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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미국동부오후c 본문

해외 특강/14미국 강의

미국동부오후c

정인순 2014. 10. 29. 15:59

20140926 미국동부오후c

(강의:이근호 목사)

 

음성3

 

녹취:한윤범

 

 

누가복음 1장 30~32절까지 제가 읽겠습니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멀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아멘.

 

지난 시간에 누가복음의 내용은 테마는, 구원받을 수 없는 이방인이 어떻게 구원이 되는가? 예수님이 오셔서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구원이 된다고 했고, 그럼 예수님의 행적 가운데 구원될 수 없는 자도 구원이 되는 그 요소가 담겨있으니까 우리는 누가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행적 속에서 죄인이 의인 되는 요소가 어디에 담겨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지요.

 

그래서 제가 던진 질문이 뭐냐 하면, “세종대왕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할 때 제가 답변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세종대왕은 아담의 자락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의도한 것은, 아담의 옷자락이라고 보면 되죠. 아담을 펼쳐진 주름치마라고 볼 때 세종대왕은 이쪽에 한 점으로 꽃그림으로, 광해군 이쯤, 뒤주에서 죽은 사도세자는 이쯤, 이순신장군은 이쯤 되겠지요.

 

어쨌든 간에 세종대왕이라는 개별자가 우리가 보기에는 개인이라고 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담이라는 옷자락의 한 지점에 불과합니다. “세종대왕은 구원이 됩니까?”라는 질문을 저는 의도적으로 수정하기를 바란 거예요. 아담은 구원됩니까? 제 정답은 아담은 죄인이기 구원되지 않습니다. 고로 세종대왕은 아담에 소속되었고 아담 안에 있기 때문에 구원되지 못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구원됩니까? 우리도 역시 세종대왕과 마찬가지로 아담의 자락에 있기 때문에 구원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됩니까? 그리고 변화산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구원될 수 있습니까? 모세와 엘리야도 구원되지 못합니다. 지금 하늘나라에 있다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구원됩니까? 구원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옷자락의 하나의 꽃무늬기 때문에 구원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천국 가 있는 사람은 뭡니까? 아브라함은 구원되지 못한다. 그러면 천국 가 있는 사람은 아브라함이 아니냐 이 말이죠.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잖아요. 그러면 저 사람들은 뭐냐 이 말이죠. 그 사람들은 사도 바울에 의하면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이죠. 그리고 예수 안에서 아담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질문을 수정하라고 이야기한 게 거기에 있어요. 어떤 개별자가 구원된다고 할 때 특정인과 구원이 바로 연결되는 질문은 성경에서는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특정인은 구원됩니까?”라는 말은 안 돼요. 왜냐하면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의 옷자락의 수에 놓여있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비로소 구원이라는 게 성립돼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무조건 구원됩니다.

 

예수님 자신이 구원자이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구원받은 분이기 때문에 그 옷자락에 무조건 속해집니다. 세종대왕이 아니라 어떤 죄인이라 하더라도 세리와 창기라 할지라도 예수 안에서는 구원이 되는데 예수 안을 빼놓고 세종대왕은 개별자죠. 세종대왕은 구원됩니다. 하면 애초부터 구원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개별자는 구원이 안 돼요. 아담 안에 있는 모든 개별자는 아담의 죄와 더불어 멸망돼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걸 간추리면,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님에게만 구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된 자는 뭐냐? 예수님의 자기 구원을 자기 안에 구원이 있는데 그 안에 우리를 포섭해서 집어넣을 때 비로소 구원이라는 게 성사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구원은 예수님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찾아오셔서 낫게 하면서 바리새인들과 주위에 있던 군중들은 중풍병자가 어떻게 낫게 되는지 개별자의 치유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거든요. 예수님께서는 그 개별자에 대한 집중을 내가 여기 왜 왔는지 돌리기 위해서 개별자란 중풍병자의 변화는 병에 걸렸다, 나았다로 포착이 되지만 이것이 예수님에게 관심을 두려면 죄 사함을 받아주셨다, 죄 사함을 받았다로 해야 관심사에서 중풍병자에서 중풍병자를 낫게 한 예수님에게로 초점이 모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마태복음 9장을 보면서 지붕 뚫어서 구원받았데. 우리도 나라는 개별자가 지붕이라도 뚫고 들어가게 되면 그 열심 보고 병 낫겠다는 것으로 돼버리면 그것은 무엇이 누락되느냐 하면, 여전히 아담의 옷자락이라는 아담의 필드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거예요. 병 고침은 받았는데 구원이 안 되는 겁니다.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 지나가니까 병 고쳐주는지 알고 불렀지요. 불쌍히 여기소서. 이 저주가 풀리게 하옵소서. 이 병이 낫게 해달라고 할 때 예수님께 그 문둥병을 낫게 했지요. 그랬으면 예수님과 관계는 끝난 거예요. 고맙다 하고 집에 가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한 것은 거기까지예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집에 가면 되는데 사마리아인 문둥병자는 왜 아홉 명과 같지 않고 도로 예수님께로 오느냐 하는 겁니다. 오는 게 이상하죠. 챙길 것 챙겼으면 집에 가면 되는 거예요. 왜 옵니까?

 

“주님, 잘못됐습니다. 주님을 몰랐습니다. 병 낫고 난 뒤에 주님은 병 고치러 오신 분이 아님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병을 낫게 해달라는 이 죄를 용서하옵소서. 예수님의 능력 빌려서 내 고질병을 낫게 해달라는 이 죄를 용서하옵소서.”

 

주님께선 내가 온 것은 요나의 기적을 이루기 위해서지 너희가 기대하는 병 고치는 기적을 제공함이 아니고 십자가 지기 위함인데 십자가는 죄와 용서의 관계로서만 비로소 예수님의 목적은 완전히 다 드러나는 겁니다. 주님 지나갈 때 병 고쳐 달라고 할 때 그 사람은 뭘 오해했느냐 하면, 나는 병 나아야 될 정도로 가치 있는 존재란 것을 자부했기 때문에 나는 병 들 그런 무가치한 존재는 아니니까 자신의 본래의 가치를 회복해달라는 식으로 예수님께 호소를 한 거예요. 결국 이것은 주님 위함이 아니고 자기 가치 유지책으로 예수님을 자기 인생에 관여하고 개입하라고 요청한 겁니다. 그게 바로 죄의 극단이지요.

 

이방인들을 왜 구원하느냐? 바로 본래의 이스라엘이 어떤 사람들이냐? 이미 저는 해답을 내렸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은 예수 안에 이스라엘이지 아담 안에서 친목계 만든다고 그게 이스라엘 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적인 아담을 버리고 새롭게 예수 안에 이스라엘을 창조하면 간편할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고 기존에 있는 이스라엘을 배격해야 되는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를 제가 간단한 문장으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원래 간단한 문장으로 설명하면 이해하기 어려워요. [우월이 아니라 근본이다.] 제가 이렇게 썼는데 우월이 된다면, 나보다 나은 어떤 초월적인 가치가 새로 발생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저분은 나보다 낫다는 것은 성립이 되는데 현재 나의 가치는 그대로 유지되지요. 나 말고 나보다 나은 사람, 그러면 두 노선이 성립되는 겁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부족한 나, 죄 많은 나를 건지기 위해서 나보다 우월한 존재로써 메시아가 오셨으면 우리는 그 간격을 통해서 나를 부인하고 주님을 믿고자 한다는 그런 아이디어가 인간에게는 생겨납니다. 모든 사대 성인들이 자기보다 초월한 영웅적이거든요. 부처, 소크라테스, 다 뛰어난 사람이잖아요. 나보다 우월한 존재가 나를 건져주시면 참 고맙겠다고 할 때 사람은 우월한 것을 생각하지요. 그러나 그런 예수님은 없어요.

 

예수님은 근본으로 오신 겁니다. 근본으로 오셨다는 말은, 현재 여기에 나라는 게 있음을 째야 돼요. 근본은 우리 안에 포함이 돼있습니다. 따라서 나 밖에 초월적인 분이 계셔서 그분 같으면 의지하자는 게 아니고 그 안에 내가 있는 식으로 솟아나면 나의 가치가 유지되지 않고 이게 찢어져야 되지요. 그렇잖아요.

 

예를 들어서 제가 연기를 얼마나 연습하면 좋은 배우, 우월한 배우가 되겠습니까? 할 때 선배 배우들의 상투적인 충고가, 배우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어라. 좋음이란 네 속의 네 근본을 찾을 때 비로소 좋은 배우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바깥에 초월적으로 계시는 분이 아니고 이건 우리의 신 관념이고. 네가 나밖에 없다고 여기는 그 가치가 부정당하는 작업을 통해서 새로운 창조를 일으키는 방식으로 인간의 근본 되시는 분이 차고 올라오는 거예요.

 

여기서 발생되는 것은 뭐냐 하면, 제가 생각해낸 아이디어, 적당한 개념은 트랜스포머입니다. 그런 영화 있잖아요. 자동차가 로봇이 되고. transformation, 변형체 또는 변형체화. 분명히 나라는 인간이 있는데 이 자체가 형태가 바뀌는 거예요. 어떤 형태냐 하면, 그리스도가 우리 몸을 통해서 등장하기 적합한 몸의 변형체가 일어나면서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우리보다 우월한 분이 우리 바깥에서 우리의 시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죄 많은 육신의 몸 안에서 창조주가 계시다는 사실은 인간의 능력으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속에 메시아가 올 때 이스라엘은 자기 집단 있고 구름 타고 외부에서 오고. 따라서 쳐다보면서, “오신다, 오신다. 준비 해. 플랜카드 걸자.” 이것이 인간들이 생각한 우리보다 우월한 존재가 오시는 거예요. <부시맨>이란 영화의 첫 장면이 그거에요. 아프리카를 횡단하면 소형비행기에서 코카콜라 병을 던졌는데 그것이 부시맨 부족 안에 떨어졌습니다. 부시맨은 신의 선물로 여겼습니다. 코카콜라 병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는 게 나오지요.

 

이것이 현재 나의 생로병사, 모든 고통의 해결은 어디서 온다? 나의 경계선 바깥에 계신 분이 이쪽을 방문하면서 우리가 그쪽 세계에 간다는 종교적인 우리의 인식의 틀을 부시맨이 아주 명쾌하게 잘 이야기했어요. 부시맨 생각이 오늘날 보편적인 아담의 주름치마에서 같이 어떤 지점을 차지하기 때문에 다들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게 얼마나 고상한지 이집트 종교처럼 화려한지 아니면 토속적으로 소박한지 그것과 관계없이 인식의 틀은 동일합니다. 외부인이 우리를 데려가 고통을 끊어버리고 영원히 행복을 누리는 천국에 간다는 모든 민족과 모든 종교를 초월해서 다들 그런 식입니다. 불교의 해탈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우리 안에서 천국이 꿈틀거린다는 것을 누가 예상했습니까? 아무도 예상 못하지요. 우리는 누가 만들었다? 신이 창조했다. 신은 우리와 함께 했다? 아니다. 신은 창조하시고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다른 세계에 계시다. 그러면 황폐한 우리의 삶의 환경은 다시 외부에서 와서 손대시면 새롭게 변화시키면 우리는 행복은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굉장히 상식적이고 자연스럽지요.

 

그런데 우리가 살기 싫은 이 세계 한 복판에서 천국이 이뤄진다는 아이디어는 예수님 아니고서는 누구도 그것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죄 속에서 의가 나온다는 그런 아이디어는 도저히 없는 거예요. 죄수들이 철장에 갇혀있는데 “판사님, 저희를 끄집어내달라.”고 부탁할 때 판사가 하는 말이, “저는 여러분을 끄집어낼 권한도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죄는 어떻게 용서받습니까? 여러분 속에 들어 있잖아요. 그러면 경상도 말로, 어데예?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이야기가 누가복음은 그렇게 시작되는 겁니다.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 물건 찾기 위해서 근본의 자리, 우월이 아니고 근본이다. 그 근본이 어디 있느냐?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죄 짓는 네가 근본이라는 거예요. 로마서 8장 4절에서 예수님은 죄인의 모습으로, 섞인 모습으로,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 있었던 모습으로 계시기 때문에 그래요. 종교가 일종에 착각이죠. 천주교, 기독교, 모든 종교가 착각이었습니다. 그 착각을 우리 선배인 바리새인이 했던 착각을 같은 아담의 옷자락이기 때문에 동일하게 하고 말았어요. 이방인들도 마찬가지고.

 

이방인들은 구원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구원의 대상이 되지 않는 이방인들은 구원 돼야 될 유대인을 대체하는 새로운 이스라엘로 만든다는 것은 진짜 근본은 아담 속에서 새롭게 발생되는 겁니다. 아담 죽이고 아담 만드시는 게 아니고 죽어야 될 아담이 결정적으로 죽음까지 가서 완전히 죽어버린 상태가 될 때 그 아담 속에서 새로운 아담이 죽어야 될 이유를 품고 거기서 나올 줄이야 아무도 몰랐습니다.

 

저녁 시간에 입맛 없게 이런 예까지 들어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화장실에 앉아 있는데 화장지가 없어요. “엄마, 화장지 좀 줘.” 하니까 엄마가 하는 말이, “변기 안에 있잖아.” 지저분한 예라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어디요?” “네 안에 있잖아.”

 

그럼 내가 어떻게 끄집어냅니까? 내가 변형되게 되면 그 안에서 구세주가 나오는 겁니다. 그 모델이 마리아에요. 마리아의 몸이 변형이 돼요. 마리아에게 없는 것이 마리아의 근본의자리에서 마리아의 구세주가 나오는 거예요. 그동안 마리아는 개별자, 본인의 마리아만 본 거예요. 그런데 어떤 자리를 깔고 앉았다는 자기는 느끼지 못했지요. 마리아가 있던 그 자리에서 마리아를 뚫고 마리아를 변형시키면서 새로운 아기를 탄생시키는 몸으로 트랜스포메이션이 이뤄지는 겁니다.

 

이 이야기가 누가복음 본문에 나오거든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대목을 그것은 한 때에 그 여자에게만 일어났던 기적이지 우리한테는 해당되지 안 된다고 그렇게 이해하고 싶어 합니다. 왜? 우리는 임신이 안 되는 남자기 때문에. 만약에 마리아가 임신해서 구원된다면 모든 사람은 여자로 변형되어서 각자 작은 꼬마 예수님을 잉태할 때 동일한 방식으로 구원됐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마리아에게만 해당되는 특수한 상황이지 우리한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마리아에게 일어났던 일이 동일하게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 중 누구도 마리아에 속했던 예수 안의 세계에 합류된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마리아 몸이 변형이 되어서 남자가 있어야 될 아담의 몸이 남자 없이도 아기 낳는 이상한 몸으로 변형되었다면 나도 그렇게 변형돼야 마땅하지 않느냐? 마땅합니다. “그러면 내가 여자로 성전환수술을 할까요?”라고 하신다면, 마리아가 본인이 스스로 변형시켰습니까? 마리아가 자기가 알아서 임신하려고 시도했습니까? 마리아에게 천사가 와서 아기를 잉태한다고 할 때에 34절에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했지요.

 

내 몸이 임신할 줄은 마리아가 사전에 몰랐지요. 그렇다면 구원이란 뭡니까? 사전에 알고 있는 방식으로 찾아온 게 구원이 아니고 이렇게 하면 구원될 것이라고 사전에 모든 것을 대비된 상태에서 그 모든 예상을 피해서 구원이 된다면, 그렇게 구원된 사람의 고백은 마리아와 동일한 고백을 내놓게 돼있어요. 내가 이런 식으로 구원될 줄은 저는 몰랐습니다. 그 말은 내가 내 몸에 손댄 것이 아니고 전혀 내 몸에 손대지 않았는데 주께서 일방적으로 제 몸에 손대어서 저로 하여금 구원의 반열에 들어서게 하셨다는 고백이 성령 받은 사람에게는 동일하게 나오게 돼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단출하게 표현이 되지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전체 누가복음 맥락에서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겠습니다. 이 그림을 보시면 제가 복잡하게 이야기했던 것이 간단하게 이해가 될 겁니다. [시작은 쪼개져있다.] 대나무를 쪼갤 때 신기하죠. 처음만 쪼갰는데 끝까지 갈라지죠. 시작이 쪼개져있으면 결국 끝도 쪼개져있지요. 시작을 쪼개져있다는 말을 어제 밤에는 이렇게 했습니다. 1+1로 변형을 시켜놓고 1+1이 찢어지면서 들어오게 되면 1+1은 황급하게 다시 1로 환원이 된다고 했지요. 그러면 1이 몇 개냐 하면, 처음에 1이 있었고, 그 다음에 갈라진 각자가 1이라고 주장하고, 세 번째 갈라진 틈을 통해서 이미 올라온 낯선 1이 있고. 세 종류의 1이 발생되는 이것이 신약성경에서 나타나는 기이한 현상이 되는 거죠.

 

이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구원받으려고 하는 나, 이게 첫 번째고, 그 다음에 내가 죄인이 되어야 주님의 용서를 받고 구원된다고 생각하는 주님의 복음에 관한 교리를 듣고 우리가 상상하는 나, 이게 두 번째. 이런 식으로 관통하면서 올라오는 세 번째 나, 세 종류가 있는 거예요. 첫 번째 나, 두 번째 나는 아담의 속성이 살아있는 나지만 세 번째 나는 밑에서 누가 나를 들어올렸으니까 이것은 예수 안의 나가 되는 거지요.

 

처음에 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이 아브람이죠. 아브람에게 주께서 약속을 줬습니다. 아브람1. 아브람이 스스로 아브라함이 되어서 구원받는 나가 된다는 두 번째. 그 다음에 아브라함을 째고 올라온 세 번째 있지요. 이삭이 올라옵니다. 이게 세 번째가 되는 거예요.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복의 근원이 된다. 자기는 자신이 복의 근원이 되는 줄 알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내가 복의 근원이 되는 게 아니고 나의 근본이 복의 근원이 된다는 사실을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바칠 때 비로소 아는 겁니다. 내 후손의 나를 살리는 복의 근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서 아브라함은 누굴 기다립니까? 예수님을 기다리죠. 왜 기다립니까? 본인이 아들 바쳤으면 그걸로 믿음이라고 칭찬받았으면 본인의 믿음으로 믿으면 구원되는 게 아니겠어요? 본인이 그렇게 훌륭한 일을 했는데 왜 자기의 믿음으로 구원 못 되는 겁니까? 그렇게 교회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자. 어떻게요? 자식까지 바쳤다. 그 정도로 순종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순종을 본받자. 이렇게 되면 첫 번째 나와 두 번째 나로 끝나지요. 그러면 예전의 나는 새로운 나를 믿게 되지요. 예수 안 믿던 내가 예수 믿는 나를 믿게 되는 거예요. 나는 이미 예수 믿게 되었고.

 

그렇게 되면 신천지나 구원파, 박옥수가 하는 말이, “실례지만 구원받았습니까?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여기에 당황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정답은, “나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를 째고 들어오신 예수 안에서 발생된 새로운 나만이 구원된 나입니다.”라고 이야기해야 되지요. 첫째, 두 번째 나는 아담의 옷자락에 있기 때문에.

 

블로흐라는 철학자가 있어요.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독일의 철학자인데 이 사람은 소망의 철학을 주창했는데 소망의 철학은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현재 인간은 이 지점에 있을 때 이 지점의 자아를 보면서 절대로 확장하지 않는다. 그러면 인간은 뭐냐? 점, 점, 점, 점 더 나가서 점으로 되어있는 새로운 이게 자아1이라면 인간은 자동적으로 자아2를 상정하게 돼있고 인간의 모든 행동과 사고방식은 현재 자아를 확정짓기 위해서 자기가 상상한 자아를 상상으로 경유해서 현재의 자아로 규정하게 돼있습니다.

 

이걸 현재의 자아는 즉자존재라 하고 내가 예상한 자아를 대자존재라고 사르트르는 그렇게 이야기해요. 인간은 돌멩이처럼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 즉자존재에요. 나는 난데 어떤 나냐?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상상함으로써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소망을 품은 그것이 진정한 나의 모습이다. 소망 없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동기, 일하고 활동하고 사업하고 농사짓고 교사일하고 공직 일하는 모든 일은 그냥 일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상상한 자아2를 잊지 못하고 그것을 어떻게 근접하게 일치시키는 그것이 나의 삶을 일깨워주는 유일한 에너지가 되는 겁니다.

 

죽어도 좋다. 하지만 희망이 있는 이상은 사람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수용소군도에서 또는 나치의 유대인수용소에서 살아난 유일한 힘이 있다면 그것은 살아난 내 모습의 미래를 당겼기 때문에 남들이 뭐라 해도 어떤 유대인 정신과 의사는 종이쪽지 주워서 자기 논문을 씁니다. 왜 쓰느냐? 언젠가 자유를 얻을 자아2를 바라보기 때문에. 이것이 인류가 살 수 있는 유일한 윤리라는 겁니다.

 

Boys, be ambitious! 꿈을 꾸라.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그것이 너희를 살리게 될 것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꿈을 잃으면 그 사람은 산 사람이 아니고 죽은 사람이다. 비전과 꿈이 우리를 지금보다 더 진보하게 할 것이다. 이것만이 이 시대가 발전할 수 있는 유일한 구호, 다른 구호는 필요 없어요. 이것이 바로 블로흐의 소망의 철학입니다. 2차대전이 끝나고 난 뒤에 절망에 빠져있는 독일 사람과 전 유럽을 향하여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간 자체가 자기가 소망을 뿜어낸다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왔을 때 주께서 이름조차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꿔줄 때 그는 기대했습니다. 기어이 내 자식 낳아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내가 만들어서 하나님의 약속에 부응하겠다는 이 용기, 희망으로 인하여 자기는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걸 믿음이라고 여겼지요. 그게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블로흐의 소망의 철학이지 믿음이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아브라함의 연장선에 있는 아담의 자락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안이 아니고 아담 안에 있었던 거예요. 죄에서 못 벗어난 상태란 말입니다. 구원되지 못한 상태였어요. 구원되지 못한 상태의 극단은 뭐냐 하면, 언젠가는 구원받는다는 그 희망 자체가 구원되지 못한 유일한 이유가 돼요.

 

보통 문제 아닙니다. 교회가 보통 문제 아니에요. 예수 믿는 자기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딜레마에요.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예수 믿어서 새 사람 되었다는 나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담의 속성이에요. 인간이 갖고 있는 숨길 수 없는 희망입니다. 그 희망을 어떻게 버립니까? 희망 자체가 우리의 속성 중 일부인데 어떻게 희망을 버려요. 여러분, 희망을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부탁할 것은, 희망을 가지세요. 그게 죄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 이야기밖에 못하겠어요.

 

성경에서 예수 안에서만 다른 말로 하면, 죄 사함의 권세는 오직 주님께 있다는 것. 중풍병자가 나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군중들과 본인과 친구들의 한계에요. 비록 왔지만 꿈을 가져라. 주께서 병을 낫게 해준다. 이건 아담 영역 안에서 이뤄지는 소망이에요. 그런데 주님은 그걸 뭐로 변환시켰습니까? 네 죄 사함을 받으라고 했어요. 이것은 중풍병자나 친구나 그걸 관람하는 어떤 사람도 예상 못한 이야기입니다. 갑자기 거기서 죄 문제가 왜 나옵니까? 병만 고치고 집에 가라고 하면 끝날 문제지요.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중풍병을 낫게 해달라는 자체가 너희들은 불가능성을 요구했다. 하지만 불가능성의 원인은 네가 죄인인데 그 죄를 네가 어찌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에 근거해있다. 따라서 묻는다.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일어나서 걸어가라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제가 지어낸 질문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에게 한 질문이에요. 어디 게 쉽습니까? 그럼 말을 바꿔볼게요. 달 따는 게 어려워요, 별 따는 게 어려워요? 둘 다 안 되지요. 지금 너희들은 우리가 하면 된다는 희망을 가지고 건방지게 나를 찾아왔는데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나는 내 힘으로 되지 못했다는 결과만 남는 불가능성만 너희에게 안겨주겠다는 거예요.

 

병든 사람이 병고치고 싶어 하지 병든 사람이 내 죄를 용서해달라는 소리를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 말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에. 머리 좋은 사람 이걸 알아들어야 할 텐데. 병만 나으면 도로 나는 온전한 사람으로 가치가 유지된다는 전제 하에 병만 낫게 해주세요. 하거든요. 병원에 오십견 걸려서 왔는데 “주사 한 대 주세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오십견만 나으면 내 가치는 얼추 온전하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그 여자 의사가 하는 말씀이, “이 죄인이 어딜 건방지게 병 고치러 와. 죄인이라면 지옥에 가 죽으라.” 하면 “아멘.” 하고 갈 사람 있어요? 없지요. 아무도 그렇지 못합니다.

 

왜? 우리는 스스로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우리 근본을 끄집어낼 능력이 없어요. 그런데 주께서 우리를 죄인 되게 만들어버리면, “이게 어디서 건방지게 중풍병을 낫게 해. 너는 죽어도 싸.” 하면, “아멘. 감사합니다.” 그게 바로 아담 안에서 어디로 건너왔어요? 예수 안에 들어와서 이제는 나를 위한 이 세상이 아니고 오직 주님에 의한 주님만이 죄를 용서하고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이 새삼스럽게 나의 근본을 발견하게 된 그 현장에 그 사람이 놓여지게 된 겁니다.

 

넌 어떻게 해서 갔느냐고 물으면, 그 사람이 도로 묻습니다. “친구야. 네게 걷는 것과 죄 사함 중 어느 것이 쉽겠느냐? 이건 내 힘이 아니고 내가 상상치도 못하고 예상치도 못한 사태가 주께서 손대서 일으켰다.” 따라서 이제부터 내 믿음의 증인이 아니고 내 소망의 증인이 아니고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물 길러 왔어요. 여러분 그 대목 기억하지요. 물 길러 왔다가 물동이 버려둔 것 아십니까? 물 길러 올 때는 물 항아리에 꽉 찬다는 처음에 왔을 때 포인트1이라면 p1은 반드시 상상하게 돼있어요. 블로흐에 의하면. 빈 통으로 왔는데 꽉 채워 돌아가는 p2 지점을 생각하면서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 자체를 던져버리고 왔어요. 이게 가능합니까? 예상 못했지요. 뭐지? 누가 날 손댔어? 이게 부대효과라고 어제 밤에 이야기했죠. 미쳤어. 내가 왜 이래.

 

“물 길러 간다더니 어떻게 됐어?” 딴 소리합니다.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 그때 무대 저편에서 빵 사러 갔던 열두 제자가 등장합니다. “예수님, 양식 조금 사왔습니다.” “너희들 없는 상태에서 양식 내가 먹었어.” “누가 우리 말고 양식을 사다 주던가요?” “나의 양식은 추수하는 것이 양식이다.” “추수를 하다니요? 넉 달이나 남았는데 무슨 추수를 하십니까?” 계속 제자들은 아담 안에서 익히 아는 이야기를 해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만 통용되는 이야기를 해댑니다.

 

“나는 이미 추수가 시작되었다.”라고 하시면서 그렇다면 우리가 좀 도와줄 건데. 너희가 한 사람은 수고하고 다른 사람은 수고하지 않는 추수에 너희들은 거저 참여되는 식이 내가 원하는 양식 구하는 추수가 되는 겁니다. 인간에 대한 철저한 배제, 배제된 자가 주님만 했다는 것을 증거하는 유일한 증거물이 되게 하는 그 구원의 방식, 그것이 누가복음의 테마로 여전히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천지나 구원파처럼 내 구원을 언급한다는 자체는, 분명히 말합니다.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인간은 구원을 언급한 위치에 있지도 않고 자격도 없습니다. 그저 희망일 뿐이지요. 그러면 진짜 구원은 외부에서 오느냐? 아닙니다. 구원될 자격도 없으면서 구원을 논하는 그 존재를 찢으면서 거기서 내가 구원을 얻고자하는 자체가 바로 나의 최종 죄라는 것을 까발리면서 그걸 밀어 올리면서 구원은 등장하는 겁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007 영화를 보게 되면, 닥터 노가 007과 마지막 대결을 벌이는데 호수에서 지구를 멸망시킬 기지가 올라오면서 덩달아 미사일도 함께 올라오거든요. 주님께서 우리의 존재의 기반 되시는 분이 죄인을 너 같은 인간은 오직 나만 잘 되고 나의 가치만 잘 되는 식을 하나도 버리지 아니하고 가수가 무대에 올라오듯이 그 죄인을 의인이라고 선언하고 말지요. 우리는 부끄럽지요. 히브리서 4장에 보면 말씀이 오게 되면 우리의 모든 것을 꿰뚫어서 우리를 발가벗긴 채로 드러내지요. 그 말씀 앞에 드러내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구원된 자의 표상으로 만드시는 겁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다윗의 두 번째 처가 누굽니까? 밧세바지요. 사실은 본처라고 할 수 있는데 마태복음 1장에서 다윗의 본처가 밧세바가 되는데 밧세바가 결혼해서 솔로몬을 낳았다는 말은 뭘 인정한다는 말입니까? 내가 밧세바와 있었던 과거의 행적, 밧세바뿐만 아니고 밧세바의 본 남편이었던 우리야 장군이 어떻게 살해당했는지 그 사실을 본인이 노출시키면서 감히 밧세바와 결혼했다는 말은,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아니고 나를 죄인으로 한껏 높여주시는 다윗언약의 주인공이 진정 이스라엘의 살아있는 왕임을 증거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보통 어두운 과거가 있으면 다방에 앉아서 밧세바한테 봉투 내밀면서 네가 실수로 내 아들 건드린 모양인데 5년간 프랑스 유학이나 갔다 오라고 하잖아요.

 

사람은 자기 어두운 과거는 숨김으로 자기 가치를 유지하려는 것은 바로 나1과 나2 그 수준이에요. 그걸 사도 바울은 육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육을 고치는 게 아니고 육을 드러내게 하시는 그것이 영에 속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워치만 니는 크게 오해한 겁니다. 육에서 벗어난 게 영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현실교회의 비리, 모순을 느낀 사람들이 워치만 니 쪽으로 많이 넘어간 거예요. 많은 목사들과 워치만 니에 빠졌어요. 열두 광주리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봤거든요. 제가 보기에 마귀의 마지막 노림수에요.

 

삼분설은 이중 중생설을 언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육과 혼과 영이 돼버리면서 점프를 두 번 해야 돼요. 육에서 혼으로 중생해야 되고 혼에서 영으로 또 중생해야 되는 이런 교리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분설, 육에서 영으로 거듭나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이런 교리고 요한복음 3장에 안 나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지요. 이 육은 개별자 육이 아니고 현재 속해 있는 필드, 장 전체를 육이라 하지 내가 육이란 말이 아니에요.

 

우리가 죄 진다고요? 우리는 죄를 모릅니다. 죄를 알아야 죄를 짓지 죄도 모르는데 무슨 죄를 지어요. 우리는 죄를 짓는 자가 아니라 죄를 생산하는 자지요. 알아서 생산한다? 아니지요. 알게 모르게 생산하지요. 우리보다 더 센 죄가 왕 노릇하기 때문에. 그 상태를 그대로 원반에 얹어서 우리를 높이 들면, 들게 하시는 그 관계가 주님이 우리를 구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노출됩니다. 디모데전서 1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내가 죄인 중의 괴수로다.

 

마리아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마리아가 임신을 했습니다. 처음부터 시작은 쪼개져있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인간 자체 속에서 인간이 기대하는 인간 노선 말고 바깥 노선이 새롭게 철로가 놓여져서 한쪽은 지옥으로 한쪽은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동일한 아담 노선 안에서 천국을 만들어내는 작업에 나서시는 겁니다. 그때 인간의 아이디어나 희망이나 인간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지요.

 

 

이야기하다보니까 50분 됐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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