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미국동부오후g 본문
20140927 미국동부오후g
(강의:이근호 목사)
녹취:한윤범
구약 이스라엘에게 시형제결혼법이 있다. 형이 아기를 못 낳을 때는 동생이 낳게 해야 된다. 그걸 반대한 사람이 있었어요. 오난이란 사람이 땅에다가 설정했지요. 그래서 죽었어요. 죽은 게 아니고 죽였지요. 땅에다 설정했다고 죽였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언약을 짓밟았으니까 언약대로 저주받으라는 이야기에요.
도대체 이 현실은 우리가 아는 현실이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첫날에 이야기했잖아요. 지금 우리가 아는 현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러한 현실 말고 진짜 현실은 도대체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건 주의 계시에 의해서만 되는데 그게 너무 이상하고 낯설다. 왜 낯선가?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눈이 감겼기 때문에 감긴 상태에서 만들어낸 모든 세상은 주님 보시기에 상징, 쉬운 말로 허상, 허구, 사라질 것.
다시 말해서 주께서 창조하셔야 되고 따로 있다면 없앨 것을 없애고 빈 자리에서 새로 만드는 겁니다. 화장실에 휴지 없으면 바깥에서 주는 게 아니고 없는 그 안에서 주는 식이에요. 죄를 지었잖아요. 죄를 구원하는 능력이 죄 속에 있다니까요. 어제 목사님이 이야기했잖아요. 죄가 나를 구원한다고. 기절초풍할 이야기에요. 다만 그 사람들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성경 어디에 그런 구절이 있느냐는 거죠. 그러면 네가 이야기한다고 알겠나. 이걸 보고도 모르는데 이야기한다고 알겠어요? 상처는 상처로 치유된다는데. 도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에요. 선문답도 아니고.
그러나 시형제결혼법은 분명히 있는 거예요. 그냥 말로만? 아니에요. 죽여 버립니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진지하기에 얼마나 하나님께서 그 법칙을 사수하기에 이것 무시하면 죽여 버릴 정도로 그 인간을 개 취급해서 죽일 정도로 중요하다면 왜 우리는 그 시형제결혼법이 적용되지 않고 살아가느냐? 뭔가 우리가 허상을 따르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해야 돼요. 성경 따라 나 따로. 성경에서 나오는 발현되는 진리는 모르고 나의 의를 정당화하고 변명하는데 성경을 한껏 이용함으로 주를 모독하는 삶이 아닌가를 돌아봐야 되겠지요.
누가복음 2장 23절, 시형제결혼법과 맏아들의 관계는 뭐냐? 둘째 아들은 자식이 없어도 좋다. 셋째 아들은 자식이 없어도 좋다. 하지만 누구는 자식이 있어야 된다? 심지어 그 남자가 죽는다할지라도 남자의 씨는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룻기에요. 그 룻에 따라 온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다윗이 죽는 자리에 진짜 다윗언약이 나와요. 다윗은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언약했다. 아니에요. 다윗이 죽을 때 죽은 다윗에서 언약이 나오는 겁니다.
다윗은 하나의 제물이었습니다. 다윗은 무슨 제물이야. 다윗은 어린양이 아닌데? 다윗 인생 자체가 제물이었습니다. 무슨 제물? 세상 죄를 대표하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제물이었고 그 제물을 하나님의 언약이란 제단에 바침으로 말미암아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다윗언약에 의한 용서가 죄에서 구원이 나오듯이 죄 많은 다윗에게서 다윗의 자손이 나와서 소급해서 다윗을 건져내시는 방식을 하나님께서 그것만 고집하고 고수했다. 이것을 믿느냐? 이것이 구약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길고 복잡하고 얽힐 때에 하나님의 언약이란 징검다리를 통해 살펴보면 찾아낼 수 있는 중심이 있는데 그 중심이 뭐냐? 죄인을 구원한다. 그걸 줄여서 말하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께서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다. 달리 이야기하면 내가 죽으면 죽은 이도 산다. 내가 죽으면 네가 산다가 아니라 말 한 마디도 주의해야 돼요. 내가 죽으면 죽은 네가 산다는 거예요. 따라서 너는 주님 없이는 살아도 죽은 자라는 걸 인정한 사람에게만 주께서는 메시아를 알아보도록 성령께서 사전 조치가 그렇게 이뤄진다는 겁니다. 로마서 6장에 보면,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살 것이요. 디모데전서에도 그게 나와요.
중보자요? 우편배달부는 그냥 산 채로 부치잖아요. 그러나 하늘나라 생명의 전달자는 죽음으로 받아서 “나는 주기 싫어요.” 하면 안 되고 이분은 내 죄 때문에 죽은 거야라고 고백하면 그 속에 생명이 들어있어요. 생명의 편지, 자기가 죄인인지 알아먹는 자만 알아먹는 그런 편지.
그렇다면 시형제결혼법은 뭐냐 하면, 바로 죽은 자도 씨를 낳을 수 있다는 겁니다. 자손을 낳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럼 씨를 어디에 써먹으려고 강조하는 겁니까? 아브라함의 약속에 의하면 세 가지를 축복했어요. 하나는 씨, 두 번째는 땅, 세 번째는 의. 하나님의 의, 땅, 씨, 이것을 복으로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씨가 만들어지는 땅을 주고 땅에서 온 씨가 의를 갖고 있다고 하나로 묶어낼 수 있어요. 예수님이 씨고, 예수님이 땅이고, 예수님이 의입니다. 그 중에서 사람들이 제일 못 알아듣는 게 두 번째입니다. 예수님이 땅이라는 걸 못 알아들어요.
땅은 공간개념이고 예수님은 인물이잖아요. 인물이 어떻게 땅이 될 수 있을까요? 도저히 그건 납득이 안 되지요.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축복이 땅에 있잖아요. 사도 바울은 땅이 바로 예수님이라 하지 않고 중간에 거쳐서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뭘 거치느냐 하면, 아브라함 자손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성령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영적 공간 속에 예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공관복음에서 예수 안(In Christ), 예수님 자체를 공간개념화해서 사용하고 있어요. 네가 의로운 것은 예수 안에서 의롭다는 겁니다. 공간개념이니까 그 비유를 우리가 사용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동그라미를 그릴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만 의인 되고 영생을 얻는다면 예수 밖에 있는 자는 저주뿐이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그들은 대대로 그 땅이 그 땅이고, 그 씨가 그 씨고, 그 의가 그 의다. 그 땅은 가나안 땅을 말하고, 그 씨란 할례를 행한 아브라함의 혈통, 야곱의 열두 지파 가운데 유다가 대표니까(멸망하고 난 뒤에) 그게 유다나라거든요. 유다지파가 여전히 dna가 흐르고 있는 거예요. 아브라함 자손이니까 그 씨가 됐고, 의는 구약에서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율법을 어기면 저주받으니까 율법을 지킨 만큼 양적으로 누적이 되겠지요. 마일리지 쌓이듯이 쿠폰 모으듯이 자꾸 자기 장부에 예수 믿고 난 뒤에 날로 의가 저축이 되는 보람을 느끼잖아요. 그게 바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모르기 전에 했던 방식이에요.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우리 자신이 선악과나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선악과나무는 하늘나라에 없습니다. 에덴동산 회복 안 됩니다. 회복되려면 선악과나무가 있어야 되는데 선악과는 지옥 가 있으니까. 선악과는 악마를 악마로 드러내기 위해서 심어놨는데 그걸 알고 악마가 같이 죽자고 따먹으라고 한 거예요. 인간을 조지기 위해서 따먹으라고 한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은 행함에 대한 심판이고 구원은 행함으로 구원하는 게 아니고 생명책에 명단 있으면 구원합니다. 이걸 잘 모르는 사람 있어요. 생명책은 말라기에 보면 기념 책이라고 돼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기념하는 거예요. 평생토록 예수님 때문에 존재했음을 기록한 명단이 있어요.
기념했기에 기념하는 주인공이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나무가 있는 그 나라에 지상에서도 기념하고 지상에서 기념한 것처럼 영원히 살면서 기념하라. 예수의 주 되심을 기념하라. 그런 역할로 천국에 입성하게 된 겁니다. 합격통지를 미리 당겨서 받았어요. 전화 걸면 불합격입니다. 안 됩니다. 합격자 발표했느냐고 물으면 안 돼요. 그러면 회사에서, “이미 통보했습니다.” “저한테는 통보 안 했는데요?” 바봅니까? 불합격이란 뜻이에요.
성령의 보증금으로 이미 와버렸으면 그 아파트는 성령으로 등기가 되면서 아브라함의 땅에 해당됩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 이야기지요. 우리나라에 이것으로 논문 쓴 사람이 있어요. 성령이 곧 땅이라는.
천국은 어디 있다? 성령 안에 있지요.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요한복음 14장. 내가 가는 것은 처소를 마련하기 위함인데 그 처소는 곧 아버지와 예수님과 올 수 없는 너희도 함께 하게 할 새로 만든 처소지요. 그것은 성령의 기능 속에 확장되게 업그레이드 된 성령의 기능이 인간도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그런 여건을 마련한 겁니다.
식사 초대했는데 예상 못한 사람이 왔을 때는 한 사람 더 왔으니까 숟가락하고 음식 더 내오세요. 그리고 자리 좀 당겨서 앉고. 의자 하나 마련해. 옛날에는 아버지와 예수님만 있을 자리에 의자 하나 더 허겁지겁 준비해서 예수님이 선택한 자를 거기에다 앉히면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나와 함께 있는 방식으로 너희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보혜사 성령이 오게 되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도 아니고. 그런데 이게 맞아요.
지금 이런 이야기가 있으면서도 왜 우리가 놓치느냐 하면, 내 행함으로 어떻게 구원되는지 내 쪽에서 강력하게 요구했기 때문에 안 행해도 다 마련했다는 말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행하게 되면 자기 명예가 높아져요. 그게 주기도문과 안 맞아요. 내 이름이 살아있어 영원히 빛나게 되면 그건 천국이 아니고 아들의 나라가 아니고 내 나라가 돼요. 나만 내 나라입니까? 나 같은 인간 또 있잖아요. 그러면 천국에서 투쟁하게 돼요. 꼴좋다. 아직 싸움 안 끝난 모양이라. 천국 가서 멱살 쥐고, “네가 여기 올 줄 몰랐다. 돈 내놔라. 돈 떼먹고 결국 여기 왔구나.” 주님께서 둘이 싸우지 마라. 그러면 골목으로 가서 “내가 여기까지 따라올지 몰랐지?” 이게 무슨 천국입니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인간들. 좋은 환경 줘도 안 되는구나. 내가 못 살아.”
여러분,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따먹을 때 환경이 나빴습니까? 먹을 게 없어서 배고파서 따먹었습니까? 희락의 동산, 최고의 동산에서 그들은 범죄 했습니다. 부자 된다고 죄 안 지어요, 가난하다고 죄 안 집니까? 환경이 문제가 아니고 주를 위해서 우리는 죄의 생산 공정도구가 돼야 됩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은 구원된 사람이고 그 사실을 모르고 자기를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지옥 갈 사람입니다. “목사님, 원색적인 설교는 좀~” 원색이고 뭐고 포기했어.
맏아들은 무조건 씨가 있어야 된다. 시형제결혼법은 아들이 있으면 안 돼요. 둘째, 셋째 낳으면 안 됩니다. 그건 형수가 바람난 게 돼요. 아들이 있는데 왜 해요. 우리의 부부는?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아들을 낳아야 돼요. 어떤 아들? 맏아들. 그것이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입니다. 결혼의 목적은 부부의 행복에 있는 게 아니고 아들을 낳는데 있어요. 아들을 못 낳으면 저주, 낳으면 축복입니다.
아비멜렉에게 어떤 손님이 찾아오는데 그때부터 아비멜렉 모든 가문의 여자들이 임신이 안 되네. 아마 누가 약을 먹인 모양이라. 그게 창세기 20장에 나오지요. 물론 아비멜렉이 예쁜 처자를 데려오니까 “당신 부인인가?” 아브라함이 두 가지 카드를 갖고 있었어요. 자기가 세다 싶으면 부인이라 하고, 자기가 약하다 싶으면 누이동생이라고 적절하게 써먹으려고 했어요.
아비멜렉이 자기보다 세니까 누이동생이라 카드를 내밀었지요. “누이동생이라면 내가 부인으로 맞이해도 되겠네요.” 그때 사라가 뭐라고 그러겠어요? “왜 저 여자가 내 여자라고 말을 못해.” 분명히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사라가 뭐라고 합니까? 논개라. 이 몸 바쳐서 나라 구하겠다고. 왜냐하면 남편이 복의 근원이잖아요. 이 몸 희생해서 복의 근원 유지하라고 이슬처럼 사라지겠노라고 자기는 성상납에 자진해서 나섰습니다.
그런데 제삼자가 개입할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갑자기 아비멜렉이 이 여자가 괴물인지 알고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불렀지요. 이실직고하라. 부인이냐 아니면 네 친척이냐고 물었지요. 그때 비로소 가족이 아니고 자기 부인이라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입니까? 복의 근원이 싫어도 될 사람입니까? 싫어도 복의 근원이 될 사람이지요. 맞지요. 그럼 여러분은 천국 갈 사람입니까, 가야만 할 사람이에요? 천국 가야만 하는 사람이에요. 돈을 버세요. 나쁜 짓하세요. 막 사세요. 절대로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운명이 아니고 주님이 개입된 운명으로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예레미야가 선지자 노릇 못하겠다고 때려치우겠다고 자격증 반납했어요. 말만 하면 욕하는데. 여러분도 실감하고 있지요. 말만 하면, “나 밉지?” 이런다는데 에이 씨. 못 해먹겠다고 반납하니까 주께서 말립니다. 네 일이 아니고 엄마 태에서부터 간택 됐기 때문에 취소가 안 된다는 거예요. 조져놨어. 예레미야는 해야 돼요. 에스겔 같은 경우에는 욕 얻어먹는데 정말 맹렬한데 임금은 죽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성경책을 드리니까 난로 불에 집어넣고, 이게 내 뜻이야. 가봐.
예레미야가 힘이 나겠어요? 권세자 잡으면 선교에 도움 되겠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선 어떻게 합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짐을 미리 경험하는 겁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 것이 장난이 아니고 실제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는 현장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노선이 주님과 같은 성령의 노선인 것을 일깨워줍니다.
여러분 기대하지 마세요. 정말 기대하지 마세요. 기대하지 않을 때 감사가 일어나고 기대하면 실망밖에 오지 않습니다. 기대 안 하되 더 낮게 십자가 자리에서 하세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 것을 나라고 알아듣는 건 아닌데 성령이 왔기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예수님의 피로만 용서된다는 말도 안 되고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되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진짜 귀한 것으로 알아들을 때 주의 다른 뜻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맏이를 만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아비멜렉 전체 가문의 태가 닫혔지요. 이 말은 아비멜렉의 패밀리라면 이쪽 반대편에 있는 아브라함은 개인의 구원이 아니고 아브라함 가족이 반대로 복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맏아들이 누구와 연계되는가? 그 맏아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주님의 계획과 연계됩니다. 그때부터 맏아들이 어떻게 생기느냐? 죽은데서 살아나기 위해서 사라의 태가 죽지요. 거기서 이삭이 나오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모든 행적은 바로 죽음을 장고처럼 관을 끌고 가는데 그 관 안에 생명이 들어있어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바다에 뱃길을 낸 거예요. 그러나 배 지나가자마자 바다는 본성적으로 언제 배가 지나갔냐는 듯 다시 봉합이 돼버렸지요. 그리고 쉬쉬한 겁니다.
누가복음 4장에 봅시다. 27절 읽어보세요.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왜 엘리사는 많은 사람을 깨끗하게 하지 못합니까? 이게 제 질문입니다.
25절, 제가 읽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왜 많은 과부를 찾아가지 않습니까? 구제차원에서 많이 하면 사랑을 보다 많이 전파하는데 이 본문 해석 어떻게 할 거예요? 뭐예요? 성질내시는 겁니까? 왜 그렇습니까? 간만 보시는 거예요? 지금 한 사람을 건졌다는 걸 강조합니까, 많은 사람이 배제됐다는 걸 강조합니까? 많은 사람이 배제됐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건짐 받은 것은 건짐 받을 만해서 받은 게 아니고 그 한 사람도 배제돼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 건짐으로서 모든 인간이 건짐 받을 자격이 없는 겁니다.
제가 물리적으로 말씀드립니다. 고요한데 바늘 하나 떨어지면 더 조용합니까, 약간 더 시끄럽게 되었어요? 약간 더 시끄럽게 됐지요. 그런데 표현을 어떻게 합니까? 바늘이 떨어져서 소리가 날 정도로 그 다음에 시끄럽다고 합니까, 고요하다고 합니까? 고요하다지요. 고요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물리적으로 더 시끄러운 요소인 바늘을 일부러 던집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이 상황은 어떻다? 너무나 고요하다.
이 세상은 죄가 많다. 아무도 구원받을 자격 없다. 다 저주받아야 돼. 이게 이 세상에 대한 저주의 강조점입니까? 아니면 일부러 한 사람만 건지는 것이 이 땅이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걸 강조하는 거예요? 한 사람을 무심코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건짐 받을 때 건짐 받은 당사자도 이게 뭐야? 왜 나한테 찾아오지? 이것이 세상은 아무도 구원받을 자격 없다는 겁니다. 바다? 홀로 뱃길 가고 있습니다. 지나가게 되면 다시 봉합돼요.
그런 예수 말고 우리를 인정하는 예수만 사람이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그 어두운 바다를 주님 홀로 가는데 고마운 것은 그냥 가지 않고 아무 이유도 없이 난데없이 무작위로 한 사람 뽑아서 데려감으로서 이 정도로 세상은 악하다고 증거하는 그것이 누가복음 사실은 오늘로 끝이에요.
모든 사람이 배제되는데 배제시키는 그분마저 나중에 세상으로부터 배제당하지요. 그러면 사흘 뒤에 부활을 생각하지 맙시다. 십자가 달린 그 순간만 생각합시다. 세상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누가 하나 설치고 까불다가 정치범으로 몰려서 그냥 고요하게 사라졌지요. 죽고 난 뒤에 24시간 지났습니다. 소식 없습니다. 그냥 고요하지요. 둘째 날 고요하지요. 그러니까 셋째 날도 고요하겠지요.
세상에, 어둠의 새벽을 깨고 무슨 난리가 났습니까? 예수님의 시체를 찾던 두 사람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인상을 압니까, 모릅니까? 알지요. 낯선 사나이가 자기 옷 하나 걸치고 앉아있어요. 마주쳤지요. 아무리 세상이 어두워도 자기 아들 얼굴 못 알아보는 그런 엄마는 없어요. 그런데 알아보기는 뭘 알아요. 누구십니까? 동산지기인 줄 알았어요.
본 것은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이 삼년 동안 본 것은 육신, 흙에 속한 형상이기 때문에 이제예수님에게는 지나갔어요. 수술 너무 심하게 하지 마세요. 흙을 잡아당겨봐야 흙 됩니다. 상징물입니다. 흰머리 빠져도 그것도 흙머리 빠진 게 돼요. 부활되면 아담의 형상은 끝나고 예수님의 하늘의 형상을 입을 겁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 46절, 48절.
그것은 우리가 기대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보느냐, 못하느냐? 그겁니다. 인물 보고 알아볼까요? 막달라 마리아가 실패했는데. 그럼 신장 보고 알아볼까요, 외형 보고 알아볼까요? 그것도 실패했는데요. 그럼 뭘 보고 알아볼까요? 주님께서 도마에게 제시한 게 뭡니까? “너, 모르나. 그새 잊어버렸어? 내 얼굴 몰라?” 주님께서 이랬습니까. 그전에 열 제자에게 다 보여줬어요. 뭘 보여줬습니까? 창자국과 못자국. 그래서 기념하라고 한 거예요. 뭘 기념해요? 내 살과 내 피를 기념하라.
이 살과 피는 상징에 속하지 않는 상징입니다. 그래서 천주교의 성만찬은 잘못된 거예요. 상징이 아닌 상징. 그래서 개신교 성만찬은 잘못된 겁니다. 상징이 아닌 상징, 그것 구원받는데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것은 상징인들이 같은 상징인으로 봐야 믿겠다는 자기의 고집으로 매주, 또는 일년에 두 번씩 한 겁니다.
중세에는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무식하니까 연극 이벤트용으로 성만찬을 자주 했어요. 떡 봐라. 떡 보니까 뭘 기억해? 죽으신 주께서 이 피는 뭘 생각나지? 주께서 흘린 피. 이것으로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용도로 했던 거예요. 그러나 성령님이 그걸 이용했느냐가 중요하거든요. 성령님은 상징을 피해버립니다. 상징을 찢어버립니다. 상징 자체가 우상이 되기 때문에.
인간은 상징을 받으면 자기가 상징이기 때문에 같은 상징영역 속에 추가된 상징으로 그것을 소유하게 돼요. 그러나 성령은 절대로 소요대상이 안 돼요. 오히려 나는 상징에 불과하고 허상에 불과하다고 고백하는 것은 물과 피가 아니고 물과 피마저 부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겁니다. 구원의 능력은 여기서 오지 않습니다.
그럼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뭡니까? 그건 저한테 묻지 마시고 갈라디아서 3장 1절,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세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제가 적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이야기하는지 보세요. 십자가가 어떻게 된다? 보이거늘. 보입니까, 보여요? 얼마짜리 십자가에요? 이런 십자가.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 사도 바울이 십자가 보여주고 그런 이야기합니까? 손에 십자가 백 개 들고 있다가 보는 사람마다 십자가 보이고 그랬습니까? 십자가는 이미 끝났어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십자가가 눈에 보이거늘. 그 사람한테만 보이는가. 한 번 그려보라고 할까요? 그리면 안 돼요. 그리면 상징이 돼요.
여러분, 사도 바울이 손수건으로 죽은 사람 살려냈지요. 그러면 그 손수건을 기념물로 박물관에 놔둘까요? 안 그러면 그 손수건을 구조를 해체해서 손수건을 제작할까요? 안 그러면 손수건을 어떻게 할까요? 손수건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바늘 떨어뜨린 것과 똑같은 거예요. 손수건과 관계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손수건을 사용한 겁니다. 손수건은 보이지 않는 분의 십자가가 보이지는 않지만 십자가 중심으로 지금 일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잊어야 될 손수건을 사용하신 겁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사용하지 않습니다.
홍해요? 홍해 가면 열립니까? 홍해가 백화점 자동문입니까? 지금 홍해에 간 사람 홍해 열렸다는 소식 들어봤습니까? 일회용입니다. 요단강요? 요단강 용기 있게 물 속에 들어가면 열립니까? 아닙니다. 여리고성요? 실험 삼아 성에 서보지요. 독일의 유명한 성이 있는데 엽서에도 나오고 드라큘라 영화에도 나오는 노이슈반슈타인 성, 시에도 나오거든요. 진짜 예뻐요. 그 성 일곱 바퀴 돌아보지요. 무너집니까? 미쳤어요, 무너지게. 어떻게 상징이 상징한테 져요. 앞자리 앉으면 은혜 받습니까? 은혜 받는다고 최면을 걸면 은혜 받겠지만 그건 다 가짜지요.
우리는 우리 쪽에서 행함을 시도하는 게 아니고 그냥 있으세요. 그 자체가 주님의 행함의 결과물입니다. 캔슬 되도 결과물이고 할 수 없어. 주께 당하신 거예요. 결과물이에요. 합력하여 선을 이룬 겁니다. 어디에? 출세하는데? 아니에요. 성공하는데? 아닙니다. 직장상사 인사 받는데? 아닙니다. 영생 얻는데. 이래도 구원받았다는 걸 깨닫게 하는 요소가 내 뜻대로 안 될 때 뜻대로 안 되도 구원되는 걸 새삼스럽게 느끼라고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시는 겁니다. 나도 못 믿는데 누굴 믿어요. 남을 믿어요? 본인도 안 믿으면서 감히 남을 믿어요. 나도 모르는데 어떻게 니가 나를 알아요.
누가복음의 흐름은 뭡니까? 다 배제하는 거예요. 배제를 어떻게 합니까? 배제하라? 아닙니다. 이방인을 구원하고 소경을 구원하고 세리와 창기가 너보다 먼저 천국 갈 사람을 툭툭 던지면서 유대인들을 배제합니다.
참 이런 이야기할 때마다 미안하지만 성경에 있기에 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6장 21절, 하여튼 이런 걸 끄집어내는 나도 미운 거예요. 할 수 없어요. 성경에 있으니까.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5절,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해서 전도해야 됩니까? 좋게, 좋게 하면 안 되겠습니까? 웃는 것은 축복이니까 많이 웃으세요. 개콘 다 봤다, 이제. 웃는 것도 문제라. 뭘 어쩌라고. 볼링장에서 스트라이크 치고 울까요? 실제로 그런 사람 있어요. 내가 눈을 의심했는데 실제로 있었어요.
연말에 개그부문 최우수신인상을 신보라란 사람이 받았거든요. 그래서 소감을 말하는데 내가 자랑할 것은 예수의 피밖에 없습니다. 이런 소리를 했다니까. 생중계로 전 국민이 시청하는 가운데서. 나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니까요. 갈라디아서 6장 14절 나왔어요.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신보라라고 여자 코미디언이지요. 예수님을 자랑한 게 아니고 십자가의 피라고 이야기했다니까요. 장난도 아니고 얼마나 심각한 문제에요. 그때부터 간증집회가 들어오는데 돈 많이 벌었을 거예요.
이렇게 예수님께서 삐딱하게 이야기하면 전도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 말은 예수님 하신 말씀대로 네가 같은 시대에 같은 세상에 산다면 우리에게 너도 이렇게 전도하라는 이야기잖아요. 전도 이렇게 합니까? 못 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무도 자력으로 내가 시키는 대로 해서 구원받을 위인은 없다. 할 수 있다는 것을 일부러 피해가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모일 것이라는 걸 피해가요.
그러면 이 세상에 맏아들은 누굽니까? 결국 예수님만 인간이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될 자격이 없음이 그대로 드러나지요. 그게 누가복음이 터 잡아놓은 택지조성이에요. 모든 사람을 죽여 놨습니다.
34절 봅시다. 참 이 이야기할 때는 여러분 귀 좀 막으시기 바랍니다. 안 돼. 무슨 소리이기에 벌써 호들갑을 떠느냐?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이 말은 뭔 뜻인지 알아요? 돈 빌려주지 말고 돈 줘버려. 받을 생각하지 말고 주라. 만약에 받을 생각하고 줬다면 하나님의 칭찬은 없다는 겁니다.
네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할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두 번 다시 너한테 돌아와서 그때 대접해주셔서 너무 감사해서 잊지 않고 제가 보답하겠다는 여력이 없는 사람에게만 대접하라. 그것을 말로만 하지 마시고 여러분이 따님 치울 때 혼수 보낼 때 그렇게 하세요. “사돈이여, 예단 있습니까?” “예단요? 예단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예단 하세요. 그런데 “사돈, 예단?” “받았으면 해야지요.” “미안합니다. 혼사 없는 걸로 합시다. 우리 사정 때문에. 예단 한다니까 더 이상 안 되겠습니다.” 지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이 이유가 있어요. 율법은 누굴 지향한다고 했습니까? 율법은 우리한테 오는 것이 아니고 맏아들 만들기 위해서 오지요. 예수님한테 오지요. 율법 중에 출애굽이 있거든요. 출애굽이 올 때 이스라엘 전체를 고아와 과부로 만들었습니다. 고아와 과부가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는 주위 사람들, 친척이 없습니다. 친지가 하나도 없어요. 전혀 도움 줄 친지가 없을 때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보겠지요. 그게 바로 성도 만들고자 하는 모델인 거예요. 이 세상에 믿을 놈 없다는 걸 몸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그런 환경을 주신 것에 대해서 할렐루야 감사합시다. 이 세상에 믿을 놈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러면 믿을 놈 없으면 믿을 분만 찾아야지요.
왜 갚을 여력이 없는 사람에게 주느냐 하면, 하나님의 상은 그때 주는 거거든요. 네가 너에게 도로 갚을 것이 없이 줬다는 말은, 거지한테 준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이런 사람을 이렇게 했기 때문에 함께 계시는 주님에게 제 것을 드리겠다는 뜻이에요. 드린다는 말은 있어도 고아고 부모 있어도 고아고 남편 있어도 과부입니다. 진정한 나의 부모는 주님밖에 없다는 고백이에요. 그것을 지금 예수님께서 바닷길로 가면서 뿌렸다는 것은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지요. 없기 때문에 성령을 통해서
맏아들이 있는 이유는 유일하게 아버지를 알기 때문에 아버지와 맏아들 사이의 관계를 여기에 적용시킴으로 아들도 아닌 자를 아들로 만든다고 했지요. 그러면 맏아들과 예수님 사이에 비둘기 같이 성령이 오지요. 성령으로 오신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네가 네 행함으로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 말은 조금 있다가 성령을 보내주게 되면, 안 되는데 되네. 못하는데 되네. 돈을 사랑하는데 돈을 사랑하지 않고 헌금이 되네. 예단 줄 수 없기에 오히려 예단하고 싶어지네. 돈 빌려달라고 왔는데 그냥 가져가라는 말이, 내 입에서 왜 나오지? 이건 누가 한 거예요? 내 속에서 성령께서 하게 하셨지요.
그 말은 뭔 뜻입니까? 나는 죠다입니다. 나한테 존경의 표를 하지 마세요. 얼마나 내가 못하면 성령께서 와서 나를 사용해서 너는 못하고 내가 한다는 식으로 했겠어요. 그러니까 신보라처럼 내가 개그맨해서 신인상 탄 것은 뭐다? 내가 겸손한 것도 내 자랑이지요. 그러면 주체를 바꿔야 되지요. 내가 자랑할 것은 십자가 예수님 피밖에 없다. 예수님이 신인상 탔습니까? 아니지요. 신인상에서 관심을 끊어주세요. 저는 다른 큰 자랑거리가 따로 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하는 것은 신보라가 믿음있다는 조건 하에 이야기하지 저는 그런 기대는 안 합니다. 사람을 안 믿으니까.
신보라가 진짜 성령 있다면 그 마음을 대변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이 부럽습니까? 내가 탈 것은 네가 탔으니 기분 좋겠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나의 큰 자랑거리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신인상 타고 대상 타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십자가 외에는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의 말씀은 신보라가 착해서 이뤄지는 게 아니고 신보라와 함께 있는 성령께서 기어이 신보라로 그것을 토해내도록 사용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똑같은 팔자에 있는데 그 이유는 맏아들의 관계 속에서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는 맏아들이 계시다는, 그분만 자랑한다는 쪽으로 오직 자랑할 것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누가복음은 펼쳐진 겁니다.
내일 낮에는 누가복음을 마저 설교로 그때는 50분만 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