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미국동부오전e 본문
20140926 미국동부오전e
(강의:이근호 목사)
여러 번 했으니까 간단, 간단하게 핵심만 집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만 앉아 있어도 이해되도록 해드리겠어요. 창세기 4장, 형이 동생 죽였다. 간단한 이야기에요. 가인이란 이름도 외우기 싫어, 아벨이란 이름도 외우기 싫어. 그냥 간단하게 봅시다. 형이 동생 죽였다. 성경이야기지요. 아니면 아니라고 하세요. 맞지요.
두 번째, 인간들의 반응은? 나는 안 죽였어요. 성경을 보면서 형이 동생 죽였다는 이 말은, “그래. 가인 성질 더럽네. 아이고, 다행스러워라.” 아직도 내 동생은 아직 살았어요. 나는 안 죽였어요. 그러니까 성경이야기가 남의 이야기 돼버리죠. 가인이 동생 죽였어요. 설교자가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앉아있는 교인들이, “목사님, 저는 안 죽였어요.” 그러니까 말씀 앞에서 자기 정당성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말씀은 들었는데 성경 세계에 잠입하는 데는 실패한 거죠. 형이 동생 죽였다. 남의 이야기네. 나는 안 죽였으니까. 옛날의 에피소드로 그때 그런 일이 있었었지. 남의 이야기에요. 내 이야기 아니에요. 나는 안 죽였으니까.
주님께서 성경 속에 교인들을 집어넣기 위해서 산상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다. 네 번째는 여러분한테 의견을 묻습니다. 산상설교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죄다. 그 다음에 반응이 재미있지요. 어떻게? “나는 안 미워했습니다.” 나는 동생을 안 미워했습니다. 여전히 자기 세계는 확보되는 거예요. 설교자들이 설교하면서 앉아있는 교인들 모습이 예민한 설교자의 눈에는 들어와요. “목사님, 저 건드리지 마세요. 저 그런 나쁜 짓 안 했어요. 저한테 회개 강요하지 마세요.” 이런 식으로 점점 더 딱딱하게 자기 토치카 속에 숨어들어가요. 그럼 여기서 포기하실 주님이십니까? 아니지요.
다섯 번째, 이건 예를 들겠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형은 동생을 안 미워했지요) 그런데 아버지 돌아가시기 직전에 동생에게는 부동산을 남기고 형한테는 빚을 남겼어요. 그 순간 형이 동생을 미워하겠어요, 안 미워하겠어요? 미워할 수밖에 없지요. 이제는 동생이 좋아하는 축구도 미워. 동생의 친구들, 동생이 좋아하는 노래도 미워. 사람의 특징이 누가 밉기 시작하면 그 사람과 연관된 모든 것이 미워요. 가인과 한 핏줄이었습니다. 성경 속에 안 들어가려고 그렇게 몸부림쳤건만 주님께서 이렇게 유발하셔서 이미 성경 안의 세계에서 새삼스럽게 들어오고말고 마시고 할 것도 없이 성경이란 보자기가 우리를 덮어씌웠습니다.
첫날 오후강의 때 이런 이야기했어요. 지금 현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했지요. 그 이야기에서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사람들은 지금 현실은 이렇게 돌아간다고 했는데 자기 코앞에 자기 일이 전부인 줄 알고 성경의 현실은 시큰둥하고 들으나마나가 돼버린 겁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이야기하면서 부분적이고 뭐고 전체를 보시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누가복음으로 시작한다고 했지요. 해도 피곤하고 나도 피곤해서 그랬지만.
사람이 고민, 걱정, 전체를 보게 되면 고민, 걱정거리가 안 되는데 너무 그동안 개인적인 자기 일에 승부를 거니까 그 옆에서 하는 일을 몰라요. 이것 실패하면 죽고, 이것 성공하면 살겠다는 자기가 설정한 그 현실에만 모든 것을 거기에 올인해버렸어요.
예수님께서 어떤 제자를 불렀을 때 그냥 따라가면 될 텐데 그 제자가 하는 말이, “예수님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나 일단 아버지 장례는 치러야 이것이 자식 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라고 그는 상식에 의거해서 정당한 답변을 했을 때 예수님의 답변은 너무나 매정했습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장사하고, 요새 같으면 보람상조에 맡기라는 거죠. 너는 나를 따르라.
그러니까 아버지 장례식에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한테 한 수 배운다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네 인생은 끝났고 내가 접수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너는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접수 당하기는커녕 내가 뭔가 모자란 것을 예수님한테 한 수 배워서 내 것을 윤택하게 살찌우려는 목적으로 주님한테 한 수 배워봐? 이런 식이 있는데 그런 것은 제자답지 않다는 것을 주께서 그런 일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또 한 가지를 예를 들면 오병이어 사건에 떡 먹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왔지요. 홱 돌아보시면서 “왜 따라왔지? 너희가 따라온 이유를 알려줘? 너희들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지. 반박 못하지. 맞지?”라고 지적하신 거예요. 그런데 그 지적을 듣는 사람들은 매우 억울합니다. 떡을 누가 제공했습니까? 떡을 주셔서 주신 떡 맛있게 먹지 거부할 이유가 없잖아요. 떡을 먹고 배부르단 말이죠. 그래서 앞으로 저분과 함께 있으면 경제난은 해소되겠고 싶어서 따라왔는데 먼저 제공해놓고 고맙다고 붙들려고 하니까 이제 와서 딴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희가 따라온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지, 그지?” 이 사람들이 뭘 잘못했는데? 떡 먹는 것도 죕니까? 주신 떡 먹는 것도 죄에요?
주신 떡 먹는 것이 죄가 아니고 죄를 생산하기 위해서 떡을 주셨지요. 나중에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알지요. 어제 이야기했잖아요. 우리는 죄의 생산 공정기라고요. 하지만 인간들은 자기 주체의 확대에 있어서 어떻든 간에 정당화, 자기 의를 유지하고 싶어 하지 나는 죄 만들어내는 기계라고 자진해서 신고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세무신고도 안 하는데 그런 걸 신고해요. 세무신고 자진해서 합니까? 그래서는 사업 못하는데.
하여튼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종잡을 수가 없어요. 종잡을 수 없는데 여기서 공식을 해봅시다. 이 정도 했으면 공식 낼 때가 됐어요.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아벨 죽인 것으로 공식을 만들어봅시다. 사건 유발자는 예수님이고 성경 밖에 있는 자들을 성경 안으로 합치시키기 위해서 사건을 유발했다고 보면 돼요. 이 말은 인간이 알고 있는 현실은 너무나 일방적인 자기 위주의 현실이라면 그건 가짜 현실이고, 진짜 현실은 성경이 소개하는데 사람들은 성경에 나타난 현실이 자기 구미에 안 맞는다고 자기는 따로 놀겠다고 할 때 사건을 유발시켜서 강제로 현실 속에 우리를 집어넣는 일을 지금도 주님이 하십니다.
하다보니까 길게 했는데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주께서 만드신 현실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게 공식이죠. 그걸 더 정리하게 되면 여러분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여러분 뜻대로 일어난 게 아니고 주의 뜻대로 일어난 겁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공식 간단하지요. 모든 것이 주의 뜻대로.
찬송가에 나오지요.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주님한테 요청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행하시라고 한다고 행하시는 게 아니거든요. 이미 행하고 있는 것을 내가 뒤늦게 수용하게 하옵소서. 내 발톱이 아픈 것도 내 일이 아니고 주께서 일으킨 일인 것을 내가 뒤늦게 회개하고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그래서 온 천지가 주의 뜻으로 싸라기눈이 내리게 하옵소서. 눈 떠보니까 온 천지가 하얀 눈밭이 되는 것처럼 눈 떠보니까 온 천지가
제가 집사님 보니까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이라고 돼있어요. 이건 찬송가에 나오는 건데
-옛날에 붙여놨어요.
그런 변명할 줄 알았습니다.
주님만 섬기면 주님이 대상이 되잖아요. 그런데 어떤 아는 집에 가니까 딱 한 마디였어요. “다 이루었도다.” 그것도 길었던지 그 다음 달에 가보니까 한 자였어요. “끝” 당황하지 말고 탁, 끝. 그 집사님은 딱 한 자에요. 끝. 이걸 예수 안 믿는 자식들 보라고 화장실에 해놨는데 자식들은 이게 무슨 선문답도 아니고 불교의 도 닦는 것도 아니고, 딱 한 자에요. 끝.
내가 아닌 다른 분이 만든 현실 속에서 다 이루었다에 참여된 사람, 이 지경, 이 모습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는 그렇게 아름답게 보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장에 내 기뻐하심을 입은 자라. 네가 하나님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너를 내가, 하나님의 기쁨에 의해서 구원됐다는 것이 누가복음의 복음의 소식입니다. “내가 기뻐서 하니까 너는 네 인생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내가 기쁘다잖아. 네가 기쁜 게 아니고. 네 일이 아니고 네 일은 없어. 널 구원하는 것은 내 일이야. 왜 걱정해. 네 일도 아닌 것을.” “주여, 지옥 갈 것 같습니다.” “네가 걱정하지 마. 그런 염려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나만 믿어. 네 안에 나 있어. 예수 안에 네가 있는 거야.” 이렇게 나가시죠. 이게 첫 번째 공식입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창세기 4장에서 두 번째 공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파호, 어떻게 집어넣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자기중심의 잘남을 유지하는 현실밖에 몰라요. 코앞의 현실밖에 없는데 대단한 고집이거든요. 그래서 베드로가 하는 말이,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베드로가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예레미야도 이야기했고, 욥도 이야기했고 엘리야도 이야기했습니다. 차라리 이럴 것 같으면 죽어버리겠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요나. “주여, 동업자끼리 왜 이러십니까? 사십일 만에 망하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이왕 망할 것 나는 다시스로 빠지겠습니다.” 그런데 마침 배가 있어서 이것도 주의 뜻이라고 해서 배 타고 갔는데 도중에 배를 뒤집어버리지요. 심청이처럼 물에 빠지잖아요. 그리고 난 뒤에 전했는데 자기는 산에 가서 팔짱끼고 구경한 거예요. 유황불이 언제 떨어지는지. 사십일 됐는데 아무 소식이 없는 거예요. 완전히 자기는 거짓말쟁이가 돼버렸어요. “왜 주님은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동업자끼리 사업 이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하청업자가 지금 난처하게 됐습니다. 뭐합니까? 분명히 사십일 되면 망해야지요.” 안 망하거든요. “이래선 일 못합니다.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깊은 뜻은 이거에요. 요나의 모든 모습은, 북 이스라엘이 그 당시 갖고 있던 신앙적 태도를 요나를 통해서 대표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요나는 니느웨 선지자가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니느웨를 가든, 다시스를 가든, 이스라엘을 변화시키기 위한 이스라엘 선지자입니다. 니느웨 회개했다고 해서 니느웨가 안 망했습니까? 몇 십 년 지나서 바벨론한테 망해버려요. 그러니까 바벨론을 우회해서 북이스라엘을 회개를 통째로 하게 하는 방법으로써 멸망돼야 될 니느웨를 잠시 회개케 해서 도대체 이스라엘의 신앙상태가 어떤지 우회적으로 촉구하는 말씀이 바로 요나서입니다. 전도나 선교에 관한 내용이 아닙니다. 선교단체에서 요나 이야기하는데 그건 해석 잘못한 거예요. 선교단체치고 요나 언급 안 한 곳이 없어요.
-니느웨의 모습이 바로 이스라엘의 모습이라는 그걸 알려주시기 위해서
본 자손은 회개 안 하고 분명히 이스라엘 보기에 이방인이고 멸망 받아야 마땅한 그들이 회개하는 걸 봐서 얼마나 그들이 부끄러우냐 말이죠. 자기 엄마가 김밥 싸니까 아들이 오해해서 오늘 맛있는 김밥 먹겠구나. 했는데 점심 때 고아원에 줘버리는데 누가 기분 나빠요? 본 아들들이 기분 나쁜 거예요. “엄마, 김밥 좋아하는 걸 뻔히 알면서 그걸 왜 주십니까?” “네가 전에 김밥 말아줄 때 감사했나?” “아니요. 당연하다고 여겼지요.” 바로 그게 문제인 거예요. 은혜 너무 주다보니까 이건 마땅히 늘 오는 줄로 착각한 겁니다.
여러분 주기도문 외울 줄 알지요. 외울 줄은 아는데 문제는 주기도문을 제대로 생각하게 되면 세상의 모든 사업이고 가정 문제고 그건 고민거리가 되질 않습니다. 왜? 거기에 보면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는 두 달 치 없다고 닦달하는데 주께서는 정작 네가 기도할 내용이 두 달 치가 아니고 내일치가 아니고 알약 먹고 죽듯이 하루치만 달라고 해야 될 위치가 정작 네가 은혜를 발견할 위치가 그 자리밖에 안 되는데 우리는 일용할 양식 정도는 늘 확보되어 있으니까 우리는 욕심을 내면서 욕심 아닌 줄로 착각하며 사는 거예요.
그리고 저에게 이런 시비 거는 사람이 많았어요. 이 목사는 맨날 죄, 용서, 그것밖에 모릅니까. 그건 기초가 그 이후의 이야기는 왜 안 하십니까? 그것 말고 다른 이야기도 해야 되지 않습니까? 왜 자꾸 그것으로 돌아오느냐고 하는데 저는 이렇게 해요. 주기도문 다시 보세요. 일용할 양식 주옵시고, 그 다음에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죄와 용서가 끝이에요. 그게 출발점인 동시에 회귀점이에요.
용서 받은 은혜 같으면 우리가 세리, 강도, 창기가 돼도 할 말 없습니다. 지금 당장 죽인다 할지라도 왜 죽이느냐고 우리는 거기서 반항하면 안 돼요. 하루치인데. 일용할 양식이잖아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틀 치 양식을 주옵시고, 이런 주기도문은 유사품입니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 없고 죄 용서 빠지면 그건 주기도문이 아니에요. 주기도문의 확장이 일반 기도거든요.
일반교회에서 장로들이 대표 기도할 때 쓰는 상투적인 용어가 뭡니까? 당회로부터 어린아이까지 남북통일까지 온 천지 다 돌아다니고. 옆의 교회 크게 해주시고 이번에 땅을 위해 기도하는데 빨리 땅값 오르게 해주시고, 계약했는데 저쪽 주인이 갑자기 개과천선해서 교회가 산다면 그냥 드리겠다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온갖 것으로 포장을 하잖아요. 진짜 우리는 그런 기도를 할 수밖에 없어요. 코앞에 있는 걸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놓고 뒤에 뭘 붙이세요. 제가 요령 가르쳐드릴게요. “주여, 이런 죄를 용서하옵소서.” “남편이 아직도 교회 안 나오고 있습니다. 술 먹고 있습니다. 주여, 남편이 개과천선해서 부부가 같이 나와서 온 교회에 모범이 되게 하옵소서.” 하고 뒤에 뭘 붙인다? “주여, 이런 욕심을 부린 저희를 용서하옵소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시고 바로 강청 기도를 말씀하시잖아요.
그렇죠. 그것은 바로 주기도문을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네 길을 경유해서 다시 오라는 거예요. 그리고 주기도문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성령이 오고 난 뒤에 우리 뜻 말고 예수님의 성령이 하는 기도가 따로 주어집니다. 그 기도가 주님의 고난으로 탄식하는 기도로 옵니다. 로마서 8장이지요. 너희는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그 다음에 너희를 위하여 내가 기도해서 기도 응답대로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다 하시느니라. 이 모든 것은 우리 기도의 응답이 아니고 누구의 기도의 응답입니까? 택한 자를 위해서 기도했던 성령의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분은 아버지 뜻을 아시나니.
로마서 8장에 그 이야기 나오기 전에 하는 이야기가,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제가 어제 저녁의 블로흐의 소망철학 했지요. 보이는 소망은 소망 아닙니다. 애굽에서 끌어 모은 소망은 우리 소망이 될 수 없고. 그럼 뭘 소망하느냐? 모르지요. 우리는 경험한 것만 소망하니까. 경험 되지 않은 소망이 미래에서 현재로 찾아오는 거예요. 그거는 시간론인데 그걸 이야기하면 너무 어려워요. 보통 과거-현재-미래로 가는데 미래에서 우리를 낚아채는 식으로 찾아오는 식으로 현재 속에 미래가 미리 와있는 것, 이런 용어가 참 어려운 용어에요. ‘선취’라고 합니다. 미리 와서 취하는 거예요. 낚아채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에 이런 게 있습니까?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4~6절에 나오고 로마서 8장에 도 나옵니다. 에베소서 2장을 볼까요? 진도 나간다고 좋은 게 아니니까. 정리할 것을 정리합시다. 로이드 존스는 이것 해석한다고 아주 고생, 고생해요. 에베소서 강해에서 해석이 안 되고 있어요.
에베소서 2장 5절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놀라운 사실은 6절에 보면 더 기절초풍할 구절이 나와요.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와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로이드 존스가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청교도신학, 개혁주의신학에서는 역사는 미래에서 완성되는 것이지 미래로 표현돼야 되거든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미래가 아니고 과거완료가 돼버렸어요. 어떻게 설명할 거예요? 인간이 갖고 있는 시간의식으로 이걸 해석할 재주가 없네요. 인간의 미래는 아직이에요. 이미 된 것은 already not yet 될 때만 우리가 납득이 되는데 성경은 이미 되어버린 것으로 되었어요.
신학교 때 고민되데요. 저도 고민했어요. 강단에 못 선다. 전도사로서 설교 못한다. 미치겠다. 이건 모르고 숨겨놓고 넘어가면 불안정한 표정이 설교할 때 교인들에게 포착이 돼요. “목사님 이야기가 틀린 말은 아니데 왜 그렇게 불안하지, 뭐지? 뭘 감추고 있는가?” 혹시 이런 질문 쑤시고 들어올까 봐, 그런 것 저한테 묻는 게 아니라고 이런 식으로 할까 봐, 지금 그 설교자는 교인들과 상대했지 교인들 속에 함께 있는 두세 사람과 함께 있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자기 고백을 못 토해놓는 거예요. 주님 빼고 무식한 인간들 가르치는 스승 행세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 앞에 고백하는 게 아니고. “주님 주셨잖아요. 이런 믿음을.” 이게 아니고, “한 수 배워.” 이렇게 되면 학원이 돼버립니다. 주산 학원이든지, 태권도학원이든지.
심각해요. 이건 남의 문제가 아니고 나의 개인적인 문제인데 도서관에 가지요. 선배들밖에 없으니까. 루터, 칼빈, 벌코프, 자유주의고 그 대목에 주석 책들이 많잖아요. 이것 베끼고, 저것 베끼고, 서로 베끼고. 베낄 때 글자도 틀리게 베끼기도 하고. 이게 주석이야. 남한테 틀렸다는 소리 안 들으려고, 이단이란 소리 안 들으려고 믿을만한 것만 골라서 베낀 거예요. 완전히 논문 베끼는 것과 똑같아요. 아무도 해결 못한 거예요. 그렇지 로이드 존스만큼은 해결했겠지. 청교도로 유명하니까. 없어요. 중구난방, 횡설수설이라. 설교가.
어디서 찾았는가? 오스카 쿨만(보수에서는 자유주의자라고 하는), [그리스도와 시간]이란 책이 있어요. 세계기독교사상전집에 나오는데. 우리는 신학교 다니면서 시간을 언급한 적이 없어요. ‘믿으세요’라고 했지 시간 자체가 뭐냐는 불편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가만 보니까 우리는 너무 성급했어. 나는 문제없고 나는 순수한 경건심으로 성경 본다고 착각한 거예요.
사실은 내가 갖고 있는 노림수가 있었는데 마치 없는 것처럼 나는 어떤 노림수도 없고 경건으로 성경에 다가선다고 착각했어요. 그런데 나중 알고 보니까 성경이 그것을 노출시켜요. 나도 모르는 그러한 노림수를 얄팍한 수를 노출시키는 쪽으로 말씀 자체에서 움직이고 활동한다는 겁니다. 말씀은 살아서 움직여서 나를 발가벗은 채로 드러내는 이것이 성경 자체의 고유의 활동이다.
데살로니가후서에 그런 말씀 나오지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칭찬하면서 너희들이 나의 말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로 들으니 정말 그러하도다. 분명히 사도 이야기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사적인 견해로 받는데 그들은, 사도 바울은 우편배달부고 소포 내용이 중요하니까 우편배달부한테 절할 필요는 없고 예수님께서 사도에게 뭘 전달하는가? 그걸 받으면 사도가 전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향하여 전한 걸로 받으면 그게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나는 사도 편, 나는 바울 편, 나는 베드로 편 그건 성립이 안 됩니다.
거기에 보니까 to부정사입니다. to부정사는 동사로 명사나 대명사 역할을 하는 겁니다. 명사화 되면 시간 요소가 날아가지요. 한국말로 하면, ‘의로움이 되었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시간 요소는 다 빠지고 2013년 의로움 되었음, 2014년 의로움 되었음, 2015년 의로움 되었음, 주님 재림할 때도 너는 애초부터 이미 의로움이 되었음.
그래서 도대체 to부정사 용법이 과거완료에 해당되는 히브리 용어로 썼는데 그렇다면 일반언어학에서는 어떤 때 쓰느냐? 동사를 동결시키면 명사가 돼요. ‘비가 오고 있다’를 동결시키면 ‘비가 왔음’이 됩니다. 또는 다른 말로 그냥 비. It's raining. 하나에 사물 대하듯이 붙을 수가 있는 거예요. 그걸 보고 제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행함을 자랑질 못해서 환장을 사람이거든요. 행함은 동사에 속해서 명사에 속해요? 행함은 동사잖아요. 뭔가 행해서 더 얻어낼 걸 생각하거든요. 재롱을 부려서 내가 원하는 걸 받아내려고. “주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러거든요.
그런데 예수 안에서는 동결, 냉동상태에 들어가 버린 겁니다. 냉동상태는 얼음이 아니고 반복이에요. 주께서 하신 일의 또 주께서 관여하셔서 또 반복케 하시는 겁니다. 어제도 주께서 잠자고 있는 가운데 수염을 자라게 하셨어요. 오늘도 자라게 하셨어요. 이게 뭐냐? 반복입니다.
이걸 간단하게 정리합시다. 우리의 행함은 보다 발전을 기대하면서 과거-현재-미래로 달려가는 지향적인데 주님께서는 이미 완료된 동결된 확정 내에서 스프링처럼 그 자리에서 튀면서 이미 너희 자리는 시간에 따라서 변동될 자리가 아닌 것을 반복을 깨닫고 느끼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 어제 주기도문과 오늘 주기도문이 달라진 적 있습니까? 아니지요. 어제도 “주여, 우리의 죄를 사해주옵소서.” 오늘도 “주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그러면 주님께서 화를 내면서 “어제 용서받아놓고 또 용서해달라고 하느냐? 좀 발전 좀 하라고 주님께서 닦달내십니까?” 없지요.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언제까지 찡찡대고 있어 이틀 치 양식을 달라고 해.” 이렇게 요구하십니까? 아니지요.
-그럼 자람 자체가 반복의 연속이네요? 발전이 아니고.
자람, 이걸 아주 쉬운 말이 있어요. 주님의 은혜의 구현 또는 구체화. 구체화와 구현을 합쳐서 발현됨. 발현됨의 가장 좋은 예가 옛날 국민학교 때 겨울 되면 소사가 교실마다 넣잖아요. 그러면 당번이 일찍 와서 나무를 넣게 되면 시커먼 쇠 난로가 발갛게 발현되잖아요. 그냥 피어오르지요. 그렇다고 쇠가 쇠 아닙니까? 우리 육이 육 아니에요? 우리는 여전히 이기주의입니다. 우린 육밖에 몰라요. 그런데 육밖에 모르는데 생소하게 발갛게 그리스도 은혜가 죄와 더불어 같이 나올 때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그게 to부정사고 하늘에 이미 앉히시니. 그리고 로마서 8장에는 이미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할 것이라고 하지 않고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누가 너희를 주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십자가 사건이 이순신 장군 사건처럼 고정된 게 아니고 지나가면 끝나는 게 아니고 그것이 지금 역사를 움직이는 역사를 반복시키는 유일한 중심체가 되는 겁니다. 어제도 십자가, 오늘도 십자가. 사도 바울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사도 바울이 십자가가 나와 함께 못 박혀 죽었다고 할 때 이미 십자가 사건 지나고 난 뒤에 대략 15년 후입니다. 그런데 그때 십자가 진 사람은 예수님과 양 쪽의 두 강도밖에 없어요. 아무도 십자가 진 적 없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누가 포개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할 때는 이건 누가 봐도 십자가에 사도 바울도 함께 포개졌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역사적 사건으로 고고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말합니다. 성령 안에서는 나에게 일어난 일이 너희들에게 일어난 게 맞지요? 맞는다면 성령 받은 사람이고 모르겠다면 육에 속한 사람이고.
이게 창세기 4장을 봅시다. 창세기 4장에서 공식 하나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한다. 첫 번째 공식, 저는 동생 안 죽였다고 하지 마세요. 미워하는 것도 살인자입니다. 우리는 동생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으로 몰아넣으면 동생을 미워할 수밖에 없게 만들지요. 가인을 동생을 미워하는 게 평소의 취미였습니까? 아니었지요. 그런데 동생을 미워서 죽이게 된 것은 하나님이 일부러 개입했잖아요. 모처럼 제사 드렸는데 받지 왜 안 받아요? 가인이 동생을 죽이라고 요청한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첫 번째 공식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성경의 현실이 나의 현실을 대체해서 진짜 현실은 성경 속의 현실밖에는 없다. 하나님의 관여로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제가 중국에서 강의할 때 이렇게 했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인용했어요. 그게 뭐냐? 거울 속. 거울 앞에 서면 내 모습이 비추지요. 놀라운 사실은 내가 섰는데 다른 사람이 등장하게 되면 이건 기절초풍합니다.
제가 어제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호텔에서 잠을 자는데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불을 켜면 가족들이 깨니까 배려하는 차원에서 불을 켜지 않고 몰래 나가는데, 저는 화장실 입구에 전면 거울이 있다는 것은 이 호텔이 처음이거든요. 여러 모텔에 가도 이런 게 없었거든요. 뭔가 희미한 가운데 괴물이 등장하는데 평소에 주를 사랑하는 자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지요. 갑자기 가슴이 내려앉고. 누구야? 가만 보니까 내 모습이 괴물인지 알았어요.
거울 앞에 서면 항상 선 사람의 모습만 보여줍니다. 이게 상식이죠. 그런데 거울 앞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상당히 위기를 느낍니다. 거울보고 합니다. “거울 안에 계시는 아저씨, 내가 어떻게 하면 이쪽에서 그쪽으로 건너갈 수 있습니까?” 이게 말이 안 되지요. 불가능이지요. 주께서 개입하시면 건너가게 해주십니다. 건너가지 않으면 구원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육이고 영에 속한 사람은 영이에요. 니고데모는 걱정이에요. 어떻게 육에서 영으로 건너갑니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못 건너간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육에서의 아이디어가 뭐냐 하면, 자기가 과거만 기억하잖아요. 엄마 뱃속으로 갔다가 태어나면 비로소 존재하는 경험을 했잖아요. 그래서 그 수법을 또 쓰겠다는 거예요. 엄마 뱃속에 갔다가 다시 나오면 되느냐고 하니까 그것은 육에서 제자리 뛰기밖에 안 되죠. 육의 방법으로 육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습니다. 안 된다는 이야기죠. 하늘나라는 볼 수 없다는 이야기죠.
그러면 하늘나라에 간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 영의 반복에 의해서 육이 영으로 들어가면 되지요. 그러면 그 일을 보여주옵소서 하니까 이미 보여줬잖아요. 네가 땅에서 일어난 일도 모르고 어떻게 하늘의 일을 생각하느냐? 땅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모세가 놋뱀 들었잖아. 요한복음 3장 이야기가 계속 됩니다. 모세가 놋뱀 드는 이야기가 네가 보기에는 육으로 보이지? 왜? 놋뱀 사물체지, 모세 인간이죠. 그런 지팡이 있으면 나도 들겠다. 하지만 그게 영적인 거예요. 영적인 일이 이 땅에 사건을 일으키면 어찌 그리 육적으로 보이는지. 그러니까 못 믿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내가 이 땅에서 십자가로 죽을 때 사람들은 에서라는 어떤 청년이 죽은 줄 알았지요. 그것이 모세가 놋뱀 드는 것처럼 영적인 일인지 모르고 육속에서 어제도 말씀드린 것처럼 죄는 죄로 해결해줘야 됩니다. 죄 속에서 해결책이 있다니까요. 화장실에 휴지 없으면 화장실 안에서 찾아봐야 돼요. 없는 데서 나와요.
우리가 예수님에게 창을 찔러 상처를 냈잖아요. 상처는 상처를 통해서 해결되는 겁니다. 뒤에 독일약이 있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 지고 따라 갈 때 그게 해결책이에요. 주님께서는 죽으라는 이야기구나. 살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애당초 성립이 안 되는 말이구나. 주여, 저를 살려달라는 질문은 애당초 해서는 안 되는 요구를 한 거예요.
“이왕 죽는 것 어떻게 죽을까요?” 이건 되는 기도에요. “살기 위해서 뭘 하면 됩니까?” 이건 애당초 기도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주와 함께 죽으면 비로소 살리라. 나와 함께 죽으러 가자. 그러면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으리라. 아무도 못 따라 갑니다. 못 따라 가는 것을 따라 가게 하시는 것이 to부정사, 이미 주의 일이 나를 사용해서 반복하면 되는 거죠. 그래서 거울 속의 세계는 주님의 관여로 들어가게 해주십니다. 이게 공식 1번입니다.
이제 공식 2번 해봅시다. 그러면 어떻게 들어가게 하시느냐? 그걸 공식화시켜야지요. 교인들은 공식을 좋아하니까. 하나님의 개입으로 우리는 낯선 현실 속에 있습니다. 두 번째, 어떻게 우리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2번 공식, 그것은 주님께서 유발한 죽음을 통해서.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어요. 자살하면 사는구나. 아닙니다. 자살하면 본인이 가해자가 되고 본인이 피해자가 되니까 가해자와 피해자가 구분되지 않아요. 포켓볼 예를 들었지요. 공을 하나치니까 깨지면서 각자 다른 구멍으로 가잖아요. 지옥 가는 사람, 천국 가는 사람 가는 것처럼.
가해자와 피해자가 드러나는 죽음, 이 죽음 사건을 1번 공식에 의해서 주께서 유발시킵니다. 1번 공식은 주님께서 사건을 유발시켜서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 2번 공식은 어떻게? 답변은 가해자와 피해자와 알 수 있는 방법으로 1번 공식과 결합하면 그렇게 주께서는 일하고 계신다. 합치면 이 현실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유발시켜서 건질 자만 건지는 사건의 덩어리가 곧 현실입니다.
이걸 한 마디로 축약하면 이 세상은 기능적 현실입니다. 그 기능적 현실은 약간 더 이해하기 쉽게 한다면, 천국은 기능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요. 부연된 설명을 붙인다면 천국은 존재가 아니고 기능이다. 다른 말로 하면, 천국은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다. 예수님 말씀대로 하면, 천국은 존재가 아니고 바람이다. 김범룡의 노래 아십니까?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바람은 소유 대상이 아니고 소유당할 뿐이에요. 부대효과라고 이야기했지요. 디모데전서 2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도를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
여러분 무시하는 게 아닌데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1번 공식, 하나님의 개입. 2번 공식, 가해자와 피해자가 드러나는 그런 구조와 질이 우리가 예전에 미처 몰랐던 현실의 기능적이다. 그 기능의 집합, 사건의 다발이 곧 현실이다. 그러니까 자기 존재에 집착된 인간들은 그 영적 세계를 모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주여, 이런 일이 있으면 내 존재가 윤택해집니다.” 항상 돌아오는 것이 내 존재의 가치, 내 존재의 잘남, 내 존재의 뽐냄에 집착하고 있으니 뭐든지 존재로 생각하는 거예요. 저 인간 존재를 만나면 내가 얼마나 잘난 존재가 되겠는가.
아까 차타고 오면서 집사님과 바둑 이야기를 했거든요. 왜 바둑이 허무한 걸 느꼈느냐 하면, 죄인이 이겼다고 더 잘난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걸 신경 쓰고 하는 거예요. 그걸 알고 제가 바둑 1초 만에 두는 겁니다. 상대방에게 복음 전하는 거예요. 의미 없다, 의미 없다, 땡 탈락. +100점? 의미 없는 거예요. 골프요? 프로한테는 괴로워요. 아마추어는 즐기면 되는 거예요. 물론 돈 내기만 안 하고. 그런데 즐기다보면 드디어 목표가 생기고 언더파 했다든지, 홀인원 했다든지 갑자기 아마추어가 프로 흉내 내게 되면 늪에 빠집니다. 골프 나이 많으면 못 칩니다. 한때 잘했지만 한때는 날아가 버립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의 게임에 불과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는 장기판에 하나의 졸이 되어서 졸의 특징은 자기는 여기 있다고 전체에서 볼 때는 하나에 기능인에 불과하거든요. 자기는 중요하지만 졸은 차를 위해서 희생타가 되게 됩니다. 여자 분들은 장기 잘 못 두지요. 장기에서 졸은 맨날 초반에 죽어요. 꼭 장군이 아끼는 것은 차, 포만 아까지 나머지 졸은 엑스트라입니다. 왜 죽이는가? 전체를 위해서 죽여야 돼요. 그것이 바로 아벨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졸이 돼도 좋으냐고 우리한테 묻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미 우리는 낯선 현실 속에 일원으로 기능으로, 사건의 다발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졸을 움직이는 것은 내가 아니고 주께서 움직여서 적합한 졸로서 그 자리에 버지니아 비치에 살게 하신 거예요. 이 세상은 거대한 장기판입니다. 전체 조망? 우리는 몰라요. 주께서는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겁니다. 때를 따라 적합하게 한 겁니다. 잠언서에서는 더 잔인하게 이야기해요. 가난하냐? 그거는 주 앞에 가난하라는 것이 네 팔자고 운명이니까 까불지 마. 적당해. 너한테는 가난이 적당하기 때문에 가난해야 구원받기 때문에 가난했어야 해.
그 다음에 부자? 너는 부자 됐으니까 재산 팔아서 교회 바치고 그런 짓 하지 마. 너는 부자로 살아 줘. 부탁이다. 제발 아파트 평수 넓히고, 차 바꿔. 세 대 더 추가해. 그게 네 팔자다. 또 차사야 되나? 보석 또 바꿔야 되나? 고민이다. 만수르도 아니고. 부자라서 지겹다. 어쩔 수 없지 뭐. 주님이 주신 시련이니까 부자로 살아야지, 어쩌느냐.
그 이야기를 제가 중국에서 하니까 목사님들이 잠간 이해를 못 했어요. 보통 교회에서 말하는 고난이 뭡니까? 지지리 궁상이잖아요. 그런데 제가 객관식 문제 냈어요. 다음 중 고난은 뭐냐? ①순교한다. ②가난하게 되었다. ③선교사로 가서 많은 희생을 했다. ④부자 됐다. 정답은 4번이거든요.
부자 되고 예수 믿기가 얼마나 힘든지 가난한 사람들은 몰라요. 돈 있는데 왜 기도합니까? 말도 안 되지요. 그러니까 얼마나 고난입니까. 문제는 저도 그런 고난 좀 돼봤으면 좋겠어. 외출할 때 옷 열 벌 가운데 어떤 옷을 입을까 고민하는 고난, 차 열 대 중에 어느 차를 타야 파티에 적합한지 고민하는 고난을 좀 누려봤으면 좋겠어. 왜 못 누리느냐? 주께서 허락하지 않는 졸이기 때문에. 그건 포나 차가 할 일이지 졸은 해당사항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이혼하거든 이혼해버려라. 참 이 이야기가 감히 신명기, 출애굽기 내용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거잖아요. 산상설교와도 안 맞는 것처럼 느껴져요. 이혼했거든 될 수 있는 대로 같이 하고 간음한 연고 없이 헤어지지 말라고 돼있는데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남편이 이혼하다고? 하라 해. 주의 뜻이라면. 제가 방금 너무 어려운 이야기했는데 10분 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