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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미국동부오전b 본문

해외 특강/14미국 강의

미국동부오전b

정인순 2014. 10. 15. 14:08

음성2 

 

녹취:한윤범

 

20140924 미국동부오전b

(강의:이근호 목사)

 

 

전에 이 세상에 인간이 있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인간들이 있어요.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너도 있고, ‘나’와 ‘너’가 있으니까 합쳐서 ‘우리’라고 해버렸어요. 그러면 우리에 해당되지 않은 이것들을 영어로 ‘it’ 그것이라고 해버렸다고. 이런 게 문제가 됐어요. 예를 들어서 너라고 이야기할 때는 나가 먼저 있는 거예요. 나에서 사물로 넘어가면서 나를 사물화 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은 이름을 만든 겁니다. 그 이름을 누가 불렀어요? 내가 부르면서 여기서 의미가 생긴 겁니다. 꽃을 내가 부를 때까지는 의미가 없는 거예요.

 

사람이 이름을 부르면서 자동적으로 나에게 종속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거든요. 그 하나님은 나에게 종속된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람은 무슨 거짓말을 하느냐 하면, 자기가 기도해놓고 뒤에 주문처럼 붙는 게 있어요. 기도 끝날 때 언제 끝나는 겁니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예수 이름을 기도했지만 거짓말이에요. 방금 기도한 모든 내용은 누구 좋으라고 기도한 거예요? 자기 좋으라고 하나님 이름을 부르면서 하다 보니까 내가 집어넣은 의미를 내가 다시 회수하는 셈이 돼버렸습니다.

 

주여, 주여. ‘주여’라는 말이 성경이 있으니까 집어넣었고 다시 될 줄로 믿는다고 기대하는 기대치에 대한 응답은, 결국 그 기대치는 옆집 사람들이 부른 거예요? 누가 만들어낸 거예요? 내가 만들어냈지요. 내가 만들어낸 의미를 사물에 이름 붙이듯이 이름을 불러서 한 겁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종속된 겁니다. 이런 것을 성실, 다른 말로 충실이다. 나는 나에게 충실하고 성실해요.

 

여기에 대해서 이의를 걸 수 없어요. 아담이 자기 부인 보고 이름 불렀지요. 아담이 부를 때 그 여자는 아담 없으면 없어져야 되겠지요. 그러면 아담이 먼저 있고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아담은 항상 생각해요. 저 여자는 내가 이름을 주어서 나한테 종속된 여자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돼있지요. 아담은 그 순간 뭘 잃어버렸습니까? 내가 여자 이름을 부르면서 자기한테 종속된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아담은 하나님이 나의 관계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겁니다.

 

그것을 한 자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꽉. 자기 인생에 꽉 찬 것, 아까 이야기한 성실, 충실. 게으름아 꺼져라. 나는 나의 게으름을 용납 못해. 이런 식으로 보면 돼요. 모든 인간의 행동은 결국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자기한테 회수하는 식으로 인간은 행동에 나서게 됩니다. 항상 그 의미가 나에게로 되돌아오도록. 심지어 사업에 실패하더라도 내가 실패하니까 아쉽다. 아쉽다는 말은 꽉 차 있었는데 사업에 실패했으니까 빠져나간 거죠.

 

또 예를 들면 나의 배우자가 죽었어요. 어떤 남자가 자기 아내가 죽었단 말이죠. 자기 아내가 죽어서 자기는 우는데 다른 남자들은 울지 않아요. 그럼 물어봅시다. “내 아내가 죽었는데 당신은 왜 울지 않나요?” 그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미쳤나. 니 마누라 죽었는데 내가 왜 울어?”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내 마누라 죽으면 나도 울 거란 뜻이거든요. 각자, 각자 꽉꽉 차 있어요. 자기 속에 남이 절대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흘러간 1950년대 팝송에 보면, 내 아내와 헤어졌는데 태양은 왜 빛나는지, 파도는 왜 치느냐. 나는 이렇게 아픈데 파도는 치고 한결같고. 여자와 헤어졌는데 새는 전과 같이 짹짹거리고 해는 왜 뜨느냐 이 말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전에 알던 새소리와 아름다운 해도 의미 없지요. 그럼 사랑하는 여자가 죽고 난 뒤에 같이 따라 죽는다는 말은, 더 이상 그 전에 내가 봤던 해와 달과 별들은 그냥 자연이 아니고 현실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누구한테 예속된 현실이었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살아있다는 조건 하에 나는 이걸 현실로 봐주는 겁니다.

 

자연은 누가 만드는가? 자연 어디 있는가? 자연은 내 안에 있어요. 내가 의미를 줄 때만 자연이에요. 내가 그 이름을 부를 때만 별을 별, 달을 달이라고 불러 줄 때만 “달이 거기 있네. 참 아름다워.” 할 때만 그 달은 의미가 있는 겁니다. 자식이 공부 못하고 있을 때 달은 백날 아름다워도 좋아지지 않아요. 나한테 종족 되는 것. 따라서 종속된 이것을 이제부터 합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했지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이라고 이름을 부를 때 나에게 종속된 하나님이고, 이 천지, 자연도 종속된 것이고, 창조라는 것은 마치 내가 창조가 뭔지 이미 아는 것처럼 건방을 떨면서 세 단어 다 이해하니까 합친 것도 이해한다고, 이걸 ‘믿습니다’라는 말로 우린 그냥 내 것으로 받아들였어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라고 믿고 난 뒤에 갑자기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 멀쩡합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뭐. 아내 죽어도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이 죽여겠지 나와 무슨 관계있어.” 이렇게 멀쩡한 정신으로 정상적으로 됩니까? 안 되지요. 뭐라고 따집니까?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여, 왜 하필이면(Why me?) 저에게 이런 불상사를 주십니까?” 이 말은 아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조건 하에 나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뒤늦게 들통 났어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순수하게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노림수가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단계를 높입시다. 꽉꽉 차 있던 내가 안다는 것을 한 단계 높이면, 비어있음, 뭔가 빈 게 돼요. 비어있다는 것은 내가 아는 세상이 아닐 수가 있다는 겁니다. 사업 망하고 난 뒤에, 가족이 죽고 난 뒤에. 내가 뭔가 완성됐다고 여겼던 것이 아닐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비어있으면 자아가 구멍이 뚫렸는데 그것이 채워졌을 때만 자아가 되거든요. 그런데 뭔가 허전하단 말이죠.

 

아내가 죽고 난 뒤에 6개월 넘지 않아서 사랑하는 사람을 새로 만나서 이 남자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전처 죽었을 때 하나님 앞에 왜 나를 죽음으로 몰아세웁니까? 이제 살 소망 없습니다.”라고 했는데 당신 만나려고 아내가 죽었구나. 이럴 줄 몰랐다는 것예요. 갑자기 비어있던 것이 채워졌지요. 채워져서 이제 하나님 뜻을 알았다고 장담했는데 두 번째 아내가 바람이 나서 떠났어요. 또 비었지요. 1층에서 2층으로 3층에서 또 비어졌어요.

 

그런데 아내가 그냥 가지 않고 재산을 챙겨서 젊은 남자 만나서 가버렸을 때 이 남자는 비어있음이 돼버렸지요. 그러면 아내가 죽은 것은 마지막 여생을 행복으로 이어지기 위해서 만났다는 그것은 제대로 세상을 간파한 게 돼요? 몰랐지요. 재산이 날아가고 난 뒤에 또 다시 나오는 용어가 Why me? “주여, 주님을 사랑하고 주께서 저를 사랑하는지 믿습니다. 절대로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나를 이런 식으로 몰아넣는지 이유에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빈자리가 생기지요.

 

제가 이런 예를 드는 이유가 이겁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를 이 남자는 계속 믿는다고 생각하는데 뭘 생각이 안 나느냐 하면, 뭐는 실감이 안 나느냐 하면,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 17절 말씀처럼 태초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지를 창조했고 모든 목적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라고 할 때 골로새서에 나오니까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글자를 받아들인 것처럼 골로새서 1장에 그 말씀도 자기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구멍이 나고 비어있는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위하여’란 의미가 뭔가 내 중심의 인생과 자리바꿈이 일어나야 된다는 것을 간파하는 거예요.

 

그동안 중보자가 빠진 거예요. 자기는 중보자란 개념을 1층에 있을 때부터 안다고 자부했는데 구멍이 뚫릴 때마다 도대체 나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걸 믿는 그 믿음을 본인이 믿은 거예요. 그러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리라는 믿는 이 믿음은 절대로 그리스도가 원하는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건 유대교에요. 유대교는 구약성경을 어릴 때부터 다 외웁니다. 하지만 그 유대교에 의해서 예수님이 살해당했습니다. 예수님 자리가 있을 수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자리 비워놓고 예수님 들어오셔도 되는데 그게 아니고 비워놓은 자리에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고 아내는 죽었지만 나는 살아있다는 이 자체를 가위질해서 죽이시는 것을 앞장세워서 주님께서 내가 중보자라고 외칠 줄이야 감히 생각도 못했지요. 나 여기 있고 주님 저기 있으니까 주님 저와 좋은 관계로 악수합시다. 왜? 계속 살아있으니까. 이렇게 예수님과 악수할 줄 알았지요.

 

선교단체에서 많이 가르치는 구절이 있어요.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 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은 내가 일단 살아있고 그 다음에 안녕하십니까? 예수님이십니까? 저는 아무개입니다. 이렇게 악수하면 함께 살아있는 걸로 생각한 거예요. 자기 인생에 구멍 날 이유가 없거든요.

 

“여기 앉으세요. 주님 자리라고 만들어놨습니다.” 선교단체에서 동그라미 그려놓고 의자 하나 놓지요. 당신이 중심이 되지 말고 중심은 주님한테 양보하라. 양보하지요, 뭐. 양보하고 자기는 밖에 나가서 주님께 감사하면 되잖아요. 주님 자리를 이 자리입니다. 하고 자기는 이제는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한 거예요. 그것이 꽉 차있는 진리체제를 완수했다고 했는데 왜 Why me? 그렇게 완성된 나에게 구멍을 일으키느냐 이 말입니다. 도대체. 어디서 잘못됐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이름 붙이는 겁니다. 누가? 내가 사물이나 어떤 인물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사람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나에게 종속돼요. 내가 절대자가 그분이 하나님이든 삼위일체든 예수든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하나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름을 불러주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내가 이름을 부르면 안 되고 방향이 반대가 돼야 되지요. 내가 부를 이름 자체가 완전히 붕괴시키면서 그 현장을 만들어가면서 내 이름을 새롭게 불러줘야 될 분이 계신데 그 분은 내가 생각한 체제 속에 안 담겨있지요. 왜냐? 내가 생각한 체제는 나에게 의미로 엮여져있는 체제기 때문에 그것은 백날 기적으로 해도 돌아서면 나 잘남으로 환원되게 돼있어요. “나, 예수님 계시 받았다.” 이러면 안 되거든요. 나 말고 내가 미처 생각 못해 다른 곳에서 찾아오시면서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걸 호명이라 합니다.

 

알튀세르란 유명한 철학자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사람의 주체란 호출로 말미암아 주체가 생긴다. 사회에서. 누가 나를 불러줄 때 비로소 나는 다른 사람 앞에서 하나에 주체로서 활동하다가 만약에 그 사람이 나를 불러주지 않으면 나는 있어도 죽은 자가 된다는 겁니다.

 

인터넷에 사이트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아무도 조회수 한 명도 없을 때 나는 이 사회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지요. 아무도 나를 불러준 사람이 없기 때문에. 취직도 그렇고 결혼도 그렇고. 뭔가 나를 불러줄 때 불러준 사람 앞에서 주체로 살게 돼있어요. 하늘나라가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는 거예요. 불러준다는 것이 일시적으로 불러주면 안 되잖아요. 궁극적으로 불러줘야 돼요.

 

궁극적으로 불러주는 그 대목을 제가 성경 찾아보겠습니다. 제가 말은 어렵게 하지만 실내용은 간단한 거예요. 내가 생각한 예수님 말고 실제로 나를 찾아오신 그분을 상정하자는 내용이거든요. 로마서 8장 29,30절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건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미리 정했다는 사실을 내가 정할 수는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 대목을 보는 순간 내 중심의 체제기 때문에 불러준 것이 마치 나인 것처럼 나에게 의미를 일방적으로 부여했지요. 내가 나에게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담의 본성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주께서는 그러지 말라고 할 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그게 인간이라는 거예요. 제 말에 사람들이 제일 오해하는 게 뭐냐 하면, 그러지 말라는 거구나. 그러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우리는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우리가 살아왔던 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수긍하자는 이야기에요. 별난 인생 없고 별난 재주 없거든요. 제가 이야기하는 모든 이야기는 이단이고 삼단이고 없어요. 모든 인간은 그렇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우리는 아주 적합하게 자기에게 하는 이야기라고 일방적으로 수입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야기는 그것을 바꾸고 수정하고 손대는 작업은 절대로 우리가 손대는 작업을 하지 말자는 거예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우리는 무슨 말인지 알아요. 설명하려면 두세 시간 합니다. 하지만 정작 주님께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할 때는 이걸 잘 알고 있는 우리에게 완전히 와이미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러면 자살합니다. 살고 싶지 않습니다. 죽이든 지옥 가든 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주님 섬겼으니까 더 이상은 못 섬깁니다. 정말 주님 이렇게 나온다면 저도 더 이상 주님 못 믿겠습니다.”라는 것을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유도해요. 드디어 나오는 거예요. 주님께서 “유단자인가? 이게 네 본색이야.”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특징이 뭐냐 하면, 그 사실을 누구한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야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느냐 하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남한테 이야기한다? 이건 말이 이야기지 자기 성질부리는 거예요. 못 알아듣습니다.

 

이 포도를 먹고 난 뒤에 맛있다고 하잖아요. 얼마나 맛있는데? 뭐로 표현합니까? 맛있다는 것 외는 표현할 수 없어요.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맛있어요. 어떻게? 참 맛있어. 좀더 정확하게. 억수로 맛있어. 그냥 맛있는 것과 억수로 맛있는 것과의 차이가 뭔데? 코미디에 보면, 말꼬리 잡고 제대로 표현하라는 거예요. 이걸 말할 수가 없지요. 남자한테 참 좋은데. 산수유가 남자한테 좋다는 거예요. 말로 할 수는 없고. 말로 어떻게 표현해요. 그러면서 우리에게 말을 하지요.

 

예수님을 믿습니다. 믿는 게 뭔데? 몰라, 몰라. 그냥 믿어. 우리는 주님과 사귀면 돼요. 그걸 남한테 표현해서 믿음 좋다는 과시할 필요 없습니다. 목회자는 남을 설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주님한테 당한 것을 지난주에 이렇게 당했다고 성경말씀으로 화풀이하는 거예요. 자기 성질 드러내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설명합니까? 자기가 주님한테 당했는데. 자기는 꽉 찼다고 여겼는데 주님께서 꽉 찬 것을 후비고 완전히 도려내고 구멍을 뚫고 쥐포 찢듯이 찢으니까 얼마나 아파요. 이것이 복음이라고 정립했는데 그걸 찢어버리니까, 컨닝페이퍼 준비했는데 그걸 찢어버리니까 시험을 어떻게 쳐요. 빵점이지요.

 

우리나라 가수 중에 노래 잘하는 백지영이라는 가수가 있어요. 그 가수가 부른 <총 맞은 것처럼>이라고 있잖아요. 그게 사랑을 표현할 때 도대체 그 아픔을 달리 표현해서 총기까지 집어넣는다니까. 총 맞은 것처럼. 하지만 기껏 그 표현이지만 그 사람이 총 맞아 봤습니까? 모르잖아요. 자기는 총 맞은 것처럼 아프지만 자기도 직접 총 맞은 게 아니에요. 총 맞았으면 죽었지요. 자기도 모르면서 ‘근접성’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모든 언어는 은유에 불과하다고 언어학자들이 결론내린 거예요. 언어는 달라지게 마련이지 그래서 언어는 게임이고 그림이라고 비트켄쉬타인이 그런 이야기했어요. 이건 어떻게 정확한 표현이 없어요.

 

그래서 성경에서 원어 찾는다는 게 속임수입니다. 원어라는 게 없어요. 지금 언어의 다양성을 추구했지만 옛날에는 몇 개 안 되는 단어로 변화를 표현하다보니까 고대 언어거든요. 히브리어, 헬라어 특징이 단어 몇 개 되지도 않은 것으로 이것도 써먹고 저것도 써먹는단 말이죠. 그걸 원어를 찾으면 오늘날 세분화 사회에 맞을 리가 없지요. 그래서 원어하는 사람들이 자기 지식자랑해서 교인들을 자기 수하로 만들기 위해서 하는데 그건 사기에 해당되는 겁니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자기가 느끼는 것은 누굴 전도하는 건 주님 소관이고 자기는 날마다 총 맞고 있어요. 그러면서 자꾸 비워지면서 나 아니고 당신입니다. 중보자입니다. 이 세상은 중보자가 만들었고 중보자가 관리하고 중보자가 책임지고. 거기서 누구는 빠져야 돼요? 내 인생에서 나를 드러내야 돼요. 절대로 내 인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강제로 총 맞는데 자식한테 총 맞고, 재산 있으면 재산한테 총 맞고, 온통 인생 자체가 누더기가 되는 겁니다. 총 맞은 것처럼~ 주님이 계속 쏘아대는 거예요. 하여간 내 뜻대로 되는 법이 없어요.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하잖아요. 주님을 본받으면 사람들이 제일 먼저 윤리, 도덕으로 생각하는데 성경에는 그런 뜻이 아니고 주님께서 이 땅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신 것을 본받으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아버지 뜻을 몰라요. 아버지 뜻이라고 우기는 낮은 계층이 있지요. 1층, 2층. 그것이 나중에 3층으로 올라가면 1층으로 변해요. 5층 올라가면 1층으로 변해요. 맨날 우리는, “이만하면 됐어. 이만하면 복음 압니다. 이만하면 주님 압니다.” 맨날 이래서 총 맞는다니까. 그러면 겸손하게 “주여, 저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총 맞아요. 그러니까 “주여, 제가 아는 게 뭡니까? 오직 주님만 생각합니다.” 그런다고 총 안 맞을 줄 알아요?

 

인간이란 뭔가 진리로 규정이 되거든요.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십자가 앞에서 전적으로 죄인이며 오직 구원은 주님만 하게 됩니다. 라고 해봐야 시간 지나면 되돌아와서 내 존재됨에 대한 좋은 완벽한 진리처럼 내 창고에 역사를 통해 진리가 저장이 돼요. 저장이 되면 나는 이 정도까지 아는 사람이라고 자아를 뽐내는 근거가 됩니다. 제가 고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건 어쩔 수 없어요. 누구도 마찬가지로 어쩔 수가 없어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신다고 할 때 그 부르심은 그냥 부르심이 아니고 중보자를 위하여 네가 존재한다는 걸 드러내면서 나타나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얻어맞은 경험이 있어서 싹싹 빌면서 이제는 내 뜻이라는 것도 내 뜻이 아니고 중보자의 뜻이라고 일단은 고개 숙입니다. 아직까지 내일을 모르니까 9월 26일을 안 살아봤으니까 25일 오늘까지는 남은 여생은 주의 것이지 내 것은 아니야. 이게 25일치에요. 내일 되면 25일치가 나를 섬기는 우상의 재료가 돼있어요. “나는 복음 안다. 물어봐. 나는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다. 틀렸어?” 내일 되면 주께서 총 들고 나섭니다. 개념과 아는 것과 실제로 느끼는 것과 내가 예상 못한 다른 느낌을 또 다시 주십니다. 주시면서 내 인생은 중보자의 것이라고 깨닫는 거지요.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게 틀린 겁니까, 맞는 겁니까? 강의를 지금까지 하고 돌아보니까 이 고백은 맞는 고백이에요.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내가 고백한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있는 중보자가 고백케 하신 겁니다. 수동적입니다. 수동적이 제일 중요하지요. 우리는 십자가를 경유해서보니까 수동적으로 했는데 우리는 내가 눈으로 보니까 보이네요. 따라서 ‘믿습니다’라고 자동적으로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내가 한 걸로 생각하면서 살아온 것은 결과적으로 보니까 소급해서 보니까 주께서 나에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이 맞는 고백이 되는 거예요.

 

또 하나 예를 들면 자식이 공부를 못해서 성질나서 딸의 뺨을 때렸다. 때리면서 단서를 달았지요. 네가 맞으면서 엄마가 때렸다고 생각하지 말고 사랑의 매라고 생각해라. 사랑하니까 때리지. 봐라 히브리서 12장에 봐라. 자기가 아는 성경 동원돼요. 남의 아이 같으면 때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만 징계를 내린다. 또 잠언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매를 아끼면 자식을 죽인다. 내가 보니까 남의 자식이면 안 때렸어 나는 널 살리기 위해서 때린 거야.

 

그러니까 자기 딴에 온갖 아는 성경구절 다 동원했지만 저 같으면 다른 구절 댑니다. 신명기에 뭐라고 돼있어요? 자식이 말 안 듣거든 네 손으로 죽이지 말고 마을 원로한테 가서 맡겨서 돌로 쳐 죽이라고 돼있어요. 그것 실시한 부모 아무도 없습니다. 세월호 물에 빠졌다고 지금까지 데모하는 있는 판에. 누가 자기 자식을 남의 손에 맡겨요. 그런데 성경은 그걸 이야기한다고요. 일반 평신도는 그 구절을 모르니까 기껏 아는 구절, 매를 아끼면 자식이 망한다는 그런 구절 동원한다고요.

 

나중에 주님 진짜 찾아와서 해보니까 자식 사랑해서 때린 게 아니고 내 자식이기 때문에 때린 거예요. 그러면 마태복음 10장에 어긋나요. 누구든지 천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참, 성경말씀이 그렇게 엮여져 있어요. 좋은 것 지 마음에 맞는 것 어디서 함부로 자기 마음대로 골라내요. 자기 정당화가 될 수 없어요.

 

그러면 그 구절을 일단 들었다 칩시다. 그 다음에 나오는 핑계가 있어요. “주님이여, 제가 자식 때린 것이 내 자식이라서 때린 게 아니고 주님의 자식이니까 때렸다.”고 비겁한 변명을 할 수 있겠지요.

 

강의가 끝났다 치고 돌아보니까 남은 것은 뭡니까? 그때 내 자식을 때린 것은 잘했습니까, 못했습니까? 참 문제 어렵다, 정말. 이런 강의도 모르고 그때 성질나서 성경구절 대면서 공부 좀 하라고 때렸는데 그게 잘한 짓이에요, 잘못한 짓입니까? 둘 중에 하나인데. 제가 답변할게요. 잘했습니다. 조건이 있어요. 주님 안에서 잘했습니다. 주님이 나도 모르게 딸에게 손질하도록 시킨 겁니다. 물론 이 이야기를 딸한테는 하지 마세요. 딸들은 뭐라고 합니까? “어머니, 그건 비겁한 변명이십니다. 어머니는 스스로 속이고 있습니다. 분명히 때려놓고 이제 와서 주님한테 핑계를 댑니까?” 그걸 변명하지 마세요.

 

이건 누구만 알아요? 총알에 구멍 난 본인만 알지 다른 사람은 몰라요. 이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 이야기를 잘못 들으면 철저한 허무주의에 빠지고, 난 뭘 해도 죄인이야. 극단적 허무주의지만 달리 들으면 자기가 한 일은 무조건 잘한 짓으로 탈바꿈 시키는 비겁한 이기주의가 돼버려요. 따라서 인간들이 알고 있는 사상체제는 이기주의냐, 아니면 허무주의냐 그런 개념으로 성도를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런 주장이면 목사님한테 묻고 싶습니다. 누가 성도인지, 아닌지를 당신 주장에 의하면 아무도 평가 못한다. 목사가 되어서 당신은 아무리 봐도 성도 아니에요. 우리 교회 나가도 할 말 없습니다. 당신은 붙어 있으니까 성도에요. 이렇게 지적하는 그것도 너무나 잘못된 평가가 된다면 목사가 하는 목회를 무슨 자신감을 가지고 어떤 확신도 없이 목회한다는 것은 무책임한 짓이 아니냐고 나올 수 있지요.

 

정말 성도인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의 고백 그대로에요. 너희들 가운데서 주님 죽으심과 십자가 못 박히심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고린도전서 2장 2절 말씀입니다.

 

이걸 설명하면서 이번 강의를 정리해봅시다. 이것 하게 되면 머리 깨져요. 강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전제로 깐 게 있어요. 저와 여러분은 살아있습니다. 제가 목사님한테 “목사님, 살아있습니다.” 하면 목사님은 기분 되게 나쁜 거예요. 그럼 내가 죽었어. 이렇게 되거든요.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다는 말은 인격모독에 해당되는 말이에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 전제로 깐 게 있습니다. 여러분은 죽어있습니다. 죽어있는데 예수님의 피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지금 내가 피를 이야기하면 입술을 나불나불해야 되잖아요. 죽은 자는 피부조직이 죽어있기 때문에 나불나불하지 않지요. 예수님의 피, 이것만 이야기해도 입술이 살아있어야 된다니까. 누가 뭐래도 스스로 말하는 내가 살아있는 것 맞아.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사도 바울은 죽어있는 걸 전제로 할 때만 예수의 피로 살았다는 말이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가 살아있다는 걸 전제로 한단 말이죠. 그러면 뭔가 다녀가야 한다고. ‘나는 살아있다’가 주님께서 찾아오시면 나는 죽었는데 내 안에 주님이 살아있어서 나로 하여금 예수님의 피 이야기했다는 복잡한 문장이 고백으로 튀어나오는 거예요.

 

지금 질문이, “누가 성도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지요. 답변이 뭐냐 하면, 예수님 살아있다고 이야기할 게 아니고 내가 죽었는데 주님으로 인하여 살아있다는 것과 아울러 이야기하면서 “이건 컵입니다, 이건 포도입니다, 이건 과자입니다.”라고 일상적인 생활을 하시는 것이 성도라고 하는 거예요.

 

문장이 길어서 이해 못하는 거예요? 정리가 안 되는 거지요. 정리해봅시다. 정신 차려야 돼요. 제가 지금 전혀 시차를 못 느낍니다. 왜냐하면 정신이 없어서. 강의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내가 여기 있고 사물이 있는데 사물에 이름을 붙임으로 이름을 내가 부른다. 물론 사물의 이름은 내가 정하지요. 내가 정하는 게 아니고 주위에 있는 공동체가 정하지요. 컵인데 주전자라고 하면 안 돼요. 공동체가 주전자라고 했기 때문에 교육을 받아서

 

복습합시다. 공동체가 나를 불러주면 나는 주체가 된다. 너는 딸이라고 할 때 비로소 딸이 되는 거예요. 꽃이라고 할 때 꽃이 되는 겁니다. 남이 나한테 “기타 참 잘 치네.” 하면 나는 기타에 달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주변에서 “포기해라. 넌 기타리스트 아니야.” 이러면 기타리스트가 아닌 거예요. 기타리스트로 취직이 안 돼요. 나는 기타리스트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기타 치는데? 안 돼요. 남들이 불러주지 않으면 나는 그 사회에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은 남이 정해줘요. 호명한 그분이 정해줘요. “사장님, 저는 과장하고 싶습니다.” “아니 말단 사원해.” 이러면 말단 사원이에요. 이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누가 나를 지정해줘야 돼요. 왜냐 하면 내가 남을 지정하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을 사장이라고 부를 때 그 사람한테 종속되는 겁니다. 내가 그 사람을 사장이라고 불렀다는 말은, 당신을 사장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사장 시키는 대로 말단직원 하는 겁니다. 사회라는 게 그런 관계로 되거든요. 그게 전부 이름이에요.

 

이름이 되는 이것이 나의 살아있음의 근거로 했단 말이죠. 주께서 이걸 교체하는 게 아니고 이걸 통째로 죽여 버린단 말이죠. 주께서 통째로 죽이면서 통째로 죄로 살려내요. 제가 말은 어렵게 했지만 결론은 쉬워요.

 

이걸 컵이라고 할 때 일방적으로 컵이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아까 제가 질문을 했잖아요. 딸을 때리는 것이 잘했다고 했지요. 내가 컵이라고 부른 것은 잘한 거예요. 그런데 지금 경우에 의하면 잘한 것이 아니고 이걸 컵이라고 할 때 교육을 받아서 컵이라고 했다. 여러 가지 있지만 주께서 나를 죽은 자로서 내 안에 주님께서 컵이라고 부르게 하셨다면 내가 컵이라고 부른 것은 주님 안에서 정당한 겁니다.

 

왜 자꾸 제가 이렇게 복잡하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되기 때문에. 세리도 의인 되고 창기도 의인되고. 의인 안 되면 천국을 못 가요. 그러니까 천국이란 내가 가는 게 아니고 누가 나를 데려가야 돼요. 그것을 로마서 8장에 이미 아신 자를 불러주고. 호명하지 않으면 주체가 없거든요. 우린 이 땅에서 주체가 있지만 천국에 주체 있는지 몰라요. 하지만 생명책에 명단이 있기 때문에. 생명책에 명단이 있다는 걸 예수님이 알아요.

 

창세전에 불러줄 때 우리는 부름을 받을 때 기존에 죄 짓는 것이 날아가는 것이 아니고 죄 짓는 그 버릇과 성질 그대로 고스란히 살려내면서 누가 봐도 죄에요. 내가 봐도 내 행동은 죄고. 왜? 돈밖에 모르기 때문에. 나는 사는 게 우선이기 때문에. 남의 가정은 몰라요. 내 가정만 챙기면 되는 거예요. 그야말로 천하 자식이나 남편이나 우리는 그것부터 우선적으로 사랑해요. 남은 뒷전입니다. 유치원 달리기할 때 남의 아이 넘어지면 박수치고 자기 아들 달려가면 대신 뛰고 그럽니다. 누가 봐도 나밖에 몰라요.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 어디 가느냐? 천국 갑니다.

 

그런데 기존 교회에서는 그걸 고치라고 이야기해요. 이건 위선입니다. 절대로 고치면 안 돼요. 그래서 제가 얼마 전에 중국 문둥에서 강의할 때 성경 보세요. 지키지 마세요. 누가 지킵니까? 주께서 지키면서 우리를 누더기로 만들고 너는 뭘 해도 죄밖에 나오지 않는 식으로 이 말씀이 성취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재산이 한 20억 된다. 남들은 복 받았다고 한다. 복 받은 게 아니에요. 재산 20억 교회에 바친다. 바치지 마세요. 그냥 먹고 싶은 것, 좋은 차 사세요. 신자가 사치한다고 공격하면 받으세요. 왜? 내가 사고 싶었기 때문에.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게 의가 돼요. 예수 안에서 의가 된다니까요.

 

이걸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철저하게 성화를 주장했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거예요. 신은 존재하시고 신이 말씀을 주셨다. 우리 사명이 뭐냐? 말씀 지켜서 주께 영광 돌리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물론 우리는 천사가 아니고 우리는 신은 아니지만 신이 아니라는 것은 변명에 불과하고 주어진 형편 따라 최선을 다하여 지키는 만큼 영광이 되니까 만약에 못 지킬 경우에는 돌아서서 회개하고 회개한 것으로 끝나지 말고, 회개했으니까 잘못을 알았으니까 두 번 다시 그런 짓하지 말고 좀더 말씀의 진보, 거룩의 진보를 보이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말씀 그대로고 완벽한 해석이다. 아래층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참 총알 맞아야 됩니다. 구명 나야 돼요. 그래서 와이미가 나와야 돼요. 나올 때 결국 사도 바울을 말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미 우린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9월 26일을 안 살아봤어요. 9월 26일을 안 살아봐서 25일에 하는 이야기,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라는 느낌과 9월 26일 하는 느낌이 다를 것을 미리 당겨서 우리가 예상을 합시다. 9월 27일 되면 또 몰라요. 다만 제가 확증할 수 있는 건 이겁니다. 천국 가면 한 평생 살아왔던 모든 것은 면류관 벗어서 주님 발 앞에 내놔야 됩니다. 그때 다시 이야기합시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입니다. 그때는 모든 것은 끝이에요.

 

제가 이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변화산 이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주님과 함께 있을 때 엘리야, 모세가 주님과 의논한 것이 누가복음 9장에 나오거든요. 예수님과 무슨 대화를 했느냐? 예수님의 별세,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한 겁니다. 이미 하늘나라에 도착한 사람은 바탕에 예수님의 죽음이 깔려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것도 모르고 뭐라고 합니까? 여기가 좋사오니 제가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습니다. 아직도 자기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빠진, 중보자가 빠진, 피가 빠진 채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말씀 주시고 말씀대로 지켜나가는 영광된 거룩한 분위기가 주께서 원하는 분위기가 맞죠? 이것이 그 당시 베드로가 생각했던 겁니다.

 

물 위를 걸었지요. 오병이어 먹었지요. 이만하면 됐잖아요. 그런데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할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몰랐던 거예요. 내가 누군지 몰랐던 거예요. 그런데 그 점은 우리도 베드로와 진배없습니다. 똑같아요. 지금도 마음 같으면, “주여, 제 목숨을 드리겠습니다.” 주님을 말합니다. “목숨 드리지 말고 너는 너를 위해서 살면 돼.” 중보자가 관여할 상황을 중보자 안다는 네가 작업 빼앗지 말란 말이죠. 너는 네 행세, 버릇, 네가 잘하는 것 있잖아. 너 잘하는 것 하라고. 우리 잘하는 게 뭔지 알아요?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되는 걸 제일 좋다고 하고 있어요. 이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참 잘해요.

 

요새 한국에 한 살배기, 두 살배기 노는 게 인기 있어요. 이휘재 아들 둘하고, 송일국 아들 셋하고, 추사랑 해서 출연료 대단하답니다. 손녀는 안 될까? 됩니다. 이제는 미국 편해서 미국 동부부터 시작해서 할 수 있어요. 제가 그 아이들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이 제일 잘하는 게 그겁니다. 내리 사랑입니다. 남의 아이 물에 빠져죽어도 아무 관심 없어요. 자기 아이 다칠까봐, 그 잘하는 것 쭈욱 하세요. 이미 아시고 중보자 보내셔서 그것마저 나중에 의가 될 겁니다. 잘해서 의가 아니고 그게 죄라는 걸 알게 하셔서 주 안에서 의로 나타나게 될 겁니다. 아무 염려하지 마시고 안정감을 가지시고 이래도 죄인데, 뭐. 편안하게 하는 대로 사시면 절대로 막 살지 않도록 주께서 작용해주십니다. 그야말로 막 살지 않도록 그때 내가 정신 차렸다고 하지 마시고 주께서 관여하셨다고 자기를 수동적으로 맡기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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