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잠언'속의 그리스도 13 - 전쟁 / 140811 본문
[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13 - 전쟁
14,08,1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52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 아들의 속성이 무엇인고 하니, '싸움꾼'이 돼요. 야곱처럼 싸움꾼이 되는데, 그 싸움꾼이 바로 출애굽기 7장 4절과 12장에 보면, '이스라엘 곧 나의 군대' 라고 합니다. 칼 한 자루도 없고, 총 한 자루도 없는 군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벌려놓으신 전쟁판에 본의 아니게 뛰어들게 된 군대입니다. (출 7:4)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더하여 여러 큰 재앙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 보통 교회에서 신앙을 이야기할 때는 은혜로운데, 전쟁이나 군대와 같은 살벌한 분위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군대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군대인 마하나임이 야곱을 찾아오게 된 것이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창 32:1)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에게 군대가 찾아왔는데, 그것도 지상의 군대가 아니라 천군 천사로 된 군대가 말이다. 그 인솔자 중의 한 분이 얍복강가에서 야곱과 한 바탕 일대 일로 씨름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야곱으로 하여금 싸움꾼으로, 이스라엘 자체가 '싸움을 한다' 라는 의미인데 말이다. 이스라엘이 그런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 구원은 전쟁에서 !! 그러니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좋아할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구원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구원은 전쟁에서 나왔는데, 여기에서 영생과 천국을 같은 말로 여기면 되는데, 그러니 "구원을 받았다. 영생을 얻었다. 천국에 간다" 라는 것을 같은 의미로서 보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구원은 전쟁에서 나온다" 라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는데, 하지만 우리의 상식으로 보면 어떠한가? 우리의 상식도 과연 그러한가?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러니 성경은 우리의 잘못된 상식과 대결하면서 본래의 자기 의미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꾸만 원어를 주장하는 분이 있는데, 원어에서 의미를 끄집어내게 되면, 그것은 자기가 주입한 의미만 되돌아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원어를 분석한다고 해서 새로운 의미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먼저 자기 의미를 따로 챙겨놓고, 성경의 문자를 일종의 소스로 보는데, 즉 찍어서 맛을 보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니 자기 의미를 집어넣어서 소스로 찍어서 발라놓고는, 그것이 성경의 의미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성경은 전쟁을 통해서 구원이 나온다고 하는데, 그러면 전쟁이 없으면 구원이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상식적으로는 구원이 어디에서 온다고 보는가? 하나님의 존재에서 온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이 저기에 계시고, 나는 여기에 있는데,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서 건져내신다" 라고 말이다. 이렇게 되면 전쟁이 있을 이유가 없는데, 완전히 낚시인데 말이다. "어이쿠, 건졌다. 올라오너라" 라고 하는 식이란 말이다.
◈ 언약을 이루기 위한 전쟁 !! 그런데 전쟁이 성립되려고 하면 전쟁의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면 그 명분이 무엇인고 하니, 즉 무엇을 이루기 위한 전쟁인고 하니, 언약을 이루기 위한 전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이 언약에 대해서 사전이 정보가 있었는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닌 하나님의 아이디어이기 때문에 말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전쟁이 있어야만 하고, 그 전쟁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만 계신다고 하면, 그 하나님이 자기를 불쌍히 여기서 구원을 해주신다고 하는, 즉 "고생했구나. 그러니 이제 좋은 곳으로 가거라" 라고 하면 깔끔하게 정리된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란 말이다. 그러니 언약을 위해서 전쟁을 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에서 끄집어낼 수가 없고, 우리는 그런 필요를 전혀 느끼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언약이 없기 때문에 진짜 구원을 모르고, 물론 전쟁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냥 "꿈을 꾸고 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까 천국이더라" 라는 것만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과정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 과정에 주목하시는 하나님 !! 하지만 하나님은 결과에 주목하시는가? 과정에 주목하시는가? 물론 과정인데, 결과에 주목하게 되면 다른 코스로 접어들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왜 초등학교 운동회를 보면,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아야만 과자를 먹을 수 있는데, 성질이 급한 아이들은 가로질러서 바로 간다는 것이다. 한 바퀴를 제대로 돌아줘야 등수를 제대로 매길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도는 과정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구원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 구원만 챙기고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으면 고난에도 참여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빌립보서 1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은혜를 주신 것은 그를 믿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말이다. (빌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로마서 8장에도 보면,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라고 하고, 그리고 베드로전서 2장에서는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 죽음도 말씀에 입각해서 !!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당일에 죽었는가? 그렇지 않은데, 오히려 900살 이상을 살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아담이 살고 죽은 것은 의미가 없고, 선악과를 따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그 내용을 차근차근히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말이다. 그러니 죽을 때 죽더라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의 죽음은 언약적인 죽음이어야 하는 것이지, 자기가 죽고 싶다고 해서 죽는 죽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도 새언약의 죽음에 참여해서 통과해야만 새언약의 세계, 즉 아들이 세계인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니가 고생했으니 천국에 보내줄 게" 라는 것은 안 된다는 말이다.
◈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아들의 나라 !!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튜브, 그 관을 통해서 언약이 완성된 세계가 곧 천국이라는 것이다. 언약이 없는 천국은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이고, 인간에게서 나온 아이디어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주셨는데, 그렇게 이스라엘에 준 언약을 하나님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그 언약을 이루어나가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나라가 아들의 나라가 되고, 그 아들의 나라에 참여하게 되면 그것이 곧 천국이란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나라만 팍팍 밀어주시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극락을 밀어주는 게 아니고 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신 분은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인 아들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의 나라만 천국이고, 그 이외는 지옥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니, 전쟁을 한다는 것은 어떤 전쟁인가? 우리가 생각했던 천국과, 그리고 언약사건으로 인해서 진짜 숨은 곳에서 나타난 천국과 보이지 않는 전쟁이 있다는 것이다. 그 전쟁에서 우리가 패배하면 정말로 다행스러운 것인데, 왜냐하면 "나는 패배자입니다" 라고 하는 그 패배의 흔적에 의해서 새롭게 언약이 실행된다는 것이다.
◈ 에서와 야곱의 싸움 !! 어제 오후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야곱만이 아니라 에서도 축복은 공짜로 주어진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인데, 에서와 야곱은 둘 다 천국은 공짜로 온다는 것을 알았다는 말이다. 하늘의 복은 다 공짜라는 것을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 아버지인 이삭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권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노력으로 축복을 따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선택에 의해서만 축복이 돌아가고, 그 선택에서 배제되면 저주가 돌아간다는 것을, 그것을 둘 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에서와 야곱 가운데서 누가 못되먹었는가? 옛날에는 장자에게만 축복권이 돌아가고, 둘째는 결혼도 하지를 못하고 형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형이 자식도 없이 일찍 죽으면 형수와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래서 자식을 낳아도 자기 자식이 아니라 형의 자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직 맏아들만 대우를 받고, 나머지는 거기에 다 종속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야곱이 그 맏아들을 쟁취하기 위해서, 어머니인 리브가의 태 중에서 이미 싸움이 일어났는데, 세상에 태아가 장자권을 두고 싸웠다는 것이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데 말이다. 태아의 아이큐가 얼마인가? 어떻게 태어나기도 전부터 엄마의 뱃속에서 씩씩거리면서 격투기 게임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누가 형이 되고, 누가 동생이 되는지를 말이다. 그렇게 에서와 야곱은 하나의 장자권을 두고서, 하나의 축복권을 두고서 서로 싸운다는 것이 말이다. 물론 이것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기가 참으로 곤란한데, "그들의 싸움이 언제부터인가? 줄기세포 때부터인가?" 라고 따지게 되면 정말이지 난처하다는 것이다(ㅋㅋ) 아무튼 태 중에서 싸움이 시작되는데, 이미 끝났다고 보는 것은 에서이고, 왜냐하면 먼저 나온 자가 에서이니 말이다. 자기가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형의 발목을 잡았는데, 떨어져야 게임이 끝나는데, 그렇게 발목을 잡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뱃속에서의 전쟁이 바깥으로 나와도 여전하다는 것인데, 전혀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 !! 리브가는 임신을 하지 못하는 불임여성인데, 그러한 불임여성에게 하나님께서 아기를 주었을 때는, 그 아기의 모든 운명은 개인의 기대와는 상관이 없이,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가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계시는 하나님의 언약이 포함이 되고, 앞으로 언약으로 이 세상을 지배할 때, 에서와 야곱의 관계도 같이 적용되는 요건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언약을 구성하는 요건에 있어서 에서처럼 야곱처럼, 그러한 구조 안에서 역전이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즉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그러한 역전의 요소가 이미 모든 언약 안에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고 왔다" 라고 하셨는데, 즉 섬기는 자가 먼저 된다고 하는 그 원리원칙이 예수님의 말씀 안에, 복음 안에 이미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 우리는, 반복적인 실패로 이어져야 !! 그래서 지난 낮 시간에 뭐라고 했는가? "교회는 비밀이다" 라고 했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교회에는 우리 인간들의 인위적인 요소가 실패하고 실패는, 그런 실패들이 연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내가 나를 지탱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반복적인 실패로 이어져야 한다" 라는 능력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쏟아짐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실패하는 즐거움이 최고의 즐거움인데, 마음껏 실패해야한다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말이다. 남들이 욕을 하든 말든, 자기는 마음껏 실패자의 입장에서 이미 구원을 해주신 주님 앞에서 눈물로서 발을 씻길 때, 그 여인의 당당함, 그 사랑의 당당함, 용서함을 받은 자의 여유로움, 그것이 바로 자유라는 것이다. 따로 자기 인생을 챙길 이유가 없는데, 굳이 따로 도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주 안에서 주님이 주신 자유를 마음껏 만끽하면 된다는 것이다. 막달아 마리아가 어디 자살했는가? 전혀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무엇을 만끽하고 있단 말인가? 그것이 바로 주님의 용서함인데, 따라서 막달라 마리아처럼 살아가는 것이 언약 안에서 죽음을 만끽하는 사람들의 여유이고 넉넉함이라는 말이다. 넉넉한 자가 자살하는가? 아니면 쫓기는 자가 자살하는가? 뭔가 쫓기는 자가 불안해서 자살을 한다는 것이다.
◈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모든 것이 다 너희의 것이고,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라고 하는데, 그처럼 이 세상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고 곧 우리의 것이란 말이다. 성도는 실패 자체를 즐거워하기 때문에, 또 따로 우리 나름대로의 실패를 염려하거나 걱정할 하등의 근거가 우리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스스로 지킬 만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데, 그것은 올무이고 스스로 만든 덫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전 3: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 마감재 인생 !! 그래서 어제 오후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뜯겨져나갈 것을 있게 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인위적으로 우리의 인생을 우리 자신이 지킬 만한 것으로 만들어내고 그런 요소를 가미하는데, 그런 것은 뜯겨져 나간다는 것이다. 저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싶은데, '마감재' 라고 말이다. 마감재는 건축을 할 때 제일 뒤에 붙여지는 것인데, 그게 건물을 중력을 버티고 있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장식품이란 말이다. 비록 그것이 뜯겨져 나가도 그 안의 골조가 튼튼하다고 하면 괜찮다는 것이다. 어차피 그것은 마감재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마감재가 하나 떨어졌다고 해서 울고불고 낙담하고 하면, 그 안에 무엇이 없다는 말인가? 안정된 골조가 없다는 것인데, 그냥 마감재만 붙들고 살았다는 말이다. 주님은 우리의 그런 인위적인 마감재를 뜯어내면, 우리는 또 그것을 갖다 붙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자존심입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 실망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야곱의 경우에, 물론 에서나 야곱, 그렇게 둘 다 복은 공짜로 주어진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런데 에서는 지옥에 가고 야곱은 천국에 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야곱이 공짜천국의 의미를 더욱 더 부각하는 쪽으로, 그것을 자력으로 따내려고 하는, 즉 장자가 되려고 애를 쓴 죄성을 자기 인생으로 보여주고 또한 품고 있다는 것이다.
◈ 악착같은 야곱 !! 에서는 그야말로 무덤덤한데, 하지만 야곱은 악착같이 그 복을 따내려고 하는데, 물론 다른 사람들은 다 말렸는데, 그렇게 해서 장자가 되는 게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다. 형이 동생이 되고, 동생이 형이 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흑인이 어떻게 백인이 되겠는가? 마이클 잭슨 이후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ㅋㅋ). 물론 DNA 이상으로 돌연변이가 되어서 표범의 무늬가 지워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처럼 인간의 죄는 하나의 운명이고 숙명인데, 왜냐하면 그 죄에서 인간이 나왔기에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죄에서 분리가 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안 되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되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면 야곱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것인데, 즉 "나는 안 되는 존재이다" 라는, 그 자리가 도리어 하나님 언약의 구성요건이 충족되는 자리라는 것이다.
◈ 울어도 못하네 ♪ 어제 오후 설교시간에 찬송가 343장의 가사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그것을 집에서 설교를 다시 정리하면서 생각해보았다는 것이다.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되고, 참아도 안 되고, 그런데 믿으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믿어도 안 되는데, 예수님을 믿고 주님의 은혜를 따라가도 말이다. 그것이 후렴부분에 보면 보면 나오는데, 오직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된다" 라고 말이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이다. 그러니 주님의 언약은 그 어떤 인간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데, 오히려 무엇을 보태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마지막 죄성이 된다는 것이다. 주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자기가 도움이 되려고 하는 게 말이다.
---------------------------------
◈ 다시 정리하면 !!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전쟁에서 이루어지는데, 하지만 우리는 전쟁이 없는, 즉 "싸울 사람이 없는데 왜 싸우는가? 하나님, 저는 싸우지 않습니다. 그럴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라고 하는, 그렇게 전쟁이 없이 그냥 고생했다는 것을 보상받는 차원에서 천국을 소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우리가 소망한 대로 천국에 넣어준다고 하면 언약이 그만 통째로 빠지고 마는데, 그것은 과정도 없이 결과만 성급하게 쥔 것이란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 과정을 쫙 펼치시는데, 그 과정에는 언약이 있고, 그 언약에는 전쟁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 전쟁이 없는 구원은 없어 !! 다시 강조하지만, 전쟁이 없는 구원은 없는데, 그 전쟁이 어떤 전쟁인지 살려보자는 것이다. 구원은 전쟁에서만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그런 전쟁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도 없는 우리는 그만 빠져 달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냥 죄만 지으면서 빠지라는 말이다.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 자체가 인간이 신과 더불어 전쟁을 한다는 의미인데, 그런 이름이 야곱에게 부여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전쟁에서 구원이 나온다고 하는데, "어떻게 전쟁에서 구원이 나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그것은 바로 여기에 중요한 것을 하나 집어넣어야 하는데, 이 전쟁에서 '자리'가 확보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출애굽기 15장 17절을 보겠는데, 누가 읽어보세요. (출 15:1)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기 17절에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라고 하면서 주의 처소가 나오는데, 이게 나중에 천국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3절과 4절에 보면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 라고 하는데, 그렇게 그분은 전쟁을 하시는 분이라는 말이다.
◈ 이스라엘 자손은 내 군대, 내 백성 !! 그리고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군대' 라고 하는데, 7장에서도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 이라고 하고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군대가 되고 싶어한 자들이 아닌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이스라엘을 군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이스라엘을 대적하면서 따라오는 자들은 그동안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이다. (출 12:40)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삼십 년이라 (출 7:4)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더하여 여러 큰 재앙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 이스라엘의 출현과 더불어 하나님의 원수가 !!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군대라고 하면, 그러한 이스라엘을 공격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인데, 그러니 그들이 바로 그동안에 이 세상에서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하나님의 원수인데, 그들이 비로소 자기 본색을 드러내는 계기가 이스라엘의 출현과 더불어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만을 두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원수도 동반해서 같이 노출시키는 것, 그것이 용사가 되신 여호와, 그 언약의 실시과정에서 같이 동반해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원수도 같이 드러내는 것, 그게 바로 언약의 취지라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되었던 간이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면 되잖아요?" 라고 하는데, 이스라엘이 구원을 챙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기들끼리 "야, 우리가 구원을 받았어. 이리 오너라. 여기가 구원을 받은 자들의 집합이니, 여기가 천국이다" 라고 하면서 오해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구원을 받은 자들끼리 모이면 누가 빠지는가? 정작 구원을 해주신 분께서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를 들어서, 젊은 아이들이 결혼을 막 했는데 그러면 그들이 무슨 돈이 있겠는가? 그래서 시부모가 촌에 있는 땅을 팔아서 서울에 아파트를 하나 사주겠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 신혼부부에게는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그런데 거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시부모도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신혼부부는 당연히 갈등이 생기는데, 그 아파트를 받아야할지 말아야할지 말이다(ㅋㅋ).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도와주는 것은 좋아하는데, 그런데 같은 인간들끼리만 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물론 잘난 척을 하지 않는데, 못난 것을 다 아니 말이다. 그렇게 못난 자들끼리만 살아도, 그것이 곧 행복이고, 소박하나마 인생에 주어진 약간의 즐거움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 야야, 우리 같이 살자 !! 하지만 그것은 우리 생각이고, 하나님의 생각은 무엇인가? 거룩하신 분께서 같이 살겠다는 것인데, 그야말로 겁을 상실한 시부모라는 말이다. 요즘은 그런 소리를 며느리에게 하다가는 당장 추방을 당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거꾸로 되어서, 며느리의 말을 잘 들어야 시어머니의 인생에 조금이나마 햇살이 들어오지, 그렇지 않으면 캄캄한 밤이라는 것이다. 돈은 돈대로 날아가고, 설움을 설움대로 받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재산을 가지고 서로 밀고 당기는데, 즉 "줄까? 말까?" 라고 한다는 말이다(ㅋㅋ). 아무튼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은 무엇인고 하니, 현재 우리 인간들끼리 살아가는 버릇을 그대로 유효하게, 그것이 천국에 가서도 그대로 자기 위주로 유지되기를, 자기 편하게 살아가는 것이 연속되기를 소망하는데, 그런 즐거움을 우리가 기다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구원은 무엇인가? 우리 인간들이 전혀 경험하지 못한, 즉 거룩한 분과 더불어서 살아간다는 것인데, 그것도 한 집에서 말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겠는가? 하지만 그런 자들은 오지 말라는 것인데, 즉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인 사람들은 오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오지도 못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세상만사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데, 죽어서도 마음대로 안 되는데, 즉 천국도 자기 마음대로 골라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종교생활이나 신앙생활을 백날 해도 소용이 없는데, 현실은 우리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전쟁은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 이어지는가? 자리로 이어지는데, 그 자리가 자기의 자리는 박탈당하고 누구의 자리라는 말인가? 주님의 성소이니, 우리는 주님의 전리품에 함께 기거하면서, 즉 "너희들은 노획물의 자격으로, 포로가 된 자의 자격으로 여기에 참여했다" 라고 하는, 그것으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끝이 난다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이 마련한 프로젝트의 결론인데, 그래서 목회자는 교인들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간에 말씀을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시어머니가 함께 한다는 것은, 그러한 시어머니의 잔소리를 듣는 환경 속에 놓여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죽기 전에, 이미 그런 잔소리와 더불어 살아갈 용의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주님의 잔소리, 주님의 말씀과 더불어 말이다.
◈ 소리가 먼저인가? 문자가 먼저인가?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은 "소리가 먼저인가? 문자가 먼저인가?" 라는 것인데, 시편 19편에 보면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때 낮과 밤이 편지를 쓰는데 있어서 그 언어가 무엇인가? 히브리어인가? 헬라어인가? 그게 아니라, 그냥 들리지 않는(?) 소리라는 것이다. (시 19: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그런 소리가 문자가 된 것은, 이미 인간이 죄인인 것을 가만해서 문자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십계명의 경우에, 처음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은 문자였는가? 아니라면 소리였는가? 처음부터 돌판이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돌판은 32장에 가야 나오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께서 모세 양 쪽에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들고 가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이전에 이미 모세가 십계명의 내용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가? 몰랐는가? 20장에 이미 십계명이 나오니 32장에서는 다 외워서 온다는 것이다.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하늘나라에서는 다 외우게 되어있는데,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모세의 그 육체 자체가 돌판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몸 자체가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 전체가 말이다. 그러면 왜 문자화를 시키는가? 그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인간의 죄로 인해서 언약은 순탄하지 못하고 늘 깨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연결되지 않은 관계 속에 있는 것이 바로 너희들이다" 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들의 모습이란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대표자들이 곧 이스라엘이니 말이다.
◈ 깨어졌음의 과거사건을 함유한 돌판 !! 그러니 인간들은 언약과의 관계가 마치 돌판이 깨어지듯이 깨어질 수밖에 없는데, 하지만 그렇게 깨어진 것을 회복하는 힘은 누구의 힘이란 말인가? 그들의 힘이 아니라, 그 깨어진 돌판을 그대로, 물론 그 깨어진 돌판을 대신해서 나타난 돌판인데 말이다. 아무튼 깨어졌다고 하는 과거의 사건을 함유하고 있는 돌판은 하나님의 아카시아 상자 속에 들어가서 무엇을 기다리는고 하니, 7월 10일에 구원받은 백성을 대표해서 대제사장이 드리는 흠이 없는 소나 염소의 피가 그 아카시아 상자 뚜껑에 묻혀지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묻히게 되면 깨어졌음을 하나님께서는 일괄적으로 처리하시는데, 즉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관계로 지속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 대제사장이 신약에 오면 누구라는 말인가? 신약이라고 하지 말고, 마지막 때에 누가 오는가?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데, 그분이 곧 대제사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신약이라고 하지 말고 마지막 때라고 하면, 마지막 이후에 마지막은 있는가? 없고 그것으로 끝인데, 즉 다른 언약은 없다는 것이다.
◈ 십자가 사건의 반복 !! 그렇다면 서기 약 30년경의 십자가 사건 이후의 역사에 나오는 모든 죄는 어떻게 씻어지는가? 추가된 언약은 없는데, 왜냐하면 마지막이니 말이다. 마지막 때에는 마지막 때다운 방식으로 죄를 씻게 되는데, 그 방식이 무엇인고 하니, 십자가가 눈 앞에 보인다는 말이다. 그것을 고린도전서 11장에서는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라고 하는데, 즉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과 잔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나눈 것을 기념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란 말이다. 성령께서 그런 작업을 하시는데, 그렇게 시간의 흐름을 의미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마치 마네킹처럼 굳어진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고전 11: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혹시 두부를 만드는 과정을 보았는지 모르겠는데, 콩을 갈아서 만드는데, 그 콩을 굳어지게 하는 것을 간수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굳어지는 것이 전체가 동시에 되었다고 봐야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신약의 시간은 동결된 시간이라고 볼 수가 있다는 말이다. 서기 2014년이 의미가 없는데, 그 시간은 동결되었다는 것이다.
◈ 목사님, 너무 어려워요 !! 이번 수련회에서 그 이야기를 했는데, 어떤 분은 정신을 집중하고 듣는데도 어렵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그것을 숙제라고 여기시고, 그런 숙제가 있다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이다. 다 알고 나서, 뭔가 할 일이 없으면 허무하니 말이다. 아무튼 시간이 동결되었는데, 그것을 묵시라고 한다는 것이다. 역사가 아니고 말이다. 이 묵시에서는 년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두부를 그 어디를 잘라도 두부이고 두부 맛이 나듯이, 마지막 때는 그 어디를 잘라도 다 십자가 맛이 난다는 것이다.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떻게 표현했는고 하니까, 죄 많은 인간의 언어를 가지고 묵시를 어떻게 표현했는고 하니, 그게 11장 8절에 보면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사실 지리적으로는 소돔과 애굽은 꽤 차이가 나는데, 그런데 서로 같은 곳으로 보는데, 그런데 그곳이 바로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곳을 골고다 언덕이 있는 예루살렘 근방으로 보는데 말이다. 쓰레기나 시체를 버리는 곳인데 말이다. (계 11: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그것을 히브리서에서는 성문 밖, 혹은 영문 밖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성문 안이 아닌 성문 밖에 기다리자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이 죽으신 자리에서 기다려야 천국이 온다고 한다는 것이다. (히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 VIVA PAPA ?? 그렇다면 주님이 오실 곳은 어디인가? 주님이 재림을 하신다면 예루살렘에 오시는가? 아니면 서울에 오시는가? 두 곳에 다 오실 수가 있는데, 그래서 이번에 프란체스코 교황이 서울에 오시는지 몰라도 말이다. 시복식을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교황이 무엇인데 복을 준다는 말인가? 복자(福者)라고, 성자(聖者) 이전의 단계를 의미하는데, 그 복자가 되는 의식을 거행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천국에 무슨 단계가 있고 계급이 있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했던 버릇을 연장하면 그게 천국이라고 구라를 치고 있다는 것이다. 언약이 빠지니 그 대신에 역사를 집어넣고, 그렇게 찬란한 교회역사를 집어넣으니, 그 역사의 주체로 자처하는 교회조직이 마치 신의 대리자인 것처럼 군림하는 것인데 말이다. 이 세상 자체가 주님의 성전인데, 그 성전을 혼자서 독차지하고 있으니, 그게 바로 적그리스도가 아니고 무엇이냐는 말이다. 그리고 기독교는 그런 천주교를 따라가지 못해서 안달이 났는데, 저임금에 시달리는 수녀들처럼 기독교도 전도사들에게 저임금으로 하면 잘 될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런 자들 중의 하나가 바로 구원파라는 것이다. 통일교도 그러하고 말이다. 그게 옛날 수도원에서 하던 행세를 그대로 하는 것인데, 그게 교회사에 보면 다 나와있다는 것이다.
◈ 자리 만들기 !! 지금 제가 '전쟁' 이야기를 하면서 '자리'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전쟁에서 구원으로 곧 바로 가지 않고 자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자리를 말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그 자리를 만드는 방법을 이야기하겠는데, 자리는 빈자리는 없고 빼앗아 버린다는 것이다. 가나안에 10족속이 있는데, 12족속이란 주장도 있지만, 그러면 그들이 이스라엘을 보고 "어서 오세요. 우리가 이미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비워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는가? "원래 주인이 오시는데, 우리가 눈치도 없이 차지하고 있었네. 어서 나가자" 라고 했느냐는 말이다. 지금 가자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보고 "이미 여러분은 1948년에 독립을 했는데, 그러니 우리가 알아서 나갈 테니, 이 가자 지역을, 이게 원래 다윗에게 약속한 지역이니 가져가세요" 라고 하면서 양보를 했느냐는 것이다. 그게 아니고 "니 죽고 내 살자" 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경상도 말로는 "니 죽고 내 죽자" 라고 하는데 말이다(ㅋㅋ). 그렇게 "니 죽고 내 살자" 라는 족속이 몇 족속이란 말인가? 무려 10족속이나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즉 인간의 힘으로는 갈 수 없는 나라라는 것이다.
◈ 왜 구약역사가 방해를 받으면서 흘러가는가? 구약역사를 보면, 이렇게 장애물이 방해를 해서 구원이 성사되지 않도록, 그렇게 구약역사가 반복해서 흘러가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신약에 와서는, 즉 마지막 때는, 그 어떤 식으로 해도 이제는 안 된다는 것을 충분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확정을 지었는데, 즉 성전을 지어도 안 되고, 제사를 드려도 안 되고 말이다. 또한 기도를 해도 안 되고, 구제를 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예수님이 홀로 하신다는 것을 마지막 때에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자리 만들기는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는데, 베드로가 자기 목숨을 바쳐서 가겠다고 해도 예수님은 오지 말라고 하셨는데, 즉 "니 자리는 없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자리 만들기는 어떻게 되는가? 기존의 있던 자리에서 쫓아내고, 그 자리를 하나님이 세우신 백성과 함께 그 자리를 빼앗아서 차지하는 방식으로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즉 기존의 것을 빼앗기면서 그 자리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 아하, 나는 갈 수 없는 나라구나 !! 그렇게 해서 들어가게 해줄 때, 들어간 백성의 입장에서는 "내 힘으로는 도저히 차지할 수 없는 자리였구나" 라는 것을, 그것을 들어갈 시점에서는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것이다. 여리고 성도 그러한데, 여호수아에게 군대장관이 뭐라고 했는가? "신발을 벗어라" 라고 했는데, 즉 "여기에서는 니가 아니라 내가 장군이다" 라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는 말이다. 마지막 때에 누가 추수를 하는가? 예수님과 천사들이 하고, 사도들은 이삭줍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밀레의 '이삭줍기' 라는 유명한 그림이 있는데, 그렇게 이삭줍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다. 여자들이 그것을 좋아하는데, 다슬기 줍기라고 말이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지겨워서 난리를 치고 말이다. 아이들도 지치는데, 그런데 아줌마들은 난리라는 것이다(ㅋㅋ). 아무튼 이렇게 일방적으로 주님에 의해서 주어짐을 당할 때, "이것은 내가 생각한 그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라고 영원토록 고백하게 만드는 나라인데, 그것이 곧 천국에 대한 합류, 즉 천국입성이라는 말이다. 이에 반해서 기존에 자기가 생각한 나라는 무엇인가? 자기 공로로, 자기 성과로 간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국에 가니 자기 성과를 요구하기는커녕, 그것이 얼마나 현실감각이 없는 무지의 소치인가를 깨닫게 되는데, 천국백성은 그런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냥 주신 나라인데, 우리가 들어갈 수 없는 곳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은혜이고 사랑이라는 것이다.
◈ 마리아야, 니가 천국백성이다 !! 이것을 막달라 마리아가 알게 되었는데, 그래서 남들이 욕을 하든 말든 어떻게 했는가? 예수님의 발 앞에다가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드렸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이것이 바로 천국의 사랑을 받은 자의 모습이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런 모델케이스라는 말이다. (눅 7: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렇게 우리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들어갈 수 없는 자리로 주님은 끌어당기시는데, 결국은 만만한 코스가 없다는 것이다. 중간 중간에 모두 다 끊어지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금식을 해서, 헌금을 해서, 봉사를 해서, 기도를 해서, 목회성공을 해서, 그렇게 해서 천국에 가겠다고 하는 모든 길이 다 끊어져있다는 말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순교를 해서 가겠다고 하지만, 하지만 그것도 다 끊어져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들어오게 되어있는데, '오직 십자가' 라는 것이다. 다른 것들은 그 어떤 것이라고 해도 일체 허용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그 자리가 어디입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신약성경은 의외에 그 자리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 자리가 바로 우리 몸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 몸이 성전이고, 우리 몸이 우상과 싸우는 전쟁터라고 한다는 말이다. 세상적으로 말해서, 어디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간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몸은 아무런 변화도 없이 어떤 비어있는 자리에 들어가면 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주님은 우리 몸을 어떤 특정 장소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들어가려고 하는 우리의 몸 자체를 아예 영적 전쟁이 일어나는, 그런 본래적인 전쟁터로 삼아서, 그렇게 해서 성령으로 인하여 우상이 무엇인지, 즉 무엇이 주님의 뜻이고, 무엇이 주님의 뜻이 아닌지, 그렇게 우리 몸이 사용되어진다는 것이다.
◈ 그러면 이게 잠언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래서 성전은 전쟁터라고 보면 되는데, 그러면 잠언과 이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고 하니, 잠언은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을 분명하고 날카롭게 언제나 구분을 한다는 것이다. 즉 "아들아, 선을 행하고 악은 행하지 말라"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 선과 악은 어디서 나왔는가? 다윗언약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제가 설명한 것이 무엇인가? "언약이 없이는 전쟁이 없고, 또 전쟁이 없이는 구원이 없다" 라는 것인데, 그리고 언약이 없이는 자리도 없고 말이다. 그러니까 언약이 없는 우리에게는 단지 우리 자신의 자리만 있을 뿐이지, 그것으로 된 것이지, 굳이 그 자기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올 이유나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약으로 인해서 그 자리가 자리가 주님의 자리로 변하면서, 처음부터 자기 것이라고 하면서 주인노릇을 하던 우리 자신에 대해서, "너는 처음부터 주인이 아니었어" 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그게 자기 자리가 아니라 주께서 일하시는 자리라는 말이다. 즉 우리 인생이 우리 자신의 인생이 아님을 깨닫게 하신다는 말이다.
◈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 이것을 말로 하기보다 성경을 직접 살펴보겠는데, 고린도후서 6장에 보면 그게 나온다는 것이다. 15절에 보면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고후 6: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 각자가 성전이라면 성전은 몇 개인가? 2013년도 겨울 십자가마을 수련회 때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대전에서 했는데, 그때 제가 무슨 질문을 했는고 하니까, "각자가 성전이라면 성전이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여기에 세 사람이 있다면 성전이 세 개입니까?"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16절에 보니 '저희 가운데'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때 제가 숫자 '1'을 가지고서 설명을 했는데 말이다. 혹시나 기억이 나는지 모르겠는데, 물론 묻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그러면 제가 그만 나쁜 사람이 되니 말이다(ㅋㅋ). 여기에 이렇게 귤, 귤, 귤이 있으면, 그 귤은 하나가 있는 것인가? 세 개가 있는 것인가?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 둘, 셋, 그렇게 3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이 귤이나 저 귤이나 모두가 같은 귤이니, 하나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인이 10명이 있으면 10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성전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성전이 말이다. 그러니 숫자도 주님의 안목에서 보아야 하는데, 숫자가 "1인가? 0인가?" 라고, 그 둘 중에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라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2,3,4,5,6'을 마구 집어넣는다는 말이다. "우리는 교인이 234명인데, 너거는 몇 명이고? - 우리는 345이다" 라고 하는데, 234명이든 345명이든, 그런 숫자가 왜 나오느냐는 말이다. (엡 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 모든 숫자는 '1'로 귀속 !! 물론 성경에도 중요한 숫자가 나오는데, 7, 12, 4 등이 말이다. 하지만 그 숫자는 무엇에 종속되는가? 결국은 하나에 종속이 된다는 것이다. 70이레가 결국 한 이레에 종속되듯이 말이다. 7일만에 창조된 것이 결국 한 분에 의해서, 한 분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인데, 그렇게 예수님 한 분으로 귀속이 된다는 것이다. 144,000명이 있더라도 결국은 오직 한 분이신 예수님을 위해서, 그 한 분을 모시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어떤 분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천국에 가면 두 분이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예수님의 보좌도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요한복음 1장 18절을 몰라서 그러한데, 거기에 '독생하신 하나님'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몇 분이라는 것인가? 즉 아버지와 아들이 둘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그러니 하늘나라의 숫자 '1'은 한 번에 알아들어야 하는데, 2와 3과 4로, 그렇게 아무리 다양하게 분류가 되어도 1로 귀환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1로 돌아서려고 하면 2를 포기하고 3을 포기해야만 하는데, 그렇게 되면 2와 3이라고 우겼던 우리 자신이,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있음으로 숫자가 2가 되고 3이 되니 말이다. 그것은 하늘나라가 아닌 이 세상에서 따져도 마찬가지인데, 자기 나이가 60이 되어도 죽을 때가 되면, 그렇게 죽을 때까지 살아온 날은 바로 죽은 그 날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8월 14일에 죽는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그 하루치만 할당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머지 살아온 것은 이미 다 까먹었다는 말이다.
◈ 잠시 빼빼로 게임을 !! 예를 들어서, 빼빼로를 양쪽에서 물고 서로 먹어서 들어온다면, 결국 남는 것은 마지막 하나만 남는다는 것이다. 다들 이 빼빼로 이야기를 모르는 모양인데(ㅋㅋ), 여기 한 쪽에서는 예수님이 입을 벌리고, 아니 입을 벌리시고, 반대쪽에서는 우리가 입을 벌리고, 그렇게 서로 빼빼로를 갉아먹으면서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입술이 결국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데, 그 날이 주의 날인데, 그러니 주의 날은 하루라는 것이다. 천년이라도 하루라는 말이다. 그것이 묵시의 세계인데, 그 한 날 속에 시간적으로 창조도 들어있고 십자가도 들어있다는 것이다. 지리적으로 소돔이 되고 애굽이 되고, 그게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장소도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묵시적 상황이라는 것이다.
◈ 가나안 땅에는 평범한 10족속이, 그런데 !! 가나안 땅에는 시간만 알고 역사만 알고 지리만 알고 공간만 아는 자들이 10족속이 있었는데, 하지만 그 가나안 땅에, 일반적이고 평범한 땅에, 특정 지역을 점유하고 있고, 그냥 하루 하루의 날짜만 계산하는, 그런 보통 시간을 살고 있는 10족속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 침투해서 그 자리를 장악한 민족은 어떠한 민족인가? 그들에게 있어서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진 묵시적 존재인데, 그들이 그 곳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그게 구약 출애굽 역사의 마무리인데, 그것이 신약에 와서 오늘날 우리에게 현실화가 되고 구체화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 신약성경의 모든 개념과 문자는, 묵시를 !! 신약성경의 모든 개념과 문자의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 묵시를 표현하기 위함인데, 그런데 원어를 따진다고 해서 그런 묵시가 나오겠느냐는 말이다. 원어가 문제가 아니라 성령을 받아야 하는데, 그래야 신약에서의 시간과 공간 개념이 물리적 개념이 아니라, 그게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뭐라고 하는가?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섰다" 라고 하는 고백은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인데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아브라함보다 내가 먼저 있었다" 라고 하셨는데, 그게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그것을 신학에서는 '선재성(先在性)' 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도 잘못된 표현이라는 것이다. 선재라는 것은 미리 있었다는 의미인데, 그러면 "지금 있다" 라는 것이 거기서 빠져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이런 신학적 이야기는 여러분을 피곤하게 만들지 싶어서, 여기서 그만 하겠는데 말이다. 아무튼 전쟁을 통해서 구원이 나오는데, 그 전쟁에서는 없던 자리가 마련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없던 자리인데, 그러니 하나님 나라는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니라, 이 세상과의 전쟁을 통해서 비로소 획득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전쟁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면 그 자리에 들어갈 때, 사실은 쫓겨난 자들이나 들어가는 자들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저들은 쫓겨나고 반면에 우리는 들어가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의적인 의지이고 결심이고 선택임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하면 - 전쟁, 자리, 구원, 그리고 '관심사' !! 다시 정리하면, 전쟁에서 구원이 나오는데, 방금 그런 과정 속에 자리를 하나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전쟁을 해서 자리를 만들어서 구원하시는데, 그러면 그것이 전부인가?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전쟁을 해서 자리를 만들어 구원에 이르기 이전에, 또 하나를 집어넣으면, 그게 '관심사' 라는 것이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과, 그리스도가 없이 홀로 있는 것은 그 관심사가 다르다는 말이다. 흔히 아가씨들이 뭐라고 하는가?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가 30이 넘어서 했다는 것이다. 20대에 혼자 있을 때는 "이번 휴가 때 배낭여행을 가야지. 결혼을 해도 소용이 없어. 드라마 '사랑을 전쟁'을 보니, 결혼을 해도 매일같이 싸우고, 그러니 혼자 사는 것이 최고야" 라고 했던 친구들이, 돈을 벌어서 유럽에 배낭여행을 다니면서 인생을 즐기겠다는 자들인데 말이다.
◈ 어머나, 사랑이 찾아왔어요 !! 그러던 어느 날 "어머나, 사랑이 찾아왔어" 라고 하면서 청첩장을 보내고 후다닥 결혼을 하더니만, 그 이후에 오랜만에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늘어놓는가? 팥빙수를 시켜놓고는, 그것이 녹는 줄도 모르고 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관심사가 달라졌는데, "우리 아이가 이번에 말이야" 라고 하면서 맨 날 자기 아이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가끔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이야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친구들을 만나도, 이제는 그 입에서 아줌마들이 하는 이야기들만 나오니, 그만 듣기가 싫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만나는 횟수도 점점 줄어들고, 나중에는 아예 만나지도 않고 헤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시아버지가 따로 살림을 차려주면 좋은데, 그게 아니라 5억이나 하는 아파트를 사주면서 "나도 같이 살자" 라고 하니, 그러면 그 며느리의 관심사는 무엇인가? "우리 시아버지가 어떻고" 라고 하면서 시아버지에게 집중에 되는데, 왜냐하면 같이 사니 말이다. 같이 사니, 그 관심사가 같이 사는 사람에게 쏠리게 된다는 것이다. 즉 주님과 함께 살고, 그 주님에게 관심사를 두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제 낮 설교의 본문에 보면 "주와 함께 교제케 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게 바로 견고함인데 말이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견고함이고, 그 견고함의 자리가 마련되면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의 관심사가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 '나의 전쟁'에서 '주님의 전쟁'으로 !! 이제부터 조금 어려운데, 휴식을 좀 하고 지나가야 하는데, 일단 쉬었다고 여기고 계속해서 해보자는 것이다(ㅋㅋ). 그렇게 관심사가 바뀌는 과정 속에서, 즉 관심사의 대체, 혹은 바뀜인데, 그렇게 관심사가 어디서 어디로 바뀌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나의 전쟁'에서 '주님의 전쟁'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전쟁'에서 '주님의 전쟁'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나의 전쟁'이 무엇인지가 먼저 정립되어야 하는데, 이 이야기를 하게 되면 아마 여러분이 무릎을 치지 싶은데 말이다. "그래, 평소 우리의 삶이 바로 그 삶이야" 라고 하면서 공감에 공감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은 나의 힘으로 자리 확보에 나서야 숨을 쉴 수 있다" 라는 것이다. 그게 바로 타고난 인간의 본성이란 말이다. 예를 들어서, 원숭이에게 아침에 바나나를 3개 주고 저녁에 4개를 주는 것과, 그리고 아침에 바나나를 4개 주고 저녁에 3개를 주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을 원숭이가 더욱 좋아하겠는가? 물론 합치면 둘 다 7개인데, 원숭이는 먼저 4개를 주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흔히들 "10손가락 가운데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은 없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형제나 쌍둥이를 키워도 자기들끼리 무슨 전쟁을 벌리는가? 부모의 사랑을, 부모의 관심을 누가 더 받을 것인지, 그런 싸움을 서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쌍둥이라고 해도 말이다.
◈ 민사법에는 그런 게 없어 !! 심지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유산을 좀 남겼다고 하면, 임종을 맞이하면서도 아들과 딸들이 모여서 보이지 않는 시기와 질투가 엄청나다는 것이다. 물론 며느리들까지 거들고 말이다. "끝까지 병든 아버지를 누가 모셨는가? 라고 하면서, 그 모신 자식에게 몫을 더 주어야 한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모시지 않은 자식은 반대를 하겠지만 말이다. 민사법이 그런 것을 따진다는 것이다. 부모가 임종을 맞이해서 유언을 하는데, 즉 "야야, 니가 나를 모신다고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유산의 절반은 니가 가지고 가라, 여기에 다른 아이들도 동의해라" 라고 하는데, 그러면 물론 그 자리에서는 "예, 알겠습니다" 라고 하지만, 건너방에 가서는 뭐라고 하는가? "민사법에는 그런 게 없어. 자녀들이 공평하게 나누게 되어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시는 것도 헛방인데, 그 증인이 여기에 있는데 말이다. 할머니를 아무리 잘 모셔도, 재산을 고모들에게 빼앗겼다는 것이다. 똑똑한 고모들이 나서서 "민사법에는 그런 게 없어. 법이 바뀌었어. 유언도 소용이 없어" 라고 하면서 나와서 말이다. 아들이든 딸이든 똑같이 나누어야 한다고, 그것으로 끝이란 말이다. 보통 집안에서 고모들이 그런 문제를 일으키는데 말이다. 그런데 제가 방금 뭐라고 했는가? 관심사가 어떻게 된다고 했는가? 자기 전쟁에서 주님의 전쟁으로 바뀐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 전쟁이 무엇인지 궁금했는데, 그런데 강의를 들어보니까 그게 전혀 궁금하지 않다는 것이다(ㅋㅋ). 왜냐하면, 그게 평소 우리의 일상(日常)이니 말이다. 자기 자리, 즉 자기가 힘을 들여서 모았던 그 자리를 감히 누가 빼앗아 가느냐는 것이다.
◈ 잠시 세월호 이야기를 !! 여기서 세월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안티들이 생겨도 말이다. 안산 단원고의 꽃과 같은 아이들이 죽었는데, 그것은 배에 짐을 너무 많이 실어서 배를 틀다가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말이다. 그러면 민사상 보상을 누구에게 청구해야 하는가? 청해진인가 하는 해운회사에다가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끝을 내야하는데, 그런데 왜 국회의사당까지 걸어가고 하느냐는 말이다. 이게 누구의 전쟁인가? '나의 전쟁' 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어린아이를 그만 때려서 죽였다고 하면, 그 사람은 형법으로 10년을 때리든지 해서 감옥을 살게 하고, 그리고 재산을 털어서 죽인 아이에 대한 보상을 하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재산이 없으면 안 되고 말이다.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국가라는 것은 없는데, 국가는 국민들의 추상적 집합체라는 것이다. 그러면 세월호의 희생자 부모들은 누구에게 가야하는가? 해운회사로 몰려가든지 해야한다는 것이다. 여의도로 가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것은 세월호 침몰사건의 원인을 해운회사가 아닌 국가로 보기 때문인데, 그래서 진상조사를 하자는 것이다. 자기 아이가 죽으면 국가가 책임을 져야하는가? 이렇게 넘어져도 국가가 책임을 져야하는가? 국가는 없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에 '두레' 라는 것이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말이다. 그게 상호부조의 성격인데, 서로서로 도와주는 말이다. 자기가 여유가 좀 있을 때 돈을 모아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인데, 그 반대로 자기가 힘들 때는 도움을 받고 말이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 축의금이나 조의금을 내는 것이 그런 것인데, 그게 바로 국가라는 것이다.
◈ 국가가 내 딸을 죽였다 !! 그러니 국가의 실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본인들이 곧 국가라는 것이다. 그런데 마치 국가가 따로 있는 것처럼 여기고, 거기에 대항을 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그런 사람은 결국 자기 전쟁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추상적인 자기의 적을 일부로 만드는 것이란 말이다. 즉 "국가가 내 딸을 죽였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지나친 것인데, 너무 많이 나갔다는 것이다. 보상금을 주면 고맙고, 주지 않아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보상금을 받아서 이웃을 도와주는 것은 자기 자유인데, 실제로 과거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그렇게 도와준 사람도 있었는데 말이다. 왜냐하면, 국가라는 것은 없는데, 자기보다 어려운 저쪽이 다 국가라는 것이다. 국가라는 것은 하나의 민족으로 모인 것으로, 그런 모임을 만든 것이란 말이다.
◈ '나만의 아지트'를 위해서 !! 흥분을 가라앉히고 잠시 여기서 정리하면, 사람은 끝까지 자기 본성대로 자기 전쟁만을 하고 싶어서, 계속해서 "내 인생을 이 꼴로 만든 그 놈 나와!" 라고 하면서, 자꾸만 적들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게 적들을 만들다보니, 결국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파는 꼴인데, 있지도 않은 적들을 만들어서, 그 적들에게 신나가 욕설을 퍼부음으로서, 자기가 이 땅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스트레스를 가상의 적들에게 퍼붓는 방식으로 오직 '나만의 전쟁'을 하고 있는데, 모든 인간들이 각자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지난주일 낮 시간에 '토치카' 라고 했는데, 즉 자기 아지트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렇게 전쟁을 했는가? 사도바울이 그렇게 전쟁했는가? 예수님이 북한정권이 무너지라고 전쟁했고, 사도바울이 박근혜는 하야하라고 전쟁을 했는가? 자기가 힘들게 살아간다고 해서, 그것을 가상의 적에게 퍼부으라고 국가가 있느냐는 말이다.
◈ 모두가 나의 적 !! 인간은 자기 전쟁밖에 모르는데, 그래서 이번 수련회를 하면서 "인간에게 믿음은 없다" 라고 했는데, 즉 출애굽을 아무도 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애굽나라에 자기 아지트를 만들면 그것이 곧 행복이지, 그런 자기 아지트에서 빠져나간다는 생각은 우리 인간에게 없다는 것이다. 즉 자기 전쟁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형제가 곧 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가 자기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면 좋아하는데, 그런데 형에게는 더 큰 것을 사주면 어떻게 되는가? 그만 울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족들도 서로서로가 적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홉스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이라고 했는데, 즉 이 세상은 전쟁터라는 것이다. 이 세상 전체가 완전히 콜라텍인데, 아무나 붙들고 부킹을 하고 그야말로 난리라는 것이다. 그냥 닿기만 하면 돌리면서 춤을 춘다는 것이다. 시간이 되면 장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가고 말이다. 그리고 다음날 또 출근하고 말이다.
------------------------------------
우리 인간은 그렇게 자기 아지트만 있고 토치카만 있으면 되는데, 그것은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타고났는데, 자기 전쟁만큼은 말이다. 그러니 가나안 10족속이 바로 우리 자신인데, 애굽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 이외에 다른 것에는 일체 관심도 없이 살아간다는 말이다.
◈ 따박 따박 20만원 !! 요즘 노인네들에게 20만원씩 노령연금이 들어오는데, 탈 때가 되어서 농협에 가면 노인들로 꽉꽉 차는데 말이다. 그런데 받으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나라에게 미안하다" 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 자기가 왜 받아야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라 돈은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국가는 추상적인 존재이니 말이다. 어떻게 우리 장로님은 받는지 모르겠는데, 받고 싶어요? (ㅋㅋ) 우리 어머니의 통장에 보면 20만원이 들어오는데, 어머니는 그만한 노동을 한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물론 자식들이 세금을 많이 내어서 어머니가 받는다는 식으로, 그렇게 해석을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앞으로 어머니들이 점점 더 늘어난다는 것이다. 세금을 낼 자식들은 줄어들고 말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나라는 어떻게 돌아가든지 간에 먼저 받아 챙기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인데, 즉 따박 따박 20만원인데, 그러니 승리한 것이란 말이다. 바로 이런 것에 관심을 두면서 살아가던 사람에게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시어른과 같은 주님과 함께 살게 되면, 그 관심사가 무엇으로 바뀐다는 말인가? '나의 전쟁'이 아니라 '주님의 전쟁'으로 바뀌면서, "내가 바로 주의 원수의 자격으로, 주님과 함께 동거하고 있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성도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 그런데 그게 아니라 자기가 속으로 웃고 즐거워한다고 하면, 그것은 심히 수상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복음 6장에 보면,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웃는 자는 슬퍼하게 되고 말이다. 마지막 날이 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라는 의미인데, 그런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은 전쟁을 하기 위해서 오셨고, 그 전쟁은 우리가 알고 이 세상의 뒤바뀜이라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이 '거꾸로' 라는 말이다. (눅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 우연적 언약 사건에 의해서 !! 마지막으로 다시 정리하면, 구원이라는 절차 앞에서, 즉 먼저 언약에 의해서 전쟁이 있었고, 전쟁에 의해서 자리를 만들게 되는데, 그 자리에 들어간 사람은 관심사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요리해서 어떻게 잡아먹지?" 라고 하는, 그것을 '관심사' 라고 했는데, 그것을 어려운 말로 철학에서는 '현상학'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나는 마땅히 잡아먹을 자격이 있다" 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저 카메라를 어떻게 요리해서 먹을까? 이 의자를 어떻게 이용해먹을까?" 라고 하는, 즉 "어떻게 나의 것을 만들까?" 라고 하는 '나의 전쟁' 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주의 전쟁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자진해서 바뀌는 것이 아닌데, 웃기지 말라는 것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이 그렇지 않았고, 이삭과 야곱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부가 다 하나같이 자기 새끼밖에 몰랐는데, 그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어떻게 되었는가? 그리고 다윗, 물론 모세도 그러하고, 사무엘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강력한 우연적인 언약 사건에 의해서 "이렇게 못난 저도 쓸모 짝이 있네요" 라고, 즉 '나의 전쟁'에는 안 되지만 '주의 전쟁'에 쓸모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의 일에 참여되어서, 요한계시록 12장의 두 증인처럼 죽기까지 죽도록 주님만 드러내는 증거자로서 살아가게 하는 그 프로젝트,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실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곧 전쟁이란 말이다. (계 11: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전쟁 중에서 있으면서도 나의 전쟁에 몰두하다가 보니, 모든 것이 다 평온하기만 하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을 챙길 때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손을 털치시는 줄 압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에게 관심을 두게 하는 놀라운 기적적인 사건이 일어남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이미 주의 증인임을 깨닫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 > 잠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잠언'속의 그리스도 15 - 관계 속의 경외 / 140915 (0) | 2014.09.15 |
---|---|
'잠언'속의 그리스도 14 - 복음과 가난 / 140818 (0) | 2014.08.18 |
'잠언'속의 그리스도 12 -아들과 언약 140721 (0) | 2014.07.21 |
'잠언'속의 그리스도 11 - 아들 / 140707 (0) | 2014.07.07 |
'잠언'속의 그리스도 10 - 잠 8:35 / 발견과 발견 안됨 / 140616 (0) | 2014.06.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