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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미국동부오전f 본문

해외 특강/14미국 강의

미국동부오전f

정인순 2014. 10. 29. 06:24

음성6

 

20140926 미국동부오전f

(강의:이근호 목사)

 

 

제가 가해자, 피해자 만드니까 하나님의 개입은 가해자, 피해자가 드러나는 쪽이구나. 쉽다. 쉬운 게 아니에요. 방금 제가 중요한 걸 이야기했지만 사람들이 자꾸 잊어버리는 게 뭐냐? 하나님에 의해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돼야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에 의해서 되지 않는 가해자와 피해자라면 우리는 뭐가 남느냐? 복수심이 있어요. 원수를 내 손으로 잡으려고 합니다.

 

중국영화의 흐름이 이거에요. 착하게 식당하고 있는데 옆의 도장에서 쳐들어와서 아버지 무술 좋다고 죽이고, 겨우 탁자 밑에 숨어서 살아남은 아들이 금강산에서 무술 익혀서 십년 만에 나타나서 이제 원수를 갚고자 칼을 갈았다. 이게 중국영화의 테마잖아요. 무협지죠.

 

그러나 로마서 15장 끝에 보세요. 원수 갚는 것은 주께 있다. 신앙이 있다,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저는 단적으로 이야기해요. 여러 가지 이야기하면 복잡하니까. 원수 갚는 것을 본인이 갚겠다고 하면 신앙 없습니다. 사람은 주께서 가해자, 피해자 있는데 내 돈 떼먹은 사람에게 내가 원한이 없다? 이게 인간입니까, 천사지요.

 

그런데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엄청난 이야기를 합니다. 구약의 윤리, 도덕은 저리 가라에요. 네가 차라리 돈 떼이는 게 낫다는 겁니다. 어떻게 같은 성도를 법원에 고소하느냐. 우리는 천사가 판사인데 어떻게 세속적인 판사한테 신앙문제를 판결해달라고 요청하느냐. 차라리 네가 돈 떼여라. 산상설교에 보면 이렇게 돼있어요. 네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내놓으라는 이야기고, 차마 목사 입에서 주저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 나옵니다. 돈 빌려주려거든 거저 주어라.

 

이 자본주의사회에서 말이 됩니까? 강남의 부자 동네 교회에서 그 설교를 했다가는 그 다음에 헌금 들어오겠어요? 주께서 갚아주신다고 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떼였습니까? 왜 애초부터 줘버리지 않았습니까? 떼일 사람에게 미리 줘버렸으면 떼였다는 감정도 안 생길 텐데 당신이 떼였다는 악함이 생겼다는 말은 처음부터 산상설교를 위반했기 때문입니다. 떼여도 쌉니다. 이렇게 설교하면 그 목사가 그 교회에 못 붙어있습니다.

 

 

-형제들끼리 얘기죠?

 

그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이게 존재론으로 하게 되면 나, 성도로 존재하고 너는 형제로 존재하지. 이렇게 존재와 존재로 만나면 성경으로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성경은 기능이거든요. 존재로 해석하면 항상 나를 주인공으로 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존재는 따로 있어요.

 

목사님, 1번 공식을 잊어버렸어요. 성경 속의 현실은 따로 있는데 거울 속에 있는데 우리는 내 위주의 현실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속에 들어가려면, 1번 공식,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니까. 1번 공식이 뭐지요? 주께서 유발시키지요. 나의 존재를 위한 현실은 날아가고 주의 존재만 드러나는 현실만 기능적으로 있고 그 기능에 우리는 장기판의 졸로써 활용되지요. 그러면 내 돈 떼먹은 사람은 내가 그 존재 탓을 할 게 아니고 기능 탓, 너는 이번에 맡은 일이 내 돈 떼먹고 싹 닦는 기능을 한 거예요.

 

그래서 다가올 때 내 존재로 다가가지 말고 주님을 경유해서 다가서게 되면 주께서 보내셨구나. 그리고 나는 사기 당한 거지요. 그 사람은 사기 치는 기능을 하는데 그 사람도 마음도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 사람이 사기 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기 치고 싶어서 사기 치는 것이 아니고 물결이 밀려왔으니까 지하철에서 옆 사람이 미니까 본의 아니게 아무 사적 감정 없는데 같이 밀려버린 거예요. 이쪽 어음 받아서 갚을 생각했는데 대기업이 부도나는 바람에 하청업체가 돈을 못 받으니까 자기가 갚을 재료상에 돈을 못 주고, 재료상의 경리 아가씨와 같은 교회 형제자매라고 부른다면 이건 어떻게 됩니까?

 

 

-성경에 나오는 명령이나 권유들이 형제들끼리 한 몸을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될 일들에 대한 되어짐에 대한 약속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면 존재가 되고 한 몸이 뭔가를 새롭게 발현하기 위한 임시적 존재에게 이야기해요. 임시적, 존재는 아닌데 사람은 돌아서면 존재로만 이해하거든요. 인간의 의식 자체가. 여기 지우개가 있다고 하지 지우개가 발현됐다고 이런 소리 안 하잖아요. 항상 지우개가 주께 있게 하더라도 우리는 존재로만 이해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존재, 나는 즉자존재고 이건 존재로 보는 대상이 되니까.

 

그래서 형제가 네 돈 떼먹고 달아나거든 차라리 돈 떼여라.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말씀이 아니에요. 그러나 1번 공식에 의하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지키지 못하는 것을 주께서 지키도록 조치를 하게 되면 우리는 감사하지요. 나라는 졸을 통해서 주의 말씀이 발현되게 된 것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하지요. 물론 돈은 떼였지만.

 

 

-그렇게까지 마음을 갖는다는 게 인간으로서 힘든 것 아닙니까?

 

그게 1번 공식이에요. 주께서 개입해야 되지 이번 일은 주께서 개입하셨지 내가 일부러 그 말씀 지키려고 애쓴다는, 사도의 권면과 명령을 내가 지켜볼까 하는 이건 기능으로 나선 게 아니고 내 존재의 잘남을 어느 정도 의식하면서 나선 거거든요. 그렇게 되면 죄 짓는 기능이 아니잖아요. 우리는 잘만 하면 죄 안 지을 수 있다. 그것을 무산시킵니다. 그 일이 주께서 벌어지게 되니까 너도 기능이고 나도 기능이고, 둘 다 잘났다, 또는 둘 다 못났다 할 필요 없다 이 말이죠. “에이, 잘 먹고 잘 살아라.” 이게 정답이죠. 그런데 본인이 찾아가게 되면,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나도 밀리니까 밀렸습니다. 돈 생기면 갚을게요.”

 

방금 질문에 답변은 하나밖에 없어요. 베드로가 한 이야기에요. 형제가 죄 지으면 몇 번 용서해야 됩니까? -할 수 없지요. 왜 할 수 없어요? 우리는 항상 나를 존재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할 수 없는 것을 기능으로 바꾸게 되면 주께서 던진 언약을 주께서 회수하면서 부대효과로 구원받은 거예요. 할 수 없었는데 이미 의인돼버렸어요. 우리는. 주의 일에 말려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주님이 의인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의인돼버렸어요.

 

 

-거기서 형제는 누구인지는

 

그때그때 달라요. 존재가 아니니까. 기능 속에서 형제적인 기능이 나타나죠. 만약에 어떤 사람은 형제로 생각하고 돈 빌려주면 큰일 납니다. 왜? 내가 너를 모르는데~ 어떻게 돈 빌려줘요. 너, 나 모르나? 그건 지금까지고 내일 일을 누가 압니까. 믿는 놈이 나쁜 놈이지요.

 

 

-형제라는 건 꾸어주는 게 아니고 거저 주는 마음으로 줄 수 있으면 주라는 뜻이고

 

그러니까 제 말은 지키는 방법은 절대로 차용증 받고 주란 말이죠. 그래야 내 의가 나타나지 않아요. 나는 이 말씀을 못 지킨다는 걸 분명히 해줘야 돼요. 자칫 그냥 줘버리면 나는 형제를 이용해서 잘난 내 존재를 부각하는 용도로서 형제를 이용한 셈이 되지요. “주여, 보시옵소서. 내가 이 정도로 대단한 존재입니다. 말씀 지키잖아요.”라고 자기 의를 고취시키기 위한 용도로 “형제여, 너한테 돈 갚으란 소리 안 할게.” 이렇게 자기중심으로 돼버려요. 그게 가인입니다. 졸지에 가인 돼버렸는데.

 

성경에 나오는 현실 자체를 우리가 자꾸 흉내 내요. 그런데 주님의 진짜 현실에서는 가해자, 피해자만 나눠지고 피해자는 오직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에요. 이 세상에서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아벨은 얼마나 주님을 원망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벨은 피해자가 아닙니다. 아벨 속에 계신 분만이 피해자지요. 그분이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만 증거합니다.

 

저는 이해된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지금 형제라는 단어에 매이는 것 같아요. 성령을 같이 받은 사람이 형제인데

 

그렇게 되면 존재론적 공동체가 된다니까. 너, 너, 너, 존재들 모여. 존재들 모여서 건전한 존재가 돼버렸지요. 그러면 그 존재가 이데올로기의 가치가 이미 확정된 존재가 돼버리면 그것은 대상이 돼버리고 그 대상을 바라보는 나는 또 하나의 존재로 굳혀지지요. 그러면 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실천이 돼버려요. 말씀 실천이 돼버리면 내 조직이 우상화되지요. 해체돼야 되는데

 

 

-결국은 우리가 교회를 이루려는 노력이라든가 교회가 되어지는 것은 이 땅에서 볼 수 없는가

 

교회가 되어지는 것은 매일 보지요. 어떻게 보느냐? 존재라고 우기는 그 교회는 절대로 영원한 교회가 아님을 늘 느낄 때 이게 발생론적 교회입니다. 발생은 주께서 우리 뜻대로 되지 않고 우리가 교회라고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매일 해체해나가시는 그 손길이 진정한 교회가 되는 거예요.

 

형제라고 믿었는데 형제답지 않은 행동이 나올 때 우리는 실망할 때 누가 실망했는가? 1번 공식에 의하면, 주님의 개입으로 그렇게 하신 거예요. 한 시도 주님의 개입이 없는 날이 없음을 그게 현실인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되는데 우리는 뭔가 좀 된다 싶으면 이제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지요. 구태여 간절히 기도할 필요 없네. 이 정도면 저는 만족합니다. 저는 아주 소박한 사람이에요. 이렇게 나오는데 소박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것 건드리면 화나는데.

 

 

-목사님, 방금 진정한 피해자는 예수님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럼 진정한 가해자는 하나님 아닌가요?

 

그렇지요.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니까 하나님의 자작극이란 말도 되는 거네요?

 

자작극이란 말을 로마서 11장 36절에 이렇게 돼있어요.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께 돌아간다. 그 앞에 나오는 말이 놀라운 말이에요. 누가 알았으리요, 이 비밀의 지혜를.

 

그러니까 이걸 예수님과 하나님의 언약이거든요. 언약 안에는 두 가지가 있지요. 당구공 치면 둘로 갈라지잖아요. 택한 백성은 천국으로 안 택한 백성은 지옥으로. 이것을 구체화시킨 것이 인류의 역사지요. 인간은 태어나고 난 뒤에 이 현실을 잊어버렸지요. 잊어버린 것을 성령이 오게 되면 to부정사, 이미 확정된 사실 속에서 이 언약이 나한테 반복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면서 나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는 겁니다.

 

사람이 어떤 특정 공식을 믿어버리면 주께서 그것을 다치게 하면 섭섭해져요. 우리끼리 참 좋았는데 갑자기 어떤 유력한 헌금 내던 교인이 이사 가버리고, 이사 가는 건 좋은데 더 기분 나쁜 것이 그 교회에 헌금 낸다는 사실이 더 기분 나빠요. 저 돈이 우리 교회 올 돈인데 미치겠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누가 그걸 유발했습니까? 1번 공식에 의하면 주께서 했지요. 주님은 이러시면 안 된다고 할 때 우리는 졸지에 가인으로 변해버려요. 그러면 유발하신 분이 내가 가해자로 등장하면, 예수님 하는 일이 잘못된 일이 되기 때문에 피해자가 되지요. 그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면 성도가 되는 거예요.

 

성도는 온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활발한 활동 속에 하나의 졸로 부단히 쉴 새 없이 절대로 이것이 나라고 확정되지 않도록 늘 조치를 해주시는데 우리의 확정된 자리는 하나밖에 없어요. 우리는 있다가 없어지는 그냥 안개로 만족해야 돼요. 따로 있다고 계속 하려고 한다면 이건 존재가 되니까 자칫하면 사실은 우상이 되고 맙니다.

 

 

-그게 베드로였던 거죠.

 

예. 맞습니다.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 뭐하십니까? 한 패잖아요.” 주께서는,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그럴 리 없습니다.” “베드로야. 너는 내 기도 아니면 거기서 못 벗어나.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 너를 위해서 기도한다.” 그러니까 배신하라. 빼주는 사람은 누구다? 네가 알아서 빠져나올 수 없고 주께서 빠져나오게 했다. 앞으로도 네가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다. 그러면 베드로는 이 사실을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창세기 4장을 하면서 사실은 성경 전체를 다 한 셈이 돼요. 아벨이 죽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히브리서 11장의 어려움이 거기 있어요. 아벨이 죽었잖아요. 죽은 공로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아벨은 모자이크에요. 모자이크 타일 중에서 한 조각에 불과해요. 아브라함 타일, 야곱 타일, 모여서 그리스도가 나온 겁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 미리 당겨서 아벨에게 그 역할을 일부 맡긴 겁니다. 아벨 속에 그리스도 영이 들어있어요.

 

베드로전서 1장 10절과 11절을 다 같이 읽어봅시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떤 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유대인들은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나사렛 예수는 최근에 생긴 사건이지요. 그런데 베드로는 뭐라고 합니까? 이미 구약 때 하나님의 신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미리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신약 때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새롭게 밝혀진 확정된 진리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예수님 보기를 기다렸고, 아벨도 예수님 십자가 피를 흘려야 자기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고, 노아도 방주 만들었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방주 만들면서 자기 죄를, 방주 만드는 것이 결코 내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방주 만들면서 비로소 그리스도 십자가를 알게 되는 거죠.

 

모든 인간은 아담이라는 선상에서 그리스도가 보이도록 조치한 겁니다. 물론 택한 자에게만.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에게만 그게 해당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 가기 위해서 “그리스도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나는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라는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1번 공식에 해당되죠. 주님의 개입으로 한 거예요. 2번 공식은 주께서 어떻게 개입했는가? 예수님 빼놓고 모든 자를 가해자로 만드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그걸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람은 가해자가 되더라도 천국 가고 그걸 모르는 사람은 지옥 가서 땅을 치고 후회해도 이미 그는 때는 늦으리.

 

사람 잘나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성령이 와서 문을 열어줄 때 비로소 거울 속의 현실을 알 때 공로로 주님의 용서하심으로 구원되지 내 힘으로 구원되지 않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구멍 나야 돼요. 총 맞아야 돼요. 우리 인생 자체가 누더기 돼야 됩니다. 사람의 심리는 어제 오후에 이야기했듯이 구멍 나면 봉합하고, 구멍 나면 봉합하고.

 

저는 그걸 실감나는 장면을 [터미네이터2]에서 봤어요. 기계로 만든 액체인간인데 호박엿처럼 늘어졌다가도 다시 붙는. 그러니까 마지막에 용광로에 집어넣잖아요. 본인도 들어가면서 엄지손가락 하나 남기면서 하는 말이, I'll be back. 다시 돌아오겠다. 3탄이 있다는 말이거든요. 3탄은 기계가 여자로 태어납니다.

 

그야말로 [매트릭스]가 정답 같아요. 모든 것이 예수님이 뿌려놓은 정보세계. 잠시 인간 같은데 흩어지면 언약적 정보로 흩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매트릭스에 나오는 용어들이 전부 언약적 용어들이에요. 다윗, 시온성, 그 용어들이 다 메시아 용어에요.

 

 

-그 원칙 가운데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요?

 

자유의지는 필히 등장해야 됩니다. 그래야 봉합이 되니까. 앞으로 잘 하라는 이야기이구나. 사실은 자유의지란 말은 없어요. 사실은 자유란 말은 필요 없어요. 의지만 있으면 충분해요. 의지 자체가 나만의 의지지 자유의지가 아니거든요. 의지란 말은 토마스 아퀴나스와 아벨라르 이런 사람들이 사용했습니다. 자유의지란 기독교 쪽으로 선악과 따지면서 한 이야기고, 뒤에 칸트 이야기고. 앞에 중세에는 의지 충분했어요.

 

신은 의지다. 따라서 신의 형상을 받으면 우리도 의지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로 이전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주의 뜻이다. 이게 중세에서 벗어나면서 기존의 교리를 반대하면서 나온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오캄이란 사람의 주장이었지요. 이걸 의지주의라. 의지주의의 끝은 니체로 끝납니다. 유명한 말이 있잖아요. 신은 죽었다.

 

신은 죽었다는 말은, 이성으로 만난 신은 죽고 남는 것은 존재가 아니고 의지의 바다다. 이게 화엄경에 의하면 인연의 연결이다. 출렁이는 인연. 바다에 뱃길이 나오지요. 그 뱃길이 두 시간 지나면 다시 봉합되지요. 불교 말이 맞지요. 인간은 항상 무슨 일이 있어도 봉합이 돼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찢어짐 속에 잠시 숨통 트인 것이지 결코 휴식 가운데 잠시 고난이 있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인간은 저주받아 마땅한데 주의 은혜로 잠시 수영 강습하는 것처럼. 수영 강습할 때 음-파-

 

숨쉴 때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숨 못 쉬고 병원에서 뭘 꽂을 때 우리는 재주 없는 게 아니고 원래 우리 모습이에요. 병원에 있을 때 밖에 있는 사람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죄 있는 놈은 튼튼하고 착한 사람은 왜 누워있느냐고 하잖아요. 마치 건강해야 당연한 것처럼 살아가는 이 교만, 주께서 은혜 주셔서 다시 마음을 낮춥니다. 하나님께선 겸손한 자라를 찾으시고 교만한 잘을 물리치신다. 백날 글자 써놔도 소용없어요. 우리는 사건 터져야 다시 한 번 잃어버렸던 주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이틀 치가 아니고 하루치만 있어도 과분한 조치인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현실을 확정지어야지요. 1번 공식은 주의 개입, 2번은 주의 개입의 목적은 가해자와 피해자, 3번 공식에서 우리는 그걸 보고 싶지요. 간단합니다. 유일한 역사의 구체화, 숨겨진 영적 세계가 역사와 만나는 접점 지점에서 나타나는 유일한 것은 피. 이걸 예수님은 아벨의 피에서 스가랴의 피까지 너희가 담당하리라. 아벨의 피, 스가랴의 피, 그 다음에 누구 피? 주님의피, 끝. 신천지에서는 이만희 자신의 지혜가 등장합니다. 이게 이단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피로 끝나야 되는데 자기가 보혜사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만희가 그런 소리를 할 때 교리를 이야기하는 줄로 생각하지요.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고 돈 내란 이야기에요. 결국은 돈과 결부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주님께서 하나님의 라이벌로 누굴 제시했습니까? 무엇과 무엇은 겸하여 섬길 수 없는 의식구조로 너희는 이 땅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느냐? 돈을 마다해요? 미쳤어요.

 

그래서 어떤 조사에 의하면, 조사니까 가설인데, 정신적 장애자가 암이 거의 없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 있게 전혀 없다는 거예요. 왜 지적 장애자는 암이 없을까요? 스트레스를 안 받으니까. 오뉴월의 개가 암 걸립니까? 오뉴월의 개는 칠월이면 사라지거든요. 그러면 유월 말쯤에 스트레스 잔뜩 받습니까? 아니지요. 결국 인간이 어떤 암에 걸리고 스트레스 받는다는 말은 오뉴월의 개가 되기 싫다는 말이거든요.

 

그걸 빗댄 유명한 최초의 근대소설이 있어요. 세르반데스의 [돈키호테]지요. 그게 왜 유명하냐? 세상은 미쳤다는 겁니다. 바짝 마른 기사가(이미 기사 계급이 날아간 이후의 시대에) 이미 구닥다리 기사가 풍차 돌아가는 걸 보고 적으로 간주하고 긴 창을 들고 나쁜 놈이라고 쑤셔댈 때 그게 왜 근대소설이 시초가 되느냐 하면, 인간의 모든 구조를 엎어버리는 겁니다. 조롱하고 놀리는 거예요. 위선을 까발리는 겁니다.

 

이것은 곧 신의 질서에 대한 인간의 과감한 도전입니다. 그때부터 나온 게 도전해야만 생기는 게 주체입니다. 반항하지 않으면 주체라는 게 없어요. 복지부동은 주체가 없어요. 물에 물 탄 듯이 되지요. 그러나 직장에서 바른 소리한다는 것은 내 목소리 내겠다는 것은 주체가 유지되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보기에 직장에서 주체 많이 과시하시지요? -자기 목소리를 많이 낸다는. 그게 주체라니까. 그게 근대사상이에요. 파묻히지 않겠다는 거예요.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끝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는 숨 막혀 못 살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네가 하지 말라는 겁니다. 네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누가 합니까? 아까 봤지요. 예수의 영이 그때그때마다 진짜 영적 세계에 있음을 주님 담당으로 시킬 때 시킨 대로 살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창세기 4장, 아벨 이야기 마무리 짓겠습니다. 아벨은 죽었지요. 제가 묻습니다. 승리자입니까, 패배자입니까? -승리자죠. 죽었으니까. 바로 둘 다 정답이 되는 이유가, 오늘날 우리의 삶의 현실이 두 가지 다 나올 때 이 사람이 성도입니다. 이게 안 나오면 성도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승리자다? 성도 아닙니다. 승리자라고 하면서 말꼬리가 미묘하게 떨리게 돼있습니다. “에이씨. 한 주먹도 안 되는데 성도니까 참는다.” 이것 자기 신앙 믿는 거예요. 이러면 안 돼요. “주여, 패배자 맞습니다. 주님 안에 승리자 맞습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그러니까 패배자입니다. 그래서 승리자입니다. 절대로 자기 위안, 변명하지 마세요. 바둑 져놓고 주의 뜻이라고 하지 마세요. 실력 없어서 진 거예요. 그런데 진 걸 인정할 때 승리자가 되는 거예요.

 

세상은 게임이에요. 도박판이고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세상 속에서 자기 존재를 승리자라고 구가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성도라고 해서 왜라고 하시면 안 됩니다. 그건 정말 주의 뜻을 모르는 거예요. 성도라도 똑같아요. 문제는 뒤늦게 깨우치는 거예요. 그게 바로 패배자가 비겁하게 변명하는 거다. 그걸 아는 순간 우리는 승리자 품속에 있는 거예요.

 

내 이야기 같은데 그게 아니고 신명기 9장에 나옵니다. 사람들은 비겁하게 변명하는데 변명할 필요 없어요. 돈 못 벌었다? 재수 없어서 못 벌은 거예요. 신명기 9장 4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은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복습합시다. 주의 말씀은 반복된다고 했지요. to부정사니까. 배운 것 응용해봅시다. 그러면 이 이야기가 그때 옛날 에피소드가 아니죠. 지금 현재 상황이지요.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이것 한 것은, 내가 기도 40일 해서 그렇고, 내가 주께 봉사했기 때문에 그렇고, 내가 열심히 심방 갔기 때문에 교인들 붙들고 있다고 했지요.

 

그 다음에 보면,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다른 말로 하면, 네가 성실함도 아니고 네가 신앙 좋아서도 아니고, “이 민족들의 악함을 안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쫒아내심이라”(5절) 그 뒤에 보게 되면,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6절)

 

그 뒤에 나오는 게 쉽게 말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이용했다는 겁니다. 감독은 주님이지 우리가 감독이 아니고 우리는 엑스트라였습니다. 따라서 제가 부탁합니다. 제발 착하지 마세요. 안 착합니다. 세상 사람들 욕하지 마세요. 그런 형편 되면 돈 떼먹어야 돼요. 꼭 사기 당한 사람이 사기를 쳐요. 그게 복수심이기 때문에. 그 사람한테 복수를 못하니까 암에 걸릴 지경이니까 다른 친구한테 되받아 사기를 칩니다. 해놓고 탓을 “주님이여, 저를 원망하지 마세요. 주께서 그렇게 했으니까 살기 위해서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물론 잘못된 걸 알지만 주께서 이해는 해주시옵소서.” 그런데 그건 주께서 이해해주시도 않고 원래 그 일을 해야만 하는 졸이었습니다. 졸이 기분 나쁘면 상으로 마로 승격시켜드릴게요.

 

사실은 창세기 4장하면서 세상 끝나는 방법은 이미 결론 났어요. 예수님 빼놓고는 다 가해자. 가해자인 걸 아는 사람이 주님의 성도. 1번 공식은,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의 개입함으로써 이 현실은 주님이 주인공이다. 2번은, 방법은 뭐였습니까? 피해자와 가해자를 예리하게 드러내게 한다. 3번은 그게 관념이 아니고 상상력이 아니고 실제로 구체적인 사건으로 나타나는데 그 사건이다, 그 사건이 아니라는 증거는 하나밖에 없다. 그게 피지요. 앞에 뭘 하나 붙이면 이해하기 쉽지요. 억울한 자의 피, 이것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다. 자진해서 하고 싶지는 않아요. 우리는 남한테 지는 것은 죽기보다 싫어하니까.

 

그래서 저는 이렇게 내 자신과 여러분을 위로하고 싶어요. 우리가 주님 때문에 피해봤다고 치자. 어떤 피해냐 하면 우리는 거룩하고 싶어요. 정말 우리는 착하다는 소릴 싶어요. 그 소리를 못 듣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피해자가 되는 거예요. 사기 안 치고 싶었는데 구멍가게에 제 때 돈 갚으려고 했는데 이사하느라고 경황이 없어서 두루마리 화장지 값 안 갚았는데 하필 왜 2년 뒤에 생각나느냐 말이죠. 본의 아니게 악한 자가 되는 피해를 우리는 날마다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피해 준 것도 있지만 주님한테 피해 본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좀 위로 되십니까.

 

5장 넘어갑시다. 4장에서 방정식이 확정됐기 때문에 더 이상 공식을 하게 되면 합쳐야 되기 때문에 간단하게 합시다. 주께서 개입했다. 피해자, 가해자가 갈라진다. 천당, 지옥 노선 확정되었다. 그다음에 천당 간 사람은 희생자가 피 흘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면 그 다음 이야기 전개는 어떻게 됩니까? 피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게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입니다. 피가 징검다리에요. 피를 찾으면 되는 겁니다.

 

그럼 목사님, 그 말을 찾고 싶습니다. 찾아드릴게요. 창세기 8장에 나옵니다. 20절,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기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뒤에는 읽지 않고 여기까지 제가 일부러 끊었습니다.

 

저주하지 않겠다는 말의 논리가 어렵기 때문에 묻고 답하는 식으로 하겠습니다. 저주하지 않겠다는 말은 애초에 저주거리가 없다는 말입니까, 저주할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까? 있습니다. 됐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 단계, 저주할 게 있는데 네가 착해서 저주하지 안 하겠다는 말입니까, 다른 걸 봐서 저주 안 하겠다는 말입니까? 다른 걸 봐서 저주 안 하겠다는 말입니다. 통과. 그 다음에 마지막 것, 그 저주하는 분이 멀쩡합니까, 피 흘려죽었습니까? 피 흘려죽었지요. 드디어 가해자, 피해자, 2번, 3번 공식 다 됐습니다.

 

주께서는 너, 구원받았다고 했어요. 우리는 감사합니다하고 다시 우리 일상으로 돌아가려는데 붙들고 하는 말이, 네가 3번 공식 받았으니까 2번 공식으로 가야 돼요. 가기 싫어도 무조건 끌어당겨요. 내가 가해자구나. 그런데 아무리 봐도 나쁜 짓을 한 적이 없어요. 다시 한 번 끌어당기니까 우리는 나만의 현실을 현실이라고 우기며 살아왔어요. 남들처럼. 나 잘되면 행복이고 못되면 슬펐어요. 이게 뭐냐 하면, 전체를 모르고 내 중심의 부분을 마치 전체인 양 그렇게 착각하며 살아온 거예요.

 

그런데 주님의 개입이 마지막 3번 공식에 의하면, 물어보지도 않고 피 흘렸어요. “피 흘렸구나. 나와 상관없네.” 하고 가니까 2번 공식이 멱살 쥐고 내려가 보니까 “네가 가해자야.” “왜 그러세요. 나는 예수님을 싫어한 적이 없습니다.” 1번 공식에 가보니까 나는 나밖에 모르는 그 자체가 엉뚱한 현실, 마귀가 준 현실을 현실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1번, 2번까지 왔는데 3번까지 못 간 사람의 예를 들겠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 그 사람은 영생 얻기 위해서. 영생 얻는다는 말은 소망의 철학이지요. 꿈이죠. 살기 힘드니까 멋진 세계를 유토피아를 그립니다. 영생 얻기 위해서 선하다고 소문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1번 들어왔습니다. 들어오면서 2번을 예상하고 자기는 착하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가해자가 아니라고 자부했습니다.

 

3번에 들어서면서 주께서는 그 당시에 피다운 요구를 한 거죠. 피 앞에서 누구도 자기 자신의 것을 가지면 안 되니까. 그 방식을 그 사람에 맞추어서 이야기하지요. 네 모든 것을 팔고 나를 따르라. 부자가 근심해서 3번까지 못 하고 2번까지 맛보고 돌아섭니다. 히브리서 6장의 이야기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맛보고 결국 피는 체험되지 못한 채 자기 체험에서 갈 데까지 가보고 다시 자기 세계로 귀환하고 말았어요. 주의 뜻이에요.

 

멋지게 주께서 활용했습니다. 제자들에게 “봤지?” 그때부터 제자들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 부자 청년이 만약에 열두 제자들을 후원해주면 재정을 염려 없겠지요. 그래서 하는 말이, “부자도 저렇게 가버리면 천국은 누가 갑니까?” 예수님이, “봤지?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지.” 불가능한 예를 너무 심하게 이야기했어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게 힘들다는 겁니다.

 

주님의 예에서 구멍이 나오지요. 구멍의 의미를 주님이 두 가지 용어를 합쳐서 사용했어요. 일단은 통과된다. 두 번째는 통과 못 된다. 첫 번째는 통과할 수 있다. 두 번째는 구멍 크기와 부합되지 않으면 어떤 것도 구멍은 허락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두 가지 양상이 다 포함된 겁니다.

 

제자들은 이걸 보고 제자들 상식에서는 낙타는 바늘구멍에 부합치 않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들이 아는 기준에 맞추어서 예를 들면서 불가능을 선포하니까 제자들은 오버하기 시작합니다. “주여, 우리 중에 아무도 구원받을 자가 없으니 어떡하면 좋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부자에 국한해서 이야기했는데 제자들은 그걸 알아듣고 확장시켜버렸어요. 누구도 아무도 통과할 사람이 없다는 것, 그만큼 제자들은 부자 되기를 소망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구원받으면서 평생 부자도 못되고 죽는다고 그게 아쉽다는 뜻이죠.

 

그러면 주여, 누가 구원됩니까? 주님의 답변은 간단했습니다. 어제 제가 한 이야기입니다. 아무도 구원되지 못한다. 아브라함, 엘리야, 모세, 아담, 아무도 구원되지 못합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유명한 말, 1번 공식입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느니라. 앞의 긴긴 이야기하고 난 뒤에 그 이야기를 했는데 사람은 그 긴 이야기는 생략하고 일부만 챙겨서 할 수 있단다. 이런 식의 이해는 제자들의 이해는 아니에요. 제자들 이해는 뭐냐? 충분하게 자기 속내를 다 드러내고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느니라.

 

그 다음에 제가 묻습니다. 제자들이 낙담했을까요, 즐거워했을까요? 정답은 낙담했다. 안 된데. 왜냐하면 인간은 성령이 올 때까지는 나의 실력만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밖에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그렇고 다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나밖에 믿을 수 없는 것을 고치는 게 아니고 주님의 구원에 훌륭한 소재로 사용함을 당할 때 그게 구원이에요. 그래서 구원은 소유가 아니고 관계입니다. 이런 못난 놈을 멱살 쥐게 하시는 성령의 손길이 그리스도의 영이에요.

 

따지고 보면 너무 쉬워서 놀랄 정도로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 되는데 되게 했다. 우리 성경공부하고 있습니다. 성경 공부한다고 절대로 구원 안 됩니다. 안 되는 줄 아신다면 구원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것 외워서 구원돼야지 절대로 그런 사람 구원 안 해줍니다. 안 되는 줄 알면서 하게 되면 구원한 사람입니다. 말만 내가 잘못이다. 되도 않는 말해서 미안합니다.

 

그래서 목사들의 목회는 도박입니다. 안 됩니다. 왜 안 되느냐고 강조하느냐 하면, 혹시 안 떠나거든 기적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설교 잘해서 붙어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주께서 임시적으로 붙여준 거예요. 저분은 우리 교인이다. 믿지 마세요. 내일 떠납니다. 고마운 줄 알아라. 이 설교를 듣도록 마련해준 것에 대해서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우리는 그만한 가치가 없어요. 주께서 졸과 졸을 만나게 해주신 것도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내일 나가면서 욕하더라도 어제까지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어제 떠나지 않고 오늘 떠나 준 것을 감사합니다. 어제까지 얼마나 기뻤는데.

 

목사님들은 교인들이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두세 사람만 있어도 주께서 함께 있다고 했잖아요. 내 이름으로. 노아가 여덟 명밖에 구원하지 않았어요. 방주는 크게 지어놓고 삼천 명 전세버스인데 달랑 탄 사람은 여덟 명. 운전사가 뒤돌아보면 기가 막하지요. 주께서 작업을 할 때 너무 허비가 많은 것 같아. 빈자리가 너무 많아서 노아가 꿇어앉았습니까? 그것도 여덟 명도 남의 식구가 아니고 자기 식구뿐인.

 

저는 개척교회 목사한테 이야기하고 싶어요. 자기 있고, 마누라 있고, 딸 있지요. 세 명이잖아요. 목회 성공하신 겁니다. 심지어 사모가 복음 알게 되면 이건 잠언서 말씀 그대로입니다. 여호와께로 온 아내에요. 지혜로운 아내, 복음을 아는 아내는 여호와께로부터 왔다. 주의할 것은 복음 아는 아내가 언제까지 갈 것인지 남편은 짐작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주께 맡기세요. 계실 때까지만 아내고 떠나면 남남입니다. 지금 붙어있어 주는 것만 해도 고맙게 여기고 감사해야 됩니다.

 

그 뒤에 마저 봅시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그 뒤에 제가 말하지 않겠습니다. 일단 괄호를 치시고 괄호의 내용을 여러분이 문장으로 써보세요.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그 다음에 들어갈 말이, ①인간은 이제는 정신 차렸기 때문에, ②때려죽여도 정신 못 차릴 인간이기 때문에, 어느 게 맞습니까? 2번입니다.

 

20년 전에 대구 삼익뉴타운아파트에서 40대 주부들 모아놓고 성경공부하면서 이 이야기했더니만 그들이 깜짝 놀랐어요. 세상에 성경에 그런 말이 있느냐? 보니까 있거든요. 저들은 예상은 이렇게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은혜를 베풀었으니까 이제는 보답을 해야지. 자기들은 이렇게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내가 너희를 저주하지 않는 이유는, 네가 어릴 때부터 모든 것이 악하기 때문이다. 설마 그 문장이 뒤에 붙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는 겁니다. 그때부터 성경공부하면서 했던 교재가 모여서 나온 책이름이,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입니다. 그 책을 완성한 역사가 10년이 넘었습니다. 한 자료도 버리지 않고 모아놓았더니만 그렇게 됐어요.

 

 

-그런데 그걸 다하셨네요?

 

다 못했지요. 제가 그랬잖아요. 항상 임시적이라고. 그리고 있을 때 감사하라고. 정말 여러모로 감사했습니다. 그것이 연줄이 되어서 그분들 없어지고 신학생들 왔고 그분들 사라지고 연줄로 다른 데서 오고. 그렇게 해서 차곡차곡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는 요한계시록까지 마감이 될 수 있었어요. 나중에 뒤돌아보니까 마치 아침에 닭이 가고 난 뒤에 그 자리에 계란이 있는 것처럼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가 계란처럼 있는 거예요.

 

 

-그거는 책으로는 안 나왔나요?

 

못 냅니다. 제가 쓴 게 아니라. 왜냐하면 참고도서가 나와요. 제가 그 중에 베낀 것도 있고. 기껏 편저라고 하는데 편집한 내용이 10%도 안 되지만 어쨌든 간에 편저기 때문에 제가 저자로 낼 수가 없어요. 필요하면 복사하면 돼요.

 

 

9장에 봅시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왔지요. 그야말로 그 시대에 새 하늘과 새 땅이지요. 이제는 선원생활 그만하고 땅에 나가 농사지면 되겠지요. 그런데 피를 잊어서는 안 되거든요. 그래서 피를 집어넣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됩니다. 그게 창세기 9장 5절에서 6절이에요. 제가 공식에서 3번에서 피라고 했지요. 그러면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는 이미 정답이 나왔지요. 피만 찾아가면 된다. 이근호 당신 주장이 아니냐? 아니에요. 아벨의 피에서 스라랴의 피로 그 다음에 예수님의 피로 요한계시록에 그 피로 말미암아 하얗게 입었다. 그러니까 성경은 예수님 자체가 세운 징검다리의 행렬이거든요. 피만 발견하면 되는 거예요. 피를 따라가면 돼요. 그걸 고난만 애매한 선지자의 억울한 죽음만 따라가면 돼요.

 

물론 그것 이야기한다고 교회 부흥되지는 않습니다만 진리를 그래요. 그러니까 수사극에 보면 범인이 총 맞고 도망갈 때 수사관은 뭐만 따라가면 돼요? “형사님, 피가 여기에. 피가 여기서 멈췄습니다.” “그래? 이 근처에 있겠구먼.” 그 피가 하늘나라까지 올라가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하늘나라는 어린양의 보좌라고 합니다. 죽었던 분이다. 너희들이 피 흘리게 하신 당사자가 지금은 주가 돼있다.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는 간단하지요. 연필에 심이 있지요. 심지를 못 찾아내면 성경 만 독해도 소용없어요. 그 심지는 피로만 만들어졌어요. 피로만 이어지게 돼있어요.

 

피라는 것이 너무 엽기적으로 들리니까 ‘죽음’으로 바꾸면 안 되겠느냐고 하지만 죽음으로 바꿀 마음이 없어요. 죽음에는 여러 가지 죽음이 있어요. 자살이 있지요, 순교 있지요, 타인의 죽음 있지요. 이러면 복잡하게 돼요. 사람들은 죽음도 듣기 싫어서 이걸 ‘희생’으로 바꾸었어요. 희생으로 바꾸면 갑자기 세상적인 도덕, 윤리가 돼요. 부처도 희생했어요. 소크라테스도 악법도 법이라고 지키기 위해서 희생했지요. 복음은 날아가고 어느새 완전히 인간 중심이 되잖아요.

 

피라고 하면 오직 한 분의 피지만 죽음으로 되면 다양한 죽음이 되니까 테레사 수녀의 죽음, 울지 마 톤즈, 갑자기 영웅이 되는 거예요. 주님의 정신으로 희생했다. 손양원, 주기철, 메시아에 왜 그렇게 많아요. 도대체 어느 이름을 불러야 됩니까? 테레사 수녀를 만약에 원하면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따라잡을 수 있어요. 그러나 아무도 이미 확정된 죄 없는 어린양의 피는 그분만으로 좀 스톱시켜주시고 다른 분은 죄인으로 그냥 남아주세요. 괜히 스트레스 받지 말고.

 

피가 반도체 칩처럼 삽입이 됩니다.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피가 삽입이 되면서 피 중심으로 피로 소환시키는 피에서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 능력이 새로운 현실의 무늬, 물결치듯 피 중심으로 물결이 파동을 일으키면서 세상은 숨겨진 피를 소환하는 쪽으로 세상의 모든 일이 벌어지는데 그것을 실재 현실이라고 되는 겁니다.

 

이걸로 창세기 끝냅시다. 사실은 이걸로 성경의 중심사상은 끝난 거예요. 피 묻은 징검다리로 그 피를 언약이라 합니다. 언약을 펴보면 안에 어린양 피 있다. 새 언약은 십자가에 들어있다. 그게 성경 중심입니다.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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