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미국뉴욕교회예배 본문
녹취:한윤범
20141005 미국뉴욕교회예배
(강의:이근호 목사)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천지를 만들기 전에는 천지가 없었습니다. 제 말 맞지요.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 말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계셔서 하늘과 땅, 다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느 위치에서 믿어야 하나님을 아는 것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만 계시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처음이나 생각이 일치될 때 제대로 하나님 아는 겁니다. 이 짧은 논리에 오묘한 것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맞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는 하나님의 창조를 안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창조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갖고 있던 뜻을 안다고 할 때 우리는 제대로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셨는데 만들어진 중에 우리가 포함돼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을 저는 압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는 그것 미흡합니다. 그것 전부 아닙니다. 이미 만들어진 상태에서는 만들어졌다는 그것 때문에 없음이란 생각이 스며들 자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만들어졌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있습니다부터 믿습니다까지. “주님, 제가 있네요. 하나님이 절 만들었지요? 저는 하나님 믿습니다.” 이것과 아예 하나님이 없을 때에 인간을 만들 때 그 심정과 결코 일치되지 않습니다.
제가 하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거예요. 그 인간을 방해하는 것이 뭐냐 하면, 어쨌든 간에 나, 여기 있잖아. 이것이 하나님 믿는데 방해됩니다. 이것 간단한 논리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만들어진 하나님 믿고, 나도 너도 그도 다른 분들도 다 그렇게 안다고 하니까 같이 대충 믿는 걸로 서로서로 의견 통일 되어서 믿는 걸로 쳐주신 거예요.
그 일하신 분들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지금부터 짧게 몇 분 동안 유대인들의 생각을 제가 말씀드릴 테니까 성급하게 아멘하지 마세요. 미리 당부합니다. 이것 예수님 죽인 유대인 생각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우리는 누가 만들었지?(이 대목부터 듣는 사람들은 곤란하지 싶어). 창세기에 보니까 없는데서 하나님이 만들었어. 그럼 하나님이 만들었으니까 우리는 뭘 하면 되지? 그렇지. 지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셨어. 그러면 말씀을 줬다는 것은 우리가 지킬 수 있다는 뜻으로 줬기 때문에 그 말씀을 지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안 지키면 모르는 것이 된다. 동의 다 했어요.
그리고 계속 나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여기서 하나님 말씀은 지적과 율법 다 포함됩니다) 이렇습니다. 오후에 잠 오니까 복잡하게 하기 싫어요.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기적을 통해서 믿음 생기고 행함을 통해서 영광 돌리고. 많이 듣던 소리 아니에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을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대표적인 게 홍해 갈라진 것, 여리고성 무너진 것, 특히 당나귀 말하는 것, 그것 민수기에 있거든요.
뉴욕에서 말하는 당나귀 봤습니까? 못 봤지요. 뉴욕에는 당나귀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당나귀가 말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지킵니까, 못 지킵니까? 못 지키지요. 집에서 강아지나 당나귀 키워서 훈련해봐야 짖기나 하지 말하지 못 하거든요. 여러분, 강아지 키우는데 때리면 왜 때리느냐고 하던가요? 주인 기절해버립니다. 인간이야, 귀신이야. 놀라버립니다.
따라서 제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지키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유대인들은 이미 익히 알고 있다는 거예요. 자기가 하나님 알아야 하는데(이야기 복잡하게 하면 안 되는데 간단하게 가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야 통합해서 영원히 살 거잖아요. 그런데 아는데 한계가 있더란 말이죠. 지키는 건 하겠는데(십계명 지킨다든지) 지금 있는 강아지 훈련시켜서 말하라고 한다면 그건 안 된단 말이죠.
여러분들이 작은 지팡이 들고 홍해에 가보세요. 시험해 보세요. 바다야, 갈라져라. 열두 번 해도 안 되면 서른네 번 하든지, 안 그러면 이천오백오십오 번 해보든지. 갈라지겠어요? 갈라질 리가 없지요. 그래서 내린 결론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알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우리가 못하는 것은 믿음으로 넘겨버리자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멋진 아이디어죠(아멘 하면 곤란한데).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성경중심이에요.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그 다음에 말씀이지만 우선이고 유대인들은 말씀(토라)이 우선이고 자기는 뒤에요. 말씀 속에 있으니까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고 기적이 있더란 말이죠. 기적마저 지키면 되는데 기적은 우리가 못 일으키니까 어떻게 하느냐 하면, 기적 파트까지 모셔오는 방식 중에 하나가 믿자. 믿음으로 구원받고 그다음에 남는 것은 기적만 있는 것이 아니고 십계명을 던져줬으니까 감이 오더란 말이죠.
예를 들면 부모를 공경하라. 평소에 공경해왔잖아요. 뭐가 어렵습니까? 들을 귀까지 동원할 게 뭐가 있어요. 부모 공경하고 있는데. 그 다음에 살인하지 말라. 몇 명 죽였지요? 아니잖아요. 우리는 길에 개미죽여도 회개할 정도로 양심이 유순하고 나약한 사람인데 어쨌든 간에 우리가 사람을 죽이다니?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사람을 안 죽였으면 일단은 지킨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 알아서 된 겁니다. 지킬 것은 지키고 믿을 것은 믿어서 믿음 +지키면 온전한 하나님에 영광이 된다고 유대인들은 생각을 했습니다. 따라서 분명히 제가 이야기합니다. 유대인들은 말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자신만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유대인들이 그 다음부터 한 게 있어요. 십계명 줬습니다. 그런데 계시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잖아요. 이 계시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말씀은 지식이 아니고 실천이다. 바리새인들의 모토입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죠.
그러면 사두개인들의 주장은 뭐냐? 하나님의 성전 있으면 우리는 살았다. 성전 지키고 제사 하는 그 작업은 우리한테 맡겼다. 사두개인, 사독, 다시 말해서 다윗 시대에 제사장으로 낙인찍힌 대대로 죽으면 옷 벗고 인수하던 제사장계열이 사두개인, 사독계열입니다. 그래서 사독계열은 성전에서 제사만 드리면 우리는 이 성전에 있는 감람산에 메시아가 두 발 딛고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스가랴 에언 대로 거기에 감람산 나오고 메시아 두 발 딛고 내려옵니다.
그 다음 문제는 사두개인이 독점하고 난 뒤에 성전을 됐는데 말씀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말씀 전문가가 일체 어떤 일을 하지 않고 말씀연구와 실천 방법을 개발해내는 전문직이 등장했습니다. 누구냐? 바리새인입니다. 제가 그냥 무심코 던지는 조작된 말 아닙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
바리새인이 선두에 있거든요. 선두에 있는 바리새인마저 천국에 못 간다면 그 뒤따라오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천국 못 간다. 따라서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은 아무도 천국에 못 간다. 바리새인들이 하는 일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유대인이 나오니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바리새인이 하는 일은, 말씀을 어떻게 하면 실천에 옮기느냐 하는 일을 합니다.
또 한참 잠 올 때거든요. 에베소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말씀을 바리새인적으로 지켜봅시다. 알코올 혈중농도측정기를 들고 불어야 돼요. 술은 먹되 알딸딸하기 직전에 술잔 놔야 돼요. 그러면 그 말씀을 어긴 것이 아니죠. 또 하나 예를 들면, 분을 품되 해지도록 품지 말라고 했으니까 서산을 바라보면서 자기가 분을 품은 사람의 멱살을 쥐고 해지기를 카운트합니다. 5, 4, 3, 2, 1. 이렇게 하면 그 말씀을 지킨 것이 되겠지요. 바리새인이 그런 식입니다.
주님께서 한 방에 보냈습니다.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 끝. 당황하지 말고 한 방에 조지니까 끝. 끝났습니다. 끝난 게 아니고 여기까지 결론내립니다. 바리새인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겉은 종교적 법으로 해결했는데 문제는 속은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안 돼.” 이러면 될 텐데 바리새인들은 저 사마리아인들보다는 낫지 아니하느냐는 식으로 예수님의 일단의 제자들을 사상적으로 포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열두 제자도 사실은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사상에 포위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해결할 문제는 딱 한 가지에요. 겉은 그럴싸하게 됐는데 문제는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영광 돌린다는 그것이 이미 예수님한테 인정받지 못한다, 거절당했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최고 실력자인 바리새인만큼 되지 못하면 천국 못 간다고 하니까 결국 바리새인들이 아무것도 해결한 적이 없습니다. 천국 못 갑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겉은 그럴싸했는데 속을 해결할 수 없는 이 문제가 있는 겁니다. 겉이 번지르르했기 때문에 자기 속을 볼 마음이 없는 거예요.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고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여기 장로님 계십니까?(제가 그런 걸 묻는 타입이 아닌데) 예를 들어서 어떤 교회에, 예니까 이해하세요. 장로님이 오셨는데 헌신적으로 했는데 막 들어온 어떤 교인이 있었어요. 그런데 자기가 먼저 된 자로 나중 된 자를 한 수 가르친다고 했는데 주님 법칙이 뭐냐 하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거예요. 그러면 오래된 장로님보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자가 됐지요. 일단 나중 온 자가 먼저 됐지요. 그러면 자리가 바뀌었습니다. 나중 온 자가 먼저 된 자고 장로님은 나중 되니까 자리 또 바꾸어야 되죠. 머리 나쁜 사람은 이해 못하십니까?
고정된 먼저 된 자는 인간이 소유할 수 있도록 허락한 적이 없단 말입니다. 천국은 하나에 과정이니까.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핵심은 그거에요. 속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미 자기는 속까지는 걱정할 필요 없다고 그렇게 위장했기 때문에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거예요. 그렇게 자기가 상대적으로 저 사람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 대상이 있었는데 그들이 사마리아인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선한 사마리아인 나오죠. 문둥병에서 나은 열 명 중에 돌아온 사람도 사마리아 한 사람. 그래서 사마리아는 항상 전제가 유대인은 천국 가도 그들은 지옥 간다는 지옥 리스트에 해당되는 것이 사마리아인들이에요.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유대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현장에서 다 보냈어요. 달랑 남은 것은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만납니다. 속을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설 때
이것 하기 전에 설교 다시 합시다. 사람이 태어나고 난 뒤에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대로 하나님을 알려면 내가 얻기 전에 있는 상태에서 창조하셨던 그 마음을 알아야 제대로 다 아는데 이왕 있고 난 뒤에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항상 한계에 부딪칩니다.
<부모>란 노래가 있는데 어릴 때 철없이 부모를 원망했는데 자식이, “엄마 마음, 어때?” 엄마가 하는 말이, “너도 시집가서 아이 낳으면 안다.”는 거예요. 시집가서 아이 낳으면 엄마 마음 압니까? 턱도 없는 소리, 몰라요.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나지 모릅니다. 너무 말을 함부로들 해요. 아무도 몰라요. 나는 나의 확장으로 살지 나밖에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을 알아요? 모릅니다.
지금 제가 하는 설교의 목적이 정해졌습니다. 만들어진 입장에서 만들기 전의 입장을 어떻게 알아서 깔끔하게 만들기 전의 입장으로 돌아서서 아예 죄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될 수 있는 방법이 저는 있다는 겁니다. 그걸 지금 여러분한테 소개해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그 방법은 그냥 사세요. 어떤 종교적인 티, 바리새인, 사두개인, 말씀 실천, 그것 다 잊으시고 그냥 사세요.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에 물 길러 온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 온 게 아니고 자기식구들 목말라서 온 겁니다. 이것이 이미 태어난 입장에서는 도저히 죄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오줌 마려서 오줌 눈 게 죕니까? 태어난 입장에서 이미 내가 있는 입장에서는 절대로 죄 아닌 걸로 하는 거예요. 물 없을 때 물 달라하는 게 죕니까? 그게 죕니다. 오늘아침 2부예배한 사람은 알아요. 그게 죄에요. 원망을 낳기 때문에 죕니다. 양식 없어서 양식 달라는 게 죕니까? 그게 죕니다. 그게 왜 죄냐? 더 근원적으로 설명해 들어갑니다.
그게 왜 죄냐 하면, 일상적인 것 자체가 뭘 모르는 상태냐 하면, 내가 여기 있으니까 목말라서 물 길러 온다는 것은 내가 없을 때 사고방식으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그게 죄가 되는 겁니다. 젊은 분들 앞에 두고 어려운 말하려고 하니 참 괴롭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없을 때 생각을 내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게 막혀있는 거예요.
복잡하니까 깔끔하게 합시다. 진짜 우리가 속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하느냐? 내가 사라지면 되겠지요. 그럼 내가 사라진다는 것이 뭐냐? 우리의 일상이 나에요. 목마르다. 목마르니까 물 먹고 싶다. 이게 나에요.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은 비록 창조주를 모르는 죄인이지만 그냥 편하게 일상적으로 온 겁니다. 주님께서는 그 일상을 죄라고 규정하기 위해서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 되기 위해서 같은 레벨을 사용합니다. 물 좀 다오. 사마리아 여인이 하는 말이, 일상적이고 자기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창조 전은 모르고 창조 후의 이야기입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왜 사마리아인에게 물 달라 합니까?”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여기에 전혀 종교적인 냄새, 그런 색채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편한 일상입니다. 그냥 우리가 생활하는 그대로에요.
예수님이 하는 말이 1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가 물 돔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사마리아 여인이 너는 네 전부를 모른다. 네 일상생활에 뭔가 빠져있다. 결핍돼있다. 생수 주실 분이 따로 있다는 것을 너는 일상생활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 있다고 시작하는 거예요.
여러분, 일상생활하면서 결핍을 느낍니까? 잘못됐다고 느낍니까? 언제 잘못됐다고 느끼느냐 하면, 돌아가실 때 잘못된 걸 느낍니다. “주여, 아직 제가 죽을 때가 안 됐습니다.” 예상 못할 죽음이 왔을 때 비로소 우리는 어떤 결핍을 느낍니다. 뭔가 빠져있다는 거예요. 오늘 설교제목을 [사마리아 여인]이라 했지만 저는 바꾸고 싶어요. [뭔가 빠져있다]. 나만 빠진 줄 알았는데 저쪽도 빠졌어. 뭔가 빠졌는데 뭐가 빠졌는지 모르겠어요.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하는 말이 11절에 그는 뭐가 빠져있는지 모르지만 빠졌어요. “여자가가로되 주여 물 길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라고 했어요. 사마리아 여인은 일상생활에서 합니다. 당신이 물 달라했으니까 물주겠는데 생수 언급했으니까 이 근처에서 당신이 원하는 생수는 여기에 없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말하기를 생수를 언급했지만 생수는 나한테 결핍돼있습니다. 주님의 작전은 성공했습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이 생수라는 낯선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뭔가 결핍돼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느끼도록 조치를 해주신 겁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계속 이야기합니다. 12절에 보면,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하고 1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벌써 결핍 점점 더 또렷하게 돼있지요. “생수가 한 번 생수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나는 아는데 너는 모르는구나. 이래도 결핍 아니야? 이래도 너, 문제 있는 것 아니야?”
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 만나지 않았더라면 자기는 그저 거만한 보통 사람인데 예수님이 찾아와서 자기와 대화하는 가운데서 뭔가 나는 결핍된 존재라고 하는 거예요. 왜?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답변할 어떤 자료가 없기 때문에 생뚱맞은 이야기를 하거든요. “뭐지, 뭐야? 시비 거는 거야, 뭐야?”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결핍된 것이 정체를 밝힙니다.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결핍돼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잠간 멈추고 설교 다시 들어갑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이미 있습니다.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데 온전하지 못해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하나님이 어떤 선물을 갖고 왔는데 그 선물은 바로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갖고 왔다는 이야기를 하실 때 두 사람의 만남은 예수님은 전부를 아는 사람이고 그 맞은편에 서있는 여인은 일부만 아는 결핍된 존재로 부각되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대화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기도한 적 있습니까, 금식하고 통성 기도했어요? 그냥 물 길러왔어요. 물 길러온 것, 계시입니다. 우린 일상이지만 주님 앞에서 그것조차 계시입니다. 어떤 계시? 결핍 있음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계시입니다. 여러분, 요란스럽게 교회생활 할 것이 아니고 여러분 있는 자리에서 결핍된 자로 사시고 무엇인가 빠져있다는, 이 세상, 뉴욕 자체가 무엇인가 빠져있다는 도시에 결핍 있는 나도 같이 살고 있다는 것, 그러면서도 아무도 해답을 제사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찝찝한 가운데서 죽을 때까지 죽으시기 바랍니다. 뭐지? 뭐지? 뭐지? 돈을 벌어도 뭔가 만족하지 않고.
14절, “내가 주는 물은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것 설명합니다. 보통 인간 예수님, 보통 인간 사마리아 여인, 둘이 만나면서 대화가 처음에는 됐지요. 갑자기 예수님께서 우물이라는 물체를 집어넣습니다. 예수님과 인간 사이에 우물이 결핍됐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을 가지면 되겠는데 아닙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우물이 되게 하는 거예요. 사마리아 여인 자체가 주님이 사용하는 영원한 생수가 나오는 우물이 되는 순간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 내려두고 마을로 내려갑니다.
처음에 물동이 왜 들고 왔습니까? 어떤 남자 만나서 대화하려고 왔습니까? 아니죠. 물 길러왔는데 자신의 목적은 날아가 버리고 물동이 버려두고 메시아 만났다. 창조 이전의 분을 만나서 내가 달라진 것은, 나 따로 있고 예수님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예수님이 나오고 생수가 나오는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운 창조, 창조 이전의 내용까지 알고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달라졌다. 실제로 달라진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여자는 집에 가서 살림하고 밥 합니다. 메시아 만나는 순간 결핍이 날아가 버렸어요.
전에는 내가 주인공이라 결핍이 있었지만 그 결핍조차 몽땅 주님 쪽에서 접수해가니까 내가 생수를 얻어먹는 게 아니고 내 자체가 생수가 나오는 공장이 되고 말았어요. 결핍이 없어졌습니다. 그때는 로마서 14장,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7,8절) 우리는 다 동의하지요. 이게 바로 로마서 14장입니다. 동의하기는 동의한다 해놓고
주님의 창조 전의 상황까지 알려줘서 아는 순간 사마리아 여인 본인은 날아가 버렸어요. 이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 안에서 주님과 동일하게 창조 전의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피조물은 그 상황의 내용이 뭔지 궁금해요? 알려드리죠.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서만 만들어진 존재, 이게 바로 비밀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란 추상적 존재를 설정했지만 그래서는 겉만 번지르르했지 속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는데 이제 속에 해당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와서 사마리아 여인은 깔끔하게 주님에 의해서 해결되었습니다. 창조 이후는 아는데 이전은 몰랐던 사마리아 여인은 이제는 예수 안이라는 창조 이전의 창조주와 함께 드디어 살게 된 겁니다.
잠간만 기다려주세요. 그 다음 이야기가 남아있습니다. 구원받으면 됐지 왜 필요하냐? 예배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이제 시작이에요. 처음에 예배는 자기가 하나님 백성인 것처럼 행세할 수 있는 어떤 외형적인 방법을 찾아서 그 방법을 반복적으로 실시하는 것을 예배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어요. 대표적으로 바리새인이죠. 백날 해봐야 천국 못 가는 바리새인.
그들은 말하기를 그리심 산은 안 되고 예루살렘은 된다는 겁니다. 여기에 20절에 보면,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 말을 하는 전제가 뭐냐 하면, 장소 있고 형식 시스템 갖추면 예배된다고 믿었던 겁니다. 그것으로 자기 속도 달라지고 결핍이 매워집니까? 안 되지요. 하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그것밖에 모르는 거예요. 일단은 사마리아 여인을 영원한 생수가 나오는 만드는 작업에 들어갑니다.
그 만드는 작업이 뭐냐 하면, 네가 나를 알기 전에 내가 너를 먼저 안다는 멘트가 날아갑니다. 여인이 목마르지 않는 물을 달라고 할 때 “목마르지 않는 물은 여기 있잖아.”답변하는 것이 아니고 목마르지 않는 우물이 되기 위해서는 숨겨진 면이 노출돼야 돼요. 죄 속에서 구원이 됩니다. 죄가 죄를 구원한다는 어려운 말이 있는데 하여튼 죄 속에서 비로소 그동안 나타나지 않은 의가 나옵니다.
따라서 죄라는 바탕이 마련돼야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네 남편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멘트가 뭔가 바뀌었지요?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물 달라는 물체로부터 이제는 인격의 문제로 바뀌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우물 있다가 우물을 빼버리니까 사람이 등장합니다. 우물을 만드는 첫 작업을 개시한 겁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 하니까 여자는 흠칫하면서 감춥니다. 들키지 싫어서 “남편은 없습니다.” 그때 예수님 말씀은 정말 놀라운 말씀이에요.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은 옳도다.” 지금 속의 문제에요. 속을 해결해야 돼요. 네 속에 있는 것도 문제지만 속에 있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2차적 작업하는 그 속도 있음을 깨끗하게 고백한 것은 제대로 한 것이다. 네가 그렇게 나와 줘야 그 죄마저 내가 해결해주기 때문에 그렇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하는 말이,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얼마나 미인이었으면 다섯 명까지, 정말 부럽습니다. 한 남편으로 평생 산다는 것이 얼마나 지루하고 고생인 것을. 그래서 어떤 여자는 남편 얼굴만 보면 토한다는 겁니다. 빨리 바꿔치기하든지 해야지.
“네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는 거짓말했는데 옳다고 해놓고 사실은 옳은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옳다고 맞추는 친절한 예수님, 거짓말하는 것을 진짜로 바꾸는 이 작업이 우리 힘으로 속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모든 것이 옳다, 옳다, 옳다의 연속으로 바꿔주는 그것이 생수가 되는 무슨 짓을 해도 의가 되는 죄인이 의인이 되는 그것을 사마리아 여인을 상대로 작업을 시작한 겁니다.
문제는 예배입니다. 예배가 효과 있으려면 그 예배 하나 잘 드려서 예배에 참여한 자가 의인이 되는 그 예배를 에스겔에서 예언을 했습니다. 그 순서가 에스겔에서는 다윗의 자손이 오게 되면(요한복음 4장에서는 메시아 오게 되면) 그분이 성신을 보내주고(신약에서는 성령) 성신에 의해서만 참된 예배가 될 날이 온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 예배가 되려면 먼저 메시아부터 와야 되는 거지요.
예수님이 하십니다. 내가 오리라 한 그다. 여자가 한 답변은 간단했습니다.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 끝. 물동이 버려두고. 아마 그때 집에 가면 혼났을 거예요. “목말라 죽겠는 물동이 어디 있노?”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물동이 어디 있어?” 분명히 이런 핀잔을 받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 여자가 핀잔을 받든 남편 다섯이라고 공격을 받든 그것은 그 자체도 생수가 나오는 재료가 되도록 주께서 우리를 죄인으로 몰아넣었던 사실을 메시아의 일방적 작용으로 남편 다섯 있는 여자가 바로 하나님의 예배처소가 되는 겁니다. 움직이는 예배처소. 고정된 것은 날아가 버렸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예배처소는 없습니다. 움직이는 예배처소, 하나님의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냥 무심코 살았습니다. 결핍되는 줄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할 때 왜 돌아가셨는지 왜 오셨는지 몰랐습니다. 주여, 일상의 지루함을 깨닫게 해주시고 뭔가 결핍을 깨닫게 하셔서 이 속에 숨겨있는 더러운 해결책을 위하여 주께서 일찍 오셨다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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