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미국맨해튼교회a,b 본문
20140929 미국맨해튼교회a,b
(강의:이근호 목사)
녹취:한윤범
-하나님 앞에서 말씀하라고 했어요. 고넬료와 베드로는 하나님 환상 가운데 만났기 때문에 그랬잖아요. 그런데 요나와 이방인들이 배에서 만났을 때는 너는 누구냐고 물어봐요. 요나가 나는 히브리 백성이라고 말하잖아요. 우리는 지금 환상 가운데 만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목사님이 어떤 분이신지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목사님께서 저희에게 소개해주시고 시작하면 되겠습니다. 박수로 환영
저는 from Korea. 저의 영어는 간단명료합니다.
-여러분, <7번방의 선물>이런 영화 보셨어요? 감옥에서 이렇게 소개했다가는 엄청 맞는 거예요. 짧게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목사님의 신학이 어떤지 소개해주셔야 합니다. 피상적인 말로는 통과가 안 됩니다. 감옥에 들어왔다고 생각하시고 초범 입장에서
저는 한국에 대한예수교장로교 합동 측 목사였고, 목회는 한 30년 이상했고, 제가 책을 35권정도 썼어요. 쓴 내용은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 더 이상 교인들이 목사한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성경을 관통해서 다만 목사들이 앞에 있는 것은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 없고 성령께서 친히 가르칠 때에 목사들이 한 의견은 그냥 참고로 듣고 우리 속에 과연 성령이 친히 나를 가르친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확인하는 작업에 도움이 되고자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어떻게 일관된 하나의 주제가 뚫려나가는지 그것을 위해서 30년간 계속해서 했습니다.
그래서 제 책의 특징이 있다면, 시편 속의 그리스도, 욥 속의 그리스도, 레위기 속의 그리스도, 창세기 속의 그리스도, 출애굽기 속의 그리스도, 그리고 로마서 강해도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책을 냈습니다. 책을 내서 후학들이나 성도들에게 살아있을 동안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해왔습니다.
그것을 인하여 전통적인 기독교 이천 년 신학과의 차이점이 드러나지요. 이천 년 기독교역사는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교인들에게 무엇을 제공한다는 쪽이라면 제 쪽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주셔서 결과적으로 교회가 나타나게 하는 거예요. 발생하는 거예요. 누가 교회 만들고 등록하면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당신도 형제였어요?” 새삼스럽게 만나게 해주시는 그 만남 자체가 이미 존재하는 교회임을 확인하는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겁니다.
-이제 소개가 됐지요. 요나를 물 속에 집어넣듯이 목사님을 강의 속에 집어넣겠습니다.
기도 잠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한 일이 하나님이 준비된 결과로 나타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늘 제가 할 테마는 출애굽기입니다. 출애굽기는 여기서 선을 하나 그어야 됩니다. 어떻게? ‘출’에다 선을 긋는 거예요. 출-애굽, 애굽에서 탈출한다는 겁니다. 애굽에서 탈출하는 이야기를 B.C.1440년경, 오늘은 A.D.2014. 2014에 어떤 인간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갈 때 자기 나름대로 상황을 갖고 있어요. 현재 내가 어렵습니다. 나는 기쁩니다. 방언을 합니다. 나는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여러 가지 교회의 사건을 접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하나님과 접촉하는 거죠. 지금 이걸 하고 있어요.
이 인간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에고, 한국말로 ‘자아’, 나란 자아가 상황을 유발시키면서 신의 계시/뜻을 알고자 신에게 접촉하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이것 이기주의입니다. 자기중심이거든요. 따라서 저는 이걸 붉은 글씨로 No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가 신에게 접촉하는 것이 no고, 성경은 기원전 15세기경에 일군의 사람들이 상황을 만들고 신으로부터 나가는 것이 아니고 신으로부터 출발한 상황 속에 일단의 무리들이 여기에 덮쳐지는 거예요. 이게 Yes입니다.
한 개인을 에고, 여기는 집단이지요. 집단이 하나님으로부터 집단적 체험을 할 때 이것이 예스가 되고, 개인적으로 어떤 은혜 해버리면 항상 이기주의로 전락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소개하는 것은, 노가 아니고 예스 쪽을 소개하려고 해요. 이쪽을 소개하면 현대인들의 잘못된 생각은, ‘나+너=우리’가 되는 것 아닙니다. 이 상황에 의하면 we가 먼저 내려오고 we 속에서 I를 새롭게 발견하는데 이걸 영어로 self라고 이야기해요. 이것을 한국말로 ‘자기’라고 하죠. 에고는 자아.
이 자기가 오기 전에 자아와 자기가 큰 충돌이 일어나요. 그 충돌의 현장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 출애굽기입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과 이미 하나님께서 준비한 하나님과의 충돌, 그 과정을 낱낱이 보여주는 것이 출애굽기에요.
이 당시에 일군의 사람들이 아담의 후손이에요. 오늘날 우리도 역시 아담의 후손입니다. 따라서 동일한 체험을 하게 하십니다. 성령을 통해서 출애굽 체험이 없는 사람은 나의 상황으로 직접 하나님과 접촉하는 이것이 마치 성령의 체험이요, 하나님의 체험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지요.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은 나의 체험을 신과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고 we우리 안에서 너는 뭐냐? 네 역할, 기능이 뭐냐를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옛날 히브리인들이란 아담의 후손들은 여기에 대해서 순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내가 원했던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모습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저항했습니다. 그 저항한 것이 아담의 후손의 속성의 표출입니다. 아담의 후손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죠. 지금 출애굽은 바로 그 저항성을 이미 우리가 발휘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 하나님이 내가 조작한 하나님인지 아니면 성경을 통해서 직접 나타난 그 하나님인지 만나게 해줘서(만남 자체가 축복이에요) 얼마나 우리는 진실로 주신 하나님의 출애굽 사상에 대해서 극렬하게 저항하고 반항하고 Why me?왜 하필 저에게 이런 일을? 이건 제가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이런 하나님을 제가 원한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잘못 관리하신 거예요. 나보다 못한 인간은 잘 되고, 나한테는 어려움을 주고. 이러시면 하나님께서 혼동하신 것 아니에요? 생명책 명단 보세요. 이렇게 어려움을 주는 것은 제가 원하는 하나님에게는 그런 내용이 없다고 강력하게 저항할 때 하나님께서는 박수를 치시면서 걸려들었어. 가짜 하나님은 사라지고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는 겁니다.
일단 공식 하나 제시합니다. 진짜 하나님은 어디서 나타나는가? 가짜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저항하면서 고백하는 현장에만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요. 좀 극단적인 표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죄 짓는 죄 속에만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상현 목사님이 놀라운 발언을 했어요. “주여, 나의 죄가 나를 구원하는군요.” 나의 죄가 나를 구원했습니다. 나는 어질고 고상하고 착한 점잖은 훌륭한 남들보다 뛰어난 나를 받아줄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을 영접하는 나를 주께서 영접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저항하게 만들어서(수동적이죠) 저항 속에서 새로운 하나님을 경험케 하시는 방식으로만 저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왜? 출-애굽이니까.
이러한 사실은, 사실은 출애굽이 끝날 쯤에나 알아요. 초창기 히브리인들은 정권교체를 원했어요. 애굽에서 벗어나는 걸 원한 것이 아니고 그냥 정권교체, 전처럼 히브리인들에게 우호적인 모습으로 평화롭게 각 종족들이 애굽에서 살기를 원했는데 갑자기 뭔가 바로가 잘못 생각했던지 히브리인들을 집중 공략하면서 그들은 힘들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예전처럼 되게 하옵소서.”
여기서 ‘예전처럼’이란 말이 제 강의에 굉장히 중요합니다. 인간의 시간 의식은, 현재란 과거의 누적으로만 이해하게 돼있어요. 미래는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를 뜯어보면 겹겹이 층층이 과거에 있던 체험 중에서 나에게 유리한 것만 편집해서 들어있어요. 역사란 조작이고 편집이거든요. 편집해서 나한테 유리한 내가 얼마나 잘난 존재며, 내가 얼마나 훌륭하게 살아왔는가를 남한테 증명하기 위한 증명 책으로 우리는 좋은 것만 골라서 모아 놓은 겁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해서 인간에게 출애굽이란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출애굽이란 애굽을 벗어난 경험이 있어서 다시 애굽에 살면서 “이건 아니야. 난 탈출할 거야.”라고 할 때는 출애굽 의지가 생기는데 이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애굽 바깥의 세상을 생각해 본적이 없어요. 따라서 그들의 천국을 상상하든, 지옥을 상상하든, 어떤 좋은 것을 상상하든, 나쁜 것을 상상하든 그것은 항상 애굽이란 자기가 체험된 세계보다 더 좋은 것, 더 나쁜 것 그것뿐이에요.
살짝 어려워지는데 미안합니다. 이렇게 어렵지 않게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할 수 없어요. 다시 하겠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해탈을 하겠다든지 나는 여기서 도저히 못 살겠다고 하는 것은, 그 주장의 전제가 이미 살아봤던 것을 근거로 해서 부정이 되는 거예요. 이것을 살아봤는데 이것 아닌 무엇. 그럼 그게 진리입니까? 진리가 아니고 그건 회피지요. 자칫하면 자살로 이어지지요. 회피지요.
엄밀하게 말해서 이것 아닌 곳에 나아가봤자 그건 애굽의 확장입니다. 애굽의 확장이지 절대로 그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출애굽 없습니다. 출애굽은 없고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상상의 세계, 상상일 뿐이죠. 지금 힘든 것보다 더 낫겠지. 자기가 되고자하는 그러한 환상을 따로 꾸미면서 차이 속에서 희망과 꿈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인간이 조작한 소망의 세계에요. 이것 출애굽 아닙니다. 착각입니다. 그것을 파헤쳐보면 자기가 경험한 것밖에 없어요.
그러면 못 살겠다고 불만해서 나가버리면 그 새로운 세계의 주인공은 못 살겠다고 나가버린 결심이 정당화되는 세계, 철저한 이기주의적 세계지 하늘나라 아닙니다. 그런 나라 가봤자 사실은 자기만을 위한 나라에요. 아무리 기독교적이고 종교적이고 복음적인 것을 온통 때려 넣어도 결국 남는 것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돌아오는 나만 위대해지고 대단한 존재로 부각되고 너무 자기에게 관대한 자기에게 너무 후한 점수를 주는 자기만의 폐쇄적인 세계, 그래놓고 자기는 천국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왜? 다른 세계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나 빼놓고 나 없는 다른 세계를 그려낼 줄 모르는 것이 인간의 실존적 한계에요.
내가 거기에 한 다리 끼어야 비로소 납득이 되지 나를 빼놓고 따로 있는 그런 세계를 우리는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게 세상의 모든 종교의 한계요 거짓입니다. 그 속에 기독교도 포함돼있어요. 천주교는 물론이고. 천주교, 기독교 다 깨보면 나의 야심과 야망을 천국이란 이름으로 데커레이션, 포장한 겁니다. 물론 이 희망을 갖고 있는 만큼은 마치 마약처럼 고통을 잊을 수는 있어요. 그러나 인간은 결국 제자리 뛰기. 침 뱉으면 자기에게 그대로 떨어지지요.
이것이 에고, 자아가 만든 상징계입니다. 라캉이 주장했지요. 자아에서 셀프로 넘어가는 브릿지 없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은 셀프에서 자아로 나가게 하십니다. 어떻게? 출애굽을 통해서. 그래서 기원전 15세기경에 히브리인들은 자기가 도저히 예상 못한 그러한 낯선 세계에 살면서 애굽에서 나온 것이 출애굽이 아니고, 참 어떻게 표현해야 될까요? 이런 것까지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
물을 이렇게 해서 소매를 적셨습니다. 이 사실은 몰랐는데 걸어가니까 자꾸 물이 떨어지는 거예요. 보니까 물이 소매에 있어요. 자기는 홍해 건너서 애굽에서 탈출했다고 생각했는데 애굽이 늘어진 거예요. 자기가 가는 곳이 지리적으로는 애굽을 나왔는데 본인이 애굽에서 만들어진 생산물이에요. 내 에고가, 철저하게 에고야. 아무리 애굽에서 멀어져도 계속 애굽은 오히려 더 확장되는 겁니다. 애굽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벗어났다고 착각했지요.
처음에 홍해 갈라지고 애굽 군사들이 바닷가에서 시체로 나올 때 이제 됐다. 심지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할 때는 가로등까지 만들어놨으니 우리는 성공한 거야. 그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어디로 했는가? 물 없는 곳으로, 양식 없는 곳으로 정확하게 인도해요. 여러분 교회도 일단 먹을 것, 입을 것 되고 난 뒤에 다니는 거죠. 굶으면서 교회 다닐 일 없습니다. 내가 우선이고 하나님은 뒷전이에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건 뭐냐 하면, 하나님도 내가 우선이고 나에게 잘해줄 때 하나님 섬길 용의가 있다는 것이 인간의 근대주체사상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지옥 보내도 내가 지옥 가는 나를 걱정하지 말라고 어깨를 두드리면서 용기를 불어넣어줄 용의가 돼있어요.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윤복희? 아니에요. 그 여러분은 1+1, 나와 너와 모인 we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준비된 we에요.
애굽에서 벗어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영원히 출애굽은 없습니다. 공식 하나. 어떤 인간도 애굽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두 번째입니다. 따라서 세 번째, 인간에게는 출애굽 없습니다. 아이고, 아쉽다. 큰 일 났습니다. 성경 보고 기도하고 성령 받았다고 주장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신이시여, 내가 원하는 세계를 펼쳐주옵소서.”라는 에고중심의 사고방식 어떻게 할 거예요? 오늘 주제는 출애굽이 어떻게 관통할 것이냐는 겁니다.
뜸들이면 제가 욕 얻어먹으니까 빨리 시급한 대책을 내놔야 되겠습니다. 더 하다가는 정말 큰 일 나겠어요. 출애굽 1장 8절은 누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요셉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일단의 그룹이 있습니다. 이들은 에고입니다. 자기 자아밖에 모르는 자기 생존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사람. 생명, 아닙니다. 생존입니다. 신, 아닙니다. 우선 먹고 사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거예요. 마아슬루의 심리학에서처럼 생존의 욕구가 가장 기본 욕구에요. 교회 간다고 안 사라집니다. 기본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고 그 다음에 소속. 뭔가 소속이 될 때 어떤 기쁨을 느끼고.
이런 사람은 에고기 때문에 항상 꿈을 꾸지요. 노동의 대가가 주어지는 세계. 내가 노력한 것에 정확하게 그걸 보상해주는 정의로운 하나님. 내가 노력한 만큼 정확하게 보상을 제때 해주는 그러한 정의의 하나님을 내 중심으로 생각해요. 그래서 내 뜻대로 내 노동의 대가가 안 될 때는 반드시 억울함, 분통터지는 일에 대해서 내가 믿는 하나님은 정의로운 하나님이기 때문에 반드시 내 편이 되어서 내 힘이 없어 복수 못하는 악한 세대에서 대신 복수해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믿고 견디며 살아가는 자들? 에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완전히 이들을 배제합니다.
한국이 북한과 전쟁할 때 해병대 졸병과 대통령과 의논합니까? 총참모총장이나 미군사령관과 의논하지요. 그건 일종에 배제입니다. 졸병, 취사병과 회의합니까? 말이 안 되지요. 배제하지요. 졸병은 시키는 대로 가만있어. 너는 우리가 하는 일에 그냥 얻어먹기만 하면 돼. 이걸 효과, 부대효과라고 합니다. 구원은 효과입니다. 내가 하지도 않은 것을 그저 효과 때문에 그 상황 속에 사로잡혀서 구원되는 거예요. 여기서 무엇이 탈락하느냐 하면, 나의 노동의 가치가 탈락해버립니다.
세상은 여러분이 노동한 대로 뜻대로 변화되던가요? 이번엔 미국대통령으로 민주당에서 되어라. 그러면 민주당 대통령이 되던가요? 안 되지요. “나의 노동의 대가만큼 줬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그게 소원입니다.” 하는 것을 하나님은 그게 에고다.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중심의 현실감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출애굽이란 할 때 탈출해야 될 당사자와 의논하지 아니하고 바로 왕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바로 왕이 요셉을 알지 못하다는 겁니다. 요셉은 이미 죽은 사람, 고인이에요. 죽은 사람을 요셉을 모른다고 해서 그 여파로 벌어진 사건이 출애굽 사건입니다. 신기하죠. 오즈의 마법사와 비슷하게 정말 신기한데
당사자와 의논하지 않고 그냥 보내버리고 바로 왕과 직접 이야기하느냐? 요셉은 죽었는데. 여러분, 요셉이 죽었습니까? 맞습니다. 죽었습니다만 요셉언약은 죽지 않았습니다. 이 언약이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원리에요. 언약의 특징은 뭐냐 하면, 우리에게 나가 놀라는 거예요.
그러면 에고는 배제된 자리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셀프를 대동해서 셀프와 하나님과 의논한 결과에 의해서 에고가 구원을 받든지 탈락하든지 결정 나는 겁니다. 그러면 셀프는 어디에 담겨 있느냐? 언약 안에 담겨 있어요.
옛날 팝송에 하늘에서 신랑이 떨어진다는 노래가 있지요. 할렐루야 하는. 그런 노래 아세요? 언약이 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에요. 얘들은 있어도 괜찮아요. 이것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무에서 출현되는 거예요. 이것이 언약이란 모습으로 떨어집니다. 잡았습니다. 언약이 ‘~하라’ 또는 ‘~하지 말라’는 명령 모습으로 왔습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드디어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야 됩니다. 인간은 에고였습니까, 셀프였습니까? 에고였지요. 하나님께서 어떤 지시와 명령이 떨어지니까 에고가 드디어 반응을 나타냅니다. 이 고통스럽고 생로병사의 이 세계에서 내가 비록 지금 이 땅에서 힘들게 살았지만 나중에 죽어서 하나님과 만나게 된다면 주께서 주신 이 언약, 이 약속, 이 지시와 명령을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고 붙잡았습니다. 붙잡는 순간 하늘에서 하나님이 드디어 네가 네 에고성을 더 이상 감추지 못하고 노출시켰다고 외칩니다.
그들은 이걸 지킴으로 말미암아 지킨 나는 구원받고 지키지 못한 사람은 지옥 간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냐? 신명기 28장에 이 말씀을 지킨 자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만약에 못 지킨 사람은 들어가도 저주받고 나가도 저주받는다고 하니까 과연 그런지 하나님 테스트하고 나를 테스트할 거야. 나는 과연 천국 갈지 지옥 갈지 이 말씀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수용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 사람들이 뭘 몰랐느냐 하면, 그게 바로 죄였던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이 이 말씀을 지켰다, 안 지켰다는 판정을 어떻게 내리느냐 하면 본인이 판사가 됐어요. 본인이 결정해요. 본인이 지킨 것 같으면 지켰고, 자기가 어겼다 싶으면 안 지킨 걸로 돼있어요. 이 말씀을 지켰는지, 안 지켰는지 결정하는 요인을 인간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양심 같은 것을 동원하는데 거기에 선악과 요소를 동원하게 돼있어요. 선악과 요소를 동원하는 자체가 에덴동산에 의하면 그 자체가 죄였던 겁니다.
그래. 나 오늘 51% 착한 일했어. 나쁜 짓은 49%지. 그러면 밤에 잘 때 51-49=? 어, 남는 장사네요. 2% 착하잖아요. 그러면 오늘 밤에 만약에 죽는다면 우리는 천국에 갈까요, 지옥에 갈까요? 차변, 대변, 당기순이익 2% 남았으니까 천국 가는 거예요. 교회에 만약에 좀 늦게 왔다. 죄진 느낌이거든요. 그런데 헌금시간에 이천 원을 더 보탰어요. 그러니까 갑자기 양심이 편해졌어요. 내가 스스로 나쁘다는 것을 스스로 착한 것으로 메웠으니까 여전히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18세기에 칸트라는 철학자가 이야기하기를 인간은 무조건적으로 반성하는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반성하는 그것이 바로 죄의 극치였습니다. 아무리 천 번, 만 번을 반성해도 에고에서 출애굽되지는 않아요. 그 반성하는 것, 남 좋으라고? 반성하는 나 좋으라고. 회개하면 회개할수록 반성하면 반성할수록 점점 더 예뻐지고 점점 더 고마워지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과 집착으로 이어지게 돼있어요. 남들은 반성하지 않는데 내가 대견스럽게 반성한다? 나는 더욱 더 나에게 고귀한 존재로 탈바꿈 돼가는 겁니다. 그냥 해탈이죠. 빗자루 들고 개미 쓰는 거예요. 주여, 나는 개미 생명을 함부로 밟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기장을 쓰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예를 들었는데 안에 뭔가 다른 게 들어있지요. 여러분 실력을 무시하는 건 아닌데 이것과 이것의 차이점이 뭘까요? 겉으로 보면 차이점이 있습니까? 없지요. 지시하고 명령했다. 율법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명령인데 이 안에 열어젖히면 여기에 셀프가 들어있어요. 이것 들어있었네요.
율법이 오면서 율법 담당자, 율법 전문가, 율법을 친히 이룰 분이 율법 안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유대인들,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각을 못한 겁니다. 이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요. 율법은 어떤 누구도 지킬 재주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겉으로는 누구도 못 지킨다. 하지만 율법이 폐하느냐? 아니요. 율법을 오픈하세요. 오픈하시면 이 분이 등장하는 거예요. 오픈할 그냥 여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켰다고 하는 사람들한테 주먹질을 당하면서 이게 열립니다.
-지금 다시 설명하셔야 돼요. 못 알아들었을 거예요.
그래요. 너무 무시하시는 것 아니에요? 겉으로 봐서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태어날 때부터 납득하고 있어요. 그래서 피아제의 도덕심리 이론에 의하면 얘들에겐 논리적인 설명이 안 되고, 이것하면 안 돼. 이것하면 잘했어. 상줄 게. 이것밖에 없어요. 선악이니까. 얘들이 무슨 이유를 알겠어요. 때리면 아프니까 안 하고 상주니까 하고. 부모가 갖고 있던 이미 확정된 윤리체제를 어린아이들은 선악과 체제로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대대로 선과 악 윤리도덕이 형성되는 겁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그거에요. 아버지, 어머니의 관계가 자식들이 그대로 그 환경을 물려받아서 자식은 어떤 경우라도 부모가 가르친 윤리도덕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한다는 이론입니다. 그만큼 집안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지만. 선악적이기 때문에 주님께선 그걸 전제로 해서 언약을 줄 때 선악적인 요소로 그 형식으로 하늘에서 툭 떨어졌어요. 그것도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에게만. 주니까 모든 게 하면 복 받고 안 하면 저주받는다고 돼있으니까 오케이, 내가 얼마나 평소에 착하고 절제하고 나를 잘 관리하는지 테스트를 해보자는 겁니다.
테스트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테스틀 그냥 하면 기준이 성립되지 않으니까 가상적인 형제와 가상적인 이웃을 여기에 세웁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나는 부모를 공경한다고 일주일에 한 번씩 멀리 있는 부모님께 전화하는데 다른 집사님은 한 달에 한 번씩 전화했어요. 나는 저 사람보다 네 배나 부모를 공경한 사람이 됐으니까 이긴 거예요. 그런데 교회에서 보니까 나처럼 일주일에 한 번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명절에 두 번 하는 사람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아는 교회 내에서는 복이 우선 자기한테 온다고 생각했는데 새로 등록한 어떤 아주머니가 하루에 한 번씩 하네. 갑자기 이인자로 밀렸습니다. 만약에 이런 상황에서 하늘의 복을 받게 되면 복이 몽땅 저쪽으로 가게 돼있지요. 왜? 말씀을 지킨 자는 복 받고 말씀 안 지킨 자는 저주를 받으니까. 갑자기 아파트 청약순위처럼 두 번째로 밀리게 되는 겁니다.
전화하는 것은 이겼구나. 그렇다면 기도하는 것은? 저분은 새벽기도에서 정확하게 32분 기도했어요. 나는 37분을 기도했어요. 5분 이겼어요. 이 말은 뭐냐? 나의 윤리도덕에 합함은 옳다, 그르다는 주변의 다른 에고와의 경쟁에서 임시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이 에고의 성격이 어디까지 가겠어요? 평생 가도 다 못하지요.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는데 그야말로 몸 바쳐서 의료행위하면서 우간다 사람 이백 명을 전도했다. 그래서 유엔에서 상 받고 칭찬받고 간증집회하고 했다. 그런데 웬걸 5년 후배가 우간다보다 더 심한 가나에서 칠백 명을 전도하면서 심지어 그 사람은 멀쩡한 의사인데 수단에서 암에 걸려 돌아가셨네. 자기하고는 게임이 안 돼요. 명함도 못 내. 미치겠어. 어떻게 할 거예요? 어떤 분은 아마존 가서 20년, 30년 선교하시는 분, 어떻게 할 거예요?
그게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게임이에요. 이 세상 모든 것은 장기판, 바둑판이고 그런 거예요. 새로운 라이벌 일부러 찾아서 꺾는 묘미가 내 삶을 부흥시키는 동기로 작용한 겁니다. 그것이 교회라고 제외되는 게 아니에요. 교회는 에고들의 집합체기 때문에. 우리 교회 교인 25명, 저쪽 교회 교인 450명, 분발해서 부흥하세. 이게 에고의 정확한 발산인 거예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입니까? 선과 악의 판정을 본인이 내리는데. 그런데 그러한 것을 주께서 중지하지 않고 마음껏 발휘하게 해서 어떤 분이 오셨는데 이분이 말씀하기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것. 그러면 게임의 룰이 변화가 왔어요.
막달라 마리아, 창녀가 울면서 향수를 뿌릴 때 바리새인들이 저 여자는 더러운 여자라고 지적할 때 주님께서는 많이 용서받은 줄 아는 사람이 베스트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에고를 셀프로 이어주는 다리는 오직 무한한 사랑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의 놀라운 점은 예수님 발에 울면서 향수를 뿌리는 이벤트를 나를 욕하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했다는 것이 무지무지 대단한 거예요. 몰래한 것이 아니고. 그걸 통해서 너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관계는 다르다. 이것은 바로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출애굽기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끌고나오면서 그들은 애굽의 요소를 계속 쏟아내게 하는 겁니다. 출애굽의 구호가 있어요. 출애굽기나 민수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특징이 있어요. 그것은 애굽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거기서 맛있는 부추도 먹었고 마늘도 먹었는데 정력이 쇠해졌다. 정력 따라 사는 몸에 적합했어요. 애굽에 몸에 적합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제시하는 약속의 땅은 자기 몸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혀 맞지 않아요. 나오는 것은 원망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원망이 나올 때마다 주님께서는 박수를 치는 거예요. 어떻게 되고 있어? 수술 잘되고 있습니다. 그렇지.
죄가 너를 구원하는 거예요. 죄는 죄로 구원받는 겁니다. 상처는 상처로 구원받는 거예요. 상처받은 자만이 상처받을 때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준비된 구원 줄이에요. 성경지식, 오래하는 기도시간, 방언 터짐, 이것이 구원의 밧줄이 아니라 “내가 이걸 해도 진짜 원하는 소원 안 들어주네, 에이 씨.”라는 말이 나올 때 그것이 바로 접촉되는 인식되는 순간이에요.
에고의 예수님을 버려야 돼요. 그래야 나도 같이 버려지거든요. 인간은 잘난 자기를 천국 가서 잘나게 해주는 그런 하나님밖에 생각 못해요. 나를 못나게 만들어서 나를 인간도 아닌 것으로 취급해서 주의 날에 합류한다는 것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가 없고. 막상 그런 일을 실시하게 되면 우린 당황스럽고 거북해합니다. 동업자인 저를 못나게 만드시냐고 나와요.
요셉과 야곱과 아브라함 이 모든 사람은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어떤 행위도 부정당한 사람이에요. 이건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어려운 이야기할 때는 제가 항상 물어요. 아브라함이 구원받은 것이 ①자기 아들, 이삭을 바쳐서 구원받았습니까? ②장차올 예수님의 십자가 피 때문에 구원받았다. 몇 번입니까? 요한복음 8장 보세요. 아브라함이 누굴 기다렸습니까? 예수님을 기다렸지요.
유사응용문제 또 나갑니다. 엘리야가 제단을 쌓아서 850:1로 붙어서 물을 붓고 해서 엘리야가 구원받았습니까? 아니면 엘리야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구원받았습니다. 정답은 항상 끝에 있어요. 이번이 정답이에요. 정답인 증거를 대야 하잖아요. 그것이 마태복음 17장, 누가복음 9장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한 내용이 나와요. “주님이여, 내 죄 때문에 언제 돌아가십니까?”
인간을 행위를 하게 되면 그 행위를 잊지 못해요. 도저히 잊지를 못해요. 내가 아들 바쳤다. 내가 십일조를 냈다. 내가 봉사했다, 청소했다. 도저히 잊지를 못하는 것이 내용으로 쌓이게 되면 나의 의가 되는 거예요. 내가 회개를 했다. 회개한 것을 잊지를 못합니다. 회개함으로 점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회개 안 한 것보다 상대적으로 잘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준비된 복은 회개한 나에게 와야 되지 절로 가면 안 돼요. 그러면 내 에고가 화를 냅니다. 에고의 집합, 집단, 그것은 진정한 준비된 교회가 아닙니다. 그건 다 자기 잘난 체의 경쟁마당, 자기가 갖고 있는 솜씨를 발휘하는 마당. 참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가 얼마나 잘못됐는지 몰라요.
요셉 안에 들어있는 이 분이 신약에서는 예수님이에요.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의 차이가 뭐냐? 엄청나게 어려운 문제에요. 이름 하나 추가했을 뿐이지. 아니지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의 차이는, 이름은 피조물에게만 붙는 게 이름이에요. 창세기 2장에 아담이 피조물에게 이름 붙이듯이 이 말은 이름을 붙이시는 분의 역할을 이 땅에서 대행할 때 이름이에요. 이름을 불이려면 이 땅에서 활동성을 보여줘야 되고, 그분의 이름은 이름 붙여주는 분의 기능을 그대로 수용해야 될 책임을 지고 있는 분이 그 이름이에요.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이란 아버지 하나님이 갖고 있던 이름이니까 지상에만 이름이 있거든요. 지상의 이름에서 다른 이름과 차별 나게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능을 온전하게 수행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름의 이름은 소위 인간의 이름과 대결하면서 강제로 질질 끌면서 출애굽시킵니다. 강제로, 억지로. 인간들이 자기 나름대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어떤 행위를 발휘하게 되면 다 털어내고 가만있으라고 하면서 가게 하시는 거예요. 사람들이 가만있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뭔가 하고 싶어 하고 답답해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지금 자기한테 주어진 상황을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고 몸부림치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하지 말라고 하지요.
중요한 부분이라 천천히 갑니다. 하나님이 주신 어떤 과제가 주어지고 그 과제 앞에서 인간을 세우게 될 때 그 과제가 인간이 할 자신이 있다든지 난관을 극복한다든지 뭔가 해야 돼요. 그런데 하지 말라고 할 때는 이것은 한 마디로 절망입니다. 사람은 물고기가 아니기 때문에 바다에서 못 살아요. 그런데 갑자기 바다가 있을 때 사람들은 절망을 느낍니다. “신이시여, 너무 하십니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그때 신의 응답은 하나밖에 없어요. 뭡니까? 가만있어. 출애굽기 14장 14절 말씀. 가만있으라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①가만히 있다. ②반발한다. 몇 번입니까? 반발하게 돼있어요. 그 반발을 주께서는 보고 싶은 거예요. 그 반발을 보면서 그 반발이 출애굽 성향이 아니고 그냥 애굽에 살고 싶은 성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또다시 증명되는 순간이기도 한 겁니다. 못 사는데 못 살면 뭔가 해야 되는데 그걸 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홍해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히브리인들에게 제일 마지막 장면을 보여줬어요. 집집마다 모든 장자를 다 죽이는 작업이 있었어요. 하나님이 약속대로 문설주에 피를 바른 사람한테는 어린양의 피, 약속이 묻어 있지요.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했단 말이죠. 그러면 피를 보고 넘어간 거예요.
북한과 전쟁할 때 해병대 취사병과 이야기합니까, 총사령관과 이야기해요? 취사병은 배제되지요. 하나님이 심판할 때 우리와 의논합니까, 우리를 대신하는 분과 하는 거예요? 어린양이 대신한다면 우리는 빠져야 돼요. 빠지고 하나님이 하시는 최종심판 앞에 우리가 행한 것이 아무 짝도 소용없다는 것을 미리 앞당겨 보여준 사건이 뭐냐? 피를 바르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은 어린양 바치면 돈을 번다든지, 어린양 바치면 병이 낫는 그런 사건이 아니고 죽음이에요.
그래서 다시 봅시다. 율법 안에 명령 안에 어떤 분이 나오시는데 이분이 죽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에요. 그렇다면 정리해봅시다. 에고에서 셀프로 이동하면서 뭐가 개입된다? 죽음이 개입돼요. 여기 젊은 분들이 많은데 앞에 계시기 때문에 묻는 건데 여러분, 지금 죽음 생각합니까, 죽음 안 합니까? 안 하지요. 감사합니다. 앞당겨 넣어버려요.
예수님의 죽음으로써 우리는 구원받았다는 로마서 10장 13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아시지요. 그럴 때 사람들은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나의 행함, 내가 믿었다는 자기 믿음을 믿는 경우가 많은데 분명히 뭘 믿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연루돼야 되거든요. 예수님의 죽음과 연루되면서 에고는 죽음에 섞이고 주님의 셀프/자기도 함께 해서 에고의 죽음을 대신해서 주님의 죽음이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써 같이 동참한 모든 것이 주님의 몸의 일부로 같이 부활하는 것이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전략이거든요.
그런데 젊은 분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생존이 우선이지 죽음은 나중에 늙으면 생각해보겠다고 하거든요. 여기 다른 사람보다 연세가 많은 분이 계신데 지금 죽음을 생각합니까, 하루하루 사는 그게 더 중요합니까?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저 하루하루 몸 편하게 사는 게 최고에요. 죽음은 죽을 때 생각하지 미리 당겨서 생각하는 인간 없어요. 그게 에고에요. 그게 나에요. 부모로부터 죄 속에 태어난 나에요. 그것 버리지 마세요. 여러분이 버리면 그건 반성이 되고 버렸다는 것이 잘난 내가 되거든요.
주께서 쓰레기차가 옵니다. 주께서 버릴 수 있게 하는 순간들이 와요. 어떻게? 절망으로서, 모든 것을 다 상실한 순간이 젊은 얘들도 옵니다. 열두 살, 아홉 살도 와요. 일곱 살 때도 그게 옵니다. 엄마, 시험 쳤는데 내가 모르는 게 나왔어. 죽어버릴까? 엄마, 형한테는 장난감 좋은 건 사주고 왜 나한테는 선물 없어. 나 삐졌어. 가출할까? 이거잖아요. 절망이에요.
주께서는 절망을 줌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의 마음, 오직 에고, 나밖에 모르면서 신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정작 내가 중요하다는 그 죄악 된 본성을 절대로 그것까지는 우리는 손대지 않고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해먹는 그런 식으로 살아온 거예요. 그럴 때 주님의 대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자아가 오히려 실망케 하는 자아로 바뀌지요.
내가 집사인데 집을 하나 샀는데 앞집에 새댁이 목욕을 하는데 뚱뚱하면 괜찮은데 너무 잘 빠졌어요. 뒤태가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을 강제로 범했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이라크 전쟁에 가있는 장군인데 불러서 아내와 동침하라 해도 안 먹히니까 그 사람을 시리아 내전에 보내서 죽게 했습니다. 이것 범죄 맞지요? 이 범죄는 누가 저질렀습니까? 에고, 내가 저질렀지요. 제가 아까 이야기한 응용문제입니다.
내가 어떤 죄를 지어도 누굴 변호한다? 나를 변호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쁜 여자 줬잖아요. 하필 이사를 다른 곳으로 하게 하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잖아요. 뚱뚱하면 저는 마음에 없었는데 다이어트 해서 잘 빠졌습니다. 모든 탓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탓입니다.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제발 제 탓이라고 하지 마세요. 누가 누굴 지킵니까? 에고 에고를 지킵니다. 변명으로 일관하지요.
방금 이야기한 게 구약의 다윗이지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윗을 다그치는 것은 다윗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이미 다윗과 언약 안에 예수님과 창세전에 구원되기로 약속됐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거예요. 에고를 지키는데 에고는 천국 못 갑니다. 에고를 셀프로 바꿔주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예수님 안에 우리, 예수님과 함께 있는 무리 안에 예수 안에 우리를 집어넣기 위해 한 거예요. 그래서 신약성경에 너희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다. 너 말고 형제들 많다는 뜻이에요. 너 혼자 잘나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다 이루었어. 그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이 너뿐만 아니고 다른 사람도 있어. 따라서 천국 가거든 그때 누가누가 높으냐는 그런 것 하지 마. 피로 말미암아 동등하게 균등하게 다 구원받은 거야. 그걸 이야기하려고 하는 거예요.
어떤 남자가 여자를 따라옵니다. 따라오니까 여자가 겁이 나서 도망을 치는 거예요. “아가씨, 아가씨.” 하면서 자꾸 따라오는 거예요. “데이트 할 시간 없어요.” “그게 아니고 뒤에 자크 열렸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교회 다녔고 성경공부하고 멋지고 남보다 착하고 저 사람은 교회도 안 다니는데 나는 교회에 간다. 맨해튼 교회에. 여기 오는 게 얼마나 착합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오셔서 “아가씨, 당신은 에고를 갖고 있어요. 에고를 예수님의 준비된 셀프로 바꿔야 합니다.” 그걸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곳에 보낸 거예요. 와서 누가 예쁘냐, 잘난 척하다가 그게 아니었던 거예요.
다윗이 말하기를 주께서 원하는 것은 자크 열린 것을 원했던 겁니다. 나의 자랑, 장점들이 아니라 내가 숨기고 싶은 그것을 주께서는 그것을 접촉점으로 해서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도 아니고 예배도 아니고 상한 심령입니다. 상한 심령이라고 지적해서 구원하는 게 아니고(통역 잘해야 돼요) 우리가 죄인이라고 고백해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창세전에 구원받은 자에게만 내가 상한 심령이라는 고백이 주님의 압박에 의해서 주님이 조지는 상황에서 터져 나오게 하는 겁니다.
그 상황을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광야에서 물 없고, 양식 없는 가운데서 그걸 완전히 노출시킵니다. 우리에게 물을 다오. 주님께서 그렇지. 우리에게 양식 다오. 그렇지. 그게 너희의 본색이야. 우리에게 고기를 다오. 그렇지. 그것이 바로 너희가 애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네 몸으로, 완전히 몸 자체가 애굽의 사람으로 철저하게 만들어졌어요. 그런 사람이 교회에 왔다. 교회나 세상이나 똑같은 거예요. 교회도 세상이고 세상도 세상이고. 서로 소통 잘하고 그럴듯한 행세,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새게 돼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만나는 것은 율법이 아니고 율법에서 복음으로 열어줘서 뭘 보게 하는가? 율법 안의 예수님의 떨어지게 돼있는데 예수님이 멀쩡하게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피를 흘리며 떨어지게 함으로서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앞으로 내 인생에 몇 차례 절망이 올지 모르겠지만 심지어 죽는 순간이 온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사실입니다. 표를 끊으려고 하는데 앞에서 하지 마세요. 제가 이미 다 값을 다 지불했습니다.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성령의 마지막 열매는 다른 게 아니에요. 감사하는 겁니다. 고맙습니다. 탱큐.
문제 나갑니다. 고마워하면 인간될까요, 인간 안 될까요? 고마워했으니까 인간됐다. 고마워해도 인간 안 된다. 몇 번입니까? 고마워해도 인간 안 됩니다. 끝까지 인간되지 마세요. 끝까지 에고 주장하세요. 만약에 여러분이 에고를 버렸다고 착각하는 것은 마귀의 시험입니다. 죽을 때까지 여러분의 이기주의는 그리고 돈 사랑은 절대로 여러분을 떠나지 않고 유지될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오직 천국 갈 때까지 예수님 때문에 갔다고 이야기해야지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 나의 멋진 결단력으로 갔다는 소리하게 되면 그게 마귀의 시험이에요. 교회를 오십 년 다녔느니 목사인데 신학을 몇 년 했니 책을 몇 권 냈느니 그거는 전혀 우리의 구원에 도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막 사세요. 성깔대로 사시고 성질대로 사세요. 땡큐 나왔습니다. 다른 곳은 아멘 하는데 여기는 땡큐 나왔습니다. 막 사세요. 그리고 느끼세요. 절대로 주께서는 나를 막 살도록 방치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수동적 인간이에요. 뭔가 나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분의 창세전에 예정하신 그분이 나와 함께 동행함을 더욱 더 나를 죄인 되게 만드는 작업을 통해서 오직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께만 감사하는 그 마음으로 살게 하시는 그 작업, 그것이 바로 출애굽의 작업이었습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노래가 있어요. 노사연의 <님 그림자>라고 있습니다. 가사에 달이 떴는데 님은 저만치 가고 자기는 그 님의 그림자를 밟아가는 거예요. 현대 젊은 사람들 님이 없어요. 경쟁 대상밖에 없어요. 사랑의 대상이 없습니다. 저분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는 게 없어요. 나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거예요. 칭찬받기 위해서. 칭찬받으면 인정받고 인정받으면 돈 생기고. 그런 식으로 어릴 때부터 훈련받았습니다. 수학성적, 생물, 영어, 모든 게 주변의 기대감을 충족하기 위해서 우리는 애썼어요. 특히 음악 하는 사람들 콩쿨.
아버지의 귀신이 뒤집어쓴 거예요. 그것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겁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기의 사상을 그대로 강요했고 우리는 얻어맞지 않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그것이 선인 줄 알았고 아버지가 원하는 게 출세였다면 아버지의 목표를 만족할 때 이미 아버지는 고인이 되어서 따뜻한 양지 밭에 묻혀 있으니까 소주와 마른 오징어 들고 가서, “아버지, 제가 왔나이다. 그토록 바라시던 판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야, 인사해. 그토록 날 사랑하시던 아버지야. 아버지 제 여자친구 여기 왔습니다. 제가 손자 보면 다시 와서 인사드리겠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동안 노예 생활한 거예요. 정신적 노예를. 아버지 말 들어야 유산 생기고. 아버지 말 들어야 용돈 생기고, 아버지 말 들어야 공납금이 생겨요. 아버지를 사랑한 적 없어요. 인간은 에고, 에고는 나만 사랑하고 주변의 모든 사람은 나의 이용물이에요. 그 이용물 중에 하나님이 끼어있어요. 하나님은 뭘 원한다? 헌금과 기도를 원하는 거예요. 기도해주고 줄 건 주고 정작 받아 챙길 건 챙기겠다는 흥정하는 심보, 장사하는 심보, 누굴 위해서? 셀프가 아니고 에고를 위해서.
그럼 셀프는 어디서 나왔는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율법에 둘러싸여서 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 셀프가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선악과기 때문에 에고로 작용하지 셀프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나 잘난 쪽으로만 살게 돼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인간을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죄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기 때문에 항상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이다) 나를 죄인으로 만들게 하는 그 작업이 나를 구원하는 프로세스고 과정이었던 겁니다. 나의 죄가 나를 구원하는 거예요.
그 죄가 바로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졌기에 주님으로 인하여 날마다 우리의 죄가 생산되는 겁니다. 내 몸은 죄를 생산하는 기계고 공정입니다. 이 말은 대단히 오해할 소지가 많아요. 제가 이 정도 이야기하면 반박 들어옵니다. “목사님, 성경에서는 바르고 하나님 형상을 본받으라고 했는데 목사님 이론이 아무리 기묘해도 성경과 다르지 않습니까? 성경과 다르니까 당신 이론이 멋져도 그건 성경과 어긋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어서 반박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에 대한 답변을 해드리겠습니다. 예배 마치고 형제간에 모여서 어려운 고아원, 노인들에게 봉사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아직 선악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오늘은 예배드리는 착함도 했고 끝나고 난 뒤에 고아원을 방문하는 착함, 플러스 백점이에요. 착함에다 또 착함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교회 와서 십자가 피 앞에 설 때에 내 구원문제, 영생문제를 해결했기에 내 죄를 지적하시는 거거든요. 다른 사람은 지적 안 하는 이유가 이미 구원받은 자에게만 골라서 지적해요.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다시 살리는 이것이라. 요한복음 6장 39절에 나오는 말씀이란 말이죠.
그렇다면 옛날에는 착한 일하는 주체도 나였는데 그때부터 뭐냐 하면, 과연 고아원 방문하는 것이 착한 일인가? 나의 죄를 끄집어내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어떻게? 고아원 방문하고 난 뒤에 돌아서니 왜 그렇게 마음이 흐뭇한지 착하지 못해 도를 닦는구먼. 내가 그 귀한 돈을 교회 나오지도 않을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주다니. 아차. 이것이 바로 미처 내가 몰랐던 깊은 바닥에 있는 자기 의라는 것은 고아원 방문이란 계기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드러내는 겁니다.
-중요한 것이라서 다시 한 번 해주시겠어요?
제가 잊어버렸어요. 중요한 건 다시 반복할 테니까. 중요한 건 뭐냐 하면, 전에는 착하다고 여겼다는 것이 나중에 새롭게 주께서 어떤 계기를 만들어주니까 그 착하다고 여긴 것이 악의 다른 모습이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겁니다. 그럼 고아원 방문하지 말까요? 하세요. 하시고 가세요. 가시고 내 죄를 내 앞에 두세요. 그때 고아원 방문 안 했으면 얼마나 자랑질했을까? 이것을 갈라디아서 5장에서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겁니다. 죄가 나를 구원한 거예요.
내가 아는 죄는 그건 죄가 아니고 주께서 발굴해주시는 죄, 그 죄는 헌금하는 죄, 기도하는 죄, 사십 년 전도하는 죄, 저처럼 강의하는 죄, 설교하는 죄, 개척교회 열 군데 하는 죄, 그리고 순교하는 죄. 의인은 없나니 아무도 의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일을 해도 우리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하시는 그 작업 주께서는 멈추지 않고 자기 백성에게만 그런 혜택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런 작업에 참여시키는 겁니다.
-전적 타락 개념인가요?
타락 개념은 그건 신학에서 고안한 개념이고 성경에서 나오지 않는 개념이기 때문에 제가 뭐라 설명할 수 없어요. 신학 개념의 타락은 전제가 뭐냐 하면, 회복된다는 걸 연결시켜서 타락을 했기 때문에 그 타락을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타락한 것을 믿으시면 당신은 회복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돼버리면 그건 하나님의 구원방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를 알지 못해요. 에고적 차원에서 죄는 한계가 있어요. 나이 구십이 될 때 지은 죄를 알아서 백 살까지 살다 죽은 사람에 비하면 모자라요. 사람이 아무리 똑똑해도 자기가 안 만큼 살았던 환경만큼만 세상을 평가하게 돼있지 규정하게 돼있기 때문에 온 세계 모두를 아는 그런 입장에서 나는 과연 죄냐를 판정내릴 수 없습니다.
아담 스미스란 경제학자가 이런 말을 했거든요. 치과의사는 이기적으로 자기 돈 벌기 위해서 치과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체를 봐서는 공익이 된다. 그게 보이지 않는 손, 시장에서 이상한 원리에요. 각자는 모두 이기주의인데 전체를 봐서는 이빨 아플 때 얼른 가서 도움 받는 공익적인 혜택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지 않는 그것을 수용하세요. 하지만 그것을 이기주의기 때문에 죄라고 하시면 안 돼요. 죄는 몰라요.
죄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만 죄가 확정됩니다.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그 죄를 아담이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어요. 사람이 뭔가 경험한 걸 지시해야 인간의 자유의지가 발휘할 수 있는데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 할 때 아담과 하와는 죽어본 적도 없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건 아이큐가 필요한 대목인데 그래도 중요하니까 해야 되겠어요. 다섯 살 먹은 유치원 아이한테 너, 숙제해. 숙제 안 해? 돋보기 씌운다. 얘가 돋보기 써 본적 없잖아요. 너, 자꾸 그런 일하면 고혈압 약 안 준다. 이게 해당이 안 되잖아요. 만약에 걔가 돋보기 쓴 경험을 한다면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자유의지로 선도 행할 수 있고 악도 행할 수 있게 되는데 전혀 경험하지 않은 걸 벌로 내세우면 이건 인간의 자유의지 자체가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아울러 이야기한 바가 되는 겁니다.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죠.
죽는다는 것은 아담이 죽어도 죽음을 몰라요. 죽음은 누가 아느냐? 십자가에서 죽음이 제대로 예수님만 죽음을 알고 있어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참 그 십자가의 비밀이에요. 우리는 몰라요. 버림받았던 그것을 주님만 아시고 우린 졸병입니다. 취사병이고. 구원문제는 아버지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부대효과를 받아서. 백날 내 뜻대로 안 되네요. 저만 경험한 겁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뜻대로 되던가요. 특히 복음 알라고 해도 자식 마음대로 안 되지요. 그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어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게 창세전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구원되시거든 내가 구원받고자 노력했기에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나는 구원에 관심도 없고 내가 생각한 구원은 에고의 구원이었는데 주의 뜻대로 셀프의구원이 되었다고 천국 가서 면류관을 주 앞에 반납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구원을 제쳐주시는 고마움, 내가 상상한 것을 이뤄지게 않게 하시는 그 고마움.
그러면 목사님, 그렇게 됐다, 안 됐다는 것을 어떻게 판정할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에게만 감사할 때 나의 행함은 아무것도 내 구원에 보탬이 되지 않는 것을 깨달았을 때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장세우는 성령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신 겁니다. 그래서 하세요. 하시고 어차피 우리가 하는 것은 우리는 죽을 때까지 에고니까 기억할 거예요. 기억하면서 우리는 자랑질을 하겠지요.
어떤 식으로 자랑질하는지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오늘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절대로 내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입니다. 오직 성령께서 인도했습니다. 하나님 영광 받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도 멋들어진 기도를 내가 이런 기도를 제작하다니 내가 이만큼 신앙이 자라났어?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볼 때 상대적인 어떤 승리감도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죽을 때까지 에고적인 것이 절대로 고쳐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것마저 했음에도 불구하고 은근히 노렸던 뜻이 있었어요. 주여, 이 정도로 내가 괜찮게 신앙생활 하니까 정작 아버지 제가 원하는 걸 아시지요. 결혼문제, 준비된 게 있을 거예요.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오실 줄 믿습니다. 이렇게 흥정에 나섭니다.
출애굽에서 어린양의 피가 인간의 의식 속에, 인간의 시간의식은 과거-현재-미래입니다. 현재가 되면 과거는 날아가 버리죠. 현재가 되면 미래는 날아가 버립니다. 한 번 피 발랐다. 그러면 우리는 잊어버렸어요. 요단 강 건넜다. 신났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과거의 에피소드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순신 장군이 1592년에 그렇게 해도 나와 상관없어요. 왜? 나는 2014년이니까. 참 훌륭하셨습니다. 박수쳐줄 수는 있어도 그건 남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시간이 그것밖에 안 되는 줄 알고 어린양의 죽음을 제사라는 법을 통해서 매일같이 동행하면서 반복케 하십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렇게 합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여러분,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할 때 십자가 사건은 십오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맞지요?
그런데 십자가 사건 그 당시에 사도 바울은 다소라는 다른 동네에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과학적으로 확인 안 되는 소리를 사도 바울이 내뱉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 거예요? 예수님과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구라, 거짓말이잖아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요? 십자가가 가로 몇 센티인데요? 이게 보입니까? 여러분, 성경이 쉽다고 생각하세요. 지금 사도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합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니. 너희 눈에만 보여. 우리 눈에는 안 보이는데. 이걸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우리는 과학적, 논리적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할 거예요.
사람들은 신앙생활 하면서 어떤 증거를 눈에 보기를 원하거든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 했는데 우리는 자꾸 보는 것을 통해서 어떤 실적과 업적을 통해서 복 받았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하는 에고적인 우리 몸의 본성적인 것을 발휘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걸 비껴가는 겁니다.
뭐냐? 신앙에 실패하라는 거죠. 실패하면 안 되잖아요? 실패해보라. 실패한 자리에 네가 미처 신앙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 너의 신앙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게 뭐냐 하면, 작은 일에 그리고 실패 자체가 감사로 느껴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에게 너무 심한 부담을 줘서 미안합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고 내가 신앙인 것을 확정하겠다고 마음에 다짐을 했는데 그걸 비껴버릴 때 우리는 어떤 실패를 느낍니다. 실패를 느끼면서 해는 그대로 뜨고 파도는 칩니다. 1962년에 나온 유명한 팝송에 이런 게 있어요. why does the sun go on shining 나는 사랑을 잃었는데 태양은 왜 빛나고 있느냐 말이죠. 내가 여자와 헤어지면 해가 시커멓든지 안 떠야 되잖아요. 도대체 세상은 누구 중심이냐는 겁니다. 내 남자친구 만나는 중심이냐? 아니요. 내가 취직해서 안정된 자리를 확보하는 중심입니까? 아니죠.
그럼 세상은 무슨 중심입니까? 죄인을 의인 되게 하는 언약이 중심입니다. 못 먹고 못 살아도 구원받았으면 영생 얻었으면 주께로 받을 것 다 받아 챙겼어요. 그러면 더 달라고 기도하지 말까요? 아니요. 하세요. 왜? 우리 에고는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 그것을 그대로 노출시키세요. 주님께서는 한 때 죄인인 것을 의인 만드는 게 아니고 늘 죄인인 자를 의인으로 만드는 겁니다. 한 때 죄인으로 예수 믿었습니까? 이제는 착한 일하세요. 그것 아닙니다. 그 착한 일이 내가 의라고 여겼던 색다른 죄로 진화된 거예요. 어떤 겸손을 위장한 교만이에요.
새로운 상황이 오게 되면 우리는 갑자기 악마로 돌변합니다. “하나님, 나는 맹세하겠습니다. 이제 돈을 사랑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해도 오년 뒤에 이백만 원 뇌물 생기면 우리는 전에 약속한 것이 있어서 밀어냅니다. 저는 오년 전에 돈을 사랑하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업자가 천만 원 냅니다. 아닙니다. 저는 약속했습니다. 업자가 이십육억 오천육백만원 줍니다. 아멘, 할렐루야. 그동안 내가 돈을 사랑하지 않은 대가로 목돈으로 적립되어 드디어 주께서 축복으로 주시는군요. 날름 받아버립니다. 그러니까 돈을 사랑하지 않을 때마다 적립된 게 뭐냐 하면, “주여, 보시옵소서. 돈을 사랑하지 않음으로 이 보상이 큰 목돈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라는 간절한 자기 행동이었지요.
여러분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여러분, 막 사세요. 막 사시면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 돈 받아 챙길 때마다 돌려주지 마세요. 받으면서 몰랐던 죄가 발각되면서 십자가가 같이 동반해서 보일 때 이미 나는 예수 안에서 오늘밤 죽어도 천국 가도록 확정되었기에 이러한 놀라운 사태가 우리에게 찾아온 걸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편하게 살면 된 일을 그저 내 몸대로 살면 될 일을 우리는 뭔가 조작을 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면서도 아닌 것처럼 했고 주님을 이용하면서 주님을 사랑한 척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마저 주님의 십자가 드러내고 하나님 은혜를 아는 좋은 재료가 되었사오니 죽을 때까지 주께서 원하시는 죄인이라는 재료로 남게 하옵소서. 그래서 죽을 때 오직 십자가 피로만 용서받았다는 것을 그 은혜만 증거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감사합니다. 목사님. 시간이 좀 남았는데요. 오늘 들은 것은(질문할 게 많을 거예요) 현대기독교의 허를 찌르신 거죠. 그래서 누구든지 오늘 들은 것 중에서 이런 것이라고 sentence(?)를 알려주세요. 누구든지. 목사님 말씀하신 것은 그렇게 살라는 게 아니라 사실은 그렇게 사는 현대교회를 고발하신 거예요. 사실은 현대교회는 예쁘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그렇게 하죠.
위장하죠.
-나중에 복을 많이 주시겠지 하는 그런 흥정 같은 걸 굉장히 selfish하게
그저. 오늘 말씀하신 중에 있죠. 하나님과 흥정하는 것. 또요?
끝까지 유지하세요.
-그 부분에 대해서 저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대해서는 지금 말씀하신 것과 상충 것과 같은 부분이 있거든요. 그 부분은 아마 다음 섹션이나 전체적으로 해주셔야 되는 게
아닌데 간단하게 지금 답변됩니다.
-이런 거죠. 목사님은 누가복음부터 하신 거예요. 출발점이 성경의 개념이 아니라 사람들이 갖는 개념으로 시작하신 거예요. 여기서 말씀하신 에고라는 게 성경에서 셀프죠. 그런데 셀프는 예수 안의 개념으로 만들어내신 거죠. 사실 혼선을 빗을 수가 있습니다.
제가 간단히 답변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분을 품되 해지도록 품지 말라고 하지요. 그것이 어디서 나오는지 보세요. 십자가에서 나왔지요. 아까 통 안에 예수님이 들어있지요. 십자가 안에 예수님이 들어있지요. 그러면 이건 율법적 기능이라 하는데 이것은 죄를 더 죄 되게 하는 기능이에요. 로마서 3장에. 해를 품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분을 품되 시계 보는 거예요. 해질 때 언제인가.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을 취하라 한다면, 술 몇 잔 먹어야 비로소 취함과 취하지 않음의 경계선을 따지게 마련이거든요. 그렇게 하는 것이 내가 품고 있던 새로운 죄를 발견하는 계기로서 주님께서는 여전히 율법적 기능으로 사도 바울의 권면과 명령이 우리에게 유효한 겁니다.
-자기 부인이 혼의 부인과는 다릅니까?
혼이란 헬라적 철학에서 나온 개념인데 히브리적 사고에서는 혼과 영이라 하는 건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돼있습니다. 시편에 보면 하나님과 관계가 이어지면 영이고 하나님과 끊어진 것을 육이라 합니다.
-이건 설명이 필요해요. 왜냐하면 헬라어나 히브리어나 영, 혼, 육이 있지요. 이렇게 말씀하시면 이단스러워지는 거죠.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은 유대개념이에요. 유대개념은 통합하는 사상, 하나로 보는 거예요. 헬라개념은 분석하는 거예요. 목사님 사고방식은 완전히 유대개념의 무반복을 쓰세요. 조금 아까 지나간 것을 repeat하라고 하시니까 못 하시는 거예요. 그게 무반복에서 나온 설교세요. 너무 설명 잘한 것 같아요. 또요. 다음 강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구원이란 전적으로 we에서 내려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이 저희를 덮으시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경험 없이 교회 나와 있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은 주님이 주신 은혜라는 것에 이미 덮여져 있습니다. 코끼리, 코스모스도 이미 예수님의 은혜가 삽입된 채 코스모스와 참새와 들풀도 지금도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의 키가 자라는 것이 성장판 훈련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은혜로 이만큼 자랐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받은 주님의 은혜는 생각 안 하고 그건 기본으로 생각하고 서로를 비교하면서 욕심을 낸 거죠. 그래서 어떤 누구도 핑계치 못합니다. 나중에 죽어 보니까 주께서 은혜를 주셨구나. 햇빛과 공기주시고 악인과 선인과 가리지 않고 은혜를 주신 거예요.
-저는 주님이 해설해주시는 것 같아요. 목사님은 설교의 시작을 사람으로 시작해요. 누가복음처럼. 사람이 아는 바로는 이런 예수다. 우리가 만든 에고가 만든 예수라는 거죠. 그런데 마지막에 어느 순간에 뭘 말씀하시느냐 하면, 모든 구원은 주님께 예정이 됐고 준비된 대로 되는 것이라는 거예요. 이게 확 바뀌거든요. 제가 제동을 거는 것은, 이 바뀌는 순서가 너무 빠르시다는 거죠. 거기서 필름이 끊어지는 거예요.
시간이 충분하지 않으니까.
-오늘 큰 명제인데 지금 자매님이 중요한 말씀하셨어요. 목사님이 말씀하신 또 하나 포인트가 뭐냐 하면, 주님이 됐기 때문에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노력한 것 때문이 아니라는 그걸 흥정이라고 하죠. 오늘 너무 감사해요. 세 분이 우리 쪽에서의 반성에 대한 말씀을 잘해주셨고 자매는
그러니까 주님께 완전히 달려있다는 걸 들고 가신 거죠. 그리고 장로님께서는 미들필드시거든요. 성경 개념의 자아란 목사님 말씀하신 자아라는 것이 설명이, 사실은 에고가 자아죠. 너무 감사합니다. 목사님은 인터넷 보시고 수요일은 뉴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