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미국이상현목사집회 a, b 본문
녹취:한윤범
20141003 미국이상현목사집회a
(강의:이근호 목사)
아무도 아무나 들여다보지 않는 그 천국 어떤 기준에 의해서 어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누구는 갈 수 있고 못 가는지 예수님이 친히 가르쳐주신 천국에 대한 비유를 통해서 저희들이 깨닫는 시간되게 하옵소서. 시작부터 끝까지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25장에 두 개의 비유부터 먼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한 가지 비유는 흔히 말하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와 지혜로운 다섯 처녀의 비유. 신랑 하나 놓고 열 명의 여자가 결혼한다? 참 신기하죠. 물론 능력 있는 남자 같으면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능력 없는 남자한테는 부담이 되겠죠.
한 명의 신랑과 열 명의 처녀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하시면서 무엇을 언급하느냐 하면, 25장 1절에 보면, “그때에 천국은”이라고 이야기했잖아요. 천국이란 이 세상 아닌 것입니다. 쉽게 합니다. 천국이란 이 세상 아닌 곳.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원리원칙과 삶의 원칙도 역시 통하지 않는 곳이 되는 겁니다. 제가 이걸 미리 언급하는 것은 천국에 간다고 하면서 분명히 천국은 이 세상 아닌 곳인데 이 세상 원리를 고집하면서 “천국에 넣어주세요.” 하는 것에 대한 저는 거절의 의미를 언급하는 겁니다.
그럼 제가 이렇게 하면, 이 세상 살다가 천국에 들어가도 무방하지 않겠느냐는 고집이 있을 수 있어요. “하나님이여, 저는 이 세상에서 이런 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눈감아주시고 그냥 넣어주세요. 가서 잘하겠습니다.” 이럴 수도 있단 말이죠. 저라도 그러고 싶은데 그러질 못해요. 왜냐하면 천국은 이 세상과 그냥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 같으면 그냥 가도 되는데 이 세상이 누굴 박대하고 천대했느냐 하면, 이 땅에서 천국의 주인 되신 예수님이 오셔서 이 세상에서 어떤 식으로 추방당했느냐 하면, 미움 받아서 추방당하셨거든요.
“천국에서 오셨습니까? 잘해봅시다.” 이렇게 헤어진 게 아니고, “뭐지? 뭐야? 왜 낯설지? 우리한테 필요 없어. 당신, 꺼져! 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천국입니다. 원리가 서로 통하면 좋겠는데 이미 이 세상의 원리를 고수하다보니까 섞을 수 없어서 튕겨 나오신 분이 예수님이고 그분이 세우신 나라가 천국이라면 우리가 사는 원리가 그대로 통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베드로전서 2장에서는, 천국은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의 돌이 모퉁이 돌이 되는 겁니다. 하나, 하나 쌓이는 거룩한 성전이 공통점이 있다면 튕겨서 나온 사람들의 집합. 이것은 우리가 “천국은 그렇구나.” 이러면 별 이상 없는데 문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건 좋은데 그 다음에 우리 차례에요. 어떤 차례냐 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딱 맞는 원리와 원칙대로 사는데 우리 몸에 맞아요. 소위 한국에서 요새 유행하는 단어가 ‘소통’이라는 거잖아요. 소통이란 공통점 만남이잖아요. 서로서로 소통하면서 “그래 당신 원리, 내 원리, 인정해.” 이런 식으로 세상을 만든 겁니다.
그런데 천국은 어떻게 된다고요? 우리에 맞는 원리로 들어간다고 했습니까, 못 들어간다고 했습니까? 못 들어가죠. 우리에 맞는 원리로서는. 왜냐? 예수님이 추방당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곱게 나가신 게 아니고 퇴학당하신 거죠. 퇴학당해서 버림받은 돌이 천국이 되었다면 현재 우리 몸에 익숙한 원리는 안 통한다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논리가.
그 다음 논리를 전개해봅시다. 우리가 사는데 적합하고 이만큼 사는데 필요했던 것이, 그 원리가 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우리가 기껏 아는 것이 이 세상에 적합한 원리밖에 모르는데 이게 안 통한다는 이야기거든요. 그쪽에서 안 받아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겠어요? 이 땅에서 아무리 잘 살아도 고생인데 죽어서는 편히 쉬고 싶고, 천국이 구미에 당기는 요건 중에 하나가 그게 영원히 산다는 거예요. 십 년 살고 나오는 게 아니고 한 번 들어가면 이사를 안 해도 돼요.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사실은 저녁에 할 이야기인데 당겨서 해도 괜찮겠지요. 지옥의 문제점이 힘들다는 문제가 아니에요. 지옥이 단순히 힘들다, 불이 뜨겁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한 번 들어가면 두 번 다시 거기서 빠져나올 수 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마지막 웃는 자가 승리자거든요.
아무리 여자 분들이 스포츠를 몰라도 권사님한테 물어볼까요? 축구할 때 전반전만 뛰고 끝나는 겁니까, 후반전이 있습니까? 전반전 하고 15분 쉬고 후반전 있지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서 부자가 축구가 전반전만 있는 줄 알았어요. 전반전에 부자 됐거든요. 그런데 후반전에 어떻게 됐습니까? 후반전에 거지 나사로는 천국 가고 자기는 지옥 갔잖아요. 그러면 세 번째 피리어드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게 문제네. 마지막 후반전 뛰면 더 이상 축구는 없어요. 이제 테스트는 끝나버렸어요. 이 부자는 전반전에서 후반전으로 이어지질 못했습니다. 부자가 전반전 뛴 것은 소통이었습니다. 남들이 원하는 것을 누렸고 그것으로 자기는 늘 웃는 사람 될 줄 알았어요.
그리고 상대적으로 모든 걸 박탈당한 거지는, 제가 미국에서 만난 분들은 박탈된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지 몰라요. 어떤 식으로든 모든 걸 빼앗겼단 말이죠. 부자는 비아냥 거렸습니다. “아이고, 인간아. 나 같으면 너 같이 안 산다. 나 같으면 자살한다. 내가 보기에도 답답하다. 인간아, 왜 그렇게 사니?” 문제는 거지 나사로가 죽을 때가지 몸이 호전된 적이 없다는 겁니다. 마지막 죽을 때 약간 형편 핀 그런 적도 없어요. 심지어 몸도 성하질 않았습니다. 누가 봐도 웃을 수 없는 패배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9회말 역전이 생겼습니다. 마지막 웃는 자가 승리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니까 이것도 포함됩니다. 부자가 궁금해서 묻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서 나는 지옥에 오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 갔습니까? 그 원리가 궁금합니다.” 끝난 마당에 왜 궁금해? 부자가 하는 말이, 제 동생 다섯 명이 아직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전반전이 전부인 줄 알고 까불고 난리 났어요. 아직 안 죽었으니까. 소통이니까. 눈에 보이는 게 전부인 줄 아니까 서로 친하게 지내면 그걸로 행복인 줄 아니까 그 동생들에게 거지 나사로를 다시 살려서 천국의 원리는 따로 있다. 다르더라. 그 다른 원리가 있어야 나 있는 지옥에 오지 않고 거지 나사로처럼 천국에 갈 수 있다.
그걸 보면 역시 맏이는 맏이 같지요. 보세요. 자기가 지옥에서 동생들 걱정하잖아요. 맏이는 타고났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동생을 절대로 그런 마인드가 아니에요. 지만 챙기면 그만인데 가장이니까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원리를 알려줬습니다. 그 원리가 우리가 시작된 거죠. 천국의 비밀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가 죽기 전에 눈치 챌 기회를 주셨다는 겁니다. 축구 끝나기 전에 이 원리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줬다는 겁니다.
기쁜 소식, 나쁜 소식이 있는데 기쁜 소식부터 먼저 말씀드렸습니다. 고맙게도 우리가 이 세상 끝나기 전에 그 말씀을 주셨다는 게 기쁜 소식이에요. 이제 남아있는 게 나쁜 소식이지요. 나쁜 소식은 다 바꿔야 된다는 겁니다. 몽땅 다 바꿔야 된다는 이것이 나쁜 소식은 너무 하고 슬픈 소식 정도. 바라기는 슬픈 소식이 기쁜 소식이기를 바랍니다. 강의 끝나고 난 뒤에.
왜 슬픈 소식이냐 하면 이 세상은 돈 없이 못 삽니다. 어떤 사람은 그냥 편하게 말하기를 사람 낳고 돈 낳지 돈 낳고 사람 낳느냐고 이야기하는데 돈 낳고 사람 낳습니다. 괜히 곱게 위장하지 마세요. 이 세상은 철저하게 돈 낳고 사람 낳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진리 아닌 것 같아서 멀리하지만 실은 어느새 우리 몸도 거기에 푹 젖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돈 보태주는 주님이기를 간절히 간구하면서 우리는 되도 않는 포장용 기도를 해옵니다.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옵소서. 이 한 몸 희생해서 주의 말씀만 증거하고 주의 뜻대로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해봤자 주님께서, “그렇게 해서 결국은 네가 원하는 돈 달라는 이야기지? 솔직히 깨놓고 이야기하자. 빙빙 돌려서 이야기하지 말고 딱 깨놓고 이야기해. 이렇게 하나님 잘 섬기면 진즉에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겠지, 명예회복 시켜주시겠지. 그거지?”
그러니까 우리 몸이 어디에 적합하냐 하면, 이 세상 원리에 적합해요. 이것은 사적으로 우리가 성질이 더럽고 나빠서가 아니에요. 제가 지금 기거하는 곳이 김성진 장로님 댁인데 그 장로님이 차에서 이런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 인간의 성격이 어떻게 바뀝니까? 예수 믿고 난 뒤에 뭔가 변화가 있어야 되는데 어떻게 하면 그 변화가 있습니까?” 제가 이렇게 답변했어요. 교육심리학자들은 말하기를 dna 30%, 환경 70%라고 하는데 저는 환경 100프로라고 이야기했어요.
인간성 더러운 인간이 좋은 환경 되면 100프로 바뀐다는 게 아니고 인간성 좋은 척하는 사람이 진짜 주께서 집어넣은 환경에 들어가게 되면 나는 100프로 죄인인 것을 아는 마음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의 기본원리입니다. 천국 기본원리라고 해놓고 후딱 지나가서 모르겠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천국의 기본원리는 내가 생각하는 천사처럼 사는 게 원리가 아니고 내가 위선적이고 꾸몄던 모든 껍질이 다 벗겨져서 속살이 그대로 노출되게 함으로써, 예수님 하신 말씀에 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정말 주님께서 주신 은혜와 사랑이 많이 알게 되는 그 심령, 그것이 바로 주님의 천국의 조건입니다. 또 해도 모르겠지요. 잘 이해 안 되면 또 합니다. 나도 끝까지 갑니다.
천국은 천사처럼 사는 게 아니고 주여, 주님의 긍휼이 아니고 불쌍히 여기심이 아니면 저는 어떤 식으로도 아무리 이 땅에 와서 고생하고 외지에 와서 고생해도 고생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최선을 다해도 최선을 다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주님께서 저를 이유도 따지지도 않고 불쌍히 여겨서 데려가셔야 천국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장착이 될 때 그것이 바로 천국의 조건입니다.
부자가 왜 못 들어가는지 아시겠지요. 부자와 왜 못 들어갔느냐? 예수님이 없이도 행복한데 예수를 왜 믿을까요? 가진 게 넉넉한데 왜 믿을까요? 그런데 부자는 바보 같아요. 그 조건이 천국에 못 가는 조건인 것을 상상도 못했어요. 왜? 주위에서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았고 설사 그렇게 이야기해도 콧방귀 뀌면서 네가 없으니까 답답해서 그런 소리하겠지. 하면서 시답지 않게 여겨서 거절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말합니다. 부자야. 지금 이 선지자와 말씀대로 오신 분을 믿지 아니하면 너는 네 동생들, 거지 나사로의 존재가 부활할지라도 그곳은 갈 수 없다는 겁니다. 사람은 죽어서 다시 천국 있다는 소식 자체만으로 우리는 천국 못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계시를 받았는데 천국을 봤다. 따라서 천국 계시 본 사람은 갑니다. 그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주제넘게 우리는 천국을 들어갈 자격이 안 된다는 오히려 그것이 천국 가는 우리의 조건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리와 창기가 훌륭한 사람보다 천국에 먼저 간다는 그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아주 친절해요. 천국이란 있습니다. 증거가 뭐냐? 주께서 부활했기 때문에 있습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천국에 가려면 천국에 맞춤, 맞는 마음이 돼야 되는데 현재 우리는 몸 자체가 우리끼리 사는데 적합했어요. 돈이 최고고 돈 없이는 아무리 예수고 하나님이고 못 산다는 것에 우리는 완전히 익숙해진 겁니다. 따라서 그것은 천국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바꿔줘야 돼요.
기쁜 소식은 우리가 아직도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약간에 꺼림칙한 소식은, 바꿔야 한다는 이것이 상당히 우리한테 부담이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바꾸기 위해서 머리 깎고 절에 갔는데 쓸데없는 짓한 거예요. 어떤 사람은 열군데, 스무 군데 개척교회하고 모든 걸 버리고 선교지로 떠났는데 선교지로 떠난다고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세리와 창기가 소위 종교인들보다 먼저 간다는 주님의 그 말씀을 다시 한 번 새겨봅시다.
주님은 우리를 이해하셔요. 어떻게 이해하시느냐 하면, 네가 남보다 못 되서 그런 게 아니고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쪽으로 이해해요. 100프로 환경입니다. 사람이 환경에 들어가게 되면, 사람이 아무리 믿고 싶어도 본성이 환경을 이기기 못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에 너희는 그때에 불순종의 악한 영들 속에서 불순종의 아들들로 살아왔다. 나, 그런 식으로 너희들을 바라보고 있다.
어떤 분야에 있던지 남한테 밀리지 않고 부러움을 사는 자기 자존심의 이름이 영광 받고자 하는 본성은 심지어 어린아이라도 다 있는 거예요. 그걸 누가 이해하신다고요? 주님이 이해하는데 네 자신이 그것을 긍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주여, 그래도 남보다 낫습니다.” 그 자체를 긍정하지 마세요. 주께서 이해하겠다니까 그걸 자랑질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어쩔 수 없다는 건 할 수 없지만 그걸 자랑삼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여기까지는 알았다고 치고 그 다음 문제는 우리 몸을 바꾸시는데 바꾸는 주체가 나냐, 외부인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천국으로 마음을 바꾸는데 내가 스스로 바꿀까요, 다른 분이 와서 내 마음을 바꿔줄까요? 정답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른 분이 와서 바꿉니다. 바꿔주는 다른 분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뭘 믿지 말라? 내가 나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 시도하는 모든 것을 절대로 믿지 마세요. 금식, 기도, 헌금, 전도, 선교, 목회 모든 걸 믿지 마세요. 자기희생, 자기 구제 믿지 마세요. 누가복음 18장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계실 때 바리새인이 기도합니다. “주여, 제가 이레 두 번씩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엎드려있는 저 세리는 나처럼 성화되고 거룩한 생활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 재판소가 멀리 있을 때 순회재판소가 미국에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판사가 가서 마을회관 같은데서 재판을 하지요. 예수님께서 즉석에서 판결을 내립니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자랑질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주여, 저는 감히 얼굴도 못 들고 엎드려있습니다. 주님의 판결이 내려집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기도하고 십일조까지 하는 너는 천국에 오지 못하고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하는 너는 의인으로서 천국 간다고 순회재판을 즉석에서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 판결로 인하여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미움 받는데 그럴 때 우리가 궁금한 것이 누가 승리자고, 누가 패배자였습니까? 잘 했다고 하는 자는 패배자고, 죄인이라고 한 것은 승리자가 되지요. 어떻습니까? 그 이야기 듣고 나니까 갑자기 우리가 구원받는 길이 열린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사람이란 남 따라 하면 되거든요.
교육이 뭐예요? 교육의 시작은 모방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건데 뭐든지 교육한다는 것은, “나처럼 해봐라, 이렇게.”라는 거예요. 그러면 교인들은 누굴 모방할까요? 나보다 앞선다고 생각하는 교회 목사님이죠. 목사는 교육자니까 목사가 사는 대로 살겠다고 모방하게 되면 목사가 천국 간다고 생각하니까 나도 따라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는 죄인입니다.”에 대해서 누가 모방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모방 못해요. 왜냐하면 사람은 각자 느끼는 죄의 강도가 다르기 때문에 아무도 모방 못해요. 달리기를 빨리 달린다. 연습하면 됩니다. 그러나 죄는 연습이 안 되는 이유가, 환경이 나를 죄인으로 만들었지요. 구원받은 사람, 합격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어쩌다보니 죄인이 아니고 죄인 되게 하는 목표로 주께서 나를 이 환경에 집어넣었습니다. 드디어 나는 도달했습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죄인 맞습니다. 이 속성이 천국 가는 원리입니다.
진짜 이건 받아들이기 곤란한 원리에요. 아주 어려운 원리에요. 잘만 하면 착한 사람 될 수 있는데 이게 아니고 드디어 주님께서 나에 대한 작업을 성공하셨습니다. 나는 이유도 없이 무조건 이 땅에서는 주님 보시기에 죄인 맞는다는 죄인 의식이 돈으로 살 수 없어요. 경험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여행 많이 다닌다고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왜? 주위 사람도 날 칭찬하니까.
비유 들어갑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비유가 뭐냐 하면, 열 처녀가 있는데 천국은 이와 같으니, 지금까지 한 것을 응용해봅시다. 예수님께서 먼저 천국을 제시하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이 땅에 살기 적합한 그것은 뭐로 바꿉니까? 천국에 필요한 조치로 바꾸는 거죠. 이 죄인은 뭐냐 하면, 모든 조건은 주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다 준비된 거예요.
어제 제가 이 집에 왔을 때 저녁을 뭐뭐 크랩인데 하여튼 게에요. 목사님이 게 잡은 게 아니고 외부에서 공수해 왔단 말이죠. 천국의 원리는 주님이 친히 준비해온 거예요. 열 처녀 모두 다 똑같이 신랑 올 때 잠을 잤습니다. 이것 놓치면 안 됩니다. 예수님과 혼인한 다섯 처녀와 그렇지 못한 처녀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신랑 만나는 조건을 자기가 준비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정해준 조건 앞에서 자기를 내세운 겁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신랑 만나겠지.” 하는 자기의 세상적 논리를 포기하고 낯선 논리, 신랑이 올 때 준비할 기름을 신랑이 왔다고 생각하고 신랑 오기 전에 신랑의 조건을 먼저 시키는 대로 준비한 거예요. 그러면 그 조건은 자기 머리에서 나왔습니까, 주님 머리에서 나왔습니까? 주님 머리에서 나왔지요. 그렇다면 그 구원받은 여자들은 주님의 조건과 더불어 살고 있는 겁니다.
열 명 다 잠을 잤어요. 주님께서 아홉 명 잠자고 한 명 깨어있으면 신랑은 오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홉 명 잠자고 깨어있는 사람이 한 명이면 조건이 어떻게 달라지느냐 하면, 깨어있는 자는 구원받는다는 조건이 되잖아요. 그건 주님이 제시한 조건이 아니에요. 따라서 주께서 가시고자 해도 다섯 명 잠자고 다섯 명 깨어있을 때 안 갑니다. 여섯 명 잠자고 네 명 깨어있어도 안 갑니다. 나중에 너무 졸려서 아홉 명 잠자고 한 명 깨어있어도 안 갑니다. 드디어 열 명 다 잠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타났습니다. 난리 났지요. 신랑 떴다는 순간에 주유소 가서 기름 사고 분산을 떠는데,
잠자고 있었다는 말은 여자들이 신랑 오는 것을 반겼다는 겁니까, 안 반겼다는 겁니까? 반기질 않았지요. 다만 신랑이 주는 조건만 생각했지 반기질 않았지요. 신랑 오고 난 뒤에 깨웁니다. 깨우니까 그들은 영접했고 뒤늦게 같이 깼는데 조건이 구비되지 않아서 주유소에서 기름 준비할 때 주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문을 닫아버린 거예요.
여러분, 물어봅시다. 하나님은 사랑하십니까? 만약에 사랑하신다면 주께서 문을 닫지 않고 열어두지요. 왜냐? 다섯 명 오는 것보다 열 명 오는 게 천국이 더 빛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지요. 문 닫으려고 하니까 다섯 명이, “신랑이여, 우리 기름 준비 못했습니다. 문 닫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요 앞에 주유소 있으니까.” “그래, 기다리지 뭐. 나는 세상을 사랑하니까.”
어떻게 합니까? 다섯 명이 기름 사러 갈 때 문을 닫아버리지요. 주님은 사람을 사랑합니까, 자기 조건을 사랑합니까? 자기 조건을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소통의 원리 통하는 세상과 천국의 원리와의 차이점이 이겁니다. 주님은 우리 속에 칩처럼 박힌 조건을 사랑하지 우릴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런 원리를 수용하기 참 힘들지요. 우린 좋은 게 좋다고 생각하지요. 좋은 게 좋은 게 아닙니다. 자신의 원리만 사랑합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너의 아이디어로 천국은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고 내가 준비한 것만 용납하는 곳이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조건만 언급하고, 안 믿는다? 싫으면 말고. 그런 배짱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비유, 유명한 달란트 비유. 달란트 비유란 뭐냐 하면, 어떤 공장에 일꾼 세 명이 있습니다. 세 명 다 주인의 종으로 다 소속되었다고 생각했지요. 첫 번째 종도, 주인님. 옳지. 두 번째 종도, 주인님. 옳지. 세 번째 종도, 주인님. 옳지. 너는 우리 편이라고 했습니다.
공개적으로 주님은 타국에 갔습니다. 가고 난 뒤에 다시 왔습니다. 첫 번째 종이 하는 말이, “주인님이 시키는 대로 제가 이렇게 남겼습니다.” 두 번째도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인님이 함께 있으나 우리 눈앞에 떠나있으나 저의 신분은 전혀 달라질 게 없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세 번째 종은 주인이 떠나고 난 뒤에, 달란트 비유에서 중요한 포인트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세 번째 종에게 하는 이야기가 중요한데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네가 그렇게 노동할 자신이 없다면 내 돈을 은행에 맡겨서 이자를 얻을 생각을 왜 못했느냐고 추궁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세 번째 종은 주님 주신 것을 왜 은행에 맡기지 않았을까요? 그는 책망 받았는데 책망 받을 짓을 왜 했을까요? 그 사람은 주님과 함께 있어도 독자적인 생각을 한 거예요. 저 주인은 나를 위한 주인이지 내가 주인의 종으로 있기는 싫다는 겁니다. 내가 우선이고 그 다음에 주인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주인이 안 보이면 내 것이 아니니까 관심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힘없어서 못하던 하여튼 재물도 주인 것이고 자신도 주인 것이라면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전과 똑같이 일할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주인 떠났다고 이제는 자기 본색이 드러난 겁니다. 나 있고 예수 있지 예수님 있고 내가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 세 번째 종의 본색이었습니다.
결국 그런 사람은, 천국은 이와 같으니 해서 천국에 못 가지요. 천국 가서 독자적인 행동하게 되면 그건 천국이 아니고 자기 나라 되지요. 천국에서 땅 빌려서 자기 사업할 일 있습니까? 아니잖아요. 그 사람이 바로 못 들어가지요. 그것은 뭐냐 하면, 철저하게 주님이 먼저 있기에 내가 있다는 그 원리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천국에 못 간다는 이야기가 달란트 비유입니다.
주님이 없을 때 인간은 자기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지금 주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껏 자기 본색을 발휘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든 하나님이든 삼위일체든 나 좋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나 우선이지 예수 우선 아니라는 것, 그 원리가 바로 우리 몸에 딱 맞는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남들이 이해해주는 그런 원리입니다. 하지만 천국의 원리는 그것이 바뀝니다.
두 가지 비유를 말씀드렸지요. 여러분이 궁금한 게 하나 있었을 겁니다. 다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하여튼 이렇게 안 되는 걸 어떻게 되게 하시느냐? 그 조치는 어떤 조치인지 그것이 궁금하겠지요. 예수님이 우선이고 나는 나중이라고 태어나면서 자동적으로 그렇게 됩니까? 그건 아니거든요. 누구나 아무리 좋은 것도 내가 제일 좋아요. 우리는 우리가 지옥 갈 때도 격려할 사람은 우리밖에 없어요. “걱정하지 마. 지옥 가도 살만 해.” 어깨 두드리면서 할 사람은 우리밖에 없어요. 그런 원리가 어떻게 주님 먼저고 나는 나중이라는 그런 원리로 어떻게 바뀔 수 있습니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상당히 궁금하지요.
마태복음 13장 시작됩니다. 그걸 생각하시고 바꿀 의사도 없고 바꾸지도 못할 우리가 어떻게 그게 바꿔져서 천국에 골인되는지 마태복음 13장에 그 원리가 들어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3절부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덜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여러분 같이 보았습니까? 그 끝에 있는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말은 안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수상한 음산한 기운이 들지 않습니까. 그 말은 빼도 무방한 느낌 들지 않아요? 지금 제 취지가 전달이 되지 않는 것 같은데. 저기 기타가 있지요. 여러분, 천국은 기타의 현을 치면 소리가 나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제가 이렇게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면, 기타 치면 소리가 난다는 것까지만 이야기하고 그 뒤에 있는 말,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것은 쓸데없이 갖다 붙인 말처럼 들리지요. 이건 귀고 뭐고 간에 누가 봐도 그렇잖아요. “주님께서 귀 있고 없고 간에 전부 다 누구나 납득이 되도록 그 말씀을 주셨구나.”라고 생각하지요. 기타 현 치면 소리 난다. 이건 얘들도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씨를 뿌렸는데 새가 먹어버린 그런 씨도 있고 흙이 얕은 곳에 던져진 그런 씨도 있고 그 다음에 가시덤불에 던져진 씨도 있고 돌밭에 떨어진 씨도 있지만 그 다음에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다. 이게 그렇게 어려운 거예요? 이게 구태여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요건이 꼭 필요한 말씀처럼 들리십니까? 아니잖아요. 그렇지. 어쩌라고? 다 이야기네. 그게 다 아는 이야기십니까?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이 들어간 취지를 모르면 완전히 오해한 거예요.
그렇다면 이 씨 뿌리는 비유를 설명하면서 잘못된 해석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틀린 답을 먼저 말씀드리면서 그 다음에 제가 진짜 해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잘못된 해석을 이렇습니다. 밭은 사람의 마음이다. 씨는 주님의 말씀이다. 씨가 떨어졌는데 어떤 사람은 마치 길가에 떨어진 씨를 새가 먹는 것처럼 말씀이 떨어졌을 때 졸거나 할 경우는 마귀가 와서 씨를 먹어버려서 씨 자체를 먹어버리니까 열매를 못 맺었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들을 때 졸지 마세요. 말씀 들을 때 마귀가 와서 먹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여러분은 옥토가 돼야 됩니다. 아멘하면 곤란한데.
두 번째 해석, 여러분들이 교회 와서 누가 우선이다? 내가 우선이고 예수님이 나중이거든요. 우리는 돈 낳고 사람 낳잖아요. 돈 있어야 사니까 “주님이여, 다 털어먹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원상복귀 시켜주옵소서. 주님은 전능하시잖아요. 그 전능한 힘 어디에 쓰려고 그냥 두십니까? 주께서 전능한 능력을 주셔서 모든 자존심을 회복해주소서.” 그런 마음으로 그런 기대로 교회에 온 거예요. 오고 난 뒤에 말씀 들으니까 기도하면 이 땅에서 복 받고 나중에 믿으면 천국 가고. 좋더라 이 말이죠. 그러다 갑자기 취직을 했는데 주일에 쉬지 않는 곳에 취직해서 또는 사장이 불교신자라서 “교회 가려면 회사에 나오지 마.” 이랬고,
또 어떤 사람은 시어머니가 아주 불도가 심해서 어디 가는데? 교회 갑니다. 어디 며느리가 허락도 없이. 머리카락 휘어잡고 교회도 못 가고 환란이 심하고 또 남편이 교회 간다고 때리고 해서 “아이고, 하나님이여, 저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할 도리 다했습니다.” 하고 환란이 교회에서 집사 시키고 해서 좋았는데 갑자기 주위에서 경제적인 여러 가지 환란이 있으니까 주님이여, 더 이상 저는 견딜 수 없습니다. 나중에 늙어서 죽을 때쯤 주님 믿겠다고 하면서 환란에 넘어질 때 “여러분, 그러지 마시고 그러면 열매 못 맺으니까 이겨내셔야 30배, 60배 열매 맺습니다.” 이런 해석 잘못된 해석입니다. 밭 관리 잘하셔서 열매 맺을만한 마음으로 바꿔달라고 간곡히 기도하라는 식으로 이 비유를 해석하는 건 잘못됐습니다.
세 번째, 어떤 사람은 교회 와서 부러움을 받을 정도로 복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너무 많이 받았어요. 처음에는 어려울 때 주일 꼬박꼬박 지키고 심지어 새벽기도 나오고 하다가 좀 배부르니까 그 다음부터 노래방에 가고 나이트 가고 흥청망청 쓰니까 목사 입장에서는 교회도 안 나오고 교회 안 나오니까 헌금도 동시에 안 나오고. “집사님 왜 안 나옵니까?” “바빠서. 놀면서 사업 되는 줄 아세요.” 이렇게 된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 말씀에 그러면 천국에 못 갑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그런 유혹이 왔을 때 뿌리치고 많은 열매를 맺어야 됩니다.”
네 번째, “만약에 여러분 진짜 마음 관리 잘하면 드디어 효과 보는데 30배, 60배, 100배, 가면 갈수록 복을 받는데 이 복을 여러분 원하지 않습니까? 그런 복 받고 싶지요. 그러면 정신 차리고 교회 와서 마음 관리하고 성화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이 해석,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럴 것 같으면 구태여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할 필요 없어요.
인간은 나면서부터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하면 복 받고 나쁜 짓하면 하나님이 기어이 벌준다는 것이 짜여있기 때문에 열심히 애쓰는 사람에게 복이 오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벌이 온다는 그 뻔 한 이야기를 다 알고 있는데 심지어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와 있잖아요. 베짱이는 굶어죽고 개미는 잘 산다는 다 아는 이야기를, 내 몸은 내가 관리하고 도 닦듯이 닦아야 된다. 마음을 거울 같이 닦아야 제대로 보인다. 이건 불교에서다 하는 이야기거든요. 그렇다면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할 필요 없잖아요. 주께서는 바로 그 해석 자체가 예수님을 결국은 이 땅에서 추방시킬 수밖에 없는 동기가 된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천국은 이 땅에 왔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발로 차버렸단 말이죠. 왜 찼을까? 안 맞으니까 찬 거예요. 기존에 들어있는 세상관으로는 천국은 설명이 안 되니까 주님은 탈락된 겁니다. 추방된 겁니다. 이게 십자가거든요. 그렇다면 진짜 비유의 원리가 뭐냐? 이것이 아니라면 정녕 그것이 아니라면 그럼 진짜 그 뜻이 뭐냐? 궁금해요? 그것은 바로 여기에 나옵니다. 누가 마태복음 13장 11절 읽어보세요. 그게 해답입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됐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이라고 하면서 앞장세운 것이, 씨 뿌리는 비유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쉽다, 누구나 안다고 하지요. 누구나 알고 누구나 이해가 된다면 구태여 무슨 단어가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까? ‘허락’이죠. 허락이 뭐예요? 아무리 가고 싶어도 여기서 패스 오케이라는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못 들어가지요.
“씨 뿌리는 비유, 감동받았습니다. 저 이해했습니다. 어때요? 허락해주세요.” 허락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할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허락해야 들어간다면 구태여 씨 뿌리는 비유를 앞장세울 이유가 없잖아요. “너, 들어와. 너, 들어오지 마.” 한다면 다이렉트로 “목사님, 들어오세요. 들어오지 마세요.” 이렇게 할 것 같으면 씨 뿌리는 비유 같은 마치 미끼 같은 것이 필요치 않다 이 말이죠.
결국 씨 뿌리는 비유는 뭐냐 하면, 이해한다, 천국 알았다. 이건 내가 알기에 허락 없이도 들어갈 수 있다는 자를 거절하기 위함입니다. 네가 안다는 것, 그것은 내가 곧 거절하는 것이다. 그러면 허락이란 말을 수용할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아무리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유일한 남은 희망은 뭐예요? 허락하면 되겠지요.
다른 분이 15절 읽어보세요.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내가 고쳐주지 않았는데 고침 받았다고 우기는 인간들에게 그들이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내가 했는데 첫 번째 이야기가 씨 뿌리는 비유였다는 겁니다. 알아들었나? 그러면 끝났어. “주여, 무슨 이야기인지 못 알아듣겠습니다.” 그러면 허락만 있으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려라. 남은 것은 주님의 허락만 떨어지게 되면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으면서 천국 가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첫 번째 강의 전체를 단순하게 축약하면 이렇습니다. 아무도 갈 수 없는 그곳을 주의 허락이 떨어지면 어떤 상황도 전혀 거침없이 그곳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 제안을 하신 주님을 믿읍시다. 못 믿겠다고? 그건 아직도 자기에게 어떤 가능성을 스스로 지키겠다고 버티는 식입니다. 그런 자에게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못 알아듣는 말씀으로 규정됩니다. 알아듣지 못해도 갈 수 있는 나라, 오직 주님의 허락만 있으면 되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 말은 애초부터 천국을 상상하지 말라는 거예요. 마치 천국이 내 나라인 것처럼 그렇게 전제로 깔지 말라는 겁니다. 갈 수 없는 나라고 안 가도 되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런데 가게 해주셨지요. 오직 조건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해주셨다는 겁니다. 그럼 어떤 식으로 허락해주셨는가? 씨 뿌리는 비유를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고 자기가 한 말, 약속을 누가 지키는가? 주님이 지켜서 소급해서 내가 전에 너한테 준 씨 뿌리는 비유 있지, 그것 홀라당 내가 다 지켰어. 내가 다 지킨 자격에서 이미 넌 지켰기 때문에 못 지킨 너도 지킨 내가 허락하면 나와 동반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10분 쉬고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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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3 미국이상현목사집회b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끝에 제가 이런 말했지요. 예수님은 자신이 뭔가 말을 뱉어놓고 그 말을 본인이 다 수행해버려요. 자기가 던진 말을 다 거둬서 본인이 다 완성해버려요. 그리고 본인 외에 어느 누구도 개입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것은 비유하면서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시잖아요. 언약은 주신다는 것은 약속을 주시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약속을 던지게 되면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키라고 준 말씀처럼 들리는 거예요. 십계명이 대표적이잖아요. 코앞의 말씀이 왔는데 부메랑처럼 도로 가버리고 주신 분에 의해서 완성이 돼버립니다.
그러면 본인이 지킬 말씀을 우리에게 왜 던져줄까요? 그것은 우리의 현재 상태가 천국에 부합되지 않다는 것은 보여주는 겁니다. 법이 없는 곳에는 죄가 없어요. 로마서 7장에서 너희가 탐내지 말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너희들이 탐내는 죄를 지을 수 없었다. 그런데 탐내지 말라는 순간부터 우리는 탐내지 말라는 그 말씀을 내가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면서부터 우리 속에 탐내자는 본성이 들어있을 줄이야 어떻게 알겠어요. 그것이 비로소 노출이 되고 부각이 된다는 겁니다. 이게 공자 윤리도덕과 다른 점이에요.
우리가 어떤 지시를 하게 되면 그 지시를 지킬 수 있는 것을 전제로 해서 준 거라고 오해하는데 그것은 세상의 법에서는 그럴지 모르지만 성경의 법의 목적은 우리 속에 잠재돼있던 법에 대한 위반과 반항심을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 것처럼 건드림으로 일깨워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법을 준 목적이에요. 그리고 그 법이 신약성경에 오게 되면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점점 더 완성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율법의 일점일획도 폐하지 않고 다 이룬다고 돼있어요. 이룬다고 하면서 추가적인 법들을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으로 지켰다고 자부하는 사람에게 새롭게 도입된 추가된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보고 기겁을 하지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에 해당된다면 도대체 이 세상에서 살인자 아닌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체가 이미 간음죄라면 이 세상 남자치고 간음죄 안 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십 년 동안 여자에 대해서 관심 없더라도 십오 년째에 정말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다면 십오 년 지킨 것 무효가 되는 겁니다. 말씀을 주신 것은 말씀을 지킬 수 있어서 준 게 아니고 못 지킨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준 말씀이죠. 코앞에 왔다가 도로 가버리죠. 예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는 허락된 자와 허락되지 못한 자를 구분하는 그 권한과 자격이 누구한테 있다고 봅니까? 예수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씨 뿌리는 비유를 했습니다. 문장이 좀 어려워졌지요. 내가 허락하면 천국이고 허락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그렇게 선언할 수 있는 자격자가 예수님 본인밖에 없는 거예요. 천국에 적합한 30배, 60배, 100배를 맺는 그런 능력은 말씀을 주신 예수님 본인만이 그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천국은 공짜로 가지요. 공짜로 값없이 갑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왜 공짜이어야 하느냐고 할 때 그 다음 말이 있어야 돼요. 왜 우리는 공짜로 가지요? 이 말은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주님께서 치렀기 때문에 공짜로 간다고 해야지 그냥 내가 공짜로 들어간다고 하면, 공짜로 들어가게 하신 그 은혜를 모르면서 그냥 가버리면, “너, 어디서 왔노?” 이렇게 돼요.
분명히 씨 뿌리는 비유는 제가 율법이라 했습니다. 조건 주님께서 제시했습니다. 옥토에 떨어져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조건에 부합된 사람이 없습니다. 없으면 천국은 누가 들어가느냐?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당사자가 허락하면 우리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이 어렵습니까? 참 쉽지요.
쉽다 하니까 이제 발동 걸렸습니다. 계속 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성도로서 주님을 만난 사람의 모든 행위와 생각들은 결국은 무엇을 낳기 위한 행위들이냐 하면, 주님에 의해서 30배, 60배, 100배를 맺을 수 있는 작업의 일환으로서 공정 가운데 우리가 포함이 된 겁니다.
물 있습니까? 목말라서 물 마신 게 아니고 여러분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물 마신 겁니다. 제가 방금 물을 마셨습니다. 잘못된 해석부터 먼저 말씀드립니다. “주여, 주께서 물 주셔서 이 물로 힘 얻었으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힘을 얻어서 주의 일을 하게 하옵소서.” 이것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거는 일단 내가 주님 아니까 이제부터 내가 주인공이 되어 30배, 60배, 100배 열매를 맺겠다는 겁니다. 이것 잘못된 겁니다. 하도 반응들이 없으니까 뒤에 해답부터 먼저 드립니다.
그러면 물 마시는 이것조차 30배 열매에 해당되는 겁니다. 주께 이미 구원받았기에 우리가 물마시게 하셨다고 할 때 그것이 주께서 정말 기다렸던 그 열매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이것 자체가 주님의 은혜라고 아는 것, 쉬울 것 같지만 쉽지 않습니다. 주의 능력이 아니면 이걸 깨닫지 못합니다.
로또를 샀는데 1등이 되어서 20만불 얻었다. 그때 우리는 이것은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라고 쉽게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로또복권을 들고 가보니까 글자 하나 틀렸어요. 괜히 좋다 말았어요. 안 맞은 것 누구 뜻입니까? 주의 뜻으로 기쁨으로 돌아오는 것, 그것 30배 열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불가능 일이에요. 어떻게 내가 고생해서 내가 노동해서 얻은 것을 주님한테 빼앗겨놓고도 그것을 감사합니까? 이게 사람으로 가능한 일이겠어요? 이것이 바로 허락하심 속에 포함돼있는 주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내장되어 사용한 결과입니다. 참 어려워요.
전에 욥기 했잖아요. 주신 자는 하나님이요, 우린 믿습니다. 그 뒤에 뭐라고 돼있어요? 주께서 주실 때 고맙다고 받는데 그 주신 것을 도로 가져갈 때 우리는 힘을 쓰고 안 빼앗기려고 애를 씁니다. 줘놓고 도로 가져가느냐고 벌벌 떨지요.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니까 가져가실 때 잘 가져가시라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주실 때 고마운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데 주신 것 도로 가져갈 때 사람은 짜증을 내게 돼있습니다. 이러려면 뭐하려고 주셨습니까?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사실 인간의 힘으로 안 됩니다. 안 되는 것을 주께서 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말씀에 부합되는 자만 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런데 말씀에 부합되게 하시는 주체자가 내가 아니고 나는 주님이 하신 일에 결과로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그것이 믿음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주께서는 비유만 던져놓고 그 비유를 따라서 마무리를 지어야 되는데 그 마무리가 우리 죄를 위해서 대신, 우리가 주님이 주신 말씀을 못 지키는 그 죄마저도 주께서 홀라당 다 가져가셔서 그 말씀을 지키지도 못하면서 의인으로 간주하시는 근거가 우리 내부에 그것이 파고 들어온 겁니다. 그것이 예수 안에서 우리가 의롭게 된 겁니다.
“너는 못했지만 내가 했잖아. 겁내지 마. 쫄지 마. 천사 앞에서 쫄지 마.”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주님께서 지시만 했다면 우리는 못 지켰다고 벌벌 떨어야 되는데 지시한 것으로 쫄지 마가 아니라 지시에 따르지 못한 걸 미리 아시고 못한 그 모든 죄를 대신 가져가서 지킨 자로 간주하셔서 찾아오신 분이 내 곁에 있는데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이게 복음이에요. 자기 잘남과 못남의 자랑이 복음이 아니고, 내 곁에 누가 있다가 복음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너무 독립적이에요. 자기 곁에 누가 있다는 걸 인정 안 해요. 그러니까 맨날 지 잘난 맛에 변명조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성도는 남들이 네가 했다고 수고했다고 해도 아니요, 주께서 날 가지고 하셨음을 고백하는 겁니다.
로마서 8장 9절을 제가 읽어볼게요.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영이란 관계라고 제가 뉴저지교회에서 이야기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타고난 것 말고 이질적인 것이 너희 안에 있지 아니하면 아무리 착해도 그리스도인이 아니에요. 너의 것만 남아있으면 절대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이질적인 것, 전혀 낯선 것이 장착되고 내장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영이 있는 거예요.
그 다음에 11절을 보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니라”라고 돼있지요. 듣거나 보거나 했지요.
이제 문제 나갑니다. 하나님이 우리하고 상대합니까, 우리하고 상대 안 합니까? 이게 문제입니다. 그렇지요. 예수님은 우리하고 상대 안 한다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여, 제가 나쁜 짓을 했습니다.” “너하고 상대 안 해.” “주여, 제가 남한테 구제했습니다.” “너하고 상대 안 해.” “주여, 제가 성경을 백독했습니다.” “너하고 상대 안 해.” “주여, 제가 이번에 큰 목돈을 교회에 헌금했습니다.” “나는 너하고 상대 안 해.” “헌금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아까워서 빠졌습니다.” “너하고 상대 안 해요.” “주여, 제가 남편이 다섯 있었는데 헤어졌습니다. 이제 사귀는 남자가 여섯 번째입니다.” “너하고 상대 안 해.”
주님은 애초부터 우리와 상대 안 하기로 마음먹고 예수님의 자신의 영을 넣어서 자신의 영으로 말미암아 죽을 우리 몸도 천사보다 더 빛나게 하십니다. 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습니다. 그 횡재가 우리가 기대한 횡재도 아니었어요. 일방적으로 주께서 찾아와서 주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에게 집어넣고 우리를 예쁘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린 늙어가고 예쁘지도 않은데 무조건 예쁘데요. 우리는 주님을 기뻐하지도 않은데 주님 쪽에서 먼저 우릴 기쁘다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사는 것과 너무 달라요.
하늘에서는 영광이고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의 평화라는 말씀을 교회에서 어떤 때 많이 듣습니까? 크리스마스 때죠. 제가 크리스마스 때 십오 년 전인가 그 설교를 하면서 그 대목을 지적했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구원받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어떤 모습이든 관계없이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기뻐하는 사람이 구원받습니까?”라는 말을 설교시간에 질문을 던진 적이 있어요. 여러분, 어느 쪽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한 공로로 구원받습니까, 아니면 기뻐하지도 않는데 주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보고 기뻐하시고 구원하시는 겁니까? 나중 쪽이죠. 주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기쁘게 보는 거예요.
주께서 기쁜 자 중에 주의 평화로다. 기뻐하심을(수동형) 입은 자 중에서 공짜로 자신이 성령 주시고 성령 있다고 죽을 몸도 살리신다는 거예요. 도대체 우린 뭐예요? 뭔가 왔다갔어요. 마치 위치추적기 같습니다. 잠자고 있는데 배 째고 위치추적기 집어넣고 하는 말이, 네가 어디 가든지 나와 함께 있다. 심지어 죽어도 내장된 주께서 집어넣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위치추적기로 말미암아 하늘 끝에 가더라도 건져내겠다는 겁니다.
너무 좋아서 안 믿어지지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습니다. 그런데 이게 아니잖아요. 일방적으로 집어넣고, “누가 이렇게 집어넣었지?” 주님께서 우리와 놀이를 하고 있는 거예요. “누가 이렇게 사랑했지? 내 사랑이 있네. 내 사랑 가져가야지.” 하고 회수하는데 딸려 나온 사람이 누구냐? 우리에요.
여러분, 가정주부가 호일로 고구마를 싸서 구운 다음에 호일 먹습니까, 군고구마 먹어요? 어느 쪽을 먹습니까? 군고구마 먹으려면 알루미늄 호일을 벗겨야지요. 그것 벗길 때 아프다고 합니다. “주님이여, 저 착합니다. 성실합니다. 교회 삼십 년 다녔습니다.” 그런데 자꾸 우리의 껍질을 벗겨요. 벗겨놓고 하는 말이, “군고구마 여기 있네.” 하고 그것을 가지고 기쁘게 먹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주님과 소통한다고 목사한테 잘 보이려고 기도할 것도 없는데 하는 척하고 통성 기도했는데 그런 조작과 위선이 의미 없습니다. 자기 것 집어넣고 자기 것 찾아가시는 그걸 로마서 11장에서 모든 게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가는 겁니다.
이제 씨 뿌리는 비유는 끝났지요. 30배, 60배, 100배는 이것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하는 거예요. 씨 뿌리는 비유에 하나 더 추가합니다. 그렇다면 돌밭에 있는 건 뭐고, 하여튼 밭에 떨어지는 건 뭐고, 그 다음에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이야기를 구태여 할 필요 없잖아요. 옥토 만들어서 씨 뿌리고 열매 맺으면 되지 그걸 왜 하느냐? 이게 주께서 일하실 때 구원될 자만 드러나게 일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인간은 기어이 내가 구원되지 못하게 했다는 주님 자신의 분명한 분류작업도 아울러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그 말씀하신 겁니다. 그 이야기가 뒤에 알곡과 가라지 비유가 연이어 나옵니다.
우리는 자기 구원에 너무 급하다보니 나만 달랑 구원받게 되면 몰라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천국 가는 사람은 누가 지옥 가는 사람인지 알면서 아울러 천국에 가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봅니다. 천국 간다가 아니라 난 저쪽으로 가고 싶은데 저쪽 아니네, 이런 식으로 천국 가는 겁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주체를 바꿉니다. 주께서 나를 사랑하는지 아시잖아요.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그 정도 이야기했으면 베드로가 괜찮은 수준에 올라온 것처럼 생각이 드는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네가 띠 띠고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살면서 14년 6개월 15일 동안 원치 않는 길로 가면 그 다음부터 원하는 길로 가겠어요? 못 가지요. 그 다음 날에도 마찬가지로 원치 않는 길로 가요. 만약에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길로 가버리면 저쪽인 줄 알았다고 저쪽으로 가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베드로가 이미 자기가 갈 길을 아는 셈이 돼버리면 그때부터 주님과 베드로가 헤어져도 베드로가 알아서 찾아오는 셈이 되지요. “주님, 그동안 교육 잘 받아서 앞으로 제가 혼자서 하겠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에 구원받는 길에 베드로 본인의 공로가 섞이게 되지요. 그래서 끝까지 원치 않는 길로 갑니다. 그게 구원의 모델이에요.
저나 여러분 한 명도 원치 않는 길로 가서 이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앞으로 내일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원하는 길은 내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나한테 사기 친 사람, 나를 싫어한 사람들은 이유도 없이 제발 지옥 갔으면 좋겠다는 복수 심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나한테 사기 친 사람을 천국에서 만나면 어떻게 하려고? 난감하지요. 천국에서 멱살 쥐고 싸울래요? 난감해 진다고요. 나를 싫어하고 내 인생을 조져놓은 사람을 천국에서 만나면 반갑다고 할 수 있습니까? “너, 왜 왔는데? 주님이여, 저를 지옥으로 보내주시옵소서.”
<밀양>이라고 전도연 나온 영화가 있어요. 자기 아들 죽인 사람이 자기가 믿는 기독교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을 믿을 때 주인공 전도연은 그때부터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자와 함께 천국 간다는 것은 자기는 견딜 수가 없었던 거예요. 이건 뭐예요? 천국 가는 길은 이제는 내 힘으로 갈 수 있다. 이 정도 신학 실력이면 갈 수 있다고 여겼던 그것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없습니다. 그저 알루미늄 호일만 칭칭 감은 거예요. 신학이란 호일, 아는 지식, 이런 걸로 감은 겁니다.
주께서 여러분 속살을 보여줄 때마다 우리는 그걸 원치 않아요. 남들처럼 근사하고 싶어요. 좀 고귀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요.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 뜻대로 해서 데려가는 겁니다. 우리는 부자 되고 싶어요. 가난하기 싫어요. 하지만 그것이 내 뜻이라면 주께서는 그 뜻을 꺾어버립니다. 배제해버립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 별로 없겠습니다만 저는 부자 되기 싫어요. 정말 우리 얘 공부 잘하는 것도 싫어요. 그런데 주께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부자 되게 하시고 공부 잘하니까 견딜 수가 없어요. 나는 남자 만날 때 모범생이고 키 작고 성격적으로 문제 있고 예수도 안 믿고 돈 없고 그런 남자와 결혼하고 싶은데 주께서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키 크고 성격 좋고 나만 사랑하고 돈 있고 잘 생기고 머리 좋아서 후손들 공부 잘할 것 같은 그런 남자가 왔을 때 “주여, 이것은 내 뜻이 진정 아니었습니다. 왜 저를 이렇게 난처하게 하십니까?” 그쪽으로 가야 네가 천국으로 가기 때문에. 그래서 천국 문 앞에서 이렇게 온 것은, 제 뜻이 아니었고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여기서 나온 노래가 최성수의 <동행>이에요. 누가 나와 함께 가겠느냐. 이 길을. 주님과 함께 가고 있습니다.
조건이 있어요. 절대적 내 뜻대로 아니지요. 주의 뜻대로. 우리는 주의 뜻대로 하면서 이 말씀은 결코 내가 지킨 게 아닙니다. 내가 지킬 수 없었다고 늘 고백케 해서 저 사람이 지옥 가는 것처럼 나도 지옥 가는 게 마땅한데 오직 주님의 사랑으로만 그쪽으로 가지 않고 이쪽으로 간 것은 주님이 일방적으로 나를 예쁘게 보시고 일방적으로 사랑의 은덕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 비유로 주신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체리 보면 유혹 되고 마귀를 못 이기고 환란 오면 다 넘어집니다. 못 넘어지게 하신 것은 내 뜻이 아니고 내 고상한 신앙이 아니라 주께서 이미 확정된 믿음을 주셔서 내가 했다는 소리를 못하게 입을 틀어막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안 가게 하신 겁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의 기도 내용이 바뀌어야 됩니다. “주여, 고생케 하옵소서.” 혹시나 말이죠. 통박이거든요. “고생케 하옵소서. 완전 거지 되게 하옵소서. 이게 주의 뜻입니다.” 하면 혹시나 진즉에 우리가 노렸던 부자 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주께서는 그 통박도 다 알고 계십니다.
그 다음에 비유가 무슨 비유지요. 24절입니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 같으니” 그것 하기 전에요 23절에 “좋은 땅에 뿌렸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라고 했지요. 깨닫는 능력이 우리한테 없습니다. 왜냐하면 뭘 깨닫느냐 하면, 이 모든 말씀을 우리가 지킬 수 없음을 깨닫는 거예요. 아까 세리가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그럴 때 주께서 “네가 합격자야.” 그 원리와 똑같은 원리에요. 기적과 말씀, 말씀과 기적, 같은 원리가 같이 녹아져있습니다.
그 다음에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24~29절)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천국은 하나의 액션이다, 이 말입니다. 천국은 있는 것을 가지는 것이 아니에요. 여기 북쪽에 가면 우두머리(한국말로)? 거기 가서 사람들이 하는 일은 뭐냐 하면, 물건이 존재하는 것을 돈 주고 가져오면 되지요. 물론 남자들은 주차장에서 자고 있지만 너무 힘들어서. 존재하는 것을 가져오면 내 것 되잖아요.
지금 예수님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종들이 잘못된 게 뭐냐 하면, 가라지가 존재하면 나라는 존재자가 가라지를 뽑아내면 가라지가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주인이 어떻게 합니까? 가만두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가라지의 존재가 물건처럼 있다면 그 있음에 대해서 나라는 존재가 뽑을 수 있단 말입니까, 없단 말입니까? 뽑을 수 있는 자격이 없지요. 이건 어려운 게 아니고 쉬운 거예요.
밭이 있는데 가라지가 군데군데 있단 말이죠. 알곡도 있고. 우리는 가게에 진열한 물건처럼 있다고 보고 까만 것 제거하면 하얀 것만 남으니까 모든 것이 알곡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게 천국을 이해 못한 사고방식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알곡을 심어놓은 게 하나님의 원수가 심어놨죠. 원수가 심어놓은 것을 종들이 뽑을 수 있다는 발상은 잘못된 발상이라는 겁니다. 왜냐? 인간은 원수 안에 있기 때문에, 마귀 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적을 물리친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가 저 적을 물리치겠습니다.” 주님이, “네가 뭔데? 너도 같은 편이잖아요.” 우리는 주님 편이라고 자부하는 거예요. 우리는 아부하는 식으로 “주여, 주님의 원수가 있습니다. 내가 뽑을게요.” 하면 주님께서, “너나 잘하세요.”
하나님의 원수가 심었다는 말은, 같은 편인 우리 인간이, 자기가 마치 주님의 편에 있다고 착각해서 제가 충성되이 뽑겠다고 나서면 인간이 원수를 제거해서 그 공로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되지요. 예수님 왜 왔습니까? 예수님 오실 필요가 있습니까? 없지요. 종들만 있으면 되지요.
이 해석을 하면서 천국은 어떤 작업이냐 하면, 존재하는 가라지를 뽑을 수 있는 것은 그 원수를 심어놓은 그 존재를 다른 어떤 분, 존재가 제거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종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는 경우에만 가라지는 제거되는 겁니다. 그러면 주의 원수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지요. 가만두어라. 네가 나서면 가라지 뽑다가 알곡 뽑힌다. 쉽게 말해서 가라지인지 알곡인지 네 주제에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너는 너밖에 몰라.
마치 너는 자동적으로 주님 편에 서있다고 착각하는 것, 이건 나폴레옹 정복욕입니다. 징기스칸 정복욕이에요. 저 모든 것 기독교 신자 다 만든다. 이 아파트 몽땅 우리 교회에 다 데려온다. 이거는 자기의 정복욕의 화신이 된 상태입니다. 주께서는, “너나 잘하세요.” 주께서 자기 백성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나댄다고 성공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나대든 안 나대든 관계없이 주님은 자기 백성 구원하는데 실패하지 않습니다.
또 여러분이 기다리는 시간이 왔습니다. 잘못된 해석 기다리지요. 잘못된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교회가 있는데 장로님 한 분이 자꾸 교회 돈을 횡령하고 있어요. 교인들이, “목사님, 저 장로님이 가라지 같이 행동하는데 우리교회 발전을 위해서 장로님을 아예 이참에 재정에서 뽑아버리죠.”라고 했을 때 목사님이, “마태복음 13장 비유에서 놔두세요. 주께서 뽑아야지. 우리가 뽑다가 알곡까지 뽑히면 안 됩니다.” 이 해석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보나마나 맞을 리가 없지요. 틀린 거예요.
왜 틀렸느냐 하면, 그 목사는 지금 주님을 생각하는 겁니까, 교회를 생각하는 겁니까? 교회를 생각하지요. 교회는 존재가 돼요. 어떤 존재에 대해서 처리할 문제는 존재가 아니고 진짜 존재인 주님만 처리할 수 있어요. 그럼 우리는 뭡니까? 하나에 과정이거든요. 우리 가운데 알곡이 있고 가라지가 있다고 했을 때에 우리는 마치 우리가 존재로 생각해서 나는 마땅히 가라지가 아닐 것이고 알곡이라고 확정지어버리죠. 그런데 알곡과 가라지는 존재로 확정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알곡은 알곡대로 드러나게 하시고 가라지는 가라지로 드러나는 그 과정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가만두어라. 마지막 때에 처리한다는 겁니다. 누가 와서? 주님이 와서 처리하는 거예요. 저 장로 잘못되었으니까 이걸 우리가 뽑자고 할 때 그 장로가 알곡이고 나머지는 가라지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 책임 누가 질 거예요? 그 생각해본 적 없습니까? 저 장로를 분명히 나쁘다고 했는데 만약에 그 장로가 알곡이고 나쁘다고 지적한 우리가 가라지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어디서 잘못된 겁니까?
실제로 이런 일이 사사기 마지막 장에 나옵니다. 베냐민 지파가 나쁘다고 공격했지요. 베냐민 지파 다 날아갔습니다. 뭔가 잘못되었어요. 자기는 정의라는 이름은 걸었지만 과연 우리 자신이 정의라는 말에 부합되는지 본인이 살필 능력이 우리 자신에게는 없습니다. 없으면 어떠냐? 간단하게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 살 때 기분대로 삽니다. 누가 잘해주면 기분 좋고 못해주면 적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왜냐? 천하보다 내 존재가 중요하기 때문에 나부터 우선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나한테 잘해주면 천사고 못해주면 마귀라고 잘못된 판정을 내리는 우리 자신이 이미 가라지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빼놓고 다 가라지지요. 알곡은?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대신 십자가 지시고 성령을 집어넣어주면 가라지가 알곡으로 변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때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가? 내가 상상한 주님이 나도 미처 몰랐지요. 그게 마귀의 본성인 것을.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마귀의 대장이라고 분류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예수님을 처리하는 그쪽이 천사인줄 알았어요. 바라바를 풀어줄까, 예수를 풀어줄까? 할 때 누굴 풀어줬습니까? 바라바지요. 그렇다면 묻습니다. 그 자리에 본인이 계신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 바라바입니다. 맞습니다. 누구도 예수님 편에 설 수 없어요. 왜냐? 의도적으로 다 끊어버리기 때문에. 나 같으면 예수님 편에 설 텐데. 그런 사람은 착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보입니다. 그냥 보이는 게 아니고 체포돼있습니다. 상황극입니다. 우리는 여기 앉아있습니다. 묻습니다. 저분은 내 구주라고 고백할까요, 나는 모른다고 고백할까요? 성경에 해답이 나와 있는데 어느 쪽이에요? 모른다고 할 때 정답 맞췄습니다. 갑자기 분위기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여러분, 베드로 개인의 실수가 아니에요. 베드로는 우리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권력에 포착되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 부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제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 이유에 대해서 제가 좀 알거든요. 진도 나간다고 좋은 것 아니니까 할 때까지만 하겠습니다.
이것 뭐죠? X가 수학이나 학문에서 뭘 의미합니까? 미지죠. 보이지 않는 미지의 것이라 할 때 X라고 하잖아요. 인간은 미지의 두려움과 공포에 둘러싸여 살고 있습니다. 뭔가 집에서나 여럿이 있으나 관계없어요. 개척교회를 하시든지 사업을 하든지 간에 어디서나 가만있는 그 순간도 항상 아우라처럼 미지의 공포가 두려움이 우리에게 밀려옵니다. 이것은 이유도 모르고 원인도 몰라요. 알 수 없는 공포에요. 얘가 공부를 잘해서 100점 맞았다고 달려올 때 잠시 기쁜데 이게 웬일입니까? 알 수 없는 공포가 우리를 둘러쌉니다. “쟤가 계속 잘해야 될 텐데 다음 시험에 90점 맞으면 어떡하지?” 알 수 없는 공포가 밀려옵니다.
우리가 남의 일이라고 쉽게 나 같으면 주님을 인정하겠다고 하지만 막상 그 현장에서 예수님이 체포됐을 때 내가 말한 것이 아니고 미지의 공포가 우리 몸을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무섭다, 겁난다, 이 땅에서 살 길은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나는 저 예수를 저주한다. 그런데 고마운 것은 이러한 형편을 누가 이해하십니까? 주께서 이해하시고 돌아보지요.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그때 퍼뜩 베드로에게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했지요. 진도 더 나가지 맙시다. 지금 중요한 대목이니까.
그 다음에 묻습니다. 베드로가 그 다음부터 예수님을 구출했습니까, 울면서 그 자리를 피했습니까? “주여, 제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왔나이다.” 이렇게 했습니까? 피하고 울었지요. 통곡했지요. 왜 웁니까? 구출하고 싶어도 그걸 할 용기가 없지요. 왜 용기가 없습니까? 그걸 제가 묻는 거예요. 인간은 누가 데려다주지 아니하면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야기했거든요. 마귀가 너를 지배하고 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제가 죽기까지 따르겠습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내가 기도하지 아니하면 너는 마귀의 손에 잡힌다. 이 말은 내가 기도하게 되면 결코 마귀가 공격해서 마귀에게 잡히지 않게 될 것이다. 그 말은 뭐냐? 자기 힘으로 예수님을 구출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증명하는 식으로 주께서 인도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 비겁한 자입니다. 절대로 아는 대로 실행에 옮길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점을 주께서 이해해주셔서 이미 다 영생 얻는 문제에 대해서 깔끔하게 해결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시다.
주님 믿으니까 내 힘으로 하겠습니다. 되도 않는 건방떨지 마시고요. 이천 명 모였으니까 천오백 명 될까봐 두렵고요, 삼천 명 됐으니까 이천 명으로 내려갈까 두렵고요, 재산 500억 가졌습니까? 300억 될까 두렵고요. 달랑 재산이 29만 원밖에 없는 사람이 있거든요. 전두환 전대통령. 20만 원밖에 없는 사람은 10만 원 될까 두려운 거예요. 그게 뭐라고요? 무슨 기호라고요? X에 휘둘리는 두려움에 감사합시다. 이 두려움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한계를 뽐내지 않게 하시는 겁니다. 이만하면 됐다고 했는데 강도 들어오고, 강도 퇴치하기 위해서 개 키웠는데 또 다른 일이 벌어질 때 이건 뭔가 됐다 싶으면 넘어질 수밖에 없는 또 두려움이 찾아오고.
도대체 해결책이 뭡니까? 해결책 알려드려요? 사도 바울 같은 마음 가지면 됩니다. “주여, 어서 죽여주옵소서. 제가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빨리 이 땅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빌립보서 1장. 내가 사는 것과 떠나는 것 가운데서 나는 떠나는 것을 원합니다. 하지만 못 떠나는 것은 여러분 때문입니다. 여러분께 봉사하느라 못 떠나는 것이지 제대하고 미치겠습니다. 하지만 주의 뜻으로 제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나를 죽인다? 그건 협박, 공갈도 안 돼요. 죽는 게 소원인데 고맙지요. 강도의 위협과 도적의 위협과 그것은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해요. 다만 주의 뜻 말고 주께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영웅심리에 의해서 호들갑을 떨면서 열심 내는 것, 주의 뜻이 지시도 안 했는데 뭔가 멋들어진 결과물을 내겠다는 것, 그런 것들이 오히려 주님을 힘들게 아프게 합니다. 주께서 일하시니 우리는 그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럼 목사님, 어떤 일을 하게 됩니까? 강의 듣다 조는 것도 주의 일입니다. 항상 소급해서 설명하세요. “주여, 졸았습니다. 주의 뜻에 감사합니다.” 믿으면 될 문제지 졸아서 마귀가 와서 말씀 빼앗고 되도 안 되는 소설 쓰지 마시고 모든 것은 머리카락 자라고 뽑히고 키가 자라고 다 주의 뜻입니다. 참새 보세요. 우리보다 훨씬 낫습니다. 개를 보세요. 오뉴월에 개 팔자. 개는 거의 암에 안 걸려요. 아무 걱정 없기 때문에. 미지의 X가 없어요. 개도 있을 수 있겠다. 어쨌든 간에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 우리 힘으로 해결 안 되는 두려움을 주셔서 우리 힘으로 구원받았다는 소리 못하게 하는 것, 이미 다하신 주님께 영광 돌리는 것, 이것이 나의 증인이 아니고 바로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31절, “또 비유로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묻습니다. 나무 되고 난 뒤에 씨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그 다음에 봅시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누룩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주님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안 보이는 분이 갈 수 없는 천국에 가도록 할 때 그런 관계가 천국의 관계지요. 그러면 그런 관계 되려면 안 보이는 분이 나를 도와주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끊어버려야 돼요? 모든 보이는 것을 부정해야 되겠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천하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할 때 천하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보이지요. 그걸 부정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 비유 말씀을 우리가 지킵니까, 못 지킵니까? 못 지킵니다. 이번에 삼촌이 도와주셔서 이렇게 회복됐습니다. 그러면 그 삼촌, 보이는데요. 그럼 누구 공로에요? 삼촌과 나의 좋은 관계가 어떤 큰 효과를 얻었다고 되잖아요. 우리는 그런 식이니까 어려울 때 아무리 친척끼리 싸워도 역시 마지막 어려울 때 일가친척이 도와줘요. 물론 일가친척이 안 도와주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리 자식이 어려울 때 결국은 마지못해 부모가 도와줘요. 아버지는, “이놈의 자식. 너는 내 자식 아니다. 호적 파가라.” 하지만 그새 엄마는 현금 싸 들고 몰래, “아버지 성질 알지. 내가 도와줄게.” 그게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세상나라입니다. 이런 식으로 천국 못 갑니다.
그러면 아버지한테 도움 받지 말고 주님한테 기도할까요? 아닙니다. 이렇게 해석하세요. 우리를 도와주던 어머니를 우리 주님이 보냈다.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참 편리하죠. 그게 사실입니다.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줄 때 얼른 받으세요. 엄마 마음 바뀌면 그것도 못 받습니다. 어려울 때는 그저 솔직한 게 최고에요. 그래놓고 누구한테? 엄마가 아니고 엄마를 보내주신 주님께서 누룩이 되셔서 제가 오늘도 주님의 혜택을 입고 사니 나는 도저히 내 힘으로 못사는 그런 존재임을 일깨워주심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제 말은 이 비유의 말을 지킨다, 못 지킨다? 우리 힘으로 못 지킨다.
그 다음에 봅시다. 13장 34절,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감추인 것을 드러낼 때 비유로 드러낸다. 비유의 말씀 끝에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말은 허락된 자와 허락되지 않은 자, 들을 귀 없는 자와 있는 자를 구분한 작업은 네가 하는 게 아니고 내가 한다. 따라서 네가 구원받거든 누구 공로다? 허락하시고 들을 귀 주신 오직 주님의 공로로 알아라. 그 말은 세상사람 믿지 말고 그리고 네 자신도 믿지 말고 너를 너 되게 한 주님께서 비유의 말씀 그대로 실천하는 과정에서 포함되어서 구원되는 거예요.
그래서 비유할 때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 비유는 주님이 던져놓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다 지켜놓고 마치 우리가 지킨 것처럼 우리에게 그냥 그 결과를 효과를 덮쳐버리면 우리는 비유 안에서 당당하게 천국 가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 비유의 완성은 바로 십자가로 드러나지요.
그 다음에 38절 봅시다.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앞에 있는 가라지 비유가 비유로 끝난 줄 알았는데 그 비유를 해석하는 조차도 비유가 되는 거예요. 비유의 확장, 비유의 연장이 되고 마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쪽에서 알아듣는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우리 쪽에서 알아듣는 것이 아니고, 낱말 하나에 이것은 천사고 이것은 원수고 또 보이지 않는 분을 붙여요. 우리는 보이는 내 힘으로 지키고 싶은데 보이지 않는 분을 붙이니까 역시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 밖에서 주께서 혼자 싸우시고 그 결과만 우리에게 그냥 무상으로 제공하는 식입니다. 그 작업에 우리가 말려든 것이죠. 우리의 동의도, 허락도 없이 해놓고 너는 내 전쟁의 여파로 전리품으로 구원됐느니라. 이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 원수는 우리의 원수가 아니고 주님의 원수인 것을, 그런데 주님의 원수를 우리가 압니까?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몰라요.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주님의 원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의 원수라고 하니까 반발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게 로마서 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경건치 않은 자, 죄인 된 자,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냐? 하나님의 원수 된 자를 예수님의 피로서 의인 되었다. 분명히 우리를 하나님의 원수 된 자로 넣는 거예요. 원수 된 자로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우리가 고칠 수 없는 육신의 소통하는 법칙인데 그것 죽을 때까지 절대로 버리지 못합니다. 갖고 있으세요. 우리 몸에 딱 맞습니다. 돈만 챙기고 지만 생각하고. 이런 우리를 주님이 그저 피로서 구원했다는 걸 알면 바로 우리 안에 성령 들어계신 겁니다.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시간은 지났지만 목사님께서 융통성을 허락해주셔서 제가 감사합니다. 여기에 44절 봅시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이 비유의 잘못된 해석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농부는 우린데 세상 살다가 우연히 발에 채였는데 보니까 교회더라. 가보니까 천국 소식이더라. 보물이었더라. 따라서 세상에서 살던 것에서 돌이켜서 교회 가서 신앙생활 잘해서 천국에 골인했다. 이것 잘못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를 우선시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이 있다는 식으로 해석했습니다. 주님이란 왜 있느냐? 나 잘 되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누가 우선입니까? 내가 우선이고 나 잘 되라고 예수님 있는 것, 그건 비유해석 잘못될 수밖에 없어요.
그 다음에 또 다른 잘못된 해석, 두 번째 해석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농부는 예수님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농부가 되셔서 귀한 보물을 챙겨다가 우리로 하여금 농부의 기쁨에 자기 성도를 집어넣었다. 굉장히 건전한 복음적인 해석처럼 들리지요. 내가 우선이 아니고 주님 우선처럼 해석되니까 참된 복음 같지요. 이것 아닙니다. 그럼 뭐냐? 존재로 해석하면 안 되고 농부가 누구며, 사람이 누구냐가 아니라 흐르는 과정 자체가 예수님의 작업입니다.
어떤 사람이 밭을 갈든지 하다가 거기서 보물을 발견했다. 기뻤다. 어떤 희생의 대가를 치러서 얻었다. 그 과정이 귀한 것 놓치지 않고 반드시 찾아내서 기뻤다. 그 기쁨이 우리 주님의 기쁨입니다. 따라서 그 기쁨이 속에 있으면 우리가 구원받았으면 이런 주님의 기쁨이 우리 자신의 기쁨으로 주어지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새삼스럽게 이 사람이 누구냐? 이렇게 되면 과정으로 설명할 것을 존재로 설명해버리면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존재만 인정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존재를 믿어야 될 나라는 존재도 인정하면 아무리 예수님 위주라 하지만 결국 예수님 위주라고 하는 내가 위주가 되는 것이 인간의 사고의 한계거든요.
여러분, 아내를 사랑한다는 말이 진정으로 아내를 사랑한다고 보십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도 사랑 받았으면 사랑 값을 해서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해야지. 하는 요구가 포함된 사랑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은 손해 보는 장사 안 하거든요. 명품 사줬는데 헤어지자. 이건 화나지요. 사주기 직전에 헤어졌다. 이건 기쁘지요. 사줬는데 얼른 받고 우리 헤어져. 이거는 남자들이 미칩니다. 뭔가 사기 당한 기분이 들잖아요.
이건 여자 쪽도 마찬가지지요. 못 배운 주제에 접대부로 있으면서 사랑하는 남자를 법대 나와서 사법고시 합격시켰는데 그 남자가 연수원에 다니면서 다른 연수생과 연애해서 자기를 버렸다. 이것 <별들의 고향>이고, 이것 실화입니다. 얼마 전에 있었거든요. 결국 그 여자는 남자를 사랑했습니까, 사랑 안 했습니까? 오늘 중요한 문제인데 사랑했어요, 사랑 안 했어요? 사랑 안 했지요. 내가 그 남자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했지요. 그것을 정복욕, 소유욕이에요. 사랑이 아니고 소유욕을 발휘해놓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포장한 겁니다. 이런 자기 사랑에서 아니라고 할 사람이 있겠어요?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사랑하면서도 계속해서 미지의 두려움이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쁨은 우리가 참여할 수 없고 주께서 십자가 지시면서 네가 이 기쁨에 참여할 수 없다고 꾸짖으면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했을 때 나는 이 말씀에 있지도 않은 자에게 무상으로 이 기쁨을 주니 사랑도 못해놓고 사랑을 받는 그런 입장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기쁨, 그 기쁨이 바로 이 기쁨입니다.
보물은 우린데 그렇게 한 개념에 존재 하나를 집어넣지 마시고 대입하지 마시고 전체에 흐르는 과정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같은 내용이 그 다음에 나오는 비유, 어떤 보석상하는 사람이 귀한 보석 얻고 기뻐했다. 누가 기뻐했습니까? 혼자 기뻐했지요. 주님 혼자 기뻐하신 거예요. 과정에서 주님이 기뻐하는 과정에 우리가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내 기쁨 말고 주님의 기쁨이 따로 있음을 깨닫는 식으로 우리는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겁니다.
너무 갈수록 설명이 부실하고 성의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여러분 실력을 믿으니까 그냥 넘어가고 마지막 끝으로 하나만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비유가, 천국은 마치, 보세요. 이건 설명해야 되겠어요. 천국은 마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존재하는 것처럼 그 자리에 물건이 있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그런데 제가 방금 뭐라고 해석했습니까? 천국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과정으로 흐름으로 있는 거예요. 흐름에 휩싸이면 여기가 천국이네 하고 느끼는 겁니다. 천국이 따로 있으면 우리는 그걸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거든요. 그런데 천국이 흐름 같으면 우리도 같이 흐름이 되는 거예요. 살아가는 과정 자체가 천국의 기쁨에 포함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꾸 좋은 것을 가짐으로서 내 안에서도 계속 좋다고 여기는 그런 버릇으로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말 어렵게 하지 말고 쉽게 합시다. 하늘의 파랑새가 예쁘지요. 그 예쁜 것을 손에 잡으면 예쁩니까? 비린내 나요. 멀리서는 아름답지만 내 손에 파랑새는 예쁘지 않아요. 온통 냄새납니다. 사람들은 자꾸 행복을 소유하려고 했어요. 살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행복한데 남이 가진 소유물을 나도 가지면 같이 행복하겠다고 여기는 자체가 이것이 행복을 날려 보내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미지의 두려움이 같이 찾아오게 돼있어요. 이것 잃으면 안 되는데. 돈 가진 사람의 걱정이 뭐냐? 가진 것 날아 갈까봐 걱정이에요. 걱정이라도 갖고 싶지요. 걱정은 걱정이고.
그 다음 마지막 비유가 뭐냐 하면, 47절,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언제 말입니까? 세상 끝이지요. 끝의 일을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52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라고 돼있어요.
결국 이 모든 이야기는 신약과 구약, 마지막 때 모든 것을 최종 정리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나는 지금까지 비유로 이야기했다. 곳간에 있는 것을 가지고 온다. 피동적이죠. 우리는 피동적이에요. 우리는 곳간에 있다면 주께서 분류해서 좋은 고기는 따로 나쁜 고기는 따로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야곱이 착한 일을 하기 전에 에서가 나쁜 일을 하기 전에 이미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걸 구체화시킨 것이 인류역사고 역사 속에 야곱과 에서가 실제로 나타났고. 결국은 구원받는 것은 누구의 권한이며 누구의 일방적인 권리행사입니까?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허락된 사람만 구원받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기분 나쁘십니까? 그렇다면 그건 나쁜 고기고, 여기에 대해서 고맙다고 하면, 그것은 좋은 고기가 되는 겁니다.
바로 주님이 자신이 던진 말씀을 스스로 십자가까지 지고 가면서 스스로 완성해놓고 소급해서 나는 전에 이런 비유를 던진 적이 있지. 그 비유가 성령 안에서 이미 그것이 완료가 되었기에 너는 죄 지었지만 나로 인하여 깔끔하게 정리되어서 말씀 지킨 사람으로 간주되어서 천국에 합류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과정입니다.
어디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택한 백성을 끄집어내는 그 과정, 주님만이 할 수 있는 과정을 우리는 지금 뒤늦게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주님 홀로 하셨다고 고백하면서 주님을 찬양하면서 우리는 지금 남아있는 인생에 비유의 혜택이 덮치는 가운데서 즐겁게 기분 편안한 가운데 이미 결과가 끝난 상태에서 드라마 재방송 보듯이 축구 재방송 보듯이 즐거운 마음으로 “주여, 이렇게 못난 인간을 십자가로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비유의 완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던진 말씀을 홀로 이뤄주시니 우리는 웬일인가 싶었는데 따지고 보니까 우리는 나만 우선 챙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바뀌려고 해도 이 성질 죽을 때까지 안 바뀔 걸 미리 아시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말씀 취지에서 죄인 되게 하셔서 용서하시니 용서하심에 대해서 다시 감사하고 찬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질문 있으면 하십시오.
-우선 천국 비유를 해주시면서 알곡과 가라지부터 과정을 얘기하셨거든요. 그전에는 과정이란 말씀 안 하셨는데 전환점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요. 군데군데 들어가는 주께서 주신 구약에서 인용된 말씀을 집어넣을 때 처음에 인용한 것이 이사야 6장이죠. 너희는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이건 총괄적으로 일방적으로 내가 이뤄가는 것이다. 너희는 끼지 마라. 너희는 하나님 원수인 것도 분간 안 되고 마치 예수님 편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런 식으로는 내 작업에 못 낀다. 내가 하겠다.
그 다음에 두 번째 비유로 이야기하신 것은 그 비유의 과정 속에서 우리가 수용되고 참여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처음에는 물체로 이야기하지요. 나중에는 뭡니까? 어떤 사람, 보석, 장수, 드디어 사람 이미지가 강렬하게 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고기로 나는 사람을 분류하면서 지옥 갈 사람은 이렇다는 걸 보여주면서 너는 천국 오너라. 저 사람이 지옥 가는구나. 아울러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나는 저 사람을 지옥 가도록 하지 않았는데 주께서 지옥 가게 하시는구나. 그렇다면 이 조치는 이 분류는 내가 한 게 아니고 주님께서 하셨다면 내가 천국 가는 것도 내가 선택해서 가는 게 아니고 저 사람이 지옥 가는 분류의 능력에 동일하게 나는 지옥 쪽이 아니고 천국 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그리고 이 말씀과 더불어 기적이 일어나면서 구체적으로 인간과 직접 맞닥뜨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끝나면 이야기하는 게 있어요. 여러분들이 그냥 사세요. 사시면서 자신이 얼마나 아무리 말씀 지키고 싶어도 못 지킨다는 정도는 착한 사람이에요. 그게 아니고 지킬 마음이 없어요. 왜? 살기 바쁘니까. 사람 낳고 돈 낳기 때문에 사람이 중요하다고요? 그건 구색에 불과하고 실제로 내가 중요한 것은 돈이 최고 중요하고 내 명예가 최고 중요하다는 그러한 모습을 살아가면서 보이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재방송이지요. 죄인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작업에 참여된 사람이에요.
우리가 흔히 말하잖아요. 저 사람은 불쌍하다. 용서해 달라. 주께서 너나 잘하세요. 남 불쌍하다고 하지 말고. 생각해보세요. 불쌍함의 정도가 뭡니까? 사람마다 다 달라요. 어디 일방적으로 자기 기준을 남한테 적용시킵니까. 우리 집 개나 옆집 개에게 수작 걸다가 거절당할 때 우리 집 개가 너무 불쌍해. 우리 얘가 코 파다가 코피나면 불쌍하잖아요.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그게 어른들 보기에 불쌍함에 들어갑니까? 안 들어가잖아요. 다른 사람은 그것보다 더 불쌍한데.
그러니까 우리는 자꾸 나를 정당한 기준을 동원시키게 돼요. 그런데 그것이 문제 있는 게 아니고 그렇게 하게 하셨던 거예요. 뭐든지. 나는 예수 믿었다고 자신만만했는데 주께서 일으킨 상황 속에서는 그게 전혀 믿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믿음이 아니고 사랑한 게 사랑이 아님을 들춰내는 그런 사태가 우리에게 자꾸 밀려옵니다. 그런데 그게 이상한 일이고 잘못된 길로 가는 게 아니고 그게 정상이에요. 자꾸 주님께 감사하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미 구원이 허락된 사람이라면 제가 만약에 중보적 기도를 할 때 이미 이 사람은 지옥 가려고 결정한 사람이라면 내가 이 사람을 위해서 구원을 해달라는 그런 기도는 잘못된 기도인가요?
인간의 어떤 기도도 다 잘못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중보기도를 시킨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만 중보기도하지 다른 사람은 중보기도하면 안 돼요.
-하여튼 어떤 가족이나 어떤 친척이나 이미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은 허락된 사람이잖아요(그럼 존재가 돼요). 제가 만약에 주의 의지로 이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해서 계속 기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요?
대상을 내가 정했다는 것이 잘못이죠. 주님의 기도 대상은 이미 정해져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미 정해져있는데 우리의 기도 범위 내에 원수가 포함될 수 없지요. 왜냐하면 원수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원수가 발생돼야 되는 거거든요. 원수가 없는데 기도 못하잖아요. 주이 말씀대로 하면 원수가 있어야 되죠. 그런데 원수를 내가 사랑해버리면 그 사람이 원수에요, 동료에요? 내가 사랑한 순간 원수가, 원수가 아니고 나의 동료가 돼버렸죠.
-그럼 우리의 기도는 어떻게 해야 되나요?
그건 우리의 본성이죠. 우리의 본성은 날 위해서 기도하게 돼있어요. 마태복음 6장에 우리는 나한테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내가 정합니다. 쇼핑할 때 “주여, 뭐든지 사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안 하지요. 이것은 살 것, 안 살 것을 내가 하지요. 기도할 때도 내가 정하잖아요.
-그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기도할 때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 백성을 구원했거든요. 멸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
모세 안에 예수님이 들어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선지자 안에 예수님의 영이 들어있기 때문에 모세는 그렇게 한 겁니다.
-사람들이 하는 어떤 중보기도는 그런 것은?
하나님은 우리 기도에 일체 응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계속 기도하기 때문에. 기도는 사건이어야 되는데 사람의 기도는 재주가 되고 말았어요. 기도 시작, 끝. 재주가 되는 것은 숙달된 기능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기도 외에는 이러한 이적이 없다고 한 그 말씀은 무엇인가요? 누가복음에서.
그 말이 제 말인데요. 주님이 사건을 일으켜서 하는 기도, 그 기도하는 당사자는 절대로 내가 기도했다는 생각이 들 수 없지요. 왜? 주님이 직접 나한테 관여했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이 관여하지 않고 마음을 답답할 때는 기도할 수밖에 없는데 기도할 때부터 결과를 우리가 예측하잖아요. 그럼 내 뜻대로 마옵시고에 해당 안 돼요. “내 뜻대로 해주옵소서.”라고 협박조로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지금 기도하면서 사람은 그냥 기도하는 게 아니고 기도하는 내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해 달라는 요구가 함께 들어있어요. 그게 문제라니까요. 기도했는데 안 들어주기만 해봐라. 그 마음이 함께 들어있어요. 그런데 제가 강의 끝나면서 뭐라고 합니까? 그게 우리의 본성이에요. 하시라고요. 기도를 하세요. 한이 맺혔는데 터뜨려야지 안 터뜨리면 암 걸립니다. 터뜨리되 의미두지 마세요.
히브리서 7장 25절, 본인이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그는 항상 살아있어서 저희를 위해서 기도하지요. 주님의 기도가 응답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되지요. 우리 응답이 왜 필요하지요? 우리 대신 100% 응답되는 분이 기도하고 있는데 내 기도가 왜 필요하냐 이 말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뭐냐 하면, 내가 원하고 내가 보고 싶은 것에 대해서 한이 맺혔기 때문에 기도 안 하면 답답해서 못 견뎌서 기도하는 거예요. 답답할 때는 기도하세요. 하시고 그 가운데서 내 기도는 의미 없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해주세요. 그리고 마지막에 내가 기도했다고 하지 마시고, “주님이 내 안에서 기도했습니다.”라고 하면서 이 모든 것을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붙이세요.
답답한데 가만있다? 이건 폭발합니다. 그러지 마시고 우리의 기도를 일체 듣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기도하세요. 답답하면 달라 하지요. 강권 하에 하세요. 강권 하에 하시면 주께서 응답하십니다. 어떻게 응답하는 줄 알아요? 네 기도 개판이다. 내 기도 때문에 산다는 응답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아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일 2부 예배 때 설교할 걸, 뉴저지교회 11시 예배 설교제목이 [주기도문]이에요. 중보기도 없다는 것 이야기할 거예요. 중보자가 있는데 중보자도 아닌 우리가 왜 중보기도해요. 성경에 도고란 좋은 말도 있는데 왜 갑자가 중보기도가 유행됐는지. 이것은 “여러분, 자신의 행위는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 행함이 왜 가치가 있어야 돼요? 큰일 날 일이거든요. 주님이 피에다 우리 행함을 섞으면 이건 복음이 아니에요. 그런데 사람은 복음이 아닌 걸 왜 그리 좋아하는지.
그래서 기도한 내용이 뭐냐? 가까운 사람, 내가 사랑한 사람, 이 사람들 이야기하니까 뭐는 빠집니까? 사기 친 놈, 도망간 놈, 이런 것을 위해서는 기도 안 해요. “주여, 저주받게 하옵소서.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나게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하지요. 그게 무슨 원수에 대한 사랑이에요.
우리 성질 드러내세요. 그리고 이미 주께서 그걸 이해하시고 다 아시고 조치 해놨습니다. 우리 인생은 재방송입니다. 이미 구원받고 난 뒤에 재미로 인생 살아보세요. 보시면 모든 것이 어설프기 짝이 없습니다. “오년 전에 목사님 강의할 때 기도했지.” 돌아보니까 그것도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 이렇게 하면서 돌아보는 즐거움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제가 어제 뉴저지교회에서 마지막 한 이야기가 전도서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즐겁게 사세요. 세상에 이런 긍정이 없어요. 즐겁게 살고 마음대로 사세요.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할당된 복입니다. 이미 합격했는데 시험 문제에 벌벌 떨지 마시고 미지의 은사 앞에 농락당하지 마세요.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늘 그랬으면 좋겠는데 늘 오지는 않아요. 어쨌든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그러면 왜 주께서는 이런 사랑이 늘 오지 않느냐? 누비이불 알지요. 바늘이 들어갔다가 올라왔다가 하지요. 그럼 이불 완성되고 난 뒤에 실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실이 들어갔던 점 같은 것만 있지요.
군데군데 주의 십자가를 알지 스물네 시간 온종일 십자가 생각합니까? 안 하지요. 하지만 가끔 뭘 생각합니까? 자기가 너무 어려울 때 자기가 너무 죄의식을 느낄 때 “주여,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다가 오, 십자가. 이미 구원받았잖아. 그게 바늘 들어간 구멍이에요. 누비이불이에요. 실은 안 보여도 들어간 구멍은 보이거든요. 우리 몸에 촘촘히 성령이 들어간 자국이 있어요.
나는 십자가 흔적을 가졌으니 나를 무시하지 말라고 갈라디아서에 나오잖아요. 십자가 들어있는 장착돼있는 흔적이 예상 밖에 남 같으면 절망할 텐데 “나 죽을 거야.” 하다가 “이미 용서했다는데 내가 왜 죽어. 그런데 이 느낌은 뭐지? 성령께서 내 안에 있으니까 이런 능력을 주셨구나.” 돌아보면서 우린 느끼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한테는 실패가 없어요. 실패, 성공이란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 성공이 어디 있고 실패가 어디 있습니까? 그걸 따진다는 자체가 우리는 없습니다. 그냥 사시는 대로 주께서 굴러가는 대로 사시면서 세상 유람하시다가 소풍 왔다고 생각하고 사시다가 주님 부르실 때 군대생활 힘들었다고 제대하게 되면 거기 거지 나사로 만나게 돼요. 그 심정 이해하게 됩니다. 축구 후반전 있습니다. 전반전 다 아닙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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