 점이라면 물이 안 나와야 되잖아요? “이 사람들아 너희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느냐?” 성질나서 탁탁 치면서 “물을 주신단 말이야, 어, 안 나오네, 왜 안 나오지? 아하, 가리키라 했잖아. 아이쿠, 주님 죄송합니다. 자, 한번 봐라” 마음 정리하고 다시 한 번 “자, 봐라. 자, 날이면 오는 게 아니야, 자.” 가리키고 물이 나와야 하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치니까 뭐가 나왔어요? 물이 나왔죠. 물을 내놓고 뒤에 가서 딴 소리 하십니까? 물 내놓고, 이상하잖아요? 그거는 뭐냐 모세로 하여금 모세는 메시야다? 아니다? 모세가 메시야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세가 동행해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이름이 너와 함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세로 하여금 은퇴케 하는 겁니다. 은퇴 시켜버리는 거예요.

물론 설교하다가 자살해 죽는다고 은퇴라고 그렇게 해석하시면 안 되고요. 우리 목사님 복음 전하니까 자살해 죽는 걸로 은퇴시키고 우리는 주님 바라보라고, 그런 식으로 또 잘못 해석하시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고 주님을 보게 하는 것은 하나님 뜻은 뭐냐 하면 어쨌든 저쨌든 태어난 자체가 너는 내 죽음과 거기에 동참해야만 산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신 거예요. 사용하셔서 결국 어디서 만난다? 십자가에서 만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십자가 질 때 현장에 없었습니다. 분명히 현장에는 옆에 양쪽에 강도 두 사람이 있었지, 그 외 어느 누구도 십자가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뭡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한 거예요.

도대체 어디에 근거해서 그런 이야기 하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는 십자가 사건 이 속에 이 사실을 모든 죄의 역사를 뒤엎는 하나의 반복적인 사건으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성령 안에서는 시간이 없기 때문에.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기 때문에. “전에 한번 했잖아요?“ 이게 필요 없어요. 영원히 반복시키는 동일한 원칙이 작용하니까. 반복할 것도 없어. 사우나 들어가게 되면 동쪽이든 서쪽이든 사우나 안에서는 다 뜨끈뜨끈하잖아요. 십자가에 들어가게 되면 전체가 다 십자가 안이에요. 죄를 용서하는 곳 이예요.

따라서 십자가에서 우리는 죽고 그 안에서 살려내는 작용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십자가 안’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십자가 안을 사도바울은 딴 데서는 이걸 예수 안이라고 한 거예요. 예수 안, 십자가 안이라는 말은 인간이 생각하는 시간 개념 가지고는 그런 것으로 어쭙잖게 갖다 붙일 생각 하지 말라는 뜻 이예요.

쉽게 말해서 그냥 너는 살다 죽어. 살다 죽는데 그 죽는 일이 네가 잘못해서 죽는 게 아니고 내가 일부러 죽인다 이 말 이예요. 일부러 죽인다 이 말입니다. 이제 설날 되는데 설날 되면 떡 빼잖아요. 떡 뺄 때 어떻게 합니까? 쌀에다 물 부어서 건져서 떡 방앗간에 갖다 주죠. 만약에 내가 한 알의 쌀 알갱이라면 그 딱딱한 기계 속에 들어갈 때 얼마나 바들바들 놀라겠습니까? 이렇게 죽어야 떡이 되거든. 죽어야 떡이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살아있으니까 뭘 걱정합니까? 지금 통장 은행 잔고, 내일, 한 달 뒤 이야기, 걱정을 늘어지게 하는 거예요. 또 주식이 내려가고 어떻고 자금 조달 안 되고, 퇴직하면 안 되는데, 이거 밥 해주는 아줌마들이 방학 때도 월급을 다오, 데모하고. 데모 왜 합니까? 자기가 자기 관리해야 되기 때문에 하잖아요. 하기 싫어도 해야 되지 안 하면 왕따 당하니까.

하지만 주께서는 뭐냐 하면 그게 네 인생을 결정하는 게 아니고 그런 식으로 데모를 하든 좋은데 그런 식으로 죽는다는 사실 이예요. 데모를 해도 안 해도 재벌 되든, 어쨌든 죽잖아요. 죽을 때 죽는 이유가 뭐냐, 내가 먼저 죽었기 때문에 너도 따라죽어야 되는 이유 때문에 죽는다는 겁니다. 율법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죽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성도는 순교자입니다. 가스..에 죽든지 술집에 가서 술 먹다 엎어져 자빠져서 미끄러져 죽든지 다 순교에요. 다 순교입니다.

이 이야기했더니만 또 어떤 사람은 삐져서 술 먹으면서 무슨 순교냐 하는데, 성도는 개인의 행함에 따라서 순교가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죠. 성도는. 성도가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주께서 성도로 하여금 예수 믿음을 발췌하도록, 발현되도록, 조치를 그렇게 당한 사람이 성도에요. 그런데 자기 인생 자기 맘대로 못합니다. 믿기 싫어도 믿어져야 돼요. 그래서 제가 주일 날 믿지 마라 이유가 믿지 마라 한다고 ‘난 안 믿는다.’고 한 사람은 그건 가짜고 ‘안 믿고 싶어도 자꾸 믿어져요.‘하는 사람은 진짜기 때문에 내가 그런 소리 한 거예요. 과감하게 도박을 해본 겁니다. 믿지 마십시다. 이렇게 함으로 ’그래도 믿어지는 걸 어떻게 합니까?‘ 그거는 바로 특이한 사건이 당신을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이거는 당신이 관리할 수 없는 오히려 그쪽이 당신을 관리하는 그런 상태에 있을 때는 바로 믿음이 애써 자꾸 믿음이 생겨나는 거예요. 십자가 죽으심이 이게 거부할 수가 없어요. 이게 다 헛소린데 그러면서 십자가는 헛소리가 아니에요.

따라서 십자가는 헛소리 아니니까 모든 성경 내용이 이게 헛소리가 아니에요. 뭔 소리를 해도 헛소리가 아니에요.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뒤에 심판이 있다 소리고 헛소리가 아니에요. 그러나 십자가 없이 가버리면 한 20년 악착같이 믿더라도 ‘이게 다 헛소리 아냐?’ 해대버리면 처음부터 애초부터 안 믿은 사람 이예요. 그럼 본인이 믿으려고 애쓴 사람이 절대로 안 믿은 사람 이예요.

그래서 제 강의가 항상 많은 사람이 왔다 가고 왔다가 가버리는데 그건 참 좋은 현상 이예요. 왜냐 하면 믿지도 않은 사람에게 믿음 줄 수 있는 그거는 없거든요.

끝으로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거 뭔 뜻입니까? 이 뜻 이예요. 심판 기준은 상상하지 마라. 심판 기준은 누가 정한다? 내가 정한다. 내가 정한다. 심판 기준은 내가 정한다. 이 말, 심판 기준은 내가 정한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기준 정해놓고 지키란 말이 아니고 구원받을 사람은 내가 알아서 구원시켜 낸다는 뜻 이예요. 시험 문제 내고 풀라는 말이 아니고 아예 처음부터 정해놓은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섯 처녀가 갈라질 때 여섯 번째 처녀가 기름 준비하면 안 돼요. 반드시 다섯 명만 기름 준비해야 되지, 여섯 명이 기름 준비하면 안 와요. ‘기름 준비할까요? 에이 포기해야지.‘ 요렇게 될 때 고 타이밍 노리고 들어온 겁니다. 이미 다 정해놓은 거예요. 수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한 과부에게만 엘리야가 찾아갔듯이 주께서 따로 정해놓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21절에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그 다음에 뭐라 했어요? 아들도 뭐하는 자를? “자기가 원하는 자를“

따라서 믿음이라는 게 뭐에요? “내가 예수님을 원했습니다.“를 고백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이 원했잖아요. 이제 와서 왜 그러십니까? 주님이 원했잖아요.“라는 고백을 스스럼없이 이게 자연스럽게 아무런 구애 없이 편하게 ”주께서 믿음 줘놓고 씨, 아이구“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어떤 경우에? 환란과 곤고와 핍박 가운데서 이 고백이 나와야 돼요. ”주께서 이렇게 해놓고 씨, 고생 되게 시키시네. 주께서 이렇게 했잖아요.“ 옆에서 ”지금 누구하고 이야기하나?“ ”너는 몰라도 돼. 너는 모르는 사람이야, 나만 아는 사람이야. 주께서 했잖아요. 주께서 원했잖아요.“ 주께서 ”원하니까 너한테 고난주는 것이지.“ ”아멘“

가정에 어떤 어려움이 있고 힘들고 우리 한 목사님 아들이 많이 아프답니다. 얼마 전에 처음 알았어요. 이상한 병이 걸려서 많이 아프답니다. 그래서 우리 아내도 같이 울고 둘이 같이 울고 했는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울을 일이 생기고 가슴 아픈 일이 생기는 것은 그게 내 인생이 아니고 누구 인생이기 때문에? 주님 자기 인생 자기 아프게 하시는데 우리는 내 인생 내가 관리한다는 것 때문에, ‘주여 이것까지 뺏어 가면 무슨 보람으로 살란 말입니까?’라는 죄가 톡 튀어나오게 만들어서 고 죄마저 ‘내 튀어나올 줄 알았다.’고 이야기해서 그것마저 용서했다는 감사로 메워줄 때 그거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이 아닙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집집마다 가정마다 우환이 없는 가정 없고 주께서 약속한 대로 아담의 후손들은 저주받으라 했사오니 아! 저주가 이런 거라, 하는 그런 생각으로 우리가 막연하게 그냥 참으려고만 했습니다. 이제는 참지 말고 도리어 감사케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