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미국동부예배 / 20140928 본문
녹취:한윤범
20140928 미국동부예배
(강의: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24장 22~27절까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신약성경 140페이지입니다. “또한 우리 주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이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자지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교회 나와서 신앙생활 한다고 할 때 이것이 친목인지 교제를 하는 생활인지 정말 신앙생활인지 본인은 신앙생활이라고 우기는데 과연 주님은 그렇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저는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은 신앙생활 못하게 된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났어요. 인간은 신앙생활 하는 존재가 아니고 사람이 제일 원하는 것은 편한 겁니다. 그냥 즐겁고, 즐겁고, 즐겁고. 편하고, 현하고, 편하고. 제는 그것을 노인네들을 통해서 많이 느껴요.
인간의 본성이란 신앙으로 위장하고 종교로 위장하고 신이란 이름으로 위장해도 결국 긴장이 풀리면 사람이 정말 원하는 것은 즐겁고, 즐겁고, 즐겁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편하고, 편하고, 편하고. 내 편한 것 방해하면 하나님이라도 싫고. 내 편한 걸 도와주고 날 즐겁게 한다면 부처라도 반길 수밖에 없는 이단, 삼단이든 가리지 않고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면 우리는 대환영할 것 같은 몸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억지를 부리면서 신앙생활을 한다. 이게 억지가 되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합니다. 참 신앙생활 잘 하시는 분에게 예의가 없는 건 알겠지만 깨놓고 이야기해서 신앙이 중요하냐, 내 몸 편한 게 중요하냐? 내 몸 편한 게 최고에요. 귀찮게 하지 말라. 편하게 살다가 죽는 것, 어쩌면 우리의 타고난 본성인데 그걸 가린다고 가려지겠습니까?
여자들에게 묻습니다. 어떤 남자가 좋으냐? 돈 있고 능력 있고 잘 생기고 키 크고 성격 좋고, 뭐 그 정도만 있으면 괜찮겠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남자들에게 물어보세요. 어떤 여자가 좋으냐? 20대한테 물으면, 예쁜 여자. 20대니까 철이 없어서. 30대 예쁜 여자. 40대, 예쁜 여자. 50대, 예쁜 여자. 그럼 80 되도 예쁜 여자. 90대 노인에게 어떤 여자가 좋습니까? 예쁜 여자가 최고에요.
그것이 모든 남자의 공통점이라면, 그런 남자가 신앙생활을 한다? 이거는 거짓말 아니면 자기를 속이는 것 아니면 무슨 일이 벌어졌어. 이건 있을 수 없는 기적이 벌어지지 않고는 아무리 교회 20년, 30년 다니면서 사도신경 외우고 예배참석해도 그저 예쁜 것, 다른 말로 하면 잘 생기고 성격 좋고 돈 많고 나의 무한 쇼핑해도 아무 소리 않고 즐겁게 뒷돈 다 대줄 수 있는 능력 있는 남자. 상상만 해도 기분 좋아요. 있든 없든 간에. 그게 인간 본성 아니에요? 누가복음 펼쳐놔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거룩한 말씀 들어도 우리의 본성 우리가 속일 수 없다 이 말이죠.
그래서 신앙생활 이렇게 합시다. 잘해보려고 하지 말고 매일같이 이렇게 생각합시다. 내 신앙 내가 조작한 것일 수 있다는 걸 늘 생각합시다. 이건 분명히 내가 스스로 남한테 우리 가정이 기독교 가정이니까 하도 부모가 교회 가라고 닦달 내니까 믿는 척하지만 사실은 나는 신이고 예수고 성경이야기고 관심 없고 나는 내 몸을 꾸미고 남한테 으스대면서 박수 받는 것, “나 이런 존재야. 나 이대 나온 여자야.” 이런 것을 오히려 더 선호하면서 그걸 교회에서 곱게 포장질하는 이중인격자, 이중만 해도 괜찮아요. 삼중, 사중 인격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본 모습이다.
따라서 40년, 50년 성경공부해도 결국 내가 믿는 것은 나뿐일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성경을 보셔야 돼요. 그러면 놀라운 게 나타나는 데 성경에서 예수님의 반대편에 섰던 그 행동들이 어쩌면 그렇게 정이 가는지 그리고 예수님한테 질타 받은 그들이 어쩌면 우리 자신을 그대로 닮았는지. 그렇다면 신앙생활 한다고 우기는 그것은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거는 조작된 것이고 그냥 분위기에 맞추려는 나의 연출, 그 연출이 하나님까지 속이려고 경건한 척하는 나의 본성을 내가 어떻게 스스로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복음을 강의했고 이제 누가복음 마지막 대목을 보겠는데 여기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올 때 우리는 여기서 비정상적인 인간을 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상식과 정상은 부활하지 않아야 돼요.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한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이야기고 이거는 후대 사람이 조작했든지 아니면 그 당시 사람들이 꾸민 이야기인지 그럴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성경 말씀을 대해야 됩니다. 마치 신앙도 없으면서 “믿습니다, 믿습니다. 부활 믿습니다. 남들은 안 믿어도 나는 믿습니다.” 이렇게 까불지 말고 진지하게 해야 돼요.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 이 사람들은 여기 선지자 나오거든요. 27절에 보면,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여기 모세와 선지자들은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입니다. 우리는 비정상이 싫어요. 심지어 장애자 한 명만 있어도 약간 느낌이 안 되는데 비정상이 있으면 흔히 요새 유행하는 소통이 안 돼요. 소통 안 되면 우린 왕따를 시키고 싶어요. 소통 되는 우리끼리 친목을 도모하면서 그 자체에서 행복을 만끽하는 것, 이게 우리 몸이 편하게 되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죠. 우리의 소망은 내가 즐겁게 사는 것이고 내 몸이 안 아프고 편하게 있으면 우리는 최고에요. 돈 많이 벌어서 쓰는 재미로 사는 것,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만큼 돈이 없기 때문에 품고 살지만 못 써서 환장하고 남한테 구제도 팍팍하면서. 생각만 해도 기분 좋지요. 그렇게 살 때 우리는 그것을 정상인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은 [정상인]입니다.
이 정상인이 되는 것에 대해서 누구도 이의가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기를 정상인으로 규정하고 세상을 보기 때문에 그래요. 나와 누가 다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비정상일 가능성이 많고 나는 원래부터 정상인이니까. 이건 이유도 없어요. 무조건 그래야만 돼. 나는 무조건 정상인이어야 돼요. 그리고 내 목적은 나 혼자 즐겁고 편하고 행복하고. 그게 정상인의 유일한 희망이 되겠지요.
그 정상인의 눈으로써 이 부활이야기를 접근해보자 이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은 정상인이 아니네요. 왜 그러냐 하면 그분이 부활을 한 거예요. 사람은 한 번 죽으면 흙이 되어 사라질 때 박테리아 작용에 의해서 흙 속에 있는 유기물에서 무기물로 탄소가 있는 결합체에서 탄소 없는 것으로 변하거든요. 이게 정상이에요. 우리가 알고 있는 정상인들끼리 내린 결론은,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다시 자연으로 환원한다. 이게 정상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가복음 24장을 봤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은 정상인입니다.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여자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입니다. 어제 강의하면서 요새는 머리가 완전히 갔어요. 여자 세 명이 사실은 살로메와 야고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세 명인데 나는 예수님 엄마 같다고 했는데 나중에 뭔가 찝찝해서 찾아보니까 이게 살로메와 야고보 어머니에요. 하여튼 그건 중요한 건 아니니까. 난 틀려도 성경만 안 틀리면 되니까.
문제는 이 여인들이 정상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정상인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예수님을 삼년 동안 따라다녀도 그들은 정상인입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말입니까? 그들은 자칭 자기를 믿는 자라고 봤어요. 믿는 자라면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보고 놀라야 돼요, 안 놀라야 돼요? 안 놀라야 돼요. 그런데 그들은 자칭 정상인이고 정상인 된 것을 어떤 자부심을 갖고 있는 거예요. 왜?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고 그 사회에서 같이 웃으면서 산다는 것이 자기로서는 자부심을 느끼는 겁니다. “나 어때?” “정상인이야.” “너도 정상인이야.” 얼마나 좋아요. 아무도 토 달 사람 없어요.
그런데 뭡니까? 그 정상인 그룹에 예수님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예수님 혼자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죽는 게 정상인데 시체가 없어요. 이것 어떻게 할 거예요? 둘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정상인 맞으면 예수님은 비정상인 되고 만약에(지금 이런 말하고 싶은 건 아닌데) 예수님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상인이라면, 우리는 자살 열 번 해도 마땅합니다. 이건 인생 헛살았습니다.
성경 말씀은 진리에 관한 것이지 종교 하나씩 갖고 있으세요. 종교생활 하세요. 이걸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 가져서 뭐 할 건데요? 천주교 가져서 뭐 하는데? 힌두교 가져서 뭘 할 겁니까? 어차피 목적은, 또 이야기해드릴까요? 내 몸 편하고 돈 재어놓고 쓰는 재미, 그래서 그게 즐겁고. 그건 우리 정상인이, 지금 세 번째 강조합니다. 정상인의 목표는 너도 나도 이미 정해졌어요. 이빨 아프면 싫어요. 이빨 아프면 얼른 치과에 가서 치료를 해서 뭐로 환원한다? 안 아픈 이빨을 가지면 내 몸이 편해요. 이빨 아프면 신경 쓰이거든요.
항상 편하고 그냥 편하면 또 재미가 없어. 권태로워. 그래서 즐거워야 돼. 즐거운 것은 돈 쓰는 것만큼 더 좋은 재미가 없잖아요. 쇼핑 재미. 완전히 홈쇼핑 중독되어 쓰지도 않을 걸 재어놓는 재미. 알아주는 재미, 잘 사는 재미, 부자 됐다는 소리 듣는 재미, 칭찬받는 재미, 그것이 정상이고 우리를 그것이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옆 사람도 그렇고 다들 그래요. 그러니까 아무문제 없는 줄 알았어요. 그리고 하늘에서 천사가 오든 주님이 오든 우리는 동의할 줄 알았어요. 호응할 줄 알았어요.
그리고 심지어 메시아란 분과 삼년 동안 따라다녔던 여자 분들이나 제자들도 했기 때문에 “정상인 맞지요?” 확인하면서 그동안 같은 레벨인 줄 알았는데 부활했다는 소식 듣고 딜레마에 빠진 겁니다. 그냥 부활을 접수하면 되잖아. 아닙니다. 부활을 접수하는 순간 우리는 졸지에 인생 자체가 사기였습니다. 어제 강의에서 우리는 상징물에 불과한데 실제 인간인 줄 착각한 거예요.
그래서 일단 부정합니다. 아니야. 부활 안 했어. 아마 시체를 누가 훔쳐갔든지 무덤의 번지수를 잘못 찾았든지. 네가 지금 너무 슬픔에 빠져도 정신착란을 일으켜서 시체도 없는 무덤에 가서 부활하셨다고 착각할 수 있거든요. 하도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한다고 하니까 믿지도 않았지만 혹시 그럴까 싶어서 정신없이 가보니까 그럴 수도 있단 말이죠. 그래서 여자들이 오고 난 뒤에 특히 옛날이나 지금이나 남자들 취미가 여자 무시하는 거니까. 여자들이 와서 셋이나 그러니까 직접 제자들이 확인 차 가본 거예요. 확인사살이라는 게 있잖아요.
만약에 부활한 것을 우리가 그걸 미리 내 정상 속에 부활이 들어있지 않다면, 이것은 그동안 나를 정상이라고 여겼던 그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된 판단을 내가 나한테 강요한 셈이 되거든요. 정상도 아닌데 너나 나나 정상이라고 행세를 하니까 빌붙어서 같이 편하게 살려고 즐겁게 살려고 뭣도 모르고 그냥 정상으로 여겼던 겁니다.
가보니까 무덤에 시체는 없었고 거기에 천사가 나타났고 그 다음에 천사가 잔소리하기를 책망을 하는 거예요. 책망을 하면서 하는 말이, 예수님의 길이 아직도 남아있는 우리 길인지 아니면 장례 치르고 보내고 우리끼리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마감인지 안 그러면 연장해야 되는지 다시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로 연장하지. 우리는 쉽게 생각하잖아요. 그것부터 문제입니다. 만약에 연장하게 되면 우리는 같이 즐겁게 친구처럼 사는 사람에게 미친 놈 소리 들어요. 우리는 서로가 정상이라고 우기면서 만났는데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버리면 우리는 누구 패로 분류가 되느냐 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을 하신 분과 한 패가 되는 것으로 규정을 받아서 저쪽에서 우리와 안 놀아줘요.
그러면 졸지에 우리는 뭐가 돼요? “놀아줘.” 했는데 “너는 정신상태가 희한해. 어떻게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 3+5는 얼마?” “8.” “그건 맞네. 5*5는?” “25.” “그건 맞네. 그럼 그것까지만 알고 우리 편이라 할게.” “아니야. 인간은 죽었다가 부활해서 하늘나라 갈 수 있어.” “그런 소리하지 마. 그러면 안 넣어줘.” 안 놀아주니까 우리만 손해 보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할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부정할까요? 부정하니까 찝찝한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부활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저 사람들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애초부터 그런 것 들을 생각도 없는데 이건 웬 은혜인지 웬 강력한 사랑의 폭풍인지 예수님을 연구한 적 있습니까? 없는데 주께서 부활했다는 사실과 아울러 한꺼번에 마지막 심판이 있다는 것이 밀려들어오니까 몰랐던 사실을 아는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저들이 안 놀아준다는 데 있어요. 그리고 그들은 우리를 “참 똑똑한 사람인데 아이큐 높은 사람인데 좋은 대학 나왔는데 인간이 저렇게 변해버렸나. 누가 저렇게 망쳐버렸지?”
묻지요. “누구야. 어느 광신도가 그렇게 하더냐?” 하니까 신앙인이 하는 말이, “이건 광신도가 아니고 사람이 아니고 주의 성령께서 하셨다.”고 하니까 그 소리 듣고 더 기분 나빠하네요. “에이, 증명되는 소리를 해라.” 성령이 보입니까, 주님이 보입니까? 왜 우리와 전에는 소통할 때는 서로 보이고 아는 것끼리 소통해서 형제인 줄 알았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 말이죠.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왜 갑자기 예수의 부활과 십자가, 죄 졌느냐 하는데 죄 졌으면 감옥살이하면 돼요. 내가 죄 진만큼 벌 받으면 돼요. 어떤 분이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용서를 했다는 약속이 있어서 그 약속이 믿어진다는 겁니다. 그럼 내 인생 조진 거지요.
옛날 우리나라 티비 cf에 이런 게 있어요. 아직도 그 cf가 너무 마음에 드는데 닭튀김 광고인데 멘트가 그거에요. “도대체 이 닭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을 했기에 오묘한 맛이 나느냐 말이죠. 우리가 닭이라면 주님께서 도대체 무슨 짓을 했습니까? 배울 만큼 배웠어요. 물리, 화학 압니다. 저 화학과 나왔어요. 철저하게 논리적이에요. 실험해서 데이터 똑같이 나와요. 안 나오면 뭐가 과정이 잘못됐고 과정대로 했다면 예측된 결과 그대로 나옵니다. 그럴 때는 원자구조가 눈에 안 보여도 확실하게 있는 거예요. 물리학이 그렇고 화학이 그렇고 그런 겁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요? 누굴 속이려고 그런 거짓말을 합니까? 길 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하는지. 부활만 빼면 좋은 사람 되고 똑똑한 사람 돼요. 그런데 자기 스스로 똑똑할 수도 있는데 왜 거기에 남들은 납득이 안 되는 부활이야기, 죄 씻음 이야기, 지금 죽어도 강도처럼 하늘나라에 낙원에 합류한다는 이야기,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되는 이야기를 네가 무슨 통뼈라고 그걸 왜 믿어서 손해 보는 짓을 스스로 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하죠. “나도 몰라.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야.” 우리는 묻지요. “주님이여, 저한테 무슨 짓을 하셨습니까?”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주여,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했어요.
이렇게 해놓고 설교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제가 이야기했지요. 우리가 성경을 백독을 하고 만독을 해도 신앙을 자기 스스로 멋있게 만들려고 조작한 것이 아닌지 항상 자기한테 물어야 돼요. 남이 물으면 우리는 변명 잘하지요. “왜 이래? 삼십 년 다녔어.” 본인이 본인한테 물어보잔 말이죠. 내가 안 믿으면서 믿는 척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자기보다 가장 날카로운 심판관은 없어요. 아무리 남을 속여도 본인을 속일 수가 없어요. 그럴싸해도 본인은 자기한테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따라서 조작된 신앙인지 정말 “주님이여, 저에게 무슨 양념을 발랐습니까?” 하는 식으로 주님과 대화 가운데 이뤄지거든요.
그것을 누가복음 끝나고 난 뒤에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니까 주님의 영이 강제로 차압당할 때 빨간 딱지 붙이는 걸 보고 도장을 성령의 인치심이라고 해요. 우리가 붙이지 않았으니까 뗄 수도 업고. 그래서 우리는 남들은 모르지만 진짜 신앙생활은 날마다 싸웁니다.
<박하사탕>이란 영화에서 철길에서 주인공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 돌아갈래.” 나, 옛날로 돌아갈래. 그 말은 뭐냐 하면, 주님께 차압된 인간은 절대로 옛날로 돌아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환란, 핍박, 곤고, 어떤 유혹, 어떤 것이라고 그리스도께 이미 용서받은 인간, 천국 가야만 할 인간은 내 힘으로 지옥으로 발길을 돌릴 수 없는 주께서 우리에게 그런 짓을 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요. 정상인 되고 싶어요. 똑똑한 사람 되고 싶고 소통 잘 되는 그쪽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러나 이게 인력으로 안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남들이 괴로운 게 아니고 우리가 날마다 괴로우면서도 순간순간 주님이 주신 희락 있잖아요. 그 평화, 이건 남들이 아무리 도 닦고 절에 가도 안 되는 그것을 우리는 한꺼번에 받아버렸어요. 그것도 내 뜻 같으면 내 쪽에서 처리하면 그만이어요. 내가 기도해서 금식해서 믿음을 얻은 것 같으면 그 단계를 내 쪽에서 취소하면 그만인데 내가 뭘 했는데? 어떤 사람은 설거지하다가 성령 받았어요. “가만있어봐라. 내 죄? 내가 어릴 때 주일학교 다닐 때 인간이 어떤 죄를 지어도 십자가 피가 모든 걸 용서한다. 그게 믿어지네. 설거지나 마자하자.” 그런 사람이 있어요. 여자 가순데. 이건 기도한 것도 아니고 예배 참석한 것도 아니에요. 설거지하다 된 거고.
저 같은 경우에는 소나무에 눈이 앉은 거예요. “눈이 앉았다. 누가 소나무를 만들었고 누가 눈이 내리게 했지? 하나님이잖아. 그럼 하나님이 했으면 나는 뭐야? 하나님이 그동안 나를 만들어왔잖아. 나는 몰랐어도. 그럼 내 할 일은 그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되네.” 인생의 고민이 한꺼번에 날아가 버렸어요. 성경 안 봤습니다. 목사 설교 듣지도 않았어요. 소나무라니까요. 눈 내린 소나무에요. 저쪽에서 조치를 했는데 내 쪽에서 이유를 끄집어낸다는 것은 이건 말도 안 되지요.
동생이 자고 있는데 개구쟁이 형이 와서 숯으로 고양이 수염 그렸다 말이죠. 동생이 일어나서 거울보고 놀래서 “누가 이런 짓을 했지?” 형이, “내가 했지롱.” 깔깔거리면서. 하나님 없이도 잘 살아요. 하나님 없이도 오히려 더 잘 살아요. 주님께서 내 허락도 없이 낙서를 해버릴 때 우리는 그분과 새로운 관계에 돌입됩니다. 그게 오늘 설교에서 부활이란 첫 단락에 말씀드린 겁니다.
이제 두 번째 단락이 중요해요. 설교시간에 두 번째 하면 첫 번째 다 잊어버려요. 그래서 제가 두 번째 하면서 첫 번째는 뭔지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뭐냐? 우리는 정상인이고 싶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남들이 예수님을 비정상적으로 보는 그쪽으로 우리를 주님 쪽에서 합류시켜 비정상으로 만들었습니다.
두 번째 하기 전에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집이 다섯 명을 초청했다고 합시다. 소파에 앉았는데 사람 다리는 두 개입니다. 강조할 필요는 없지요. 두 개니까. 다섯 명 왔으니까 2*5=10. 소파 뒤에서 보면 다리가 열 개여야 되거든요. 그게 정상이거든요. 그런데 뒤에서 보니까 분명히 사람 다섯 명 들어갔는데 여덟 개밖에 없어요. 그럼 어떻게 된 거예요? 한 사람은 비정상이거든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은 사람으로 봅니다. 코, 눈 있고 다리 두 개 있으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은 나와 똑같은 사람인데 예수님 혼자 죽었다가 혼자 부활해버리니까 네 사람은 정상인데 예수님은 비정상인으로 규정한 거예요. 우리도 그렇게 규정합니다. 그래, 빠이빠이 어떤 사람이 살다 갔구나.
그런데 여자들이 예수님 무덤에 가면 예수님이 정상이라면 거기에 예수님의 시체가 있어야 돼요. 시체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시체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체가 없습니다. 우리를 놀리는 겁니까?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미처 모르는 바가 있다는 거예요. 미처 알지도 못하면서 일방적으로 나를 정상인으로 규정시킨 거잖아요. 이건 내가 스스로 나한테 잘못을 저지른 것밖에 안 돼요. 주님은 정상인데 우리는 그분이 다리가 없다는 이유로 그분을 비정상으로 왕따 시키고 우리끼리 정상이라고 착각한 거예요.
나중에 보니까 그 사람이 양반다리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뒤에서 보니까 다리가 두 개 없는 거예요. 양반다리가 무슨 의미냐 하면, 보통사람은 땅에 딛고 살잖아요. 주님은 하늘로부터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이 땅에 시체를 남길 이유가 없어요. 주님이 그렇게 하니까 한둘이 자기도 양반다리 하네. 뒤늦게 온 사람이 저기는 다리 부러진 병신들만 있다고 보는 거예요. 다리가 안 보이니까. 처음에 여덟 개, 여섯 개, 네 개, 나중에 다리가 하나도 안 보여. 전부 양반다리 한 거예요. 다섯 명 다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아까 찬송가에 나오지요. 우리는 위로부터 온 은사를 받고서 그동안 자식 길렀고 장사했고 하루하루 눈 떴고 머리카락 하얘졌고 다 위에서 온 건데 우리는 그동안 자칭 정상인으로써 땅에서 내가 힘들여 노동하고 손님한테 아부하고 그런 식으로 내 자식 길렀고 이만큼 옷 입고 밥이나 먹고 있다고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우리도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그동안 우리를 천국에 보내주기 위해서 주께서 부른 은혜로써 지금까지 결국 부활의 사람 되라고 조치를 한 거죠. 이게 첫 번째에 담긴 내용입니다.
그럼 두 번째는 뭐냐? 살다가 그냥 가면 되겠네. 그럴 것 같으면 누가복음 24장 있으면 되겠어요. 그런데 누가복음 24장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저 따라 성경 봅시다. 누가복음 24장만 있으면, “나, 부활 믿습니다. 하나님, 합류합시다.” 이러면 되는데 누가복음 15장이 있어요. 시간 관계상 여러분 다 아시니까 읽을 필요도 없고요. 15장에 탕자이야기 나옵니다. 이것 설명하기 전에 걱정 되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부활 믿으면 주님과 합류되겠네. 그러면 누가복음 24장만 있으면 되고 15장이 필요치 않은 거예요. 그런데 24장 받기 전에 22장이 있고, 11장 있고, 1장이 있고, 15장이 있더란 말이죠.
거기에 보니까 아버지 재산을 미리 당겨서 기생한테 다 줘버리고 허랑방탕 다 써버리고 완전히 거지꼴이 된 그 아들이 뒤늦게 빌어먹을 데 없어서(아르바이트하기도 힘들어서) 아버지 집에 아르바이트 하려고 들어왔는데 아버지께서는 집나간 불효막심한 아들이 뭐가 그리 좋다고 오늘도 동구 밖에서 이제나 오나 저제나 오나 하고 있는데 저기서 아들이 나타나니까 평소에 아들이 오기를 고대하면서 미리 가락지 준비하고 가다마이 준비하고 오는 날 주려고 소 길러놓고(수입 소고기 아닙니다. 한우) 왔는데 와락 안아버려요. “아버지, 미안 ....” 아예 입을 막아버려요.
놀라운 사실은 그 옆에 한 번도 아버지 속을 섞이지 않고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힘든 농사를 도와가면서 맏이 노릇을 단단히 했던 아들한테는 가락지 없고, 좋은 옷 하나 없고, 그 아들을 위해서 잔치 한 번 벌여주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예배시간이니까 속으로 답변하시면 됩니다. 탕자가 좋은 아들입니까, 맏이가 좋은 아들입니까? 우리의 정상적인 안목에서. 만약에 우리가 신앙도 없으면서 있는 척하면서 성경을 어디서 들은 풍월은 있어서 “정답은요, 탕자가 하나님 사랑받고 맏이는 미움 받습니다.” 이렇게 아는 척하다가는 오늘부터 네 아들과 네 재산 다 날려도 좋아하겠네? 이렇게 반박 들어오면 그건 또 벌벌 떠는 거예요.
이렇게 정합시다. 탕자가 환영받고 맏이가 환영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정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우리로서는 상당히 이상하다는 고백이 솔직해요. 이런 식으로 주장하다가는 남들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반대가 되기 때문에.
다시 합시다. 24장만 있어도 구원받는데 왜 15장에 탕자이야기가 있느냐 말이죠. 그 말은 주님과 합류하기 전에 먼저 네 사고방식부터 주님의 사고방식으로 전환시키라고 15장이 있는 겁니다. 전환되기가 참 힘들어요.
또 한 가지 15장의 예를 들겠습니다. 양을 백 마리 몰고 갔는데 99마리는 참 말을 잘 들어요. 이리 가라면 가고, 저기 가라면 가는데 꼭 학교에서 어떤 동창회고 어딜 놀러가도 지 마음대로 하는 그런 놈이 있어요. 백 마리 중에서 말을 도대체 안 들어 처먹는 거예요. 그런 잃어버린 양 같으면 99마리 양들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는 다수고 저쪽은 한 마리니까 “샘이여, 쟤는 원래 그래요. 놔두고 갑시다.” 세상에 99마리 양을 두고 그 한 마리 양을 찾으러 갑니다. 납득이 갑니까?
우리 생각에는 24장만 하면 되는데 15장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주께서 왜 하셨습니까? 사고방식 바뀌지 아니하면 합류가 안 된다는 거예요. 이 말씀은 주님께서 너희들은 너희 존재만 생각하지 나는 과정까지 아는 사람이 내게 합당하다. 죄인을 부른다고 할 때 남들이 싫어하는 죄인을 친히 사랑해주시는 그 무한한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면 합류되지 못하는 거예요.
합류되려면 어떻게 하죠? 남들은 정상이라고 똑똑하다고 보지만 주님 보시기에 틀림없이 비정상이란 주님의 생각으로 교체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잘했다는 것이 아니고 못난 내가 어떻게 잘 됐지? 존재 말고 과정에 주목하세요. 얼마나 과정에 주님께서 말도 안 되는 인간을 천국 보내려고 그런 수모를 당했는지 그 과정에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누가 승리자인지 관심 있는데 주님께서는 과정입니다. 잘나서 승리한 게 아니거든요. 다같이 못났는데 승리할 자격도 없는 자에게 주께서 이쪽은 사랑을 베풀고 저쪽은 사랑을 안 베풀어서 원치 않는 용서가 돼버린 거예요.
탕자가 아버지 만날 때 “나, 탕자인데 잘 했습니다.” 이렇게 온 게 아니에요. “나는 아버지 아들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라고 했어요. 가락지 있는 것도 몰랐어요. 소 잡는 것도 몰랐고 좋은 입힐 것도 몰랐어요. 하여튼 무조건 나는 주님의 사랑을 감당치 못한다는 거예요. 그 마음을 유지해야 돼요.
설교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우리가 좋아는 것은 신앙도 아니고 예수도 아니에요. 나는 내 몸 편하고 내 몸 건강하고 돈 싸놓고 쓰는 재미, 즐거운 걸 원합니다. 그런데 그걸 버리지 마세요. 좋은 복음이죠. 절대 그걸 버리지 마세요. 우리 본성이니까. 그걸 고치지 말고 그 몸 그대로 아버지 품에 안기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저는 나쁜 탕자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님을 주라 부르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제게 과분한 은총을 베푸신 저한테 베푸신 겁니다. 주여.” 주께서 “그러니까 합격이야.”
스스로 개과천선하는 게 아니에요. 더러운 속성 그대로 가져오세요. 손대지 마세요. 손대지 말라면 오히려 편하죠. 원래 본성이 돈 좋아하고 잘난 것 좋아하니까. 그대로 가져오세요. 우리의 잘남은 두시고 그대로 가져오세요. 가져오시고 이렇게 하세요. “주여, 저 같은 인간 감당하시겠습니까? 저요? 저밖에 몰라요.” 그대로 가져오세요. 이미 다 준비됐어요. 부활이란 죄 용서했기 때문에 용서된 자만 부활을 믿도록 성령께서 조치를 하신 겁니다. 부활을 믿으십니까? 죄 용서 받은 거예요.
또 한 가지 16장입니다. 이건 기가 막힙니다.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인데 어떤 직원이 구조조정 당하게 생겼어요. 사장이 회사가 어려워서 회계담당을 자른다는 것을 눈치 챘어요. “사장아, 네가 나를 잘라? 내가 너한테 손해 볼 것 같아. 웃기네.” 자기가 회사 대표로 거래했으니까 거래하는 사람을 불렀어요. “전에 우리 회사에서 소주 몇 병 가져갔어요?” “우리 즐겁네 나이트에서는 소주 천 박스 가져갔습니다.” “장부 가져와.” 사인하고 천 박스를 오백 박스 가져간 걸로 하는 거죠. 이건 회사의 재산을 손해 보게 하는 짓입니다. 이왕 잘리는 것, “감히 나를 잘라내. 내가 그냥 순순히 물러갈 것 같아. 다른 나이트 와.” 전부 장부를 다 반으로 잘랐습니다. 속이 시원해. 회사에 큰 손해를 입혔죠. 이왕 잘리는 것 그냥 못 잘리겠다. 심보가 더러운 놀부 심보에요.
속으로 묻습니다. 이 사람 천국 가겠어요, 지옥 가겠어요? 회사 돈 횡령했는데? 지옥 가지요. 부활하신 주님이 이야기합니다. 바로 그 사람보고 나쁘다고 하는 사람은 지옥 가고 그 사람이 지혜롭게 했다는 사람은 천국 간다는 겁니다. 이게 정상인이라고 자처하는 우리에게 어떻게 완전히 황당한 내용을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뭐냐? 이렇게 회사 돈을 자기 마음대로 복수한다고 횡령한 이 인간이 이 세상에서 나를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지혜롭게 행동했느니라. 이 세상은 너나 나나 잘했다고 할 것 없는 세상인 것을 주께서 강조하시는 겁니다. 너희들끼리는 저놈 나쁘다, 이놈 나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누가 누구에게 나쁘다고 손가락질 할 수 있는 그런 세상 아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너나 나나 다 나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너희들 보기에 누가 봐도 나쁜 인간을 내가 천국에 넣어줌으로 말미암아 나머지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저 사람을 나쁘다고 한 나쁨이 주님 앞에 진리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채야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 빼놓고 아무도 의로운 사람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설교를 정리하면 돼요. “주님이여, 누가 의롭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누가복음을 통해서 나온 정답은, “나, 예수가 의롭다 하면 아무리 욕해도 의로운 거다. 탕자가 아버지 돈 떼먹고 도망쳤는데 나쁘다고 하거든 나, 아버지가 영접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천국행이다.” 이것이 누가복음의 복음입니다. 기쁜 소식입니다. 사람의 어떤 윤리도덕으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상인으로 그런 논리라면 안 믿으랍니다. 불교가 마음에 듭니다. 왜? 성실하게 도 닦으면 업을 쌓으면 복이 온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 믿는다고 해도 조작할 수 있어요. 그런데 도대체 이런 나에게 주께서 무슨 짓을 했습니까? 누가복음 15장, 16장을 거부하고 싶은데 왜 거부가 안 되지요? 이상해요. 주께서 손을 대고 있는 거예요.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양반다리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남들처럼 다리로 딛고 노동하고 사는 게 편해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데 주께서는 다리를 접게 만드네요. 네가 너 된 것은 내 은혜지 네 노동의 대가가 아니다. 그건 마르크스에게 배우란 말이죠. 경제한테 배우란 말이죠. 그것은 정상인들의 상식이니까. 하지만 나처럼 비정상인이 될 수밖에 없다. 이건 빼도 박도 못한다. 어쩔 수 없어. 내가 정해준 네 운명이니까. 다리를 양반다리로 접어야 돼. 예배드리면서 양반다리 하기는 처음입니다.
비정상인 되는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비정상인으로 사는 보람을 느껴야 됩니다. 물론 그걸 티내지 마세요. 그러면 안 놀아주니까. 안 놀아주면 돈이 안 생겨요. 그렇게 하지 마시고 문제는 비정상적인 것을 남한테 하지 마시고 주님 앞에서 “주님이 저를 이렇게 만들어놨습니다.” 남 가진 옷 같이 입고 싶고 남처럼 좋은 저택 갖고 싶고 남처럼 좋은 차 갖고 싶고. 갖고 싶은 걸 그대로 유지하세요. 기쁜 소식이다, 정말. 그리고 이렇게 하세요. “주여, 저 같으면 저를 내치겠는데(나밖에 모르니까) 나 같은 인간을 어떻게 받아주십니까?”
마지막 외칠 것은, 이같이 못된 나를 받아주시고 용서까지 마무리 깔끔하게 일처리해주시고 천국 가는데 아무 흠이 없도록 모든 죄를 탈탈 다 털어주시고 그것이 확실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시체를 없애버린 주의 시체 없다는 사실을 성경 속의 문자만 아니고 이게 내 마음까지 퍼져서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이 내 안에도 꿈틀거리고 펄떡거리고 활어가 튀는 것처럼 날마다 주께서 이미 용서했기에 살아있는 그것은 느끼는 놀라운 능력을 주실 때 속으로만 이야기합니다. “주여, 저는 주님께 감사합니다.”
끝으로 이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남들에게 짜증내세요. 성질부리세요. 갑자기 복음 막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남들이 안 놀아주면 주님 앞에 서세요. “주여, 나 이 정도밖에 안 됩니다. 내 실력으로 천국 못 갑니다. 이미 천국행을 확정지었기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성령으로 믿게 해주시니 그저 주님께 감사합니다.” 이뿐이에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조작된 신앙으로 신앙인 척하며 교회에 합류했던 나, 실력이 그것밖에 안 되는 나, 하지만 그것이 속일 수 없는 주님의 십자가에 대한 사실이 찾아오고 주께서 실제로 무덤이 없이 부활했던 사실이 실제 사실로 들어오면서 주여, 도대체 우리한테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남들에게 티내지 말고 신앙인 척하지 말고 그저 주님 앞에서만 신앙인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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