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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미국동부오전d 본문

해외 특강/14미국 강의

미국동부오전d

정인순 2014. 10. 18. 22:00

20140925 미국동부오전d

(강의:이근호 목사)

 

음성4  

 

녹취:한윤범

 

2장에 선악과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선악과 위치가 중요합니다. 크게 써야 돼요. 중요하기 때문에. 자리입니다. 어제 오후 강의하고 난 뒤에 고함지르지 말라고 하는데 사실 변명 같지만 설교자가 고함지르는 것은 들으라고 하는 게 아니고 내가 나를 재촉하는, “정신 차려 이놈아!” 정신을 안 차리면 다음 단어가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내가 나한테 질책하는 거예요. 그건 목사님들은 다 그래요. 그 다음 생각이 흐름이 이어지기 때문에.

 

 

어쨌든 자리가 중요합니다. 어떤 자리냐? 그걸 괄호를 치겠습니다. 중심자리입니다. 중심자리에 뭐가 있느냐에 따라 에덴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만약에 중심자리가 깨지면 에덴 깨집니다. 따라서 해석을 주께서 주신 자리라고 해석을 출발해야 할 텐데 우리는 에덴을 볼 때 나 여기 있음, 에고, 행복할 권리 있는데 불교적으로 생로병사, 창세기 3장으로 하면 이마에 땀 흘리고 해산하는 아픔과 연약한 존재로서 남자에게 구박받는 가운데서 남편을 지향하는 그런 이상한 존재로서 여자의 운명, 남자의 고생.

 

 

나부터 출발하면, “신이시여, 회복케 하옵소서.” 자동적으로 나와요. “사랑 많으시다면 서 그 사랑 어디에 써먹으려고 아끼십니까? 저 불쌍하잖아요. 도와주세요. 저 행복할 자격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행복의 수준에 도달되게 하옵소서.” 이것은 바로 뭘 날려버리느냐 하면, 내 중심이 아니고 자리중심이란 걸 완전히 놓치게 되는 거예요.

 

 

이 자리만 들어가면 오지 말라는 행복도 오게 돼있는데 엉뚱한 자리에서 주님에게 오라는 거예요. 그 자리가 아닌데 다른 자리에 가서 주님에게 합류하라고 하니까 주님께서 합류될 수 없지요. 이 자리가 무슨 자리냐 하면 복의 자리입니다. 에덴이란 뜻이 즐거움의 자리거든요. 이 자리만 즐거움의 자리고 나머지는 이 자리와 관계와 끊어지면 저주의 자리입니다.

 

 

그 저주의 자리에 인간들이 놓여있다면서 날 생각해서 자리 묵살하고 그냥 도와달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이 자리가 복의 자린인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가 앉은 방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의 자리가 방석인 근거는 신약에 나옵니다. 중심이 유지되게 되면 그 효과로 에덴동산은 전체가 자리가 됩니다.

 

 

목사님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를 대세요? 에스겔 47장. 새 성전을 만드는데 거기서 물이 나오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성전 행사를 놀렸습니다. “너희 지은 성전, 물이 안 나오지?” 얼마나 놀리는 말씀입니까. 어떤 성전도 물 나오는 성전을 인간이 지을 수 있습니까? 못 짓지요. 건물은 지었는데 물 나오려면 거기에 수도 공사해야 돼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실로암에서 물을 길러서 성전에 부어서

 

 

물이 안 나오면 하나님이 원하는 새 성전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7장에서 네 배에서 영원토록 생수가 나올 것이다. 그 이야기가 창세기 2장에 에덴동산 중앙에서 물이 나옵니다. 네 개의 강이 나오지요. 첫째는 비손, 두 번째가 기혼, 세 번째는 힛데겔, 네 번째는 유브라데. 따라서 이 세상의 창조의 중심은 에덴동산이다. 그 에덴동산에서 물이 나와서 생명이 고기가 살고 넘쳐나는 겁니다.

 

 

그걸 그대로 에스겔 47장에 보면, 성전에서 나오는 물은 그냥 흐르다마는 물이 아니고 점점 깊이가 더하지요. 그 강물에는 물고기가 뛰놀고 생명을 부여받습니다. 그 중심자리를 에스겔 마지막 48장에 보면 왕의 자리고요, 그 주변에 제사장 자리가 있고, 그 주변에 이스라엘 자리가 터 잡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새 성전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나라가 완성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여호와삼마, 하나님이 바로 거기 계시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22장에 생명수 강이 흐르는 그 대목이 또 나와요. 요한계시록 해석은 한두 시간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어렵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구약에 있는 전 말씀을 가위로 잘라서 퀼트라고 하지요. 자수 비슷한데 천을 잘라서 예술작품 만드는 것 있잖아요. 되게 비싸데요. 중국에서 살려고 들어갔다가 금방 나왔는데.

 

 

요한계시록은 흐름이 없어요. 예언서를 잘라서 다니엘, 에스겔을 마구 했고 창세기, 출애굽기를 무차별적으로 붙였기 때문에 역사적 해석으로 해석이 안 되는 겁니다. 묵시적으로 해석해야 되지요. 시간이 고정돼야 됩니다. 동결된 상태에서 해석이 돼야 됩니다. 그렇게 해석해야 신천지가 잘못된 줄 아는 거죠.

 

 

그러면 인간은 뭐냐 하면, 네가 이 자리를 보존할 수 있는 자격자인지 보자는 겁니다. 이 자리는 인간은 차지하지 못하고 인간은 이 자리의 혜택을 입고 있습니다. 인간이 마음 놓고 동산의 모든 실과를 따먹는 것은 이 자리가 근사하게 유지될 경우에만 보존되는 거죠.

 

 

그래서 이 자리에서 외치는 유일한 계명이 뭐냐 하면, 죽음을 전제로 이야기합니다. 네가 선악과 과실을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말은 에덴동산 자체가 죽음을 전제로 해서 설치돼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에덴동산에 뭐 하나 잘못 건드리면 죽음이 너희를 덮칠 것이라고 한 겁니다. 그런데 이 죽음에 대해서 인간은 압니까, 모릅니까? 전혀 경험한 바 없어요.

 

 

그런데 경험한 바 없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이 에덴동산의 모든 조치,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죽음이라는 것, 죽음과 현재 선악과 따먹게 생겼으니까 온전하게 생명의 강이 흐르잖아요. 생명과 죽음, 모든 것은 장차 이 자리에 오실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영원한 생명의 공간, 천국 만드시고 하나님에 의해서 영원한 죽음의 공간, 지옥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죽음은 무엇인가? 이 죽음은 여러 가지 할 수 있지만 어렵기 때문에 하나만 이야기합시다. 창조 전으로 되돌아가는 거죠. 창조행위의 무효현상. 창조 전으로 되돌아가면 흙을 통해서 인간 되었지요. 흙이었는데 인간이 되었다고 이렇게 생각하면 인간의 약점입니다. 인간 속에 흙의 요소가 있다는 생각을 해야 될 텐데 지금은 흙은 더 이상 없다고 여기면서 살아가게 돼있어요. 인간의 시간 요소, 과거는 흘러가고 현재만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때는 흙이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흙은 아니라고 자기 자신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건 너의 일방적인 생각이고 네가 만약에 범죄 하면 어디로 돌아간다? 너는 아담이니,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는 거죠.

 

 

그러면 흙이 중요합니까, 인간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흙에서 인간, 인간에서 흙으로 가는 이 과정이 중요합니까? 어느 게 정답이겠어요? 과정이 정답이에요. 그 과정이 있을 때 비로소 드러나지 않던 자리가 품고 있던 하나님의 비밀이 드디어 공개되는 겁니다. 그 과정을 보여줄 때. 존재적 해석법은 여기서 날아가지요. “나라는 존재에 하나님의 존재가 무슨 도움을 주시겠습니까?”라는 존재적 인식은 과정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런 질문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런 질문하지 말기.

 

 

그 질문을 하다가 그 질문이 잘못됐다는 걸 안 사람이 바로 아하수에로 왕의 별이란 이름을 가진 왕비가 있었어요. 이름이 에스더지요. 에스더가 한 유명한 말, 죽으면 죽으리라. 더 말하면 죽으면 죽는 것이 내가 해야 될 이 왕국에서 주께서 맡겨주신 역할이라는 겁니다. 주님이 주관하시고 나는 그 역할을 일부 담당하는 것이 제가 종으로 할 일입니다. 그러면 자기의 주체성은 누구한테 헌납했어요? 헌 것 받고 새 것 주시는 거예요. 에스더 받고 에스더 주시고. 그런데 받은 에스더는 에고의 에스더고, 부여받은 에스더는 셀프가 주어지고. 진짜 셀프는 예수님의 것과 연결된 끊어지지 않는 에스더가 주어지면서 그 여인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남편에게 찾아갑니다.

 

 

그 순간 아하수에로 왕은 눈이 열리면서 세상에 그렇게 예쁠 수가. 이것은 에스더의 사랑이 아닙니다. 이미 아하수에로도 말려들었어요. 누구한테? 에스더의 자질이 아니고 에스더의 솜씨도 아니고 에스더가 화장해봐야 소용없어요. 이미 에스더 속에 있는 주님의 화장발이거든요. 그 화장발에 바보 같은 아하수에로라는 남정네가 말려들었어요. 그래서 에스더의 주제가 뭐냐 하면, 미인은 권력보다 세다는 겁니다. 아름다움 앞에서 인간의 이성은 죽어야, 무릎을 꿇어야 돼요.

 

 

그게 칸트의 판단력비판입니다. 순수이성비판, 실천력비판하고 그 다음에 마지막 판단력 비판은 미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미학은 숭고의 미학입니다. 광엄의 미학. 할 말을 잊어버리는 것은 그랜드캐니언인데 갈 계획 거의 무산됐습니다. 처남이 하는 말이 반드시 그랜드캐니언 가봐야 된다. 아마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너의 이성, 너의 판단이 초라해지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허무해지는 즐거움. 허무는 어떻습니까? 슬프잖아요. 내가 허무해질 수 있다는 행복에 잠기게 된다는 것이 그랜드캐니언, 처남이 이런 이야기한 게 아니고 내가 주를 단 거고 처남은 그냥 가보라 했고.

 

 

그게 바로 칸트의 숭고의 미학입니다. 모든 언어를 닫아라. 그걸 유구무언이라 하지요. 이사야가 봤던 하나님은 그저 유구무언이지요. 욥이 재를 뒤집어쓰고 했던 고백이 뭡니까? “주여, 제가 유구무언입니다.” 저에게 고난을 주십니까하는 이런 소리가 얼마나 망발인지. 욥은 자기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모르고. 거기가 예수님 자리거든요. 십자가 고난 자리란 말이죠. 그런데 그걸 모르고 에고가 있었던 거예요. 왜 하필이면 고난을 주십니까. 에고로 셀프는 상대하니까 대화가 안 되잖아요. 차라리 이럴 것 같으면 태어나게 하지 말지 태어나게 해서 고생시키십니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네가 정신 못 차렸구나. 염소새끼 있는데 봤냐. 하늘의 별, 북두칠성이 어떻게 만들었는지 네가 내 자리에 있었는가? 황무지에 비 내리는 이유를 네가 아는가? 나는 모든 것을 비켜, 네가 딛고 있는 자리를 볼 거야. 너는 네 자리를 보지 못하고 너만 바라보고 있어.” 이왕 태어난 것 좀 잘해주지.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그게 죄입니다. 그 죄를 주께서는 대신 죽으신 거예요. 죽으시고 자리 만드신 겁니다.

 

 

어떤 자리? 죄인도 믿음으로 의인되는 자리를 만드신 거예요. 그 자리는 이미 피가 고여 있는 자리고 어린양의 피를 발라서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는 출애굽 당시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신 그분에 의해서 우리가 하지도 않은 일을 주께서 이미 자리를 마련하시고 거기에 집어넣어서 어떤 죄도 용서되는 일흔 번에 일곱 번도 용서되는 사랑의 능력으로 구원받을 때 면류관은 우리가 감히 쓸 수가 없지요. 얼른 벗어서 상급이고 면류관이고 주께서 받으셔야 한다고 들이미는 곳이 24장로가 어린양 보좌 앞에서 했던 일이 그 일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우리에게 예고편을 잠시 보여주셨어요. 천국 보고 싶으냐? 보여줄 때는 면류관 던지는 일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걸 이 지상에서 미리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자리는 주님의 자리인 것을 내가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인 것을 주님이 마련한 자리에 우리는 공짜로 걸치고 있는 걸 생각 못하고 자기 자랑질하고 싶어서 환장했습니다. 비교의식에서 온 자존심의 고수를 위해서.

 

 

이 사실을 예수님이 아시도 또 누가 아느냐? 마귀가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마귀를 못 이깁니다. 마귀가 보는 사람을 우리는 못 알아봐요. 귀신 들려서 무덤가에 있던 청년, 그 사람을 사람들은 병들었다고 생각했어요. 청년 본인도 자기가 왜 그런지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니까 속의 마귀가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마귀가 말한다고 하니까 상당히 엽기적이고 오멘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생각하는데 성경은 마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그날 너희가 이야기하는 것은 네가 아니고 네 속의 성령이라고 해서 상당히 엽기적인 이야기를 해요. 네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네 속에 있는 성령께서 너를 통해서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박수무당도 아니고 어떤 경지에 이르면 우리가 박수무당처럼 성령이 말하는 대로 말하지? 정말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요.

 

 

마귀가 알아봤어요. 우리를 멸하려 오신 분이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오십니까? 때가 안 됐는데 일찍 오셨다는 말은, 마귀는 이미 멸망 받기로 작정이 돼있었습니다. 그 내막은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그 이유가 나와 있어요. 에덴동산에 찾아왔던 그 마귀는 그전에 한 차례 전쟁을 치렀어요. 하늘의 전쟁에서 미카엘에게 좇기고 난 뒤에 갈 데 없어서 지상에 내려와서 분탕질 일으킨 겁니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은 결국 또 다른 전쟁터고 전쟁의 거점이 되고 말았어요. 하늘의 전쟁이 이동해서 에덴 전쟁으로 전환되고 만 겁니다. 인간은 가만있다고 친 거예요.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겁니다. 그게 숨겨진 복음의 비밀이에요. 창세전부터 숨겨진 것이 그리스도로 나타났다는 말은, 그때나 지금이나 너희들은 있어도 모른다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에스더는 본인도 몰랐지요. 사촌 오빠 모르드개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공주처럼 누리면 되는 줄 아는 자리에요. 그 자리는 나의 자리가 아니고 에고를 셀프에 종속된 에고로서 있는데 그 에고는 에고가 지워질 때 비로소 나를 위한 자리가 아님을 아는 거죠. 무슨 자리냐? 공주의 자리가 아닙니다. 죽음의 자리였어요. 자기 십자가로 죽지 아니하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는 자리에요. 자살하란 말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네가 원하는 게 아니고 내가 원해서 철저하게 써먹을 거다. 네 밧데리 다 닮을 때까지 써먹을 거다. 너는 무익한 종이라 할 바를 했을 뿐이라는 고백만 내놔다. 어쨌든 다 써먹을 거란 말이죠.

 

 

만약에 서울에 있는 삼성그룹 회장이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이건희는 삼성그룹을 절대로 자랑하지 않을 거예요. 삼성그룹 회장됨을 자기는 그냥 당해버린 거죠. 내 뜻이 아니고 아버지 뜻이란 말은, 그러니까 소유가 아니고 구원이에요. 소유냐, 존재냐 하는 것은 에릭 프롬이 한 이야기고.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속한 철학자의 유명한 책이죠. [소유냐 존재냐] 사람은 자본주의적인 소유가 자아가 될 수 없고 어떻게 사느냐가 자아라고 해서 자본주의의 윤리관을 펼친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그게 아니고 이 땅의 소유냐, 탈출이냐? 어제 누가복음의 본문에 보면 다윗과 아브라함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탈출할 것이다. 구원을 이룰 것이다. 전혀 탈출할 마음이 없는데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탈출하는 거죠. 소유가 아니고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럼 에스더나 욥이나 아담이나 어디에 말려든 거예요? 지상에 왔던 전쟁터에서 인간은 승리하지 못하고 다만 승리자가 따로 와야 되거든요. 하늘의 승리를 이어가야 된단 말이죠.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분이 되지 말고 지상의 하나님으로 와야 되는데 올 때 언약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름이란 피조물이거든요. 만든 자가 만들어진 것에 붙이는 것이 이름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스스로 창조주이면서 피조물이 되면서 여기서 명찰이 생겨버린 겁니다. 그 말은 붙여진 이름대로 실행하게 되면 마귀한테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을 부를 때 눈에 보여야 부르지요. 그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주의 이름에 의해서 언약이 주어지게 되고 언약이 주어진 특수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 사람이 언약맨입니다. 노아가 방주 만들 때 이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노아가 설계사 찾았습니까? 누가 한 거예요? 일방적으로 언약을 받았는데 그걸 노아언약이라 합니다. 노아언약에 의해서 방주를 만들 때 노아는 자기 일을 하는 게 아니고 주의 이름의 일을 하는 겁니다. 방주 만드는 주의 이름이 노아 시대에 끝나고 아브라함에서는 방주가 아니고 인간으로 들어와요. 아브라함에게 복 주면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지요.

 

 

그러면 에덴동산에서 생명의 주요, 죽음의 주가 되시는 분이 이미 에덴동산에 자리를 잡았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축복하는 것도 아브라함이고 저주하는 것도 아브라함 때문이라면 아브라함 속에 주님이 살아 계신 거죠. 그것을 그 당시에 아브라함 자손이 주가 된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아브라함 자손을 끄집어내면서 장차오실 예수님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삭을 죽일 때 옆에 수풀 속에 숫양을 대기시키면서 이삭을 살려내지요.

 

 

살려낸 이삭은 이삭이 살아난 것이 아니고 장차오실 예수님이 숫양의 모습으로 죽었던 이삭을 살려내는 양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메시아는 이 땅에서 죽었다가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택한 백성은 마귀한테 죽더라도 다시 마귀 손에서 죽음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거예요. 지옥에 있더라도 천국으로 갈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이 너 말고 따로 오셔서 그 사람이 구원의 혜택을 입게 되면 그 사람은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고백을 하기 위해서 영원토록 천국에 가야만 하는 팔자가 되는 겁니다.

 

 

그것이 주님을 봉사했다는 게 되지 않기 위해서 모든 행함을 삭제해버리고 모든 행함을 죄로 몰아넣고 오직 주님의 사랑으로 하기 위해서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주체적인 믿음에 의해서 관계 맺을 때 믿는 자는 의인이 되는 겁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구약 전체가 단어 하나에 다 포함이 돼있는 겁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행함이 섞여들지 않습니다.

 

 

믿음이니까 이 지상에서 사람들이 알 수 있는 행함이 아니고 다른 세계의 행함을 믿음이라고 하거든요. 그건 주님의 행함이 이 지상에 들어오게 되면 인간 행함은 아니라는 부정적 의미에서 행함은 아니라고 해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표현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되는 겁니다. 선물을 어떻게 받습니까? 하지 말고 누가 받았느냐고 할 때 선물인 것을 고백하면 받은 자고 선물을 모르고 자기 행함이 섞였다고 하면 아직 선물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죠.

 

 

그 열매를 다시 주체 자리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계속해서 선물 주는 자는 주님이어야 되고 나는 염치 불구하고 매일같이 선물을 받아 챙기는 역할을 해야 돼요. 주면 받고. 이것도 못해요. 일용할 양식을 주면 받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맛있게 먹고. 직장 찾지만 그 직장도 주님 주신 것이고 잘리면 잘린 것도 주께서 주신 잘림이고 자리고 그저 매일같이 당하면서 살 수밖에 없죠.

 

 

그래서 선악과는 악마를 처단하기 위한 용도였음을 나중에 알게 되지요. 지옥은 인간을 보내기 위한 동네가 아니고 전쟁에 의해 즉 하나님의 원수 마귀를 보내기 위한 곳이 지옥이었습니다. 그래서 무덤가의 청년, 그 속에 있는 귀신이 미리 눈치 챘지요. 우리를 멸할 때가 안 됐는데 왜 벌써 왔습니까? 협상합시다. 임시적으로 저 돼지 떼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어차피 멸망할 것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지 않습니까? 가라. 돼지 한 마리 속에 들어가니까 돼지가 미쳤어요.

 

 

돼지가 저주와 죽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다는 물고기 사는 데지 돼지 사는 곳이 아니거든요. 바다에 빠져 죽는 자살하는 그 돼지가 만드는 귀신이 그 사람 속에 있다면 그 사람도 자살하지요. 그 귀신이나 저 귀신이나 같은 귀신이니까. 뭐라고 고백하면서? 주님을 모르고? 주님을 알면서. 우리를 멸하러 왔지요? 잠시 어디 이동하면 안 되겠습니까?

 

 

결국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마귀는 불쌍하게도 님 그림자가 없는 거예요. 밟을 그림자가 없는 거예요. 살아도 죽어도 내 인생 누가 책임져야 돼요? 내가 책임져야 되지요. 극단의 죄입니다. 바로 전두환 전 대통령, 이건희 회장들입니다. 돈 있고 권력 있는데 예수 믿을 이유가 없어요. 회개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병철이 죽을 때 그렇게 고민한 거예요. 이병철은 늙어죽었지요. 자살한 겁니다. 어차피 주님 모르면 모든 게 자살이 돼요. 안에 마귀가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도록, 고린도후서 4장의 이야기에요. 세상은 마귀가 들어 있느냐, 성령이 들어 있느냐 둘 중의 하나밖에 없어요. 칼빈의 신학이 잘못된 거지요. 칼빈은 선한 것 있고, 악한 것 있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립적인 게 있다. 무서운 이야기에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어요.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나와요. 깜짝 놀랐어요. 이 사람이 미쳤나.

 

 

성경은 그게 아니에요. 마귀한테 우리가 세간으로 붙잡혀있으면 주님이 들어와서 그 주인을 꽁꽁 묶고 난 뒤에 세간을 마음 놓고 냉장고고 뭐고 들고 나갈 때 그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마태복음 12장 28절에 나오거든요. 하나님 나라가 뭐냐? 주인을 묶어놓고 거기에 세간을 보쌈 당하듯이 나가는 그런 식으로만 탈출이 가능하고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네 힘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이 안 된다. 왜? 인간이 개입할 전쟁이 아니고 영적인 전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어른들 싸움에 왜 끼어듭니까. 끼어들면 안 되지요.

 

 

주의 원수를 노리고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목사님 말씀대로 하면 하늘의 전쟁이 지상의 전쟁으로 양상이 바뀌었네요? 예. 바뀌었습니다. 지상까지 따라와서 전쟁을 수행하는 하나님 편은 누굽니까? 그것은 바로 여자의 후손이라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이라는데 저 사람은 주님 쪽이고 이런 식으로 알아먹어야 우리가 그쪽 편에 서서 나는 주님 편에 섭니다. 전쟁 같이 합시다. 이렇게 될 텐데 어떤 식으로 알아먹습니까? 여자의 후손의 특징이 오늘 저녁에 할 내용인데 또 해도 괜찮거든요. 자꾸 해도 딴 게 나와요.

 

 

여자의 후손 특징이 있어요. 잉태치 못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고 그것은 이사야 내용이거든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사라의 특징이 불임여성입니다. 이삭의 부인 특징이 불임여성이에요. 아기를 못 낳아요. 석녀라고 하지요. 이미 태가 죽은 사람. 잉태치 못했기 때문에 여자 혼자 살아요. 이사야 54장의 말씀이 갈라디아서 4장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잉태치 못하면 자식이 없지요. 잉태함으로 자식을 생긴다는 것은 인간들이 이미 알고 있는 바잖아요. 그렇다면 이건 마귀를 못 이깁니다. 마귀의 전쟁의 승패는 인간들이 아는 수준에서는 될 수 없어요. 오늘 오후에 할 이야기를 미리 하게 되면, 마리아가 처녀입니까, 기혼녀입니까? 처녀지요. 처녀가 아기를 낳지요. 그걸 지난 시간에 ‘위반’이라 했고, 다른 말로 ‘이탈’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도저히 납득이 안 돼요. 왜 처녀가 아기를 낳습니까?

 

 

처녀가 아기를 낳은 것에 대해서 천주교가 한 오해와 개신교의 오해, 두 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일단 천주교의 오해는 뭐냐? 마리아가 아기를 낳았기 때문에 마리아에게 의미가 있다. 마리아에게 의미 있다고 여긴 우리 종교는 하나님에게 유일하게 합법적인 종교가 된다. 이게 천주교입니다. 그런데 개신교는 뭐냐 하면, 마리아가 처녀로 아기를 낳았다는 건 인정해주자. 그러나 그건 과거에 있었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다. 지금은 예수님이지 천주교처럼 마리아를 섬기면 안 된다. 둘 다 오해한 거예요.

 

 

개신교는 역사주의를 주장했기 때문에 오해한 거고 천주교는 자신의 구원 욕구를 위해서 마치 성경이 있는 것처럼 오해했기 때문에 오해한 거고.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 못해서 환장한 것이 천주교의 오해고 개신교는 우리가 역사에 대해서 아니까 우리가 판단해서 우리가 알아서 중요한 포인트 잡아서 구원하겠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닙니다. 그 뒤에 보니까 마리아 별 대우를 못 받아요. 여자야 나와 무슨 상관있습니까. 책망 받고. 사도 바울 서신에 마리아 이야기 나옵니까? 안 나오잖아요. 마리아 믿어 구원받으라는 게 없잖아요. 그러니까 마리아는 젖히자.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로만 되지 다른 이름으로는 안 된다. 그래서 개신교가 이야기한 겁니다.

 

 

천주교는 성경을 인정합니다. 어떤 분이 천주교에 대해서 질문하는데 천주교와 개신교의 신학에 차이가 없어요. 교황 오고 난 귀에 어떤 목사님은 교황과 천주교와 싸워야지 왜 개신교를 비판합니까? 이러면서 전화로 30분 동안 했는데 그 사람은 천주교를 몰라도 너무 몰라요. 마리아 섬긴다고 마리아 섬기는 게 아닙니다. 신자들이 마리아 상 앞에서 성호 긋는다고 마리아 섬기는 게 아니에요. 그건 미끼 상품이고. 혜화동 천주교 신학교 도서관을 가보세요. 거기서 나온 논문들을 보세요. 신부들이 어떻게 하는가? 개신교 신학과 똑같아요. 루터를 존경합니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어요.

 

 

신부들의 능력은 얼마나 헌금을 많이 끌어내느냐에 있어요. 헌금을 많이 끌어내는 신부는 큰 성당으로 승진이 돼요. 그러나 헌금을 유지 못하는 신부는 한직으로 밀려나게 돼있어요. 왜냐하면 천주교는 기업이기 때문에. 수녀는 직원들입니다. 천주교라는 이름의 주식회사를 운영하는 직원들이 신부와 수녀들이에요. 사람들이 원한다면 뭐든지 상품으로 제시할 용의가 있습니다.

 

 

신학이 개신교를 포함한 폭넓은 신학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개신교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이걸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이에요. 옛날에 천주교를 그들이 더 냉철하게 비판합니다. 중세 때 잘못 알았다. 그러나 이 시대는 맞춤이다. 다만 개신교가 폐쇄된 교리 때문에 못하는 것까지 우리는 손을 벌인다. 이게 바티칸의 자신감입니다. 바티칸 교황의 자신감입니다. 교황을 섬긴다고요? 그거는 천주교 신부가 웃을 일입니다. 이런 무식한 것. 어느 신부도 교황 섬기는 사람 없어요. 교황은 하나의 봉사자로 알고 있어요. 명목상 대표자지 우리의 대표자는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신부들이 이야기해요.

 

 

그것을 개신교에서 안 가르칩니다. 집단과 집단의 이기주의 싸움이기 때문에 적의 비밀을 불리한 건 안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비겁해요. 진리가 중요하지 전쟁에 승리하는 게 안 중요해요. 자기 집단화 전쟁은 주님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둘 다 오해했다. 둘 다 잘못된 거죠.

 

 

그럼 목사님 답변은 뭡니까? 그 뒤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은 남자의 후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모든 족보는 명목상 남자의 이름을 붙이게 돼있어요. 교회에 나오면서 제일 먼저 대하는 마태복음 1장을 대합니다. 1장부터 재미없어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 해놓고 그 뒤에 뭡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그게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자기 조상 족보도 모르면서 남의 족보 이스라엘 족보까지 보려 하니까 한심스럽지요.

 

 

그 족보가 남자 이름으로 돼있어요. 그런데 남자를 살리는 것은 ‘~에게서’라는 말로 되는 네 명의 투입된 특수 여군에 의해서 그 족보가 유지됩니다. 제일 마지막이 ‘마리아에게서’ 여자가 살리게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 살리는데 역사 표면적으로는 여자가 등장해야 돼요. 왜? 여자는 남자로부터 무시당하고 인간도 아닌 것이,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이미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는 겁니다. 보조적 존재에요.

 

 

그래서 라캉이란 철학자는, 여자는 마이너스 남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남자 없이 여자가 없다는 겁니다. 남자가 있고 남자의 결핍 요소가 여자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는 부단히 남자를 찾게 돼있고 남자는 부단히 여럿 여자를 거느리고 싶어 환장하는 겁니다. 어떻게 평생에 한 여자하고만 사느냐 말이죠. 지루하게. 그게 숨겨진 남자의 본성입니다. 고칠 생각하지 마세요. 차마 돈 없어서 차마 능력 없어서 여러 여자 못 건드리지 능력만 받쳐준다면 현지처가 각 지점에 두는 소망이 잠재돼있습니다. 문제는 돈이 없다는 거예요. 고급 레스토랑 데려가서 음식값 지불할 능력이 없는 거예요.

 

 

남자는 그 자체로서 충족됩니다. 그러나 여자는 결핍존재에요. 이 결핍존재를 하나님은 충실히 이용합니다. 이 결핍에서 새삼스럽게 남자를 집어넣지 않고 미지의 남자를 집어넣고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여자의 후손이 이 여자를 살려요. 따라서 여자의 후손이 누구냐? 그건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봐야 아는 겁니다. 그 여자는 누구냐? 바로 오늘날 교회를 말합니다. 마리아가 아닙니다. 마귀가 옛 뱀이 여자의 남은 자와 싸우기 위해서 강가에 버티고 있다는 내용이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지요.

 

 

정리해봅시다. 에덴동산은 움직이는 장기판의 말들은 중요하지 않고 자리가 중요하다. 그런데 그 자리가 의도적으로 손상이 가게 만들었어요. 생명나무가 선악과와 배후에 연결돼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노출시킵니다. 선악과만 못 따먹는 게 아니고 결국 선악과 따먹으니까 선악과 뇌관 건드리면 생명나무 터지는 거예요. 이젠 따먹고 안 따먹고 간에 자리 보존을 위해서 인간은 거기서 전부 나가야 돼요.

 

 

바퀴벌레 방제한다면 집주인은 잠시 두세 시간 동안 집을 비우고 나가야 돼요. 그게 이스라엘 역사 속에 안식의 땅을 쉬게 하기 위해서 우상 숭배로 인하여 손상된 안식의 땅을 청소하기 위한 기간이 몇 년입니까? 70년이지요. 70년 동안 원래 살던 거주민들은 어디 가야 돼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야 되고 이방나라에 종으로 팔려야 되고 그렇게 해서라도 안식의 땅이 되기 위해서 70년이라는 것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에덴동산이 제대로 가동되기 위해서는 인간들은 나가야 됩니다. 내 보내야 돼요. 선악과와 생명나무와 연관된 모든 훼손된 것은 주님의 손으로 온전하게 만드는 것을 마련하고 다시 인간의 저주의 대지에 찾아오셨는데 찾아오는 모습이 처참하고 비참합니다. 육신의 죄 모습으로 찾아오십니다.

 

 

그러면 에덴동산은 어디 있는가? 예수 안에 있어요.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느니라. 내가 바로 천국이니라. 천국은 어떤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기능을 말하는 겁니다. “천국은 이와 같으니”라고 해서 농부가 씨를 뿌리면, 이게 전부 어떤 기능이죠. 천국이 어디 있다가 돼버리면 이건 에덴동산 시절 이야기고 에덴동산이 공간적 의미를 상실하고 난 뒤에는 에덴동산이 어떤 특정 주체의 기능으로 전환됨으로 말미암아 주께서 집어주면 호출하면 그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국은 이와 같으니 농부가 씨를 길가에 뿌리니 마귀가 와서 날름 먹더라. 또는 어떤 땅에 뿌렸는데 처음에는 잘 자라는 듯하다가 거기 큰 돌에 기운이 막혀서 결실을 맺지 못하더라. 천국은 이와 같으니 씨를 뿌렸는데 열매를 따는가했는데 갑자기 난데없이 가시덤불이 와서 기운을 막아버렸다. 천국은 이와 같으니 옥토에 뿌렸는데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더라. 네 가지 결론은 뭡니까? 천국은 내가 만든다.

 

 

천국은 네가 자리 이동하는 것이 아니고 천국 자리는 내가 곧 천국 자리고 내 자리에 호출 당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겁니다. 다만 그 방식이 네가 범죄 한 방식을 밟아오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타락한 자의 죄악 된 방식이기 때문에 거부하는 기능이 강해요.

 

 

어제 저녁에 강의한 것처럼 땅을 샀다고 혼인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 자기 장가가야 된다고 임금님의 혼인잔치에 참석 못한 사람, 또는 소를 샀기 때문에 소가 어느 정도 기능을 발휘하는지 시험한다고 핑계대고 참석 못한 사람, 아들의 혼인잔치는 누가 갑니까? 길에서 놀고 있는 자를 무작위로 불러다가 혼인잔치 자리를 채우잖아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거예요? 인간 요소 밀어내고 주님 요소로 은혜로 일방적으로 당길 때 천국은 완성된다는 겁니다.

 

 

끝으로 이 말씀드릴게요. 자진해서 자기를 포기할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천국 갈 사람? 저요. 손 내리세요. 어거스틴이 이야기한 것처럼 빛에 가까운 사람은 천국에 가깝고, 빛과 멀어진 사람은 지옥에 가깝다. 저는 말씀을 연구하기 때문에 빛에 가깝다고 하면, 손 내리세요. 그건 인간적인 방식이고 그래서는 마귀 못 이깁니다.

 

 

그럼 어떻게 들어가는가?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주인이 개를 묶고 다닙니다. 어떤 사람이 주인을 공격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생각합니다. 개가 탐이 나서 주인을 때려서 기절할 때 개만 데려간다. 주님의 방식은, 개를 때려서 주인을 데려가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마귀를 닮았기 때문에 자기가 주인이고 주인 밑에 개 목줄로 삼위일체 주님을 묶는 방식이 꼭 마귀가 하는 것과 닮았어요.

 

 

나의 주체가 절대자가 되고 하나님은 내가 이용할 수 있는 나의 보디가드 역할로 있단 말이죠.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사는데 절대로 이런 식으로 사는 게 아니라고 주님에 의해서 묶였다는 식으로 우리가 스스로 또 다른 나로 위장하는 재주가 있어요. 그게 마귀의 재주입니다. 내가 주인공이면서도 마치 아닌 척하면서 살아가는 게 있어요.

 

 

그래서 주님 방법은, 네가 주인이었잖아요. 내가 네 종노릇했잖아.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을 없애고 그 주인을 납치해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부끄러워서 할 말을 잊어버려요. “어떻게 알았지? 내가 신으로 행세하는 걸 어떻게 알았지?” 바로 그런 방식으로 가야 저는 이제 더 이상 신이 아니라는 말을 함으로서 내가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항상 살아가면서 내가 주님을 젖히고 내가 주인 노릇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늘 있기에 주님, 저를 늘 때려달라는 자기 부인이 가능한 겁니다.

 

 

이렇게 해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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