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미국뉴욕교회 본문
20141002 미국뉴욕교회
(강의:이근호 목사)
녹취:한윤범
오늘은 욥기 하겠습니다. 욥기 1장 6~8절까지 제가 읽습니다. 구약성경 761페이지.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아멘.
복음이란 것은 죄인을 예수님의 희생으로 용서하시는 겁니다. 죄를 용서할 때 죄를 용서할 만한 죄는 예수님이 대신 희생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해서 복음이란 자기 죄에 대해서 자기가 뭔가 관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희생하심이 나의 온전한 모든 죄를 용서하신 것을 받아들이신다면 장담합니다. 오늘밤에 낙원 갑니다. 돌아가셔도. 이게 기쁜 소식이라 해서 복음이라는 거예요. 인간이 나에 대해서 하지 않아야 될 이유가 욥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내 구원에 어떤 것도 관여하지 않아야 될 이유는, 내 몸이 예수님의 영광을 위한 몸이지 내 영광을 위한 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위한 몸이라면 예수님의 처분에 맡겨주시면 되는데 예수님의 처분이 나에게 어떻게 오느냐 하면, 예수님 홀로 희생하시고 고생하시고 애쓰심이 우리를 완전히 아이스크림이 흘러내리듯이 온 전체에 예수님의 희생하심이 범벅이 되고 넘쳐흐를 때 그때 가장 예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제가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있어요. 로마서 3장 23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머리 좋은 사람은 감이 옵니다. 잘 들어보세요. 죄 지면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는구나. 그보다 머리가 더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죄만 없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네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죄가 있으면 영광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죄가 없으면 영광이 됩니다. 그렇다면 죄를 없애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위해서 다른 건 일체 생각하지 아니하고 인간의 죄만 없애는 작업만 하셨겠네요.”라고 하신다면 아이큐가 한 150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됩니다.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세요. 인간이 죄를 범했으매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었습니다. 그 다음 우리 생각이, 죄만 없애면 영광되겠네. 오케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일을 하실 때 자기 영광을 포기할 일은 없잖아요. 그러면 자기 영광을 위해 하실 일은 뭐냐 하면, 죄 없애는 일만 하십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일번으로 옮겨가요. 죄가 없으매 자동적으로 영광이 되는 겁니다. 전혀 복음 어렵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죄가 있으면 영광이 안 된다. 이건 알아요. 자기 죄를 해결 못하니까 다른 열심을 가지고 영광 돌리려는 다른 루트, 통로를 만들었어요. 그렇게 돼버리면 하나님의 원래 의도, 죄만 없으면 영광 되는데 이건 뒷길로 돌은 거예요.
사업자가 건축사에게 설계도대로 잘 지으면 건축비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건축가가 실력이 없어요. 그래서 발주한 사람에게 뇌물주면서 좀 부실해도 봐주세요. 실력 없는 것 눈감아주시면 황금덩어리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주문자가 나의 관심은 이 집에 제대로 잘 지었는가에 있는데 당신은 다른 방식으로 열심 내고 뇌물 바쳐서 나를 기쁘게 하려고 하는데 애당초 나는 당신에게 그런 것 요구하지 않습니다. 완벽하게 집 지어내세요. 이러면 당신은 나와 거래 못합니다. 그러면 이쪽에서 사람이 왜 융통성이 없어요?
여러분, 하나님은 융통성이란 게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만 있으면 저주하고 죄 없으면 무조건 영생에 넣어주시는 전혀 융통성이 없으신 분이에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 지부터 압시다. 하나님, 저 예쁘지요? 귀요미, 어떠니. 죄가 없으면 귀요미고, 죄가 있으면 마귀가 되는 거예요.
이 성경을 어떻게 다 압니까? 이 두꺼운 걸 어느 세월에 신학교 갈 것도 아니고 어떻게 다 알겠어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립니다. 죄가 있으면 영광 아니고 죄 없으면 영광입니다. 응용문제 들어갑니다. 가난합니다. 영광입니까, 영광 아닙니까? 가난해도 상관없어요. 그러면 내가 몸이 약합니다. 영광입니까, 영광 아닙니까? 몸이 약해도 괜찮아요. 죄만 없으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제가 열심히 노력해서 죄 없애겠습니다. 주님께서 부릅니다. 그 죄 없애는 방법은 하나님이 따로 준비했다는 거예요. 자기가 하이타이 풀어서 이태리타월로 문지른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고 내가 착한 일 많이 한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죄가 없으면 영광이 되는데 없애는 방법도 이미 하나님께서 따로 준비했어요.
세 살 먹은 소녀가 엄마 손님들 오니까 엄마 도와주겠는 가상한 마음으로 잡채도 만들고 탕수육도 해봅니다. 엄마가 보니까 이건 엉망이에요. “엄마, 내가 정성을 다하여 성의를 다하여 열심을 다하여 했으니 제 성의를 받아서 어머니의 영광이 되시옵소서.” 엄마는 쓰레기통에 그대로 넣습니다.
너는 죄 짓는 방법에서 따로 네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지 마라. 죄 짓는 방법조차 내가 준비한 방법을 그대로 받으시면 그것이 영광이에요. 따라서 키르케고르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정성을 드리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사람이라고. 19세기에 유명한 기독교철학자가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하나님이 주시는 방식, 십자가 외에 다른 방식으로 영광을 돌리면 그거는 주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마귀의 장난이니까 주께 영광이 안 되는 겁니다.
제가 초반에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하나님 섬기는데 너무 부담 갖지 마시라고 이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야말로 실질적으로 기쁜 소식이기를 바랍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영광 받는 방식을 주께서 친히 준비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친히 예수 그리스도 자기 몸을 드리사 화목제물로 드림으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 경건치 않은 자, 이런 자까지 자신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게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도 의롭고 본인도 의롭고. 로마서 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없는 이야기 기쁜 소식 지어내려고 일부러 만든 게 아닙니다.
정리합시다. 일 아홉 시에 마치고 오셔서 힘드신데 그 다음에 정리할 몫은 제가 해야 되니까 할 수 없어요.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1.하나님의 영광은 죄 없으면 된다. 2.그 방식도 하나님이 준비했으니까 받아 챙기면 된다. 강의 끝낼까요? 아닙니다. 그 다음 문제입니다.
당신 주장이 맞는다면 성경에 창세기도 필요 없고 데살로니가도 필요 없고 당신이 말한 로마서 3장, 5장 달랑 두 장만 있는데 욥기는 왜 있느냐?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질문이에요. 저는 그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어떻게 바꾸느냐 하면, 출애굽기 왜 있고 민수기 왜 있습니까? 이렇게 묻는 것과 같은 거예요. 아까 식당에서 목사님이 뉴욕모임에 초신자를 위해서 살살 하시라고 하셨는데 아무리 초신자라도 창세기 다음에 출애굽기 있다는 그건 아시죠. 그 출애굽기에(이건 안 믿는 사람도 아는데) 십계명 있다는 걸 아시죠.
이야기 다시 합니다. 하나님이 죄 없으면 기뻐하시고 죄 용서하는 방법도 친히 준비했기 때문에 따로 준비할 것 없다. 그것 알면 영광이다. 그러면 십계명은 왜 있습니까? 이근호, 당신 말이 옳다면 출애굽기 20장에 십계명이 왜 있느냐 말이죠. 그것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것과 욥과 관련돼있어 그래요.
이건 여러 번 해도 참 기쁜 소식이라서 씁니다. 죄가 없으면 영광이 된다. 죄가 없어야 영광이 되기 때문에 죄는 필히 등장해야 됩니다. 죄가 필히 등장해서 그 죄가 사라져야 영광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병 주고 약줍니다. 병 주고 약 줘야 약사와 의사가 먹고 살아요. 죄를 발생시켜놓고 죄를 없애는 방법에 하나님이 친히 투입해서 영광을 홀로 다 받으시거든요. 죄를 만드는 방법은 우리가 나가서 칼 들고 설치는 게 아니고 법이 있어야 돼요. 법이 있는 곳에 필히 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이 법이에요. 십계명이 왜 있느냐? 법이 있는 곳에 죄가 있고 그 죄가 있는 곳에 저주가 있고 그 저주가 지상에서 구체적인 방법은 죽음입니다.
우리교회는 이처럼 좋은 예배당이 아니고 허름한 상가거든요. 예배드리고 있는 중에 가스배달 오고, 뒤에 수도 검침합니다. 저는 그걸 보고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 사람이 분명히 우리교회에 왔는데 자기는 자기 생존하는 일만 신경 쓰기 때문에 마이크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들을 수가 없어요. 검침하면서 제 설교를 듣는지는 모르겠는데 무리한 요구겠지요. 어쨌든 검침을 해요. 검침하면 그 사람 밥 먹고 살고 가스배달하면 밥 먹고 삽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기 죄를 압니까? 죄를 모르지요. 문제는 그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이에요. 지금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아직 깨나지 않고 있어요. 돈 수십조 원이 넘잖아요. 그런데 돈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죽는데. 죽는 거야 다 죽지. 죽는 이유를 모르는데요? 가스배달하고 수도 검침할 때 지금 강단에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죽는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죽는 이유 안다고 가스배달하지 말까요? 아니에요. 우리는 밥 먹고 살아야 됩니다. 이왕 죽는 것, 죽는 이유나 알고 죽읍시다. 우리 아버지, 우리 할아버지 돌아가셨습니다. 남의 이야기 아닙니다. 그 다음에 누구 차례인지 모르겠어요. 죽음엔 순서가 없으니까.
그러나 오늘밤에 네 영혼 데려간다. 이 말은 병 주고 약 주는 겁니다. 강도, 살리지 않았습니다. 강도를 강도짓해서 죽이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에요. 그 죽은 강도를 살리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놓고 누가 영광 받느냐? 주님이 영광 받는 겁니다. 내 죄 효과 만점이네. 강도도 천국 가잖아. 세리도 천국 가잖아. 창기도 천국 가잖아. 봐라. 내 솜씨 봤지. 어떤 죄도 용서받는 것 봤지. 그 이야기를 설교하고 있는데 그 사람은 검침 옵니다. 가스배달와요. 그리고 삼성그룹을 위해 너무 과로했는지 지금 혼수상태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가 어디서 영광이 오는지 그 영광의 구체적인 방법은 죄 씻음에 있다는 것도 모르고 심지어 죄 씻는 방식은 따로 이미 주님께서 피로써 다 해결했다는 화목제물로 해결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오늘도 살아야지. 살기는 뭘 살아요? 결국 죽는데. 평생토록 최선을 다해서 다 살아왔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정말 사는 것, 영생은 어떻게 살까요? 영생은 내가 만들었습니까? 주께서 영광 받으시려고 만들었다면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마지막 죽을 때 십자가 피만 외쳐야 돼요. 주께서 친히 준비한 것을 외쳐야 돼요.
참 이민 올 때 기막힌 사연들 갖고 왔잖아요. 어떻게 다 말할 수 없지요. 고생 무지무지하게 했지요. 하지만 고생하면 구원받습니까, 최선 다하면 영생 얻습니까? 영광이 안 되는데요.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할까요? 영광이란 죄가 없어야 돼요. 그러면 뉴욕에 이민 오면 죄가 없어집니까? 안 돼요.
율법을 준 것은 인간이 지킬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율법을 준 것은 죄를 더하게 함이라.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 따라서 내가 죽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죄 진 자가 저주받는 것이 아버지께 영광이라면 아버지여 그렇게 조치하시옵소서. 그게 주의 법에 합당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밖에 없습니다. 저 뒤에 검침하러 오신 분, 당신 죽습니다. 하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아직 젊은 사람에게 죽는다는 말하지 말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이고 우리는 그 영광을 위하여 주어진 겁니다. 일단 이것까지 이야기했습니다. 죄를 만들어내기 법을 주셨다는 겁니다.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하셔요. 그렇다면 법이 없는 곳에는 죄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죄 안 짓게 하면 어떻습니까? 법이 안 줬으면 우리가 죄인 안 될 건데 그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아닙니다. 죄를 용서하심으로 예수님이 주가 됨으로써 영광이 되는 거예요. 지금 제가 이상한 말을 하고 있잖아요. 일부러 병 주고 약 주는 거예요. 일부러 병 줘서 병자로 하여금 약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도록 병부터 주는 겁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물어보지도 않아요. 죄 줘놓고 죄 씻어주고 모든 영광은 오직 주님만 받으면서 천국 갈 때 면류관도 반납시키는 겁니다. 천국 가서 면류관 던지기 바빠요. 제가 쓰는 건 합당치 않습니다. 주께서 쓰셔야 됩니다. 그것을 지금부터 시작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피아노 반주하는데 “집사님, 피아노 반주합니다.” 하면 피아노 반주하다 면류관 던져버리고. “집사님, 꽃꽂이.” 꽃꽂이하는 면류관을 던져버려요. “목사님, 설교도 잘하시고.” 설교 집어던져. 모든 영광은 나같이 반주하면서 지 자랑하는 이런 죄를 십자가 피로 용서하신 그 피 흘리신 그것으로 인하여 그 방법으로 영광 받는 거예요.
지금까지 서론입니다. 욥은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법이 있음으로 죄가 있고 이 죄를 씻어줌으로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법이 있다는 것은 출애굽기고 민수기입니다. 그래서 이 노선을 언약노선, 율법언약,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드러나게 되면 다윗 한 사람이 받은 용서로 수하에 있는 모든 백성이 공짜로 구원 얻는 다윗언약으로 책임이 이전됩니다.
문제는 구약에서 이 노선만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 노선만 있는 게 아니에요. 어떤 노선이 있느냐 하면, 이 법 안에 누가 들어있으면, 법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려주는 노선이 있어요. 그 노선이 욥입니다. 어렵지요.
죄 짓기 전에 인간은 무엇 때문에 생겨나야 하는지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욥기 1장 6절에 보면,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이 안에 인간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 없지요. 천사와(사단도 천사니까) 하나님밖에 없지요. 그렇다면 인간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이란 하나님의 천상회의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은 왜 있는지 거론함으로서 죄 짓기 이전에 인간이 무엇 때문에 생겨났는지 밝혀집니다. 인간의 원형. 하나님 계시고 천사 있으면 그걸로 족하지 인간은 왜 있느냐 이 말이죠. 하나님이 천사로 충분히 영광 받으실 수 있는데 인간은 왜 있느냐는 겁니다.
그것을 알려면 살짝 컨닝을 해야 돼요. 인간이 빠진 상태에서 뭐라고 하느냐고 봐야 됩니다. 오늘 같은 선선한 가을에 부부가 저녁에 퇴근하고 만나서 “여보, 당신과 이야기할 게 있어.” 철없는 얘가, “아빠, 무슨 이야기인데?” “너는 네 방으로 가. 엄마와 이야기할 거야.” 그러면 얘들이 더 궁금해요. 얘는 문 열고 본다고요. 컨닝하는 거예요. 나를 빼놓고 무슨 소리하는지. 그 무슨 소리가 인간을 태어나게 만들었어요.
부모만 있는 상태에서 어떤 이야기가 인간이 미처 자기 한계 때문에 뚫을 수 없던 인간 존재의 비밀이에요. 거기서 천사와 하나님의 대화 속에서 내용이 나오고 그것이 인간 속에 담기게 되면 인간의 시작입니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묵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욥기를 묵시문학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무엇과 대조되느냐 하면 투입된 법이 진척되면서 죄가 더욱 더 증가하게 하는 이런 죄의 이동을 역사라고 하거든요. 바르게 살고 싶지만 점점 더 죄 쪽으로 가는 간격이 벌어지는 이동의 사태가 다음 순서로 자꾸 밀릴 때 이걸 역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민수기 10장에 보면, 언약궤를 앞장세우면 반드시 적들이 물러가게 돼있고 또는 패배하게 돼있어요. 만약에 여기 교회에 언약궤처럼 상자가 있다고 합시다. 이 상자를 어떤 가게든지 어떤 집 문 앞에 들이대면 무조건 24시간 내에 그 집안의 가족이 몽땅 회개해서 이 교회로 다 올 수 있는 신기한 상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로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민수기 10장에 보면, 언약궤를 앞장세우면 적들이 너희에게 돌아온다는 거예요. 굴복해서. 세상에 아직도 그런 무기가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좋아요.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을 살리는구나. 이제 이스라엘은 걱정 없다고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앞장세웠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언약궤 빼앗겼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언약궤를 이스라엘을 위하여 준다고 해서 전쟁에 써먹으려고 했는데 써먹기는커녕 언약궤 빼앗기고 그럼 언약궤가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했는데 그럼 그 효능과 그 작용은 하나님께서 거짓말한 것인가? 그 다음에 보니까 그 언약궤가 혼자서 돌아다니면서 블레셋 진영을 완전히 초토화시켰어요. 다곤 신상 앞에 여호와를 이겼다고 전리품이라고 언약궤를 모셔놨더니 아침에 가보니까 다곤 신상이 발목 다 부러졌어요. cctv 놔봤으면 좋겠어요. 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옛날 고대에는 신과 신의 전쟁이거든요. 새벽 2시 30분에 어떻게 해서 다곤 신상이 엎어져서 관절이란 관절은 다 부러졌어요.
그래서 감당이 안 되니 제사를 안 드려서 그런 줄 알고 이스라엘 흉내 낸다고 제사를 하지만 그 마을 쪽에, 예를 들면 뉴욕 중국거리에 에볼라 바이러스 완전히 퍼져버렸고, 뉴저지 저쪽에 전염병이 퍼져버리고 도대체 감당이 안 돼요. 보세요. 누가 이겼습니까? 언약궤가 이겼지요. 약속 지켰지요. 그런데 승리의 영광이 이스라엘한테는 돌아가지 않는 거예요. 인간이거든요. 인간은 주님의 영광을 가로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뤄지되 그것을 이용해서 자신의 체면과 자신의 자존심과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주님의 죄 용서 방법을 자기 자랑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주께서는 피해갑니다. 난 너와 안 논다.
법을 주었지만 지킨다고 착각했지요. 하지만 그걸로 통해서 숨어있는 주어진 법 때문에 안에 내장된 법이 더욱 더 크게 노출되면서 역사는 흐른다. 이스라엘 역사는 망할 때까지 흐르는 거예요. 이게 구약의 흐름입니다. 죄가 얼마나 깊이 있게, 주님이 주신 말씀을 주면 줄수록 인간은 마치 드릴 같아. 주신 법을 지키려고 하면 점점 더 인간 자신도 알지 못하는 더 깊게 빠지게 되지요.
그럼 목사님, 그 당시 사람들 지옥 갔습니까? 아니지요. 죄가 깊은 만큼 선지자의 희생도 같이 비례해서 깊어지는 겁니다. 나중에 어느 정도까지 되느냐 하면, 메시아가 와서 채찍에 맞아야 나음을 입는 지경까지 가는 거예요. 얼마나 인간이 죄에 대해서 해결책이 없으면 구원자 자신이 말로 해서는 안 돼요. 아예 구원자가 내 몸 줄게. 너 살리기 위해서 네 대신 내가 모든 저주와 사망을 다 받을 테니까. 그때에 너는 나로 인하여 구원되리라. 그게 일관된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이 했어요. 그래서 너무 쉽습니다. 그런데 법의 노선이 욥에는 정차를 안 하네요. 그냥 지나가요. 욥이 여기에 투입되는데, 아까 한 걸 다시 이야기하면, 율법이 있어 죄인 되었는데 선악과 따먹기 이전에 진짜 인간은 무슨 내용으로 되어 있느냐? 그 점은 이런 역사와 관련 없는 역사를 떠난 묵시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겁니다. 주어지게 되면, 끝이 시작이 되고 시작이 끝이 돼요. 이 말은 괜히 했다. 하여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여러분, 수평선이나 땅 끝을 보면 지평선이 있지요. 수평선이나 지평선 가까이 가보세요. 선이 있습니까? 선 없지요. 지평선, 수평선 어디로 갔습니까? 지평선이라고 플래카드 걸어놨어요? 없지요. 그런데 멀찍이 보세요. 분명히 선이 있지요. 묵시와 역사가 맞닿은 선이 있습니다만 막상 묵시와 역사가 같이 있는 데는 이게 역사인지 묵시인지 구분이 안 돼요. 그래서 제자들이나 심지어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알파요 오메가, 시작과 끝이신 분이 오셨는데 사람들은 자기와 똑같은 아저씨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사울은 그런 이단을 죽이는 것이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예수님이 사울에게 나타나서 네가 역사도 분간 못하고 지평선도 모르냐는 식으로 네가 핍박하던 나사렛 예수니라. 내가 선이다. 내가 유일한 선이었단다. 네가 보기에는 보통 평범한 서른세 살 먹은 청년이지만 이게 선이다. 나 외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인간에게 허락한 적이 없다. 왜? 나는 화목제물로 왔기 때문에.
율법으로 죄를 만들어주시고 그 죄를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대신 처리하는 방식으로 그 사람의 죄를 잃었다가 얻는 방식으로 그 과정 자체를 영광으로 받는 거예요. 잃어버린 적이 없는 아흔아홉 마리 양은 소용없어요. 잃었다가 찾은 사람. 아버지 돈 다 날리고 온 탕자가 그 과정과 예수님의 희생이 매치가 되면서 주님을 우리가 알아본 겁니다. “주님, 피 흘렸지요?” “어떻게 알았지?” 우리가 생각하는 주님은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아닙니다. 피 흘린 분이에요. 훌륭하시고 똑똑하시고 아이큐 2500이고. 아니에요. 그냥 피 흘린 분이에요. 피 흘린 분으로 알 때 우리는 나와 주님과 관련 있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피 흘렸는데 누구 때문에? “나 때문에 피 흘렸지요?” 하고 묻는 것, 이 말은 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바로 하나님은 죄를 있게 하시고 그걸 없애는 과정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예수님 찾지 마시고 피 흘린 예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제 수요일에 했어요. 죄인은 죄인으로 구원한다는 겁니다. 죄인을 신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같은 죄인이 죄인을 구원합니다. 십자가 세 개 있었습니다. 가운데 예수님, 양쪽에 강도. 한 사람 건짐 받고 한 사람 지옥 갔지요. 죄인이 옆에 있는 죄인을 구원합니다. 구원받은 강도, 믿음 최곱니다.
물에 빠졌으면 뭍에 있는 사람한테 건져달라는 게 상식인데 옆에 같이 허우적거리는 물에 빠진 사람에게 물에 빠진 박태환아, 네가 나를 오늘밤 낙원에, 이런 식으로 대화가 오고가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놀랐습니까? 돈 많은 사람이 뉴욕에 사는 한인들 도와주는 건 되는데 같이 사업 망한 사람이, 네가 나와 함께 내일 부자가 되리라. 이게 말이 됩니까?
교회 목회 어려워서 허덕거리면서 한 달 전에 오십 명, 그 다음에 사십 명, 삼십 명, 이제 열 명 남았는데, “목사님, 개척교회 안 되지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교인 몇 명입니까?” “두 명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두 명이 무슨, 지나 나나 같은 신세인데 어떻게 돕는다고 해요. “당신을 위해서 내가 채찍 맞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대화가 되는 겁니다. 이게 유일한 영광이에요. 다른 영광 찾지 마세요.
저분은 죄가 없는 데도 불구하고 저분에게 있는 죄는 내 죄를 가져가기 위한 죄라고 알아보는 이 안목, 성령, 예수님의 영이 아니면 누구도 그 안목 없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주장하면서 그들은 남북통일문제, 경제문제 해결하는 예수를 들고 나왔어요. 그 예수는 예수 아닙니다.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그 예수님을 어디서 찾을 거냐는 겁니다. 욥기 1장 6절 다시 읽겠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하나님 계시고 그 앞에 천사들 있고 사단도 있습니다. 이 광경에서 주목 받는 무리는 천사가 아니고 사탄입니다. 제가 지금 묵시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역사 말고요. 죄 짓기 전에 원형적인 인간은 어떤 내용을 품고 있느냐? 더 나가서 인간은 왜 있느냐? 그걸 푸는 겁니다. 인간은 왜 생겨나야 하는가?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지금 천사도 제치고 하나님께서는 사단과 이야기합니다. 욥기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사단과 내기를 하는 겁니다. 욥의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욥은 지금 이 땅에서 정신없이 농사짓고 바빠요. 하늘나라에 무슨 일이 있는지 전혀 깜깜합니다. 다만 욥과 전혀 다른 욥이란 역사적 구체적 상황과 다른 욥이 묵시적 상황에서 하나님과 사단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어떻게 옵니까? 위에서 오지요. 여러분이 한국을 떠나서 여기에 살 때 비록 고국은 멀지만 천국은 한 뼘이에요. 고국 가야 구원받습니까? 오순절 성령의 의미가 그거에요. 천국은 묵시는 지금은 지평선 없지만 멀리서 보면 지평선이에요. 내가 보면 지평선이 손에 안 만져지지만 여기서부터 5킬로 떨어진 친구가 보면 나는 지금 하늘과 땅의 경계선에 서있습니다. 욥기는 묵시와 역사의 지평선에서 하나님께서는 욥의 의견도 묻지 아니하고 일방적으로 사단과 내기에 욥의 운명을 집어넣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결론부터 던지겠습니다. 인간은 뭐냐? 하나님의 승리를 의로움으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사탄과 대결했던 결과가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악을 이겼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어놓고 사단으로 하여금 인간을 마음껏 유린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인간은 자기가 미처 가담하지 않은 낯선 묵시에 의해서(역사만 알기 때문에) 당할대로 다 당하면서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궁지에 몰려서 이제는 인간이 스스로 지탱할 수 있는 여력이 다 소진된 상태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사단도 주목하고 하나님도 주목하지요. 왜? 이게 내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좀 더 알기 쉬운 예를 들면, 하나님과 사단이 화투를 치는데 사단이 9땡을 쥐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장땡을 쥐었어요. 이걸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는지 나도 궁금한데 장땡이 9땡을 이깁니다. 사탄이 주님의 장땡을 38따라지로 만듭니다. 이런 일방적인 내기에 인간은 어떤 자기주장을 내세울 수 없는 역사적 상황에 있고 묵시는 역사적 상황을 농락합니다. 여러분도 평생 동안 농락당했을 거예요. 분명히 한국에서는 장땡인데 여기선 38따라지.
그런데 하나님의 개입은 창세전부터 너는 내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식 하나가 사탄에게 우리를 내어주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승리(나의승리가 아니고), 사탄한테 다 빼앗겼다고 만들어서 빼앗긴 자를 되찾아오는 방식으로 기어이 주님만 승리하고 우리는 승리 못했는데 주님이 승리했다는 전리품으로 천국에 합류하는 방법, 이게 하나님이 계획입니다.
돈을 한 200억 가졌습니까? 38따라지로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원래 주께서 주시고자 하는 영광 돌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피를 대신할 것이 없을 보여주기 위해서 욥을 부자 되게 만들었어요. 욥이 하는 말을 들어보세요. 많이 들었겠지만 1장 21절 여기에 보면,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고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이렇게 하지요. 저는 욥기의 말씀 가운데서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팻말은 많이 봤는데 이 팻말 붙인 집은 못 봤어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그랬으면 심방 갈 때 선물했을 거예요. 문제는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야구하면서 1회에 25점 얻었는데 9회말에 30점 내줘서 완전히 역전패한 것과 마찬가지거든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주님이여 감사합니다. 거기까지만. 가만있어봐.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 제발 그것만큼은. 빼앗아 갈 것 같으면 차라리 주시지나 말지.
세월호.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부모들과 아예 아기 못 낳은 사람의 차이점은? 하나는 잃어버린 아픔이 있고 한쪽은 잃어버린 아픔이 전혀 없다는 거예요. 자식을 낳아봐야 잃어버린 아픔이 있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신자와 더불어 세상 것을 마음껏 누리게 합니다. 그런데 세상 것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고 성도한테는 지금 내가 가진 은과 금이 결코 하나님이 정말 주시고자 사탄 앞에서 내기했던 그 장땡은 아니라는 겁니다. 7땡, 6땡은 모르겠지만 진짜 천국 가는 장땡은 아닌 거예요. 50억, 100억 가져도 괜찮아요.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정말 영생 주는 그건 아니다. 은과 금으로 구원하지 못하거니와. 시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시험대상으로 욥이 걸려든 거예요.
그러면 욥의 이야기에서 묵시가 분명히 지평선에서 역사와 닿는다고 아까 이야기 드렸잖아요. 그러면 닿는 지점에 뭐가 있습니까? 그 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그게 시형제결혼법이에요. 시댁 형제 결혼법과 로마서 8장에 우리가 맏아들의 형상과 본받기 위해서란 말과 연관이 돼요. 시형제결혼법을 먼저 설명하고 맏아들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우선 맏아들을 통하지 아니하면 구원을 못 받습니다. 우리는 양자에요. 우리는 맏아들 아니라고 하니까 어떤 분이,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못하겠네요?”라고 이야기해요. 그래서 로마서 8장에 성령을 받으면 우리가 맏아들이 아니더라도 양자의 영을 받았으니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해요. 예수님만 알았던 아버지를 이제 우리도 알게 된 거예요. 아버지 모르면 아들 아니거든요. 이 세상에 아버지 아시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우리는 몰랐어요. 우리는 하나님을 지어내니까.
그런데 세상에 주께서 성령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예수님이 아는 아버지가 우리도 아는 아버지가 됐는데 조건이 있어요. 예수님이 맏아들이란 사실을 징검다리를 딛고 하는 겁니다. 그 맏아들을 위하여 출애굽기의 어린양이 그렇게 발휘된 거예요. 어린양 피 바르고 난 뒤에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희 각 사람에게 살아남은 맏아들 다 나한테 공출하라. 이제는 너희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것이니라. 출애굽기 13장 1절에서 2절에 나옵니다. 좋다 말았지요. 우리 아들 살았다고 했는데 빼앗겼어요. 이제 여호와의 것이에요.
그럼 여호와의 것이 되면 어떤 혜택이 있느냐? 이제 모든 정보는 아들을 통해서 남은 가족에 복이 전달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맏아들이 왜 중요하냐? 어린양의 피가 내용으로 담겨있거든요. 세상 죄를 진 어린양의 피가 담겨있는 각 가정에 증명하는 대표인물이 맏아들이에요. 그래서 맏아들 없으면 축복이 잘립니다. 축복이 저주가 돼요. 그래서 맏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형이 결혼을 했는데 자식을 못 낳을 때는 동생과 형수와 결혼하되 그 동생에 의해서 낳은 자식은 형의 자식으로 옮겨가서 하나님의 축복을 계속 받는 그러한 세태가 이스라엘이 살아남게 하는 제도가 바로 묵시와 역사의 만남, 지평선이에요.
오난이란 사람은 형수와 합궁해서 자기 자식이 안 된다는 걸 알고는 땅에다 배설했어요. 죽었습니다. 세상에 하나님 법도, 설정한다고 죽여 버리고. 남자들 다 죽어야 돼. 무슨 그런 법이 있어요. 또 이 이야기 듣고 난 조심해야지. 그 이야기 아니잖아요. 꿈꾸다가도 나올 수 있는데 그럼 어떻게 할 거예요? 자살할 거예요, 연탄불 피울까요? 그런 이야기 아니에요. 지평선 이야기에요. 묵시, 역사 양쪽을 다 증거하라고 법 만든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형이 무정자증이에요. 큰 재벌회사 이을 후계자가 없으니까 엄마가 동생의 정자로 형수 몰래 인공수정하려다 걸렸잖아요. <청담동 스캔들>에서. 돈 번다고 바빠서 연속극 볼 시간도 없지요. 시형제결혼법이 거기서 나올지 몰랐어요.
하나님께서 주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주고 뺏는 과정에서 사탄은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아무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섬겨도 주고 뺏으면 화냅니다. 개 키워보세요. 아무리 친한 주인이라도 개 밥그릇 발로 차면 뭅니다. 이게 본성인데 저한테 안 됩니다. 장땡인 인간 완전히 조져놓겠습니다. 됐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선 무슨 배짱으로 니 마음대로 하라고 한 거예요.
중요한 대목 남아있는데 어려울 때는 미리 한다고 했지요. 욥의 존재는 단절입니다. 절단입니다. 욥의 세 친구가 절대로 욥을 이해할 수 없어요. 욥 본인 묵시와 역사가 만나는 지평선입니다. 그러나 묵시를 모르는 사람들은 욥을 하나에 역사적 인물로 봐서 자기가 이 세상을 살아왔던 판단기준을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욥아, 네가 지금은 힘들지만 회개한다면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에는 창대하리라.” 다단계회사 아침마다 외치는 구호가 그겁니다. 전기장판 팔 때. 기숙사에 가 보면 기숙사 벽에 써놨어요. 시작은 두 개 팔아도 나중에는 천 개 팔 것이다. 그것 마귀가 이야기한 겁니다.
묵시를 맛보지 못한 자들, 주님께서 구원이 대상이 안 되는 자들은 자기가 역사에서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고 지평선을 경유하지 않은 채 하나님과 접촉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이건 마귀가 그렇게 사주했기 때문에 마귀는 자신만만한 거예요.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눈을 흐리게 만든 겁니다. 안목을 흐리게 해서 묵시는 느끼지 아니하고 그저 검침이나 하고 가스배달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지가 왜 죽는지 팔십 넘어 구십 되고 왜 죽는지 이유도 몰라요. 죽는 이유도 모르면서 살 때까지 살지, 그뿐입니다.
그런데 왜 은혜인지 죽기도 전에 주여, 왜 죽이십니까?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정말 연세 좀 되는 사람은 몰라도 연세 안 되는 사람한테는 기적적인 거예요. 우리교회에 스물 몇 살 먹은 청년이 있는데 세상에 이야기할 때 자기 또래와 이야기 안 해요. 전부 오십, 육십, 칠십 하고 이야기합니다. 인생이 무엇이며 죽음이 무엇이며, 스물두 살 먹은 청년이. 전부 다 뭐지? 신기한 겁니다. 그 청년의 친구가 납득이 안 돼요. 이해가 안 돼요.
우리가 고마운 것은, 욥이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했거든요. 욥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사탄이란 것을 보고 싶냐? 보여줄게. 단 조건이 있다. 욥이 고난 받는 현장에서만 비로소 사탄이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왜? 두 사이는 단절이기 때문에. 아무리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고 아무리 설득해도 못 알아듣고. 심지어 봉투에 돈 넣어도 교회만 왔지 봉투에 돈만 빼내지 서너 번 나오도 돈 떨어지면 교회 안 나오고. 관심 없다. 복음 들으니까 잠 온다는 식입니다.
단절이란 장차 예수님이 오실 때 묵시가 역사 속에 풍덩 빠질 때 역사는 아무리 애를 써도 묵시를 파악할 수 없는 그 방식이 뭐냐? 자기의 죄를 씻는 방식은 결코 자기 아이디어에서 끄집어내지 못하게 하는 방식이에요. 만약에 자기 죄를 자기 식으로 해버리면 주님께 돌아가야 될 최종 승리가 시시한 인간의 승리가 섞이게 되기 때문에 온전한 주님의 영광이 아닙니다. 욥마저 낙담에 빠지도록 시나리오 그렇게 짜여있어요. 이런 드라마가 없어요. 믿었던 욥마저 드디어 낙담에 들어가고 하나님께 원망할 때 그때가 하나님께서 박수치는 시간입니다. 스탬프 도장을 찍습니다. 참 잘했어요.
여러분, 집에 돌아갈 때 여러분의 등에 참 잘했어요, 스탬프가 찍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오늘도 손님 한 명밖에 안 왔어요. 참 잘했어요. 오늘도 얘가 성적이 또 내려갔어요. 참 잘했어요. 왜냐하면 사탄은 얼마나 우리로 하여금 낙담시켰습니까? “너, 그렇게 사느니 약 먹고 죽어라.” 평소에 사탄이 얼마나 주둥아리를 놀려왔습니까? “니 그렇게 사나? 아이고, 등신아. 나 같으면 죽었다. 치워라. 인생 그만 살아라.” 그 사탄, 우리 고마우신 하나님께서 오직 자신만의 승리를 위해서 나를 괴롭히는 일군으로 사탄을 내 곁에 딱 들어붙어서 조롱과 멸시와 놀림을 해대는데 그 체험은 우리만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도 함께 받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 낙담했습니까? 여기 필살기가 있습니다. 뭐냐?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난 손들었습니다. 이라크 전쟁 때 이라크는 사막이거든요. 미국이 전쟁하기 좋은 곳이에요. 숨을 데가 없어요. 나오라고 하니까 전부 손들고 다 나왔어요. 우리는 숨을 데가 없어요. 우리는 수시로 사단과 짝짜꿍이 되어 그렇게 십일조를 했더니만 십일조 한 것 적립해도 지금 집을 두 채 샀겠다. 십일조하면 창고 넘친다고? 내 창고 불날 뻔했어. 하나님 믿는 내가 바보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평선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역사에서 실패자, 머리 둘 곳도 없었던 분이 예수님이고 사람들은 아무도 예수님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예수님을 희한하게 십자가 동창생, 옆에 있던 강도한테는 메시아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바로 강도가 욥이었습니다. 욥이 강도였고. 정확하게 말해서 욥 안에 강도 들었고, 창기 들었고, 저와 여러분 들어있습니다. 이제부터 욥이 받는 고난, 여러분도 지금 5학년 2반 학습을 같이 받고 있고 내년 되면 6학년 1반 진급해서 또 받게 됩니다.
뭘 받느냐? 과정입니다. 어떤 과정? 주신 것도 빼앗기는 과정. 제가 아까 했지요. 돈 빼앗기고 건강 빼앗기는 게 아닙니다. 내가 남들처럼 가진 것이 날 살리지 않는다는 것, 이게 의미 없다는 것, 내 구원에 의미 없고 오직 장차 어떤 분이 내 대신 죄를 가져가줘야 비로소 그게 의미 있다는 것을 우리가 누리면서도 우리가 없는 가운데서도 풍족한 가운데서 그게 밝혀진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여러분 속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인생을 갈 수밖에 없어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취하신 자도 하나님입니다.
끝으로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욥이 이런 이야기할 때 1장으로 끝난 줄 알았어요. 이제는 하나님의 축복이 기다리겠지. 분명히 뭔가 좋은 멘트 날렸으면 심판도 피해갈 줄 알았는데 결과가 더욱 더 어려워졌습니다. 문제는 욥이 말만했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시험이 뭐냐? 욥에게 질병이 주어집니다. 그러면 욥은 지식과 몸이 이제는 떨어질 수 없어요. 아프다고 말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송곳으로 찌르면 큰 비명으로 바뀌는 거예요.
이건 몸 덩어리 자체가 신앙도 필요 없고 멘트도 필요 없고 삼위일체 지식도 필요 없고 어떻게 성령 달라는 것도 필요 없고 나는 네 몸 자체를 사용하겠다는 코스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 이것 해드리겠습니다. 저것 해드리겠습니다.” “가만있어. 네가 나대지 마. 내가 알아서 아침부터 모든 것을 마음대로 사용할 거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따로 신앙생활 없습니다. 그냥 살아가는 자체가 신앙생활이에요. 먹는 것, 입는 것도 신앙생활이에요.
그것을 로마서나 고린도전서에서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또는 먹든지 입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이것은 주님의 것이고 이것은 내 것이고, 없습니다. 교회에 내든 안 내든 다 주의 것입니다. 주도권을 주님이 갖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어요. 이제는 욥의 동창생이니까 그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걸 쳐다보니 주변의 시선입니다. 죄 짓더니만 망하네. 그 이야기를 함으로서 그들은 마귀에 속한 존재임을 스스로 폭로하는 계기를 하나님께서 욥을 통해서 마련하셨습니다.
승리한 것 같은데 오히려 그것이 패배인 것을 증명하는 쪽으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욕했고 이 시대는 욥을 바라보면서 욕했습니다. 그들은 이야기합니다. 아주 합리적이고 신학자들이에요.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고 정의로운 분이기 때문에 악을 모르시기 때문에 벌을 내렸다는 것은 반드시 죄가 있는 곳에 벌을 내린다. 욥아, 정신 차려라. 네가 모르는 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회개하면 정상참작은 해줄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뭘 모르느냐? 낯선 고난을 몰랐어요.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띠 띠고 원치 않는 곳으로 가게 할 때 베드로가 미리 예측한 게 전혀 없어요. 낯선 것을 줍니다. 우리는 똑같은 생각을 해도 항상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남을 전도하기보다 주님이 나부터 전도 개시하다보니까 전도되는 거예요. 내가 아는 지식으로 남한테 하면, 이건 나의 몸에 체험이 안 돼요. 아픔이 안 돼요. 내가 주님한테 아야 해야 옆의 사람이, “누구한테 얻어맞았어요?” “예. 주님한테 얻어맞았습니다.” “이상한 사람이네. 주님은 없는데 왜 당신은 주님이라고 해요?” 이렇게 그들에게 전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점점 더 친구들 세 명은 설명을 해요.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인데 죄가 있는 것에 벌을 내린다. 맞지? 그러니까 너는 벌을 받았다. 내 논리에 문제가 없지. 그런데 욥은 논리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데 무슨 논리가 필요합니까? 주님의 피만이 날 용서했다는 걸 아는데 거기에 무슨 논리가 필요해요. 성도님, 이리 와보세요. 예수의 피가, 당신의 죄가 여기 있는데 어떻게, 어떻게 다가와서 했는지 해보세요. 그걸 어떻게 논리로 설명합니까? 이미 논리란 낯선 것이 아니고 예측된 논리를 동원해서 논리를 소유화하면서 구원받겠다는 자기소유욕인데. 전혀 그건 통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아프다고 할 때 찾아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께 대듭니다. 이야기합시다. “하나님이여, 제가 뭔데 인간이 아무것도 아닌데 죄 지은들 주님한테 영향도 없는데 왜 저를 힘들게 하십니까?” 하나님 말씀이, “황무지에 비 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채소 가꾸는데 말고요?” “그래. 황무지에.” “황무지에 비가 왜 옵니까? 채소도 없는데.” “모르겠지?” “모르겠습니다.” “그처럼 내가 너한테 고난주는 것 아무 이유 없다. 인간은 몰라도 돼. 이건 묵시에서 하는 것이지 역사는 당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어쨌든 너로 인하여 내가 승리했다. 참 잘했다. 스탬프 하나 찍고, 친구들을 위해서 네가 제사 드려라. 그러면 그 죄가 너로 인하여 구원받을 것이다.”
욥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아무리 이유도 없이 아들은 순종했습니다. 아들 한 명의 순종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따지고 예수님 시시하다고 예수님께서 나한테 돈 벌어준 적 없다고 나를 고생시켰다고 원망한 우리에게 난데없이 영생이 주어지고 천국이 주어졌습니다. 얼른 면류관 벗어서 주의 발 앞에 던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몰랐습니다. 주님이 친히 다루실 줄 몰랐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다룰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변에 사람에게도 낯선 존재인 것처럼 나에게도 내가 낯선 존재로 달라지게 하셔서 기어이 예수의 십자가 공로만 높이시는 주님이여, 실제로 죽으신 그 피가 무용지물 되지 않도록 저희들은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