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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5장 23절 / 악 / 141204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5장 23절 / 악 / 141204

정인순 2014. 12. 5. 08:40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이한례

가락-요한복음 5장21(악)141204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5장 21절부터 해봅시다. 여기 요한복음 5장 21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 이렇게 죽 나오잖아요. 여기에 나오는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22절에 심판이란 말이 나오죠. 그 다음에 24절에 보면 믿는 자는 뭘 얻겠고? 영생 얻고 안 믿는 자는 심판에 이르고, 죽 나온다 말이죠. 그러면 심판, 그리고 살린다. 그리고 영생,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어떤 경우에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하면 세상 끝이 다 끝난 시점을 미리 당겨서 아는 사람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심판자이거든”라고 말한 것은 이미 심판이 끝난 그 지점에 여전히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경우는 이 말이 맞아요. “한번 심판 해볼까? 한번 영생 줘볼까?” 지금 중간 과정에서는 이건 해당이 안 됩니다. 내일 되면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끝에 다 가신 분으로서 이미 세상 궂을 보면 돼요. 그걸 요지경이라 하죠. 세상은 무슨 속이다? 요지경 속이다. 세상은 요지경 속이라 하죠. 이걸 하나의 둥근 구술로 보자 말이죠. 점쟁이들이 점 칠 때 둥근 구술로 하는데 구술 자체가 이게 뭐가 있느냐 하면 한계가 있어요. 이게 갇혀 있잖아요. 이 구술 안에 있는 모든 변화들은 갇혀 있죠. 요 구술 밖에서 예수님께서 이걸 쳐다보신다면 이 안에 있는 우리가 아는 모든 시간적인 흐름 같은 것은 의미 없어요.

창세전부터 택한 자, 이래 나오면 뭐, 주께서는 이미 다 아시면서 뭘 언급하느냐 하면 심판을 언급하고 영생을 언급하거든요. 그러면 이 안에 들어있는 우리는 심판과 영생을 나름대로의 이 개념을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의 영생, 우리가 서로 소통하고 통용하는 그런 개념의 심판으로 이걸 받아들이면 제 뜻이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이건 보나마나 엉터리죠. 엉터리잖아요.

유치원 애들 보게 되면 ‘너 커서 뭐 할래?’ 하면 “나 유치원 선생님 할래요.‘ 이런 애들이 많이 있어요. ’너희들은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 하면 ”유치원 선생님이 제일 예뻐요.’ 하는 애들이 많다 말이죠. 그런데 그 애들은 어디에 갇혀 있는 거예요? 유치원에 갇혀 있죠. 바깥에 전쟁 있는 것도 모르고 바깥에 훨씬 잘 나고 예쁜 사람이 있는 걸 모르고 아침, 저녁마다 선생님만 보니까 선생님이 제일 친절하고 선생님이 제일 착하고, 선생님이 제일 예쁘고, 선생님은 화장실도 안 가고 선생님은 아침이슬만 먹고 사는 것 같다 말이죠. 밥도 안 먹고. 어떻게 선생님이 자장면을 먹어요? 그 시커먼 걸. 아주 곱게 잡수고, 이런 생각하죠. 그 세계가 전부가 아니다 말이죠.

한번 물어볼게요. 그렇다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심판이 뭐고 영생은 뭐에요? 우리 인간들이 유치원 애들이라고 봅시다. 그럼 인간들이 생각하는 영생은 뭐겠습니까? 그걸 불멸성이라 해요. 길게 이어져 가는 것. 안 죽고 이어져 가는 거죠. 우리들이 보통 그걸 영생이라고 생각해요. 그냥 길게 오래 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엿가락을 길게 잡아당기면 그게 소시지 되는 겁니까? 아무리 엿가락을 길게 당겨도 소시지 안 되죠. 맨 엿이잖아요. 자전거 빨리 달리면 비행기 돼요? 자전거 달려도 자전거잖아요. 같은 질을 백날 살아도 나이가 천년 만 년 살아봐야 동방사기밖에 더 돼요? 딴 인간 되는 건 아니죠?

성경에서는 그걸 아담에 속했다. 아담에 속한 게 천년 만 년 살들 그게 아담에 속하지 않겠습니까? 맨 아담에 속하겠죠. 천년 만 년 산들 그게 영생입니까? 영생 아니죠. 영생 아닙니다.

예수님의 영생은 전~혀 달라요. 그런데 사람은 뭔가 동화책에 나오는 것처럼 물만 마시면 다시 청춘으로 되돌아가는데 그 청춘 되돌아가봐야 맨 똑같은 인간이 젊어지는 것 뿐 이예요. 그렇죠?

만약에 날 때부터 얼굴에서 이마가 넓어서 커서도 그게 불만이라는 사람에게 청춘을 돌려주면 어떻게 됩니까? 무슨 신기한 샘물을 먹고 돌려보면 어떻게 돼요? 역시 이마가 넓은 아기가 되겠죠. 그게 본인이 만족스러워요? 제발 다른 인간이 됐으면 좋겠죠.

다른 인간 되는 거 알려드려요? 알려드리겠습니다. 심판 받으세요. 다른 인간 되려면 기존의 인간이 다른 인간으로 바꾸어주시는 분에 의해서 심판을 받아야 되는 겁니다. 뭐라고 심판받느냐 하면 “너는 죄지었기 때문에 너는 죽어 없어져도 마땅함”을 수용을 해주면 바꿀 수가 있어요. 수용을 하게 되면. 심판 하신 분이 쉽게 말해서 심판 받는 분에게 미리 땅겨서 심판 받으면 돼요. 땅겨서!

이것을 가지고 로마서 6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같이 죽지 아니하면 살 길이 없다.”는 겁니다. 누구와 함께? 혼자 자살하면 돼요? 아니에요. 같이 죽지 아니하면, 누구하고? 주와 함께 같이 죽지 않으면 다른 인간이 안 돼요. 인간 자체가 아담에서 새로운 아담으로, 그리스도란 아담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새롭다는 말이 나왔는데 사람은 굉장히 새로운 걸 좋아해요. 새 집, 새 차, 새 옷, 새로운 가구, 새로운 걸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이 좋아한다는 게 만약에 내가 새로운 자동차를 얻고 싶다 할 때 여기 새롭다 하는, 이게 약간 어려운 건데 한번 들어보세요. 이 차가 나한테 새롭다고 할 때 이것이 새롭다고 느끼는 그 생각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하늘에서 나온 게 아니고 어디서 나왔어요? 내 머리 속에서 나왔죠. ‘아이쿠, 이 구닥다리 이 옛날 거. 이거 말고 새 차 없어?’라고 할 때 새 차는 기존의 옛 것과 새 것이라는 그 구분을 누가 먼저 하고 있었습니까? 내가 먼저 갖고 있었죠. 내가 먼저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새 차를 사도 남한테는 별로 안 좋은데 나한테는 좋은 거예요.

예를 들면 전에 우리가 리오를 탔거든요. 리오를 탔는데 올해 여름부터 뭘 타느냐 하면 소울을 탔어요. 소울을 타는데 맨 중고입니다. 누가 줬는데 우리는 새 차에요. 새 차지만 BMW 갖고 있는 사람한테 이거 타라면 타겠습니까? ‘아이 씨, 그게 무슨 새 차고?’ 1 키로미터라도 안타야 새 차지, (어서 오세요) 우리 가락 공부가 항상 늦게 오시는 분이 있기 때문에 항상 강의 앞부분을 새로 해요. 새로 하게 되면 이 강의 듣는 사람은 복습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자, 지금 요한복음 5장을 하고 있는데 요한복음 5장의 내용이 보니까 거기에 영생이란 말이 나오더란 말이죠. 요한복음 5장 24절에 영생이 나오거든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뭘 얻었고? ”영생을 얻었고“라는 말을 할 때 지금 영생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어요. 영생에 대해서 할 때 이 영생이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영생은 뭐냐 무조건 오래 사는 거죠. 그럴 때 제가 무슨 이야기 했느냐 하면 엿가락을 길게 늘어뜨리면 엿이 되겠습니까? 소시지 되겠습니까? 맨 엿이죠. 그러니까 아무리 길어도 질 적으로 바뀌어요? 안 바뀌어요? 안 바뀌죠. 안 바뀌는데 이게 무슨 영생 이예요? 오래 사는 거지. 안 죽고 오래 사는 거죠.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영생나무 따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게 선악을 아는 채로 계속 오래 가는 거예요. 그러면 계속 저주를 받는 겁니다. 그러니 세상에 이런 난리가 어디 있어요? 그런 비극이 어디 있어요? 오래 사는 게 비극 이예요. 오래 안 살아도 돼요. 같은 질 오래 살아버리면 점점 자기한테 실망 느낍니다. 연세 많은 사람들 절대로 사진 찍지 말라 합니다. 나이 80돼서 셀카 봉 사는 사람 봤습니까? 안사죠. 왜, 남이 찍어도 안 찍는데 자기가 혼자서 찍을 리가 있습니까? 셀카 봉으로 찍을 리가 없잖아요. 셀카 봉은 20대가 찍어요. 한창 꽃 필 때, 그때 그걸 기념하고 두고 싶어서 찍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사람은 점점 더 늙어갑니다. 아무리 인간이 몸부림치고 아무리 세상이 내 맘대로 살았더라고 아프고 늙고 죽는 이것은 몸부림쳐도 빠져나올 수 없어요. 이건희 회장 보세요. 아직도 지금 코배기 안 보이고 있습니다. 이게 뭐에요? 돈이 수십 조 전 세계 80 몇 등의 부자? 그런데 돈은 제 맘대로 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자기가 젊어지는 거, 이것은 자기 맘대로 안 되잖아요. 몰라, 미스터 백 같으면 모르지만. 34살인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런 건 드라마에서나 하는 이야기고.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영생이라 하는 것은 결국 오래 사는 거거든요. 그러면 주님이 생각하는 영생은 그게 아니고 질적으로 바뀌어져야 돼요. 어떻게? 천국 가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되는 겁니다. 천국 갈 사람으로. 그러니까 엿가락이 소시지로 바뀌든지 뭐로 바뀌어야 돼요. 바뀌는데 뭐로 바뀌어야 돼요? 천국에서 살 수 있는 분으로 바뀌어야 되거든요.

그러면 천국에는 누가 삽니까? 예수님밖에 없잖아요. 천국에서 살기에 합당한 분은 인간 가운데 예수님밖에 없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질로 바뀌어져야 되는 거예요. 바뀌는 방법이 뭐냐 하면 바뀌는 방법이 뭘까요? 나를 죽이면 돼요. 엿을 죽이고 그 다음에 소시지 될까 안 될까는 누구 손에 맡기면 돼요? 주님 손에 맡겨줘야 돼요.

내가 만약에 나는 뭔가 새로운 인간이 되고 싶다고 한다면 그 말은 잘못된 말 이예요. 그거 설명할 때 들어오셨는데 사람들은 새 차를 좋아한다 말이죠. 만약에 내가 새 차가 있을 때 이것이 새 차라고 내가 좋아하는데 사실은 이 차가 내가 좋다하는 말은 내 머릿속에 옛 차는 이렇고 새 차는 이 정도 돼야 된다는 생각이 이미 내 안에 있어요? 없어요? 있죠. 그러면 새 차라는 것이 진짜 주님이 새 차가 아니고 누가 짐작한? 이미 누가 예상한 차입니까? 내가 예상한 새 차잖아요. 그러니 그 새 차라는 것도 어느 생각의 연장입니까? 내 생각이 늘어난 것밖에 안 돼요.

천국? 진짜 천국이 아니에요. 우리는 각각 제각기, 나름대로의 천국이 다 달라요. 한 다섯 사람 모아놓고 천국을 설명해 보라 하면 다 달라요. 다 다르다고요. 남자가 말하는 천국 다르고 여자가 말하는 천국 다르고 다 달라요. 개가 말하는 천국 다를 것이고 다 달라요. 남자가 말하는 천국은 여자들이 많이 있다든지 여자가 말하는 천국은 잘 생긴 남자들이 많다든지 이런 식 이예요. 천국이란 자기 미흡함을 보상해 줄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세계를 기대하는 것, 그 천국은 진짜 주님의 천국이 아니고 우리가 미흡한 것을 보상해주고 회복시켜주는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럼 인간들 가운데 천국 아는 사람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왜, 아무도 천국을 가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러면 예수님이 말한 천국을 제자들이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죠. 인간은 자꾸 오해만 하니까. 그래서 예수님 모든 말을 제자들도 못 알아들어요.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알아듣지를 못하는데 어떻게 아느냐 하면 예수님 말을 가지고 자기가 자기 심성 안에서 재조립을 해요. 하나의 예를 들면 베드로가 예수님이 마지막에 잡혔을 때 불가에서 손 쬐면서 예수님을 어떻게 했습니까? 저주하고 부인했죠. 그러면 이 장면이 중요한 장면인데 예수님이 어떠하기를 원했던 거예요? 저렇게 체포 안 되기를 원했죠.

그러면 베드로 속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절대로 체포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체포 된 인간들을 향하여 태권도 날리고 업포컷을 날려서 어디 하늘에서 오신 메시야를? 다 쳐부숴서 갑자기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십자가 묶으니까 십자가 밧줄이 우두둑 두두둑 끊어지고 말이죠. 십자가 거꾸로 해서 십자가 들고 빌라도 뒤통수 치고 그래서 예수님 12제자들이 내무부 외무부 장관 장관 자리 죽 앉아서 그래서 다시 민중들한테 ‘야, 호산나 잘했다. 승리했다. 이겼다.’ 하는 그런 메시야를 12제자가 원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12제자가 하늘에서 누가 높으냐. 자리다툼부터 선거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내가 밀어주면 박 근혜 밀어주면 .. 그거만 따지는 거예요. 그런데 베드로가 생각한 예수님은 뭐냐 하면 예수님 말을 자기 안에서 재공략한 겁니다. 다시 구성한 거예요. 자신이 갖고 있던 구성한 거, 구성해서 내린 결론이 뭐였습니까?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입니다. 3년 동안 따라다녔는데. 물 위를 걸었는데. 오병이어를 행했는데. 심지어 예수님 힘으로 귀신까지 하늘에서 떨어지게 했는데. 병자를 고쳤는데. 그래도 몰라요? 그래도 못 알아보는 거예요. 예수님이 누군지 몰라요. 예수님의 능력을 입으면서도 예수님 당사자가 당체 누군지 몰라요. 혜택을 입으면서도. 얼마나 재미난 이야깁니까?

목사가 설교해서 천국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교인들은 앉아서 전부 다 자기 맘대로 조립해 버려요. 붕어빵 아시죠? 잡숴보셨죠? 붕어빵 특징이 뭐냐 하면 같은 틀에서 붕어빵 찍어내도 똑같은 게 하나도 없어요. 밀가루 탄 게 하나 더 붙어있다든지 대충은 맞는데 전혀 같은 게 없죠? 똑같지 않아요. 사람들이 100명의 교인들이 앉아 있으면 목사가 무슨 설교를 해도 생각이 다 달라요. 전부 다 자기 생각하고 있어요. 왜, 자기가 그 교회당 오기 전까지의 살아온 삶의 경로와 삶의 여정과 환경이 다~ 다르기 때문에. 맺힌 한들이 달라요. 어떤 데는 살 안 쪄서 한 맺히고 어떤 데는 살 못 빼서 한 맺히고 어떤 사람은 아버지가 아파서 한 맺히고 어떤 이는 이혼해서 한 맺히고 온갖 한들을 갖고 왔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이 백날 와도 이게 주의 말씀이 아니고 누구 말씀 돼요? 내 말씀 된다고요. 그러니까 엿가락 가지고 소시지 되려고 왔다가 도로 엿가락만, 이쁜 엿가락. 참한 엿가락만 돼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요.

이거 무슨 대책이 있어야 되겠죠. 예수님이 말한다고 해서 말 알아먹어서 내 것으로 소화시켜서 구원? 베드로도 실패했는데 우리야 말할 것도 없죠. 베드로는 물위까지 걸어도 실패했잖아요.

그 제자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줄곧 믿는대. 예수님이 하신 말마다 ‘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그래 제자들이 믿어서 주의 증인 됐습니까? 그 믿음도 어떤 믿음이냐 하면 자기가 평소에 눈에 보이는 걸 믿는 그 믿음이죠. 가짜 믿음, 엉터리 믿음, 아담의 속성에 나온 믿음이겠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평소에 뭐라 했느냐 하면 “네가 믿음이 있어? 믿음이 있으면 아저씨 아들 못 살렸어? 내가 너희들한테 겨자 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저 아저씨 아들 살릴 정도가 아니고 아예 산에 있는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지라“했을 지라도. 갑자기 나무가 슝! 뽑히더니만 완전히 북한 미사일처럼 날라 와서 동해 바다에 풍덩하고 빠졌을 거예요. (어서 오세요. 이젠 다시 새로 못하죠.)

그러니 겨자 씨만한 믿음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믿음은 겨자 씨만한 믿음도 없다는 말은 결국은 믿음이란 것은 양의 문제에요? 질의 문제에요? 질의 문제라니까요. 양의 문제가 아니고. 절대로 성령이 하는 일은 양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분명히 이 시간에 언급했어요. 성령에 관한 건 양이 아니고 질입니다.

그런데 왜 기도를 한 시간 해야 됩니까? 시간의 양 가지고 이야기하느냐 말이죠. 꿇어앉아서 기도해야 됩니까? 그냥 양반 다리 해서 기도해야 됩니까? 이런 게 왜 나오느냐? 분명히 질이잖아요?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헌금할 때 과부의 두 렙돈, 우리나라 돈으로 한 40원, 과부가 40원 하니까 ‘아휴,40원이 뭐고, 애들 껍 값도 안 되겠다.’ 예수님께서 뭐라 했습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40원 했다고 양적으로 따지니까 주님이 반대로 양적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전부 다 바쳤다. 네가 전부 다 바칠 수 있느냐?”

헌금도 양이 아니고 기도도 양도 아니고 그리고 교회 교인수도 어떻게 됩니까? 교인 수 만 명 이상 되면 구원받습니까? 마태복음 19장에 예수님이 교인 몇 명이라 했습니까? 어디에 함께 있다 했습니까? 두세 사람이죠. 자기 마누라 있어도 두 명이고 애까지 있으면 세 명 돼요. 그런데 주님께서 “나 초청해놓고 이게 뭐고? 다 어디 갔어? 에이, 재미없어.” 라고 그냥 가십니까? 아니죠. “누구든지 내 이름에 의해서“ 그러니까 본문을 잘 보세요. ”나로 인하여“ 예수님 본인으로 인하여 모여든 곳에는 내가 함께 있다. 너희들끼리 온 곳에 나는 가지 않는다. 나로 인하여 모여든 사람에게만 참여하는 그게 교회가 되는 거예요.

교회 소집령 누가 갖고 있습니까? 당회장 목사가 아닙니다. 누굽니까? 예수님이 소집하는 거예요. 어떻게? 이미 성도한테는 성령이 가 있기 때문에 주님의 성령을 통해서 불러 모으면 그게 두 명이 되던 세 명이 되던 그리고 예수님까지 합하면 한명이 와도 예수님까지 합하면 두 명이니까 함께 계시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소집할 때 뭐로 소집하겠어요? “교회 오너라.” 이렇게 소집합니까? 복음으로 소집해요. 복음으로! 예수님 십자가 복음으로 소집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잘난 체 하려고 오지 마라. 오늘도 죄인인데 용서 받은 사람만 오너라. 오늘도 무슨 죄를 지었기에 또 용서해주려고 불러 모으시는가?’라는 취지로 모여져야 돼요.

지금까지 쉬운 거 했는데 이제부터 어려운 거 합니다. 자, 문제가 뭐냐 하면 아무리 예수님 이야기하고 아무리 복음 이야기해도 내부적으로 어떻게 한다? 자기가 자기 맘대로 편집하고 자기가 소설 써버리니까 이거는 엿가락 늘어난 것이지 절대로 소시지로 넘어가는 건 아니잖아요. 질이 다른 걸로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질이 다른 그 질이 어떤 질이냐 하면 천국에 살만한 사람이 돼야 되는데 천국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보도 못하고 우리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 몰라요. 천국을 아시는 분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밖에 없죠. 그러면 천국에 살만한 질이라 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과 같은 동일한 질을 갖고 있으면 영생 얻을 수 있겠죠.

그러면 어떻게 바뀌어야 됩니까? 현재 있는 이것을 심판을 받아버려야 되죠. 누구한테? 스스로 자살하면 안 되고 누구한테 심판 받아야 돼요? 미리 앞당겨서 예수님한테 심판 받아야 돼요. 오늘 본문에서 심판이고 영생이고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은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만 다시 해봅시다. 이게 구슬이라면 이 구슬을 예수님이 쳐다보고 있어요. 그러면 이 구슬 속에 있다는 것은 이미 바깥에서 훤히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심판이나 영생이란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이미 심판, 영생에 대해서 이미 다 그걸 결정권을 갖고 있는 분이 모든 걸 마무리 지을 분이 쳐다보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만약에 잠실에 가면 롯데 월드에 사장님이 있다 합시다. 롯데 월드 사장님이 저 전라도 어느 시골에 가서 애가 이뻐서 ‘야, 너 롯데 월드 많이 들어봤지?’ ‘들어봤어요.’ ‘거기 내가 넣어줄게.’ 왜 그런 자격이 있는 겁니까? 본인이 누구기 때문에? 롯데 월드 사장이기 때문에 자격이 있죠. 뭐라 합니까? “나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는 말을 누가 해요?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면 이 말을 듣고 ‘이러면 구원 받겠다.’라고 하면 안 돼요. 그건 믿는 게 아니에요. 그건 자기 구원을 믿기 때문에 그건 땡 탈락 이예요. 그건 믿는 게 아니에요. 누굴 믿어야 돼요?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격자가 바로 예수님 당신입니다.‘라고 나는 자격자를 만난 것에 대해서 감사할 때 그게 믿음이라니까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할 때 주님 앞에 자살하지 마세요. 주님 앞에 내가 죽고 죽으면 주께서 살리겠지, 이렇게 돼 버리면 그 작업을 누가 하는 거예요? 내가 하는 거라니까요. 내가 하는 거라고요. 다시 예를 들어봅시다. 롯데 월드 사장님이 전라도 산골에 가서 어린애를 만났고 ‘야, 너 롯데 월드 보고 싶지? 내가 넣어줄게.’ 할 때 그 애가 순진하게 사장님을 ‘사장님이시죠?’ 라고 믿으면 되는데 그 애가 집에 가서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신 뭐시기,’ 맞는지 찾아본다고요. 이거 믿음 이예요? 믿음 아니에요? 그건 믿음이 아니죠. ‘당신이 뭐라 해도 내가 믿어져야 돼.’ 이러는 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이것은 주님의 주도권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예수 믿는 믿음은 예수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믿지 마세요. 믿지 마세요~♬ 믿지 마세요.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진짜 믿는 자입니다. 아이쿠, 너무 어렵게 했나. 믿지 않는 것이 믿는 자에요.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 믿습니다.’라는 말은 인간 세상에서 어떻게 통용되느냐 하면 ‘이제 예수님이 누군지 내가 컴퓨터로 찾아보겠습니다.’라는 자기 노력의 다른 표현이 ‘한번 믿어보렵니다. 한번 따져볼까요?’ 이런 식이라니까요. 따지긴 뭘 따져?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믿는 척을 해야 됩니까?

제가 지난 낮 설교 때 ‘님과 함께’라는 TV에 나오는 예능프로가 있는데 안 문숙이하고 아나운서 김범수하고 사귈 때에 안 문숙이가 하는 멘트가 있어요. 우리 믿는 척을 해서 돈만 받으면 돼. 방송국에서 우리는 연기하면 돼, 우리 사귀는 척하면 되는데 안 문숙이가 심경의 변화가 와버렸어요. ‘이 남자를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니’ 그 다음에 뭐라 그랬느냐 하면 아! 얼마나 좋은 말했는지 ‘혼란스럽다.’는 거예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척, 결혼하는 척만 돼요. 그래서 출연료 받으면 되니까. 그런데 너무 가까이 하다 보니까 갑자기 ‘이러다 우리 결혼하는 거 아닌가?’ 오, 혼란스러운 거예요.

요새 교인들이 뭡니까? 믿는 척, 사랑하는 척만 하면 돼요. 왜, 척하고 믿는 척해야 됩니까? 진짜 사랑하고 진짜 믿는 대상이 있기 때문에. 누굽니까? 바로 본인 이예요. 본인만을 사랑해요. 인간은 예수님은 그냥 우리 이상규 집사님 멘트에 의하면 예수님은 도우미, 예수님은 도우미에요. 내가 날 사랑하는데 옆에 도와주는 분, 몸 아프냐? 도와줄게. 돈 없냐? 도와줄게. 사업 안 되냐? 도와줄게. 애 결혼 안 했어? 내가 도와줄게. 뭔가 도우미에요. 도우미도 돈 꽤나 들어요. 다른 교회 가면 십일조 내야 되지, 새벽기도 가면 돈 드는데, 어떤 교회 가면 돈도 안 들고 괜찮아요.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교회 봉사 안 하면 도우미가 삐져서 안 도와준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인간들이. 결국은 사랑은 누가 하느냐 하면 무조건 내 사랑은 내가 포기 못해. 내 사랑하는데 어떻게 당신이 많이 도와주게 되면 내가 내 사랑하는 몫을 떼서 당신 사랑해줄게. 그러니까 우리가 먹는 빵의 부스러기를 누가 주워 먹어라? 예수님 보고 주워 먹으라는 겁니다. 내가 나를 먹이는 그 빵의 부스러기를 떨어지거든 주워 먹어라. 완전히 예수님이 개야. 자기가 주인이지. 왜냐, 자기가 주인으로 있기 때문에 내 곁에 있는 것은 전부 다 개나 고양이밖에 안 돼요. 애완견밖에 안 된다고요. 반려동물밖에 안 돼요. 도둑 오면 멍멍 짖어대면 되고, 쥐 오면 잡아오면 되고.

그런데 어느 날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그 말을 달리하면 어느 날부터 내가 싫어. 내가 싫어. 나만 챙기는 내가 싫어. 남은 죽자고 나만 위하는 내가 싫어. 그래서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데 하나를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하나는 미워하게 돼 있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타고 났어요. 거기다 부모가 애한테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질문을 하니까 아빠가 있을 때는 아빠가 좋다 하고 엄마가 있을 때는 엄마가 좋다 하고 애는 요령을 부릴 수밖에 없죠. 왜, 같이 사랑할 수 없거든요. 한쪽을 미워하게 되면 한쪽을 반드시 사랑하게 돼 있으니까.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그때부터는 내가 그렇게 귀하고 죽도록 남만 이용한다는 그게 이제는 안 그래. 내가 나에 대해서 손을 놔버리니까 이게 혼란스러워져야 돼요. 이게 혼란스러운 거예요. 그동안 내가 교회 다닌 것이 이유가 뭔데? 뭣 때문에 교회 다녔는데요? 내가 살려고 교회 다녔는데 이제는 예수님 사랑하고 난 뒤에 ‘주여 이제는 죽여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죠. ‘고만 살려줘도 이제는 날 죽여도 좋아요.’ 이렇게 나오니까 ‘내가 왜 이렇게 달라졌지? 미쳤어. 미쳤어. 내가 혼란스러워. 뭐지?’ 그게 성령 이예요. 이게 성령이 충만하면 그래요. (들어오세요.) 이제는 다시 못한다.

인간이 사람이 자기를 믿게 되게 되면 자기를 포기를 못합니다. 자기를 포기를 못하게 되면 뭐든지 나를 건드리면 다 죽이고 싶어요. 예수든 하나님이든 나 건드리면 다 죽이고 싶어요. 그래서 교회 보면 예수님을 복수하는 방법들을 사용해요. 갑자기 집을 팔아서 헌금을 교회다 바친다든지 금식을 한다든지 이거는 주님에 대한 극도의 반항심의 표현입니다.

내가 주일 날 이야기했죠. 선생님이 숙제를 낼 때 학생이 선생님을 가지고 노는 방법은 선생님이 요구한 것보다 더 많은 분량의 숙제를 해 와서 두 번 다시 선생님으로 하여금 자기한테 지시 못하게 만들어요. 선생의 간섭을 끊어버려요. ‘선생님 당신보다 내가 더 잘났어. 이것만이 선생으로부터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이나 예수님한테 벗어나는 방법은 뭡니까? 시키는 것보다 더 착하면 되죠. (어서 오세요.) 주님이 시키는 것보다 더 착하면 돼요. 착하면 주님도 딴 사람은 그렇게 지적 해도 감히 나한테는 ’아이구, 요렇게 착할 수 가 있나.‘ 이렇게 해서 복을 안 줄래야 안 주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는 거예요. 참~ 인간 못 됐죠? 주님과 어떤 라이벌 관계를 느끼는 겁니다. 당신이 나한테 요구한 것보다 내가 더 착해져 버리면 더 이상 당신이 나한테는 복만 주고 다른 거는 일체 간섭 안 할 수 있으니까 나는 자립하게 되죠. 어떤 자유? 어떤 절대성? 이걸 느끼게 되죠. 그게 바로 도 닦는 거예요. 교회 와서 도 닦는 사람, 그게 바로 저는 최종적인 모습이 그거에요. 주님이 시키는 것보다 더 착해지는 거, 그걸 목표로 살아가는.

그래서 그런 나를 만약에 힘들게 한다면 전적으로 그 책임과 잘못은 누가 지는 겁니까? 예수님 쪽에서 나쁘기 때문에 나는 절대로 안 나빠. 왜, 나는 금식했기 때문에, 나는 집안까지 모든 걸 다 교회 갖다 바쳤기 때문에. 이처럼 천사 같은 인간 나와 보라 그래. 없거든요. 이게 믿음입니까? 극도의 자기 사랑이죠.

근본적으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했는데 이 말은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는 뜻 이예요.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믿도록 돼 있고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게 돼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를 못 벗어나요. 자기 머리카락을 잡아당겨서 물에 빠진 내 팔이 내 머리를 잡아당겨서 물에서 못 빠져나와요. 내가 나한테 믿는다. 믿는다. 그거는 자기 체면이죠. 믿는다. 믿는다. 하지를 않죠. 어떻게 합니까? 믿쓥니까? 믿쓥니까? 그걸 가르쳐 주니까 새벽기도나 철야기도할 때 ‘믿쓥니다. 믿쓥니다.’를 가지고 밑에 타이머로 ‘믿습니까?’ 할 때마다 한 번씩 눌러보죠. 한 3천 번 하게 되면 나중에는 자기 체면에 걸려서 ‘그래 나는 성령 받았어.’ 해서 랄랄라, 룰룰루, 헛소리 나오고 자기가 한 소리인데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고 무슨 뜻이냐 하면 뜻도 모르고 횡설수설하면서. 그거는 소주 두 병 까보세요. 맨 그런 현상이 또 나와요. 소주 두병 먹으면 똑같은 현상이. ‘난 성령 받았네.’ 티내려고. 티내서 뭐 할 건데? 티 내봤자 엿가락은 엿가락이 소시지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직접 그 인간을 같이 죽어야 돼요. 로마서 6장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경우에만 비로소 질이 다른 생명이 나옵니다. 그게 영생 이예요. 질이 다른 생명. 그러면 그 작업을 그 사실을 우리가 믿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믿으면 되겠네요. 글쎄 그걸 믿을 사람이 없다니까요.

늦게 오신 분들이 있어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어떤 대상에 대해서 믿는다고 할 때 믿는다는 것이 원래 어느 자리에 있었어요? 내 자리에 있었죠. 내 자리에 믿음 소망 사랑이 내 자리에 있었던 거잖아요. 그럼 내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내 자리가 무슨 자리입니까? 죄가 지배하는 자리죠. 죄가 지배하는 자리에서 나오는 믿음 소망 사랑이 이게 올바른 믿음 소망 사랑이겠어요? 안 그러면 죄 덩어리이겠습니까? 이게 죄 덩어리 되는 거예요. 이게 죄 덩어리에요.

백날 믿어봤자 내가 믿는다. 백날 사랑해도 내가 사랑한다. 이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5장에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라고 돼 있잖아요. 이거 우리보고 하라는 거예요? 예수님 본인이 하겠다는 이야깁니까? 예수님 본인이 하겠다는 거예요. 이쯤에서 다시 예를 들어봅시다. 롯데 월드의 사장이 저 전라도에 있는 어떤 산골에 있는 애한테 ‘너 롯데 월드에 넣어줄게.’라고 했을 때에 그 애가 생각할 것은 ‘아, 뭐 타면 되지? 버스 탈까?’ 이걸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가나 그걸 생각하지 말고, ‘누구지?’ 이거만 생각한다니까.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나로 하여금 그 비싸다는 롯데 월드를 그냥 공짜로 넣어주느냐? 누구지?‘ 누군지만 생각하면 돼요. 그게 지금 전라도든 속초든 제주도든 미국 가도 괜찮아요. 그분은 미국 가 있는 나도 롯데 월드에 넣어줄 수 있고 북한에 가도 넣어줄 수가 있고 알래스카에 있어도 넣어줄 수가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왜 그렇게 사망에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 우리 상태가 무슨 상태냐 하면 사망의 상태입니다. 사망의 상태인데 사망한 자를 영생 주는 것은 우리가 사망했을 경우에만 해당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 안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살았다고 생각하는 자로서는 아무리 해봐야 사망에서 생명이 아니고 산 채로 생명이기 때문에 이거는 요한복음 5장 24절에 해당이 안 되는 이야깁니다. 이거는 우리의 소설 이예요. ‘내가 살았는데 예수 믿으면 영생이다.’ 이거는 우리가 짜낸 소설이고 드라마지 이거는 실제도 아니고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 같으면 우리가 사망에 속해야 돼요. 사실은 정확한 말은 우리가 죽었다가 정확한 말이 아니고 사망에 속했다가 정확한 표현인데 그렇게 이야기하면 어려우니까 그냥 우리가 죽었는데 죽은 자를 주님께서 어떻게 한다? 생명으로 옮기는 겁니다.

여러분 에스겔 37장에 보면 뭐 나오죠? 거기 에스겔 인자 데리고 어디로 갑니까? 뼈, 그것도 그냥 축축한 뼈가 돼서 암모니아나 탄수화물이 생겨서 가능성이 없어요. 바짝 마른 뼈에요. 바짝 마른 뼈를 보고 하나님이 인자에게 “이 뼈가 살겠느냐”고 묻잖아요? 물을 걸 물어야지, 이게 살겠느냐. 물어봐? ‘헉헉헉’ 이러면 이해돼요. 잘하면 다리미질해서 살겠는데 지금 그게 아니고 “바짝 마른 뼈인데 살겠느냐?” 그거 여러분 이해됩니까? 그 뼈가 살겠어요?

과학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가설이 또 다시 반복이 될 때 가설이 정설로 돼요. 맞죠? 과학이란 것은. 실험실에서 해봤는데 공장에 가면 영 안 돼요. 여기서 하든 저기서 하든 항상 똑같이 반복이 돼야 돼요. 그렇다면 과학적 인식을 교육을 받은 우리가 뼈가 산다면 우리는 그 말씀을 증명하기 위해서 어디 가서 개뼈다귀 주워서 ‘주여 기도하겠습니다.’ 이렇게 테스트 해봐야 됩니까? 전라도에 있는 골짜기에 있는 애가 롯데 월드 넣어준다니까 인터넷 쳐서 그 사장님 정체가 누군지 가짜인지, 사기 치는지 그거 검색해야 돼요?

그렇게 한다는 게 뭐냐, 이게 못 믿겠다는 뜻 이예요. 못 믿겠다는 것은 뭔 뜻입니까? 믿을 놈은 누구밖에 없다? 나의 지식과 이성과 나의 감정과 의지밖에 믿을 게 없다. 이런 뜻 이예요. 성령의 믿음하고 완전히 별개라니까.

죽음에서 살아나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우리가 살았다고 여기는 자를 주께서 뭐로 바꾸느냐 하면 죽음으로 이걸 바뀌어져야 돼요. 그 바뀌는 작업이 우리가 바꿉니까? 우리가 살았는데 한 눈 뜨고 이러면 죽은 거 돼요? 그건 연기죠. ‘주여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가슴 치면 이게 죄인 됩니까? 자기 가슴만 아프지 그게 죄인 돼요?

죄인 되는 방법 간단해요. 기도 응답 안 되면요, 순간적으로 죄인으로 돌변합니다. ‘에이’ 하고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영어로 ‘에이, 비타민 C, 에이 비타민 C’ 그게 바로 그렇게 되고 싶은 죄인 이예요. 뭐 기도 응답 안 되니까 대번 되네. 대번 되는 거예요. ‘에이, 비타민 씨.’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사망 된 자를 생명으로 옮기는, 사망되게 하는 그것도 누구 몫이냐? 주님이 하시는 몫이고 생명으로 옮기는 것도 주께서 하실 몫이고 그건 주님의 숙제지, 우리 숙제가 아니에요.

우리가 우리 인생의 어떻게 되는 것에 대해서 제발 손을 놔버리세요. 손을 놓으세요. 절벽에서 손끝에 달렸다. 놓으면 죽고 기어 올라가면 산다. 그 둘 중에 어떻게 해야 될까요? 절벽에 떨어지는데 독수리는 날라 오네. 하필 매달려 있는 손가락 두 개를 쪼아대네. 불교의 선불교에서는 거기에 대한 답변 같은 게 없어요. 그냥 문제만 던져줄 뿐 이예요. 답변은 네 맘대로 하세요. 이렇게 돼요. 그러나 그런 경우가 실제로 있다면 복음에서는 간단합니다. 그것도 누구 일이냐? 그 독수리가 시속 60킬로로 날라 오는 것도 누구 일이냐? 주님께서 하는 일인데 주님은 무슨 일을 하느냐 하면 바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해서 그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손을 놓을까요? 가만있으세요. 언제까지? 힘 빠질 때까지. 그냥 사시면 되는 겁니다. 그 매달리는 걸 가지고 세 자로 막 산다고 하는 겁니다. 그냥 막살면 되는 겁니다. 그냥 막 살면. 막 살아도 주께서 내린 그 막사는 조치도 주의 조치라고 믿어지는 것은 이것은 주님의 몫입니다. 주께서 주신 주의 영이 임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첫째 시간 결론은 간단하죠. 막 사세요. 이게 결론 이예요. 막 사세요.

어떤 개념도 우리가 만든 개념은 오염된 개념이고 엉터리 개념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스스로 수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방식은 뭐냐 하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잖아요. 살아가는 그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죽을 때 죽는 것이 아니고, 열심히 살아서 영화 보고 골프 치고 하는 모든 것을 다 죽었다고 보는 거예요. 골프장에 가서 캐디 희롱하고 하는 거 있잖아요. 그 전체를 다 죽은 걸로 간주하고 또 지하철에서 딸랑딸랑 하면서 자선냄비 하는 거 있잖아요. ‘그래 구세주는 믿을만하다. 딴 거는 누가 먹는지 모르지만 구세군은 절대로 그런 일 없을 거야. 바른 이웃을 찾아 진짜 줄 거야.’ 하고 만 원짜리, 너무 심했나? 그럼 천 원짜리 해줘도 그 자체도 무슨 일이냐 하면 그게 죽을 일 이예요. 자선냄비에 돈 던져주는 것도 그게 구원 받지 못할 지옥 갈 죄가 되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그 자체가 죄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 지래 아래. 그러니까 사적으로 우리에게 행동을 따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어떤 행동을 해도 우리보고 따지지 않아요. 우리를 지배한 마귀 보고 따지지 우리보고 따지지 않아요. 괜히 우리가 죄 진적 착각해서 ‘주님이 날 미워할 것이다.’ 뭘? 미움의 대상도 안 돼. 주님이 날 미워할 것이라는 것은 결국은 말을 이렇게 연결해 보면 논리가 뭡니까? ‘주님께서는 내가 강의 중에 물을 마시면 날 미워할 것이다.’ 하는데 목마르게 하신 분이 누군데요? 주님이시고. 마침 물 있네. 누가 물 있게 했습니까? 주께서 물 있게 했잖아요. 그럼 날 나무라면 누가 누굴 나무란 거예요? 주님이 자기가 설정한 자기가 배치한 세트를 미워한 셈이 되니까 이거는 모순되잖아요. 그렇잖아요.

내가 말을 너무 어렵게 했는데 가룟 유다보고 뭐라 했습니까? “네가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다.” 지금 가룟 유다보고 한 소리입니까? 어떻습니까? 그걸 태어나게 하신 태어난 가룟 유다보고 물을 그런 말이 아니죠. 집사님 애보고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아야지.’ 태어나게 해놓고 왜 그걸 자식한테 묻습니까? 부모 자기 책임이지. 애가 ‘엄마 태어나게 해주세요.’ 이래서 태어난 건 아니잖아요. 피동형 태어난 자식 보고 ‘야야, 너는 왜 태어났노?’ 그걸 자식 보고 묻는 게 아닙니다. 한 맺혀서 그런 경우는 있죠.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라고 울면서 하는 경우는 있지만 진지하게 자식 보고 할 문제는 아니죠.

그런데 주님은 누구보고 한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 했다.“ 이 말은 가룟 유다야. 네가 태어나서 이런 짓 하는 것도 누구 아이디어다? 예수님 본인의 아이디어에요. 나는 저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은 내가 만들 권한이 오직 누구한테? 이 세상에 남아있는 거예요. 우리에게 주는 것은 주께서 주시는 우리의 행복도 아니고 우리가 기대한 영생도 아니고 우리가 기대한 천국도 아니에요.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바로 자비의 항아리, 자비의 그릇으로 만들어주는 겁니다. 이건 우리 아이디어가 아니에요. 주님이 일방적으로 조치한 조치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거부를 하던 뭐를 하던 간에 그 자비는 여전히 자비로워요. 심지어 5도 화상 입어서 온 몸이 벌겋게 데어도 그 자체가 ‘아이구, 이쁘기도 하여라.’ 주님의 그릇이 되는 겁니다.

그런 능력으로 바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깁니다. 이게 천지 창조의 능력 이예요. 왜, 이미 끝을 다 아니까. 심판도 아시고 끝을 다 아니까. 그래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마는 어떻게 믿게 됩니까? 먼저 주님한테 된통 심판을 받게 돼요. 잘못해서 심판하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를 잘못한다고 지적하는 게 아닙니다. 괜히 우리가 자기 발에 자기가 스스로 책벌하고 자기가 벌 내리고 자기가 ‘이러면 안 되지.’라고 자기가 때려서 그래요.

주님은 우리를 책벌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둘러 싼 우리를 덮치고 있는 이 거대한 솥뚜껑을 치고 있는 거예요. 솥뚜껑을 가지고 공격하거든요. 주님께서 이 솥뚜껑에서 사망에서 사흘 만에 살아났잖아요. 그렇잖아요. 잘 들어보세요. 사흘 만에 살아난 분이 우리한테 침투하게 되면 뭐도 같이 우리가 느껴집니까? 주님이 뚫고 들어온 뭐도 함께 느껴져요? 우리가 잘못이 아니고 우리는 악한 영이, 악마가 지배한다는 그 사실도 주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면서 이것도 동반해서 이것이 느껴지게 만들죠.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우리가 나쁜 짓해서 죄인이 아니고 날 때부터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될 경우는 이미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알게 되는 거예요. ‘야, 이거 내가 착한 일 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구나.’ 비로소 아는 거예요. 주님이 이야기한 것보다 착한 일 더 많이 한다고 주께서 복 주는 게 아니고 복과 저주에 관한한 우리의 뭣이 덮어진? 주의 은혜가 덮어졌으면 무조건 복이고, 그거 말고 딴 게 악마가 있으면 무조건 저주가 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뭘 하든 간에 판사, 검사, 의사가 되도 그건 저주가 함께 있다는 말을 그렇게 하신 거예요. 괜히 자기 행동에 쫄지 마세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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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요한복음 5장21(악)141204b-이 근호 목사

예수님께서 아까 솥뚜껑 이야기했잖아요?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악, 악을 뚫고 들어온다. 그런데 그 악이 뭐냐 하는 거죠. 악이 그냥 시멘트로 발라 놨다 던지 아니면 나무토막 같으면 드릴로 드르륵 하면 우리가 ‘아, 드릴로 뚫는 소리 난다. 아, 지금 우리를 덮고 있는 악마를 뚫는구나.’ 이게 물리적으로 이해가 되는데 그 악이라는 게 모호해요. 악이라는 게 원래 우리한테는 없어요. 왜 없느냐 하면 인간들은 자기의 잘잘못은 자기가 행동하기 나름이지 누구 탓이다 저거 탓이다 할 수 없거든요. 내가 나쁜 마음 가지고 나쁜 생각을 가지고 나쁜 짓하면 그게 나쁜 짓이 되고 내가 나쁜 짓 하더라도 내가 마음 돌이켜서 착한 마음먹고 바르게 살면 착하게 되거든요.

마태복음에 부자 청년 알죠? 그 부자 청년, 어릴 때부터 나쁜 짓 한 적이 있다? 없다? 없어요. 어릴 때부터 십계명 다 지켜서 선하거든요. 선한테 그 선함 가지고 영생은 과연 이만한 선 가지고 영생에 들어갈 것인가를 측정하려고 온 거예요. 누굴 찾아왔느냐 하면 하늘에서 왔다는 예수님 찾아왔습니다. 왔을 때 “선한 분이여”라고 좋게 이야기하니까 “누구 보고 선하대?” 네가 말한 선한 개념을 나한테는 적용 시킬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악이라는 것을 지금 모르는 입장에서, 죄를 모르는 입장에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본인이 나는 양심적으로 선하면 선하고 양심적으로 꺼림칙하면 악하다. 이건 본인이 정의를 내린 거죠. 그러면 그게 열 사람 같으면 열 사람이 어떻게 됩니까? 정의가 다 다르겠죠. 열 사람 다 달라요. 결국 이건 인간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아무리 깡패고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그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모이면 의리가 있어요. 깡패 세계도 의리가 있다니까요. 자기가 나쁜 짓 했잖아요? 하지만 자기보다 더 나쁜 짓하면 자기가 의분을 느껴요. ‘저런 나쁜 놈이’ 합니다. 그런데 그런 소리 듣는 나쁜 사람이 그보다 더 나쁜 사람 같으면 ‘저런 나쁜 놈’ 이렇게 하는 거예요.

사람이 열 명 죽였다. 나쁘죠. 스탈린은 몇 명인지 알아요? 스탈린은 1500만 명 죽였어요. 히틀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히틀러는 기껏 550만 명 죽였거든요. 기껏 550만 명 죽였잖아요. 스탈린은 더 죽였어요. 스탈린 신학교 나왔습니다. 히틀러는 얼~마나 감성적이고 눈물도 많고 그림을 그리는데 너무너무 잘 그려요. 화가가 되려고 했어요. 바그너의 음악 오페라를 들으면서 감성적 이예요. 잘 울고 아름다움에 대해 도취돼 있고, 도취되면 뭐합니까? 550만 명이나 다 죽여 버렸는데. 유대인을 600만 명이나 다 죽였는데.

왜 죽였습니까? 히틀러가 유대인을 왜 죽였죠? 무엇을 위해? 명분이 뭡니까? 독일을 위하여. 히틀러한테 지시를 받고 유대인들을 아우스비츠 죽일 때 그 괴델이란 그 사람이 지시를 했잖아요. 왜 했습니까? ‘나는 공무원이다.’라고 끝나는 거예요. 나는 공무원 이예요. 공무원은 뭐하면 됩니까? 지시 받은 대로 움직이면 되네요. 그리고 그 사람은요 가정에서 그렇게 가정적 이예요. 전혀 인상이 이렇고 이렇지(험상궂지) 않아요. 착해요. 사람이 천성적으로. 참 이상하죠. 월남에 파견된 군인들이 고국에 있을 때 정말 다 훌륭한 총각들 이예요. 맨날 늬우스 영화에 나오잖아요. 베.. 보도 나올 때 맹호부대 얼마나 비둘기처럼 착합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전쟁 통에서 인간이 짐승으로 변하죠. 그런데 전쟁 끝나 보세요. 다시 온순한 양으로 변합니다.

도대체 인간이라 하는 것은 주변의 친구가 누구냐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평소에 술 한 잔 못 먹던 것이 입사해서 회식 몇 번 했더니만 술고래 되어서 폭탄주도 먹고 도대체 왜 그래요? 미생이라서 그런가. 왜 그렇게 된 거예요? 바로 죄악, 이것을 임의대로 본인이 단정 지어서 그래요.

그러면 죄가 뭐냐, 이 시간 알려드리겠습니다. 악이 뭐냐, 알려드리겠습니다. 이거 잊지 마세요. 오늘 강의, 제일 중요한 건데, 뭐가 악이냐? 이겁니다. 정상인. 정상인이 이게 악 이예요. 악마고 정상인이 이게 마귀가 이렇게 심어놓은 거예요. 정상인!

그러면 정상인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미친 자겠죠. 정상인 반대가 정신병자 아닙니까? 요 미친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 이예요.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나는 뭘 포기하고? 정상인을 포기하고 미친 자를 믿겠다는 겁니다. 이거는 성령이 아니면 그야말로 악을 뚫지 아니하면 아무도 있을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게 안 되니까 정상인보다 더 완벽하게 착한 정상인을 가지고 뭘 만드냐 하면 이분을 누구로 보느냐 하면 이분을 예수님으로 내세운 겁니다.

참, 이것이 알고 싶다. 이제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가장 정상인의 제일 위에 앉았던 분이 누구냐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이예요. 그 사람들은 자기 구원을 위해서 일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전 국민의 신자 화를 위해서 애썼던 사람 이예요. 인간을 분석하고 그리고 인간을 분석하는데 본인의 사견이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내려왔던 수많은 말씀과 거기에 대한 해석, 거기에 대한 주석들, 이런 것을 다 가지고 인간이라는 거기에 외국에 있는 철학과 모든 잠언 지혜 총동원해서 인간은 어떤 존재냐를 규정하고 그 인간을 천국에, 하늘나라 백성이 되기 위해서 이렇게 속된 인간을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어떤 중간 다리를 통해서 어떤 양육과 제자 훈련과 교육을 시키게 되면 이 인간을 인간 질적 자체를 이렇게 좋은 인간으로 달라질 수 있는가에 매진하고 그걸 연구했던 사람들 이예요.

그래서 십계명만 있는 게 아니고 십계명이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잖아요? 만약에 지금 여러분한테 제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십계명을 던져 줬습니다. 십계명 받고 뭐할 거예요? ‘아따 글씨 잘 썼네.’ 이거 구경합니까? 하나님이 주셨다고 받고 난 뒤에 무슨 작업에 들어가요? 이거 지키는 숙제 하겠죠. 숙제. 그런데 준 것은 십계명밖에 없잖아요? 그러면 뭐가 필요해요? 우리 현재 상황에서 십계명의 그 원하는 레벨, 그 차원에 도달되기 위해서 그 안에 중간에 뭐가 필요하겠어요? 수많은 중간 규칙들이 필요하겠죠. 뭔 뜻인지 이해하겠습니까? 중간 규칙들이 필요하단 말이죠.

안식일 지키라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안식일 지키기 위해서. 안식일 날 불 피우지 말라 했거든요. 불 피우지 말라는 뭔 뜻인가 연구하겠죠. 안식일 날 불을 피우지 말라는 말은 음식을 미리 하라는 말이죠. 음식을 미리 하라는 말인데 거기서 또 세부조항이 있어요. 음식을 해놓고 여기서 이동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 또 하겠죠. 그거는 그들이 결정하는 게 아니고 수천 년 이상 내려오는 이스라엘의 많은 지혜 자들과 율법 학자들이 그동안 나름대로 연구한 게 있어요. 그 사람들이 연구한 것도 자기 생각 아니에요. 그 전에 연구한 사람들이 한 거예요. 학문이란 발달이 그런 거예요. 학문이란 것은 개인적 견해가 아니고 어떤 사람이 내놓게 되면 그게 맞는지 그른지 그걸 검정하면서 혹시 그 시대 안 맞는 것은 플러스 추가 플러스, 알파 추가해서 더 보완하고 완벽하게 진리 체제를 갖추면서 점점 더 발전하고 발달하는 겁니다. 이거는 과학뿐만 아니고 기술뿐만 아니고 모든 철학 학문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윤리 도덕도 마찬가지에요.

조선시대 때 여자들이 질투하면 뭐가 됩니까? 칠거지악에 들어가죠. 요즘은 질투 안 하는 여자는 여자도 아니잖아요. 여자는 톡 쏘는 맛이 있어야 되지, 질투 안 하면 뭐가 없다? 사랑이 없는 거죠. 그렇잖아요. 그만큼 윤리 도덕의 개념이 어떻게 돼요? 점점 더 바뀌죠. 옛날에 안동 권씨는 자기가 초인종 안 눌렀어요. 바깥에서 ‘이리 오너라.’ 네가 나 있는 곳에 빨리 냉큼 쭈르륵 달려오너라. 그런 뜻이거든요. 요새 그러면 뭐라 합니까? ‘저리 가라’ 하겠죠. 요새는 ‘계십니까?’ 그러면 화면이 나와서 그것도 집에 있는 가정부가 ‘누구십니까?’ 요새는 그러잖아요. 그러면 육중한 문이 죽하고 열리잖아요. 윤리 도덕이 완전히 다 다르다 말이죠. 그게 퇴보입니까? 발전입니까? 상황에 맞게 바꾸는 거예요. 생존에 유리하도록 생존에 힘들지 않도록 또 협의 하에, 그걸 사회 계약설이라 해요. 존로크의 사회 계약설. 사회에도 계약이 있어요. 그게 민주주의에요. 의회에서 법을 만들어서 담배 값 2천원 올리기로 한 거예요. 나 같으면 한 5만 원쯤 올렸으면 좋겠는데, 그거는 내 맘대로 5만 원 올리면 안 돼요. 왜냐 사회 협약이 안 돼요. 너 혼자만 해. 다른 사람이 동의를 안 해주니까 더불어 살 수가 없어요.

따라서 윤리 도덕이고 모든 것이 변합니다. 이 말은 뭐냐 정상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정상인인데 우리는 미흡하니까 미흡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뭘 주셨다? 십계명을 주신 거예요. 십계명을 주셔서 십계명을 지키면 지킬수록 어떻게 된다? 점점 더 거룩한 사람이 되겠죠. 그럼 이걸 그림으로 한번 그려보겠습니다. 당기고 밀고 해야 되는데(카메라) 제가 맞출게요. 거룩한 레벨입니다. 이건 천사 수준 이예요. 인간은 여기 못난 사람, 잘난 사람 있죠.

그러면 여기에 예를 들어서 요새는 모르지만 옛날 식당에 가면 여름에 파리 많을 때 누런 찐드기 붙여놓았죠. 찐드기를 가만히 보세요. 거기 보면 위에도 파리 붙어 있고 아래도 중간에 파리 붙어있죠. 그 찐드기 있으면 많이 올라간 사람들, 노력을 많이 해서 십계명 이정도, 내신 등급 일등급 한 사람들, 이 등급, 삼 등급 있잖아요. 바리새인은 이걸 전체를 몇 등급 나눴느냐 하면 7등급으로 나눈 거예요. 그래서 거룩한 곳에 많이 간 사람과 이제 벌벌 기는 사람과 요걸 구분한 겁니다. 요 벌벌 기는 사람 중에 누가 있느냐 하면 바로 여기(오늘 이런 강의해서 기쁩니다.)에 누가 있느냐 하면 세리와 창기와 강도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 이 미아 성도님이 저한테 전화 문자로 질문했어요. 목사님이 천국이 낯설다고 하는데 왜 천국이 낯설다고 해야 했습니까? 할 때 답변하기를 세리와 창기와 탕자와 강도가 가는 곳이기 때문에 낯섭니다. 낯설어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어디 못 간다? 천국에 못 간다. 이 말은 이미 인간들은 이미 의식적으로 이런 의식으로 찍찍이, 파리 찍찍이가 있는 거예요. 여기 붙어있는 사람, 올라갈 때 애먹습니다. 중력에 반해서 완전히 히말라야 올라가듯이 올라가고 있어요. 철야해 보세요. 지금 3시간 째 커피도 안마시고 4시간 째 기도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30초 기도하고 집에 간 사람이 있어요. 예수 이름으로 아멘. 못 견뎌. 여기는 찬양을 20번 했는데 여기는 찬송가 2절 있다고 짜증내는 사람이 있어요. 1절만 있으면 되지 2절은 왜 있는가. 4절까지 부르려니까 짜증나서 못 부르겠다.

따라서 이런 순서에 있어서 철야 집회 할 때는 누구 역할이 중요하느냐 하면 전도사 역할이 중요해요. 밑에 있는 강대상, 위 말고. 거긴 감히 못 올라가고 밑에 강대상에서 전도사가 해야 되는데 손바닥을 내칠 때 그 인상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희열과 환희에 잠기는 표정을 지어야 돼요. 만약에 전도사가 인상을 쓰면 그 철야 예배 완전히 망쳐버립니다. 더욱 더 성령을 받은 티를 내줘야 돼. 연출력이 뛰어나야 돼. 연기가 뛰어나야 돼요. 그거 못하면 전도사 그 다음 재계약 할 때 못 받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세리와 창기와 강도가 간다. 그렇다면 뭡니까? 거룩한 곳에 주님이 계시는 거예요? 아니면 이미 주님께서 제일 밑바닥으로 왔다는 거예요? 밑바닥으로부터 오셨다는 거죠. 그러면 밑바닥으로 오면 세리와 창기가 왜 이 사람들이 못 가느냐 하면 여기서 누르는 게 있어요. 누가 눌러요? 누구보다 의롭다 여기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누르겠죠. 그 누르는 힘을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이게 바로 악이 되는 거예요. 이게 악인 거예요. 이게 악 이예요. 악.

그것이 로마서 10장 3절에 뭐라 그러느냐 하면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보되 자기 이를 챙기기 위해서 보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 밑바닥에 있는 그리스도 의를 못 보지,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기가 착하기도 하고 그리스도 십자가를 아울러 챙기는 법은 인간에겐 없습니다. 십자가를 챙겼잖아. 챙겼으면 졸지에 뭐로 변해야 돼요? ‘제가 바로 창기고 제가 바로 세리고, 제가 탕자고 제가 강도입니다.‘라고 고백이 될 때 제대로 십자가를 받은 게 돼요.

그런데 일반 교회에서는 뭐냐 십자가는 하나의 정보 같아요. ‘어, 피로 용서 받고 피 흘려 구원 받았으니 착한 일 해야지. 착한 일 해야지.’ 또 착한 일 또 시켜요. 그런 그들은 그걸 가지고 뭐라 그러느냐 성령의 법이라 하는 겁니다. 성령의 법은 계속 착해진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착하다는 개념은 어디서 나온 개념 이예요? 인간에서 나온 개념이죠. 부자 청년이 뭐라 했습니까? ‘예수여 어렸을 때부터 잘 지켰습니다.’ 할 때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네가 착해?” ‘착합니다.’ “착하거든 네 착함을 없애봐라.” 그 없애는 게 뭡니까? “모든 걸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러면 졸지에 부자는 부자가 아니고 뭐가 되죠? 가난하게 되죠. 가난하게 되면 자기가 착한 티가 못나잖아요? 내가 부자 된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지켰기 때문에 복 받은 건데, 이 상여금, 이 보너스를 다 가져가 버리면 내가 착한지 안 착한지 확인할 길이 없잖아요. 길이 없네. 그럼 남들이 볼 때 내가 착하다고 보겠어요? 저주받았다고 보겠어요? 얼마나 못 됐으면 저주 받아 가난뱅이가 됐느냐, 그리고 난 뒤에 날 따라오너라. 했거든요.

그 말은 뭐냐, 네가 그렇게 당한다면 이미 내가 너를 구원하는 너에게 영생 주는 내가 이미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 정상인들로부터 내가 그런 수모를 당하면서 영생의 길을 가고 있다. 따라올래? 말래? 이렇게 나온 겁니다.

인간은 자리 잘남을 포기 할 존재가 아니에요. 절대로 어떤 경우라도 포기 못합니다. 간디 보세요. 뭐 무저항주의? 그게 자기 잘남이에요. 테레사 수녀도 마찬가지고, 목사가 설교를 잘한다? 그것도 자기 잘남이에요. 개척교회 100군데 했다. 그것도 자기 잘남이라니까요. 애를 얼마나 잘 키워놨으면 그렇게 시집도 잘 보내고 아들 낳고, 그것도 잘남이에요. 아휴, 나는 얼마나 못났는지 세상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셨네. 세상에 이런, 어떻게 한 달 수입이 2천만 원이 뭐야.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어. 이런 사람 봤습니까? 기도를 했더니만 내가 구제를 많이 했더니만 내가 이렇게 교회 봉사를 했더니만 헌금, 십일조를 했더니만 세상에 이런 보너스를 주시네. 믿으세요. 어린아이같이 순수하게 믿으시면 나중에 욥처럼 곱빼기로 받습니다. 그 사람 데려와서 모든 걸 팔고 따라오라 해보세요. 안 가죠. 그게 자기를 의롭게 하는 유일한 증거물인데, 그걸 놓쳐 버리면 자기는 죄 진 사람 똑같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는 악이 뭔지 몰랐고 악이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가 선이라고 우겼던 겁니다. 악도 모르면서 선을 우겼다는 말은 자체적으로 선과 악을 자기 맘대로 정했다는 뜻 이예요.

사람이 자기가 죄인인 걸 언제 느끼는지 알아요? 그것은 자기 일이 안 될 때 느낍니다. 그렇다면 사도 베드로가 어떻습니까? 베드로는 하는 일이 어떻게 됐어요? 자기 원대로 돼요? 원대로 안 되죠. 그러면 베드로는 저주 받았네. 자기 뜻대로 안 되고 내가 원치 않는 길로 가는데 이게 저주 받았습니까?

지금 네 번째 예를 드는데 다시 들어봅시다. 롯데 월드에 있는 사장님이 전라도에 있는 애한테 ‘너 롯데 월드에 넣어줄게.’라고 한다면 그만한 권한이 네가 들어가는데 아무지장 없도록 했다는 거잖아요. 그 말은 뭐냐 하면 ‘그러면 사장님 무슨 옷 입고 가야 돼요?’ 네가 발가벗고 가도 괜찮아요. 그럼 뽕 넣는 옷 입고 갈까요? 뽕을 넣든 말든 어깨에 뭘 넣든 간에 아무 상관없어요. 한복 저고리 입어도 괜찮아요.

십계명을 왜 줬느냐 하면 바로 간음해도 괜찮아요. 거짓말해도 괜찮아요. 도둑질해도 괜찮아요. 부모공경 안 해도 괜찮아요. 안식일 어겨도 괜찮아요. 왜, 어차피 우리는 세리 창기니까. 이거 이야기하려고 율법 준 겁니다. 여러분 이해 되시죠? 안 된다 하면 믿음 없다 하니까.

우리교회 주일학교 애가 있는데 제가 기생 라합에 대해서 설교 했었어요. 제가 충분히 사전에 양쪽의 이야기했어요. 다 해서 기생 라합은 이렇게 거짓말까지 하면서도 바로 우리가 사는 마을 말고 우리를 쳐들어 온 마을이 하늘나라라는 것을 믿었어요. 그래서 기생 라합은 거짓말해서 그들을 살려줘서 구원을 받았어요. 이렇게 설명을 제가 했는데 우리 이 신진 집사님이 장난 끼 있거든요. 내가 설교 끝나고 난 뒤에 애들이 아는가, 요약하면서 좀 과격한 이야기를 자주 했어요. 보세요. 여러분 라합은 거짓말해서 구원받았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짧게 해버렸어요. 장난 끼가 있는 분이예요. 이 신진 집사님이 어느 정도 장난 끼 있느냐 하면 요 근래 우리교회 교인들이 많이 오죠? 이 신진 집사님이 이야기하기를 이건 분명히 이 근호 목사님이 복음을 안 전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복음을 전했으면 이렇게 올 리가 없다. 그렇게 이야기하시는 분이예요. 얼마나 제가 기쁜지.

그 이야기 듣고 애가 자기 엄마한테 이야기했어요. ‘엄마, 엄마, 엄마는 나보고 거짓말하면 나빠, 떼치, 떼치, 나쁘다 했잖아. 그런데 우리 교회 목사님이 이야기하기를 거짓말해야(말도 바꿨어요) 구원받는대. 천국 간대.’ 그 이야기 듣고 엄마가 놀래 버렸어요. 수습이 안 돼. 감당이 안 돼요. 아휴, 나보고 책임지래요. 거짓말해서 간다 한 게 다행이지 만약에 자기 아들 죽여서 간다 했으면 아브라함처럼 자기 아들 죽여서 믿음의 조상 된다 이야기하면 어떻게 될 뻔했어요? 아들 다 죽이겠어. 앞으로. 자기 성도.

거짓말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기생 라합은. 왜냐 하면 새로운 상황이 들이닥쳤기 때문에. 구원이라는 것은 기존의 내가 쪼물닥, 쪼물닥 노력하고 착한 일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뭔가 내가 예상 못한 다른 쪽에서 완전히 질이 달라요. 엿가락 당긴다고 영생이 아니고 완전히 엿이 아니고 소시지처럼 다른 질이 다른 종류의 사태가 와버리면 졸지에 우리는 뭐가 돼요? 세리가 되고 창기가 되고 강도가 되고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죄인의 친구죠. 누굽니까? 예수님께서 오신 거예요. 그렇게 되면 누가 악이 돼요? 정상인들이 악이 되는데 이유가 뭐냐, 우리의 우두머리인 예수님을 이 정상인들이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미친 자라고 했지만 성경에 나온 대로 하면 악마의 앞잡이, 귀신의 앞잡이, 귀신이 우두머리가 누구다? 예수님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라다닌다 하면 따라다니든지 네 맘대로 하라.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바로 거룩한, 거룩한 너무나 거룩한 생활을 지금도 쉬지 않고 하는 거예요.

심지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고난 주간만 되면 재 있잖아요? 재를 뒤집어 써요. 뒤집어쓰면 자기 모습이 아주 흉측하겠죠. 완전히 화장터에서 막 기어 나온 것처럼 얼굴이 시커메서 그 다음에 꿇어앉아서 울면서 ‘바로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가 부족합니다. 내가 부족합니다.’라고 하면 사람이 바로 거룩을 향하여 시범을 보이고 모범을 보이는 것을 낙으로 사는 사람 이예요. 바리새인들은 기도할 때도 그냥 기도하지 않아요. 시장터에 가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는 게 옳습니다. 기도의 시범을 보였고 금식할 때도 구제할 때도 다 남들한테 이렇게 해야 바로 우리가 여러분의 스승이고 여러분들을 그저 구원하려는 일념으로 이렇게 시범을 보입니다. 라고 했어요.

예수님은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아예 초를 쳐버립니다. 초를 쳐버려요. “너 바람 피웠나?” ’안 피웠습니다.‘ “마음속으로 바람 피워도 피운 거야. 네가 오른손으로 범죄 하면 어떻게 했어?” ’회개했습니다.‘ “회개하지 말고 오른손을 잘라버려.”

회개하는 게 쉬울까요? 오른손을 자르는 게 쉬울까요? 오른손이야 없으면 한 팔 쓰면 되는데 오른 눈은? 오른 눈이 범죄 하거든 뭘 빼라? 오른 눈을 빼라. 그러면 선장 되는데? 후크 선장. 해적 되는데. 예수님 말씀 이예요. 그 사람들이 뭐라 하겠어요? 뭐 저런 또라이가 다 있나?

그런데 후대 교회들은 그 예수님을 아주 정상인 중에도 아주 정상인으로 만들어 놨어요. 아주 훌륭하고. 예수님이 십자가 죽은 것은 생각 안 하고 우리도 주님 본받아서 이웃을 사랑하세. 이렇게 나온 거예요. 여러분 이웃 사랑하는 것은 누가 잘했어요? 바리새인들이 잘했어요. 이웃 사랑한다는 십계명을 지키는 모든 세칙까지 다 구비돼 있습니다. 요런 식으로 해서 세칙들을 지키면 된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속에 들어오는 게 더 더럽다 했어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할 때 ‘자살하면 구원해 줍니까? 그럼 ’바짝 마른 뼈 되면 구원해 줍니까?’라고 묻지 마세요. 가만히 있으세요. 가만있으면 요 바리새인 있잖아요. 요 행세를 평생 우리보고 하라네. 우리 이거 잘해요? 못해요? 잘~~해요. 이건 시키지도 않아도 너무 잘해.

혼자 있을 때는 인상 쓰다가도 남의 시선 느껴지면 참 잘해요. 너무너무 잘해요. 평소에 하는 모든 게 이거에요. 그저 한마디로 의리! 의리! 참 잘해요. 잘 하세요. 그게 주님 보시기에 바로 막사는 겁니다. 주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게 하셨습니다.

그럼 하게 하시는데 어떻게 하게 하십니까? 하게 하시는 방법을 주께서 쓰시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율법이고 사도의 권면과 훈계입니다. 쉽게 말해서 지시! “술 취하지 마라” 딱 성경 에베소 5장에 있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회식한다고 술집에 가다가 성경이 떠오른다 말이죠. “술 취하지 마라” 자 ⓵ 술집에서 나온다. ⓶ 술을 먹되 취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먹는다. ⓷ 술 취하되 두 번 다시 안 먹는다고 다짐한다. ⓸ 술 취하고 그 다음에 회개한다. 몇 번입니까? 너무 빨리 해서. 몇 번이겠어요? 다시
⓵ 술 안 먹고 집에 들어온다. ⓶ 술을 먹되 취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맨 정신 있는 순간으로 마신다. ⓷ 술 취하고 앞으로는 안하겠다고 다짐한다. ⓸ 술 취하고 술 먹은 것에 대해 반성한다. 몇 번입니까? 몇 번 하든지 그건 입맛대로 하세요. 뭘 해도 다 뭐가 된다? 그 말씀을 지킨 게 아니에요. 뭘 해도 지킨 게 아니에요.

주께서 술 취하게 하시면 술 취하세요. 아유, 위험한 발언이다. 정말. 정말 위험한 발언 이예요. 왜 술 실컷 먹어놓고 주께서 시켰다고 변명하기 때문에. 이건 이 근호 목사님이 그렇게 하라 했다 하는데. 제 지시도 자기 의를 증거 하는 도움 된다면 그렇게 하기를 원합니다마는 사람은 반드시 뭘 해도 끝에 남아있는 게 있어요. ‘그래도 나는 귀여워. 뭘 해도 나는 최선을 다했잖아.’라는 자기변명과 자기 긍정은 어떤 행동을 해도 뒤에 다 남게 돼 있습니다. 역시 남 봐라. 회개 안하지만 나는 회개했거든요. 남 봐, 남이 석 잔 마실 때 나는 딱 두 잔 마시고 ‘예수 믿습니다.’ 하고 나왔잖아. 부장 너 잘렸어. 해도 난 그 개업 장 나왔어. 봐, 얼마나 훌륭해.‘

마지막에 뭐가 나온다고? ‘훌륭해. 나 훌륭했어.‘ 아, 그때 소주 두 병 들어가는데 야, 맛있던데. 아, 내가 신자기 때문에 4병이나 마셨다가 3병을 끊었다가 요거 3번이죠. 술 취했는데 4병까지는 안 간다. 3차 안 갔다는 거예요. 그러면 3차 가면 어떻겠는가. 4차는 안 갔다는 거예요. 술 집 여자는 안 불렀다 이 말 이예요. 항상 인간은 끝에는 뭐가 있습니까? 뒤 끝 있죠. ’주여 그래도 저는 그렇게 막 나가지는 않았습니다.‘라는 게 남아 있잖아요.

그게 바로 주께서 원했던 그게 악 이예요. 자기 의. 따라서 우리는 평생 자기 의가 지워진다? 안 지워진다? 절대로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변명하지 마세요. 그럼 어떻게 되는가? 이런 죄를, 자기 의를 놓치지 않는 죄를 알려주시는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강도와 세리와 창기가 자기 직업을 바꿨겠어요? 안 바꾸겠어요? 안 바꿨습니다. 세리가 세금 하는 사람이잖아요? 세법 바뀌면 바뀐 대로 또 사무실 운영합니다. 안 바뀌었어요. 안 바꿔도 그 사람한테는 뭐가 이루어졌습니까?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른 거예요.

여기서 한번 중간에 결론 내리면 이렇습니다. 악 속에 누가 함께 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됐어요. 주님은 예수님보고 우리는 구원하지 예수님 때문에 개과천선한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보고 달라진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 때문에 구원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할까요? 십자가 피의 능력으로 구원받지 십자가 피 믿고 달라진 능력 우리보고 구원하지는 않습니다. 이게 워치만리하고 차이점 이예요. 복음하고.

복음은 뭡니까? 십자가만 구원받는 게 복음이고, 워치만 리는 십자가 알고 인간이 육에서 영으로, 혼에서 영으로, 달라진 것 이것을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이건 복음이 아니죠. 예수 믿고 달라진 나를 감상하는 것은 자기 매력에, 자기 사랑에 빠진 거예요. 이건 나르시즘입니다. 나르시즘이라는 거 아시죠? 신화에 보면 나오잖아요. 물 먹으러 왔다가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이 너무 이뻐, 이 중에도 여러 명 후보감이 있습니다만. 자기 얼굴이 너무 이뻐. 그래서 그 얼굴을 잡기 위해서 뛰어들다가 빠져 죽잖아요. 이 태백이처럼. 물에 비친 술 잔을 가져오라 하니, 얼마나 술에 찌들었으면 그 짓하겠어요?

사람이 기도를 이렇게 여러분도 기도해봤겠지만 기도가 5분, 10분 지나가게 되면 어디 빠지느냐 하면 ‘지금 내 기도도 벌써 10분이나 지났었나. 기도 너무 잘하는 것 같아‘. 자기 기도에 빠져요. ’이 참에 기록을 세워봐? 밤샘을 한번 해봐? 애 수능도 앞두고 있는데 엄마가 이정도 기도해야 효험이 있지.‘ 이래서 해본다 말이죠.

기도를 안 해봐서 못하는데요. 자꾸 해보세요. 기도 자꾸 하면 기도가 맛있어. 기도가 즐거워요. 멈추지 않고 줄줄 나온다는 게 이게 마치 공부가 제일 쉬운 사람과 똑같은 거예요. ‘기도가 제일 쉬웠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 와서 목사님보고 ‘우리 기도회 해요.’ 이렇게 나와요. 왜, 자기 솜씨를 발휘할 수 있는 자기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이벤트를 만들어 달라. 참 크리스마스 되면 가족찬양 하는데 평소에 노래 단련한 사람은 그날을 기다립니다. 평소에 바이올린 한 애들은 크리스마스 때 발표하려고 바이올린 광 반짝반짝 냅니다.

사람은 자기를 버릴 수 없어요. 자기를 잊을 수도 없고 자기를 미워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를 사랑하세요. 사랑하시는데 누가 동행한다? 주님이 동행하게 되면 주님을 생각하는 순간 성령에 의해서 잠시 주님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고 순간만큼은 자기 자신은 신경 안 쓰게 돼요. 뭐 그게 몇 초 가지도 않지만. 자기 자신은 신경 안 써요. ‘내가 뾰루지 났나?’ 이것도 신경 안 써요. 뾰루지 나도 구원받으니까. 그게 감사하니까. 그게 좋아요. 그런데 이게 오래 안 가요. 오래 안 가도 ‘아휴, 씨, 뾰루지는 왜 났어? 기도 했는데 왜 또 나지? 기도해서 더 나는 것 같아.’ 또 자기로 돌아오게 돼 있어요.

하지만 항상 주님께서 동행하는 사람 같으면 예수님께서 주님 증인 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십니다. 어떻게? 나는 나만 사랑한다는 식으로 주님을 증거 하게 하시는 겁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식으로 증거 되는 게 아니고 ‘나는 나만 최고고 나만 사랑하고 나만 이쁘고 나는 나밖에 없어.’라는 식으로 증거 하게 돼 있어요. 왜 그게 바로, 이게 바로, 이런 인간도 이런 죄인도 이런 세리와 창기가 이런 강도도 탕자도 구원해주시니까. 이런 불의한 청지기도 나를 구원했으니까. 사고 나지도 않았으면서 병원에 입원해서 보험금 타먹는 그런 불의한 청지기,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거 아닙니다. 뒤 목이 뻐근한가? 그럼 요건 50만 원 짜린가? 우리는 항상 뭐든지 돈으로 그 가치를 마지막 최종 확정 짓는 요런 불의한 청지기,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세상 사람보다 더 어떡한다? 더 천국 간다는 예수님이 하십니다.

왜냐, 우리의 끝을 알기 때문에, 인간의 마지막 끝은 자기 자랑밖에 안 나온다는 걸 미리 아시고 이미 미리 아셨기에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네가 어떤 경로를 밟아서 구원이 되느냐를 우리한테 경험케 하시는 그런 즐거움을 주시는 거예요. ‘네가 요렇게 못됐으니까 네 대신 너보다 내가 아버지를 만났다. 네가 못 만난 아버지를 내가 만나서 해결하려고 왔잖아. 요렇게 너는 너만 챙기니까 내가 네 대신 내가 아버지 만나서 네 영생 문제에 대해서 이미 이야기가 끝냈다.’고 하는 거죠.

그 끝냈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뭐냐 하면 성령의 보증이라 합니다. 보증, 이걸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도장이라 해요. 이마에 도장 한번 맞아볼래요? 차라리 이마에 도장 좀 칠했으면 좋겠어요. 아예 문신을 했으면 좋겠어요. 눈썹만 하지 말고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찍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육체는 안 됩니다. 왜 늙으면 다 흙이 되기 때문에 무용지물이죠. 성령으로써 우리를 도장을 찍어놓게 되면 우리가 아무리 해도 주님을 우리 힘으로, 내가 주일 날 설교한 것처럼 밧줄을 끊으려야 끊을 수가 없어요. 주님의 그 사랑을 끊을 수가 없는 것을 다시 느끼죠. 느끼면서 소급해서 모든 것이 그동안 내가 내 자랑하고 돈만 사랑한 모든 것이 도리어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죄 지으며 살아가는 그 자체가 감사할 때 도대체 우리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죄 지은 거 자체가 감사가 된다면 감사 안 될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러니까 성경에 성령 안에서 범사에 뭐하라? “감사하라” 잘나서? 아니요. 못나서 감사하는 거예요.

그 다음 봅시다. 하, 그 다음 이거 참 어렵다 어려워. 뭐냐 하면 여기 28절 봅시다. 이거 누가 한번 읽어봐야 돼요. 이거 중요하기 때문에.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음성을 들을 때가 오죠. 예수님 본인은 어떻게 알죠? 이걸 어떻게 장담합니까?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이 말을 하려면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해요? 이미 다 경험을 해놓고 이 말을 해야 이 말이 정당화 되잖아요? ‘요거 불 켰다 끌 수 있어.’ 그렇죠? 이건 우리가 해 봤거든. 해보니까 된다 말이죠.

예수님이 이미 경험을 모든 인간이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것을 경험을 한 이후에 이 말을 해야 이 말이 신빙성이 있는데 주님은 어떻게 해서 이 말을 하는 겁니까? 주님은 다 경험했어요. 다 경험했단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뭔 뜻인 거예요? 내가 경험한 분량만큼만 믿겠다가 아니라 이거는 믿어보려고 애를 쓰는 거고요. 이건 성령 안 받은 것이고, 성령을 받게 되게 되면 미처 경험하지 않고 체험하지 않더라도 그런 것이 다 믿어진다는 거예요. ‘따져봅시다.’가 아니라 ‘이순신 장군 만나 볼 거야.’ ‘왜?’ ‘예수님 음성 들리는가. 내가 강감찬 한번 만나 볼 거야.’ 그렇게 세밀하게 따지지 마시고 예수님이 그렇다 하면 그런 거예요. ‘너는 어떻게 그런 것이 믿어져?’ ‘따지지 마. 이건 내가 어떻게 해서 믿어진 게 아니고 성경 많이 봐서, 기도해서 그런 게 아니고 성령이, 주님의 영이 왔기 때문에, 주님의 영 도장이 여기에 있기 때문에, 속에 들어있는 그 무엇으로 인하여 이게 다 믿어지는 거예요.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아내는 교회 가는데 남편은 절에 간다. 그리고 아내를 막 핍박한다. ‘너 교회 가면 나 다시는 너하고 안 산다.’ 막 이혼 협박한다. 그러면 그 남편은 어떻게 될까요? 영원히 주님과 헤어집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 남편 죽었을 때. 누구의 음성을 듣죠? 자기 마누라가 믿던 예수님 음성을 듣게 되는 겁니다. 뭐라고 합니까? ‘너 그때 아내 핍박한다고 애 먹었지? 내가 다 보고 있었다.’ 이렇게 들리겠죠. ‘네가 할 일은 핍박하는 일을 했어야 돼.“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죠. 이것을 성령 받은 사람이 미리 안다면 이 땅에서 이 세상에서 안 믿는 사람들이 있을 때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봐야합니까? 경상도 말로 ’욕 본다. 참 욕 봅니다.‘ 이러면 돼요. ’핍박한다고 욕 많이 보십니다.‘

그렇게 핍박한다고 해서 주의 사랑이 끊어질 사랑이 아니잖아요? ‘너 교회 가지 마.’ 안 가면 되는 거예요. ‘예수님 사진 밟아라.’ 밟으면 되는 거예요. 예수님 사진 밟는다고 지옥 가는 게 아니거든요.

이쯤에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내가 행동을 어떻게 한다고 해서 구원 받고 안 받고가 아니라 누구 때문에 구원 받는다고요? 예수님 때문에 구원 받는 거 잊지 마세요. 워치만리 아닙니다. 우리가 변화돼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우리는 변화 안 돼요. 우리는 그냥 우리 육으로 그냥 가는 거예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그것을 우리가 용납이 되는 거예요. 이게 믿어지는 거예요. 이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은 선물 이예요. 그래서 제가 믿지 말라는 거예요. 믿지 말라는 이유가 성령이 와 계시기 때문에 믿을 필요가 없다 말이죠. 믿을 필요가 없어요.

예를 들어서 만약에 누가 택배를 신청했는데 그런 경우가 있거든요. ‘주여 택배가 중요합니다. 주여 믿습니다. 믿습니다. 택배가 우리 집으로 올 것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고 집에 가서 ‘택배 올 것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니까 ‘여보, 당신 뭘 그렇게 중얼중얼 해?’ ‘택배가 올 줄 믿습니다.’ 하니까 ‘벌써 왔는데? 벌써 왔는데? 이미 성령이 왔는데?’ 왜 자꾸 걱정합니까? ‘믿어야 돼, 믿어야 돼, 침해 걸리면 안 믿으면 어떻게 되지?’ 침해 안 걸려야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침해와 상관없이 주님에 의해서 구원받는 거예요. 이쯤 와서 안 믿는 표정하고 있으니까 내가 더 당황스럽다. 이게 이해 안 됩니까? 자꾸 자기 관리를 왜 해요? 주님의 것인데. 주님이 손 떼라고 네 대신 내가 아버지 만났다고 우리를 가져갔는데 왜 자꾸 도로 나를 내 것으로 가져옵니까?

우리는 주님의 것을 가지고 내 속에 어떤 죄들이 나왔기에 주께서 십자가 피 흘렸는가? 그걸 보여주는 요량으로 인생을 사시면 되는 거예요. 성경에 보면 “돈을 사랑하면 일만 악의 뿌리다.” 하잖아요. 그때부터 뭘 해야 됩니까? ‘돈 사랑이 뭐지?’ 한번 경험해 보세요. ‘돈 사랑이 뭐지? 아! 이게 바로 죄구나.‘하는 것을 추체험이라 하는데 철학에서, 야, 단어 참 어렵다. 추체험, 체험인데 소급해서 체험하는 것. 추가로 소급해서 체험하는 것. 소급해서 다시 느껴지는 거예요. 소급해서. 그걸 바둑에서는 복기라 해요. 혹시 바둑 둘 줄 아십니까? 이미 판은 끝났는데 끝나고 난 뒤에 다시 흩어버리고 다시 ’우리 어떻게 뒀더라.‘ 다시 복기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어떻게 살아왔고 제자들은 거기 대해서 예수님한테 어떻게 신앙도 아니면서 신앙인 척 했는가를 복기하는 그 인생의 모습이 제자들과 동행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오늘 우리와 동행하는 예수님 모습과 반복되면서 매일같이 반복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자들은 실컷 주께 원망해놓고 그들은 말하기를 십자가복음 외쳤듯이 오늘도 마찬가지로 실컷 제자들 삶을 살면서 ‘십자가 복음의 능력으로 우리가 구원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죽은 거 외에는 너희가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라고 사도 바울이 단언을 한 겁니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죽어 있고 어차피 모든 인간은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는 미리 듣는 거예요. 어떤 일? “마지막 때 모든 인간은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라는 소리를 우리는 믿음으로 미리 들었습니다. 들을 때 주님께서 ”나를 공경하는 자는 아들을 공경하는 자는“ 23절 봅시다.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내 말을 듣고 내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앞에 붙여주세요. “이미 옮겼느니라” 다른 말로 하면 “너는 내 안에 있느니라” 이 예수 안에 있느니라. 너 홀로 있는 게 아니니라. 홀로 있지 않다는 경우가 어떤 경우입니까? 네가 하는 모든 것을 성경에 비춰서 죄로 느껴지거든 너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되는 겁니다.

우리가 개과천선하면 되는 거 없어요. 항상 우리는 개과천선이나 뭘 해봐야, 나쁜 짓해도 자기변명, 착한 일했으면 또 티냈다고 난리, ‘오늘 착한 일했으니까 우리 한 달 동안 하늘에서 복이 떨어지길 원합니다.’ 이렇게 기대하게 되잖아요. 평소에 우리가 사람 대 사람으로 살던 그 습성과 버릇이 있어서 그래요. 아내냐 남편 생일 앞두고 갑자기 잘해주죠. 기념일 가까우면, 배우자 생일 날 잔소리하는 배우자는 별로 없습니다. 그날 안 하고 그 다음 날 생일 끝나고 난 뒤에 몰아서 벼르게 되죠. 그처럼 재수 옴 붙는 것을 우리가 알아서 착하게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가 평소의 습성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을 힘들게 했고 예수님을 죽게 만드는 이유가 되는 거예요. 하지만 이 습성은 죽을 때까지 계속 가져가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예수님만 높일 수 있기 때문에, 잘난 나를 높이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만 높일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8절 다시 봅시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라고 했는데 요거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요거 설명이 뭐냐 하면 이렇게 하면 됩니다. 크게 쓸게요. 누가 읽어보세요. 구조. 구조죠. 성경에서는 인간의 주체는 구조에서 만들어져요. 주체가 내가 만드는 게 아니고 덮어진 구조에서 만들어져요.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라는 그 짜여진 그 구조 속에서 하나는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또 하나는 사망 그대로 이렇게 분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조를 믿는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자기한테 좀 냉정하란 뜻 이예요. 제가. 자신의 느낌, 감정, 낭만, 거기에 너무 도취되지 마세요. 구조는, 시스템은 아주 냉정해요. 좀 은혜 받았다고 울고 웃고 좋아하고 또 죄졌다고 낙담하고 너무 자기감정에 휘둘리지 마시라 이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구조를 잊어버리고 자기 주체를 자기가 어떻게 감당하려고 애를 쓰다 보면 결국은 남는 것은 또 자기의, ‘하나님 해보려고 했는데 최선을 다했는데 아이쿠, 회식 가서 소주 2병 마시려다 3병 먹었습니다. 그래도 3병 먹고 4병 안 먹었으니까 잘 했죠?’ 또 이렇게 된다니까요. 이거는 사적인 것이고, 사소한 문제거든요.

구조는 든든합니다.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우리는 믿어졌잖아요. 성도는 미리 듣고 불신자는 나중에 듣고. 특혜를 미리 앞당겨 받은 거예요. 따라서 항상 주님이 우리한테 준 걸, 짜여진 구조를 생각해야 되지, 자기감정에 얽매이면 안 됩니다. 거기에 너무 휘말리면 안 됩니다. 마귀에 시험 들어요.

우리 집 앞에 건물 짓는데 후딱 져요. 며칠 안 됐는데 벌써 집 모습 있어요. 자, 새 집을 졌잖아요. 새 집을 져놓고 가면서 매일 같이 기둥 노크 해보고 문 흔들어봅니까? 보통 건축 구조물은 우리의 인식이 뭡니까? 우리보다 튼튼하고 단단하죠.

주님의 언약은 그 이상입니다. 그 이상입니다. 우리가 좀 이렇게 실수했다. 실패했다. 거기에 흔들릴 구조가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주께서 삐져서 ‘흥 삐졌어.’ 이럴 주님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애초부터 십자가 자기 생명을 내놓지 않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내놨다 하는 것은 이미 우리 알고 다 준 거예요. 이미 끝을 알고 다 준 거니까 그 든든한 새 집에 있으면서 ‘아이, 문을 열리나 해보고 바닥은 어떻고’ 이렇게 자꾸 확인 사살하지 마시고요. 날마다 오늘도 무슨 은혜 주시려고 하느냐? 마음을 낮춰서 자기가 자기한테 놀아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그동안 우리가 마귀한테 속아서 자기가 우리의 착함에 나쁨에 놀아났습니다. 영혼도 다 빼앗기고 우리의 정신도 바짝 말랐습니다. 주여 많이 시달렸는데 이제는 제발 우리 자신을 놔줘서 주께서 세리와 창기를 하늘나라 보내주시는 낯선 나라인 것을, 우리가 예상 못한 그 천국인 것을, 용서한 사람만 아는 나라인 것을, 그것이 영생인 것을, 저희들이 마음속에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