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미국동부오전c 본문
20140925 미국동부오전c
(강의:이근호 목사)
녹취:한윤범
하나님의 형상이야기가 교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다뤄졌습니다. 그것은 교인들에게 할 말이 있어요. 목표가 있어요. “여러분,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회복하세요.” 간단한 문제에요. 목회가 뭐냐? 잃어버린 하나님 형상 회복하기.
교인들은 당연히 궁금하지요. “형상이 무엇이며 회복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형상은 하나님의 진면목, 참된 본성인데 청조 때는 있었는데 그 뒤에 잃어버렸거나 잠복되었거나 그렇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성령을 받게 되면 성도가 되게 되면, 하나님을 본받으라.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대로 그 거룩을 회복하시면 여러분은 드디어 신앙생활의 목표점을 제대로 찾으신 겁니다. 특히 에베소서 5장에서 새사람을 입어라. 하나님 형상을 입어라. 너희는 전에는 어둠이었더니 이제는 빛의 형상을 입어라.
따라서 목회 목적도 확정되었습니다. 믿는 것은 사람의 뜻으로 안 되고 성령에 의해서 되지만 그 다음에 성령 받은 사람에게 삶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 형상을 본받으라는 것으로 확정되었다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러면 교회라는 것은 믿음 생겼다고 구원받았는데 교회 나올 필요 없습니다. 그러지 마세요. 왜냐하면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과제가 주어졌는데 교회 등록하시고 봉사하시면서 잃어버렸던 하나님 형상을 형제들의 모임을 통해서 회복하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본래 구원의 완성에 부합되는 겁니다.
그렇게 단출하게 정돈되면 여기는 어떤 하자도 없고 완벽한 신앙생활의 스케줄이 짜여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다들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있거든요. 그런 주장을 할 때 제일 큰 두 가지를 놓치고 있는 겁니다. 이 주장은 이천 년 교회 역사 가운데 계속해서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주장해왔던 건데 그들은 두 가지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첫째는, 유대교의 사상과 일치됨에 대한 무지. 유대교 신학은 뭐냐 하면, 홍해가 갈라지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입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동행하셔서 구원을 받는 상태에서는 추가적으로 율법이 주어지는 겁니다. 맞지요. 홍해 건너갈 때 율법 없었습니다. 홍해 건너고 난 뒤에 하나님이 모세를 시내산으로 인도하지요. 시내산에서 그 유명한 돌판이 제공되면서 줄줄이 돌판 중심으로 율법이 주어지는 겁니다.
사실 출애굽기, 레위기 설명하려면 율법을 설명할 때 왜 돌판에 십계명만 써있고 다른 계명은 안 써졌는지 그 문제도 다뤄야 돼요. 그것 궁금하지 않았습니까? 하늘나라에 돌이 모자라서 그랬던가요? 안 그러면 모세가 들고 오기에 너무 무거워서 십계명만 새기고 나머지는 외워서 가라고 된 걸까요? 이러한 차이점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왜냐하면 책에 나오질 않아요.
맛 좀 보여드릴까요? 왜 돌판에 십계명만 써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10초 동안만 말씀드릴게요. 돌판이 있어야 깨어짐이 성립되기 때문에. 깨어짐에서 새로 시작하자.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너희들 내 백성이야.” 백성이 듣고, “예. 주의 백성 맞습니다.” “아니야. 내가 보기에는 아니야.”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냈잖아요. 그러니 주의 백성 맞잖아요.” “네 속에 애굽 요소가 가득 들어있어.”
만약에 무슨 일만 일어나면 무조건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때는 수박도 있었고 부추도 있었고 향신료도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로 끌고 가냐? 만나, 메추라기, 이제 지겹다. 질린다. 차라리 뭐가 그리워져요? 애굽에 맞춘 몸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자칭 자기를 출애굽했다고 여기는 무리에 대해서 너희들은 출애굽을 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홍해는 뭔데? 출애굽이잖아요. 지리적으로 애굽이란 공간을 벗어나서 빠져나왔으면 출애굽이 아니냐. 하나님은 그게 아니고 애굽의 확장이라고 보는 겁니다.
자기 바지에 잉크물이 들었으면 그 사람 바깥에 산보하면 길바닥에 잉크물이 가는 곳마다 묻어나겠지요. 애굽에 살던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칭 새로운 나라에 대한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막상 그들이 가서 발 딛었던 그곳은 애굽의 확장이었고 애굽의 본성의 발휘였습니다. 애굽이 확장된 것이지 그 애굽에서 조금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애굽과 애굽을 벗어남의 경계선은 어떤 지점이냐? 단순히 지리적 지점이냐? 아닙니다. 어린양의 죽음과 합치된 인생을 맛볼 때 벗어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제사법입니다. 제사법은 특수한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아까 목사님 병 이야기하니까 가슴 아프지만 특수한 죽음이 전제돼요.
어제 오후에 강의하면서 죽음 이야기를 초반에 안 끄집어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어요. 기어이 끄집어내지 않는데 성공했지만. 처음 만난 사람에게 죽음 이야기해버리면 실례고 너무 잔인한 이야기 같은 거예요. 살아도 죽었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끄집어내요. 교인들이 더 잘 살려고 교회 오지요.
기존교회에서 성화론할 때 성스러움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이런 분에게 물어요. 이 땅에서 성스러워질래요, 이 땅을 벗어날래요? 둘 중에 하나만 고르세요. 이 땅에서 내가 이 정도로 대단한 존재, 이 정도로 내가 착해질 수 있구나. 자기가 착해지는 그 모습에 자기가 반하는 것이 소원이십니까? 아니면 훌쩍 제대하는 게 소원이십니까? 사람은 자기가 위대해지기는 게 소원이지 떠나기를 싫어해요. 떠나더라도 자랑 좀 하고 떠나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그러니까 떠나기보다는 차라리 성스러운 쪽을 택해서 남한테 기죽지 않으려는 그러한 성스러움의 욕구가 작용합니다. 수도원 수녀들이 그러거든요.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수녀원에 뛰어드는데. 사실 수녀원에도 그런 여자는 싫어해요. 수녀들도 공부 잘해야 되고 환경 낮으면 차별대우가 심해요. 똑똑한 수녀는 대우받고.
성스러움이란 애굽에서 익힌 버릇이에요. 주님의 성스러움은 다른 차원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 경계선이 뭐냐? 방금 이야기했듯이 어린양이 죽어서 문설주에 바른 피의 어린양과 합치된 인생을 살 때 경계선인데 그것은 이미 먼저 죽었지요. 어린양이 먼저 죽으시고 그 어린양에 동참함으로써 비로소 출애굽이 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죽으면 안 되잖아요.” 하잖아요. 그래서 대신 죽는 죽음을 반복시키는 장치가 바로 제사법이에요. 그 제사법을 쓰려면 희생, 죄에 대한 주님의 용서니까, 죄와 용서의 만남이니까 죄의 기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십계명이 주어지는 겁니다. 십계명이 주어지면서 돌판이 깨어지지요. 그 뒤에 십계명 안 주어지면 또 주어지지요. 그러면 주어진 십계명 안에 뭐가 품어져 있느냐 하면, 이미 십계명을 못 지키는 걸 확정된 상태에서 십계명을 안겨줍니다.
그러면 로마서 3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죄 되게 우리의 모든 입을 저주 앞에 두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모든 율법 주는 것이나 출애굽하는 모든 기능이 어디에 투입되느냐 하면, 코끼리나 코스모스가 아니라 어떤 주체, 인간에게 투입되는 겁니다. 그 인간은 그냥 인간이에요.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그냥 인간이라 하지 않고 언약의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참 어려운 용어가 나왔어요. 주체. 이것을 영어로 하면, self인데 셀프는 ego와 다릅니다. 그래서 언약의 자아가 아니고 언약의 주체가 돼버려요. 언약의 자아와 주체의 차이점이 뭐냐? 알아듣든지 모르겠다. 할 수 없어요. 알아서 들으세요. 여러분 알아들을만하다고 믿습니다.
자아는 영어로 we가 아닙니다. I가 돼버려요. 그런데 주체는 분명히 셀프라고 돼있지만 사실은 we 안에 셀프가 돼요. we 안에 셀프와 we 없는 셀프의 차이가 뭐냐 하면, 그냥 셀프면 나의 개성은 내가 살아온 인생이 내가 되지만 언약 안에 셀프가 되면 외부에서 마련된 그 자아가 그대로 들어오는 겁니다. 그게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형상이 우리 속에 우리 허락도 없이 그냥 침투해버리지요.
그게 우리 믿음은 죄로 깨어져야 되고 예수님이 지상에서 다져진 믿음이 우리 믿음으로 들어오고, 예수님의 소망이 우리 소망으로 대체 되고 주님이 아버지와 관계한 그 사랑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을 대체해버립니다. 그러면 요한일서에 나오는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했다는 겁니다. ‘헌집 다오 새집 줄게’가 성립되는 거예요. 그러면 헌집을 고물로 받아들이고 새 것을 주는 모든 작업에 주님께서 관여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주체를 발생시키는 새 언약의 특징이에요.
이로써 개인 구원은 없어요. 집단 구원 이외는 개인 구원은 없어요. 찾아오기는 개인으로 찾아오되 we라는 확정된 속성으로 우리에게 집어넣기 때문에 찾아오는 순간 나는 에고/자아가 아니고 셀프가 되는 겁니다. 우리 속에 내가 되는 겁니다. 나의 속성은 강탈당하고 일반적 속성, 주님과 더불어 있는 그리스도 몸과 지체된 그 속성이 우리 속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형제를 대할 때 그냥 대하지 않고 경유해서 대하는 겁니다.
머리 되신 주님을 대하게 되면 내가 죄인 된 것처럼 저분도 죄인이다. 그런데 저분은 어떻게 구원받았을까? 그 경유를 다시 그리스도고 당겨오면 주님의 피로 용서받은 입장으로 나에게 만남이 이뤄졌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만약에 피자를 못 먹는다. 그러면 어제 저녁에 한 것처럼 저분은 피자를 못 먹는 에고가 아니고 피자 못 드시는 셀프를 예수님으로 부여받은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저분의 개성이 아니죠. we라는 고물 소속이기 때문에 저분이 만약에 편찮다하면 내년에 내가 동일한 것을 할 수 있고, 저분이 만약에 창기라면 나도 내년 되면 창기 될 속성이 있고, 저분이 강도라면 나도 강도 될 속성이 공유돼있지요. 그러니까 어떤 죄인이라고 어린양의 피로만 구원받은 한 형제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형제 되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은 친교단체, 친목회로 끝나버리는 겁니다.
에고가 모인다고 we가 되는 게 아니거든요. 중국에서 이 강의하는데 중국 목사들이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I 모이면 we가 되는 게 우리 상식이잖아요. 그게 아니고 I를 깨야 준비된 we가 있는 겁니다.
오늘 주인 되시는 집사님이 피자를 준비했는데 그것도 모르고 제가 집에서 피자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준비된 피자에 대한 내가 사적으로 모독한 게 되거든요. 이미 we 안에 거룩이 있는데 내가 따로 성스러운 욕구를 발휘시켜서 이 정도로 착합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에 대한 모독이에요.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몰라요.
키르케고르란 유명한 기독교 실존주의 철학자가 이야기하기를 예수님이 착하다고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독이라고 했어요. 그것은 주님을 빙자한 자기 착함의 우회적인 과시거든요. 이렇게 되면 이천 년 신학 다 바뀌어야 돼요. 어디가 틀렸다는 게 아니라 다 뒤집어져야 돼요.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은 거예요.
그러면 유대교 신학은 뭐냐? 홍해를 건너온 것은 하나님의 기적으로 구원받았다. 이제부터 율법을 준 것은 구원받은 사람끼리 율법을 지킴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유대교 신학이라는 것을 그전의 사람들은 몰랐던 거예요. 칼빈이 성화론을 주장하면서 그게 바로 이미 선배들, 유대교 신학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연장이란 것을 몰랐던 겁니다. 천주교와 싸우느라 바빠서. 유대교를 반복한 거예요. 기독교적 유대교가 돼버렸어요. 그게 바리새인 되는 거예요. 누가누가 잘하나. 금요일 다섯 시에 어린이방송처럼 제목 자체 누가누가 잘하나에요. 교회 와서 누가 헌금 많이 하고, 기도 오래하고, 누가 목사님 잘 섬기고, 누가누가 잘하나.
두 번째 문제가 뭐냐 하면, 형상을 잃어버렸잖아요. 형상을 되찾는 경로는 잃어버린 경로를 밟아가야 돼요. 그런데 잃어버린 경로를 완전히 무시하고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윤리, 도덕으로 시도하게 되면 이것은 세상적인 철학적 형상론입니다. 그건 세상적 윤리, 도덕이에요. 정말 형상을 잃어버렸다면 그걸 되찾는 방법은 잃어버린 경로를 밟아나가서 되찾게 돼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드라마에 보면 출생의 비밀이 있어서 엄마가 자기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재혼했다. 그런데 버려진 딸의 아버지 직업이 소매치기여서 소매치기했다. 그런데 우연히 남자친구를 통해서 엄마가 살아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만나고 난 뒤에는 너무 잘 살아서 어떤 이질감을 느껴서 “난 엄마라고 부르기 싫어.” 이건 셀프가 아니고 에고가 되겠지요. 자기는 자기로 인한 주체, 엄마 없는 에고를 임시적으로 주체성, 셀프라고 한 겁니다. 그러면 엄마의 자리가 엄마를 만날 때 진정 엄마와 화합하려면 그때 엄마가 왜 자기를 버릴 수밖에 없는지 엄마를 이해해줘야 되지요. 그런데 이미 엄마와 떨어진 상태에서 형성된 자기 주체로 엄마를 싫다고 하면 곤란한 겁니다. 방금 예는 케이블에 나오는 [유나의 거리]라는 게 있어요.
-목사님, 에고와 셀프를 한국말로 어떻게 표현될까요?
에고는 자아, 셀프는 자기. ‘자기야’라고 하는 오글거리는 것 있잖아요.
-개별자?
개별자는 집단과 연관해서 하는 용어고. 개별자라는 것은 어떤 집단을 먼저 전제로 하고 하는 거예요.
-we가 집단으로 보면? 우리라고 이야기하시니까.
집단에서 개별자로 돼버리면 부분집합으로 들어갈 수 없어요. 이 정도만 하면 돼요.
지금 제가 하는 것은 애굽에서 나올 때 에고로 나왔다가 이제는 하나님 이름으로 하기 때문에 자기 이름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에고 시대는 날아가고 주님의 이름으로 대신 표현해야 될 셀프로 살아간다는 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라는 집단체제 안에서 구원받는 거예요. 집단체제를 아까 말한 것처럼 예수님을 경유해서 창기, 세리도 구원받고 하려면 그것을 경유하는 분은 집단이 아니고 한 명이어야 합니다. 그것을 구약에서는 여호와 이름으로 또는 하나님 이름이라고 합니다.
지금 신학교 교수들도 어려워서 안 가르치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차이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아무도 가르친 적이 없어요. 책에도 안 나옵니다. 구약에는 분명히 하나님과 하나님 이름이 구분돼있는데. 알려드려요?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이름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언약의 실행자에요. 그래서 이름의 특징이 뭐냐 하면, 지상에서 활동하시는 분을 이름이라 해서 그 이름은 존재라는 표현을 하지만 사실은 존재가 아니고 기능입니다. 바람 같아서 붙잡을 수가 없어요. 이름은 우리를 붙잡을 수 있지만 우리는 그 이름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름은 기능적이기 때문에 환경 따라서 계속 기능이 바뀌어요.
율법 지키라고 해놓고 율법 지키면 죄가 되는 기능으로 또 바뀝니다. 언약궤를 앞장세우면 적들이 물러간다고 해놓고 언약궤 앞장세우다가 블레셋에 언약궤를 빼앗깁니다. 그런 관점으로 구약 전체를 통으로 뚫어야 돼요. 민수기 10장에 나오지요. 왜 언약궤 앞장세우면 적들이 물러간다고 해놓고 그걸 곧이곧대로 믿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 앞장세우다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빼앗겼지요. 왜 하나님은 이랬다, 저랬다 하느냐는 말이지요. 성경에서 일관성을 뽑아내지 못하게 되면 설교하는 본인이 혼란스러울 정도입니다.
두 번째 해봅시다. 잃어버린 경로를 밟아서 잃어버린 경로로 돌아가야 된다. 따라서 자기 엄마를 만날 때 “엄마는 날 버렸어.” 이렇게 하지 말고 옛날에 왜 나를 버렸는지 무엇 때문에 버렸는데 엄마가 버릴 때 아빠는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 때 엄마는 나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통감하면서 그 사람은 엄마와 셀프로서 제대로 된 결합을 할 수 있습니다.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난 뒤에 당신 같은 남자는 두 번 다시 보기 싫어. 울고불고 하는데 상대방 말도 들어봐야 되거든요. 안 들어보고 일방적으로 상해서 그렇게 하면 정말 극단적인 경우가 생기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린 그것마저 버림이 아니고 구원하기 위한 재료로 활용하신다는 겁니다. “잃어버려도 괜찮아.”라고 해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됩니다. “주님이여, 이번에 제가 너무나 나쁜 짓을 했어요.” 할 때 주님은 나쁜 짓을 해도 괜찮다고 하면서 구원을 해주시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 예를 들 때 제가 한 동안 든 예가 뭐냐 하면, 아프리카 밀림에 가면, 날아가는 파리가 나무 밑에 있으면 긴 혀가 나와서 양탄자 굴리듯이 접어서 입 속으로 집어넣는 그런 동물 있잖아요. 도마뱀도 있고 그걸 전문하는 게 있어요.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범죄 했습니다. 나무 밑에 있어요. 파리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혀 돌돌 감아버린 겁니다. 돌돌 감을 때 이렇게 범죄한 것까지 필요한 범죄였다는 겁니다. 구원에 필요한 범죄를 우리가 저지른 거예요. 필요해서 범죄했다 이 말입니다. 더 심하게 이야기해서 죄 지어야만 하는 존재가 인간이란 뜻이에요. 유일한 인간은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아담은 예수님의 표상이다. 그냥 모델이었고 그림자였고 진짜 인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인자,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유사품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인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우리는 안개에요.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 소모품이고. 인생이란 시편 90편처럼 넓으면 손바닥이잖아요. 좁히면 손바닥 자체가 날아가 버리잖아요.
90년 살았으면 90년 살았다는 게 남는 게 아니고 죽는 그 날만 남아있어요. 89년 11개월 29일은 이미 소모되고 말았어요. 건전지 같으면 약이 다 달아서 딱 하루치만 남아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매일같이 하루치만 부여받은 거예요. 내일 염려는 내일 할 것이고. 그냥 하루치만 남아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기도문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며칠 양식을 달라고 하던가요? 딱 하루치 양식만 달라는 거예요. 완전히 만나에요. 우리가 부여받은 것은 만나입니다. 하루치만 적당한 존재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거든요. 인간은 따로 있고 너는 그 인간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모사품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인간은 잃어버린 형상이 돼야 됩니다. 잃어버린 형상을 자기의 재킷으로 여기고 뒤집어쓰면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제가 한 방금 그 이야기가 로마서 8장 3절에 나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예수님께서 입은 것이 뭡니까? 그냥 죄 없는 육신 몸이 아니고 죄 있는 육신의 몸. 그러니까 죄 있는 육신의 몸은 아담이 그 몸이거든요. 아담의 몸이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데 필요한 조치가 인간이 죄 짓는 게 필요했던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가장 궁극적인 죄는 뭐냐 하면, 내가 죄 지었다는 사실, 죄 지음을 당했다가 아니라 그게 옳은 이야기인데 인간은 에고에 머물기 때문에 내가 죄 지었다. 주님께서는 네가 죄 지은 적이 없어. 왜? 우리는 죄를 몰라요. 유일하게 죄를 아시는 순간은 예수님뿐입니다. 죄의 전부를 예수님이 언제 알았느냐?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을 때.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할 때 유일하게 저주를 알고 유일하게 죄를 알고 죄의 깊이를 통달하신 것은 그 순간밖에 없어요.
몰트만이라는 신학자가 있는데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고 특히 한국에서 감리교, 통합 측, 자유주의 진영에서 대 히트를 친 사람이 몰트만입니다. 그 사람이 지은 책 중에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 있어요. 그걸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봤거든요. 십자가에 대해서 몰라요. 20세기 최고의 신학자가 십자가에 대해서 몰라요.
몰트만은 기존의 신학자와 동일하게 주님을 어떻게 이해하면 우리한테 유리하게 작용하느냐? 지금 에고를 전제로 하고 있어요. 내가 없는 상태에서 십자가 속에 들어가서 십자가를 이야기해야 되는데 저 십자가가 나한테 무슨 보탬이 되느냐고 생각하면서 십자가를 바라보니 십자가는 그걸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본인은 몰랐던 거예요. 십자가 피를 찍어 바를까. 그 사람은 기존의 삼위일체 이론에 의해서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을 버릴 수가 있느냐? 그걸 내재적 사랑이라고 표현한다고 하거든요. 그 내재적 사랑이라는 것은 몰트만이 이야기하기 전에 이미 헤겔이란 사람이 변증법에 한 이야기란 말이죠. 헤겔 철학에서 나온 이야기란 말이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삼위일체 내재적 아버지는 아들을 버리고 버린 아들을 되찾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완성한다는 것이 아무리 옳다하더라도 현재 우리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어떤 사슬은 끈은 연결은 거기서 전혀 나타날 수 없어요.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아버지 폐쇄적인 관계인데 어떻게 외부에 놓여져 있는 것에 그게 주어집니까? 주어질 수 있는 근거가 그 안에서 찾을 수 없다면 하나에 허구적인 이론에 불과한데요. 그래서 십자가를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죄는 뭐냐 하면, 죄를 모르면서 이미 죄 속에 있다는 겁니다. 차라리 로마서 5장대로 이야기하면 맞아요. 몰트만처럼 하지 말고. 인간이 죄 지었는데 어디서 죄 지었는지 따지지 말고, 그냥 인간은 태어났으니까 죄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이게 로마서 5장 10절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그대로 이야기하면 되는 거예요. 내가 죄 지었다고 하지 말고 태어난 것이 산후조리원이 아니고 간판이 죄라는 이름의 산후조리원에서 태어난 거예요. 이미 죄 속에서 태어난 거예요.
그걸 누가 아느냐?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고백한 겁니다.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습니다. 모친의 죄가 아니겠지요. 모친의 죄 중이니까 모친 빼버리면 그냥 죄 중에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죄 안 짓는 내가 아니라 상한 심령입니다. 상한 심령이 그동안 내가 감추었던 나의 본래의 모습인데 뭐 잘났다고 상한 심령을 곱게 포장을 했는지 이제는 그 포장을 벗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께서는 번제를 원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원하는 것은 그냥 고물 그대로 가져오너라. 헌집 다오 새집 줄게. 헌 몸 그대로 갖고 오게 되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이것 잘했습니다. 주체를 앞에 세우지 마세요. 주어를 앞에 세웠는데 내가 했다고 하지 말고, 나를 목적어로 세우세요. 주께서 하셨고 나는 주님이 하신 일을 당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주께서 하신 일에 맨날 당하기만 했습니다. 양파껍질 벗기듯이. 나는 이런 성스러움을 나름대로 노력했다는 그것조차도 위선이었습니다.
다윗에게 범죄 한 책임을 물을 수가 없어요. 어제 오후에도 이야기했지만. 어제 오후 강의가 어려웠습니까? 피곤해서 그런지 안 그러면 탐색하느라 그랬는지. 저 인간이 무슨 소리하는지 조사한다고 그랬는지. 천주교는 자유의지가 있어야 책임을 묻는다고 했는데 저는 그걸 반대한다고 했지요. 그건 천주교의 잘못이라고 했지요. 책임이 있는 곳에만 벌을 물을 수 있다는 게 상식인데 그건 잘못이라고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것은 밧세바가 뒤태가 잘 빠져서 그래요. 좀 뚱뚱했으면, “에이 씨. 밑에 이상한 여자 이사 와서 눈만 버렸다.” 이럴 건데 왜 매력덩어리냐 이 말이죠. 이건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고. 어제 목사님이 강의 시작하자마자 질문했잖아요. 신이 되고 싶어서 따먹었다. 인간은 신이 뭔지 몰라요. 뭔가 알고 있어야 되고 싶다가 되거든요. 그 미흡함을 채우기 위해서.
도대체가 악마가 인간에게 뭘 노리느냐는 그 문제는 악마의 일방적인 주장이지 당사자 아담은 악마의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제가 분명히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악마를 알았으면 악마를 탈출할 비법을 만들었을 거예요. 인간은 이야기합니다. 나는 악마고 뭐고 누구한테 매인 바 없다. 그게 바로 악마에 매인 거예요. 악마의 생각? 아니야. 내 생각. 이렇게 돼있어요.
그 원인은 주님이에요. 먹임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과실로 인간 앞에 제일 중앙, 깊숙한 곳에 안 들키는 곳이 아니고, 늘 보고 따먹을 수밖에 없는 대형백화점에서 명품 의류를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디스플레이해서 여자들로 하여금 안 사고는 못 배기게 하는 겁니다. 그 옷에다 루이뷔통 신상 가방 하나 놓고 고급 지갑 해놓고 이래도 안 사나 보자. 처음에는 견뎌요. 예수 믿는데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알기는 알아요. 야고보서에 나오는 이야기니까. 소용없어요. 성경은 우리 변화에 보탬이 안 됩니다. 성경은 보고 지키지 말라고 준 게 성경이에요. 보세요. 지키지 마세요. 안 보는 게 더 문제지만.
보고 지키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이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용도지 내 잘남을 증거하는 용도는 아닌 겁니다. 우리는 탓을 하려면 조상 탓하시고 조상은 독사한테 미루세요. 모든 책임은 아담한테 미루세요. 그분 잘못으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잉크 속에서 태어났고 상한 심령으로 태어난 겁니다. 죄를 거기에 더 보탠다고 악한 사람 되는 게 아니에요. 누구나 인간은 악한 자가 될 수 있는 잠재성을 품고 있습니다.
20세기 들어와서 유명한 노벨상 받은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헤밍웨이, 특히 카뮈의 [이방인] 같은 작품을 보게 되면 이겁니다. 인간은 혼자는 잘난 척해도 상황이 들이닥치면 자기 원치 않는 행동이 나오게 돼있다. 이것이 부조리다. 라인홀드 리버가 미국의 신학자거든요. 그 사람의 책에 이렇게 돼있어요. 왜 개인은 도덕적인데 집단화되면 완전히 비도덕적인 사회가 되느냐? 도대체 그 원인이 뭐냐? 정답은 모르겠다는 거예요. 알 수 없어요.
남자 하나는 괜찮아요. 예비군복 입으면 휘파람 불고 왜 그렇게 돼요? 갑자기 집단화되게 되면. 그걸 밝혀낸 사람 없어요. 밟힐 수가 없어요. 개인으로 출발하기 때문에 해답이 안 나오는 질문을 하는 겁니다. 집단 속에 일부인데 그걸 개인을 먼저 설정하고 난 뒤에 집단은 이렇습니까? 그건 현실과 다른 질문을 한 거예요. 개인은 없습니다. 집단이 움직이면 움직이는 거예요.
자기가 성실하게 사업했다. 소용없습니다. 저쪽에서 imf 터지면 가만있는데 다 말아먹게 돼있어요. 자기 잘못 아닙니다. 성실했어요. 정직하게 물건 제조하고 팔았습니다. 부도나는데 어떻게 합니까. 타이밍이지요. 시대를 잘못 탄 거예요. 어쩔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사업은 도박이죠. 고스톱과 사업의 차이는 없어요. 패가 잘 들어오면 따고 못 들어오면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땡겨봐야 패 안 들어오면 접고 다른 것 해야 돼요.
그래서 우리는 파도에 실리는 물방울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옛날 파르메니데스가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물방울과 파도의 차이점, 불교에도 이런 게 있어요. 물방울이 파도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냥 바다 속의 일부에 불과하지요.
그러니까 제가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제발 이것은 내 책임이요, 내 탓이요 하지 마세요. 내 탓이요 하는 것이 가장 간교한 죄의 극치입니다. 차라리 이렇게 하세요. 내가 잘못한 것은 다 주님 탓입니다. 주께서는 이제야 네가 마귀와 함께 있다는 본색을 비로소 솔직하게 고백하는구나. 그래 너와 함께 있는 마귀를 내가 십자가로 승리했다. 이젠 마귀와 상대 안 해도 돼. 죽는 것 두려워하지 말고(마귀는 죽기를 무서워하는 너를 자꾸 협박, 공갈하지만) 이미 너의 생명은 살았고 너는 이 땅에서 죽었고 너희 생명은 하늘에 간직돼있느니라. 하늘나라 은행에. 골로새서 3장 5절의 말씀, 땅의 것을 생각하는 모든 것은 우상숭배니라.
그런데 제가 이런 말하기가 겁나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땅의 것, 탐심을 없앤다고 난리를 쳐요. 그러면 그야말로 내가 욕 얻어먹는 소리를 할 수밖에 없어요. 그냥 막 사세요. 뭔가 옷 한 달 동안 입으시고 빨래하지 마시고 입을 채로 펄럭여줘야 냄새나잖아요. 그 냄새를 피우시기 바랍니다. 냄새를 피워줘야 계속 상한 심령이 되거든요. 성경말씀에 상한 심령이 돼야 된다면 우리는 상한 심령을 벗어나지 말고 상한 심령이 되라는 그 말씀 속에 놓여 살면 되는 거예요. 어렵지 않아요. 우리의 살아온 버릇이 그것이기 때문에. 상한 심령이라고 고백했다고 상한 심령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고 말씀이 그렇게 지정했으면 지정된 것에 그냥 주를 경유해서 상한 심령을 수용하면 되지 개과천선하지 마세요. 개과천선은 나를 주인공으로 삼는 하나에 소설이 되고 우상숭배가 됩니다.
첫 번째는 유대교사상을 몰라서 형상을 오해했고, 두 번째는 타락한 경로를 주님이 책임질 문제를 내가 책임져서 형상을 회복하겠다고 경로를 가는 것은 주제 넘는 짓입니다. 아담이 못한 것은 두 번째 아담이 해결합니다. 믿습니까? -아멘. 그 사이에서 우리는 빠져주세요. 어른들 노시는데 우리는 제발 빠져주세요. 전쟁, 우리 전쟁 아닙니다. 마귀를 이겨요? 못 이깁니다. 주님이 마귀를 이기게 해주시는 겁니다. 우는 사자가 달려들어도. 우리는 주님한테 목줄이 묶였지 저쪽에 묶인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설교 때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그 예가 지금도 들어보면 스스로 은혜 받는 예가 있는데 얼마 전에 들었던 예에요. 노사연이 불렀던 <님 그림자> 나는 최고의 은혜, 성경 빼놓고 너무 은혜가 돼요.
님 그림자
저만치 앞서가는 님 뒤로
그림자 길게 드린 밤
님의 그림자 밟으려 하니
서러움이 가슴에 이네
님은 나의 마음 헤아릴까
별만 헤듯 걷는 밤
휘황한 달빛아래 님 뒤로
긴 그림자 밟을 날 없네
저만치 앞서 가는 님. 보세요. 님이 있잖아요. 왜 현대인은 홀로 삽니까? 잘못은 내가 책임지고.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님이 있는데 그 님은 어두운 이 세상에서 달만 있어도 님에서 님 그림자가 나오죠. 그래서 제목이 <님 그림자>에요. 뒤따라가는 여인은 앞서가는 남자의 그림자를 밟아가죠. 그 순간 그 여인네는 뭐가 날아가 버려요? 에고가 없고 님의 셀프의 연장이 돼버립니다. 나는 님의 셀프 속에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분이 한 발자국 떼면 나도 한 발자국, 그분이 두 발자국 떼면 나도 두 발자국, 먼 곳을 바라보면서 님이 계신다는 그 사실을 만끽하기 바빠서 내가 몸이 아픈지 교인수가 몇 명인지 세 명 있다가 두 명 나갔는지 그냥 님 그림자. 노랠 불러야 되는데.
-목사님 말씀하실 때 우리가 죄 지은 것도 다 하나님 안에 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예수님이 죄 값을 치러주시고 큰 테두리 안에서 하나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 권한에 속한 것이라고 할 때는 선택받은 자한테는(아멘) 다 되는 논리인데 선택받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사실 이 사람한테는 죄 지은 것이 구원을 받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 사람들은 죄를 지은 게 심판을 받기 위한 것이
지금 목사님 위치가 바뀌었어요. 주님이 선택했다고 했는데 갑자기 그 순간 선택받은 자가 주님의 위치에 올렸어요. 선택받은 자, 이렇게 주체 위치로 옮겨버리면 반칙입니다. 안 됩니다. 주님에 의해서 선택받은 자는 방금 그렇게 생각한 것은 맞는 이야기인데 선택받은 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주님이 허용하지 않는 관계에요. 이렇게 되면 나는 선택됐는데 왜 너는 선택 못 됐느냐고 해서 주님이 판정할 것을 선택받은 내가 판정관으로 서고 심판자로 나서버리면 야고보서 2장에서 네가 뭔데 형제를 심판하느냐? 거기에 걸려들게 돼있어요.
주님께서 일을 맡기시면 결과적으로 선택된 자인 것을 확인될 뿐이지 그걸 확인되었으니까 가져오게 되면 그건 9월 26일 생각이면 모르지만 9월 27일로 가져올 수 없습니다. 이미 9월 27일에서 보면 선택받은 나를 믿어버리는 믿음의 대상이 돼버리죠. 그래서 주체 위치를 조심해야 됩니다. 결과적으로 선택된 자가 되어야지, 되었으니까 일단 되었다고 치고 이렇게 나가면 안 됩니다. 방금 님 그림자 틀어준다고 해놓고. 님 그림자 있으니까 10년 간 밟았으니까 이제는 혼자 걸으면 안 돼요. 10년 간 밟아도 또 앞에서 님이 당기고 있어요. 갈 데까지 빨리 와. 20년 되도 또 와. 항상 주체 자리에 있고 나는 주님의 결실물이고 열매에 불과한 겁니다. 포도나무의 가지에 불과한 거지요. 주체가 우리 자리에 있으면 안 됩니다.
조금만 하고 쉬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형상에서 1장에서 우리의 형상대로라고 해서 드디어 우리라는 개념이 나오지요. 우리라는 개념을 하되 지상에서 나라는 개념으로 보시면 돼요. 여기 우리라는 용어를 지상에서 평소에 우리는 나만 가지고 에고가 되잖아요. 에고를 뜯어보면 나만 달랑 있잖아요. 이게 엄청난 오해인 거예요.
이렇게 그리면 제일 좋은데 목사님 같은 경우에 많은 주석이 있어서 오히려 방해가 되는데. 표면에 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형상대로 너를 만들었다고 하면 우리는 이해되잖아요. 이해된다는 자체가 잘못된 성경이에요. 이게 우리가 돼버리면 난데 왜 우리가 나오지? 이렇게 당황스러워할 때 이미 성경을 대하는 우리 자신이 형상을 떠났다는 것을 각오하란 말이죠.
저는 어떻게 하느냐? 나에서 우리로 어떻게 전환시키느냐? 하나에 괴암, 바위덩어리, 표면의 나라도 괴암이 되면 우리가 되지요. 만약에 지진이 일어나서 분명히 지표면 중에 한 면인데 솟구쳐 올라오면 뿌리까지 보이지요. 나라고 하는 것이 결국 우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위에서 볼 때는 나와 관계가 되지요. 나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사실은 입체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창세기 1장 26절에 보면, 우리에 속한 분이 지상에서는 나로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과 막 먹는 거예요. 주님 안에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걸 모르고 내가 나밖에 모른다는 인식 하에 그런 한계 된 인식론으로 내가 한 사람으로 나니까 예수님이 한분이시니까 당신도 너가 되는 거지요. 그 자체가 형상을 잃어버린 상태에 나온 거란 말이죠. 그래서 입체적으로 나라는 오해를 끌어당기면 우리가 되겠지요. 그래서 구약은 신약을 경유해서 예수님을 경유해서 구약을 다시 보게 되면 우리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 집합을 우리라고 한다 이 말이에요.
-우리 속의 나.
그렇지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여기 나는 주님에 의해서 다시 편입되게 되면 비로소 우리가 보이는 겁니다. 이게 요한복음 17장에 예수님 기도할 때 네가 나와 하나가 된다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 우리에 대해서 칼 바르트를 비롯한 많은 주석가들이 너무나 많은 주석을 냈어요. 그 주석 가운데 하나가 히브리적 용어 자체가 엘로힘과 여호와가 차이가 나는데 엘로힘은 하나님을 표현할 때 복수적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이건 히브리 용어뿐만 아니고 근동지방에 모든 신을 표현할 때 엘로힘, 복수 개념을 사용한다고 알브라이트를 비롯한 유명한 여러 학자들이 주장했거든요.
그거는 아니에요. 그건 잘못된 겁니다. 원어 자체가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한 거기 때문에 우리 속에는 우리가 모르는 예수님만 알고 있는 하나님 형상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르는 게 당연하지요. 당연하고 우리 힘으로 해결 안 된다는 자체가 이미 우리 자신의 해석법에 문제 있다는 것을 수용하면 돼요.
그 우리는 나중에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나오잖아요. 아버지와 우리가 하나 된다는 그 우리를 앞당겨서 보여주는 그림자로 보신다면 간단히 해석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가 돼요. 나는 없어지고 우리 속의 나가 되는 그게 우리의 목표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당장 나라고 설명할 수 없지요.
또 어떤 사람은 해석하기를 하늘나라 천사가 함께 있어서 우리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또 이 지상에서 쓰는 존재론으로 하늘나라까지 확장시킨 것이기 때문에 애굽의 확장이지 전혀 낯선 해석이 아니거든요. 그것도 해석이 잘못됐습니다. 성경을 예수님을 경유해서 다시 보게 되면 나가 모여서 우리가 되는 그런 우리 개념이 아니고 우리가 먼저 있고 우리를 증거하기 위한 그 속에 포함된 나라고 그 해석에 의한 우리라고 보면 제일 적당합니다.
생각을 바꾸세요. “하나님은 나의 형상대로”라고 꼭 그렇게 해야 된다는 고집, 우리의 납득을 위해서 그렇게 억지를 부리는 잘못된 생각이라고 인정하면 문제는 깨끗하게 해결되는 거예요. 내 쪽에서 잘못했다고 하면 간단한 문제를 나를 설득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바꾸라고 하는 것은 이건 너무 큰 억지가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