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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미국동부오후b 본문

해외 특강/14미국 강의

미국동부오후b

정인순 2014. 10. 29. 06:34

  음성2  

 

녹취:한윤범

 

20140925 미국동부오후b

(강의:이근호 목사)

 

 

제가 첫째 시간에 전제로 깐 것이 뭐냐 하면, 이방인인데 언약이 없지요. 언약이 없으니까 저주지요. 아브라함이 복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복이 전수되면서 그 증표가 할례입니다.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은 복에서 이미 제외된 사람들이에요. 아마 제가 이런 이야기하게 되면 김용옥 교수가 대번에 이렇게 나올 거예요. 이 세상에 많은 수천 민족 중에 한 민족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떻게 대표 하나님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들의 하나님이 있다면 우리 한민족에는 우리 신이 있는데 우리는 우리끼리 신을 믿으면 저들은 저들의 신을 믿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보면 언약에 없으니까 그런 소리한다는 거예요. 자기 결속하기 위해서 자기 공동체 혈통 유지하기 위해서 한다는 겁니다.

 

그럼 언약이 있을 경우에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린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한 자는 저주받지요.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니까. 근원된다는 것은 후손들이 자동적으로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계속 추가적인 조건들이 들어가요. 조건이 인간의 신체에 남깁니다. 그게 바로 할례언약입니다. 할례 받지 않는 것은 내 쪽에서 끊어지리라. 끊어진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이미 ktx가 확보돼있는데 문 열고 달리는 기차에서 집어던져버린다는 말이죠. 끊어진다는 말은 추방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인간으로서는 듣기 힘든 이유가 ktx는 몸체가 있잖아요. 그런데 언약체가 만져집니까? 언뜻 들으면 일방적으로 있는 듯해서 사기 치는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언약의 공동체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고 할 때 증거대라. 어디 있는데? 아브라함이 기껏 이야기하는 것이, “봐. 우리 가족은 난지 팔일 만에 할례 행했잖아.”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그것은 너희들의 일방적인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폐쇄적인 주장이다. 보편적인 증거를 대라.

 

보편적인 증거 있습니까? 보편적인 증거는 이방인들이 확보하지요. 우리 여기 있다. 신이 존재한다. 우리가 하는 식대로 하면 신과 접촉된다. 너희들 빼놓고 나머지 모든 사람, 그들의 여집합이지요. 그들 빼놓고 나머지 모든 사람은, 있음 자체가 신의 존재를 의미하고 우리가 성의를 표하면 나중에 천국 있으면 간다. 이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럴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할례를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걸 아브라함 이쪽을 ‘위반’입니다. 위반사례를 모아서 언약이 이뤄지는 겁니다. 이게 누가복음에 첫 번째 나오는 특징이에요. 위반사례는 사람들이 거부하고 싶고, 위반했다는 말은, 이미 그 전제돼있는 다른 세계, 현실이 따로 정립돼있다는 말이고 여기는 이미 사람들의 동의와 동조를 충분히 확보된 거예요.

 

1장에 나오는 사가랴는 제사장인데 아내가 잘못됐는지 무정자증인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누가 잘못됐는지 모르지만 아기를 못 낳아요. 하나님께서 아기를 낳게 해서 넣으면 위반사항이 안 돼요. 아기 못 낳는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계시가 와버리면 여자가 어떤 문제가 있어서 아기 못 낳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동의된 바입니다. 동의된 쪽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위반사례를 만들어버린 거예요. 이쪽의 사람들은, “뭐야 그 위반은? 왜 하나님께서 우리가 납득이 되는 식으로 하지 않고 납득이 안 되는 위반사태가 벌어지는 거야?”

 

위반사례를 통해서 아기 못 낳는 자들이 아기를 낳았습니다. 아기 이름을 자기 아버지가 짓든지 해야 되는데 사가랴가 갑자기 말을 못해요. 말을 못하고 아기 이름을 부친 이름 따라서 사가랴라고 하니까 이씨 집안이니까 이씨라고 써야 되는데 권씨가 나온 거예요. 이씨 집안에서 무슨 권씨가 나와요. 또 위반, 이탈사태가 벌어지는 겁니다.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의 언약은 정작 구원할 자를 일방적으로 자기 노선에 집어넣고 구원받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을 일방적으로 추방하는 형식이란 그러한 양면 활동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 인간의 기대를 이리저리 다 무산시키기 위해서. 왜 기대를 무산돼야 될까요? 천국이란 인간이 예상 못한 상황이기 때문에. 천국은 우리가 기대한 그 천국, 과거에 좋았던 걸 끌어 모아서 천국 되는 것이 아니고 낯선 세계기 때문에. 얼마나 낯설고 놀랐으면 자기의 면류관도 다 던지겠습니까. “이런 세계에 들어온다면 이것은 주께서 일방적으로 끌어당겼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면류관 주님이 받으셔야 됩니다.” 이게 천국이에요.

 

이 땅의 천국은 반드시 누굴 포함시키느냐? 나 잘되기, 내 소망 달성하기가 반드시 끼어들어야 돼요. 정작 주님은 우리가 예상한 모든 것을 비껴가는 거예요. 비껴가면서 이탈 사태가 벌어지는 겁니다. 그것은 저는 틈이 벌어졌다고 이야기해요. 분명히 하나인데 분명히 1인데 틈이 갈라지면 두 개가 되지요. 그리고 두 개가 되면서 1은 어디 있느냐? 갈라진 틈 사이에서 1이 새롭게 솟아나면서 처음에 1이라고 여긴 것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틈이 갈라질 때 기존의 지층이 아주 강력하게 반발하겠지요. 반발하는 힘과 터져 나오는 힘에서 벌어진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베드로가 이야기했지요. 마태복음 16장에서 “주여,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때 예수님이 베드로라 하지 않고, “사탄아 물러가라!” 베드로가 바람이 불어서 아버지에 의해서 신앙고백이 된 이상은 인간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또 다른 지층에서 대립된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했거든요.

 

베드로가 그런 고백하는 순간 배후에 감춰져 있던 사단이 주님 앞에 등장한 걸로 보는 겁니다. 이제는 인간 대 사단의 대결이 아니고 주님과 사단의 직접적 대결 상태가 되는데 이럴 때 나오는 특이현상, 공통점이 바로 예수님에 대해서 “주여, 이러시면 우리의 상식과 예측에 벗어납니다. 주님은 우리와 같은 편이기 때문에 우리가 납득이 되는 식으로 일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표현하는 거죠.

 

그게 바로 그동안 알지 못했던 악마의 모습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사탄은 가짜 사탄이에요. 악마였어요. 사탄은 절대로 인간의 손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황금색 얼굴로 양쪽에 검은 날개를 단 그런 사탄은 악마가 지어낸 사탄입니다. 차라리 천한 천사가 아마 그런 모습으로 올 걸요. 천사가 사탄의 모습으로 올 수도 있어요. 사탄으로 여기기 때문에 천사가 되고 천사로 여기기 때문에 사탄이 되는 역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거예요. 오래 누적된 우리의 정보력이 하루아침에 쓸모없는 것으로 배제되고 맙니다.

 

그런 이탈사태, 위반사태가 누가복음을 처음부터 드디어 지진이 벌어집니다. 갈라집니다. 거기서 하나님, 아까 뭐라고 했느냐 하면, 눈에 보이지 않기에 모든 인간은 동의했다고 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면 우리가 알아볼까, 못 알아볼까? 하는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모든 사항을 정보를 집결해서 나타나기만 하면 즉각 신고가 되도록 알아보는 체계가 잡혀있어요. 이런 하나님이다. 메시아는 다니엘에 의하면 구름 타고 오시게 돼있어요. 그리고 각종 모든 귀한 것들은 다 오게 돼있어요. 사무엘하 22장에 보면 메시아가 오는 정경이 나와 있습니다. 아주 화려하고 한강의 불꽃놀이 이상입니다. 멋져요. 대단합니다. 깜짝 놀랍니다. 모든 사람이 보게 되고. 그래서 플래카드 준비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오신 분은 누가 믿었으리요, 누가 알았으리요. 그는 흠모할 가치도 없고 믿을만한 어떤 티끌도 없는 모습으로 오셨고 그분은 자기를 기다리는 사람에 의해서 채찍을 맞고 버림받고 무시당하면서 나는 화목제물로 이 땅에 버림받은 양으로 왔다.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의 채찍은 우리를 위함이라.

 

그래서 이스라엘이 생각했던 혈통적 우리는 깨져버리고 주님의 새로운 우리가 성립되는 겁니다. 나라는 원래부터 없어요. 나라는 것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고 우리에게는 나가 없어요. 반드시 아담 혼자 나고, 주님 나에요. 그리고 우리들은 우리지 독특하게 나라는 말을 지칭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우리를 주께서는 새롭게 만들어내지요.

 

그래서 특이성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것부터 먼저 이야기할게요. 제가 욕심내서 진도 빨리 나가진 않겠어요. 하지만 다 합니다. 하다보면 다 하고 있어요. 이게 1이죠. 수학전공자를 다 아실 거예요. 1이란 바로 존재의 시작입니다. 1+1이 되고 1+1+1이 들어가죠. 1+1을 2라 하고, 1+1+1을 3이라고 해서 점점 더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0이라는 것은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기호라는 것은 사물이나 세상이 먼저 있고 그 있음을 근거로 해서 붙여야 되는데 아무것도 없는 것은 어떤 기호도 없어야 된다는 것이 당연한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인도에서 0이라는 게 처음 나와서 갑자기 수학이 비현실적 기호화 되고 말았어요. 비현실적 기호화 되면서 인간의 모든 상상력을 만족시키는 체계로 학문이 되는 겁니다. 오히려 만족시키는 거예요. 참 신기하지요. 현실이 아닌 것이 도리어 현실을 설명하는 높은 단계의 위상에 도달한 게 수학입니다. 그래서 기원전 오백 년경의 피타고라스는 이 세상은 수로만 돼있고(오늘날 정보로만 돼있다는 뜻) 그 수의 조화에 의해서 우주는 움직인다고 보는 겁니다. 그 증거로 음의 기, 음파, 현의 줄에 따라서 아주 정확하게 8단계로 나눠지는데 참 신기하기 짝이 없어요. 미술이란 것도 1:1.6일 때 가장 아름다운 비율이 나오고. 8등신이 나오죠.

 

수학에서 이렇게 나오는데 1은 반드시 존재의 시작, 있음의 시작이지요. 0이란 이처럼 있지 않은 걸 0이라 한단 말이죠. 그런데 지지직, 이걸 자르고 올 줄이야 생각 못했습니다. 우리는 여기 있고 따로 하나님이 하늘에서 나타나게 되면 나 1이고, 존재함이고 또 하나님이 존재하는 1이 되지요. 둘 사이에 존재적 관계를 유지하게 되면 이것이 백성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 구약의 유대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나 있음이 쪼개지면 존재가 날아가 버려요. 재미있는 것이 1이 쪼개지니까 1이 안 되고 1+1이 돼버렸죠. 그러니까 존재가 갈라지니까 존재의 하나 되게 하는 본성이 찢어지지 말자고 붙들지요. 붙드니까 깨어진 1이 도로 1이 되니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찢어짐이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다시 봉합이 되는 거예요. 있다가 봉합함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의 모든 존재는 주님 보시기에 찢어주시는 그 능력과 관계없는 또 다른 세계에 이미 사로잡혀있다는 것이 증명이 돼버린 겁니다.

 

첫째 시간 다시 해봅시다. 하나님의 언약에 있어서 던져놓고 언약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언약이 품고 있는 내용물이 쏟아지는데 그 내용이 뭐냐? 내가 구원받을 자를 구원하고 버릴 자를 버리는 내용이 있거든요. 아브라함에게 축복만 이야기한 게 아니고 저주도 이야기했어요. 만약에 아브라함에게 축복만 이야기했다면 우리는 중립지대에 있고 아브라함을 믿으면 복 받고 안 믿으면 그냥 복이 없는 상태가 되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아브라함을 믿으면 복 받고 안 믿으면 뭐가 되지요? 저주를 받는다니까요. 세상에 이런 생떼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보통 저주는 어떤 경우에 저주를 받습니까? 나쁜 짓을 했을 경우에 네가 한 일에 책임지라고 저주내리잖아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어야 된다는 가장 철학적인 당위성이 뭡니까? 자기가 책임질 수 없는 일에는 책임질 수 없다. 모든 인간이 동의한 바에요. 인간들이 동의한 바에 의하면 신이 있고 신의 법칙은 서로 물어보고 일치된 의견을 뽑아냅니다. 일치된 의견 중에 하나가 책임을 질 수 없는 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거예요.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걔가 지옥 갑니까, 천국 갑니까? 천주교에서는 난처한 질문이에요. 그래서 천주교에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아빠, 엄마가 얘를 대신한다고 치고 아빠, 엄마가 영세 받으면 그 얘도 구원받는다. 그러면 아빠, 엄마가 영세 안 받으면 어떻게 할 거냐? 일단 죽으면 패자부활전으로 가요. 이게 연옥입니다. 연옥이론이 11세기경에 처음 등장했어요. 전 국민을 신자로 만들기 위해서 만든 거예요. 그걸 국가종교라 하는데 한바탕 가는 거예요.

 

그 사람의 자유의지를 묻는 것이 아니고 그 얘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보존돼있으면 봐주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 형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속에 공유적 속성이라 해서 의와 양심과 착함이 들어있으면 그것은 그 사람 것이 아니고 누구나에게 할당된 것이라고 한 겁니다. 마치 커피믹스 안에 커피뿐만 아니라 프리마, 설탕도 들어있지요. 그러면 커피인데 그게 왜 들어있지요. 그게 맛을 해주잖아요.

 

인간은 죄인 맞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전적인 죄인은 아니다. 왜?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선한 게 있기 때문에. 선한 걸 따로 뽑아서 하나님 것이라고 본다면 하나님이 하나님 것을 스스로 처단한다? 이건 말도 안 되는 모순된 이야기다. 따라서 인간은 타락해도 전적으로 타락하지 않았고 어떤 사람도 그 속에 있는 의와 신과 양심에 호소하게 되면 그 사람은 구원받을 잠재성이 있으니까 꼭 예수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누구나 잠재적인 신자라고 하는 것이 현대 천주교의 교리입니다.

 

칼빈의 전적타락, 아니에요. 티벳불교, 라마불교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일단 중간단계에 가니까. 여러분, 자판기에서 덜컹하고 한 단계 떨어지고 또 한 단계 나오잖아요. 보이지 않는 중간단계에 연옥이 있어서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착하냐에 따라서 하는데 어린아이는 그야말로 순진무구한 어린애. 그래서 천주교에선 어린애를 축복했다고 말해요. 이 말은 그들의 이론에 의하면 네 속에 있는 내 것을 축복한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그게 납득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얘가 잘 켜줬으면 그럴 리가 있느냐고 하지만 태어나자마자 죽었던 얘 생각해보세요. 그 소식이 기쁜 소식입니다. 내 얘도 살 수 있다. “하나님은 얘까지 생각할 정도로 사랑의 범위가 넓구나. 세상에 이런 사랑을 모르고 말이야.” 하면서 굉장히 좋아하지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상하게 사람 기쁘게 하는 요소가 구색 맞추어서 다 들어있습니다. 천주교 가게는 없는 게 없어요. 뭘 원하십니까? 다 들어있어요.

 

다시 해봅시다. 어려운 이야기에 들어갔는데 하나가 갈라지니까 “우리의 단결력을 누가 훼손해?” 하고 다시 문을 닫아버렸죠.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어려운 이야기를 여러분 수준 믿고 합니다.

 

무가 두 종류가 있어요. 현재 내가 있음에서 없는 것을 무라고 합니다. 파르메니데스라는 철학자는 없다는 게 없다는 거예요. 없으면 없다는 말도 하지 말해야 진짜 없는 것이다. 없는데 무슨 없다고 하느냐. 만약에 없다에 무를 붙이면 없음이 있음이 되니까. 없는 게 말이 되느냐.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철학자를 말하기를, 없음을 이야기해야 있음이 의미 있다는 거예요. 밤이 있어야 낮이 있듯이 질서 잡기 위해서는 없음이 필연처럼 들어가야 한다고 본 겁니다.

 

인간이 생각한 없음은 내가 있음을 기준으로 하는 거예요. 하여튼 누가 있다? 내가 있는 것은 있는 것이다. 여러분, 내가 있는 것 맞습니까?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 안 했지요. 우리는 있다가도 없어지는 안개지요. 결국 없어지지요. 결국은 없는 거예요. 임시적이에요. 우리는 계약직입니다. 정규직이 아니에요. 내가 어느 도시에 가서 이를 보려고 하는 자들아 너희는 안개인지 알지 못한다. 차라리 이렇게 이야기해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리니.

 

그러면 뭔 뜻입니까? 있음은 나는 부속품으로 있는 거고 본체가 있지 부속품에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부속품이 소속돼있는 그 몸체를 유일하게 있다고 해야 된다. 주가 있음에 내가 있다고 해야 그게 맞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하면 우리가 평소에 일상생활 못해요. 병원에서 “전에 주사 맞은 아줌마 오셨습니까?” “내가 있는 게 아니고 내가 있다고 없는 거고 그냥 있음을 저한테 이야기하면 안 되는 거거든요. 주께서 있음인데 나는 있다가 없는 건데 ....” 무슨 이야기야. 주사 맞으란 이야기인데 딴 엉뚱한 소리하면 이 세상 불편해서 못 살잖아요. “혹시 여기 주인장 계십니까?” “주인장 없는 데요. 없지만 있거든요.” 이러면 일상생활 못 하지요.

 

또 하나 없음은 뭐냐 하면, 있음을 찢고 들어오는 있음에서 상상도 못한 없음. 나중에 보니 그 없음이 있음을 대체하는 겁니다. 구원받은 인간을 대리하면서 유일하게 아버지를 아시는 분이 바로 아들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아들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빼놓고 아버지를 아는 사람 없어요. 아버지를 모르면서 그동안 하나님을 믿는다고 우겼던 거예요. 그 거짓말을 진짜 아들 따로 있는데 아들도 아니면서 아들 행세하는 그것을 저주받을 짓이라고 째고 들어온 거예요. 째고 진짜 아들로 나타나는데 그 나타나는 현장이 뭐냐? 우리의 주체 자리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모든 말씀은 코끼리와 상대하지 않고 코스모스와 상대하지 않고 인간을 상대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이유가 뭐냐는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우리를 왜 쨉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 우리가 싫어서가 아니고 주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겠다는 신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평소 양복 한 벌 없는 동생이 오랜만에 소개팅 나가려고 형한테 양복을 빌려달라고 할 때 이건 무슨 소리입니까? 오늘 특별히 여자친구를 만난다는 이야기에요. 예수님께서 주가 되신다는 것은 그냥 주가 되지 못해요. 반드시 육신의 죄를 입어야 인간의 죄를 입어야 주가 되기 때문에 인간은 그 주를 위해서 죄를 지어야 하는 겁니다. 죄 지은 겉옷을 본인이 입으시고 주가 되시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주님한테 본의 아니게 당하고 만 겁니다. 그 당했다는 것을 추후에 알게 된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고 그 사람은 구원이란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사이지 원래부터 우리와는 상관없는 것을 알 때 그 사람은 주님께 소속된 구원받은 자가 되는 겁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불교가 이미 해답을 내놨습니다. 생로병사라는 고통의 질곡에서 어떻게 벗어나는가? 인간의 생각은 구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구원을 뭐로 봤는가? 행복으로 봤어요. 그의 선배, 선배 격인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목적은 지식이라 했어요. 인간이 죄 짓는 것은 무지하기 때문에 죄 졌다. 플라톤은 스승처럼 인간의 목적은 진리에 합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에 내려옵니다. 인간이 사는 목적은 행복에 있다. 얼마나 행복한가?

 

이 셋 진리와 진리의 합류, 행복 중에 어느 것이 우리 일상에 가장 와 닿습니까? 교회 왜 나가십니까, 예수 왜 믿습니까, 하나님 왜 믿기로 결심했습니까? 결국 끝에 풀어놓은 마지막 실타래를 보니까 거기에 주님의 행복에 있는 게 아니라 나의 행복이 숨어있었던 거예요. 좀더 범위를 넓히면 나의 가족의 행복. 행복하기 위해서 예수 믿고, 행복하기 위해서 신을 찾고. 그 외에 다른 게 있습니까? 없지요. 그 행복에 그리스도는 방해될까요, 도움이 될까요? 아예 찢어버립니다. 어디서 죄진 주제에 (행)복을 찾아. 오직 너희들은 저주밖에 없어요.

 

그래서 누가복음은 저주에 있는 인간을 어떻게 복의 자리로 옮겨갔는지 옮겨가기 위해서 근거가 있어야 되는데 그 근거가 뭐냐? 누가 나의 의견을 묻지 않고 죄진 내 죄를 그냥 자기 몸으로 걸쳐버린 분이 우리 존재를 뚫고 들어올 때 아버지로부터 죄인의 길로 들어서신 분이 나타나신 거예요.

 

죄진 것도 없는 분이 죄인의 모습의 길로 가셔서 그 죄는 대신 담당하기 위해서 지은 죄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그 모든 행적은 전혀 외부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능력으로 눈치 챌 수 없는 일방적인 작업이었습니다. 심지어 열두 제자의 존재의 목적이 뭐냐? 무지의 대표자로 모아놓았죠.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베드로가 자기를 물위로 걷게 했고 장모의 병을 낫게 했고 오병이어 했고 자기를 칭찬했던 그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뭔가 아우라가 쳐져있지요. 그 자리에서 베드로는 한 발자국도 벗어날 리 없어요. 심지어 예수님과 함께 동행했어도. 베드로뿐만 아니고 열두 제자가 함께 다 있어도 그들은 자신의 행복, 자신의 위대함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다 그러합니다. 어떤 인간도 그 난관을 뚫을 수가 없어요. 그 거리를 좁힐 수가 없습니다. 너는 네 자리에 있어라. 내가 찾아갈게. 네가 띠 띠고 원치 않는 길을 갈 것이다. 내가 다시 찾아오마. 네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사랑함으로 끝까지 너를 포기하지 않으리라. 사랑은 죽음보다 더 세기 때문에, 아가서 마지막 8장에 나오지요.

 

사랑은 죽음보다 더 세기 때문에 지옥 간다고 절망하지 마라. 사랑은 지옥에 있는 인간도 끄집어낼 능력으로 내가 지옥 다녀간 능력이 있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지옥에 들어갔으면 못 빠져나오는데 예수님은 지옥 갔다가 사흘 만에 다시 나왔기 때문에 건질 수 있는 능력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분의 능력으로만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뭡니까? 진정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는 내가 못하는 것 주께서만 해주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능력을 증거하기 위해서 오늘도 주님한테 당하고 삽니다. 쉬는 시간에 피자 먹으면서 피자 먹음을 당했습니다. 피자 먹기 싫고 김밥 먹어야 되는데 김밥 못하고 피자 준비함을 또 당했어요. 세상에 어떤 인간도 자기 마음대로 안 되니까 남 탓하지 마세요. 배후에 주님께 그렇게 하신 겁니다. 발걸음 세시고 머리카락 뽑고 빠지는 것, 댕기머리 백날 해봐야 소용없고요. 댕기머리 주신 것도 주님이시니까 열심히 바르시되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네가 염려함으로 키가 한 자나 자라게 하지 못한다. 성장판이 닫혔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그 말은 키 작은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고 키 큰 사람도 한 자 더 자라게 못합니다. 2미터 35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클 만큼 컸어도 소용없어요. 세상에 모든 것은 주님한테 당하고 사는데 문제는 아는 사람은 천국 가고 모르는 사람은 지옥 가고. 그들은 지옥 가서 비로소 알게 되고 뒤늦게 후회하지요. 로마서 1장 이야기입니다. 그때 지옥 가서 핑계치 못하리라. 주님 언제 저한테 은혜 줬습니까? 핑계치 못한단 말이죠.

 

제가 신학교 다니면서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젊은 사람들에게 많은 받은 질문 중에 하나가, “전도사님, 세종대왕은 천국 갔어요, 지옥 갔어요?” 목사님, 답변해보렵니까? 제 답변은 간단합니다. 구원이란 자체가 애초부터 구원이라고 해도 그건 가짜에요. 째고 들어와야 구원이에요. 만약에 존재 자체를 있음이 없음으로 바뀌는 나는 없고 주님만 있는 존재로 바뀐다면 세종대왕이란 그런 존재는 없지요. 그냥 아담의 옷자락에 불과한 겁니다.

 

세종대왕이라고 말하지 마시고 제66번째 아담이라고 보면 돼요. 일종의 기계론적이지만 기계가 똑같은 복제품을 만들어내듯이 서른일곱 번째 아담, 칠천사백오십육 번째 아담. 그중에 하나가 세종대왕입니다 이순신 장군이고. 그리고 팔천육백사십육 번째 아담이 전데 그것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천오백사십오로 바뀌어버리죠.

 

어떤 경우에? 돌아보니까 뭔가 우리가 돌이킬 수 없는 장벽을 이미 넘어왔어요. 이미 닫혀버린 홍해가 바로 보이는 거예요. 누구지? 내가 건널 수 없는 것을 누가 건너게 하셨지? 그것은 바로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피로 허락도 없이 건너게 해놓고 건넌 입장에서 뒤돌아보면서 주께서 그렇게 하심을 우리로 증거하는 겁니다.

 

수면내시경 해보셨습니까? 마취주사를 놓지요. 프로포폴 마취주사를 저는 몇 번 해봐서 일부러 시험해봤어요. 나는 마취 들지 않는다. 나는 의사가 하는 걸 생생하게 다 체험할 거야. 눈 떠보니까 다 끝나고 침대에서 치워져서 누워있어요. 뭐지? 누구야. 내 허락도 없이 날 잠들게 한 이 누구지. 뒤돌아보니까 수면내시경 끝나서 위에 염증도 없고 괜찮습니다. 이런 소식 온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수면내시경 다해놓고 구원받는데 영생 얻는데 전혀 지장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 내 위신과 체면과 자유의지 발휘함, 나의 당당함, 내가 얼마나 착한가 하는 솜씨 발휘 이런 것들을 밑에서 솟아오른 어떤 예상 못한 낯선 존재에 의해서 그것이 쓰레기 취급 받아서 쓰레기통에 보니 거기 다 들어있네. 결국 주님께서 나를 쓰레기로 간주한 거예요. “주여, 왜 저와 의논이 없었습니까?” 하니까 “너는 안개니라. 왜 너와 의논하지. 난 아버지와 의논하면 되지 너는 전리품인데. 너와 의논하느니 마귀와 의논하는 게 편한데.”

 

우리는 마귀에 속했기 때문에 자력으로 구원받겠다는 행함으로 구원받겠다는 것은 잊을 수가 없어요.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해놓고 그걸 잊지를 못해요. 차변, 대변으로 장부 만들어서 착한 일 적고, 나쁜 일 적는 것, 일종의 일기장 아닙니까. “오늘 날씨, 맑음. 오늘도 착한 일해서 어머니한테 칭찬받았음. 내가 강아지 때렸음, 이건 나쁜 짓. 계산 해보니까 하루 일과, 착한 것이 많으니까 주여, 오늘도 착한 얘로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단 말이죠. 맨날 전체를 볼 때.

 

그런데 그게 쓰레기통에 있는 겁니다. 쓰레기통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란 쓰레기통을 들여다보니까 주께서 대신해야 될 일들이 그 쓰레기통에 가득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을 증거하려면 그 쓰레기통을 못 본 척하면 안 되고 그 쓰레기통에 들어가서 일일이 내가 행할 것, 행할 수밖에 없던 것들,

 

인간은 같은 몸이니까 옛날 행세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성질은 변하지 않아요. 다만 환경에 따라서 약간 숨고르기 순간은 있지만 다시 끝나고 나면 달려듭니다. 사료 건드리면 강아지 달려들 듯이 우리는 날 건드리면 달려들어요. 착한 어린이 없어요. 건드리면 다 개입니다. 치매 걸리면 다 세 살짜리 어린이 되잖아요. 그냥 밥그릇만 챙기고 달려들고. 그 모습이 우리 모습이에요. 선배입니다. 남의 이야기 아니에요. 같은 아담의 몸을 입었으니까.

 

그런 죄를 어디서 찾습니까? 여러분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 다 나와 똑같은 내가 지을 죄를 먼저 짓고 또 내가 먼저 지은 경우가 있어요. 내가 먼저 지은 것은 나는 선배가 되고 내가 미처 못 지은 죄를 선배가 바라보고 있고. 그걸 우리가 쓰레기통에서 끄집어내죠. 끄집어내면서 감사합니다. 이 죄도 용서하신다니 감사합니다. 그저 범사에 감사합니다. 이게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뜻이라는 겁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한 것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성도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그렇게 되기까지 주께서 무슨 일을 이 땅에서 하셨는가? 그렇다면 주님께서 저를 위해서 그런 일을 했습니까? 아니요. 그럼 목사님을 위해서? 아니요. 우리 중에 누굴 위해서 주께서 일했습니까? 아무도 우릴 위해서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누굴 위해서 일했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 너가 아니고 이스라엘을 위함이라. 그렇다면 누가복음에서 이스라엘을 위함이라고 한다면, 예수님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시작되겠어요?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부터 멸망한 이유를 쓰레기처럼 끄집어내어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나온 인간의 쓰레기를 자기 몸에 뒤집어씌우면 그 이스라엘 쓰레기를 오늘날 이방인을 대표하는 쓰레기로 우리에게 적용이 가능합니다.

 

수면내시경 이야기했는데 그걸 다시 적용하게 되면, 수면내시경 임상실험을 몇 명 쯤 했겠습니까? 설마 한 명으로는 인가 안 되겠지요. 그러면 넉넉잡아 백 명이라고 합시다. 백 명이면 통과되지요. 정확하게 하려면 60억 명 다 해보고 부작용이 없다고 해야 되겠지요. 그런데 표본조사를 하는 겁니다. 이 정도 하면 학회에서 인정해주는 숫자가 있어요. 물론 약효에 따라 다르지만 중요한 것은 많은 숫자로 하고.

 

그런데 주님은 그 표본조사를 누구 보고 합니까? 이스라엘 보고 한 거예요. 우리 보고 안 해요. 우리는 가만있어. 이스라엘에게 성립했으면 우리한테 성공한 거예요. 그럼 여기서 문제점이 뭡니까? 이스라엘이 뭔데 우리 대신 표본으로 하느냐? 이스라엘은 특징이 있어요. 이스라엘은 죄 지을 때 그냥 죄 짓지 않았습니다. 죄를 유발하는 요인이 들어왔어요. 그게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보세요. 하나님은 철저하게 인간을 이용하지요. 죄를 죄 되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에 언약을 줘버립니다.

 

그 언약을 줄 때 지킬 수 있는 언약을 주십니까, 못 지킬 언약을 주십니까? 못 지킬 언약을 줘요. 네 목숨을 다하여 네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게 됩니까? 데카르트가 뭐라고 했어요? 내가 있는 이상 하나님이 의미 있지 내가 없는 이상은 하나님은 의미 있다, 없다? 나 죽으면 하나님 없어요. 하나님은 나의 행복을 위해서 있는 거예요. 내가 먼저 있고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있는 거예요. 데카르트에 의하면.

 

이건 데카르트뿐만 아니고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거든요.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그 땅이 비어있습니까, 사람들이 꽉 차있습니까? 꽉 차있는 사람들이 작은 요정들이었습니까? 그들은 거인들이었습니다. 상대해도 게임이 안 되죠. 못 들어가지요. 홍해 건널 때 물이 빠졌습니까, 물이 넘실댔습니까? 넘실댔잖아요. 주께서 하는 모든 일은 다 그런 겁니다. 우리로서는 하지도 못할 일이에요. 분명히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한다고 했는데 양식 있었습니까? 양식 없지요. 물도 없지요.

 

뭐예요? 제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망했다고 그들의 남보다 더 범죄 했다고 하지 마세요. 우리도 그 상황 되면 범죄 할 수밖에 없고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에게 원망을 유도하느냐? 인간은 하늘나라에 갈 수 없는 골이 인간을 포위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할 수 없습니다. 사울 왕은 골리앗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주께서 함께 한다면 우리에게 나의 나락과 나의 절망을 보게 합니다. 그걸 제가 번지점프라고 했잖아요.

 

주께서 밀어낼 때 “주여,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건 제가 감당 못합니다.” 그 말은 그동안 감당할 범위 내에서 주를 섬겼다는 말이거든요. 그건 취미생활이다. 진짜 신앙생활은 네가 주인공이 아니고 내가 주인공인데 너는 주여, 주여 하면서 사실은 네가 네 자신을 관리해왔다. 그런 식이라면 이스라엘은 절대로 범죄 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역사는 바로 우리 선배들이거든요. 그들이 원망하고 우상을 섬긴 것은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자유의지의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굶지요. 양식을 떨어졌지요. 국가적인 이방나라, 종교 따질 것 없이 그들의 원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바벨론, 앗수르의 군대의 발굽은 오지요. 그 당시 잘사는 나라 군사력은 애굽밖에 없지요. 그래서 애굽에 가서 그들의 말과 군사를 도입을 요청했는데 그때 이사야, 예레미야가 와서 하는 말이 시편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의 말과 병거를 의지했도다. 너희들은 필히 멸망할 것이다.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너무 억울해요. 주께서 안 쳐들어왔으면 우리가 애굽을 의지할 마음이 들겠어요, 안 들겠어요? 안 들지요. 주께서 일부러 우리가 감당 못할 일을 던져놓고 우리에게 감당 못했다고 책임을 지라하면 연약한 인간은 어쩌란 말입니까. 그 순간에 우리 속에 들어있는 것은 믿음이라고 하지만 그건 표피 2센티미터고 사실은 우리는 주님을 믿은 적이 없고 항상 나는 나의 실력만 최종적으로 믿어왔다는 불신이 자리 잡았다는 것을 노출시키는 사건이 언약적 사건입니다.

 

그럼 믿음 없는데 어떻게 할까요? 믿음 없으면 그대로 노출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죄인을 부르러 온 주님의 작업에 당한 거예요. 스스로 고치면 환자가 아니고 의사겠지요. 환자는 의사한테 맡기라고 병이 생긴 겁니다. 우리가 스스로 의롭게 되지 못하게 만들어서 유일하게 의를 제공하시는 분은 이미 죽었다가 모든 걸 해결하신 삶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죽음을 건너오고 새로운 영생의 세계에 계신 분이 우리를 유일하게 해결하실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에게 맡겨야 되지요.

 

이렇게 오늘 밤 지나면 걱정스러워서 혹시 잠 못 자는 분이 있기 때문에 제가 너무 염려스러워서 한 마디 첨가합니다. 갑자기 여러분이 돈을 잘 벌고 사업이 잘 되고 얘들이 공부 잘하고 가정이 화목할 때 “주여, 이런 징벌을 왜 주십니까?” 이렇게 해야 돼요. 너무 일이 잘 풀리니까 “주여, 이렇게 나오면 내가 예수 잘 믿는 사람 되잖아요. 왜 이러십니까? 갑자기.” 그게 바로 신앙이에요.

 

이런 식이 되면 남들이 다 이야기해요. 너 믿음 좋아서 기도 열심히 해서 복 받았다고. 남들 다 구라를 치는데 저도 휘말립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죄인에게 왜 이런 것을 주십니까? 죄인인데 탁구대 주시고, 피아노 주시고, 죄인인데 염색 안 해도 머리 새카맣고, 갱년기인데 얼굴이 벌겋지 않지요. 남의 얘는 세월호참사로 물에 빠져죽었는데 우리 얘는 멀쩡하게 왜 있지요? 주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사도 바울이 한 것처럼 내가 가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하나. 그게 신앙은 가난하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절망을 봤다고 신앙이 자동으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부자 됐다고 신앙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 이야기하려고 지금까지 버텼어요. 여러분, 잘 먹고 잘 살고 부자 됐다고 해서 신앙 없는 게 아니에요. 강조하는 제가 이상하네요. 다만 그것이 내 믿음의 보상으로 여기시면 신앙 100% 없는 거예요. 믿음의 보상이 아니고 부자 됨을 당하신 겁니다. 참 삼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 안 믿고 내 소유를 믿으라고 그러한 참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계신 거예요. 주의해야 됩니다.

 

나는 돈 있으나 없으나 다 주의 것이고 주님 앞에 십자가 앞에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저 피는 제가 받을 저주인데 언제 절로 가버렸습니까? 저는 쓰레기통을 다시 뒤지면서 이런 죄도 용서받았다는 것을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제가 감사하겠습니다. 하고 살아가면 신앙생활을 또 당하신 거예요. 신앙생활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당하면서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집사님 요새 온유하고 화평하고 자비롭습니까? 성령의 열매 맺기 위해서 따로 훈련받는 것 있습니까? 아니고 주님 바라보니까 나머지 뭘 해도 그게 성령의 열매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본인이 자아를 스스로 관리하면 아무리 착해도 그건 시기와 질투가 되고 다툼이 되는 겁니다. 미움이 생기고. 난 기도 끝났는데 더 오래하다니 건방지게. 나보다 성경 더 많이 알고 오늘 기분 나빠.

 

그러니까 항상 우리에게 주어지는 환경은 내가 만든 환경이 아니고 주님이 시키시는 신앙생활에 때로는 가난하게 되고 때로는 부하게 하면서 어떤 환경에도 그것은 하나에 구색, 껍데기에 불과하고 이미 너는 내시경검사를 통과한 상태에서 이것도 견디시고 저것도 견디시면 언젠가는 죽는 날이 계실 겁니다. 그때는 나그네 생활을 끝내고 새로운 하나님 형상을 입을 겁니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냥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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