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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미국뉴저지1부예배 본문

해외 특강/14미국 강의

미국뉴저지1부예배

정인순 2014. 11. 25. 14:47

뉴저지1부예배 

 

녹취:한윤범

20141005 미국뉴저지1부예배

(강의:이근호 목사)

 

 

-[나실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들으시겠습니다. 목사님 나오셔서 말씀을 전하실 때 쉽지는 않지만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본 게 구약성경입니다. 구약성경은 옛날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지금 21세기에 살고 있습니다. 옛날이란 지나간 거죠. 지나간 걸 생각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구약성경은 지나간 것이다. 따라서 현재와는 별 상관이 없다고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약성경을 펼쳤거든요. 우리가 현재로부터 시작하지 않는 것들이 우리 현재 안에 요소로 있습니다. 이 요소가 빠져버리면 내가 누구인지를 몰라요.

 

그라운드에 있는 요소가 표면으로 솟아오르는데 그것은 우리가 만들지 않고 우리가 개시하지 않았던 우리가 출발하지 않았던 그 무엇이 이미 우리 속에 층층이 깔려있습니다. 그 깔려있는 것의 효과를 누려서 지금의 우리 존재로 삶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 그라운드가 어디서 뻗어 나오는지는 구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로부터 우물을 팝시다. 우물을 파서 그 우물로 구약까지 어떻게 지하에 뻗어 있는지 생각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요즘 한국에 전봇대 지중화사업이란 게 있습니다. 지상의 전봇대를 지하로 묻는 공사입니다. 그 공사를 하다보면 아스팔트를 뒤집게 돼있는데 거기에 케이블선, 전화선, 전선 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살기 바빠서 몰랐던 우리의 단면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단면을 쪼개고 공사를 하게 되면 우리 자신의 노동으로 개시된 것이 내가 아니고 이미 일찍부터 내가 있기까지 내가 솟아오르기까지 뭔가 밑에 깔려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로마서 5장에서는 이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자손이다. 아담이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면 그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선악과 구경도 못했습니다. 왜 구경도 못한 사람한테 책임을 물어야 합니까?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의 뿌리를 보세요. 당신의 그라운드를 보세요. 이미 그것이 아담까지 뻗어있습니다. 아담이 범죄 한즉 모든 인간이 다 범죄 했고 죄의 왕 노릇하매 당하게 되고 이유도 모르는 채 죽어야 될 우리 죽음이 아담의 죽음에서 전수되어 그 죽음에 합류돼있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돈 번다고 코앞만 보지 마시고 성경, 우리의 진실, 우리의 뿌리, 이것은 세상의 소설이나 학문이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가 창세기부터 우리가 현재 어떤 식으로 해서 지금의 존재가 됐는지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영광이요? 위만 쳐다본다고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밑을 봐야 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이라고 했을 경우에 우리는 십자가를 본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속에 십자가가 들어있어서 예수님의 피가 마치 배선처럼 깔려있어서 피가 흐르는 존재의 바탕 위에 우리는 현재 하나님의 성도가 되었습니다. 성도가 자기 잘나서 기도 열심히 해서 된 게 아니고 이미 피의 효과를 보고 있는 거예요.

 

그 뿌리가 나에서 보이지 않고 그 십자가는 어떻게 해서 내 안에 들어오게 돼 있느냐? 그것은 바로 그 앞에 예레미야, 그 앞에 사사기, 그 앞에 민수기, 그 앞에 창세기, 우리 안에 이미 성경이 깔려있고 이 세상을 움직이는 모든 움직임 하나, 하나님의 경영은 말씀에 입각해서 이뤄지는 겁니다. 태어났다가 사라지고 풀처럼 없어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있으리라. 너희들은 풀의 영광이지만 사라지는 그 자체가 말씀을 말씀대로 부각하기 위한 하나님의 과정 속에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민수기 6장을 볼 이유가 생겼습니다. 민수기 6장을 펼쳤는데 낯선 용어 나옵니다. 저는 이 나실인을 볼 때마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어머님 사랑, 그런 식으로 외웁니다. 나실인이란 구별된 자란 뜻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편적으로 주신 제사법 있습니다. 십계명 있습니다. 다같이 지키면 됩니다. 그런데 왜 민수기 6장에서 서원하여서 나실인처럼 서원하는 자는 규칙에 의해서 나실인으로 그 모습을 보이라는 지시가 왜 있어졌느냐 하는 겁니다.

 

이쯤해서 설교 다시 해야 됩니다. 우리교회도 늦게 온 사람 있습니다. 요약해서 다시 설명해서 맥락 따라가도록 일단은 노력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현재 살면서 과거를 생각해야 되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 말고 밑에 배선이 깔려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피, 하나님의 말씀이 깔려있습니다. 깔려있다 보니까 이스라엘을 만나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율법을 줬다고 하니까 그들이 지켰겠지 하는 겁니다. 그런데 독특한 것이 있습니다. 나실인 제도가 있는데 우리는 그걸 몰라서는 안 되지요. 왜 있느냐?

 

나실은 제도는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라고 만든 겁니다. 어떤 인간이 1절에 서원한다고 하는데 서원한다고 할 때에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의 희망이나 기대나 욕구, 아주 경건해 보이는 욕구를 달성하기 위해서 “주여, 저 서원합니다. 아들 낳으면 신학교 보내서 목사 되도록 바치겠습니다.” 이렇게 서원하는데 그건 개인적인 요구고요. 그렇게 개인적인 요구는 이스라엘 전체의 변화를 주지 못합니다.

 

나실인이란 요새 유행하는 일탈? 다들 그렇고 그렇게 살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의 규격 안에 알고 있는 바대로 살아가는데 여기서 돌출부분이 나와요. 일종에 다이빙대라고 생각하시면 좋습니다. 나실인 제도가 삐져나와서 삐져나온 사람은 현재에 만족하고 현재가 마치 완료된 것처럼 그렇게 여기는 것에 대해서 미래지향적으로 그것을 이끌어가는 그러한 사명을 띠고 나실인 제도의 서원을 하게 돼있어요.

 

그것은 마라톤에서 선두주자 또는 군에서 향도라고 합니다. 여러 군집 가운데 집단 가운데서 독특하게 하나를 앞장세워서 “지금은 향도 뒤로 헤쳐모여!” 하면 여기 이 공간에 있던 것이 순식간에 이동해서 향도 중심으로 어떤 변화를 야기 시키는 겁니다. 변화를 주는 거죠. 그러면 향도 역할을 하는 것은 기존 현실에 자족하고 만족해서 그것이 전부라고 여겨버리면 예수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 이스라엘의 계시는 움직이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만날 때까지 이스라엘을 계속 역사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향도 같은 역할의 임무를 담당한 자가 나실인이에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항공모함 같은 이스라엘이 보수적인 체제를 가진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리스도와 접근할 수 있느냐? 그 내용은 나실인 하라는 그 규칙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 규칙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규칙을 오늘 본문에 보면 세 가지인데 또 읽으면 길다 귀찮다 해서 친절한 제가 줄여드립니다. 포도에서 나온 것은 일체 먹지 말라. 두 번째, 가족들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마라. 죽은 시체와 가까이 하지 말라는 거죠. 세 번째가 그동안 머리카락 자라도록 방치하라.

 

제시어 세 개 나왔습니다. 포도 관련 음식 안 먹기, 시체 가까이 하지 않기, 그리고 머리카락, 이 세 가지 주제를 주고 여러분이 짜 맞추어 통일된 문장을 만들어보시기 바랍니다. 5초 시간 드립니다. 힌트 드렸습니다. 항공모함 같은 보수적인 이스라엘 체계를 그리스도로 접근하는 방식입니다. 그 세 개가 주동적인 동력 역할 하는데 여러분 아이디어로 그 세 개를 연결시켜보시기 바랍니다. 5초 더 드립니다. 땡, 시간 끝났습니다.

 

포도를 먹지 말라는 것은, 포도는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노동으로 생산물을 낼 수 없는 것이에요. 그 땅 자체가 특수한 땅인데 그 땅을 약속의 땅이라 합니다. 약속의 땅은 조건이 붙는데 약속대로 말씀대로 행할 때만 하나님께서 적절한 농사가 되도록 하는 그런 조치가 되는 가동되는 땅이 약속이 땅입니다.

 

그 약속의 땅이 제대로 가동되었다는 증거는 마지막에 젖과 포도주가 풍성하게 맺힐 때에 모든 것은 우리의 노동의 대가가 아니고 주의 말씀의 실현에 의해서 우리가 공짜로 얻어먹었다고 해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쳤던 그 땅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포도 생산물에 대해서(하나님의 은혜죠) 생산물을 중심으로 결속돼있는 단체가 이스라엘입니다. 약속의 땅은 농산물에 의해서 결속돼있는 그런 단체,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니까 나실인은 포도와 결속된 그것을 의도적으로 벗어난다는 것은 그것이 해체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 쪽으로 이스라엘 완성 쪽으로 1미터도 이동할 수 없다는 것을 나실인은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면서 이게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에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여기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향도 같이 한 사람 튀어나와서 “나, 포도에 관한 모든 것은 거기서 벗어나겠어.”라고 다이빙대에서 혼자 점프하는 것처럼 다이빙대에 나가는 겁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조건, 가족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말고 시신을 만지지 말라는 것은 이스라엘 나라가 아브라함의 혈육과 관련된 나라입니다. 할례를 행함으로써 혜택을 입는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인데 그 민족에서의 죽음에 가까이 가지 말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장차 혈육과 무관한 다른 죽음과 다른 생명과 관련된 나라로 접근해 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이 몸 말고 다른 몸 주시는데 그 몸의 죽음과 그 몸의 부활로 말미암은 생명에 도달될 때 이스라엘은 완성이 된다는 것을 앞당겨서 그림자처럼 이스라엘에게 나실인이란 모습으로 그 정보가 담겨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집안 잘됐네. 복 받았네.” 여기에 안주하고 멈추면 안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12장 끝에 보면, 예수님 설교하실 때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을 때 섭섭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모친이고 누가 내 형제냐? 듣는 어머니, 듣는 형제들 참 섭섭했을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너희들이 나의 가족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직 구약입니다. 그들은 혈육중심으로 우리 혈육과 이방 혈육을 구분하면서 그들은 자기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키웠던 겁니다. 그런데 나실인만큼은 거기서 빠져버립니다.

 

세 번째, 머리카락은 어떻게 관련된 개념이냐? 머리카락은 바로미터에요. 포도에 관련된 것은 먹지 않고 혈육의 장례식, 죽음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과연 지켜내는지 얼마 동안 짘녔는지 그 기간을 측정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머리카락을 사용했습니다. 저울이나 온도계를 사용한 것이 아니고 머리카락을 사용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민수기 6장 18절에 보면,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 문에서 그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 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라고 돼있습니다. 이스라엘 제사법에서 제물은 일체 인간의 것이 손 타서는 안 되고 거기에 합류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이고 제물은 의롭기 때문에 의로운 제물에 죄가 섞이면 안 되는 겁니다. 하지만 유독 나실인의 머리카락은 거기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특별조항입니다.

 

나실인이 기존의 안주에서 벗어났다는 그것을 제대로 지켰을 때 지킨 만큼 기간이 있을 것이고 그 기간에 자란 머리카락을 잘라서 현재 안주함에서 벗어난 미래지향적인 그리스도, 메시아를 향하여 갖고 있다는 그것을 화목 제물 밑에 섞어 넣음으로 말미암아 기존에 인간의 힘으로는 그리스도, 천국까지 갈 수 없는 것을 이제는 머리카락이 포함된 나실인 같은 그런 인격과 거룩한 제물이 합류해서 제물의 반복에 의해서 점차, 점차 마지막 마무리 제물, 예수 그리스도의 제물까지 접근해가는 방식을 하나님을 사용했습니다.

 

디트로이트 공항에 보니까 전동차가 달려요. 전동차는 달리고 승객들은 기다리고 있어요. 이스라엘은 기다리고 있지요. 제물은 메시아 완성을 향하여 달리고 있습니다. 거기에 누가 탔느냐? 우리 말고 우리를 대표한 나실인의 머리카락이 거기에 포함돼있으면 나실인 제도의 의미를 예수님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해서 믿는 사람은 비록 자리에 앉아도 구원받습니다. 예수님 때에. 그런 구조에요. 구약구조가.

 

그렇다면 포도주란 그 당시에 재산이죠. 그런 것에서 이탈하고, 혈육에서 벗어난다? 혈육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완전히 지켜졌다는 것이 확정된 증거물로 머리카락이 합류된다면, 이 말은 결국 뭐냐 하면, 우리도 우리 자신의 혈육에서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니까 육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누구든지 하늘나라를 볼 자가 없다는 요한복음 3장 8절의 말씀을 지금 앞당겨서 구약말씀 속에 들어있다는 암시를 여러분은 받지 아니합니까?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인데 육으로 같은 일가친척이라고 떼써서 갈 수 없다 이 말이죠. 내 동생이라고 내 부모라고 갈 수 없는 거예요. 육에서 난 것은 육이니까 다시 태어나서 영으로 가야 되는데 그것이 신약에서는 영이지만 구약에서는 뭐냐? 나실인 제도거든요. 나중에 나실인 제도와 하나님의 신이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냐? 삼손이에요. 손이 세 개는 아니자만 하여튼 삼손입니다. 삼손은 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태어났어요.

오늘 민수기 6장에서는 본인이 자원하지만 삼손 시대에 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먼저 제안해서 없는데서 마노아 가정에 나실인을 투입시킵니다.

 

그 삼손은 자기가 나실인이 됐지만 그 힘을 여자 밝히는데 사용하고 말았습니다. 힘이 있으니까 그 힘을 자기를 위해서 쓴 거예요. 나실인 되고자 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나실인 된 삼손의 꼴좋습니다. 하나님 명예와 관련돼있거든요. 하나님에 의해서 천사가 마노아 가정에 일방적으로 나실인을 만들어줬는데 여자 밝히는데 몰두하더란 말이죠.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사자를 찢고 수수께끼를 내고 했지만 그건 전부다 여자를 소유하고 장악하는데 써먹었단 말이죠. 하나님이 실패했습니까? 머리카락은 자라나고 힘은 세고 그 힘은 자기가 원하는 여자를 더 강한 힘으로 빼앗는데 소모했을 때 그 여자 쪽에서 기다린 것은 마귀였고 블레셋이었습니다. 지금 가자지역에 있는 팔레스타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획한 삼손의 계획은 끝난 겁니까? 머리카락이 잘리고 눈알이 파였을 때에 비로소 나를 위한 나실인이 아니고 내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한 힘이 아니라 새로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러한 나실인인 것을 깨닫고 기도해서 잡아당겨서 자기가 죽었습니다. 그때 죽인 사람이 삼손이 살아서 죽인 사람보다 더 많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나실인의 완성은 바로 나실인 자신이 죽는 그 경우 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삼손은 미리 앞당겨서 보여줬습니다. 나도 구원하고 당신 구원이 아니라 내가 죽었을 때 삼손이 죽어서 삼손을 구원한 것이 아니고 나실인의 위치에서 나실인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죽이신 사명의 자리에서 죽음이 발생할 때 그 죽음만이 이스라엘이 탄생하는 유일한 장소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아니하면 열매 없다는 요한복음 12장 25절의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현하는 거예요. 전동차가 그런 전동차에요. 죽음을 실어서 하늘나라로 보내는 겁니다. 산 사람은 못 갑니다. 죽은 자만 합류하면 천국 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율법이란 것이 나실인만 그러냐? 그렇지 않습니다. 신명기 21장 19절에서 21절 말씀을 제가 잠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저는 성도님들이 성경 찾는 그 수고를 아주 안타깝게 여겨서 보통 제가 대신 읽습니다. 성경 찾는 게 얼마나 귀찮습니까? 귀찮은 것 제가 대신 하겠습니다.

 

신명기 21장 18절에 보면,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제가 구지 설명하지 않더라도 여러분들 다 귀 두 개씩 달렸으니까 보면 알겁니다. 집안에 자식이 말 안 듣거든 그를 내 새끼라 하지 마시고 마을회관에 내놓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돌로 쳐 죽이란 말입니다.

 

지금 한국에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은 중학교 3학년 수학을 선행 학습합니다. 외국에 주재하던 아들들이 특례 입학했다고 좋아했지요. 고등학교 특례 입학하고 대학교 특례 입학해봐야 기초가 안 되서 못 따라갑니다. 도로 미국에 오고 난리 납니다. 선행학습하고 있어요. 초등학교 5학년이 중학교 3학년 삼각함수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해외자녀들 못 따라갑니다. 그런데 그 자식을 죽여요? 미쳤어요? 내 혈육인데. 이게 팩트에요. 이게 하나님 말씀입니다.

 

“내 새끼를 누가 건드려?” 이건데 성경말씀은 그게 아니고 하나님 말씀 안 듣거든 네 손으로 죽이지 말고 공개적으로 죽여 버리라고 합니다. 어느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말 안 듣는다는 이유로 마을회관 앞에 내세워서 돌로 쳐 죽이는 그 광경을 보고 그것을 잘했다고 스스로 자위할 수 있는 부모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사람들은 참 비겁해. 꼭 지가 지킬 만한 것만 지키는 거예요. 온유와 화평하라니까 지킨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의 이런 말씀은 왜 안 지키지요? 골라, 골라, 골라서 지킵니까? 성경이 마트에요, 백화점입니까?

 

부모가 자기 자식을 보호하기는커녕 남의 손에 의해서 죽이라고 내놓는다는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지 아니하면 그건 산 자가 아니고 죽어 마땅하다는 본인이 인정하는 것이고 동시에 그 자식이 죽는다는 것은 아버지 자신이 맞아죽는다는 것을 동의한다는 뜻이에요. 그 자식의 죽음으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그 마음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그 심정과 부합되고 일치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손으로 이삭을 바치는 것은 그 구조가 장차오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로마서 8장의 그 말씀을 미리 앞당겨서 모형으로 보여준 것이에요. 누군가 죽지 않으면 아무도 살 수 없다는 그 원리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비정상이라는 거예요. 우린 비정상인데 말씀만 덮으면 정상이에요. 말씀을 펼치면 비정상입니다. “아이고, 겁나라.” 얼른 덮어버려요. “저, 그 말씀 안 받습니다. 안 본 걸로 쳐주세요. 저는 정상으로 살겠습니다.” 여러분, 펼치시고 그냥 사세요. 왜? 이 말씀의 완성은 우리의 향도되시고 우리의 선도되시는 예수님께서 다 이뤄놓고 그 다음에 우리 인생이란 것이 얼마나 엉망진창인가를 얼마나 내 새끼 위주, 선행학습 위주, 그저 내 자식만 최고라는 그런 죄를 보여주기 위해서 재방송 틀어주는 겁니다. 느긋한 마음에. 스물네 살에 이랬지, 서른일곱 살에 이랬지, 마흔일곱에 이랬다고. 하지만 나, 너 이해해. 그것 내가 몽땅 다 가져갔어. 내가 나실인이니까.

 

삼손의 자기 머리카락이 여자 밝혀서 자기 쾌락을 추구하는데 자기 임의대로 자기 주권대로 자기 자유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삼손 같은 경우에는 이미 하나님 쪽에서 나실인으로 지정됐기 때문에 그 머리카락이 자기를 죽이는 머리카락이고 자기 죽어서 남을 살리는 머리카락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마지막 때 알았습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은 쪽입니다. 우리 안에 나실인의 기초가 깔려있습니다.

 

남들처럼 못 살고 남들처럼 멋있지 못하다고 하나님께 원망하지 마세요. 봉사할 일 있거든 악착같이 사시고 봉사할 것 없거든 차라리 죽어달라고 하세요.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해서 그 일이 나실인으로써 살기 위해서 그것은 너의 혈육이나 네 자신이 결심한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주의 결심이 현재 너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 그라운드 안에 있습니다. 그 나실인 그라운드가 십자가를 통해서 함축해서 우리에게 안겨줬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거꾸로 나실인을 찾아갑시다. 현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안주하지 마시고 천국이 있음을 보여주는 이 지역사회에 보여줄 수 있는 성도 역할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나만 위해 살고 하나님은 내 욕구를 위해서 삼손처럼 필요한 존재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대였습니다. 주님께서 창세전에 예정하사 이 땅에 주셨사오니 내 욕구 삼손처럼 허랑방탕 자기 욕심만 채우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분 앞에서 제대로 나실인 못했음을 자인하면서 이런 죄도 이미 일찍이 주께서 처리하셔서 천국 백성으로 함께 해주심을 오늘도 다시 한 번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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