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18, 19강 / 빌 3:12 / 지옥 가는 비법 (천국 탈락 비법) 본문
100514 빌3:12 지옥 가는 비법(천국탈락비법)
~부터 ~로 간다 : 떠남(정착, 역사)과 쫏아감(어디든 천국,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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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100514빌3장12절a
100514 빌 3:12a 지옥 가는 비법 (천국 탈락 비법)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여기서 간다는 겁니다. 가기는 어디를 갑니까? 우리 가운데서 천국 간다는 사람들 많았는데 그 사람들 천국 가는 것 봤습니까? 점점 더 ‘어우 작아지네. 작아지네. 아저씨 지금 구름타고 어디 가십니까?’ ‘지금 천국가고 있다고’ ‘지금 지상 몇 미터입니까?’ ‘지상 2.5키로 3키로…….’ 저 하늘나라로 사라지는 것을 우리가 본적 있습니까? 아마 구름타고 올라가는 것은 누구만 그랬어요? 예수님만 그랬죠. 예수님만 구름타고 올라갔고 그 뒤에 내놓으라 하는 신앙인들 베드로, 사도요한, 바울, 야보고……. 그분들 돌아가실 때 구름 한 짝도 왔습니까? 구름 나타났어요? 그럼 우리는 먼저 믿었던 신앙인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11장을 가지고 믿음의 대 선배들의 나열, 리스트, 신앙의 선배들 제대로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이 나열되어 있는데 이들의 특징은 모세 같은 경우에 어디서부터 어디로 간다고 하지요? ‘나, 간다.’ 특히 아브라함 같은 경우 대표적인 것이 아브라함이 갈 곳을 모르고 갔는데 가보니까 그 땅이 자기가 살 동안 아니었고 그 땅에서 살면서 나그네와 객으로 살았는데 그들은 무엇을 바라봤습니까? 바로 하늘의 하나님이 친히 마련하신 영원히 살 새 예루살렘 집을 내다보면서 이 땅에서 사는 것은 당연하게 위에 하늘나라가 있기 때문에 당연하게 이 땅에는 그냥 나그네 이었죠. 이 땅에 정착하는 것이 땡이다 할 때는 그게 전부였습니까? 전부 아니었습니까? 그것은 자기 삶의 목적이 아니었죠.
여러분, 에베레스트 올라가야 하늘나라 가깝습니까? 아니면 뉴질랜드 지하 동굴에 가서 죽는 게 하늘나라 가깝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상관없지요. 왜냐 하면 변화산에서 예수님하고 엘리야하고 모세 이야기할 때 그것이 그냥 올라가버리면 그냥 맨땅이 되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해 같이 변화되니까 잠시 제자들에게 무엇을 보여 주웠죠. ‘아, 여기가 좋습니다.’ 라고 말했죠. 여기가 어딜까요? 1번 변화산, 2번 천국, 몇 번입니까? 예를 들면 관악산에 의존 교회가 소풍을 갔다 합시다. 그런데 갑자기 김명현 목사님께서 ‘자 봐라 하고 변하니까’ 김명현 목사님 주위에 천사가 오고 엘리야 모세가 왔습니다. 그러니까 이미아 성도님이 ‘목사님 여기가 좋사오니’ 그 여기가 관악산 입니까? 청와대입니까? 거기가 어디? 천국 이였죠. 그러면 천국은 어느 땅이든 뭐가 될 수 있다? 얼마든지 천국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건입니다. 그것을 어렵게 이야기하면 묵시적 사건이라 하는 겁니다. 땅에는 역사가 흐르지만 묵시적 역사는 항상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천국 될 수 있는 묵시적 현상이 되는 겁니다. 만약에 연세 많은 분이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시면 요양병원에서 빠져나와서 천국 갑니까? 요양병원에 있으면서 천국갈 수 있습니까? 숨을 거두었지만 거기 있으면서 바로 그것이 천국이죠. 그러면 손자가 있다가 ‘할머니 어디 입니까?’ 할머니가 ‘여기는 천국, 여기는 천국, 여기가 좋사오니’ 이렇게 하면 따라 가는 간호사가 ‘당신 여기 취직 하려고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육으로 보면 요양병원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죽은 그분에 의하면 그것은 요양병원이 아니고 언제든지 천국 됩니다. 그게 집이든 아니면 노래방도 천국 될 수 있고 교회도 천국 될 수 있고.......
제가 방금 길게 이야기한 것을 요약하면 예수님 계신 곳이 어디든지 하늘나라라는 겁니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이야기하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이게 십자가 사건이에요. 주님께서 어디 계시는가? 지난주일 낮에 설교가 생각나네요. ‘천국은 어디 있습니까?’ 제가 물으니까 우리교회 어떤 집사님께서 ‘내안에 있습니다.’ 라고 했죠. 내안에 있으면 곤란해요. 왜냐 하면 그분이 윤집사님인데 만약에 천국이 윤집사님 안에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윤집사님 따라 다니느라 바빠요 ‘천국 스톱 천국 스톱 같이 가요.’ 천국이 어느 특정 인물 속에 들어 가버리면 그분 안 따라 가면 천국은 떨어진 셈이 된 다 이 말입니다. 천국은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오늘 빌립보서 3장12절을 하면서 제가 초점을 어디다 두고 강의를 하느냐 하면 어떻게 하면 천국에서 탈락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두고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면 잘 믿다가 천국에서 탈락해서 지옥갈 수 있느냐! ‘하면 된다.’ 우리가 잘만하면 지옥갈 수 있다. 아무리 천국가고 있어도 지옥 갈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지옥에 갈 수 있는가! 그 지옥에 가는 비법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지옥 가는 비법을 알아야 하느냐 하면 반대로 천국 가는 비법을 이야기해 버리면 그 수법을 외울 수가 있어요. 외워서 마치 자기가 내가 알았던 정보에 의해서 내가 알아서 구원되는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는 천국 가는 데 내 마음대로 살 거야’ 이렇게 되겠죠. 그런데 거기는 뭐가 하나 빠졌냐 하면 바로 지옥 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복음을 안다 하면서 왜 지옥갈 수밖에 없었는가? 그 내막을 알면 그 차이점을 가지고 있어야 진짜 천국 가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안다고 우기면서 지옥 가는 사람과의 어떤 차이점, 제가 ‘히틀러’라는 영화를 봤는데 그 히틀러가 불교 신자이겠어요? 기독교신자이겠어요 아니면 종교가 없습니까? 셋 중에 하나인데 불교신자, 기독교신자, 종교 없음, 몇 번입니까? 그 사람 기독교신자입니다. 독일에는 기독교신자가 아니면 총리고 대통령이고 총무고 될 수가 없어요. 만약에 미국의 대통령 오바마가 ‘나 이제부터 예수 안 믿습니다. 안다닙니다. 불교 합니다.’ 하면 대통령되겠어요? 안되겠어요? 안되지요. 독일은 옛날 그때보다 더 심했습니다. 왜냐, 전 국민이 100% 다 세례 받았어요. 본의 아니게 그것을 모태신앙이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만약에 유럽은 다 그래요. 만약에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 버리면 우리나라 같으면 저주 덤탱이가 쏟아진다는 미신 아닌 미신을 철석 같이 믿는 사람들이에요. 히틀러는 천주교 신자에요. 기독교신자라고 볼 수 있죠.
그런데 그 사람이 천국 갔다고 우기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다음부터 무엇을 분석하느냐? 히틀러라는 사람이 분명히 신을 인정하고 꼭 자기 대화에 신을 집어넣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길 바란 다고 했다고 봐야죠. 표 얻으려고 했는지 모르지만 한 사람이 무려 군인 2천5백만 명 민간인 2천5백만 명을 죽였습니다. 거기서 유대인은 6백만 명 심지어 놀라운 사실은 여호와 증인은 그 가운데 100만 명 죽였어요. 왜, 여호와 증인은 집촌 거부, 군대를 거부하니까 100만을 죽였어요.
그런 사람이 예수 믿는 다고 공개적으로 세례 받고 했던 사람이 히틀러가 총독된 것이 유대교를 죽여야 합니다. 유대교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 나라의 사명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유대교를 척결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보호할 수 있는 그런 근거가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유대인들을 죽인다고 하면서 유대인들이 우리나라 돈 가져간다고 그것을 억울해 하면서 자기는 총독이 된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결국 지옥 갔다면 지옥 간 것이 확실하지만 그 사람에게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아하, 아무리 기독교 신자고 아무리 세례 받고 해도 지옥 가는 구나’ 그러면 그 사람이 어떻게 해서 지옥 가느냐. 그것을 연구할 필요가 있는 거예요. 그 사람 이야기가 아니고 누구의 이야기가 될 수 있어요? 바로 우리 이야기에요. 예수 잘 믿는 다고 우기고 복음 안다고 우기니까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갈 수밖에 없는가?
이런 부정적인 것을 우리가 꼭 아셔야 되요.. 그동안 우리가 너무 ‘목사님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이렇게 하면 구원받습니다.’ 너무 이쪽으로 편향했어요. 그쪽을 너무 좋아했어요. ‘이렇게 하시면 아무리 교회 나와도 지옥 갑니다.’ 하는 것을 우리가 철석같이 알고 있어야 되요.. ‘아, 지옥은 저렇게 지옥 가는 구나!’ 그것을 알고 있어야 지옥 가는 사람과 천국 가는 우리와의 그 차이점이 무엇일까를 성경에서 찾는 것이 얼마나 우리 신앙생활에 도움 될까요? 도움 되겠죠.
제가 비법을 말씀들이겠습니다. 십자가가 뭐냐, 십자가에 대해서 안다는 사람이 지옥가고 십자가에 대해서 나는 사람들이 천국 갔어요. 강도가 천국 갔습니다. 왜,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그런데 지옥 가는 사람도 지옥 갔습니다. 왜, 예수님을 믿는 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믿는 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에.........강도는 예수를 믿음으로서 오늘 밤에 낙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습니다.’ 라고 이야기했는데 나중에 지옥 가더라. 그러면 십자가에 대해서 뭔가 오해 하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 이 말이죠. 그 잘못알고 있는 것이 나에게서 나올 수 있어요. ‘십자가 믿는다. 십자가 믿는다. 십자가 믿는다.’ 하면서 3년 지나고 보니 십자가 믿는 다는 말만 들어 있고 십자가는 언제 날아가 버리고 없어요. 그래서 누가 툭 치면 ‘나 십자가 믿거든’ 이렇게 하고 있어요. '십자가 뭔데?' '십자가 잊어버렸거든’
십자가가 뭔가 하면 제가 하나교회에서 강의를 했는데 십자가 할 때, 십자가에 개가 달렸습니까? 오리가 달렸습니까? 제가 물어본 적 있어요. 십자가는 누가 달렸죠? 십자가에 개나 소나 돼지가 달린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달렸죠. 이게 너무 중요합니다. 십자가를 여러분, 저와 같이 믿습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나무 크로스, 나무가 교차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목수에게서 크로스 한 것이 아니고 거기에 뭐가 매달려 있어야 되요.? 사람이 매달려 있죠. 그러면 이것은 ‘사람이 죽었다’ 이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개가 죽은 것이 아니고 소가 죽었다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믿는 거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십자가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아침 9시에 출근해서 한참 일할 시간에 오후2시에 컴퓨터하면서 ‘참 사람이 죽었잖아 그렇다면 타자치는 나는, 나도 사람이다. 그러면 사람이 살려면 타자치고 컴퓨터하고 있는 나도 십자가에 매달려야 될 인간이 여기서 지금 컴퓨터하고 있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옆에 건물에 어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면서 ‘이빨 아 해 보세요. 어이구, 양치 몇 칠 안했어요? 아저씨 그런데 사람이 죽었답니다.’ ‘어디서요?’ ‘십자가에서 사람이 죽었답니다.’ ‘그 사람 왜 죽었데요?’ ‘죄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다 죽인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그 치과 의사는 치과의사라는 것이 의미가 있어요? 없어요? 치과의사 하나 마나 자기는 어디에 달려야 합니까? 예수님이 죽은 것은 모든 사람이 죽은 거죠. 옆에 아래층에 노점상에서 고기를 팔고 있어요. ‘자, 오랜만에 싱싱한 고등어 왔습니다. 값 내렸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었거든요’ 고등어 팔고 있는 그 아줌마가 고등어 팔아서 아이들 학비 벌려고 피아노 레슨 시키려고 그렇게 하는 당사자는 나무에 매달려 죽어야 할 사람이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치과의사, 고등어파는 아줌마, 컴퓨터 하는 경리 보는 여직원, 그 사람의 공통점을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다 같이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면 컴퓨터 할 줄 압니까? 치과의사입니까? 고등어 몇 마리 합니까? 하는 모든 것이 소멸되겠죠. 그 차이점이 .......
제가 번잡스런 예를 드는 이유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사회 나갔을 때 사람을 볼 때 차이를 두고 보느냐 차이를 안보고 보느냐를 제가 여러분에게 묻고 있는 겁니다. ‘아이고 부러워라 이건희 재산도 많아’ 이렇게 자기를 이것밖에 안되고 이건희는 재산이 많다고 하고 차이를 두고 보십니까? 차이를 없다고 보십니까? 차이가 없다고 보신다면 여러분들은 십자가를 아시는 분이고 차이를 두고 보신다면 여러분들은 십자가를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아이고 좋겠다! 저 사람은 좋은 집에 살고’ 가난한 사람 빼돌리고 부자만 달린 것도 아니고 부자 빼돌리고 가난한 사람만 달린 게 아닙니다. 이 십자가에 매달린 것은 소, 돼지가 아니고 사람이 달렸어요. 사람이 죄인 된 사람이 이 세상에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너는 의인이니까 매달릴 필요 없어 너는 죄 없어’ 라고 십자가 대상에서 빠질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사람을 볼 때 우리는 차이를 두고 봅니까? ‘저 사람은 서울대학 나왔어. 저 사람은 공부도 못했어.’ 왜 차이를 둡니까? 하나님은 차이를 안두는 데 지금 제가 예수 믿는 다고 척하면서 지옥 가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지옥가고 있는가!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교회 잘 나가면서 결국 지옥 갔던 사람들이 왜 지옥 갔는가를 제가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하면 십자가를 믿는 다고 하지만 십자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십자가 볼 줄 몰라요. 왜 평소에 세상에 나가면 세상에 자기보다 잘난 것을 다 부러워하기 때문에 ‘아이고 팔자도 좋지 해외 원정 가서 골프치고’ 골프 쳐서 박탈당하고 매달립니다.
여러분들은 지하실에서 죽어도, 요양병원에서 죽어도 거기서 구원받고 천국이지요. 그러면 지하실에서 죽어도 에베레스트에서 죽어도 천국 가죠. 그럼 천국은 어디 입니까? 천국은 항상 십자가 사건에 버려지면 그것이 천국이죠. 높은 집이 천국에 가깝고 이런 것은 없다 이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예수님의 열두제자 전부가 구름타고 갔습니까? 아니죠. 예수님은 구름타고 승천했지만 나머지 열두제자는 그냥 죽었습니다. 우리가 죽는 것처럼, 우리 선배들처럼 그냥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냥 죽었으니까 구름 안탔으니까 그 사람 지옥 갔어요? 아니죠. 제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느냐 하면 구름타고 안 갔으면 다 지옥가고 구름 타야 천국 간다는 그런 눈에 띄는 현상을 우리가 뽑지 맙시다. 그것을 찾아 내지 말자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찾아내지 않으면 사람 죽는 것은 똑같이 죽잖아요. 어떤 사람은 교통사고로 죽고 어떤 사람은 가스사고로 죽고 다 죽잖아요. 그럼 죽는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은 죽어도 천국 갈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지옥 갈 사람을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구분해야 하지 않습니까? 저만 답답한 가요? 어떤 식으로든 구분해야 되지 않느냐 말이죠. 그런데 구분의 기준점을 제가 무엇으로 제시했습니까? 십자가로 제시했거든요. 그러면 십자가 보자 이 말입니다.
십자가는 개나 소가 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개 달리면 우리하고 상관없습니다. ‘개가 죽었데. 십자가 못 박혀 죽었데. 개가 입이 터져 죽었데.’ 우리하고 상관없는 거예요. 개가 죽었어. 그럼 치과에서는 죽-치과 일만하면 되요.. 소가 매달려 죽었으면 경리 보는 여사원은 컴퓨터 그냥 하면 됩니다. ‘사장님 예 알았습니다. 5시에 퇴근하겠습니다.’ 하면 되요. 고등어파는 아줌마는 여기에 오리가 달리면 관계없어요. 그냥 고등어 팔면 되요.. ‘두 마리에 7천원, 예예’ 팔면 된 다니까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누가 달렸습니까? 개나 소나 오리가 아니라 누가 달렸습니까? 사람이 달려버리니까 치과의사라는 직업, 경리라는 직업, 고등어 파는 직업……. 그게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차이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과외 받는 애들, 가방매고 학교 가는 애들도 여기 지금 매달릴 판인데 좀 비정한 이야기이지만 방금 애 태어나서 앵- 하고 울고 있으니까 ‘애야 너도 십자가 달려야겠다.’ 얼마나 냉정하고 비정한 이야기입니까? 연세 많아서 해소 기침하면서 ‘얘야 내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고 연세 많은 친정어머니가 90넘어서 곧 돌아가시는데 ‘어머님 십자가 달려야 됩니다. 죽으세요!’ 이 얼마나 비정합니까? 그러나 이게 우리 감정 문제가 아니잖아요. 우리끼리 비정하다, 비정하다 하는 그런 판정은 하늘나라는 통하지 않고 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수요일인가 그런 얘기 했습니다. 사람 사는 거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가 묻는 거, 물을 필요 없어요. 옥경이한 테 물으라고 하고 (ㅎㅎ) 사람이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그것은 신경 쓸 문제도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이 말이죠.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어차피 달릴 몸, 어차피 십자가 알면 천국이고 모르면 지옥 가는 거 왜, 자꾸 남들과 비교하고 부러워합니까? 그러면 그 사람이 과연 십자가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 아는 척하고 지옥 가는 사람이지…….
오늘 본문 12절 보세요.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그리스도에게 잡힌바 되어 있다. 멱살 잡혀 있다. 꼼짝 마라에요. 잡힌바 된 사람은 강하게 자기를 움켜쥐는 그분의 인생 경로 외에는 다른 것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다른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 잡힌바 되었기 때문에…….
남녀 간에 연애할 때 어떤 남자가 여자를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남자가 자기를 좋아하니까 여자가 놀리듯이 장난치니까 남자가 하는 말이 낚였어, 낚였어 하죠. 낚였다는 거예요. 낚인 것이 좋아하는 사이에는 그렇게 기분이 좋은 모양이죠. 여러분 안 낚여봐서 모릅니까? (ㅎㅎ) 낚였어, 낚였어 낚여도 좋다 하는 거예요. 지금 이 기분이 누구 기분인가 하면 사도 바울입니다. 낚였어, 낚였어 예수님께 낚였다는 사람이 치과의사가 부럽고 고등어파는 아줌마가 부럽고 경리 여직원이 부럽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바로 낚여야 십자가 뒤쪽의 나라에 갈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 뒤쪽의 나라, 십자가 뒤편에 있는 나라를 구약에서 속죄함을 받은 나라라고 합니다. 이번 여름에 레위기 할 건데 우리 의존교회 교인들 서울이고 멀고 해서 참석 못하는 분이 많이 계신 줄 알아서 미리 당겨서 강의 하죠.
출애굽이라 하는 것은 애굽에서 나왔다 해서 출애굽입니다. 그런데 출애굽 할 때 그들이 나올 때 만약에 애굽군대가 뒤따라 나오면 출애굽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내가 집을 가출할 때 ‘나 이제 집구석 안 들어간다. 있는 돈 털어서 가출했다’ 하고 있는데 바로 뒤에서 엄마가 ‘우리 같이하자’ 이러면 가출이겠어요? 가출 아니겠어요? 늘 엄마가 따라 다니는데 무슨 가출입니까? 집에서 나왔지만 뒤에서 ‘형 같이 가’ 하면 그게 무슨 가출입니까? 온 집안이 이사한 것이지 무슨 가출이겠어요? 출애굽하려면 애굽이라는 영토만 나와서는 안 되고 애굽 권력조차도 못 따라 오는 곳에 가야겠죠.
우리가 이 땅에서 구원받았다 하면 이 세상 사람들이 흉내도 못 내고 따라 올수도 없는 곳에 가야 되요. 완전히 약 올리기 식으로 날잡아봐라 식으로 가야 되요. 그런데 천국 간다 하면서 온갖 세상 즐거움 다 따라 나오면 그것은 출애굽이 아니고 구원이 아니고 그것은 세상을 통째로 이동하는 것이지 구원이 아니잖아요. 애굽의 힘에서 떨어질 수 있는 곳으로 갔을 때 진정 출애굽, 애굽에서 탈출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 애굽에서의 권세를 애굽의 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섬기지 못하게 만든 모든 힘에서 떨어져 나가기 위해서 여기에 홍해바다가 있어요. 홍해바다에서 오다가 누가 죽었습니까? 애굽군대가 ‘저 까짓것 저들이 가면 우리도 간다.’ 하면서 따라 오다가 지퍼 잠그듯이 양쪽에 있는 물 벽 쏟아져서 다 죽었죠. 성경에 나오죠. 분명히 성경에 나옵니다. 그런 경험 여러분들이 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을 같은 교인들이나 친구나 동창생들이 어설프게 믿는 다고 하다가 세상 돈 벽에 넘어져서 다 떨어지고 외롭게 혼자 탈출해 본적 있습니까? ‘너 같은 사람이 예수 믿고 천국가면 나도 간다.’ 하고 따라 오던 친구들이 돈 시험, 가정시험, 친구시험, 교회시험 걸려서 결국 그들이 ‘아이고 너 따라 가다가 천국 못 가겠다 나는 천국보다도 교회가 좋아’ 하고 교회 죽치고 거기서 권사노릇하고 거기서 대장 짓하던 그런 친구들이 없습니까? 집사님 없습니까? 집사님 있지 싶은데 그런 친구들……. 지금 친구들 많습니까? 거의 없지요. 다 떨어진 거예요. 홍해바다 물벼락 맞아 다 죽은 거예요.
어딜 가요, 어디를 가요. 함부로 천국을 너무 쉽게 봤어. 나를 ……. 저 말고 여러분 자신들을, 그들은 여러분 자신들을 너무 쉽게 본거예요. 복음 십자가 하니까 다 안다는 거예요. 막상 일이 터지니까 십자가고 뭐고 '엄마야 나살려라' 하고 다시 도로 옛날 즐겼던 것 옛날에 그리웠던 것으로 원상복귀 해요. 홍해 건너가지도 못하면서 물 한번 찍어봤다고 그것도 홍해라고 혼쭐나서 도로 옛날 살던 그때 그 식으로 돌아가요. 우리교회도 많아요. 세례 받고 교회 안 나오는 사람 한 둘이 아닙니다. 세례 받을 때 이야기다 했습니다. 다 믿는다고 입을 벌려 고백했습니다. 로마서 10장에 나오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지옥가게 생겼네!’ 그래서 말로 시인하고 이것이 증표가 된다니까요. 천국과 지옥 가는 증표가 아니라는 거예요. 흔히 안 믿는 남편들 결혼할 때 보니까 전부 결혼하면 잘 믿겠습니다! 해서 남편들 다 따라 가잖아요. 회사 바쁘네! 해서 두 달 안 나오고 다음부터는 미안해서 안 나오고 영영 빠빠이 돼요.
무엇인가 떨어지는 게 있어야 뭐가 생기는가 하면, 차이 라는 것, 왜 이 차이를 우리가 묵살하려 합니까? 하나님은 나라고 하는데 우리 쪽에서 뭉개 버리면 안 됩니다. 적어도 우리가 출애굽 했으면 우리 가슴속에는 안 믿는 사람들이 아무리 흉내를 내도 따라 올 수 없는 그 무엇이 하나의 문신처럼 우리의 십자가 흔적이 있다 했잖아요. 십자가 흔적처럼 우리 영혼 속에 내 힘으로 지워지지 않는 새김이 있어요. 뭔가 새겨져야 돼요. 심지어 내 피부가 불에 타 없어진다 해도 불타지 않는 뭔가 최후로 남아있는 하나님이 심어준 마지막 남아있는 그게 있어야 돼요.
그것이 출애굽할 때 바로 유월절에 어린 양이었습니다. 피였습니다. 여러분 피를 바르면 구원된다 하잖아요. 그 피를 문지방에 바른다는 의미가 곧 내 가슴에 발랐다 이 말입니다. 신약에 보면 내 영혼에다 바른 거예요 내가 바로 피 묻은 사람이라는 것을 너희들 한번 보라는 겁니다.
그들이 홍해를 건너왔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홍해를 건너는 것은 애굽의 세력을 떨어뜨리어 놓기 위한 것입니다. 애굽의 세력을 떨어뜨리어 놓지 아니 하면 진정한 출애굽이 아니죠. 그러면 출애굽이란 무엇입니까? 애굽영토를 떠나는 것이 아니고 애굽의 세력들이 아무리 강한 군대가 오더라도 따라 올 수 없는 그 세계가 나를 현재 둘러싸고 있고 나를 지배했다 애굽의 힘이 아니고 출애굽 했던 또 다른 힘이 나를 지배하고 있음을 느낄 때 우리는 새로운 영역에 도립한 겁니다. 그것이 출애굽입니다.
그런데 홍해를 건너 왔으면 끝났습니까? 진짜 홍해를 건너가는 것은 이것은 본게임 시작도 하지 않았어요. 본 게임은 그들이 누구를 만나야 돼요? 여기 붉은 무슨 산이에요? 시내산입니다. 시내산에 누가 계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죠. 원래 출애굽 할 때 목적이 있었습니다. 애굽 탈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고 목적은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거예요. 모세가 먼저 여호와 만나시고 애굽에 내려가서 인솔해서 들어 왔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만약에 모세 같다면 우리가 예수 믿었다 그 다음부터 어떻게 합니까? 예수 믿었으면 그 다음에 뭐해요 따라 가야죠. 모세가 왔다. 그래서 홍해 건네줬다. 고맙다고 모세하고 악수하고 헤어집니까? 모세가 나왔던 그 원천지로 모세를 따라 가야 할 것 아닙니까! 세상권력에서 떨어졌다고 해서 ‘이제 나 혼자 삽니다.’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갈 곳이 있어요.
갈 곳이 뭐냐 하면 모세를 파견했던 그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하나님 앞에 시내산 앞에 그들이 당도하게 됩니다. 이것이 본 게임입니다. 당도 하게 될 때 그 때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애굽에서 나오는 것이 다가 아니고 이 시내산에서 모세는 올라가고 다른 사람들은 못 올라갔죠. 그렇다면 모세가 여호와를 만났는데 모세가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살았지요. 그러면 우리가 뭘 따라 간다? 모세 따라 가야 되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될 일이 뭡니까? 모세가 하나님 만나서 안 죽고 산 것처럼 모세 따라 온 사람들도 머뭇거리지 말고 하나님 만나도 안 죽어야 되겠죠. 안 죽어야 되는 데 ‘까짓것 뭐 만나지’ 이랬다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서 모세가 안 죽은 것이 뭣 때문에 그렇습니까? 여기 언약 때문에 그렇죠. 언약 때문에 그런데 산 밑에 있던 사람들은 언약이 내려오다가 모세가 깨뜨려 버렸으니까 결국 이 사람들은 여호와를 만나야 될 사람이 여호와를 못 만나고 오히려 만나면 죽어버리는 사람이 된 다면 이 사람들은 애굽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여호와 만날 수도 없고 어중간한 그것, 오늘 강의의 주제가 되는 예수 믿는 다고 우기면서 결국은 지옥 가는 거죠
예수 믿는 다고 '척' 하면서 결국은 지옥 간사람, 우리는 그 법칙을 알아야 돼요. 왜 예수 믿는 데 지옥 갔느냐 그 법칙, 그 차이를 모르면 우리도 동일하게 예수 믿는 다고 우기면서 결국은 지옥으로 빠질 수밖에 없어요. 그것은 이 사람들이 애굽에서의 구원만 염두에 두었지 여호와 앞에 설 수 있어야 될 그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그들은 거부했습니다. ‘고생 이제 끝이고 행복시작이지 그것으로 끝이지 여호와에게 잔소리 들어야 돼. 왜, 우리가 만들지 않은 언약을 우리가 모셔야 되는데 내가 사용하지 않는 언약을 내가 구태여 지켜야 돼. 힘들어 죽겠는데 그거 지킨다고,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여호와 하나님에게 말씀을 왜 지켜야 되는 데, 귀찮아 죽겠어.’ 그러니까 애굽에서 나오면서 하나하나가 마귀들이에요. 완전히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언약이 깨어집니다. 언약과 상관없이 죽어요.
그러니까 교회 나와서 지옥가고 그것이 아주 당연하고 그것이 필연적 코스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 나와서 지옥 가는 것, 합당한 코스였습니다. 뭐 다른 코스 없어요. 언약이 깨어졌습니다. 이야기 거기서 끝났습니까? 거기서 요한 계시록으로 바로 이어졌습니까? 깨진 돌 판을 도로 만들라고 누가 지시했습니까? 하나님이 지시하시고 그 돌판 다시 두 번째 올라가서 그 돌 판에 글씨 새기는 것은 누구 몫입니까?
오은선 대장이 히말라야 산맥 몇 번 올라갔다 왔습니까? 14번이죠. 모세는 시내산 몇 번 올라갔습니까? 3번 등정 완공 했습니다. 첫 번째 외워서 올라가고 두 번째 돌판 받으러 올라가고 세 번째 깨진 돌판 다시 글씨 쓰러 올라가고 그렇다면 그 깨진 돌판 대신 새로 땅에서 깎아서 만든 돌 판이 있다는 말은 이미 이 백성들은 언약을 이미 깨뜨린 전제하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밖에 없는 사람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과 언약을 맺겠습니까? 중간되는 모세와 언약을 맺겠습니까? 모세와 언약을 맺어서 모세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들은 저주받고 모세의 말을 들으면 복을 받는 용서받는 그런 모세 중심의 새로운 계약이 체결되는 거예요. 그것을 모세언약이라고 하는 거예요. 모세 언약은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모세가 투입된 것이 아니고 이미 백성들이 죽어 마땅한 것을 전제로 하고 모세로부터 하나님께서 새로 자기 백성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 모세언약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모세언약이 주어진 것이 아니고 이미 그들은 저주받는 자가 기정사실화된 상태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을 모세언약을 통해서 새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 새로 발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 모세언약을 구축합니다. 따르는 백성들은 아무 것도 모르죠. 그리고 모세언약 만들면서 시내산을 이동시켜요 시내산이 어디로 가느냐! 수직적 시내산이 수평적 시내산으로 거룩으로 이스라엘백성들과 동행을 하게 돼요.
현재 돌판 깨졌죠. 깨진 돌 판으로 인하여 지금 하나님은 누구하고만 상대합니까? 모세하고만 상대하죠. 모세 없으면 그들은 다 죽었어요. 다만 그들이 산 것은 모세 때문에 산겁니다. 그러면 언약이 누구하고 체결됩니까? 하나님하고 모세하고만 체결되는 거예요. 그것이 모세 언약이에요. 모세언약의 내용은 모세가 깨진 돌판 이전에는 십계명을 지켜야 되잖아요. 그런데 모세언약 이후에는 못 지키는 인간을 어떻게 용서가 되느냐, 용서가 더 추가가 되겠죠. 이미 깨어졌으니까 새삼스럽게 십계명을 물을 필요 없어요. 그 인간은 이미 저주받은 인간, 저주받은 인간보고 말씀 지키라고 하면 지킵니까? 죄인보고 성경 말씀 지키라면 온전히 지키겠습니까? 지킬 수가 없는 것 아닙니까?
제가 어제 대전에서 강의 하면서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예수님 산상설교를 설명했습니다.
마 5: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우리가 한번 여기 남정네들 몇 분계시니까 잘 들어 보세요. 여러분들이 결혼할 때 의자에 앉아 있는데 여자가 지나가니까 ‘결혼 합시다.’ 이렇게 결혼했습니까? 그렇지 않죠. 저 여자의 뒤태를 보고 앞태를 보고 그 다음 또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두 명보고 세 명보고 ……. 이미 여성에 대해서 키, 성격, 신장 등을 본다는 것 자체가 고른다는 거죠. 그냥 눈 감고 있는 봉사처럼 ‘학생, 결혼합시다.’ 이런 바보 같은 남자는 없다 말입니다. 고를 때는 이미 음욕이 동원되는 거예요. 여자를 보고 무엇을 품은 자다? 음욕을 품은 자다. 그러면 앞에 갔던 여자가 괜찮다 싶었는데 곧 뒤따라오는 여자를 보니까 앞에 여자는 여자도 아니라 이거 어쩌면 좋아요. 그렇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두 명을 측정 했어요. 자기가 뭔데 자가가 평가 다 해 버리고 ……. 죄인은 그냥 주신대로 받는 게 아니에요. 나름대로 측정하고 판단하고 평가 하고 심판해 버립니다. 왜, 인간은 안에 선과 악을 자기 위주로 판단하는 그런 고장 난 기계가 들어 있어요. 저주받은 기계이기 때문에요.
또 하나 예를 들게요. 네 오른손이 죄를 범하거든 잘라버리라 나머지 가지고 구원받는 것이 낫다는 말을 했죠. 보세요! 면적으로 손 이것 몇 제곱미터이겠습니까? 지금 나머지는 깨끗하잖아요. 면적상으로 착한 쪽이 많습니까? 악한 쪽이 많습니까? 어느 쪽이 많습니까? 착한 쪽이 많죠. 착한 쪽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네가 오른손이 죄를 범한 취급을 한 것은 결국은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양으로 면적을 따져서 안에 회계 장부가 있어서 착한 일이 나쁜 일 한 것보다 퍼센트가 반 넘으면 그것도 상세하고 뺄 것을 빼고 나머지 착한 것 가지고 구원받는 바리새인들의 선악적 사고방식을 알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면적을 형편없이 안 되는 것도 만약 손이 네가 죄를 범하면 나머지 모든 착한 것도 지옥으로 다 끌고 간다는 겁니다. 이것은 선악적인 사고방식이 남긴 큰 오류입니다.
차라리 바리새인들이 선악을 몰랐으면 죄가 지배 한다고 느끼면 오른손에 흔적 있는 것은 오른손이 죄를 범한 것이 아니고 죄가 우리를 지배한 것입니다. 권세자로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그들은 오른손이 범죄 했다고 나머지 가지고 괜찮다고 하니까 주님께서 그것을 역으로 치시는 겁니다. ‘오른손이 죄를 범했냐? 니, 다 죽는다.’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오른 눈 을 빼면 왼눈 가지고 죄 안 짓습니까? 눈 하나 없다고 우리가 착한 사람 됩니까? 주님께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신 것은 평소에 우리가 선악적인 사고방식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기준이기 때문에 세상을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죄인은 성경을 지킬 수 없습니다. 성경을 지킨다고 하면 할수록 숨겨진, 감춰진 죄가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세언약은 새삼스럽게 ‘잘 지켜라’가 아니라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십계명 지킨다고 우기면 우길수록 죄만 나오는 인간을 어떻게 죄를 없앨 것이냐를 가지고 모세에게만 준겁니다. 모세에게만 줬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레위지파에게 줬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다른 지파를 살리기 위해서 레위지파는 헌신하는 겁니다. 헌신이라는 것은 희생이라는 겁니다. 쟤들이 못하는 것, 주께서 우리에게 시켜서 우리 희생되고 저들 살리겠다는 겁니다. 그것이 레위기입니다. ‘너희 조금 고생해라’ 이 말 입니다. ‘다른 사람 당해야 하는 데 너희가 대신 당해라.’ 이 말입니다. 그러면 레위지파가 해야 할 일이 뭐라 했습니까? 이미 저질러진 죄인을, 죄를 지은 인간에게 의를 요구할 입장이 못 되니까, 설치면 설칠수록 죄가 더 나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대책이 없는 인간들입니다. 하나님 믿으면 하나님이 가짜고, 예수 믿으면 예수가 가짜고, 다른 예수고 복음 믿으면 다른 복음이고 …….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 되는 일을 시키셨다고……. 제가 언젠가 설교를 하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왈칵 눈물이 쏟아 질 뻔했습니다. 목회자에게 희망을 주면 되겠는데 주님께서는 목회자에게 힘을 안주셨어요. ‘백날 해 봐라’ 안 되죠. 김명현목사님 안되죠? 안됩니다. 기도해도 안 돼, 심방해도 안 돼, 설교해도 안 돼, 사람이 안 되는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접스러운지 자기 인생이 얼마나 수치스러워요. 희망이 있으면 희망보고 하죠. 될 희망도 없는 데 그것을 매달려야 한다는 것은 그거 눈물 안 납니까? ‘학생, 공부 해봐야 서울 대학 못가’ 이거 얼마나 사람 무시하는 거예요. ‘하지 마’ 하지마가 아니라 ‘해봐, 네가 서울대학가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진다.’ 완전히 사람을 얼마나 무시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식입니다. 안 되는 일을 하게 함으로서 내가 안됐던 일을 됐다면 결국 누구 몫입니까? 언약의 몫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몫으로 돌리기 위한 방법입니다.
이번 시간 강의 한 것 정리하고 10분 쉬겠습니다. 처음에 고등어파는 아줌마, 치과의사, 컴퓨터로 일하는 경리, 각각 직업이 다 다르죠. 우리가 보기에는 차이가 나지요. 아줌마는 뭐가 부럽습니까? 고기 파는 것보다도 에어컨 켜진 사무실에서 경리보고 싶죠.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나는 십자가에서는 개나 소나 오리가 죽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죽은 것 때문에 치과의사든 경리든 고등어 파는 아줌마든 그 차이는 소멸해 버려요. 없는 거예요. 그 의미가 없어요.
차이가 소멸했다는 말은 인생 어떻게 살아도 아무 의미가 없다 이 말입니다. 이것 하나 기억하세요. 사람 어떻게 살아도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것을 자식들에게 너무 강조하지 마세요. 아이들 오늘부터 또 공부 안합니다. 어떻게 살아도 백수로 살아도 노숙자로 살아도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는 그것은 옥경이 에게 물어보시고 아무 의미가 없어요. 왜,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결국은 우리의 모든 의미를 다 지워 버리는 거예요. 마치 칠판처럼 다 지워버리죠. 자, 여기에 글씨를 썼을 때 이게 뭡니까? 칠판이죠. 칠판에 써져 있는 것을 제가 지웁니다. 지워진 이게 뭡니까? 칠판이죠. 똑같죠. 여기 치과의사, 여기 고등어파는 아줌마 지우나 안 지우나 마찬가지, 칠판은 칠판입니다. 직업이 있든 없든 간에 구원받은 것은 십자가에 매달려야 되지 직업가지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서울100514빌3장12절b
서울100514빌3:12b
지옥 가는 비법 (천국 탈락 비법)
첫째시간 마지막에 ‘시내산이 이동한다.’ 했죠. 너무 거창하죠. ‘시내산이 버티고 있는데 뭘 이동해’ 위에 있는 거룩이 이동한다. 왜 그렇게 자꾸 위에 있는 거룩 이라고 우기느냐, 인간이 만든 거룩은 안 됩니다. 왜, 이미 인간은 언약궤를 깨뜨렸기 때문에 인간이 만든 것은 조작한 것이고 조잡한 것이고 선악적인 바탕의 거룩은 있을 수 없어요.
선악적인 바탕은 착해야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생명나무의 거룩은 죄인을 용서하는 것이 거룩입니다. 죄인을 용서하는 게 거룩이에요. 나 혼자 흥분하고 있는데 …….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환자가 병원에 오면 병 낫고 집에 가잖아요. 그런데 그것은 환자 생각이고, 병원 입장에서는 환자가 온다는 것 자체가 병원의 가치가 높아지는 의가 됩니다. 환자가 와 줘야 병원이 의가 된다. 주께서는 병든 자를 찾는 이유가 그런 관계 자체가 하나님의 의가 돼요. 왜냐하면 ‘네가 병들었는데 건강하게 된, 그 과정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 완성이기 되기 때문입니다.
환자 많이 몰고 오세요. 환자가 있음으로서 병원(의사)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을 하나님이 원해요. 우리는 병만 고치고 가면 ‘볼일 봅시다. 그럼 고맙습니다.’ 이렇게 하고 가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우리가 병 낫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병원이 진짜 의를 주는 그런 하나의 장치였다. ‘그것이 완성 이였다.’를 보여주는 겁니다.
관심사가 예수님에게 관심을 둬야지 예수 믿고 구원받는 나에게 관심을 두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것은 성경을 잘 못 해석한 거예요. 아직도 선악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 착한 일을 하니까 선하니까 그래서 나는 구원받는다.’는 사고방식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우리는 끝까지 선악적으로 일만 저지르기만 할 뿐이고 구원은 하나님께서 자체적인 의와 거룩으로 인하여 우리가 거룩함을 입는 겁니다. 히브리서 10장에 나오죠. 예수그리스도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이 덮쳐왔다, 거룩함을 입게 되었다는 겁니다.
두 번째 시간 중요합니다. 인간 거룩 말고 하늘에서 내려온 모세 언약의 거룩, 거룩이 내려오면 여기가 하나의 회막이 됩니다. 제단이 있고 텐트 쳐 있고 이 안에 경계선이 있는데 여기가 제단입니다. 여기 앞에는 회막이 있고 이걸 성소라고 하고 이 안에 지성소이고 이 사이를 휘장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거룩이 위에서 내려오게 되면 이 공간과 이 사이에는 이미 시내산에서 내려온 거룩으로 인하여 접근하면 안 됩니다. 접근하면 발포해 버렸어요. 총으로 쏴 죽였어요.(하하) 거룩을 모시고 가야되기 때문에 위에 있을 때보다 아래 있을 때 더 무섭죠. 무서운 거예요. 겁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속죄소, 법궤가 있어요. 직사각형 상자가 있는데 금으로 도금한 아카시아 나무 봉이 있어서 봉을 들고 채로 들게 되어 있어요. 이 지성소에 있는 법궤를 가지고 뭐라 하느냐하면 속죄소라고 해요.
그림이 실제 그림인데 간편하게 그렸습니다. 여기 벽이 있고 이쪽은 세속, 이쪽은 거룩……. 움직이면 죄에요. 모든 것이 죄에요. 왜,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양쪽으로 자기 의를 주장하니까, 이 죄의 벽이 있는데 이 벽을 뚫고 거룩으로 나오면 구원받고 그렇지 않으면 구원 못 받아요. 애굽에서 나오는 것, 세상 권세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진짜 돌파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면서도 죽지 않는 것, 이것이 진짜 거룩입니다. 여러분, 모세가 하나님과 함께 했을 때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살았죠. 그런데 그 밑에 백성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죽어버립니다. 누구든지 내 앞에 나오면 죽는다고 했어요.
죽음에 두 종류가 있는데 목숨 끊어지는 죽음과 하나님 앞에서 죽는 것, 이 죽음은 저주가 되겠죠. 사람들은 뭐만 겁나하느냐 목숨 끊어지는 것만 겁나지 하나님 앞에서 저주 받는 것은 겁을 내지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이 두 번째 하나님 앞에서 저주 받는 죽음을 그들은 혹독하게 경험을 해야 돼요. 그래서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 죽이고 그런 것입니다. 여기는 사형제도가 있어서 하늘의 법을 어기면 무조건 다 죽여 버려요. 고의로 범죄한 사람은 속죄하는 제사를 드려도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모르고 지은 범죄에 대해서만 뒤에 깨달았을 때, 그것도 모르고 지은 범죄도 용서가 안돼요. 모르고 지었는데 ‘아, 이것은 의도하지 않았는데 죄가 되었구나!’ 나중에 알았을 때 그때 회개하는 차원에서 속죄 하는 제사를 지낼 때만 용서받습니다. 고의로 지은 것은 어떤 경우도 용서가 안돼요.
히브리서 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하나님을 놀리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시험하기 위해서 ‘뭐 죄 져도 용서 받는데 죄 한번 지어볼까?’ 이런 인간은 두 번 다시 용서 받는, 속죄할 수 있는 법은 없다는 겁니다. 아, 겁나죠. 모르고 지은 죄, 철이 없어 지은 죄, 그런 것은 용서 받을 수 있는데 그것도 조건이 있어요. 나중에 ‘아, 잘 못됐구나!’ 라고 인정할 경우만 그런 거예요. ‘내가 어려서 몰랐는데 지을 수도 있지!’ 이러면 또 안돼요. 이 말은 결국은 용서가 된다는 말입니까, 안 된다는 말입니까? 우리 인간의 힘으로 용서가 된다는 말입니까? 용서가 안 된다는 말입니까? 용서가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용서 자체가 안 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이 하는 회개라는 자체가 한계가 있어서 온전한 회개가 될 수 없어요. 회개를 하려면, 반성을 하려면 전에 있던 기준을 먼저 알고 그 기준이 잘 못 됐다는 것을 알고 그 다음에 새롭게 다시는 이런 짓 하지 않겠습니다. 3개에 대해서 다 알아야 되는데 세 개 다 우리가 백날 알아봐야 죄밖에 안 나와요. 기준을 잘 못 고른 거예요. 기준을 잘 못 고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은 모세 언약에 의해서 인간이 속죄 될 수 있는 방법은 인간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용서가 되었느냐 하면 이런 제사 제도를 행사하고 양 잡고 피내고 하는 행위를 해보니까 막상 이런 제사제도 휘장 만들고 해보니까 우리 행위로 절대로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용서받는 사람입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시킨 일을 그대로 해도 실패 할 수밖에 없는 일들만 우리에게 시키는 겁니다. 한평생 인생을 살면서 내가 예수 잘 믿겠다고 노력하는 그것이 결국 예수 잘 믿는 것이 아니고 ‘나의 또 다른 죄의 모습입니다.’ 라고 자복하는 사람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럴 때만 내가 알아서, 내가 처신 잘해서 용서받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저를 용서하기로 작정 하셨기에 용서 했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속죄소 만들어서 이렇게 할 필요 없지 않습니까?’라고 하실 텐데 이 속죄소 만들고 하는 모든 것이 모형이 돼요. 여러분들 학교에서 학생들이 비행기 모형 만들지요. 만들고 그것을 날릴 수는 있는데 그것에 한 번 타 보신 적 있습니까? 못 타지요. 어떤 분이, 어떤 분 할 것 없이 제 동생이지(ㅎㅎ) 엘리베이터 만드는 공장에 취직을 했어요. 그런데 그것을 시험 가동을 해야 하는데 어떤 직원도 안타려고 합니다. 왜? 자기들 실력을 알기 때문에 시공되기 전에 직원부터 태워서 오르락내리락 되어야 하는데 자기가 어설픈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사람이 없을 겁니다. ‘과장님 하세요.’ ‘너 해라.’ ‘아이, 아닙니다.’볼트 하나 잘 못하면 와장창 다 내려 앉아 죽으니까 참 재미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걸 그래 소비자 보고 타라고? 자기들도 겁나서 못타면서.......’불량식품 만들 때 자기 아들은 안 주잖아요. 젓갈 만드는 사람이 절대로 젓갈 안 먹습니다. 더러운 거 아니까…….
손이 있는데 왜 못 만들어요. 만들죠. 시키는 대로 만들어 법궤를 만들어도 절대로 이것이 우리를 용서하지 못하는 다는 사실을 만들면서 아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제대로 예수 믿는 사람은 교회 백날 다니며 충성해도 교회가 우리를 구원 한다? 구원 안한다? 구원 못한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럼 교회는? 교회는 폼입니다. 우리 죄를 드러내는 폼입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어떤 것도 우리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에게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예수 믿어도 용서 받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용서만 믿는다. 예수 믿어도 용서 받지 못하는데 예수님의 용서만 믿어지죠. 내가 용서받기 위해서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한 것으로 우리를 용서하지 못하고 우리가 무엇을 하나 안하나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께서 우리를 용서했다는 용서가 우리에게 남아 있으면 그것으로 구원 됐다 이 말입니다.
그런 사람은 항상 무엇을 끄집어냅니까? 주님께서 알아서 용서했습니다. ‘창세전에 택한 자에게 용서가 주어졌습니다!’ 하는 겁니다. 믿어지는 자에게는 정말 쉬워요. 무엇인가 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보다 어려운 시험문제는 없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용서로 믿어진다면 1번이 아닌 2번 진짜 예수님의 용서를 믿는 자라면 우리가 고등어를 팔던 치과의사를 하던 경리를 하던 백수가 되던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던지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죠. 십자가에 어떻게 달려죽던지 거꾸로 죽던지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왜? 그것하고 구원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에, 상관이 없다는 것은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피 때문에 구원 받았습니다 하는 뜻입니다.
만약에 우리 피 짜서 구원받으려고 하면 피 없는 사람은 애 먹습니다. 피 뺀다고……. 우리의 땀방울, 낙타 무릎, 우리의 희생, 헌금, 기도……. 어떤 것도 우리를 구원 못해요. 우리의 마음도 우리를 구원 못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냥 우리마음이죠. 만날 예수 믿는 척하는 마음이에요. 예수 믿는 척 하는 마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에요.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 이상으로 난대 없이 예수님의 용서, 구원이 믿어지는 놀라운 변화가 우리에게 주어질 때 그것은 이 벽을 뚫는 거예요. 벽을 뚫고 우리가 간 것이 아니고 저쪽에서 우리 쪽으로 손을 내 민 겁니다. 벽을 뚫고 주님의 손이 와서 오늘 본문에 나오죠. 예수님께 잡힌바 된 거예요. 예수님 손아귀에 잡힌바 된 겁니다. ‘가자! 이놈아!’ 어디로? ‘나 있는 곳에 가자!’
그러면 사도바울의 남은 인생은 뭡니까? 남은 인생은 내가 안했는데...... 제가 어제 tv cf를 보니까 산유화 선전을 해요. “참 좋은데~, 남자한테 정말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그 cf 보신분 있어요? 집에서 노는 사람이나 보지 누가 보겠어요. 그 cf를 보고 참, 얼마나 답답했으면 cf를 저리 하겠나 말로는 설명 못하겠다는 거예요. 어떤 50대 아저씨가 나와서 “참 좋은데~, 남자한테 정말 좋은데~‘ 산유화, 남자한테 뭐가 좋은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참 좋다는 거예요. (ㅎㅎ) 사도바울이 사람이면서 ‘내가 안했는데, 정말 내가 안했는데 왜 나는 구원받지’이게 잡힌바 된 사람의 고백입니다. 나는 아닌데 내가 전도한다고 되는게 아닌데 ‘참~ 남자한테 좋은데~’ ‘구원받으면 참~ 좋은데’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어요. 다만 주께서 하십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외의 달리 설명해 낼 수가 없어요.
여기 학생들이 있는데 엄마가 물어보세요. ‘니, 왜 엄마하고 사는데?’ 그럼 아이는 ‘아~, 분명히 설명할 말이 있는데~ 엄마가 질문을 너무 어렵게 해서’ 더 어려운 질문을 하세요. ‘애야 내가 누구지?’ ‘엄마에요’ ‘너는 왜 나를 엄마라고 부르지?’ ‘아~ 분명히 뭐가 있는데~’ ‘딱 보면 모르겠나?’ ‘설명해 보라니까 설명’ ‘아, 엄마니까 엄마지’ ‘왜, 글쎄 다른 아줌마가 엄마가 아니고 내가 너에게 엄마냔 말이야?’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냐하면 가족 끼리 대화를 합시다.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자꾸 이야기이지만 자꾸 대화, 이야기를 끄집어내야 꼬리에 꼬리를 물어야 돼요. 정 안되면 끝말잇기를 하던지 자꾸 자녀하고 이야기를 해야 해요. 귀찮다고 하지 말고, 그러면 애들은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꼭 집으로 들어옵니다. 엄마하고 이야기 못하니까 아빠하고 이야기 못하니까, 친구하고 하려하고 밖으로 자꾸 나가요. 컴퓨터 게임하려고 하고…….
어느 집에는 집에서 오순도순 엄마하고 이야기 하다가 아빠가 왔다 하면 순식간에 자기 방으로 다 들어가요. 아빠가 괴물이에요. 다 들어가 버렸어요. 꼴 보기 싫다고……. 그럴 때는 먼저 아버지가 아이한테 다가서세요. 아빠가 아이에게 ‘너는 내가 왜 아빠인데…….’ 말도 안 되는 질문부터 시작해서 하면 질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빠가 나에게 하나의 존재로 다가온다는 것을 느낍니다.
사람은 날 때부터 수동적이에요. 잡힌바 되지 않으면 그 사람과 관계하지 않습니다. 자꾸 잡힌바 되어야 돼요. 제일 답답한 것이 자기가 잡으려고 하는데 도망갈 때가 제일 답답합니다. 여러분, 꿈꿀 때 재미있잖아요. 그 다음에 연속극 해 보세요. 그 꿈이 생각나는가? 생각나지 않아서 미칩니다. 잡힌바 되지를 못해요. 사람은 자꾸 잡힌바 되어야 할 텐데 자기가 잡으려고 하니까 힘든 거예요. 돈을 잡으면 돈이 도망가고 잡힌바 된 대로 살면 되는데 사는 대로 살면 되는데 자기가 환상을 꾸고 잡으려 하니까 만날 헛꿈만 꾸잖아요.
지금 사도바울이 잡힌바 되었다는 겁니다. 잡혀서 어디로 가는데요? 장소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제가 묻겠습니다. 인간이 십자가를 통과 할 때 차이가 납니까?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 고등어 파는 아줌마, 치과의사, 경리직원, 남자, 여자 차이가 납니까? 안 납니까? 십자가 달릴 때, 이야기 해 보세요. 안 나지요. 그러면 십자가 그 뒤에 있는 부활의 세계에서 우리가 차이가 납니까? 안 납니까? 차이가 안 나지요. 그럼 묻습니다. 십자가를 구경하지 말고 이것이 십자가라고 이야기 하지 말고 직접 십자가 세계에 뛰어든 사람의 특징이 뭐겠어요?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의 용서 앞에서는 자체적으로 차이를 내밀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목사님은 그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 봤어요? 성경 속에 들어가 봤습니까?’ ‘예, 들어가 봤습니다.’ ‘그러면 그 안에 십자가 뒤에 어떤 세계입니까?’ 정답은 일체의 모든 차이가 없습니다. 상급의 차이도 없고, 어떤 차이도 없습니다. 믿는 자에게 해당되죠. 안 믿는 사람 말고, 십자가 못 들어 온 사람은 관계없고, 처음부터 안 믿기 때문에 차이가 났고, 십자가 안에 들어 온 사람은 다 공통적인 특징이 일체 차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용서, 예수님의 동일한 용서를 받기 때문에 다 차이가 없지요.
그렇다면 교회에서 목사들이 차이를 만들어 낼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없고 교회에서 차이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뭐냐 하면 행함이냐 믿음이냐 예수님을 자기 행함으로 믿을 것이냐 아니면 사로잡힌바 되어서 믿을 것이냐 하는 그런 차이만이 중요한데 그래야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척하다 지옥 가는 사람인지 진짜 예수 믿어서 천국 가는 사람인지는 십자가 이야기만 가지고 모든 것이 결판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교회 올 때는 세상에서 만드는 모든 차이를 다 버리고 오직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행함보다 주님이 주시는 용서라는 행함을 다 같이 누리면서 다 같이 찬송하고 감사하고 영광 돌리고 주님 앞에 기도하고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래서 모두 한 형제가 되고 한 몸이 되고 한 지체가 되는 겁니다.
에베소서에 나오는 사도바울에 나오는 모든 교회의 관이 그렇게 쉽게 해결돼요.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근호 목사의 성경공부를 참석한다 하니까 그쪽 목사가 이근호 목사가 어떤 사람인지 조사를 하는데 그 친구 목사한테 물었어요. ‘이근호 목사가 어떤 사람이지?’라고 물었던 모양입니다. 그 친구 목사 하는 말이 옛날에 총신대 강의 할 때 얼마나 강의가 좋았던지 책을 많이 봤다는 거예요. 구체적으로 물었겠죠. 거기 책을 보고 참 좋아서 나도 책보고 많이 배웠다고 했죠. 그런데 총신대 다니면서 목사 초기에 책을 많이 봤던 사람이 지금은 제 책도 안 보고 버렸답니다. 왜냐 하면 그 책대로 하니까 교회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는 거예요. 환영을 받지 못해서 그 책을 버리고 교회에서 요구하는 대로 살아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친구의 말을 듣고 내린 결론이 ‘이근호 목사는 다른 것은 다 좋은 데 교회관이 잘못됐다.’ 이렇게 결론을 내린 거예요. 그러면 오른손이 문제 아닙니까! 오른손이 잘 못되면 다 잘 못된 거죠.
교회라는 것은 사도행전 20:28절에 보면 하나님의 피로 지었죠. 피로 지었는데 이 사람은 두 양푼이 주고 이 사람은 한 양푼 줍니까? 양쪽으로 피 받아야 구원 받는 겁니까? 피를 믿으면 구원 받는 겁니까? 피를 믿으면 구원받죠. 그런데 피가 어디서 생깁니까? 사람이 안 죽으면 피가 안 생기죠. 결국 피를 믿는 다는 말은 개, 돼지, 오리가 아니고 예수라는 사람이 죽었잖아요.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사람을 죽였다는 말은 예수님 죽을 때 모든 인간이 다 죽은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옵니다.
다 죽었는데 그렇다면 이 교회를 바라보는 누가 죽었어요? 교회를 바라보는 이 사람도 죽어요. 교회를 바라보는 사람이 죽어버리면 죽음 뒤에 십자가 뒤에는 뭐가 있습니까? 거기는 주님께서만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의 피로만 만들 수 있는 진짜배기, 이 교회의 특징은 뭐가 없습니까? 차이가 일체 없지요. 왜, 주님의 공로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런데 그들이 이런 진짜 교회를 바라보면서 살지 않고 기존의 교회를 붙잡았다는 말은 결국 교인들에게 ‘여러분, 이쪽이 십자가인데 십자가에 들어가면 구원받습니다. 자, 이제 관광 그만하고 이 쪽문으로 이쪽은 부활입니다. 자 부활이 나갑니다. 이쪽으로 빨리 오세요.’ 일본인 관광 하듯이 ‘자, 이쪽은 성령입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변화 받고 믿음생기고 기도하면 복 받습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고…….’
결국 이런 것들을 모아서 따로 교회를 만드니까, 만약에 자기 교회에 교인이 안 오고 옆 교회 가면 화가 나죠. 무엇 때문에 내가 있는 교회와 차이가 지니까 그러면 그 교회 부정선수 넣어서 시합하고 경쟁하고 문제를 일으키겠죠. 결국은 교회가 참된 교회를 가로 막기 위해서 마귀가 교회를 만들어요. 만들어서 진짜 십자가 피로 그 안에서 이미 마련된 교회를 세상신이 눈을 가려서 못 보게 만듭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주님에게 붙잡힌바 되겠어요? 아니면 교회를 누가 붙들어요? 자기가 붙들어요. 이것을 행함이라 합니다. 행함의 특징은, 주체는 누구냐 하면 자기가 붙들어요. 다 놓으면 돼요. 그런 책 있죠. 내려놓기 더 내려놓기……. 법정 스님 같아요. 무소유 같아요. (ㅎㅎ) 더 내려놓기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어떻게 하기가 아니라 우리의 속죄는 예수님의 피에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복음이지 더 내려놓기가 복음이 아니에요. 내려놨다고 생각하십니까? 파 보세요. 더 내려 놓을 것이 또 있지. 사람은 자꾸 내려놓으면 내려놓았던 자기 자신을 신봉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를 붙잡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어떻게 붙잡힙니까? 사실은 제가 보기에 의존교회, 저와 여러분들은 주께서 붙잡히고 있어요. 붙잡히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평소에 차이를 너무 많이 생각하다 보니까 그게 가리워 진거예요. 가리워 졌기 때문에 사도바울의 복음을 듣고 가리웠던 비늘같은 것이 두두둑 떨어져서 ‘아이, 기죽을 필요 없네!’라는 식으로 여러분들이 살아가셔야 돼요.
우리 집사님들, 옆에 머리 잘 나오면 그 때문에 신경 쓰인다고요. ‘나는 머리 엉망 되었다.’ 아침에 서울 오는데 버스에서 두 아줌마가 시끄럽게 이야기를 해요. 주제가 뭐냐 하면 어느 미용실에 10만원 주면 머리가 새로 난다는 거예요. ‘온갖 샴푸 쓰지 말고 내가 권하는 미용실에 가서 그거 하세요.’ 그런 내용을 시끄럽게 이야기해서 제가 또 나서서 조용히 하라 했어요. 그게 차이거든요. 머리 잘 나오고 자기 머리 빠지고 머리 안 빠지고 하는 그게 차이라는 말이죠. 그것에 현혹 되어 버리면 내가 붙잡는 것만 좋고 관람하지 붙잡힌바 되는 것은 자꾸 잊어버려요. 그런데 감사하게 매주 목사님 설교 듣고, 한 달에 한번 목사님 강의 듣고 하니까 다시 한 번 내가 붙잡는 것은 잠시 내려놓고 주께서 가려진 붙잡힌바가 드러날 때 다시 은혜 받고 ‘주여, 죄송합니다. 또 쓸데없는 차이를 두었군요.’라고 회개하고 또 문 열고 나가자마자 또 차이를 둡니다. 차이를 찾습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그렇게 살아야 됩니까?
빌 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빌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찌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빌 3: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모세가 예수님처럼 이스라엘을 대변합니다. 모세가 애굽에 나타났을 때, 모세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차이점은 모세는 이미 여호와를 독대했고(만났고, 알았고) 그리고 여호와를 만난 사람은 사명이 있습니다. 사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찬양과 영광을 돌린다는 목적이 뚜렷합니다. 돈벌이 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십자가 복음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내가 이 세상에 존재, 태어나야 될 하나님이 주신 부름의 사명, 목적이다 이 말입니다.
상의 특징이 무엇이냐, 저희 집에도 몇 개 있어요. 제가 한 것이 아니고 제가 상 탄 것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부름의 상이 아니고 개근상입니다.(ㅎㅎ) 개근상이 있고, 트로피가 몇 개 있어요. 그것은 제 딸이 음악 학원 다니면서 금상, 대상……. 이렇게 대구시연합회 배 피아노 대회라고 하는 것이 있어요. 그렇다면 그 트로피, 받은 상을 들여다 볼 때 거기서 뭐가 필름처럼 나오겠어요? 그냥 아무것도 아닌데 트로피 받았겠습니까? 뭐가 쭉 나오겠습니까? 그 뒤에 어떻게 살았다는 것, 어떻게 피아노 쳤다는 것이 기억되어 나오겠죠. 그럼 상은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 뭔가 향도 하는 역할을 합니다. 향도는 방향 잡아 이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부름의 상은 뭡니까? 부름의 상이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로 하여금 그길로 가서는 안 되고 이쪽으로 가야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겁니다. 홈이 파여진 골을 통해서 물이 흐르는 것처럼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은 할 수 없고, 어떤 경우에도 거기에 홈이 파여서 중력의 법칙에 의해서 그냥 떠미니까 떠밀려서 쪼아져서 몰려서 마치 소떼, 양떼를 몰듯이 몰려서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사람은 생각하기를 직장도 여자도, 남자도 내가 선택했다 생각하지만 교회도 내가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고 뒤에서 떠밀어서 그쪽으로 몰아진 거예요.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즐기고 싶은 것을 합니다. ‘저 남자 안 만났으면 다른 남자, 좋은 남자 선 많이 봤는데……. 그 좋은 남자 다 놓치고 왜 저런 남자 만나 결혼했나!’ 하는데 그 좋은 남자 다시 줘 봐도 그 남자 선택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고 우리의 숨겨진 본능이 물처럼 흘러갈 장소만 있으면 그쪽으로 계속 흘러가서 몰려 다녀서 된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죠. 사다리 타기 하는 거예요. 빠징고처럼 통통통 튀어서 볼이 탁탁 아래쪽으로 떨어지면 어느 쪽으로 떨어질지 하는 것은 여기 있는 장애물과 모양새에 따라서 어느 쪽으로 튈지 몰라요. 마찬가지로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최선을 다 할 뿐인데 그 최선이라는 것은 그냥 당기는 대로, 내 마음이 즐기는 대로 내 마음이 편하게 생각하는 대로 내가 재미있어 하는 대로 가다 보니까 사실은 뒤에서 누가 그쪽으로 자꾸 몰아넣은 거예요. 사실은 더 재미있고 더 멋있는 것이 있는데 주께서 그렇게 몰아넣는 거예요. 이것을 뭐라 하느냐 하면 구조라고 합니다.
세상은 구조로 짜여 져 있는데 그 구조가 들쑥날쑥 여러 가지 장애물과 홈으로 파여져서 내가 고아로 태어나려고 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태어나 보니까 그런 구조 안에 있었던 거예요. 내가 재벌 아들 되기 싫어서가 아니라 태어나서 보니까 가난한 집안에서 그것도 차남도 아닌 장남으로, 장남이 무엇을 의미 합니까? 장남이라는 것은 농심, 동생에게 벼짐 들고 가서 '아우는 새로 살림을 차렸으니 아무래도 양식이 많이 들 거야.' 하고 주고 동생은 '아무래도 형님은 식구가 많으니까 양식이 더 들 거야.’하고 벼짐을 주고 이러다 대낮에 만난 것에서 나온 것이 농심라면이에요.(ㅎㅎ) 장남이라고 하는 것은 타고 났어요.
동생이 철없이 돌아다닐 때 장남은 ‘아버지, 우리 집안은 이제 어떻게 되는데…….’걱정해 주는 것은 장남밖에 없어요. 아버지 제사 제가 드리겠습니다. 물론 안 믿는 사람이 그렇게 하겠지만, 그것도 장남의 몫이에요. 둘째, 셋째, 막내는 ‘형님 제사하기만 해봐 내가 오는가!’ ‘나, 못 옵니다. 골프 치러 가냐고 못 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장남이라고 하는 것이 타고 났어요. DNA가 그런지 모르지만 타고 났어요. 장남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일빳다로 태어나서 장남 되었고 태어나서 동생들이 줄줄이 있으니까 동생은 형 걱정 안하는데 형은 반드시 동생 걱정을 하는 겁니다. 물론 혹이나 동생 등 쳐먹는 형도 있지만 그것은 드물고 형은 동생 걱정 하지만 형수는 절대 시동생 걱정 안한다는 것은 명심하시기 바랍니다.(ㅎㅎ) 형수는 남이에요. 피가 섞였습니까! 미쳤다고 시동생 도와줘요. 쫓아내죠. (ㅎㅎ) 이게 세상의 어떤 실존, 배치된 자리는 어떤 분이 강제로 몰아세운 거예요.
우리 친구 중에 곱슬머리라고 그렇게 고민을 많이 하던 친구가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차이 없이 곱슬머리든 뭐든 홈이 파인 골로 가는 그 경로가 무엇인가 예수님이 먼저 가신, 예수님 자신이 상이 되고 주께서 그 상으로 우리를 불러 주니까 그 부름에 상에 따라서 주님 가신 그 홈 패인 그 골로 물처럼 흘러가면서 가는 거예요. 가면서 물처럼 흘러가니까 이것이 억지 아니고 즐겨, 주께서 오늘 몰아내시고 오늘도 좁은 길로 가게 하시는구나! 어이구 기분 좋다. 영생이 막 보이네. 남들은 넓은 길로 가는데 생명이 저기 보이는구나! 어떤 경우라도 주님의 상만 크게 보인다면, 십자가 주님만 크게 보인다면 그 가는 길은 주님께서 먼저 나와서 우리를 당겨주는 붉은 카페트에요. 붉은 카페트 누가 밟습니까? 장동건이 밟고 이병헌이 밟죠.(ㅎㅎ) 천국에서 내려온 붉은 카페트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벌건 하나님의 피가 묻힌 그 카페트를 우리는 밟고 가는 거예요.
그런데 지옥 갈 사람들은 카페트 하면 기겁을 하고 도망을 칩니다. 그것도 뭐냐, 그것도 자기 나름대로 홈패인 곳으로 가시는 거예요. 안 믿는 사람들, 지옥 갈 사람들은 아무리 십자가 들이대도 절대로 그쪽으로 안가요. 그쪽으로 선택을 안 합니다. 왜, 자기 취향에 안 맞기 때문에 세상 부귀영화에 더 눈이 멀어서 김중배의 다이아몬드에 빠져서 절대로 좁은 길, 영생이 있는 길로 가지를 않아요. 인간성 좋고 싹싹하고 살림 잘하고 잘 웃고, 붙임성이 있고 어디 봉사하라고 하면 남 배려하고 이웃 사랑하는데 단지 십자가 피만 드러내면 화를 팍 냅니다. ‘피로 속죄함을 받습니다.’ 하면 ‘너나 믿어라’하고 속죄함이고 뭐고 관심이 없어요. 다만 우수한 나를 발휘하기에 급급하고 그것이 재밌어요.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답니다.
나이트클럽에 있는 청년들에게 ‘여러분, 속죄함을 받으세요!’하면 다 도망가요. 사장이 와서 멱살 잡고 끌어냅니다. 거기는 그냥 즐기는 거예요. 하고 싶은 것이 속죄함이 아니고 세상 적으로 가는 것이 그게 그렇게 재미있어요. 그들은 부름의 상이 없어요. 자기가 알아서 가는 겁니다. 자기가 즐기는 대로 하지만 주님께서 부름의 상을 주게 되면 우리도 즐겨 그쪽이 크게 보이는 겁니다. 주님 계신 쪽이 즐겨 보이는 거예요.
십자가를 어떻게 참여해서 부활에 이른다고 했는데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도마라는 사람이 나와요. 도마하고 예수님이 만납니다. 도마와 예수님이 만날 때 예수님이 무엇을 보여줬습니까? 여기 창자국 보여줬고, 손에 못자국 보여줬죠. 그러면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님 몸에 상처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죠. 없었는데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부활해서 나타난 사건 보니까 창자국, 못자국 있지요. 그러면 진짜 살아계신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 그 흔적이 뭐예요?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것을 부름의 상이라 하는 데 어떤 순복음 이런 데는 ‘여러분, 복 받고 싶어요? 부자 되고 싶어요? 병 낫고 싶어요? 애 공부 잘 하고 싶어요?’ 이렇게 저렇게 불러 준다는 거예요. 부름의 상을 향하여 기도하시면 은혜대로 이뤄진다고, 보통 이렇게 하잖아요. 4대 복, 병고치고 하는 것 등…….
그러면 구약의 그 속죄소에 의하면 오직 속죄소는 어린양의 피, 소의 피이죠.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은 십자가를 통해서 이죠. 그것을 요한복음 20장 도마에게 무엇을 보여줬다? 창자국 보여줬고 못 자국 보여줬죠.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쫓아가면 우리가 원하는 복, 우리가 원하는 건강 이런 것을 원하겠는데 하나님 쪽에서 진짜 부름의 상으로 왔을 경우에는 딱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나는 너희에게 십자가 외에는 알기를 원치 아니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에게 창자국과 못자국을 보여줄 때 도마가 이랬습니까? ‘예수님, 그런 거 상처 받은 거 보여주지 말고 상처 받은 거, 조폭한테 당했나, 그런 거 하지 말고 복을 주세요. 돈 벌게 해 주시면 주님을 믿겠습니다.’이렇게 했습니까? 도마가 돈이나 건강 관계없이 ‘주는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고백 했을 때 무엇을 보고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 보고 한 것입니다. 십자가만이 진짜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당겨주는 그 길은 십자가가 점점 더 크게 보이고 십자가만이, 피만이 다 이루었다는 것이 즐겨 느껴질 때 여러분 홈패인 것을 통해서 부름의 상을, 천국을 향하여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다 이루었다 하는 사람은 아직도 죽기 전에는 여러분 주위에 십자가 사건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끝으로 한 말씀 드립니다. 십자가 사건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사건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주께서 다 이루어서 이미 저한테 안겨 주셨습니다. 주님의 용서가 믿어집니다. 내가 예수님 믿어서 용서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주님의 용서가 주어짐이 믿어지고 감사가 될 때 여러분 부름의 상을 지금 주님 앞에서 사로잡힌바 된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희에게 돈 보따리 내 준 것도 아니고 큰 재산을 물려준 것도 아니고 도마에게 보여주셨듯이 창자국, 못자국 십자가 사건 일으키셨습니다. 지금 여기는 서울 신월동입니다. 대구이든, 부산이든 서울이든, 어느 장소이든지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는 그곳이 바로 변화산이며, 천국이고 우리는 여기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 라고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사는 그런 곳인 줄 압니다. 저희들 예수님의 십자가의 부름의 상이 크게 보여서 비로소 잡힌바 되어서 살고 있다는 이 차이를 세상을 향하여 보일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06-01 10:27:59 녹취 : 김창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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