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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12, 13강 / 빌2:9 / “두 주체의 싸움”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빌립보서

12, 13강 / 빌2:9 / “두 주체의 싸움”

정인순 2014. 4. 8. 11:16

100219 내가 믿는다 vs 주님이 믿게 하신다 두 주체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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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서울/서울100219빌2장9절b.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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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100219 빌2장9절a

 

녹취 : 김창길 

 

서울 2월 19일 강의 빌 2:9 “두 주체 싸움”

 

빌립보서2:8-11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방금 읽었던 빌립보서 2장 9절에서 10절 이 일을 누가 한다는 말인가요? 우리 인간이 한다는 말인가요? 하나님이 한다는 건가요? 여기 보면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이런 일을 하나님이 하시잖아요. 신앙의 기본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가 기본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믿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심을 우리가 믿게 되면 우리가 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 여기 그림을 보면 여기서 어떤 사람이 손을 들고 춤을 춘다. 누가 춤을 추게 했죠? 누가 춤을 추게 한다? 앞에 ( )에 누가 춤을 춘다? ‘(내가) 춤을 춘다.’ 라고 할 수도 있고‘(하나님께서 나로 말미암아) 춤을 추게 하신다.’이 말도 맞는 말이죠. 둘 다 같은 말이죠.

 

그런데 간단한 이 이야기를 가지고도 안 믿는 사람들은 무엇을 삭제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신다.’를 지워 버리죠. ‘내가 애를 낳았다’하고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아들을 낳게 했다’ 둘 다 같은 말인데 불신자들은 무엇을 지워 버리느냐 하면 하나님이 일으키는 것을 다 지워 버려요.

 

하나님이 일으킨 것을 다 지워 버려야 뭐만 남겠어요? 내가 춤을 춘다. 내가 애를 낳았다. 내가 밥을 먹는다. 내가 잠을 잔다. 내가 설교한다. 이것만 남잖아요.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집어넣는 것을 대단히 싫어합니다. 하나님이 나로 말미암아 춤추게 한다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그것보다 ‘내가 춤춘다.’를 더 좋아합니다. 이게 맞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신앙인들이 ‘예수 믿는다.’ ‘하나님 믿는다.’ 할 때 제가 물어봅니다. “누가 믿습니까?” “내가 믿습니다.” “그럼 본인이 안 믿게 되면 지옥 갑니까?” “그럼요 내가 안 믿으면 지옥가지요.”

 

“그러면 당신은 믿다가 어느 날 잘 안 믿어지면 본인이 지옥 갑니까?” “그럼요 지옥가지요.” 본인이 믿다가 잘 안 믿어지면 지옥가고 그러다가 믿어지면 천국가고 ……. 하루에도 12번씩 천국 갔다가 지옥 갔다가 천국 갔다가 지옥 갔다가 ……. 그렇게 되지요.

 

어떤 아주머니가 애하고 왔는데 “쟤가 착해요 나빠요?” “얘 착해” 이러거든요 “얘 착해”라는 말 떨어지기 전에 “엄마 도넛 사줘” 라고 찡얼대면 “요 못된 것” 하고 때리잖아요. 그러면 아까 그 물어보던 아저씨로 돌아가서 아주머니 다시 물어볼게요. “얘가 착해요 못됐어요?” “아, 지금 못됐어요. 지금 도넛 사달라고 때를 쓰니까 못됐어요.” 그런데 도넛 물고 가다가 돈 만 원짜리 주어서 그것을 파출소에 가져가지 않고 어머니한테 가져다 줬을 때 “아, 착해요. 자기 주머니에 넣지 않고 엄마한테 주니 너무 착해요” 도대체 하루에 몇 번 착해야 합니까? 몇 번 나빠야 합니까?

 

사람들이 신앙생활 못하는 이유가 본인이 신앙생활 하려고 하니까 나중에는 지쳐가지고 에이 때려치워라 하고 신앙생활 못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 2장 9절에 분명히 ‘하나님이’ 이라고 했고 그리고 창세기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했죠. 누가 창조했어요? 하나님이 창조했잖아요. 하나님이 창조했으면 그 만들어진 피조물들이 꿈틀거리는 것도 누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만들었어요.

 

하나님께서 컵을 만들어 놓고 ‘컵아, 컵아 이제 네 마음대로 살아라.’이렇게 하시지 않았어요. 성경 구약 잠언서에 보면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어 놓고 내 팽개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만들었냐 하면 하나님의 지혜로 천지를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모든 창조물 안에 지혜가 다 들어 있어요.

 

욥기에 보면 욥은 자기가 지혜가 넘친다고 생각했어요.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같잖아서‘욥아 네가 지혜가 많나?’ ‘지혜 많습니다.’ ‘그래? 그럼 북극성 만들 때 너 뭐했지? 하마가 새끼 놓을 때 너 뭐했어?’ 욥이 가담한적 없어요. 북극성 만들 때 도와 준적 없고 하마 새끼 놓을 때 욥이 도와 준적 없습니다.

 

하마가 새끼 놓을 때, 1번 하마가 낳았다. 2번 하나님이 낳게 했다. 몇 번이 예요? 하나님이 낳게 하셨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지혜예요. 사람이 하마에게 무엇을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하마가 자기 새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 때부터 집어넣은 그 지혜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지혜, 사람에게도 있지요 여러분 그 지혜, 어디다 팔아먹었지요? 여러분 지혜 다 어디 있어요? 반드시 하마나 코스모스나 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그 지혜주신 자를 찬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인간들은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는데 그 지혜를 무엇으로 바꾸느냐 하면 자기 지혜로 바꿨어요.

 

하나님이 춤추게 했는데 내가 춤춘다는 거예요. 이거는 하마보다 못하고 구더기 보다 더 못해요. 사슴이나 사자보다 못하고 동물원에 있는 호랑이 보다 더 못한 거예요. 천하 만물보다 더 못한 게 인간이라 했어요. 아주 더럽다는 거예요. 왜 더러운가? 하나님께 돌려야 될 영광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니까 아주 더러운 거예요.

 

더러울 뿐만 아니라 하는 짓거리가 전부다 자기만 생각하기 때문에 다 죄가 되고 그 죗값으로 사람들은 죽습니다. 끝인 줄 알지요.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고 그 다음은 뭐가 있습니까? 심판이 있습니다. 사람이 두 종류가 있습니다.

 

안 죽으려고 하는 사람과 심판에서 면제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통 길에 가는 사람들은 안 죽으려고 사는 사람입니다. ‘어째든 돈 벌어 살아야지…….’ 그런데 정말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안다면 사람에게 죽는 것은 정한 것이고 그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라는 것 전체가 우리 안에 삽입되어야 해요. 우리 안에 장착되어야 해요. 내장되어 있어야 됩니다. 안에 있어야 합니다.

 

어떤 20대 초반의 청년이 게임하지 말라고 하니까 자기 엄마를 죽였어요. 그 사람 안에 뭐가 들어 있지 않습니까? ‘사람, 한번 죽으면 그만이지’ 이것만 들어 있지 뭐가 빠져있죠?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인데 그 다음은 심판이 있다는 지혜가 없어서 안 보이는 거예요. 잔소리하는 엄마가 안보이면 자기 편한 줄 알고 있는 거예요.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서 심판받습니다. 그래서 잠언서 8장에 보면 지혜가 없는 자는 생명이 없고 생명이 없는 자는 저주 받아 죽고 지혜는 곧 생명나무라 영생은 생명을 얻고......, 지혜가 없는 자는 생명의 반대가 저주예요. 저주를 받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만약에 지혜가 있다면 이 지혜를 주신 자는 항상 ‘내가 했다’를 제일 싫어하고 ‘누가 했다.’를 제일 좋아할 까요? ‘하나님이 하셨다’를 제일 좋아 해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우리가 먹든지 마시던지 무엇을 하던지 이렇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하심이라.

 

지난 주일날 아침에 제가 이런 설교를 했어요. 내가 만드는 인생, 자기가 만드는 인생 따로 있고 주님이 만드는 인생 따로 있다 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 인생, 자기가 생각한대로 자기가 꾸려 나갑니다. 그러면 거기에 뭐가 빠져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지혜가 빠진 거죠.

 

하나님의 지혜가 내장되어 있다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뒤에 심판이 있기 때문에 심판의 주 앞에서 주여, 현재 제 모습이 주님이 심판하시면 어떤 모습입니까? 이렇게 비춰볼 수 있는 사람, 잔소리 하는 엄마를 내가 죽일까요? 말까요? 주님, 제가 죽이는 것이 옳습니까? 안 죽이는 것이 옳습니까?

 

물어볼 수 있는 그런 분이 있다는 것, 왜냐 하면 나는 지혜로 만들어 졌기 때문에 내 생각대로 비추지 말고 자기 몸 편한대로 비추지 말고 지혜 되시는 분에게 물어봐야죠. 그 지혜가 뭉쳐서 성경말씀이 되었잖아요. 십계명을 비롯한 모든 성경말씀, 지혜가 뭉쳐서 성경 말씀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뭐로 산다? 하나님말씀으로 산다. 하나님말씀으로 산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늘 말씀에 비춰보면서 주여 이 몸은 주님께서 만들어 가시는 몸인데 지금 제 상황이 어떻습니까? 하고 누구한테 비춰봐야 합니까? 동아일보, 조선일보, MBC, ……. 어디에 비춰봐야 합니까?

 

말씀에 비추어 봐야 됩니다. 이상화라는 여자 스케이트선수가 금메달 땄죠. 이젠 죽었어요. 왜? 이제부터 동메달 따면 욕 얻어먹게 되어 있어요. 은메달 따면 욕 얻어먹어요. 금메달 땄으면 계속 금메달 따야 해요. 금메달 못따면 그것 밖에 못해. 전에는 운이었나? 이런 소리 들어요. 지금은 기분 좋지요.

 

이승엽 선수 홈런 못 치면 사람들에게 욕 얻어먹게 되어 있어요. 4번 국민 타자가 그것밖에 못 쳐 하고 욕 얻어먹게 되어 있어요. 애들 성적이 갑자기 30등에서 5등으로 올라가면 그 아이는 힘들게 되어 있어요. 이제 5등 밑으로 내려가면 잔소리 듣게 되어 있어요.

 

누가 그렇게 심판합니까? 우리 하나님이 5등 밑으로 내려가면 나쁜 아이 라고 하던가요? 하나님이 그렇게 이야기 하던가요? 5등 아래로 내려가면 나쁜 아이라고 하던가요? 누가 그렇게 하던가요? 우리가 어디에 비추어 봅니까? 너는 왜 그것밖에 못해 라고 하는 옆에 있는 사람 말에 비춰봐야 합니까? 아니면 우리 지혜에 비춰봐야 합니까?

 

지혜에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을 비춰봐야합니다. 누가 심판주입니까? 마지막 때에 죽고 난 뒤에 이웃집 아저씨가 우리를 심판합니까? 아니면 우리교회 목사님이 심판해요? 우리 주님이 심판하고 하나님이 심판하잖아요. 그러면 평소에 우리가 누구 말 듣고 살아야 합니까?

 

말 간단 한 겁니다. 논리 복잡한 것 없어요. 마지막 심판하시는 분이 주님이라면 지금 누구를 더 의식해야 합니까? 주님을 의식하면서 주님이 만들어 가는 이 몸 어때요? 라고 늘 비춰보는 생활을 해야 된다 이 말이죠. 저는 어떤 집회에 갈 때 마다 이렇게 몇 년 동안 해도 항상 이 자리에 서면 ‘오늘 처음 뵙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우리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년간 주일에 설교해도 주일에 오면 처음 뵙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말로 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사람이 아무리 한때 믿음 좋아도 다시 말씀 앞에서는 싹 밀어버려야 돼요. 믿음 좋은 것, 신앙생활 잘 하는 것, 완전히 백지로 돌려 버려야 해요. 아무것도 믿음도 없다고 하고 그 빈자리에다가 눈 오듯이, 그 빈 공터에 하늘에서 하얀 백설이 쏟아지듯이 주여, 오늘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저 마음 비웠습니다. 옛날에 잘 믿었 던 것, 그것 다 과거 이야기이고 과거는 사라지고 없는 것이고 지금 제가 말씀이 필요 합니다. 지금 지혜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밤에 죽어도 있는 지혜 때문에 살기바랍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아, 나 그 말씀 다 안다. 빌립보서 다 읽어봤다” 이런 소리 할 것이 아니고 이 말씀이 항상 살아서 우리로 하여금 백지로, 모든 것을 무로 돌려요.

 

여러분들이 무로 돌리는 것을 잘 못 보셨다면 안 믿는 아버지, 주사가 심한 아버지 같은 경우 저녁때 엄마가 “여보, 이제 왔어요” 하고 상 차려 주면 “확 치워라” 하고 밀어버리죠. 그렇게 밀던지 발로 차버리던지 상채로 날라 가던지 그렇게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밀어버려요.

 

나, 똑똑합니다. 성경 많이 봤습니다. 성경 백독했습니다. 그것 확 밀어버려야 합니다. 그것 다 지나 간 겁니다. 내가 있어서 오늘 내가 있는 게 아니에요. 지금 주님께서 지혜로 또 살려주니까 사는 거요 하나님의 지혜로 살았습니다. 하는 고백을 해야 마지막 심판 때에 우리가 산자, 지혜가 있는 자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 죽을 때까지는 내 힘으로 살고요 죽을 때 가서 주님 믿겠습니다. 하는 이런 꼼수는 그 날 밤에 네 영혼 데려가면 너는 그냥 홀로 가는 거예요. 자기 밖에 모르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지금 까지 한 것을 정리해 보면 내가 춤을 춘다. 할 때에 세상 사람들은 내가를 집어넣어요. 심지어 신앙 생활했다가도 생활이 바빠 가지고 성경을 안 보게 되면 ‘내가’를 집어넣어요. 성경을 안 보게 되면 갑자기 주님이 들어가던 그 자리에 누가 들어 가냐 하면 그전까지 내가 교회 다녔는데 언제부터 내가를 집어넣어서 내가 신앙생활 했다. 내가 그때 교회 다녔다. 내가 그때 기도 했다. 내가 그때 헌금했다. 자꾸 ‘내가’가 또 들어가 버려요.

 

그래서 교회 나오라고 하면 내가 바빠서 못나오겠어요. 이렇게 되지요. ‘예배드리러 오시죠.’ ‘바빠서 못 가겠다.’는 거예요 예배가 필수가 아니고 이것은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말려면 말고 예배 참석의 움직이는 주체가 누가 돼 버렸습니까? 자기가 참석하고 싶으면 참석한 거예요. 그래 놓고 앉아가지고 ‘주여, 내가 오늘 예배 참석 안하는 데 내가 알아서 왔습니다. 나 예쁘죠.’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신앙은 뭐냐 주께서 예배 참석하게 하셨구나. 내가 ‘내가’라고 차려 놓은 모든 상에 국그릇과 밥그릇을 다 엎어 버리고 내가 차려 놓은 상을 엎어 버리고 주님께서 차려 놓은 것, 그것이 새롭게 우리 마음 상에 하나 둘씩 제자리를 찾아서 놓여 져야 한다는 겁니다.

 

창세기를 저쪽에 놓고 예레미야는 요쪽에 놓고 요한계시록은 이쪽에 놓고 십자가는 여기 놓고 이 전체가 지금 나로 하여금 나를 있게 하나님의 배후에 역사하신 숨겨진 일이었구나. 이런 자리가 있었기에 오늘날 내가 있었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 이게 바로 코스모스 같고 이게 바로 참새 같고 오직 주님께 영광 돌리는 하나의 새로운 피조물 되는 겁니다.

 

세상에 이것보다 중요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판사가 되었다.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누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내가 공부해서 됐습니다. 이러면 안 되고 주님께서 저로 하여금 이 길로만 가라고 하시는 것 같아서 제가 그냥 순종하는 마음으로 마음에 안 들지만 판사 하기로 했습니다. 뭐 어머니의 기도 덕분에 어머니가 왜 들어갑니까? 어머니가 우리의 창조주가 아니에요.

 

우리의 창조자는 지혜예요. 이 지혜가 나중에 신약에서 예수님이죠. 어머니가 창조자가 되었다면 어머니 따로, 나 따로가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지혜가 나의 창조자가 되면 지혜에 연결된 고리에서 아무리 도망쳐도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구약에 요나 있죠. 요나서 보면서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나와 하나님 사이에 고무줄이 있습니다. 아무리 다시스로 도망쳐도 도망치면 도망칠 수록 자기를 당기는 고무줄은 더 세게 당겨지지요. 땅 하고 당겨져서 이것은 하나님의 고무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기어이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지 않습니까?

 

그 요나의 모습은 바로 모든 하나님의 택한 백성, 바로 그러한 관계라는 것을 미리 짐작하라 이 말입니다. 그 요나가 여러분 속에 있기를 바랍니다. 아, 나는 아무리 해도 땅 끝에 갈지 라도 주님 거기 계시고 바다 끝에 가더라도 주님 거기계시고 또 실험하지 마세요. 괜히 잠수복 입고 들어가지 마시고 하늘 끝에도 가도 주님 거도 계시고 찜질방에 가도 주님 거기 계시고 여럿이 있어도 거기 계시고 혼자 있어도 주님 거기 계시니까, 사람은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항상 주님이여, 주님의 말씀에 비춰볼 때 저 어떻습니까? 라고 비춰볼 수 있는 그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항상 성도의 특징은 ‘내가’가 아니라 여기에 ‘하나님’이 들어간다. 하나님이 들어가신다. 말이 맞죠. 그런데 범위가 너무 넓어요. 하나님이 일 하실 때 “하나님이 하신다.”라고 할 때 제가 물어봅니다. 자 하나님 춤을 추신다. 무슨 목적으로 춤을 추는데? 자세한 내용을 모르면 그냥 춤 자체가 목적이겠지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춤을 추는 경우 에도 춤 자체는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님 되시는 분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시는 겁니다.

 

2장 8절부터 다시 봅시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라고 하면서 그분이 모든 사람의 뭐가 되게 하신다? 주가 되게 하시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목적은 내 춤추는 것 솜씨 보이라고 춤추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우리가 먹든지 마시던지 춤추던지 노래를 하던지 무엇을 하던지 간에 우리가 무엇을 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춤을 춰서 구원받는게 아니고 춤추는 것은 하나님이 추게 해서 추는 것은 맞아요. 맞지만 하나님이 시켜서 춤을 췄다고 해서 그 춤춘 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누구 때문에 구원받는다? 주님 때문에 구원받고 주님 이름으로 구원받는 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 목표 점이예요. 도달점입니다.

 

지금도 안 믿는 사람이 택시 운전한다. 누가 그렇게 합니까? 안 믿는 사람은 자기가 운전한다. 하지만 그것은 엉터리고 지혜가 아닙니다. 지혜를 아는 사람은 택시 운전한다 할 때 누가 운전한다 하겠어요? 하나님께서 불신자에게 운전하게 하시죠. 그런데 불신자 그 사람이“그래, 나는 운전하니까 운전으로 구원받는다.”라고 말하면 맞아요? 틀려요? 틀렸어요. 내가 운전하는 것은 운전하는 운전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고 그렇다면 운전하므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구원되기 위에서는 운전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따로 준비 하신 분, 따로 구원자로서 마련하신 분이 계신데 그분을 여기서 한 자로 보면 뭐라 합니까? ‘주’, 주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신앙의 내용이 슬슬 입질이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믿습니까? 아, 하나님께서 돈이 없어서 돈을 주시는 분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를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가 되시는 분을 주시는 군아. 그것은 우리가 원했던 것은 돈인데 돈, 있으나 없으나 너는 구원되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기 위에서는 돈을 달라는 우리에게 주를 주시는 겁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고 두드려라 열릴 것이고 찾으라. 찾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너희들이 못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시죠. 제가 방금 두 가지를 다르게 얘기했죠. 첫 번째는 뭘 안주신다? 우리의 원하는 것은 안주시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시죠. 여기 원하는 주체가 누가 원해요? 주님이 원합니까? 내가 원합니까? 여기 문제는 내가 원한다는 것이 문제예요. 내가 원하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주시지 않고 필요한 것은 주체가 누구입니까? 누구보기에 필요해요? 주님이 하나님 보시기에 필요한 것을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누가복음에 보이니까 성령을 주신다 했습니다.

 

자, 우리 생각해 봅시다. 중국집에 갔습니다. 자장면이 먹고 싶어요. “여기 자장면 둘”이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볶음밥 둘” “아니, 이거 내가 시키지 않았는데……. 볶음밥 내가 시키지 않았는데 왜 주십니까?”그러니까 주인이 하시는 말이 “당신, 요즈음 밀가루 음식 너무 많이 먹었어. 그래서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고 당신에게 필요한 것을 내가 주는 거야”라고 볶음밥을 주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기분 나쁘겠죠. 그래서 그 주인을 죽여 버렸어요. 죽이고 중국집 문을 나오는 데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세발자국 나오는 데, 보니까 내가 죽인 주인장을 주님께서 살리셨어요. 세 발자국 만에 살려버렸어요. 그래서 문밖에 나가서 어깨를 확 짚으며 하는 말이 “내가 볶음밥 먹으라 했지”라고 했을 때 그게 성령이 역사하신 겁니다.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무엇과 무엇을 대조시키느냐 하면 내가 원하는 것과 주님께서 주시고 자 하는 것을 대비시키는 일을 누가 하냐 하면 성령께서 하시는 겁니다. 가운데 주님을 놓고……. 어떤 사람이 춤을 추는 데 춤을 춘다고 할 때 보통 두 가지가 있죠. 한 쪽은 내가 춤을 춘다. 하고 또 한 쪽은 하나님이 나로 말미암아 춤을 추게 한다. 이렇게 되어 있죠.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어느 쪽을 좋아해요? ‘내가 춤을 춘다.’를 좋아하죠.

 

심지어 교회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내가 꽃꽂이 했습니다. 내가 헌금했습니다. 내가기도 했습니다. 내가 오늘 새벽기도 나왔습니다. 전부다 교회 와서 조차 ‘내가’라고 합니다. 심지어 목사 설교 듣는 말이 “목사님, 내가 뭘 해야 복 받습니까?”그러면 복음 아는 목사님은 “주는 대로 먹으세요. 주께서 주는 대로 먹으세요”그러면 속으로 뭐라 하냐면 “싫어요. 주는 대로 먹을 것 같으면 교회 뭐 때문에 나와요. 교회 나왔다는 그런 수고로움 속에서 대가를 받으러 나왔지. 주는 대로 먹을 것 같으면 교회 안 나와도 주신다 하겠네요”그러면 목사님이 말씀 하죠. “바로 그 주체, ‘내가’ 하느냐, ‘하나님’이 하느냐 그것이 바뀌어 져야 합니다.”라고 하죠. 그러면 “내가 미쳤습니까? 나, 안 바꿉니다.” 목사님이 “바꾸세요”하니까 그 교인은 “안 바꿉니다.”하면서 목사를 떠밀었어요. 목사가 죽었어요. 사흘 뒤에 부활했답니다. 내 고집을 버리지 않는 것 때문에 누가 죽었습니까?

 

우리 예수님이 죽었어요. 그 죽은 예수님을 살려서 우리의 진짜 구세주가 바로 네가 떠밀었던 그분이 너희의 구세주라 할 때, 나는 세상을 너무나 좁게 봐서 내가 원하는 자장면만 생각했지 그것이 나로 하여금 지옥가게 만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미처 몰랐는데 주님께서 자장면 먹지 말고 볶음밥 먹으라고 해서 먹으니까 그 안에 다이아몬드가 두 개가 나오죠. 영생 나올 줄이야 그것을 볶음밥 먹기 싫어서 몰랐죠. 이 맛 없는 볶음밥아 하고 먹다보니 뭐가 딱하고 걸리는 것이 금 2개, 다이아몬드 7개가 나오고 백금3돈 나오고 그냥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도 나오고 두 번 다시 지옥 안가고 천국 간다. 이런 것도 나오고 세상에 이렇게 좋을 수가 하고 좋아가지고 다이아몬드 끼고 백금 끼고 나와서 하는 말이 “나는 구원받았다”이러다가 또 얻어맞아요. 왜냐 방금 뭐라 했습니까? ‘내가’구원받는 다고 했죠. ‘내가’가 아니고 ‘주님’이 나를 구원 시키신 것이죠. 방금 그렇게 일러줘도 또 나가서 내가 믿어서 내가 구원 얻었다고 합니다.

 

자식은 낳고 나면 따르지만 지혜로 창조된 사람은 요나처럼 아무리 지혜를 떠나려고 해도 떠날 수가 없습니다. 비로소 안 믿는 사람은 무엇으로 심판 받습니까?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는 데 그 심판은 하나님의 지혜에 입각해서 그 사람을 저주하죠.

 

이제 빌립보서라는 것이 왜 복음인지 아시겠죠. 빌립보서는 바로 하나님께서 한 계획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니까 우리는 여기에 가담 됐을까요? 우리가 여기에 협조했을까요?, 협동했을까요? 우리 힘은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가만히 있으세요. 가만히 있으면 절로 내 인생을 내가 꾸려 간다는 생각이 또 밑에서 올라 올 겁니다. 말이 이상하죠.

 

다시 천천히 하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하고 싶은 대로 그냥 하세요. 그냥 가만있으면 아무리 교회 와서 주님이 하셨다는 소리를 해도 교회 문 열고 나가는 순간부터 또 슥 올라오는 것이 역시 내가 설거지를 해야지 저거 나두면 우리 남편 생전 설거지 안 한다. ‘내가’가 또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것을 이제부터 설명해 드릴게요.

 

하나님께서 목적하는 것은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죠. 이것을 한 자로 뭐라 했습니까? 누가 필요하다? ‘주님’이 필요해요. 그런데 문제는 주님이 우리에게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이게 문제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있다?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으로 여겨요. 숲속 뒤에 염소가 있다. 안보이잖아요 안보이면 없는 거예요 하나님 거짓말하지 마라 나는 안 믿는다. 안보이니까 그런데 숲속 뒤에서 염소가 쑥 튀어 나오면 그때는 믿어요. 왜? 보이니까 그렇죠. 그래서 주님은 사람들이 보고자 하여도 보이지 않는 장소에 있고 믿으려 해도 믿지 못하는 장소에 있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 곳에 있고 얻고자 해도 얻지 못하는 곳에 있어요.

 

제가 어디서 강의를 하는데 질문을 받았어요. “목사님 사람이 구원을 소지한 다음에 어떤 새로운 행위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제가 말을 가로 막았어요. 구원을 소지한 것이 아니고 덮쳤습니다. 덮친 거나 소지한 거나 같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같지 않습니다. 장충체육관이 바퀴벌레를 덮칠 때 바퀴벌레가 장충체육관을 소지 한 겁니까? 똑같은 구원인데 저는 ‘구원을 덮쳤습니다.’하는데 그 사람은 자꾸 ‘우리가 구원을 소지하고 난 뒤에’소지한 것이 아니고‘구원이 덮쳤습니다.’하는 겁니다. 사람은 자기가 소유해야 보여요. 보이는 것을 소유하고 소유해서 보는 겁니다. 그냥 보지 않고 내 것으로 만들어서 보는 겁니다.

 

남자 500m 금메달 딴 모태범이 금메달을 깨물어 봅니다. 안 깨물어도 아는데 깨뭅니다. 내꺼다 이 말이지요. 진짜 금인가 왜 깨물 수 있냐하면 자기 소유에 잡히기 때문에 깨무는 겁니다. 예수님은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잡아서 지금도 깨물고 있습니다. 이것이 내 새끼 맞나? 깨물고 있는데 우리가 주님을 깨물려고 하니 너무나 커서 못 깨물지요. 구원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덮쳐 오는 것이지 저녁노을 시장에서 두말에 얼마 합니까? 말이 안 돼지요. 왜 노을을 사는 것이 안 됩니까? 3kg 같으면 잘라서 내 소유가 되어서 이것은 200원 이런 식으로 되는데 노을이나 아침햇살은 그 자체를 우리는 덮어버리죠. 덮어 버리면 누가 누구를 탓해요? 노을이 우리를 덮친 것이 우리를 판단합니다. 그래서 지혜가 우리보다 큰 것입니다.

 

지혜가 우리를 덮치니까 우리는 지혜 앞에서 ‘주님 지혜 앞에 우리 어때요?’이렇게 물을 수 있지만 우리 주님을 내가 지고 주님을 믿어줄까 말까 이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럴 수 없는 데 사람들은 교회 와서 ‘목사님, 제가 뭐 할까요?’‘내가’를 집어넣는 것이 습관화 되어서 나중에는 ‘주님이여, 어떻게 하면 이 맘 돌리겠습니까? 내가 뭣 좀 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주님을 자기 손바닥에 얹어 놓고 가지고 노는 식으로 ‘주님이여, 다음 주에 바빠서 못나오거든요.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다 다음 주에 올게요.’내가 교회 못 나온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그 다음 주에 교회에 넣어 주지 않습니다.

 

모든 주체가 ‘내가’아니고 주님께서 교회 가게 해야만 교회 가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의 흔적을 가진 사람, 주님의 표시가 있는 사람, 주님의 이끌리심을 받은 사람들의 집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복음 전하는 사람들은 오늘 여러분들을 이끄시는 주님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텐데 목사가 복음을 모르면‘이것 하세요.’하면 ‘이것 하세요.’하는 순간부터 주님을 잊어버리고‘목사님 그거 했어요.’ 자기가 했다는 것 또 나오는 겁니다.

 

지금부터 주님의 발생 과정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이 어떻게 나오는가? 우주를 창조하신 주님 뜻은 여기에 자기 사람을 보내요. 자기 사람을 보내는데 여기 끊어지지 않는 고무줄이 있어요. 우주를 덮어 창조하신 주님께서 이 땅에 자기 사람을 보내는데 등 뒤에 고무줄이 있어요. 이 고무줄을 쉬운 말로 언약이라고 합니다. 언약의 줄로 그 사람을 세워 놓으면 이 사람은 고무줄이 있기 때문에 아까 요나 이야기 했죠. 요나가 아무리 다시스로 도망쳐도 잡아당기면 휙 하고 다시 니느웨로 가야하잖아요. 그것처럼 이 언약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누구의 지시를 따르냐 하면 언약의 지시를 따라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언약의 내용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주가 되시는 분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을 맛보기로 미리 조금 조금씩 부분 부분씩 언약을 통해서 지상에 있는 언약 사람에게 전달이 되게 되어있어요.

 

예를 들어서, 노아 같은 경우에 노아가 방주에서 제사 드릴 때 깨끗한 짐승 잡았습니까? 더러운 짐승을 잡았습니까? 정결한 짐승을 잡았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렇게 못하죠. 나라에서 한사람만 군에 보내라고 하면 아들이 둘이면 누구를 보내겠어요? 골치 아프고 매일 사고치는 애를 군에 보내지 공부 잘하고 착하고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을 군에 보내겠습니까? ‘어휴 말썽꾸러기 너는 군대 갔다 와야 인간이 돼. 너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니까 너는 군대 갔다 와야 인간이 돼’라고 군대에 보내요. 그래서 착한 사람을 곁에 두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뜻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는 것에 반대로 해요.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신을 모방하지요. 모방을 하면 모방한 그것을 하나님은 또 모방을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인간들이 죄 짓고 난 뒤에 인간들이 무화과나무로 무엇을 만들었죠? 치마를 만들었죠. 하나님은 그것을 흉내 내서 무엇을 만들었습니까? 또 치마를 만들었죠. 그런데 원단이 달라요. 원단이 뭐죠? 가죽으로 만들었죠.

 

바리새인들이 상급을 얘기 하니까 예수님도 그것을 흉내를 내서 누구한테 대가를 받으면 하늘나라에 상이 없다고 얘기 했어요. 예수님이 하는 그 모든 것은 그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신을 흉내 내서 지어낸 구조가 있어요. 예수님이 그 구조를 그대로 본떠서 그 구조 안에서 얘기를 해요.

 

예를 들면 구제를 하니까 예구님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것은 구제할 때 떠벌리게 하기 때문에 그것을 흉내 낸 거예요. 그리고 사람들이 오른손이 범죄 하면 찍어버려라 나머지가지고 천국 가는 것이 전체가 지옥 가는 것보다 낫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한 쪽이 죄를 범해도 다른 쪽이 착한 일 하면 그것이 보상이 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흉내 내서 이야기하신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오른손 자르는 그런 무모한 사람이 교회에 많이 나옵니다. 이상하죠. 그렇게 해서라도 말씀대로 살고 싶은 거예요. 말씀대로 살고 싶어 했던 바리새인이라는 선배가 있었어요. 말씀대로 사는 최고의 수준인 바리새인입니다. 그 바리새인들이 하는 짓을 주님께서 그대로 흉내 내는 거예요. ‘내가 맹세할게.’ 이 말은 사람이 맹세 안하고 사는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산상설교나 모든 마태복음 설교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가지고 논다는 것을 의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아요.

 

전도서 9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내가 마음을 다하여 연구해 보니까 의인이나 착한 자나 그 사람이 다 하나님 손에 있으니 사람이 아무리 착하다고 해서 깨끗하게 산다고 해서 결과가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나쁜 짓한다고 망하는 것도 아니고 너희들의 미래는 하나님 손에 달렸지 네가 착하다고 좋은데 가고 나쁜 데 가는 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네가 이 땅에서 어떤 행위를 하던지 네 미래하고 관계없다 이 말입니다. 그 뒤에 보면 무엇을 해도 악하기 때문에 착한 일해도 악하고 에티오피아에 어떤 의사 신부인 그 사람은 에티오피아에 가서 대장암 걸려 한국에 와서 죽었는데 나이가 48이에요. 30대에서 보면 많이 살았네 하지만 50대에서는 어이구 젊은 나이에 죽었다 이러지요. 죽었어요. 얼마나 의사 신부되어 어려운 사람돌보고 에티오피아인 도와 줬습니까? 그래서 천국 갔습니까?

 

사람 구원은 하나님 손에 달려있지 자기가 이 땅에서 착실히 살았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주님의 소관이고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살아가면서 절실히 느껴야 합니다. 이 땅에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이것이 나의 구원과 상관이 없음을 믿어야합니다.

 

이런 소리 듣고 ‘그렇다면 이제 난 교회 안 간다.’이러지요. 간다고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온다고 해도 천국 가는 것 아닙니다. 바로 주체가 내가 아니고 우리주님이 주체라는 것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그것을 믿는 다고 생각하지요. 그렇게 생각할 때 2초지나면 속에서 솔솔 올라옵니다. ‘주여. 모든 세상만물이 주께서 하시는 그것을 내가 믿었습니다.’ ‘제가 믿었습니다.’ 또 믿음의 주체가 ‘자기’가 스멀스멀 나옵니다. 이 병은 평생 가는 질병이라서 내시경해도 건강 진단해 봐도 소용없습니다. 그냥 살다 죽으세요. 주여 나한 테 찾을 것은 바로 내 주체만 찾는 내가 뭐했다는 내 실적만 찾는 그것 밖에 모르는 인간입니다.

 

이 그림을 주목 하세요 사람이 꿈틀거리면서 행위를 하면 반드시 의지를 동원해서 하잖아요. 꿈틀거리면서 했던 업적을 관리를 해요. 2005년도에 했던 업적, 2006년도에도 했던 업적……. 이렇게 관리를 해서 ‘제가 예수님 믿고 난 뒤 했던 멋진 일이고 착한 일입니다.’ 하고 관리하게 되면 이것을 유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밖에 누가 있냐면 주님의 의지, 주님의 행위가 있어요.

 

주님은 뭐냐 하면 오늘 본문을 보면 십자가 지셨던 분입니다. 우리한테 얻어맞으신 분입니다. 우리에게 죽임을 당한 분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사흘 만에 살아나신 분이예요. 사람은 죽이고 살리는 것은 하나님이 살리셨어요. 그분이 주님의 행위와 의지가 만나면 이 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겠지요. 이렇게 행위주의가 바리새인처럼 예수님을 또 죽이는 겁니다.

 

인간의 주체라는 것은 자꾸 흩어놓고 또 주워놓고 폭탄을 터트려 사방팔방 손은 손대로 발은 발대로 다 흩어놓아도 다시 주어옵니다. 어떤 교인이 교회 와서 꽃꽂이 해 놓고 ‘주여 이거 제가 한 것이 아니고 주로 말미암아 시켰습니다.’ 생각했죠. 그거 한 2초가죠. 그리고 예배 끝나고 ‘어, 그거 내가 꽃꽂이 했어. 만지지마’ ‘청소 내가 했어’ 또 ‘내가’ 다시 찾아요. 신발정리 내가 한 것, 이 강대상 내가 한 것, 이 마이크 내가 한 것 전부다 자기 것을 잊지를 못해요. 어느 날 ‘집사님 교회를 떠나셔야겠습니다.’ 하면 ‘내가 왜 떠나 이것 내 것인데’주님께 바쳐놓고 주님께 바친 것이 아니고 자기 자리에 자기 관리대상에다 주님을 훼방하는 자기의 자리가 또 마련되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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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 : 김창길

 

서울 2월19일 강의 빌2:9 “두 주체의 싸움”

 

여기 글씨를 써 놨죠. “주님은 보고 싶은 곳에 나타나지 않고 듣고 싶은 대로 들려주지 않는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가 우리의 구원자를 우리가 찾아가서 믿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선악과 따먹은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나무를 따 먹을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니고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 시켰지요. 너희가 선악과를 안 이상 “못 따먹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현재 선악과 따먹은 성질이 다른 성질의 인간이 되지 않는 이상은 생명나무,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성질 자체가 완전히 딴 속성이 우리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딴 속성으로 바뀌어 져야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내가” 라고 시작하는 이런 성질이 안 되는 이유는 나, 영어로 “I", “I” 안에 선악과 들어 있어요. 선악과가 들어 있는 상태에서 생명나무를 따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 하나님이 정해준 원칙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그 원칙 바꾸면 안 됩니까?” “못 바꾸겠다.” “왜, 못 바꾸십니까?” “내 마음이다” 만약에 그것을 바꿔서 선악과 먹어도 생명나무 따먹을 수 있다고 하면 무엇과 무엇이 섞이겠습니까? 선악과나무 하고 생명나무가 우리 내부에서 섞이겠지요? 섞이면 나무가 두 개의 나무로 분리될 필요가 없고 처음부터 나무가 2개 아니고 몇 개이어야 합니까? 종합 비타민 선악, 생명 다 들어 있는 나무 하나만 심어 놓으면 되잖아요? 그렇죠.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자장면에다 볶음밥 먹는 거나, 그냥 자장밥 먹는 거랑 같다 이 말입니다. 두 개 먹지 말고……. 그러면 자장면 볶음밥 분리한 취지가 없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 이유는 선악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생명나무는 것은 너희들이 만들어줬다고 해서 따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생명나무의 가치를 보여 주기 위해서 선악과 앞에 배치한 겁니다. 선악과 무너지면 생명나무는 도망치고 마는 겁니다. 너하고 볼일 없다. 따로 분리해야 된다 말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창조가 우리 인간을 만들어 놨다고 해서 우리 인간을 목표로 인간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좋으라고 만든 게 아니에요.

 

골로새서 1장 16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우리의 모든 피조물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모든 피조물은 그 피조물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지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하여 만들어 진거예요. 그래서 생명나무를 따먹은 사람들에게만 그것이 보이는데 현재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그것을 그들은 거부하지요.

 

나, 나를 위하여, “그럼 당신은 왜 태어났는가?” “그거는 몰라 알고 싶지 않아”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그것도 알고 싶지 않아” 지금 중요한 것은 처음도 중요하지 않고 끝도 중요하지 않고 딱 잘라서……. 경상도 말로 돔배기라고 합니다. 머리짤라내고 꼬리 잘라낸 돔배기 중간에 있는 나만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엄마 죽이잖아요. 자기 귀찮다고……. 중요한 것은 왜, 나한테 잔소리 하느냐 그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지금은 여러분들이 부러워하는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여기 시장바닥, 이 동네 있는 재개발 아파트부터 빌라 있는 사람까지 모든 세상 사람들이 그저 눈에 보이는 그것이 중요한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짐승보다 더 못해요. 멧돼지한테 이리 울음소리를 들려줬더니만 멧돼지가 “웃기고 있네.”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 다음에 늑대 울음소리 들려주니까 아무렇지 않아요. 하마울음 소리 들려주니까 역시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런데 갑자기 호랑이 울음소리 들려주니까 멧돼지가 무서워서 어쩔 줄 모르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호랑이 울음소리 중에서 20hz이하는 사람 귀에는 안 들려요. 그런데 멧돼지의 귀에는 들리는 거예요. 그 20hz 이하의 저주파수의 음이 멧돼지의 힘줄과 뼛속에 들어가면 신체적으로 오금이 저려져 벌벌 떨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게 됩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무섭다고 봅니다. 그런데 멧돼지가 두려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20hz 이하의 소리를 인간은 인간의 한계가 있어서 호랑이의 중간 음만 들리지 멧돼지가 들을 수 있는 호랑이의 낮은 음은 우리 인간에게는 안 들려요.

 

우리가 보면 하마소리나 호랑이소리나 똑같은데 왜, 다른 소리는 가만히 있다가 호랑이 소리에만 왜 반응하느냐 인간들이 호랑이 흉내 낸다고 해도 멧돼지는 꼼작도 안합니다. 우리가 낼 수 없고, 우리가 들을 수 없는 그 다른 곳의 음이 멧돼지를 오금 저리게 하고 도망치게 만들었다면 지금 귀신들린 청년은 일반인들이 볼 수 없는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안 겁니다. “예수여, 하나님의 아들이지요. 우리를 멸망시키려 왔지요” 이 이야기는 우리가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공부한다고 배워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야말로 오금이 저려요. 온 몸이 벌벌 떨려요.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가 눈으로 본 것, 경험한 것, 이 선에서만 계속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우리 앞에서 오금을 저리게 하는 우리의 호랑이의 소리는 무슨 소리이겠습니까? 바로 십자가 소리죠. 십자가를 보고 십자가에 달린 그분이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신 것을, 그 깊은 내면의 hz를, 내면의 소리를 보는 사람은 우리는 십자가 앞에 엎어져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할 것이고 그 hz, 그 십자가의 음을 못 본 사람은 “십자가, 우리 집에 그런 목걸이 있다. 그거 옛날 사람이잖아” 하고 자기가 아는 범위 내에서 예수님의 의미를 전혀 두지 않지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4:4절에 보면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악마가 망하는 자들을 망하게 하기 위해서 복음의 광채가 비취는 것을 먹구름을 쳐서, 안개를 쳐서 어떤 경우라도 복음이 들리지 않도록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어떻게 알았는지 예수님 만나면 오금이 저린다는 것을 다 알았어요.

 

그리고 고린도후서 1장 2장에 보면 하나님이 주신 복음은 망하는 자에게는 악취가 되고 구원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향내가 된다고 했습니다. 똑같은 말씀입니다. 망한 자에게 다른 말씀 아닙니다. 똑같은 말씀인데 한사람은 오금이 절여서 “주여, 제가 죄인 맞습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상한 심령이군요. 죄인이 여기 왔습니다.” 하는 반면 “또 한다 또 한다. 많이 들었다. 고만 해라.” 그렇게 들려오는 사람, 그것이 인력으로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악마가 복음의 광채를 한껏 가리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악마를 가리게 하시는 배후에 작용하시는 분도 바로 우리 주님이 하시는 겁니다. 지옥 갈 자에게 지옥 보내기 위해서 복음이 들리지 않게 하시는 겁니다. 십자가 복음이 시시하게 들리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저는 복음보다도 돈 200억원이 더 오금 저리는 데요” 하지만 짧은 순간은 돈 200억이 좋은 것 같지만 돈 200억원 가져봐야 진짜 성도 같으면 “주여 200억이 나를 구원한 것이 아니군요.” 라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십자가를 다시 한 번 느껴지면서 오금이 저려지지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경말씀을 안다 하지 마세요. 성경말씀은 늘 십자가를 품에 안고 우리에게 시시 때때로 우리 필요 적재적소에 우리를 오금 저리게 하는 자체적인 능력이 모든 말씀에서 나옵니다. 그 모든 말씀에는 십자가가 있고 십자가가 선진 기지로 말씀들을 우리에게 던져져서 우리로 하여금 오금저리는 그야말로 멧돼지 앞에 호랑이 소리처럼 느껴지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 찬송가 405장이 뭐지요? '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이 살리신' 이지요. 이 찬송가 405장이 상당히 감동적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감동적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감동적이지 않아요. 심지어 같은 인간이라도 5년 전에 “이 노래 부르면서 내가 너무 가사에 은혜 받았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이 가사가 너무 좋아서 눈물 흘렸는데, 5년 뒤에 그 노래를 또 부르니까 그때 느낌이 없어요. 427장이 더 좋은 거예요. 전혀 그 때 그 느낌이 안 오는 거예요.

 

이것은 바로 구원 받는 주체가 내가 내 느낌을 유지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때 그 때마다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에게 감동 감화를 주시는 그 살아있는 말씀의 역사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매일같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저는 뭐라 하냐하면 주님은 나타날 때 ‘주님은 보고 싶은 곳에 나타나지 않고 듣고 싶은 대로 들려주지 않는다.’ 인간이 주님을 자기 힘으로 기도한다고 포착 될까요? 포착되지 않을까요? 절대로 포착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마태복음 11장 25절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여기 나타내시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나타내라고 우리가 요구 했습니까? 아니죠! 그냥 일방적으로 숨기시고 일방적으로 나타내지요. 나타내고 숨기시는 것은 누구의 자유입니까? 우리 주님의 자유죠. 여기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이에게 나타 낸다니까 우리는 또 “주여, 저 어린애입니다.” 절대로 안 나타나시죠. 왜? 어린애인척 하는 슬기로운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은 “주님께서 나타내지 않았으면 저희는 주님을 모를 뻔 했습니다.” 라는 말을 고백하게 되지요. 그러니까 ‘주님은 보고 싶은 곳에 나타나지 않고 듣고 싶은 대로 들려주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그냥 우리에게 나타내고 싶은 대로 매일 같이 말씀으로 역사를 하는 겁니다. 네가 주님을 쥘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현재, 지금도 주님이 너를 쥐고 이런 고백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진짜 ‘주님은 주되십니다.’를 우리의 예상을 빗겨가며 우리에게 고백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예상한대로 고백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예상도 못한 사태를 일으켜서 ‘주님이 머리위에서 나를 쥐고 흔드시는군요.’라는 즐거운 비명, 정말 너무 좋아서 지르는 외침입니다.

 

나는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와 함께 있다는 그 감격, 이것은 막달라 마리아가 향수병 다 날리면서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향수병 다 쏟아서 주님 발을 씻는 것처럼 너무 좋아서……. 세상에 나 혼자인줄 알았는데 그래서 행동의 주체가 나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내가 주체가 아니고 나로 하여금 이런 주체를 하게 하신 주님이 따로 계셔서 그분이 나로 하여금 이런 주님을 보고 싶은 곳에 나타나지 않고 듣고 싶은 대로 들려주지 아니하고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하는 고백을 우리가 하는 겁니다. 바로 그런 고백을 할 때, 그 순간이 우리가 뭐가 되느냐? 바로 어린아이가 되는 겁니다.

 

어린 아이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립심이 없어요. 그리고 어린아이의 모든 일과는 부모가 주는 대로 받아야 되듯이 그래서 그때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우리에게 더 이상 없습니다. 내가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누구에게 맡겨라? 내게 맡겨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해 줄게. 이것이 어린아이에게, 그냥 매일 얻어먹는 그런 식으로 천국을 가고 있는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외마디 고백입니다.

 

멧돼지 때문에 농가에서 피해가 많았는데 멧돼지 퇴치하는 것을 tv에서 방송을 했습니다. tv가 다 나쁜 게 아니고 보면 복음적인 것이 있어요. 호랑이 울음소리를 전파사에 맡겨 테이프 40개 만들어 이웃집에 돌려서 효과를 봤답니다. 여기 다시 보면 주님이 계시고 주님께서 여기 고무줄로 묶어서 여기에 자기 언약 사람을 보낸다고 했지요. 보낼 때 고무줄이 있어서 이 사람이 하는 행위는 장차 주님이 사람이 될 때 나오는 행위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 되겠지요.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위에는 점선이 점점 덮어져서 역사와 묵시가 만나요. 역사는 가고 묵시는 만나고 이 만나는 지점에서 사람들은 진짜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에 의해서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여기 예수님을 죽였던 사람이 무엇을 믿었던 사람인가요? 하나님 믿는 사람이죠.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인 사람이 있는데 예수 믿는 사람 잡아 덮치고 죽인 사람 성경에? 사울이죠. 그 사울이 생각했던 하나님, 그 하나님에 의해서 예수 믿는 사람이 죽었잖아요. 사울이 하나님을 안 믿었으면 그런 짓을 하지 안했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것이 내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헌신이라고 보는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모르는 목사가 복음 아는 교인들을 죽이잖아요. 추방하고, 미워하고……. 복음을 모른다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가 주체가 되어 있는 이 교회 내가 세웠다든지 내가 기도해서 이 교회 이렇게 부흥 시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마귀의 종들입니다. 역사에서 만들어낸 사람들이 만들어낸 하나님과 진짜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누가 죽었습니까? 진짜 하나님이 가짜 하나님한테 맞아 죽었죠. 바로 이 모습을 미리 앞당겨서 하나님께서 언약사람에게 생기도록 하시는 겁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냐 하면 가인에게 맞아 죽은 사람이 누구죠? 아벨이죠. 아벨과 가인과 비교해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 아니고 가인 배후에 있는 악마가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동생이 어디 있냐고 묻자 가인이 하는 말이 “하나님 제가 제 동생 지키는 자이니까” 라고 하죠. 그러니까 자기는 악마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 변명하기 일쑤죠. 그런데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현재 악이, 죄가 너를 지배하고 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자기 행동하는 것이 무슨 목적으로 하는지 몰라요. 다만 시키는 대로 하는데 모든 인간은 죄의 작품입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의 DNA, 유전자가 죄가 만들어 낸 작품이 앉아 있는 저와 여러분입니다.

 

죄가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본능대로 평소 상식대로 살면 우리는 절대로 눈에 보이는 예수를 안 믿게 되어 있어요. 이점을 오늘 강조하고 싶네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여러분들의 공로라고 여기지 마세요. 이것은 별종이고 특이하고 이상한 사람이에요. 외계인 이예요. 인간에게 있을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 주 낮 설교가 무엇인가하면 교회라는 것은 사람이 아무리 해도 해 내지 못한 요소가 삽입되어 있는 사람, 그 집합을 교회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속죄 하에 표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내가 여기 앉았다는 것이 말도 안 돼 라고 느껴야 되요. 내가 여기 금요일 날 차량 많고 편히 쉬어야 될 시기에 지금 여기 돈을 줍니까? 중국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겁니다. 복음 전해도 소용없어요. 돈 더 주면 더 주는 곳으로 다 가요. 한국 교회가 선교를 다 망쳐 놨어요. 그런데 이 교회는 참석하는 30분에 일당 5만원 봉투에 넣어 줍니까? 아니잖아요. 이것은 예수를 차라리 주위에 예수 믿지 말라고 핍박이 차라리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것이 있으면 있을수록 내 믿음이 진짜 믿음인지 아니면 내가 뭔가 노림수를 가지고 그냥 믿어 볼까 하는 식으로 내가 흉내 낼 수 있는 믿음인지 판가름 돼요. 여러분들이 판가름 안하더라도 주께서 흔들어 주십니다. 마구 흔들어 줍니다.

 

우리 아는 사람은 예수 잘 믿고 복음 잘 전하고 예배도 참석 하다가 집에 도둑이 들었어요. 그리고 또 우리교회에 어떤 사람은 신앙적으로, 복음적으로 살려고 하는데 고발당했어요. 하필이면 스카이 영어학원에 학파라치가 들어와 가지고 벌금 내게 되었어요. 하필이면……. 하필이면이라는 경험을 못해 본다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거짓말일 가능성이 있어요. 주께서 이렇게 흔들어 데는 겁니다.

 

고무줄이 왔다 갔다 흔들어 데는 겁니다. 이것을 유효한 주체, 파격적 주체라고 제가 표현하는데 2월 27일 날 방배역 2번 출구로 나가면 백석대학교 2층에서 논문을 발표할겁니다. 다만 주께서 허락하시면……. 고무줄을 흔들어 댈 때 언약 사람은 주변에 있는 세상적인 가짜 신, 악마가 지배하는 신과 하나님이 이야기 하는 계시 사이에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예레미아 같은 교회는 “하나님 전 안 하렵니다. 저 못하겠습니다. 바른 소리해도 욕먹는데 하나님 일인데 제가 왜 합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세요.” 이것과 요나가 “하나님 이렇게 나오면 저는 하기 싫습니다. 차라리 저를 죽여 버리세요. 하나님 저를 죽여 버리세요.” 이렇게 반항 한다든지 12제자가 분명히 하나님이 구원한다고 택해 놓고 결국 자기가 믿는 스승이 맥도 못 추고 그 적들에게 맥없이 팔려 가잖아요. 예수님이 팔려가니까 인간의 본색이 무엇인가 하면 죽는 것은 싫은 거예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왜 배반했을 까요? 죽기 싫어서예요. 살고 싶은 거예요.

 

베드로 자리에 저나 여러분이 들어가도 마찬가지예요. 베드로가 구원 되는 것이 믿음이 좋아서 되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신앙심 좋은 것도 아니고 기도를 많이 해서도 아니고 순교를 해서도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 된다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져야 합니까? 철저하게 두 번 다시 예수 믿나 봐라 라는 단호한 결심, 나는 누구보다도 예수를 저주한다는 것, 나는 예수한테 배신당했다는 배신당한 느낌이 있으면 있을수록 점점 더 주님의 은혜는 빛이 나겠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빛이 난다고 했지요. 은혜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교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면 자기관리를 해요. “주여, 저 믿음 좋습니다. 아멘, 성경 석장 봤습니다. 아멘, 오늘도 기도 했습니다. 아멘, 옆 사람 안하는데 저는 특별히 했습니다. 저 잘했죠?” 자기 관리 하다 보니까 점점 더 주의 은혜는 없고 자기가 신앙생활 잘한 그것만 자기의가 돼서 마일리지 쌓듯이 누적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잘 믿는 자기 자신을 믿어서 그것을 가지고 어디에 써먹느냐 하면 “주님이여, 내가 그동안 이런 기도 한적 없지요. 이번만큼은 우리 애 서울대학 넣어줘요” 그동안 모아 놓은 마일리지 동원해서“주께서 내가 이렇게 충성한 것 아시나이다. 이것만 해주면 지난번 내가 참아가면서 남 교회 안 올 때 혼자 나와서 청소한 보람, 난 주께서 살아계심을 알겠습니다.” 하고 쭉 내밀죠. 주께서 대학에 또 떨어지게 만들어요. 그럴 때 나오는 말이 ‘하필이면 나에게’란 말이 나오죠. 바로 그 말이 뭐냐, 그 사람이 십자가에 들어오는 순간입니다. 하필이면 나에게라는 순간이 바로 십자가에 들어가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 말로 옮기면‘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 고백을 하기위해서 주께서 그동안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 고백이 성도 입에서‘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는 고백이 나오게 하기 위해서 바로 주라고 하는 것은 주님 옆구리에 여러분 창 자국 있습니다. 내 옆구리에는 대일밴드도 안 발려 있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주님과 나의 차이점은 창 자국이 주는 있고 나는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손에 주님은 못 자국이 있고 나는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집에 가서 뚫지 말고요. 뚫어봐야 내 구원받으려고 한 것이고, 주님은 남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뚫린 것이고 아버지가 뚫은 것이고, 나는 내가 해 봐야 되지도 않는 슬기로운 것, 주께서 감추십니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또는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럼 저도 주를 버리겠습니다. 극단적인 것, 베드로처럼 두 번 다시 예수를 저주하면서 공개적으로 입으로 공개하고 시인하고 돌아설 때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다시 하시는 겁니다. “베드로야 고기 잡자” 다시 처음자리로 되돌아가서 다시 하는 겁니다. 다시해 보니까 처음 만날 때부터 주님 시인할 때까지 모든 자국이 사실은 베드로 자기가 결심해서 이끌어온 인생이 아니라 내면에 주께서 이끌어 주신 인생이었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베드로만 그럴까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기억한다, 주의 은혜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똑똑해서 성경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을 보면 지식만 늘어날 뿐입니다. 하지만 어떤 성경 구절이 가슴에 꽂힐 때는 내가 성경 봤을 때 말고 성경이 허락도 없이 꽂히면 나의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됩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게 됩니다. 예레미야 2:5절 내용이 뭔지 모르겠지만 일부러 적어봤습니다. 2장 5절이 내 속에 꽂히게 되면 우리 생각에는 2장 5절만 들어온다고 생각하지요. 내가 읽을 때는 2장 5절만 느껴져요. 오늘은 예레미야 2장 읽을 차례, 2장 읽었고, 3장 읽고 그때는 2장하고 3장만 들어와요. 하지만 주님께서 2장 5절을 드려 밀 때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 내용이 2장 5절의 칩을 통해서 전체 내용이 다 들어옵니다. 전체 내용이 다 들어오게 되면 2장 5절만 들어 온 것이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나 복음 전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 하죠. 어떤 성경 구절을 하더라도 거기서 성경 구절을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가 어떻게 연결 되는가 연결 고리를 이야기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목사님이 어떻게 이야기 할게 있어요. 본인이 경험을 해야지요. 주유를 하던지……. 어떻게 하던지 해야죠. 나는 이 말씀을 보면서 이러 이러한 것을 통해서 내가 죄인인 것을 느꼈어. 그런데 이런 죄인도 주께서 설교자로 이 쓰레기 같은 인간도 세워주네요. 쓰레기 같은 인간이 욕이 아니라 고전4:13에 보면 마지막 때에 주께서 사도를 무엇으로 세웠습니까? 만물의 찌꺼기로 사용하죠.

 

이번 논문의 마지막 끝이 이 내용입니다. 제가 논문을 한 20번 수정을 했어요. 담당자가 적용부분에서 내라 했을 때 그때 고친 것이 고전4:13절을 집어넣었어요. 하나님께서 복음 전하는 자에게 개혁주의라고 하면 항상 미완료가 되어 버려요. 그런데 복음 전하는 사람은 완료적인 자세로 서 버리면 자기가 이미 복음 다 이루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는 쓰레기 되도 상관없잖아요. 목사가 자꾸 복음을 가지고 기대 한다는 것은 자기가 쓰레기 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은 쓰레기 안 되려는 이유는 쓰레기 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겁니다. 나의 미래가 있다는 겁니다. 나의 미래가 있다는 것은 아직도 그 사람은 자기가 완료된 상태가 아니라 미완료 된 상태로 남아 있잖아요. 미완료된 상태로 가봤자 역시 또 미완료입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에게 ‘나 이 말씀 전하다 죽어도 좋습니다.’ 라는 태도로 전하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 전했으니까 좀 도와주십시오.’ 자기 노선에다 교인들을 이용하죠. 그것은 복음이 아니고 복음을 가장해서 자기 먹고 살겠다는 겁니다. 고전4:13에 사도를 마지막에 쓰레기로 사용하시는 이유는 이미 너는 쓰레기 되도 괜찮은 신분이라는 겁니다. 이미 완료, ‘다 이루었다’가 너와 함께 있는 겁니다. 이 안에 들어올 때 목사가 여기 있으면 다 이루었다가 목사 입을 통해서 덮쳐서 나오는 겁니다. 이러기 위해서 언약이 있는 사람들은 그 시대에 쓰레기, 다시 말하면 희생자가 되는 겁니다. 희생자 되는 이 모습, 다윗 같은 경우 간음죄, 살인죄를 짓고 나서 좋아했어요. 왜 좋아 했냐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 죄를 진거예요. 그 전 까지는 내가 사람에게 죄 지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너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음을 알게 하였고 다윗은 처음으로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을 알았어요.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수 있어요? 못 지어요.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내가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비로소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겁니다.

 

다윗이 그것을 본 이후에 ‘주께서 꺾으신 뼈로 인하여 내가 즐거워하리라 내가 주께만 범죄 하였사오니’ ‘주께만 범죄 하였사오니’ 이것은 나는 날 때부터, 처음부터 죄인인 것을 나는 왜 진작 그 완료를 모르고 자꾸 조금만 잘 할 수 있는데, 반성하면 잘 할 수 있는데, 왜 자꾸 나를 미완료로 몰고 가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큰 짐이 되고 짐이 된 정도가 아니라 내가 미완료로 기대하고 있는 그 자체가 누려지기 위해서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간음하고, 이것이 뭐냐 하면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좀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반성만 하면 좀 더 나아질 수 있는 인간인데……. 자꾸 자기 노선을 유지하는 거예요. 아, 오늘 이야기 하는데 표정들이 왜 그래요? 다들 구원 안 받은 사람들처럼 (하하) 왜 그래요?

 

쉽게 얘기해서 하나님 앞에 내가 죄인임을 아는 순간, 그때부터 평생 받을 스트레스는 다 날아간 겁니다. 스트레스가 있을 수가 없어요. 왜요? 완료이기 때문에 어떤 완료? 죄인이라는 것이 드러난 이상은 아무리 죄를 지어도 더 죄인 안 되고 덜 지어도 의인 안 되고 태어난 그대로 우리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여기다 붙여 있으니 이것보다 속 편하고 시원한 경우가 어디 있어요?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주님은 언제 보이는 줄 아세요? 그러한 십자가 있을 때 주님이 보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주님이 안보여요. 다른데서는 내 미완료를 보충해줄 내 착함을 보충해줄 가짜 신만 보이지 진짜 십자가 죽었던 그 주님은 내가 십자가에 합류될 때 비로소 그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이 보여서 주님이 꺾으신 뼈가 나를 구원하여서 내가 죄를 아는 즐거움을 주께서 버리지 마옵소서. 기도하게 되는 겁니다. 내가 죄인 됨을 아는 이 기쁨, 돈 10억, 2천억 가지고도 못 바꿉니다. 로또요, 어떤 영국 사람은 3천억 당첨 됐는데 그거 버리려면 애 먹습니다. 우리는 죄 버릴 필요도 없어요. 가만있으면 돼요. 죄 버려봐야 또 죄 짓습니다. 왜 그래요? 안 기쁜 사람처럼(하하) 우리 행복한 사람이잖아요.

 

정리 하면 사람이 선악적으로 착해 지는 것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미련을 두게 되고 미련을 두게 되면 그 미련을 뒤에서 부추기는 악마가 있게 되고 우리는 그 악마의 놀림을 받아서 결국은 악마는 처음부터 다가올 때 선악과를 노리고 다가오잖아요. 악마는 항상 부추기는 것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 매일 부추기는 게 그거예요. 생명, 영생, 이미 다 의롭다, 이미 구원받았다, 이미 의인이다, 이런 것은 악마가 이야기 안 해줘요. 그러나 주님은 반대로 너는 죄인이다, 너는 뭘 해도 죄인다, 네가 착한일 해도 그것이 너의 구원에 영향 없다, 네가 아무리 착해도 그것으로 구원받지 않는다, 너는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다윗처럼 주여, 주께서 원하는 것은 제사나 번제가 아니고 제사나 번제는 백날 해봐야 자기를 좋게 하기 때문에 그것이 아니고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이것을 알고 난 뒤에 다윗이 얼마나 좋아 했는지 몰라요. 주여, 주의 말씀으로 내가 즐겁게 하게 하옵소서.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을 쌓게 하옵소서. 바로 그 은혜를 알려 주시기 위해서 주체가, 다윗이 우리아를 죽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다윗의 손에 의해서 우리아를 죽게 만든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에 보면 14대 14대가 나오잖아요. 14대와 14대가 갈라져 있어요. 올라갈 때 14대 1대가 빠집니다. 내려갈 때 솔로몬으로 부터해서 14대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1장 족보에서는 솔로몬부터가 아니고 다윗부터해서 망할 때 까지 14대입니다. 다윗은 구멍으로 빠져 버리고 솔로몬으로부터 14대입니다. 그리고 다시 여기서부터 내려가서 멸망에서부터 14대로 다시 올라갑니다. 이 지점 방향틀어서 14대 까지 역사에서 묵시, 주님을 만나는 기점이 14대이고 그들이 육적인 것이 멸망해서 혈통적인 다윗의 내부는 나 같은 죄인은 망해야 된다고 보여주는 것이 14대입니다. 여기 앞에 있는 14대는 무엇인가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 같은 인간을 통해서 구원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14대입니다. 같은 다윗이 망해야 되는 다윗과 구원시키는 다윗, 양쪽을 보여주기 위해서 14대를 깔아놓고 원래는 18대인데 4대는 빠진 겁니다. 14대 14대 맞추기 위해서 왕 4명의 이름이 빠져 있는 겁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서 메시아가 나시니라. 주체가 그리스도가 알아서 자기가 낳은 겁니다. 이 구조를 맞추기 위해서 그래서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 와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겁니다. 이 모습, 같은 다윗이 구원된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있을 때 주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주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이라고 할 때 우리가 어느 자리로 가야합니까? 우리가 죽어야 될 자리가 십자가이거든요. 십자가에 섰을 때 비로소 주님 앞에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 죄인 될 때 죄인을 구원하시는 조명발, 주님이 그 위에 찬란하게 피를 흘리고 있죠. 그 피와 살이 날 때부터 죄인인 우리를 하얗게 씻어주는 구원의 피 입니다. 속죄의 피, 그 속죄의 피가 묻어 있는 사람, 표시가 있는 사람을 교회라고 이야기 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딴소리하지 말아요. 속죄의 피를 이야기 하므로 말미암아 ‘속죄의 피가 없는 사람은 안 오셔도 됩니다.’ 라고 말 할 수밖에 없어요. 속죄의 피가 있다는 말은 어떤 사람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표시가 있고 어떤 사람의 이마에는 짐승의 표시가 있고, 이도 저도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고 짐승의 인을 받던지 예수님, 어린양의 문신을 받던지 둘 중 하나이지 문신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짐승 아니면 어린양, 어린양 아니면 짐승, 하나님은 따로따로 자기 괘도를 가지고 가시지요. 목자는 양을 가지고 가고 악마는 염소를 가지고 가요. 그것이 바로 모든 역사가 주님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주가 되었기 때문에 그 경로를 따라서 우리도 십자가 옆에 있을 때 비로소 주님이 보이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병고치기위해서 주여 하고, 어떤 사람은 돈 벌기 위해서 주여, 이렇게 하는데 이 주님은 가짜 주님, 허구적인 주님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경로해서 주님이 되었기 때문에 병고치기위해서, 돈 벌기 위해서 주여 하면 안 되고 이 주체가 십자가로 가야 되죠. 십자가에 가서 돈 달라고 못하죠. 왜냐, 십자가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죽이고 주님이 필요한 것을 주시는 그 자리이기 때문에 주께서 주시는 것을 받는 사람, 그럴 때 자기자랑 안하고 “나는 주님께 이런 거 받았어.” 하고 자랑 하죠. “뭐 받았어?” “주님의 피 받았어.” “완전히 흡혈귀구나, 이 드라큘라야 그걸 받았다고 자랑하나” 남들은 놀리죠. 왜? 남들은 자기가 주체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더 이상 주체가 아니라 주의 사람으로 다루어지는 사람입니다.

 

빌2:10-11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 영광이 왜 거짓말이냐? 왜 우상숭배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할 경우에만 영광이 됩니다. 이거 제가 장담합니다.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 영광 안 됩니다. ‘예수님은 계셨다.’ 영광 안 됩니다. ‘예수님은 죽었다 살았다.’ 영광 안 됩니다. 예수님을 주라 할 때 우리의 주체가 어디 있어야 합니까? 주님 앞에 날 때부터 우리가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그 십자가 자리에 있을 때, 그 때 ‘주’라고 부를 때 하나님이 영광이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이 받은 세례가 3가지인데 요한일서에 보면 예수님이 증거가 되는 것이 물과 피와 성령, 여기에 세례를 붙이면 물세례, 피세례, 성령세례……. 피세례를 마태복음에서는 불세례라고 했죠. 불세례라는 것은 저주의 불을 받는 겁니다. 십자가 죽으심……. 세례요한 때 회개하고 세례 받지요. 세례 받으면 물속에 때 구정물이 있겠지요. 그런데 주님이 이 안에 세례를 받으러 온 거예요. 그래서 세례요한이 말린 겁니다. 주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저에게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고 오히려 제가 주님께 세례를 마땅합니다. 하고 말리니까 말리지 마라 죄 없는 내가 이 때 구정물에 죄인들이 흘려놓은 죄 속에 내가 들어가서 그들이 예수님께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먼저 죄 속에 다가올 때 비로소 예수님의 물세례가 시작 되는 겁니다. 시작되어서 죄인과 예수님이 하나가 되었죠.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저주받는 십자가에서 불세례를 받으면 결국은 예수님이 백성들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잖아요. 그 다음에 이렇게 되면 예수님 혼자 구원받는데 성령을 통해서 보내지면 예수님이 했던 이 모든 효과가 같이 참여했던 사람에게 전달되면 그것이 바로 성령세례입니다.

 

내가 붙들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에게 물어 보지도 않고 내 죄 지은 그 현장까지 주님께서 이미 아시고 왜, 날 때부터 죄인이니까 우리에게 들어와서 그 못난 죄인을 건사해서 그것을 거둬서 주께서 십자가 통과해서 성령까지 주셔서 너는 사나 죽으나 나와 한 통속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합해서 세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내가 죽었을 때 너도 죽었고 내가 살아났기에 너도 살았다. 내가 죽었으면 너도 이유도 없이 죽은 자이고 내가 살았으면 누가 옆에서 뭐라 해도 너는 내 안에서 산자가 되는 거예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이 우리가 어느 자리 갔을 때 이야기 입니까? 우리가 날 때부터 주 앞에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아는 그 십자가 자리에 갔을 때 비로소 주님이 주님답게 우리에게 고마워 지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 섰을 때, 죄인의 자리에 섰을 때 주님의 통과 점에 섰을 때 우리가 원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아까 이야기 했지요. 병 고침, 돈 벌어 달라, 교회 부흥하게 해 달라……. 이 모든 것이 다 날 때부터 죄인일수밖에 없는 죄에 해당되지요. 이것을 주여 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돈 벌게 해 주시고 건강하게 해 주시고 교회 부흥하게 해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신앙생활 잘 하게 해 주신다면 이것은 우리의 행위로 한 것입니까? 주님의 은혜로 받은 것입니까? 주님의 은혜로 받은 거지요. 그래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상화 선수가 금메달 땄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될까요? 아니면 1000m에서 23등 할 때 하나님께 영광일까요? 오늘 제대로 알았는지 문제 냅니다. 이것도 영광이 아니고 저것도 영광이 아니고 이상화 선수가 스케이트 하면서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할 때, 그 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꼭 스케이트 탄다고 영광이 아니고 안타도 중간에 포기해도 하늘나라 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주님 덕분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참석하지 못한 분들도 주님 덕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든지 간에 구원하는 것은 주님 앞에 달렸사오니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이 죄를 위하여 이미 완료 적으로 다 이루었다 해주신 그 이루심이 우리에게 넘쳐서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의 공로, 은혜에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