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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미국뉴저지교회b 본문

해외 특강/14미국 강의

미국뉴저지교회b

정인순 2014. 11. 7. 18:49

음성2

 

20141003 미국뉴저지교회b

(강의:이근호 목사)

 

녹취:한윤범

 

로마서 9장 3절을 제가 읽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아멘 안 할 줄 알았습니다. 중요한 대목을 다시 말씀하면,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자신 없으면 안 해도 돼요. 아멘 하나, 안 하나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이 말씀대로 실시할 테니까

 

자기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이용한다? 감사하게도 주께서는 로마서 9장 3절을 통해서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구원론으로 시작하면 구원파로 끝나지요.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그 이야기를 길거리에서 구원파에 다니는 사람한테 갑자기 그런 질문을 받으면 상당히 당황하지요. 언제 구원? 11월 15일 오후 두시?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이야기 안 하는데. 구원을 받았으면 날짜를 기억해야지. 태어났으면 생일이 있듯이. 이렇게 나오면 답변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 이렇게 응수해주시기 바랍니다. 구원이란 것이 어디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이렇게 응수해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언제 저주받았습니까? 그쪽에서 답변 못합니다. 구원이란 저주받은 상태에서 벗어나야 할 텐데 당신은 언제 저주받았는데, 5월에 저주받아서 6월에 구원받았다고 돼야 되는데 자신은 중립지역에 있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우리가 저주받아 놓고도 저주받은 상태를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구원이란 말을 할 수 있는 경우는 주께서 구원하기 전에 이미 우리는 저주 아래 놓여있다는 것을 소급해서 수용하는 사람에게만 이 말이 가능한 거예요. 중립지역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옥으로 갈까요, 천국으로 갈까요? 골라잡을 문제가 아니고 골라잡을 그런 권리나 선택이 우리에겐 아예 없었고 처음부터 태어나자마자 저주 속에서 죄 속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그리고 그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셨다고 믿어지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에서 끊어지는 것이 곧 저주임을 증거하는 용도로 사용하여 달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초반부터 어렵게 해서. 저번 강의하고 난 뒤에 어렵다고 질타가 날아왔어요. 어려운 것이 아니고 제가 여러분이 놓치고 있는 것을 끄집어내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죄를 짓고 난 뒤에 이 세상으로 쫓겨났는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에 죽으시고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자는, 성령이 임해서 믿게 되어서 믿는 자가 되게 하시고, 전에 죄 아래 있을 때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못했지만 성령 받았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성령 받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교회를 유지하게 되면 그 교회가 성령의 공동체가 되어 살아가는데 이 성령의 공동체에 사도의 권면과 명령이 주어져서 말씀대로 살면 영광이 되고 말씀대로 못 살면 영광이 안 되는 교회가 되기 때문에 교회는 사도의 권면과 지시를 받아서 성령을 받은 상태기 때문에 충분히 지킬 수 있는 말씀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의 공동체를 통해서 영광 돌리면 이 성령의 공동체가 그대로 주님 재림하시면 천국에 가게 되고 천국 백성 된다.

 

이 이야기가 맞습니다. 이게 틀린 이야기거든요. 전부 다 틀린 이야기에요. 이거는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고 이것이 성경에 나온 그대로 압축을 한 것이고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이런 식으로 나온다. 나오기 때문에 저는 틀렸다고 보는 거예요. 백 명이 봐도 성경에서 이런 내용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서 틀린 거예요. 이게 왜 틀렸는가? 이천 년 역사가 옳다고 이야기했는데 왜 틀렸는가? 틀린 것, 하나하나 지적해볼까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는데 죄를 지어서 이 땅에서 쫓겨났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지만 죄를 진 상태에선 이 땅에 인간이란 게 없어요. 죄인밖에 없어요. 죄인밖에 없다는 말은 죄의 지배를 받는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그 다음에 어떤 생각을 끄집어내고 성경에서 어떤 것을 참고할지라도 그거는 죄보다는 죄의 오류로 가는 모습인 거예요. 비록 성령을 언급해도, 삼위일체를 언급해도 삼위일체이란 이름으로 죄 짓고 있는 거예요. 심지어 예수님이 피 흘리고 그 피를 믿고 구원받는 것도 오류고 또 하나 죄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그런 생각 안 들었습니까? 다들 그렇게 하니까 동의하지요.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이미 죄를 짓고 죄 아래 있다는 말은, 죄 아래에서 바깥으로 들락날락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고 이제는 죄 아래 있기 때문에 죄 아래 있는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가 죄가 뭔지 모르고 죄 아닌 채로 살아가는 그 모습이 죄 아래 있는 거예요.

 

제가 어려운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당연한 말을 하는데 이것이 새롭게 들린다는 것은 정말 우리가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거예요. 특히 예수님을 믿어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 같으면 예수님 십자가에 죽지도 않았습니다. 유대인보다 아이큐가 높아요? 그 똑똑한 유대인이 예수님을 쓸모없는 인간으로 배척했는데 우리가 다들 서울대학 나왔습니까? 뭐 그리 똑똑해서 예수님을 영접해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성경에 의하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믿어지게 돼있어요. 이 예수님을 선물로 받았기에 믿어진다는 말은, 예수님이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너희 앞에 섰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누가 저에게 물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옆에 사람이, “목사님, 물이 있네요? 이 물 어디서 생겼습니까?” “누가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질문은 뻔해요. 누가 주셨습니까? 아까 질문은 내가 물을 가졌다고 했는데 상대방의 질문이 그 다음부터 바뀌기 시작합니다. 주체가 바뀌어요. 당신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고 누가 당신에게 물 있는 존재로 만들었습니까? 당신은 주체 자리에서 비껴나고 누가 당신에게 이 물을 줬느냐고 할 때 정말 선물을 받은 사람은 어떤 분이 물을 줬다고 해야 이게 정답이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해서 당신은 믿음이 생겼느냐고 하니까 기도를 빡세게 해서 믿음 생겼습니다. 사십일 금식해서 믿음 생겼습니다. 서울 아니네. 이거는 서울이 아니고 노동이네. 종교노동. 누가 주셨습니까? 글쎄. 성경에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니까 믿음을 선물로 준다고 하니까 그 믿음 가지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열심히 노력하니까 그 믿음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여러분, 선물이란 주기 전에는 추구할 수 있는 그런 생각도 없다는 이야기거든요. 제가 말을 하면서도 너무 어렵게 하는지 미안해서. 지금 녹음되니까 다시 들어보세요.

 

선물은 예상하는 게 아니에요. 예상한 걸 주게 되면 그거는 선물이 아니고 어떤 협박이에요. 성경에 믿음을 선물로 준다고 하는데 이것 주세요. 이건 협박이지 선물이 아니라니까요. 당신은 어떻게 해서 믿음이란 선물을 받았느냐고 하니까 내가 주님을 협박하니까 주님도 못 견뎌 줬습니다. 이러면 그 믿음은, 주님 주신 것+나의 협박성, 이것이 포함된 겁니다. 믿음은 올 줄도 몰라야 돼요. 받으니까 내가 놀란 거예요. 여러분이 놀란 거예요. 이것 왜 주시냐고 오히려 따져야 돼요. 네가 주가 아니고 주가 주거든. 쓸데없는 인생을 살게 됐네. 난 그 인생 원하지 않았습니다. 받아. 원하든 말든 내가 주면 받게 돼있어. 이게 선물입니다.

 

물이 갈급한데 물주더라. 이건 아니에요. 물 먹고 싶지 않은데 물 주게 되면 “주여, 내게 속한 상황이 아닙니다. 가져가세요.” 하니까 물 줬다는 말은, 너 자체가 네게 속한 상황이 아니야. 네가 어디서 살든지 몇 살에 죽든지 그것은 네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고 네가 걱정하면 믿음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네 것이라 여기는 것을 몽땅 선물로 바꿀 거예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사람은 거기서 멈추는 경향이 있어요. 그 다음 말은 안 들으려고 해요. 가져가신 자도 주님이요. 주실 때는 고맙다 하고 그 다음 가져갈 때는 안 빼앗기려고 악을 써요. “주여, 줘놓고 왜 이러십니까? 이렇게 빼앗아가려면 왜 주셨습니까?” 주고 빼앗는 가운데서 뭐가 바뀌느냐 하면, 내가 내 주인이 아니고 원래 내 주인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사도의 권면과 명령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거룩한 생활을 해서 거룩한 사람만 천국 간다고 했지요. 이러한 사고방식이 인간의 죄에서 나왔습니다. 내가 거룩해서 천국 간다는 그런 것은 성경에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거룩하고 우리는 주님한테 붙어있는 지체가 되어서 주님께 붙어있다는 이유 때문에 거룩해지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단독적으로 거룩하게 되면 그때부터 주님과 독자선언, 빠이빠이 하세요. 나 혼자도 거룩 되는데 주님이 왜 필요합니까?

 

최성수가 불렀던 유명한 노래가 있지요. <동행> 동행의 뜻이 뭡니까? 같이 사는 거잖아요. 주님이 같이 왜 살아요? 거룩 될 자질이 있습니까? 없으니까 동행해 주시는 거예요. 노사연이 불렀던 <님 그림자> 님 그림자의 내용이 뭐예요? 달은 떴는데 저만치 앞서가는 님이잖아요. 뒤따르는 여자는 자기 그림자 밟아요? 지는 좀비에요. 그림자 없어요. 주님의 그림자 밟고 가는 거예요. 지금은 님 그림자 없어서 슬프다는 노랜데 저만치 앞서가는 님을 밟는 거예요. 님이 가는 곳에 가겠다는 겁니다. 불이라고 물이라도. 님 없으면 나는 죽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결혼이라는 것은 억지로 붙어살면 결혼 되는 게 아니에요. 그대 없이는 죽겠다고 해서 하는 게 결혼이여야 한다 이 말이죠. 그러려면 다 이혼해야 되지만 할 수 없지. 대충 살지가 아닙니다. 당신 없으면 결혼도 안 했어. 물론 말도 안 되는 꿈같은 이야기지만.

 

이게 왜 죄에서 나올 수 있는 형태냐 하면,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아까 이야기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이런 논리에 보면, 이 논리로써 내가 죽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거짓이에요. 이 속에서 나는 기어이 살아남아야겠다는 것만 증명되지 이러하기에 나는 죽는 것 맞는다고 증명할 수 없어요.

 

인간이 아무리 과학, 신학과 철학이 발달해도 그래서 나는 죽은 자 맞는다고 그걸 증명하는 목적으로 논리를 전개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어떤 경우에도 잘났다는 걸 증명하는 논리는 되지만 나는 이미 죽은 자에 불과하다고 쓸데없이 그걸 증명하는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남은 다 죽어도 나는 살아남아야 될 가치가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도 오늘도 악착같이 살잖아요. 교회 나와서.

 

제가 본 <매드맥스>란 호주영화의 첫 장면에 때는 2040년도 인류는 핵폭탄으로 다 죽었다. 하지만 폐허된 뉴욕항구 험악한 곳에 오직 한 사람만 살아남았으니, 하고 난닝구 다 찢어진 것 입고 총 들고 그는 살아남았다. 이것부터 영화가 시작되거든요. 남은 다 죽었는데 나는 살아있다. 그것 우리 모습입니다. 나만 기어이 영원하리라. 반대로 해봅시다. 남은 다 살았는데 나만 죽었다. 이건 재주 되게 없는 얘기죠.

 

이런 논리로서는 절대로 인간은 죽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논리는 거짓입니다. 거짓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죽은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활동하는 모든 것은 바로 죽은 자이기에 토해놓는 죽음의 이론이고 철학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죽은 자이기에 여기에 폭 빠져있다고 해도 같은 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이 죽은 거라면 생명으로 가는 논리는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한다면, “네가 뭔데 생명을 넘봐?”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죽었다 하면 죽은 것이고, 죽었으면 죽은 채라도 하란 말이죠. 죽었는데 살겠다는 것은 덜 죽은 거예요. 확인 사살해야 됩니다. 덜 죽은 거거든요. 주의 말씀이 죽었다고 하면 그건 죽어있어야 돼요. 옛날 sbs 코미디에 이런 게 있어요. 한참 연기하는데 성우가, 그래서 누구는 죽었다고 하니까 연기하다가 곧장 다 죽어 버려요. 무슨 일을 하다가도.

 

그래서 인간은 죽었다고 하면 이게 하나님의 지시와 뜻에 의해서 자체로 죽은 겁니다. 그래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생명의 길을 터놓은 적이 없습니다. 혹시 올까봐 두로 도는 화염검으로 창세기 3장 24절에 보면, 완전히 막아놨어요. 어떤 누구도 생명을 논할 수 없습니다. 죽은 것 맞습니다.

 

그 다음 질문입니다. “인간은 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까?”라고 여러분이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정말 성경에 합당한 말이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둘로 나눴습니다. 만든 것과 있음으로 구분했습니다. 만든 것과 있음만 구분하면 성경은 해석이 돼요.

 

있음이란 요한계시록 1장 8절에 보면,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장차오실 분,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처음도 있었고 나중도 있었고. 있었다는 말을 쓰려면 지금만 있다가 없어지면 있었다는 것에 부합되지 않아요. 있으려면 영원토록 끝까지 있어야 되는데 그 있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있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럼 다른 사람은 뭐냐? 만들어졌다고 이야기해요. 주님만이 영원함을 보여주는 증거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따라서 만들어진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사라져야 됩니다. 기분 나쁘십니까? 만들어졌는데 나이 많아서 돌아가셨다. 참 잘하셨어요. 왜? 그게 만들어진 것의 운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만들어져놓고 주님처럼 계속 영원히 있으려고 시도하려면 이것은 만들어졌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진 주제에 감히 하나님 되려고 하는 시도의 양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은 어떻게 합니까? 제가 오늘 강의가 초장부터 어려워서 어려울 때는 결론을 먼저 던진다고 했지요. 이게 친절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봅시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만들어진 자로서 성경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중요하기 때문에 또는 결론부분이기 때문에 적어보겠습니다.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라는 것이 누구의 이야기냐 하면, 영원히 있음, 알파요 오메가인 분이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했으면 주님께서 이것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만들어졌기 때문에 만들어진 우리가 대표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모든 우리의 신앙생활은 다 오류고 거짓말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뭔지 보여주겠습니다. 쓰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교회에서 찬양하는 것만 신앙생활이 아니고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결론부분이기 때문에 이해를 요구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면 아버지, 어머니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래. 아들아, 차 조심하고 공부 열심히 해야지.”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주님께서는 먹든지 마시든지 평소의 일을 통해서 신앙을 보이기 원합니다.

 

모여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이 자체만으로 따로 신앙생활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교회 와서 신앙생활 시작해볼까? 집에 가면 일상생활해볼까? 그것 아닙니다. 정말 진정한 신앙은 종교의 허구를 갈아엎고 평소에 나는 무엇에 주력하면서 살아가는지 그게 바로 우리의 대표적 신앙생활이 돼야 되는 겁니다. 평소에 자기가 꾸며낸 연출된 신앙에 스스로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어머니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이게 어떻게 신앙이 되는지 보세요. 이걸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앞에 뭐가 붙어요. “만들어진 아버지와 만들어진 어머니, 만들어진 제가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만들어진 아들아, 공부 열심히 해서 다시 만들어진 아들로 돌아오너라.” 이 만들어짐은 하나님에 의하면 죽게 돼있습니다. 다 죽어 버려요.

 

내가 아버지한테 인사하고 효도하고 아버지는 자식의 건강 걱정하는 이 자체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라지고 죽어야 되는 겁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신앙생활입니다. 산수 100점 맞고 온 상황에서 죽어야 됩니다. 이것이 사실이에요.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내가 꾸민 신앙생활 속에는 아들 죽는다는 내용이 포함되지 않지요. 그래서 주님께선 그걸 신앙생활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만들어진 자리에 만들어진 속성을 마음껏 발휘하게 되면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면 내 아들, 내 부모 죽는다는 게 어디 나오느냐? 히브리서 1장 10절에 나옵니다. 성경에서 그런 것만 찾는다고 욕하지 마세요. 성경에 그런 게 있어요.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러니까 만들어짐 속에 저와 여러분도 포함돼있지요. 그 다음에 보세요.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요” 내가 지금 잘못 봤습니까? 멸망 속에 우리도 포함돼있지요.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만들어졌습니까? 멸망하세요.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찢어진 난닝구 입고 핵폭발 일어나고 난 뒤에 자기만 기관총 들고 일어나는 게 신앙생활 아니고 멸망하는 역할을 하세요. 멸망해야만 한다는 것이 믿어질 때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만들어졌기에 신앙생활입니다. 우리가 은퇴를 해야 사라져줘야 진짜 영원토록 알파요 오메가는 오직 주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활용되기 때문에 우리는 잠시 무대에 나타났다가 사라져야 되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오케이. 이렇게 돼야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신앙생활이라면, 우리는 없어질 것인데 왜 만들어졌는지가 등장하겠지요. 이제부터 제가 말씀드리겠어요. 보신각종이 있지요. 광복절 그리고 1월 1일에 유력인사들과 무작위로 뽑힌 서울시민들이 여기서 종을 칩니다. 보신각종을 치면 소리가 나지요. 묻습니다. 소리가 보신각입니까, 보신각 아닙니까? 소리는 보신각이 아니지요. 보신각에서 나왔지요. 하나님이 왜 만들었느냐? 거기서 소리를 끄집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이 소리는 다른 말로 하면 리듬이에요.

 

세례요한이 왔을 때 사람들이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당신은 제사장입니까? 아니요. 당신은 선지자입니까? 아니요. 정체를 밝혀라. 너는 누구냐? 나는 소리로다. 나는 보신각에서 울려나는 소리에 불과하다. 보신각은 내 뒤에 온다. 영원히 있는 존재는 내 뒤에 오고 나는 쇠해야 되지만 그분은 흥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고 구약의 완성이에요. 뭘 자기를 구원받아. 몇 날 며칠에 구원받았습니까? 그걸 왜 묻는데? 말려들어간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도를 아십니까,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인간이 범죄 해서 오직 자기만 살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악마가 간파했기에 나는 당신의 행복을 돕고자 합니다. 이렇게 하면 행복하십니다. 그게 바로 마귀가 하는 짓거리잖아요. 도를 아십니까, 대순진리회가 했든 심지어 교회에서 했든 간에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소리에요. 소리는 리듬입니다. 이걸 현대용어로 바꾸면 정보에요.

 

홀로그램이라는 게 있거든요. 자외선을 두 군데 비춰서 빛의 간섭효과로 그냥 보면 얼룩무늬지만 안경 쓰고 보면 실물,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 그것은 필름이거든요. 필름 안에는 정보가 담겨있는 겁니다. 그 정보만 빼내는 거예요. 그게 세례요한의 소리입니다. 내가 진짜 있음 앞에 나도 있다고 할 입장이 못 되고 그런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빨리 등장해서 빨리 역할하고 사라져줘야 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생명책이란 게 있지요. 생명책 명단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생명책이 어떤 책이냐 하면, 말라기 3장 16절에 보면, 기념 책이에요. 무슨 기념 책이냐 하면, 평생 동안 주님을 기념했던 명단들이 거기 나와 있습니다. 자기 뽐내는 책이 아니고 자기를 기념하는 책이 아니고 주님을 기념하는 책이 곧 생명책이라. 이것 중국교회에서 할 것을 미리 당겨서 하면 안 되니까 이 정도로 합시다.

 

여기 있는 소리, 리듬이라 하는 것은 물체가 있는데 거기서 리듬이 나왔고 소리가 나왔다. 따라서 만들어진 자들의 목표는, 나는 일개 정보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물체에서 정보가 나오게 하는 그 솜씨와 능력은 누가 때려줘야 돼요. 때려줘야 소리가 날 것 아닙니까.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릴 만드신 그분이, 내가 만들었다고 먼저 와서 접촉해주시면 그 접촉됨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서 나도 모르는 내 안의 예수 그리스도의 정보가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이것이 만들어진 목적입니다.

 

이게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세상에 모든 것은 오직 주를 위해서 만들었고 주로 말미암아 만든 거예요. 창세기 1장 아무리 들여다봐도 안 나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다고 나왔지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안 나오거든요. 그래서 신약에 있는 작은 소자가 구약의 선지자보다 더 큰 자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존재 목적을 비로소 알게 된 사람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있다는 아니니까 존재는 아닌 거예요. 존재란 말이 어렵기 때문에 있다는 말로 계속 갑니다. 있다는 것은 소리다. 그러면 방금 제 이론에 의하면 누가 자극을 해줘야 된다. 자극을 하지 않으면 나는 영원하다. 신을 닮아서 남은 죽어도 나는 무조건 살아야 된다는 것만 남는 거죠. 그렇게 남은 사람들이 죄거든요. 주님이 자극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유지되는 자기 자랑만 자기만 기념하는 소리가 자기 가문, 자기 가족자랑, 그것만 계속 리듬으로 나오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쏟아내는 것이 무엇인가? 그걸 지금부터 잠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령이 안 왔을 때 주님이 오지 않았을 때에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게 뭐냐는 겁니다. 그걸 왜 알아야 됩니까? 그걸 알아야 자기 자신부터 해서 남들이 정말 성령 받은 사람인지 분간할 수 있잖아요. 툭 치면 예수님이 나와야 될 건데 툭 치면 지 자랑질하게 되면, 나는 있다, 나는 지금도 살아있지만 천국 가서 영원히 산다. 맨날 자기가 존재도 아닌 게 존재 행세를 하는 거예요. 그러나 정말 성령 받은 사람은 나는 있다가도 빨리 은퇴를 해야 되고 그렇게 하게 하신 분이 진정 나를 있게 하신 분이라고 예수님만 증거하게 된다 이 말이죠.

 

그걸 알기 위해서 제가 신앙생활은,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이라고 했지요. 그처럼 교회에서 말하는 것 말고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의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의 모습이 뭐냐 하면, 이런 겁니다. 보신각에서 소리가 나왔다. 보신각은 그대로 있고 보신각에서 어떤 효과로 나왔다고 할 때 이 사람들은 손을 번쩍 듭니다. 보신각은 물질로 돼있고 물질은 분자로 돼있고 분자는 원자로 돼있고 원자는 핵과 전자로 돼있고 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돼있다. 이건 고등학교 물리시간에 나오거든요.

 

소리라고 하는 것은 이쪽에 있는 물질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고 에너지가 손상된 그만큼만 소리로 나온 거예요. 이게 학교에서 배운 겁니다. 소리는 그냥 음파에너지지요. 에너지의 향상입니다. 보신각은 물체지만 에너지 덩어리에요. 에너지 덩어리가 어떤 누가 치면 소리가 나오니까 이것이 물리학에서 진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은, 성령을 받지 않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과학을 진리로 여기며 살아간다. 그 이야기하는 겁니다. 유식한 척해도 그뿐이에요.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과학만이 진리가 되는 겁니다. 그 과학이 뭔지 알아요? 유에서 있음에서 역시 있음이죠. 있음에서 있음으로 분산된 겁니다. 없는데서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어떤 것도 먼저 있었고 그 있는 것이 모습만 바뀔 뿐이지 있음이 없어지지 않고 없음 자체가 애초부터 없다는 거예요. 없다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세상에 우리가 놓여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동의하는 진리입니다.

 

그것을 제가 방금 과학이라고 했지요. 저와 여러분이 다 아는 상식을 이야기해봅시다. 과학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으로 나눕니다. 자연과학은 물리학, 생물학, 의학 이런 것이고 사회과학은 경제학, 경영학, 언어학, 심리학 이런 것이고 인문과학은 영어 또는 수학, 신학, 철학 이거지요. 과학을 사람들은 진리라고 하지요. LG화학연구소가 신약을 개발했습니다. 진리입니까, 진리 아닙니까? 과학이지요. 과학이란 예측한대로 반드시 나와야 과학에선 진리로 수용합니다. 만약에 다른 게 나오면 진리로 수용하지 않는 냉철한 이성이 작용합니다. 진리입니까?

 

우리가 마귀가 어떠니, 신이 어떠니 하는 것은 교회 내에서 하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학교 다녀오겠다는 말은 불교신자도 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학교 다녀오겠다는 말이 잘못된 줄 몰랐지요. 불교신자는 뭘 모르느냐 하면, “만들어진 아버지여, 만들어진 어머니여 만들어진 내가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혹시 학교 파하고 집에 오기 전에 만들어진 속성대로 돌아가셔서 소리로 변해도 나는 섭섭지 않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학생 봤습니까?

 

LG연구원이 기도하면서 드디어 힌트를 얻어서 약을 개발해서 수많은 사람을 에볼라 바이러스에서 구했다 합시다. 그게 진리입니까? 그 속에 뭐가 빠져있어요? 나는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진즉에 죽어도 할 말 없다는 그 느낌이 신약 개발하는 가운데 오겠어요, 안 오겠어요? 안 오지요. 다른 제약회사 다 죽어라. 기도까지 하면서 신약 개발하는 나는 가치 있다. 이게 바로 악마의 모습이잖아요. 이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한다고요. 이게 로마서 16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로마서 16장에 나오니까 제가 자신 있게 이야기합니다. 어떤 목회자가 개척 교회하는데 사람 다 떠나고 두 명 남았습니다. 그래서 생계가 안 되니까 “목회해서 자식은 먹여 살려야 하지 않습니까? 밥을 먹어야 목회를 하지요.” 기도하는데 갑자기 옆의 교회 분열되어 50명 왔습니다. 그것도 돈 되는 사람만 왔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나 같은 인간은 죽어야 돼. 그런 생각이 들겠어요? 아니면 이 지역에 진정한 살아있는 종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겠습니까? 어느 쪽이겠습니까? 다른 목사는 다 죽어도 나만 살아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마귀에요.

 

피타고라스는 세상의 모든 것은 수의 질서로 봤거든요. 그러면 수학자가 새로운 집합론을 연구하고 새로운 이론을 펼칠 때에 논문을 발표해서 필즈상을 받고 할 때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이 작업을 하면서 비로소 알았다. 내가 바로 나의 영광과 나의 명예를 위해서 지금 하나님께 기도하는 나의 신적인 요소로 뜨려는 육의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구나. 나는 이 논문 발표하기 전에 교통사고로 죽어 마땅해.”라는 생각이 들면 그 사람은 진정 그리스도가 작용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나온 모든 결과는 누구 작품입니까? 주님의 작품인데 이게 주님의 작품인 이유가 정말 훌륭한 논문을 써서가 아니라 그 작품 과정에서 내가 미처 몰랐던 죽어 마땅한 그저 만들어진 멸망되어 마땅한 한 사람일 뿐인 것을 깨닫게 된 사실로 인하여 진리가 된 겁니다. 자기 부인된 거예요.

 

다른 목사 다 죽어라. 나만 목사다. 왜? 나는 기도 응답이 되었으니까. 너는 기도 응답 안 되니까 죽어라. 이것이 바로 악마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진정 주의 종으로 바라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주님을 보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의 역사를 눈으로 목격해야 믿겠다는 심보가 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아요. 내가 예수님이 필요 없다고 밀칠 때 그 순간 하나님이 예수님 편에서 나타나요. 내가 사랑한다고 할 때는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님이 나한테 해준 게 없다고 빠이빠이 할 때 밀칠 때 밀치는 그 자리에 아버지가 함께 있음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나는 주님 편에 있지 않고 주님만이 아버지 편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특히 아까 처음에 했던 것이 다 인간의 죄악 된 인간의 신학에 해당된다. 신학이란 이름의 과학에 불과하다는 것은, 있는 나를 천국으로 보내는 천국에도 있는 나, 있음에서 있음으로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차용한 큐티해서 얻어낸 그런 아이디어의 뭉치기 때문에 나는 저주받아도 마땅하다는 생각이 절대로 들지 않게 돼있어요. 그러니까 그건 진리가 아닌 거예요. 로마서 9장 3절과 어긋나는 겁니다.

 

그런 이유 중의 하나가 시간인데 시간은 세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라는 게 있어요. 또 어려운 것 시작했다. 또 하나는 카이로스, 그리고 아이온, 이 세 가지가 성경에서 쓰이는 시간입니다. 이 세 가지를 성경에서 사용한 이유가 있어요. 크로노스는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로, 이런 시간관이에요. 이건 죄악 된 우리 몸의 (시간)의식이 항상 이걸 느껴요.

 

과거, 현재라고 할 때 과거의 누적이 현재가 되는데, 그냥 과거의 누적이 현재가 아니고 과거를 기억으로 변형시켜서 현재를 만드는 겁니다. 왜 현재가 과거의 체험 중에서 기억할 것만 기억하느냐 하면, 현재 자기가 만들어짐을 부인하고 있음으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필요한 자료들을 기억 속에서 편집해서 만들어내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고생한 것도 다 주께 은혜를 얻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그럼 고생한 게 뭐냐? 지난번에 사업하다 망한 게 고생한 것이다. 여러분, 사업하다 망한 게 고생한 겁니까, 일곱 살 때 친구와 싸우다 코피 터진 게 고생한 겁니까? 지금 자기가 사업 망해서 섭섭하니까 과거에 친구와 싸워 코피 터진 건 잊어버리고 사업이 망했다는 것을 현재 자기가 회개하고 있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기억에서 뽑아내는 거예요.

 

베르그송이란 철학자가 이걸 증명해냈어요. 사람의 현재란 절대로 과거와 일치되지 않다. 편집하는 거예요. 그 편집을 얼마나 했으면 꿈속에 나타납니까? 프로이드는 꿈이란 편집이라는 겁니다. 의식은 무의식을 절대로 접근할 수 없다. 하지만 무의식은 살아있다. 살아있는 무의식이 의식이 납득이 가도록 일방적으로 의식에 의해서 편집되고 조작될 때 그걸 꿈이라 합니다. 그래서 꿈은 해석이 되지만 무의식은 해석이 안 돼요. 꿈 해석은 의식이 자기 변명하기 위한 해석이지 진짜 무의식은 해석이 불가능한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과학이란 현실의 나를 만들어지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기어이 계속해서 나를 있음을 붙들려하는 거예요. “주여, 이 정도까지 왔는데 지금 죽이면 섭섭합니다.” 자꾸 죽이지 말라는 거예요. 전쟁영화에서 엑스트라는 원래 시나리오대로는 총 한 방 맞고 죽게 돼있어요. 그런데 총을 맞고 빨리 죽어야 되는데 안 죽고 있는 거예요. 카메라에 지 얼굴 다 나옵니다. 주인공 따로 있는데 엑스트라가. 감독이, “컷! 다시.”

 

만들어진 것은 여러분, 또 잊어버렸지요. 소리입니다. 소리는 자기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무조건 살아야 된다는 나를 주님의 뜻에 의해서 움직이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변형시킨 그분만 증거하면 됩니다.

 

강의 새로 합시다. 물아, 미안하다. 선물 받았습니다. 이게 접니다. 묻습니다. “당신이 물인데 한 15년 물 생생하겠지?” “아니야. 선물 받은 거야.” 그 다음에 질문이 바뀝니다. “넌 언제까지 건강한데?”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니고 “누가 너를 건강케 해?” 또는 “누가 너를 몸을 망치게 해?” 질문을 “너로 하여금 만들어진 존재로 하게 하신 그분이 누군데?” 할 때 “그분은 진짜 영원히 있을 주님이야.”라고 증거하라고 병들게 하기도 하고 낫게도 하고 나은 후에 또 들게도 하고 하나님 자기 마음대로 하니 붙잡을 수 없어요.

 

우리는 주님의 정보기 때문에 정보만 나오면 되는데 지금 이 이야기는 뭐냐 하면, 정말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 존재에 집착하고 있는지 예를 들고 있습니다. 현재에 집착이 있으니까 성경에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선악과 따먹었지요.

 

지난 시간 복습해봅시다. 인간은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죽어봐야 나중에 무덤에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다 호출하기 때문에. 그때 주님 진작 믿을 걸. 그래도 소용없어요. 무덤에서 모든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모든 사람이 죽지 않는 이유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지 않아요. 그런데 죽는다는 것은 있음의 말씀이에요. 예수님 입장에서 모든 인간은 죽은 것이에요. 고린도후서 5장 14절 말씀 봤잖아요. 주님이 죽으심으로 나처럼 너희도 죽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하면, 죽님의 죽음을 증거하는 용도로 하면 되는데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우리는 죽어있어. 우리는 죽음을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해야 돼.”라는 소리가 그 정보가 자극을 안 받아서 나오지 않는 거예요. 언제 나오느냐? 죽고 난 뒤에 지옥 가서 주는 주시라고 고백하게 돼있어요. 제가 이야기해도 너무 섭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이게 섭하고 자시고 간에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만 안 해도 이런 이야기 안 합니다. 실제로 아무도 부활한 사람 없는데 혼자 부활해서 우리의 모든 사고방식을 뒤집을 판이에요.

 

부활만 안 해도 너 죽고, 나 죽고 이러면, 우리가 예상해서 “인간은 그냥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야. 오케이. 됐어. 살 동안 살자.” 이러면 되는데 우리 허락도 없이 죽은 자가 덜렁 살아나버렸으니까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이에요? 주님의 부활을 맛보고 정상이 되고 싶지만 주님께서 부활하고 나니 부활을 포함해서 정상이 되려고 하니까 그분을 우리가 밀쳤잖아요. 그러니까 밀친 그분이 부활했으니까 그분이 정상이라면 졸지에 모든 인간은 다 비정상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팩트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걔가 커서 예수님을 죽이게 되는 그런 소리를 내게 되는 겁니다. 효자 같지요? “하나님이여, 저는 효자니까 어떤 경우에도 나만 살려주옵소서.” 이러고 있는데. 효자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도 거룩하라고 할 때 거룩의 기준을 자기가 뽑아냅니다. 어디서 뽑아내느냐? 과거에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이 벌어진 것을 자아를 집어넣어서 봉합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선과 악이 봉합되지 않고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그럼 죽음은 뭐냐? 선과 악이 봉합되지 않은 채 벌어진 것이 죽음이에요. 이것이 합치 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안 죽으니까.

 

그런데 이게 죽은 거거든요. 주님께서 오호라 주의 이름으로 찬양하리라. 선과 악을 하나로 만들어서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진노라는 모습과 긍휼이라는 모습이 나올 때 주님께서 봉합했다는 결과로 그것을 보신각종처럼 우리를 치면 우리 속에서 진노가 무엇이며 긍휼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그런 소리로 이 땅에서 활동하게 돼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과 저는 전두환 전대통령을 늘 결부합니다. 왜? 신앙생활이란 교회에서 우리끼리가 아니라 실제 있는 것을 따와야 돼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전두환은 내가 알기로는 불교신자거든요. 그럼 저주받은 자란 안목이 나올 수 있다. 우리가 그런 안목이 있다면 소리로써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네가 감독으로 악한 일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아닙니다. 우리는 선악과를 내가 봉합했기 때문에 선은 취하고 악을 버리면 거룩인 줄 압니다. 이것은 있는 나를 계속 있게 하는 나의 죄악 된 본성의 발동이에요. 우리는 그것을 거룩이라고 이야기하고 그래서 우리는 주의 말씀대로 따랐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크로노스, 우리가 알고 있는 몸이 지니고 있는 육이 지니고 있는 과거-현재-미래란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전체를 과거-현재-미래라 하는 모든 것을 아이온에 집어넣습니다. 아이온은 세대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세대는 개인용이 아니고 인류 전체를 하나로 통합해서 시간 속에 집어넣을 때 그것이 아이온, 우리말로 세대입니다. 너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이 세대가 기적을 원하지만 표적을 원하지만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내가 보여줄 것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

 

이것이 에베소서 2장에서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참 에베소서 2장은 겁나는 이야기인데 여러분 다 아시는 이야기인데 너무 겁나서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이것은 전두환이고 노태우 관계없어요. 인간이십니까? 그러면 불순종 영 안에 갇혀 살았습니다. 이 세대 속에 살았습니다. 같은 말이에요. 못 빠져나옵니다. 이 세대 자체가 모든 인간을 다 아우르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이 세대를 모르고 어차피 태어난 자체가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동적으로 악하고 음란한 그 세대에 소속물인데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크로노스를 작동시켜서 어제보다 오늘 더 낫다고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대에서 자기만 따로 빼달라는 그런 주장입니다. 나만 살고 남 다 죽으라는 이 말이죠. 내 앞에 무릎을 꿇으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이온에서 어떻게 구원하느냐? 카이로스입니다. 이걸 성경에서 ‘때’라고 이야기해요. 여자여, 아직 내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의 개입이 되지 않았어요. 내가 보신각 작업을 줄 때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때가 되면 이게 갈라집니다. 갈라지면서 묵시와 역사가 만나는 순간입니다.

 

제가 뉴욕교회에서 강의할 때 멀리 보면 지평선, 수평선 보이는데 가까이 가 보세요. 선이 보입니까? 5키로 전방에 보이던 선이 현장에 가면 없어요. 선이 어디 갔지요? 묵시와 역사가 함께 있는 거예요. 멀리서 보면 보이는데 가까이서는 같이 있어요.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느니라.

 

묵시가 교회에 있다고요? 아닙니다. “아버지, 어머니 안녕히 계십시오.” 여기 안에 묵시가 있어요. 뭐만 붙이면, “만들어진 아버지, 만들어진 어머니여, 내가 학교 파하기 전에 돌아가셔도 주의 뜻인 줄 알고 순종하세요.” 이게 묵시에요. 이게 팩트에요. “어머니, 내가 수학 시험 100점 맞고 와도 좋아하지 마세요. 나도 만들어진 존재인데 100점 맞고 오다가 자동차에 치어 죽을 수도 있으니까 각오하세요.” 이게 묵시와 역사의 만남입니다.

 

만들어진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인간은 죽은 세대 속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충분한 소리로써 제 역할을 다한 겁니다. 내가 있어야 된다는 어떤 근거도 없습니다. 있음은 알파요 오메가인 그분만 있으면 되는 거예요. 그분이 카이로스, 때를 따라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면 우리가 선물을 받은 겁니다.

 

우리가 선물을 요구한 적이 없는데 갑자기 바늘로 쑤셔서 나에게 바늘의 효과가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내 안에 잠재돼있던 만들어진 속의 정보가 나오는데 그 정보에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인지, 안 받은 사람인지 판정이 나는데 그 정보가 뭐냐? 주를 사랑하는 자는 저주받지 않고 축복 받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진노와 긍휼을 우리가 보여준다면 그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강의하고 난 뒤에 성 목사님이 저한테 이런 이야기했어요. 목사님의 설교는, 침도 작은 침이 아니고 기다란 큰 침으로 쑤시기 때문에 잘못 맞으면 작살난다는 거예요. 우리는 끝까지 갈 때까지 가야 됩니다. 어설프게 신앙 흉내 내서는 안 되고 관통해야 돼요. 도대체 누가 신앙생활 못하게 합니까? 그거는 일상생활에서는 효도인 척하고 신앙생활을 교회에서 하려는 우리가 자로 신앙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시편 136편에 보면, 해를 지으신 분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지요. 해를 보라. 너보다 훨씬 철이 있다. 해는 자기 영원함을 보이잖아요. 무엇의 영원함? 인자하심의 영원함을 보이잖아요. 별을 지으신 분에게 찬양하라. 주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라.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나의 영원함을 찬양하라. 댕~ 하고 소리가 나야 되는데. 우리에게 나오는 소리는 유에서 유가 나오는 소리에요. 이렇게 훌륭하니까 더 살아야 된다는 자기의 생존의지만 나오는 그런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나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그것만 나오는 거예요.

 

목사님, 그래도 살고 싶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까? 여러분, 안 죽습니다. 그런데 인자의 긍휼, 주님의 속성이 안 나오면 그거 죽은 겁니다. 방금 안 죽는다며? 안 죽거든요. 안 죽는데 그게 죽었어요. 분명히 안 죽는데 주님께서는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죽었다고 하는 게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진노와 긍휼이 안 나오니까 죽은 거예요. 그러면 죽으면 죽습니까? 죽으면 안 죽어요. 왜? 나중에 마지막에 무덤에서 끄집어내서 지옥 보내니까. 지옥 가는 사람 안 죽어요. 지옥에서 살아있어요. 그런데 그게 죽은 거예요.

 

성경에 영과 육이라는 게 있습니다. 로마서 9장 3절에 보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렇게 돼있지요. 영과 육은 관계로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와 관계돼있는 사람은 영이고 그리스도의 작업을 받지 못한 사람은 육이에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났으면 영이에요. 이렇게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선물로 줘야 육에서 영으로 갑니다. 영에 속한 사람일 경우에만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채로 자기가 신의 흉내 낸 사람이 육이란 걸 압니다. 따라서 육이 알고 있는 인간의 존재는 육과 혼과 영으로 돼있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육과 혼과 영은 뭘 근거로 하느냐 하면, 내가 있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내가 있음이 아니고 만들어진 거거든요. 만들어질 때 주께서 죽이면 죽이시고 살리면 살리시고 주님 마음대로 합니다. 그 관계가 바로 영의 관계에요.

 

분석하겠다는 이유가 뭡니까? 분석해서 알아서 내가 이중중생, 이게 워치만 니 주장인데 육에서 혼으로 한 번 점프하고, 혼에서 영으로 점프하면 두 번 거듭나야 그게 영생 얻는다는 거예요. 기존교회에서 하는 중생은 첫 번째 중생이고 우리 지방교회에 와서 한 번 더 거듭나야 천당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무슨 노림수입니까? 살고 싶습니까, 행복하고 싶습니까? 도와드리겠습니다. 혹 하고 말려들었지요.

 

관계입니다. 관계라는 것은, 우리는 나뭇잎의 물방울 같아서, 제가 관계라는 어려운 말을 했는데 사실은 야고보서에서는 간단하게 돼있어요. 너희는 안개니라. 야고보서 4장 13,14절에 보면,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는 주님의 관계일 뿐이니라. 독자적으로 존재라고 주장하는 그것이 아니니라. 너는 주님의 관계기 때문에 그 뒤에 주의 뜻이면 죽기도 하고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리니. 제가 지금 공자, 맹자 책 폈습니까? 야고보서 4장 14절, 15절 읽고 있잖아요. 성경에 있잖아요. 존재가 아니고 주님에 붙어있는 물방울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만 증거하면 되지 따로 독자적으로 내 존재의 가치를 논할 그런 자격이나 권리가 우리한테 없다는 이야기에요. 따라서 허탄한 네 자랑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일해서 얻었다고 자랑하지 말고 주의 뜻으로 얻었다고 이야기하라 이 말입니다. 주의 뜻으로 이만큼 많은 재산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인지 알아요? 주의 뜻이면 있는 재산 다 가져가도 참 잘하셨습니다. 동의합니다. 그런 각오가 돼있느냐, 이 말입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로마서를 준비했는데 그것은 시간상 안 되고요. 마지막으로 전도서 5장을 보겠습니다. 마지막이니까 조금만 견뎌주세요. 제가 부탁드립니다. 전도서 5장 18절,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노라 이것이 그의 분복이니라”

 

전도서 9장 7절에 보면,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성경에서 지금 포도주를 권하고 있네요. 8절,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게 주의 명령입니다. 이게 팩에요.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즐겁게 사세요. 왜? 어차피 헛된 인생인데.

 

주실 때 내 것이라고 여기지 마시고 주실 때 즐기라고 주신 선물입니다. 선물을 그냥 알아서 하라가 아니라 즐겁게 살라고 선물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즐겁게 살면서 이게 만들어진 임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진노 받아도 마땅한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하나님이 이러한 분복을 주셨사오니 이것은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은혜라고 마음껏 즐겁게 사시기 바랍니다.

 

제약회사 연구원이 열심히 신약 개발한 그 즐거움에 탐닉하시기 바랍니다. 수학자가 자기 연구실에서 새로운 수학이론을 발견하는 그 즐거움에 매진해주시기 바랍니다. 교인이 다섯 명이라도 열심히 기쁘게 목회하는 즐거움에 매진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으로 자기 영광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살아도 남은 다 죽으라는 이런 용도로 사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관계입니다. 관계는 뭐냐? 부분 속에 전체가 다 포함돼있습니다. 집합론에서 이걸 부분집합이라고 합니다. 홀로그램, 입체사진이에요. 우리는 보신각종입니다. 주님이 들어있어요. 주께서 때릴 때 우리는 진노 받아도 마땅하고 오늘 죽어도 되는데 살아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여러분에게 주신 일로 즐겁게 하시기 바랍니다.

 

포도주를 마시라고 했지요. 만약에 현대인이라면 주께서 명령합니다. 고스톱을 즐겁게 치라. 고스톱 저주하면서 온 사람에게 미안한데요, 끝까지 갑시다. 이제는 고스톱 안 친다고 하지 마시고 전에는 나는 돈 벌어 살아야 된다는 마음으로 했다면 주여, 저는 고스톱 끊었습니다. 고스톱 이야기 괜히 했다. 오해의 소지가, 후회스럽네요.

 

좀 건전한 것으로 합시다. 박태환이 수영하면서 금메달 못 땄어요. 하지만 즐겼으면 분복입니다. 만약에 금메달 스트레스 받으면 그것은 자기가 계속 잘난 존재로 우기겠다는 악마적 속성의 발휘에요. 금메달 주시면 금메달, 은메달 주시면 은메달, 그것을 목적으로 하지 말고 주께서 주신 분복으로 즐기면 그게 은메달이 되던 동메달이 되던 주님의 긍휼에 대한 우리의 마음의 표현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교회 나오시되 즐겁게 나오세요. 주님 주신 분복입니다. 아프면 못 나오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교회 나오면서 빨리 1부 예배 마치고 도망가서 <왔다 장보리> 보려고. 그런데 그걸 저는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진짜 끝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교회 봉사할 때 로마서 14장에 나오기 때문에 제가 할 수밖에 없는데, 봉사하라니까 갑자기 어떤 집사님이 봉사 안 합니다. 목사님이, “왜 같은 조인데 봉사 안 하십니까?” 하니까 “내가 꼴보기 싫은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 낯짝 보니까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 어떤 여자는 남편만 보면 토하고 싶은 여자도 있어요. 그것 목사님이, 믿음 없다고 하면 안 돼요. 형제를 시험치 말라고 로마서 14장에 나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하고 싶어도 미운 것이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유 대는 게 비겁한 변명이에요. 좋은데 이유가 있습니까? 자기 아내가 있는데 옆에 예쁜 여자 갈 때 차 운전하면서 돌아보다가 박으면 이건 이유가 없어요. 예쁜데 무슨 이유가 있어요. 도대체 예쁜 걸 예쁘다고 하는데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예쁘지만 아내가 있으니까 나는 자제해야 된다. 이건 솔직한 게 아니죠. 예쁜 건 무조건 예쁘지요. 아내 있다고 안 예쁜 게 아니거든요. 믿음의 분량대로 섬기라.

 

그리고 봉사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봉사하니까 옆의 사람이 수군거립니다. “봉사 좀 한다고 자랑질, 잘난 척하기는.” 그런 소리 들릴 때 때려치우지 마세요. 그 사람이 하는 것도 주의 뜻이 있고 내가 하는 것도 주의 뜻이니까 그냥 하고 심판은 어디에 맡겨라? 최 집사 심판은 주께 맡기면 되는 겁니다. 그게 형제애에요. 그게 로마서에 나옵니다. 우리는 만들어진 것이지 존재, 있음이 아니에요. 만들어졌다가 언제 사라지듯이 사라지는 거예요.

 

이제는 신앙생활을 합산합시다. 교회뿐만 아니고 찬양해도 좋은데 찬양을 하던 바깥에서 뭘 하던 간에 우리는 만들어지고 찬양이나 설거지하는 것도 주께서 즐기라고 준 거니까 여러분 즐거워하면서 얘들 회초리 들고 때리시고 즐거워하면서 남편 바가지 긁으시고 남편은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아내의 바가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받아주시고 모든 것이 즐겁게 하세요. 이것이 분복입니다. 그리 안 돼요? 안 된다면 주께서 즐겁게 하시도록 그 다음 조치가 따라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리듬이기 때문에 세상 전체가 주님이 흔들어대는 물동이기 때문에 우리는 물방울이고 바다는 주님이니까 물결이기 때문에. 작은 것을 보지 말고 넓게 보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앙생활을 교회에 국한했습니다. 오늘도 신앙 생활하러 가자고 성경책 들고 교회에 왔지만 실은 주님께서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형식을 보지 않는 주님이 밖에 나가서 즐겁게 하시되 그것이 주님이 주신 분복인 것을 잊지 말고 기쁘게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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