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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미국동부오후d 본문

해외 특강/14미국 강의

미국동부오후d

정인순 2014. 10. 29. 16:01

20140926 미국동부오후d

(강의:이근호 목사)

 

음성4  

 

녹취:한윤범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지요. 지난 시간에 한 것 중에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이야기하면 우리는 죄를 모르고 죄를 생산하는 도구다. 죄를 생산하는 그 사실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 자체를 쪼갭니다. 그럼 이스라엘 자체가 없지요. 쪼개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이 건전한 이스라엘로 유대인들은 알았는데 봉합하는 과정에서 가짜 이스라엘이 본색을 드러냅니다. 메시아를 숨 막히게 하는 새로운 이스라엘, 본격적으로 악마의 앞잡이가 되는 이스라엘로 전환시키고 말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죄 속에서 메시아를 끄집어내놓고 끄집어내는 어미 역할하는 그 이스라엘과 예수님이 새롭게 창조한 이스라엘과의 그야말로 두 개의 노선, 평행선을 달리는 것이 누가복음에 아주 간편하게 알 수 있는 테마의 양상입니다. 그리스도 편에 서느냐, 아니면 기존에 유대인 편에 서느냐? 이건 누구나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야 그 충돌 사이에서 십자가 고난이 성립되니까. 충돌 없는데 고난 없잖아요. 계속 고난으로 충돌을 일으키는데 충돌한다고만 이야기하면 누구나 아는 건데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은 충돌이 어디서 나왔느냐?

 

갈라지기 전에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이스라엘 자체에 있었잖아요. 1이 2가 되고 난 뒤에 3이 등장할 때 이 3을 반대하는 새로운 1로 여기서 충돌이 일어나면서 십자가가 이뤄지는 거예요.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아주 점잖은 사람들이에요.

 

명절에 일가친척들 서로 사랑하는 사촌이고, 팔촌이고, 부모님이고 다 점잖고 서로 사랑하고 위합니다. 그런데 명절에 주의할 게 있어요. 다른 건 다 좋은데 제발 복음 이야기만 안 하면 돼요. 복음 이야기하는 순간 땡 탈락이에요. 명절분위기 싸늘해집니다. 그래, 너만 잘났다. 딱 한 마디로. 처음에 정종 사들고 와서 절하고 하는데 그냥 고스톱만 치다 오시란 말이죠. 고스톱 치다가 무심코 “주여” 하면 그 다음부터 문제 커요. 종교와 정치 이야기하면 안 된다니까요. 정말 종교이야기는 나타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점잖은 관계에요. 아무 일 없어요. 그런데 복음이 째고 들어오면 그때부터 충돌이 일어납니다.

 

사실은 충돌이 일어나야 마태복음 10장이 이해됩니다. 천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너의 원수는 너의 집안 식구니라. 거기까지 보시면 집안 식구가 원수인 줄 알지요. 그 뒤에 보세요. 누구든지 네 자신을 부인하라. 1을 부인하라. 1을 부인하면 이것이 포켓볼에서 공을 하나 쳤는데 구멍 둘로 들어가지요. 중성자 연쇄반응 같아. E=mc² 반응식에 의해서 두 개로 갈라져버려요. 치니까 한쪽은 복음이고 한쪽은 옛날 점잖은 분이 아니고 극단적인 반 복음이 돼버렸어요.

 

그리고 말합니다. 네 속에 이야기하는 분은 네가 아니라 성령이니라. 이 말은 무서운 말입니다. 저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옛날의 친척이 아니고 악령이니라. 그러면 육의 지평에서 이미 영의 지평으로 전환됐어요. 이게 바로 거듭남이라는 거예요. 개별자로 거듭났다고 하지 않고 바로 판 자체가 다른 판으로 갈라지면서 대조가 될 때 그게 영의 세계입니다. 영의 세계는 영의 세계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영의 세계가 아니에요. 영의 세계가 있음으로 이 땅에서 빛과 어두움, 육과 영으로 두 노선이 나란히 병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방금 제 이야기가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아브라함에게 두 아내가 있었다. 그럼 두 여자가 있었네? 아니지요. 두 언약이 있는 거예요. 그 두 언약이 아브라함이 공을 때리니까 둘로 갈라진 거예요. 그 말은 다시 시간을 거꾸로 돌리면 아브라함 안에 아담이 있었다는 거예요. 육에 속한 아담과 영에 속한 아담이 있었는데 육에 속한 아담이 영에 속한 아담이 알지 못해요. 알지 못하지만 거기서 일부러 분리시킨 것은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새로운 이름을 주신 분의 작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서 낳은 아기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는지 그것은 바로 누가복음 1장에 나옵니다. 51~55절에 보면,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이 찬양을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임신한 채로 하지요. 마리아의 솜씨입니까, 마리아의 신앙이에요? 하나님의 성신이지요. 제가 이걸 설명할까, 말까 주저하고 있는데 짧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걸 설명하려면 복잡한데. 인간의 역사는 이방인의 역사는 역사로 간주해주지 않아요. 하나님 관점에서. 역사는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로 인류 역사는 다한 거예요. 처음에 아담의 역사는 이스라엘 멸망에서 마감이 돼요. 민족이 이스라엘밖에 없는가, 우리 민족도 있는데. 그것은 역사로 쳐주지 않아요.

 

역사가 끝날 지점까지는 인간의 활동을 마음껏 역사의 지평에 토해내게 하고 역사가 끝날 지점에서 누가 관여하느냐? 영적 존재가 관여합니다. 그러니까 누가복음 1장에서 천사 가브리엘이 투입되어 인간으로선 이미 할 도리를 다했어요. 말씀을 못 지켰다는 것이 이미 들통 났습니다. 그 결과가 이스라엘의 멸망이에요. 그러면 말라기에 보면 엘리야가 오게 돼있어요. 엘리야가 오게 된다는 그 작업을 가브리엘 손에서 성취시키지요. 물론 성신이 개입하고. 이스라엘은 당하기만 하죠.

 

그게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1장 17절 말씀은 말라기 4장에 나온 말씀 맞지요?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이스라엘은 모든 말씀은 내가 지킵니다. 이제는 그만 해라. 많이 먹었다. 끝났어.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야. 말씀은 지켜야 되고 인간은 못하고. 대책은 천사를 투입하는 거예요.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 천사가 지진을 일으켜서 끄집어냈잖아요. “아이고, 천사님.” 하니까 “왜 저한테 그러십니까.” 누가 하셨다? 부활하신 주님이 하셨다.

 

정리합시다. 역사는 이스라엘로 끝났습니다. 그 다음에 말씀 성취는 오실 메시아의 자기 숙제로 이미 넘어가서 완성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완성된 것을 값없이 선물로 나눠지는 식에 돌입했습니다. 에베소서 4장 이야기에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그때 우리 왕은 이미 승리했군요. 그 왕을 메시아라고 이야기하고 제사장, 선지자, 왕적 기능 그래서 메시아는 세 가지 기능이 있다고 전통적인 신학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들은 그 과정은 모르지만 하여튼 칼빈이 그렇게 이야기하니 맞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람이 참 신기한 게 3을 이야기하면 서열을 만들어버려요. 그래서 3은 제대로 3이 될 수 없어요. 인간의 정신구조가 둘이 용납 안 됩니다. 하나를 미워하게 되면 하나를 사랑하게 돼있고. 두 주인을 못 섬기게 돼있어요. 삼위일체를 이야기하게 되면 꼭 성부를 섬기게 돼있어요. 그것은 성경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섬기지 아니하면 아버지도 없어요. 요한복음 5장의 말씀처럼.

 

누가복음 1장에 나오는 방금 이야기한 마리아의 찬양에서 나오는 내용들에서 부자, 권세 있는 자들이 누굽니까? 지금 이 활동이 어느 자리에요? 방금 제가 힌트를 드렸어요. 역사는 이스라엘이 주인공이지요. 그러면 여기서 모든 찬양에 대한 부정적 대상은 이스라엘을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54절에 보면,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했다.

 

여기 이스라엘이 등장한다면 기존에 우기는 이스라엘입니까, 아니면 그 속에서 째고 나온 새로운 이스라엘입니까? 새로운 이스라엘인 거예요. 그래서 그 창조를 낳는 창조라고 하지요. 아기 낳듯이 배태해서 나온 새로운 창조에요. 기존의 창조를 무로 돌리고 기존의 창조를 임신하는 창조로 간주하시고 그 속에 들어있는 숨겨진 새로운 창조를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언약을 사용하신단 말이죠. 그러니까 죄 짓는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입니까.

 

제 입에서 귀한 존재라고 하니까 이상하지요. 갑자기 아부하듯이 귀한 존재라고 하느냐? 아부하는 게 아닙니다. 못난 죄인이기 때문에 더욱더 귀한 거예요. 수학 0점을 맞을수록 서울대학 합격은 은혜가 빛나는 거예요. 99점인데 1점 보태서 온 것은 지 자랑해요. 그런데 0점인데 합격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마구 넘쳐요. 몽땅 은혜에요. 그러나 99점 받은 사람은 은혜 내라고 하면, 은혜 받았습니다(마지못해 작은 소리로). 가라. 지옥으로.

 

제가 오전 강의에서 그랬잖아요. 여러분, 성스럽게 되렵니까, 탈출하렵니까? 주께서 탈출했다면 그 경로를 따라 탈출해야 돼요.

 

현재 이스라엘은 이단입니다. 그 증거 하나가 바로 마태복음에 나오는데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다는 호세아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실제로는 뭡니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애굽에서 애굽이란 이름의 이스라엘로 옮겨가는 그 대목을 성경은 그렇게 적용시킵니다. 너희들이 애굽이라 생각하느냐? 그게 이스라엘이다. 왜? 아기 예수가 거기 잠시 기거하시거든요. 네가 이스라엘이냐? 사실은 애굽이다. 왜?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짐승의 속성이 발휘되는 장소기 때문에.

 

그래서 구약에서 언급하는 모든 개념은 A가 축복이고, B가 저주라면, 이것이 신약에 오게 되면 그 축복은 저주의 자리로 가고 저주라고 여기던 것은 축복의 자리로 허황된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거꾸로 지요. 거꾸로 기 때문에 예수님은 낮은 곳에서부터 오신 겁니다. 나귀 타고 오시고. 저쪽은 낮은 곳을 공격하지요. 나사렛 분으로 예루살렘을 공격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의미는 뭐냐 하면, 예루살렘에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자체를 마리아로 본다면 죽은 자리에서 생명을 피워내는 본래의 목적을 위해서 나사렛부터 예루살렘에 접근하는 식으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전개되고 있습니다.

 

자가. 예루살렘. 선지자가 예루살렘 바깥에 죽는 법은 없느니라. 내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면서 이 예루살렘이 마귀의 소굴인 것을 증명하리라. 아줌마들이 울면서, “예수님 불쌍하다. 훌륭하신 분인데.” “나보고 울지 말고 네 딸내미를 위해 울어라. 누가 불쌍한지 구분도 못하느냐. 너희들이 날 동정하는 모양인데 정신 차려.” 자기 자리, 자기 주제를 파악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불쌍히 여긴다는 건 말이 안 돼요.

 

모든 것은 역사가 끝나고 난 뒤에 묵시가 되고 묵시는 인간이 손 못 댑니다. 스가랴에 나오지요. 성전 지을 때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고 사람의 능으로 짓지 않고 어떻게 짓는다? 하나님의 신으로 짓지요. 하나님의 신과 성령의 차이점은, 옛 언약에서는 하나님의 신이 되고 성령 안에서는 성령이 되는 겁니다. 이미 누군가 완성했다는 내용이 담겨있는 것은 성령이고, 하나님께서 관여했다는 것은 성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신 받은 사람은 타락이 되지만 성령 받은 사람은 확정이 돼버려요.

 

성신의 시대는 아직 이스라엘이 살아있는 시대입니다. 역사가 끝나지 않았어요. 역사가 끝나야 종말이라고 하고 종말 때에 모든 말씀을 완성할 때는 그 솜씨는 인간의 솜씨가 아니고 오신 메시아의 솜씨로 모든 것이 다 드러나게 돼있습니다. 그때까지 가는데 갈 때 어떻게 간다? 죄 속에서 의를 끄집어내지요.

 

이제부터 지난 시간에 한 것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예루살렘에 있는 역사적 혈통적 유대인들은 의가 되고 이것이 의가 됨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바깥은 죄가 되고 심판 되고 지옥이 되고 저주가 되겠지요. 바로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공략한 이유가, 그들이 말하는 죄, 저주, 심판 속에서 새로운 예루살렘을 만들어내겠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기존에 예루살렘 유대인 속에서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유대인 속에서 소위 이방인은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그 이방인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을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전환시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을 이방인의 복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신학자들은 뜻도 모르고 이야기해요.

 

방금 이야기했던 마리아의 찬양 가운데서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시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냈다. 이제 여러분에게 진짜 잘 알아들었는지 응용문제를 냅니다. 이 대목으로 제가 30초간 설교하겠습니다. 이 설교의 문제점을 지적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가난한 자의 메시아입니다. 마리아는 바로 그것을 마지막 시대에 우리에게 예언해주었습니다. 여기 보세요. 교만한 자, 권세 있는 자, 주린 자, 비천한 자, 그 시대적 상황에서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도우러 왔습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부자가 만들었고 권세 있는 자가 만들었습니다. 그럼 이 시대의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바로 세상의 자본주의사회에서 권세 있는 자에게 억눌린 그런 자에 편에 서는 것이 이 시대에 예수님의 정신에 부합되는 그리스도의 참된 신앙생활이고 활동입니다. 여러분,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옥에 갇힌 자, 가난한 자를 위해서 분연히 해방의 손길을 잡고 일어섭시다. 끝.

 

이 설교의 문제점은?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강정마을 강정기지 반대할 때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이 설교의 문제점은? 해답도 알려드렸어요. 나1과 나2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우리가 사는 이상적인 희망적인 공동체가 뭐냐? 누구나 얽매이지 않고 누구나 평등한 사회, 공히 자기의 노동의 대가는 자본가에서 탈취당하지 않고 온전히 자기 노력한 대가를 받는 이상적인 사회, 그것이 바로 육에 속한 사람들이 기대하는 유일한 천국 같은 지상 세계, 유토피아를 말합니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로부터 쨈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기껏 블로흐의 소망의 철학. 소망의 철학을 참고해서 쓴 책이 소망의 신학이란 책이 몰트만에 의해서 나왔지요.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몰트만. 그게 블로흐의 철학에서 나온 겁니다.

 

가난한 자의 복음, 해방신학, 들어보셨습니까? 출애굽기에 나오는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 많이 들어보셨지요. 억눌린 자의 하나님, 광주사태 때 목 잘린, 혀 잘린 하나님은 들어보셨습니까? 노동현장에 나타난 이 가락은 뭐지? 태진아의 손수건을 흔들어 표절한 거예요? 운동권에서 이야기하는 것, 뭐가 문제에요? 역사는 끝났습니다. 역사가 할 수 있는 모든 시험을 다했어요. 다 불합격이었습니다. 불합격인 정도가 아니라 그 자체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악마의 마지막 모습은 이상적인 지상 공동체, 지상 사회를 건설하는 겁니다.

 

사람은 그리스도가 그리운 것이 아니고 내가 소속된 교회가 정말 이상적인 교회를 그리워하는 거예요. 믿음의 결실을 눈으로 목격하고 싶은 겁니다. 나, 이런 교회 다녀. 무시하지 마. 나, 이대 나온 여자야. 이런 것처럼 무시하지 마. 나, 이런 교회 다녀. 네가 다니는 그런 교회 아니야. 이상적인 교회야. 그게 자기 갖고 있던 희망이에요. 그것 찢어져야 돼요. 아담에 속한 겁니다. 하지만 우린 어쩔 수 없이 그걸 기대하게 돼있지요.

 

아까 낮에 어떤 분이 질문한 것처럼 “어떤 복음적인 교회에 가야 됩니까?”라는 말. 뭘 가요? 본인이 주께서 다루시는 훌륭한 기계가 되는데 우리는 죄를 생산하는 용도로 드러내면 그게 성도에요. 나는 뭘 해도 죄를 생산하는 기계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내가 불가능한 일이 나에게 일어났구나. 마치 마리아처럼. 마리아의 반복이지요. 그게 마리아의 반복인지 어떻게 확정할 수 있습니까? 바로 마리아에게 했던 찬양이 우리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그 찬양 중에 하나가 사가랴가 한 찬양 속에 이런 게 있습니다. 어제 한 본문이죠. 72절에,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을 다시 하지는 않겠습니다. 여기 중요한 단어가 뭐가 나오지요?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지우개 던져놓고 누가 기억해요?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도로 잡는 부대효과로서 누가 걸려들었습니까? 사가랴가 걸려들었고 마리아가 걸려들었습니다. 주인공은 누구시지요? 없어요. 그 죄인 속에서 그 기계 속에서 의인 되시는 분이 분출되는 겁니다. 튀어나오는 겁니다. 이제 세상은 죽었어. 세상은 어떤 것도 주님의 심판에서 핑계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실험을 다해봤기 때문에.

 

하지만 그들은 우리는 회개합니다가 아니라 저 사람을 없애버리자. 바라바를 풀어줄까, 자칭 메시아라는 예수를 풀어줄까? 할 때 만약에 그 자리에 우리가 모여 있다면 어디에 가표를 던지겠습니까? 참 어려운 문제인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지지 않습니다. 예수님 편에 선 사람까지 바라바 투표할 때까지 기다려요. 제자들 도망 안 치면 안 돼요. 도망칠 때까지 주님의 십자가는 연기가 되는 겁니다.

 

다른 이름으로 어떤 이름도 주의 이름 외에는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을 이름이 없는 것이 확정되기까지는 어떤 누구도 자기 구원에 자기가 도움을 줬다는 생각에 솔직하게 전혀 보탬이 안 되고 방해가 되었다는 것이 들통 날 때까지 주께서는 대기하다가 십자가가에 돌아가셔야 돼요. 그것은 구원문제는 네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고 나와 아버지의 약속이었다. 그것이 언약입니다. 그 언약의 긴 그림자가 노아언약, 아브라함언약, 이삭언약, 모세언약, 엘리야언약이지요.

 

혹시 여러분이 아는 이야기지만 염려되어 다시 묻습니다만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 것 맞지요. 구원받았다면 증거가 어디 있지요? 변화산에서 주님과 나타났지요. 그 다음 문제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갔지요. 그럼 모세만 못 들어갔습니까? 홍해 건너온 그 사람들도 못 들어갔지요. 그 사람들 구원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까? 모세도 못 들어갔고 그들도 못 들어갔다는 조건은 동일한데 모세는 변화산에 등장했어요. 구원받았어요. 광야에서 죽은 그들은 어떻게 됐느냐 말이죠.

 

그들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고린도전서 10장에 나오고 히브리서 4장에 보면 나오지요. 믿음이 없어서 믿음에 화합치 않아서 안식에 참여치 못했다고 되어있지요. 그래서 그들이 지옥 갔습니까? 그 질문을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왜 할 수 없느냐 하면 종말에 벌어진 사건으로 소급해서 그때가 종말도 아닌데 그들의 운명을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멸망했는가? 주님의 속성을 증거하는 연극배우들이에요. 이렇게 할 경우에 약속의 땅에 넣어주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기능을 발휘한 거예요. 다시 묻습니다. 이게 마지막 질문인데 모세가 구원받을 짓을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이진주 씨께서 말씀해보세요. 안 한 게 맞습니다.

 

모세가 구원받을 짓을 못했다는 증거가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변화산에 나타났을 때 주님이여, 언제 돌아가십니까? 주의 피 없이는 나는 어떤 경우도 내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엘리야도 합세했습니다. 엘리야가 아무리 제단 쌓고 불내려도 그것은 자기 구원에 손톱만큼도 보탬이 안 되는 짓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로마서 3장 말씀이 맞아요. 다만 그 일은 연극이었습니다. 시켜서 한 일이에요. 역할이었습니다.

 

인간의 최종 운명은 성신의 시대가 아니라 성령의 시대에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인자를 우습게 여기는 건 좋은데 성령을 우습게 여긴다면 너는 오는 세계에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요한일서에 죄가 두 종류가 나오는데 이것 때문에 박옥수, 구원파가 설치게 된 거예요. 첫째는 뭐냐? 용서받을 죄가 있고 그 다음에 두 번째, 용서받지 못할 죄가 따로 있는 거예요. 구원파는 유병언도 마찬가지지만 모든 죄는 다 용서받았으니까 니 마음대로 살아라. 이렇게 된 거예요. 전양자부터 해서 기분 좋았지요. 얼마나 편해요. 이건 한국교회에서 듣지 못한 복음이다. 진짜 복음 여기 있다. 재산 바치고 난리 났습니다.

 

그러나 뭡니까?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는 이야기를 그들은 빼먹은 거예요. 그러면 용서받지 못할 죄가 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파가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나를 구원해주소서. 여기서 내가 주체 자리 마치 내가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 주체 자리에 자기가 있는 이상은 용서받지 못합니다. 그것은 창세기 3장 22절을 위반했어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내고 그 다음에 생명나무에 오지 말라고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완전히 차단시켰지요. 그 말은 어떤 인간도 생명나무 근처도 못 오는 자격으로 이 대지에서 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대지에 간 사람은, 하나님이 허락도 안 된 구원이란 희망을 언급하면서 나름대로 패권을 만든 거예요. 이것이 바로 악마가 조작한 거죠. 주께서 이 죄인을 구원하셨습니다. 주께서 하신 구원이 우리를 덮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야기합니다. 누가복음의 전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주께서 전부 밀어 내시지요. 밀어내신 빈 터에서 묵시의 세계, 마지막 때 예수님이 실패의 자리에 들어서시면 되겠지요. 그러면 누가 와서 하는 거예요? 아까 성신과 성령의 차이점을 이야기했지요. 성령의 시대가 도래 했지요. 그러면 예수님도 성령을 받아야 되겠지요. 그래서 요단강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면서 특히 누가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성령께서 그렇게 했다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어요. 주님의 어떤 일도 누가 하셨다? 성령께서 하신 거예요. 성령에 종속된 주님이 되는 겁니다. 그 주님이 십자가 지고 난 뒤에서는 오히려 성령을 자기에게 종속시킨 겁니다.

 

그렇게 해서 제2편 누가복음이 사도행전이죠. 사도행전을 보통 성령행전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잘못된 표현이고, 사도행전의 주제는 예수님이 주시다. 예수님이 살아계시다. 그게 주제가 돼야 돼요. 어차피 역사가 아니니까.

 

그 사도행전에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라고 나오잖아요. 그것은 요엘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인용한 겁니다. 인용할 때 어떤 개념을 그 자리에서 뽑아서 옮길 때는 그 개념의 자리에서 쓰는 용어를 옮기면 안 돼요. 새로운 필드를 묻혀서 옮겨야 됩니다. 나무를 어떻게 옮기지요? 나무뿌리 다 털고 옮깁니까? 죽지요. 어떻게 옮겨요? 나무뿌리에 있던 뿌리에 맞는 흙을 감싸서 새끼줄로 묶어서 옮기잖아요. 그 개념이 필요한 그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장의 내용이 그리스도의 성령에 의해서 마련한 자리에 심어지면 그게 구약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자리는 누가 손대고 나갔다? 인간이 행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포기하고 나간 빈자리지요. 그 공터를 마지막 때 성령 받은 예수님이 그 자리를 차지했지요. 그러면 그 자리에 우리가 초청받아 가게 되면 먼저 주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 “나는 성령 받았어.” 하고 까불다가 막상 성령 주신 그 자리에 가보니까 누가 주셨어요? 주님이 주셨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만 증거해야 돼요? “주께서 이벤트를 아예 벌이셨군요.”

 

이방인이 어떻게 구원받는가? 그것은 이방인이라고 개념을 호칭한 유대교 구약적 개념을 지닌 본부, 센터를 폭파시켜버리죠. 우리는 이방인 아니고 너희들이 개 같은 이방인이라는 개념을 폭파시키고 그 폭파 자리를 주님이 차지하셔서 이스라엘은 누가 만든다? 내가 이제부터 이스라엘을 새로 만든다고 나서게 되면 거기에 초청받은 이방인들은 나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유대인의 메시아 유대인을 물리치고 감히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다고 이방인의 입을 통해서 주님이 메시아로 증거 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주께서 하신 계획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간 겁니다.

 

답을 미리 알려주고 난 뒤에 질문을 해야 예의인 것 같아서 이렇게 답부터 먼저 이야기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어떻게 구원받지요? 짜고 치는 고스톱이지요. 간단합니다. 정답은 예수님께서 이방인 자리를 친히 마련하셨습니다. 왜 마련하셨지요? 유대인들이 그동안 잘못된 이방인 개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개념은 어디서 나왔지요? 자기는 택함 받은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바로 죄였습니다. 예정론이 죄였고 선택론이 죄였습니다. 예수 안에서 선택론만 정답이었습니다. 그냥 선택론은 하나님과 나, 나의 구원욕구를 만족시키는 하나님의 선택으로 봤거든요. 이게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선택론이고 칼빈의 선택론인데 그것이 죄였고, 주께서 선택되었기에 주님의 선택에 합류한다고 제가 선택되었습니다. 칼 바르트의 이중 선택론의 그래서 나오게 된 겁니다.

 

금강산에 가면 이중 폭포가 있다는 거예요. 사진으로 봤어요. 한 번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선택하시고, 근거는 요한복음 5장에 나오지요. 하나님이 택하신 아들을 통해서 이제는 선택을 아들에게 일임하시고 아드님이 자기가 원하는 자를 따로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성부와 성자 사이에 선택 하나, 선택 받은 예수님의 선택 둘, 그래서 이중 선택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누구냐? 아들이지요. 아들에 의해서만 선택된 자만이 진짜 완벽한 아들이 되지요. 이 아들의 특징이 뭡니까? 또 역사 주장할까요? 이미 구약에서 실험했고 안 된다는 걸 뻔히 아는데 그래서 여기서 주께서 혼자 다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베드로가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고기 잡으러 갔지요.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할 때 베드로의 답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주님 사랑하지요.”라고 답변했습니까? 주체를 어떻게 해요? 너라는 주체가 나라는 객체를 사랑하느냐고 물으니까 베드로가 어떻게 대꾸합니까? 주체를 누구로 돌립니까?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로 돌아갑니다. 나는 주님의 주 되심의 증거물에 불과합니다. 네가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다.

 

주님은 드디어 예루살렘을 공략합니다. 그 공략 방법이 출생 장소를 예루살렘 근처로 잡았습니다. 그 장소가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무엇을 찾아야 되느냐 하면, 그동안 유대인에 의하면 이방인이라고 배제당한 또는 마리아 찬양에 나오는 가난한 자, 눌린 자로 여겨지는 그들을 통해서 예루살렘을 통과하게 돼있어요.

 

천사가 관여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역사적 실험은 이미 실패로 끝난 상태에서 말씀은 성취해야 되겠고 인간의 능력은 이미 좌절된 상태에서 영적 존재가 관여하는 거예요. 여기 베들레헴에서 하는 거예요. 여러분,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의 차이를 아셔야 되거든요. 예루살렘이 더 중요해요. 십자가에 죽은 것도 예루살렘이고 부활도 예루살렘이 되는 겁니다. 그럼 베들레헴은 뭡니까?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 등극할 왕의 고향입니다. 고향이라니까 제가 처음에 강의할 때 썼지요. 다시 쓰겠습니다. 반복해야 돼요. 아무리 여러분이 천재일지라도 반복만한 건 없거든요.

 

우월이 아니라 근본이지요. 베들레헴이 다윗의 고향입니다. 본적입니다. 그런데 거리는 얼마 떨어지지 않았지만 예루살렘은 정치적 수도가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이 예루살렘이고 메시아가 재림하는 자리가 베들레헴이 오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 재림하셔요. 예루살렘 근처에 감람산이 있는데 감람산에 메시아가 두 발로 딛고 선다는 겁니다. 갑자기 <회복>이란 영화가 생각나는데. 지금도 보수주의 계통에서는 그걸 실제로 예루살렘에 메시아가 온다는 겁니다. 그 생각할 때마다 일본만화가 생각나요. 간담브이. 도쿄에 가면 커다란 로봇 형사가 있다는 겁니다. 얼마나 두 발로 버티고 섰는지.

 

다시 이야기할게요. 구약의 어떤 개념을 끄집어낼 때 그것만 끄집어내면 안 된다고 했지요. 역사적 토양과 함께 묶어서 가져와서 그 토양이 묵시를 얼마나 비난하고 반대하는 속성을 드러내는지 아울러서 가져와야 돼요. 애굽은 주님이 가 계심으로서 이스라엘이 되고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이스라엘은 애굽이 되기 때문에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었다는 것이 성립이 된다고 했잖아요. 하루아침에 이걸 다,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비 올 때 길가의 물이 어디로 빠집니까? 많은 물이 맨홀로 빠지지요. 맨홀이 지하에 있잖아요. 그 지하가 십자가가 있는 자리라니까요. 우리는 자꾸 주님이 하늘에서 온다고 위만 쳐다보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당신이 메시아냐? 구름 타고 와야지.” 그들은 다니엘을 기억하고 있어요. 구름 타고 온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인자거든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검색했어요. 인자의 특징은 구름 타고 온다. “너, 구름 타고 왔어?”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인자는 이사야 53장에 의하면, 채찍을 맞고 고난 받는다. 다른 검색을 내놓습니다. 내가 찔림은 너희의 허물을 인함이라 너희 죄악으로 내가 찔리고 내가 맞음으로써 너희가 평안을 누리고 할 때 너희는 너희들 속에 숨어있는 주께서 생각하는 진짜 이스라엘은 우리 죄 속에 있는 겁니다. 변소 이야기 안 해도 되지요. 화장지 어디 있습니까? 말 못하겠다. 더러워서.

 

내 죄가 날 살린 겁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면 우리 죄를 귀하게 생각해주기 바랍니다. 주께서 당해서 생긴 죄에요. 그 죄는 우연이 아니고 실수가 아니고 나를 살리는 환경으로 전에는 착함이라고 여긴 헌금이 죄고, 전에는 잘한 일이라고 여긴 강의가 죄고, 목사가 설교한 게 죄고, 예배 참석한 게 죄라는 사실을 발견할 때 그 사람은 성령의 죄를 용출하는 사람입니다.

 

너무 진도 나가면 감당 못하기 때문에 쉬운 예를 들고 마치겠습니다. 옛날에 대덕교회에서 어떤 집사님이 근심어린 상담을 하러 왔어요. 그때는 목사가 없고 내가 대리 목사로 있을 때 아주 성실하게 성화를 추구하시는 집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제가 남편을 전도하려고 계약을 했습니다. 등산 갈 때 한 번 따라 가주면 교회 한 번 와주는 계약을 흥정을 했는데 제가 이래서 주일을 제대로 지키는 거냐는 질문을 했어요. 이 정도 들었으니까 여러분이 답변을 할 차례 같은데 이제는 수학정석에 나오는 해답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항상 제일 먼저 볼 것은, 그 사람이 말하는 행위의 주체 자리가 어디서부터 출발하는지 보세요. 내가 남편과 더불어 교회 나왔다. 할 때 내가 남편 데리고 나왔지요. 물론 그는 한 번은 등산 가주는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주님의 십자가 희생정신으로 교회 나왔다고 할 때 내가 전도한 셈이 되겠지요. 내가 남편을 전도했지요.

 

이걸 생각해보세요. 다른 가족은 다 나란히 나왔는데 그걸 그 사람은 내심 부러워한 겁니다. 그런데 사실 나란히 오게 된 것은 나란히 교회 나오는 역할을 맡았을 뿐이에요. 그 역할을 누가 줬습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허락하신 거예요. 그런데 이 부부가 맡은 역할은 혼자 나오는 거예요. 그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주님 말씀에 순종하면 되지요. 뭐라고 하느냐? “저 혼자 나왔습니다. 혼자 나온 이걸 감사하면 안 되고 혼자 나오면서 둘이 나오는 걸 부러워하게 만든 죄를 생산해서 이런 죄도 주께서 용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래서 뭐든지 감사가 안 나오면 주의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이야기했습니다. 집사님, 집사님은 누가 누굴 정죄하십니까? 그 집사님은 본인을 정죄하는 기준을 외부에서 따왔어요. 나란히 예배 참석하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운 거예요. 그게 왜 아름답지요? 그게 아름다운 순간 p1에서 p2로 달아나버리고 말았어요. 나는 언젠가 남편과 저처럼 아름답게 되겠다. 나란히 온 사람이 예수님이십니까? 혼자 오게 만드신 분이 예수님인 걸 믿을 때 만약에 남편의 폭력으로 혼자라도 못 올 뻔했는데 주께서 남편의 폭력을 막으시고 한 번은 와주도록 허용하시니 이 감사와 기쁨은 너희 나란히 오는 자들아 모르지. 자동적으로 오는 이들이 혼자 오는 기쁨을 맛볼 기회를 그들은 없는 거예요.

 

이건 가상 실험인데요. 나란히 오신 분에게 묻습니다. 오늘도 나란히 부부가 같은 신앙 생활하니까 기쁘지요? 저는 왔는데 우리 시어머니가 아직도 불도가 심해요. 나란히 와도 문제라. 왜 갑자기 시어머니까지 걱정하느냐 말이죠. 그렇게 해서 자기를 자책하는 기준은 뭡니까? 어떤 권사님은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나란히 왔다는 거예요. 도대체 나를 정죄하고 나를 벌세우고 나를 끊어 앉게 만드는 어디서 수입한 겁니까? 브라질 산입니까, 칠레산이에요? 이 세상에서 온 겁니다.

 

주님은 단 한 명도 전도한 적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 결국 혼자서 안녕, 빠이빠이 했습니다. 베드로가 따라 붙겠다고, “예수님, 제 목숨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그것도 목숨이라고. 그걸 어디 쓸모 있다고. 네가 목숨 바쳐도 내가 있는 곳에 못 온다. 내가 처소 마련하게 되면 내가 비행기 티켓 끊고 표 들고 너한테 찾아갈게. 찾아갈 때 성령 오거든 주님이 찾아온 줄 여겨라. 내가 보냈으니까.” 찾아왔다는 자체가 이미 자리가 있다, 없다? 이미 자리가 마련돼 있으니까 빨리 오너라. 또 감사지요.

 

죄 사함의 권세는 주님한테 있습니다. 왜? 이 시대는 역사가 시험하는 시대가 아니고 새삼스럽게 내 신앙이 잘났는지 시험하는 시대가 아니고 이 세대는 이미 죄인으로 확정된 시대에 우리는 주님께 구원받아 가면서 이런 죄까지 감사로 이어지도록 용서를 해주셨구나. 그래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그 기준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고 주께서 확정시킨 기준입니다.

 

전두환 전대통령, 이건희 회장 지옥 갑니다. 왜 지옥 갑니까? 돈이 많아서? 아니에요. 교만해서? 아닙니다. 뭐 때문에?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형벌이 있으리라는 데살로니가후서의 말씀처럼(1장 8절)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일가친척 누구라도 저주를 받는다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복음이 전파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귀한 존재입니다.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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