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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16, 17강 / 빌 3:10 / 왜 죽어야만 하는가?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빌립보서

16, 17강 / 빌 3:10 / 왜 죽어야만 하는가?

정인순 2014. 4. 8. 11:33

100402 빌 3:10 왜 죽어야만 하는가?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기 위한 그의 죽음을 본받음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서울/서울100402빌3장10절a.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서울/서울100402빌3장10절b.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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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서울/서울100402빌3장10절b.hwp

 

 

서울100402빌3장10절a

"참된 사람이란(왜 죽어야만 하는가?)"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기 위한 그의 죽음을 본받음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여기 이런 이야기하는 사람 이름이 뭐냐 하면 사도바울이란 사람이죠. 방금 읽었던 빌립보서 3장10절의 이야기했던 사람이 사도바울 인데 이 사도바울이 사람입니까? 사람 아닙니까? 사람이죠. 둘 중에 하나일 텐데, 사람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처럼 고백 못 하는 사람은 사람입니까? 사람 아닙니까? 사람이 아니죠. 사도바울 같은 고백이 안 나오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가 됩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있으면 ‘사도바울처럼 고백하지 않은 사람은 사람 아니다.’라고 하니까 이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서 항의를 하게 되죠. 화를 내게 되죠. ‘왜, 우리가 사람인데 사람 아니라 하느냐!’ 화를 내게 되죠.

 

 

오늘 읽었던 본문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예한다 할 때 사도바울이 사람이라 할 때는 어떤 조건이 있느냐 하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형체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주변에 힘에 의해서 둘렸어야 돼요. 그 힘이 뭐냐 하면 부활의 권능이고 부활될 수 있을 때 사람이고 부활되기 위해서 사도바울은 죽음으로 가야됩니다.

 

 

우리교회에 장로님이 계시는데 작년에 이사를 했어요. 이사한 아파트 모습이 이렇습니다. 여기 앞에 보면 300미터 이상 되는 산이 있는데 산책하기에 좋습니다. 여기에 고속도로가 나와 있습니다. 고속도로가 나 있는데 만약에 여기 아파트에서 바로 고속도로 담 타넘고 중앙분리대 타 넘고 하면 죽지요. 죽어버린다고요. 여기 산에 가고 싶은데 산에 사람들이 와서 뭐라 하냐 하면 ‘야-호’ 하고 있습니다. 여기 장로님께서 자기도 산에 올라가서 야호하고 싶어서 ‘어, 기다려 나도 곧 올라가서 야호 할게.’하면 고속도로에서 중앙분리대 때문에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아파트에서 어떻게 했냐 하면 밑에 통로를 파놨어요. 누구든지 아파트주민들은 고속도로를 건너지 말고 밑에 통로를 파면 산 밑자락이 되는 겁니다.

 

 

참된 인간이란 사도바울이 부활의 권능에 참여 하기 위해서 ‘나도 살고 싶어.’ 이렇게 나오면 안 되고 고속도로 여기 밑을 파서 와야 여기가 부활의 권능이 되는 거예요. 여기 밑을 파는 것이 바로 십자가 인데 십자가에 참여해서 부활의 세계에 도착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도 이 십자가 판은 자기가 삽 들고 팠습니까? 아니죠. 여기 십자가 가는 길은 나는 길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생명이라 누구 이야기였습니까? 예수님 이야기였죠. 그러면 예수님 말고 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길이 없는 거예요. 예수님 말고 생명이 없는 거예요. 예수님 말고 진리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유일하게 진리이고 유일하게 생명이고 유일하게 길인분이 십자가를 통과해서 이 산에서 ‘야호’라고 외쳤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은 너희들이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지만 그때는 우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나의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 예수님만이 알고 있던 하나님의 은혜를 예수님의 가는 길을 가야만 그 하나님의 아버지에게 도달될 수가 있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과 하지 않고는 부활에 들어 갈 수 없고 십자가에 통과 할 사람은 사도바울처럼 참된 사람일 경우에만 십자가에 들어가고 참된 사람일 경우에만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참된 사람이라 하는 것은 사도바울이 참된 사람 된 것은 십자가와 부활에 둘려 싸여서 참된 사람 되었으니까 사도바울도 사실은 참된 사람이라고 볼 수 없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때문에 그것을 받쳐주니까 사도바울이 참된 사람이 된 거예요.

 

 

사도바울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처럼 고백을 못한 사람은 사람이 아니에요. 여기에서 두 가지가 있는데 사람을 묘사할 때 사람을 규정할 때 복음으로 사람 있느냐 묻는 것과 법으로 사람 있느냐 라고 물을 때 복음으로 사람여기 있습니까? 하면 여기는 한 명도 없습니다. 사람 같은 사람 없어요. 그런데 법으로 사람 있냐고 하면 전부 다 ‘예, 예 나, 법 잘 알아요.’ 법을 잘 안데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법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법적으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기 오다 보니 길에 간판에 진리치과가 있었어요. 혹시 봤습니까? 여러분, 진리치과가 말이 됩니까? 치과에서 이빨 치료하는 것과 진리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진리라는 것이 이 땅에 없어서 주님이 내가 진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진리로 치료를 한다고 되어있지요. 이 자체가 말이 안 돼요. 진리라고 하는 것은 누구한테만 붙느냐 하면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진리라는 것도 예수님에게만 해당되고 생명도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십자가에 죽는다고 해서 너무 서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죽을 것을 그냥 죽는 거예요. 서해안에 46명 죽었는데 그 사람들은 죽을 사람이 죽은 겁니다. 안 죽을 사람이 죽은 게 아니죠. 그 유족들이 들으면 기겁할 겁니다. ‘네 새끼 죽여 봐라!’ 하고 이렇게 나올 거예요. 안 죽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물에 빠뜨리면 책임을 하나님이 지어야 하는데 어차피 죽을 인간을 물에 빠져 죽인 거예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죽으면서 살려 달라고 할 것이 아니고 내가 왜 죽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물에 빠져가는 가판위에 달려 산사람이 있어요. 뱃머리에 매달렸을 때에 ‘살려주세요! 해경아저씨!’ 이렇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왜 저는 죽어야만 되는 존재입니까?’ 이렇게 물어야 돼요. 그런데 다급한 병사가 편지 쓴 것 보니까 ‘하나님 살려주세요.’ 라고 쓴 거예요. 무슨 권리로 살려달라고 합니까? 하나님 언제 봤다고?

 

 

복음으로 봐서 정답은 사람 없습니다. 사람 자체는 없어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복음으로 봐서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내 아들이요, 내기뻐하는 자다. 이 세상에서 사람 같은 사람은 단 한 분,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들을 때는 ‘아, 나는 사람 아니구나, 나는 진작 죽어 없어 져야 되는 구나’ 사람 없습니다.

 

 

옛날에 목사님이 젊었을 때 유행했던 노래가 있었어요. 한대수의 ‘물 좀 주소’ 뒤에 나온 노래 중에 ‘빈 의자’라는 노래가 있었어요. 두 노래의 가사를 조립해 보면 의자는 있는데 앉을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누구 없소?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난 다음에 ‘사람 없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있는데 우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이 사람 좀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있는 사람 구출하는 게 아니고 아예 없는 사람을 만들어 내요. 무엇으로 만들어 내는가 하면 예수님이 원판이 되어서 예수님에게 나오는 영혼, 예수님이 나오는 그 육체, 예수님의 그 마음, 그 성질을 통해서 사람 없는 데서 사람을 새로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기존에 법적인 사람은 폐기처분해 버립니다.

 

 

어떤 병사가 지금 물에 빠지는 데 “하나님, 제가 왜 저는 죽습니까? 하나님 누구십니까?” 그런 것 물을 시간이 없죠. 목 터지라고 마지막 ‘help me' ‘살려 주세요’ 라고 누구나 이야기 했을 거예요. 사람이 아무리 신앙이고 믿음이고 사랑이라고 하지만 누구나 다급하면 자기 밖에 몰라요. 살려달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저 사람 맞잖아요.’ 하나님은 ‘아닌데 아무리 봐도 아닌데’ ‘저 사람 맞잖아요. 사람이니까 하나님이 저를 만들었으니까 살려줘야죠.’ ‘아닌데 너 사람 아니야’

 

 

법적이란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선악적으로 사람 있느냐 라고 물을 때 사람들은 전부 다 ‘제가 사람입니다.’ 라고 합니다. 왜냐 하면 선악을 알고 있으면 사람으로 쳐 줄 테니까 하면 ‘제가 선악에 대해서 잘 압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법으로 사람 규정하는 것을 무엇으로 바꾸느냐 하면 복음으로 사람 바꾸는 작업을 위해서 인간에게 무엇을 주느냐, 율법을 주었어요. 이방인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양심을 주고 율법을 줘서 양심껏 사람 되려 하고 법적으로 죄는 멀리하고 선은 가까이 해서 사람 되려고 애쓰는 것, 그것을 실컷 하게 해요. 동양철학 같은 경우에 맹자, 노자, 논어 같은 것 보게 되면 인간이 짐승이 아니라면 부모에게 효도 하라고 해요. 우리 부모님들 그 소리 들으면 은혜 받습니다.

 

 

동물도 자기 새끼라도 엄마 공경 할 줄 알고 또 동물의 어버이도 자기 새끼 귀할 줄 아는 데, 어떻게 시집와서 자기 새끼 놔두고 도망가나 하는 옛날이야기가 많아요. 말을 함부로 못하겠네. 해당되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서(ㅎㅎ) 어떻게 짐승보다 못하냐! 할 때는 항상 인간이라는 것이 뭐냐?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를 해야 인간이라는 거예요. 연예계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네가 인기 좀 있다고 의시되지 말고 인간이 먼저 되라!’ 하지요. 인간되고 인기 없어서 도태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여기도 하나 있죠. 인간은 됐는데 인기 없어서 그만둔 사람 한두 명이 아닙니다. 인간된다고 인기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네가 인간이 돼야지’ 그래서 사람들은 ‘나는 교회는 안가고 예수는 안 믿지만 난 교회 가는 사람보다 절에 가는 사람보다 난 더 바르게 살았고 누구에게도 해로운 소리 안하고 삼강오륜에 충실하며 어느 집보다 반듯 하게 착하게 살아가니까 나는 죽어도 좋은데 갈 자신 있다. 자신 만만하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오니까 교회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맞습니다. 그렇게 양심이 고운데 하나님이 버릴 리가 없습니다.’ 그 양심에 예수 믿는 착한 일까지 더 보태어 지면 금상첨화입니다. 이래서 떼로 유교신자 불교신자를 기독교신자로 바꿔 놓으니까 문제가 교회 다니고 지옥가고, 예수 믿는 다고 우기면서 지옥가고 하는 희한한 현상이 벌어진 겁니다. 성경을 모르는 거예요. 성경을 봤다 하면 무조건 여기에 쳐 바르기에 바빠요. 착한데다가 뭘 쳐 바르느냐 하면 너는 십자가 고난에 동참해서 부활에 이른다 하니까 이것을 지키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받습니다. 이제 부활에 이르렀죠?’ 하여튼 성경보기만 하면 자기에게 쳐 바르기에 애를 써요.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하니까 양심은 곱지, 마음씨는 착하지 그러니까 두렵고 떨림을 가지고 여기에 또 쳐 되는 거예요. 안에 인간도 없으면서 말씀을 선악적인 방법으로 모든 것을 율법적으로 쳐 되니까 그거 구원받습니까? 사람 됩니까? 베드로가 예수 믿고 사람 되려고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받치려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말렸습니다. ‘베드로야!’ 경상도 말로 ‘니 와이카노? 니가 미쳤구나! 니 와이카노? 니 주제를 모르나’ ‘주의 제자입니다. 제가 보디가드 해 드리겠습니다.’ 칼을 빼들고 ‘누구야! 우리 예수님을 해치는 자가’ 남의 멀쩡한 귀를 베고 하면서 하니까 주님께서 안됐다는 듯이 ‘베드로야 칼 접어라 꽂아 넣어라 객기부리지 말고 니는 니 자신을 몰라’ ‘제가 지키겠습니다. 제가 수제자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 만들기 하지 맙시다. 구원받는 인간 만들기는 우리 주님이 하시도록 좀 놔두세요! 우리가 우리자신을 사람 만들지 마세요! 사람 만들수록 주님이 만드시는 그 모든 공로와 그 모든 작업이 무시당하고 다 가려집니다. 소용없어요.

 

 

선악을 아는 사람은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찾아내서 ‘너는 사람 아니다.’ ‘사람 아니면 뭐예요?’ “흙이다. 너는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가라!’ 해서 이름이 아담입니다. ‘너는 기껏 해 봐야 흙이다.’ 여러분, 흙이 사람 되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주물러 줘야 되요. 그러니까 흙이 흙을 다듬어서 사람 되는 법이 없습니다. 자기 손에 흙만 묻어요. 흙에서 사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창조하신 그때 창조주께서 다시 창조의 능력을 발휘해 줘야 흙이 그 다음부터는 사람 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우리가 사람 되지 말고 그냥 짐승으로 삽시다.

 

 

오늘 이런 말하려고 이날을 기다렸습니다.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를 피우기 위해서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어요. 우리 짐승 됩시다! 짐승 되고 사람 되지 맙시다. 괜히 사람 되려고 애쓰면 주께서 주신 사람하고 충돌을 일으켜요. ‘괜히 사람 됐어~ 괜히 사람 됐어~’‘ 뿅~’ ‘이단’ (ㅎㅎ)

 

 

율법을 주니까 인간들은 ‘야 이것은 이해된다.’ 해서 법으로 ‘시키라! 하라!’ 하는 것은 이해되고 ‘하지 마라!’ 하면 이것은 이해 되서 하라 하지 마라를 열심히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라, 하지 마라를 계속하면 할수록 점점 더 무엇과 멀어지냐 하면 점점 더 저주와 가까워요. ‘아, 이래서 저주받는 구나’ 점점 더 저주를 유발하는 존재로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 그런 소리 다 치우고 아 진짜 사람을 어떻게 만듭니까? 우리는 그게 듣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고 싶죠. 그것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세례요한 태어날 때 누가 와서 세례요한 이름을 지어졌죠?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요한의 탄생과 이름까지 다 지어줬다면 적어도 세례요한은 훌륭한 사람, 죽을 때도 위대하게 죽어야 하는데 죽을 때 어떻게 죽었습니까? 처참하게 죽었죠. 여러분, 앞뒤가 매치가 됩니까? 우리집사님 애기가 태어날 때 혹시 가브리엘 천사가 온 적 있습니까? 천만다행입니다. 만약에 왔다 하면 물에 서해안에 빠져 죽을 수도 있었어요. 사람들은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탄생될 때 별들이 동원되었죠. 동방박사 동원됐죠. 별이 와서 예루살렘에서 멈추고 다시 떴다 했는데.......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던가요? 별의 진행과정이 아기 예수님의 진행과정 동일하거든요. 예루살렘 와서 별이 없어 졌죠. 그리고 예루살렘 지나가니까 다시 별이 나타나잖아요. 외부에서 와서 예루살렘이란 곳을 거치면서 별은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하는 것, 이처럼 동방박사가 와서 경배하고 천사가 와서 하늘에서 찬양소리를 듣게 하는 것, 이정도로 하나님께서 출생에 대해서 축하를 해줬으면 시작이 그렇게 화려했으면 시작은 창대하나 끝은 미약하다. 죽을 때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여러분, 그게 매치가 됩니까? 생일잔치 멋들어지게 했는데 실 잡을래? 책잡을래? 돈 잡을래? 부모들이 세 가지 놓죠. 왜 부모들은 돌잔치 할 때 옆에 십자가를 놓지 않습니까? 지금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 잡으면 부활에 이르는데 실 잡아서 지옥가고 돈 잡아서 지옥가고 책잡아서 지옥 가는 겁니다. 제가 돌잔치 설교를 몇 번 해 봤는데 십자가 옆에 놓고 애가 어느 것 짚는가 보면 만약에 애가 철이 없어 십자가 잡는다 하면 부모가 말릴 거예요. ‘얘가 믿쳤나, 십자가 길을 왜가 고난의 길을 왜 가는데’ 이것이 빌립보서 2장 10절의 말씀입니다.

 

 

어찌하던지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어느 길을 잡아야 된다? 십자가의 고난을 봐야 어디 간다? 부활의 세계에 가는 거예요. 아까 장로님 집 봤죠. 야호 하려면 어디가야 해요? 고속도로로 가면 안 됩니다. 보이는 데 가면 안 돼요. 보이는 것은 허상입니다. 허상이 허상이 아니라면 그 보이는 것이 먼저 보이는 곳에 먼저 도달하신 그 가신 그분의 노선을 따라야 돼요. 그분은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에 갔습니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십자가에 베드로가 가려하는데 주님이 말렸습니다. ‘베드로야 니 주제 파악도 못 한 게’ ‘주여, 제가 십자가 길 가겠습니다.’ ‘너는 못가는 거야’ 그 주님 가신 길은 우리가 인간이 갈 수 있는 길을 인간이 아닌 짐승 같은 인간이 흙인 인간이 참된 인간이신 주님가신 길을 우리가 갈 수 있다 이 말입니까? 하라 한다고 하고 하지 말라 해서 안할 수 있는 재주가 있어요? 안됩니다. 그냥 짐승으로 삽시다.

 

 

참된 인간 만들기는 항상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 들이대면 우리는 피해버리고 피하면 다시 십자가들이대고 그 십자가들이 된다고 피한 다고 다른 길을 가면 또 십자가 있고 계속 십자가로 해서 마치 박지성이 공 몰듯이 요리 저리 몰고 가는 거예요. 몰고 가 골인하는 거예요. 공 누가 넣었어요? 공이 알아서 갔습니까? 선수가 몰고 가니까 간 거예요. 주님 앞에 사로잡히고 주님께서 휘둘리고 주님께서 사용하시니까 가다 보니까 짐승 같은 인간도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 했고 부활의 권능에 이른 겁니다.

 

 

세례요한 같이 가브리엘 천사가 와서 그 하나님의 사명 이야기하고 이름 지어 줬을 때는 부모들이 무척 좋아했을 거예요. 하지만 처참하게 망가지고 예수님도 마찬가지 한 것처럼 이 땅과 하늘나라 사이에서는 단절, 다리가 끊어져 있어요. 여기 십자가를 걸쳐봐야 선교단체서 말하는 건데 십자가를 통해서 간다 하는데 십자가를 걸쳐봐야 여기에서 십자가 올라가면 똑 떨어져요. 십자가라는 계단을 설치해 봐야 우리는 이 십자가 말고 다른 계단을 따로 만들어요. 항상 우리는 선악적으로 사람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여기서 복음이고 십자가고 언약이고 무슨 소리 해 봐야 항상 우리는 엉뚱한 길로 가는 거예요. 이 엉뚱한 길로 가는 이 모습을 오늘 본문을 설명하면서 제가 그림 하나를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정말 이 그림을 평생 여러분들이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길이 이렇게 새총처럼 되어 있는데 여기 지옥이냐 천국이냐 갈림길에 십자가가 서 있어요. 이 십자가는 무슨 십자가가 인가하면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넓은 가시밭에 있는 이 사람을 예수님께서 말리다가 ‘거기 아니야’ 라고 말리다가 죽어버린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건 아니야 그 길은 아니야’ 라고 말리다가 얻어터져가지고 거기서 죽어버린 피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거든요.

 

 

그렇다면 지금도 우리는 넓은 길을 좋아하고 짐승이니까 날 때부터 우리는 선악적이니까 여기 가는 사람들 전부 다 법을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법대로 합시다. 하나님의 약속은 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법으로 되어 있데요. 맞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법적 양심이 있기 때문에 그 법을 최선을 다하여 지키면 우리는 법을 지킨 것이 되고 그리고 우리는 구원받는다! 라는 사람들이 다 이렇게 가요. 그리고 이런 사람 외에 다른 사람 없어요. 모든 인간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구원받은 사람이 나왔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엘리야나 세례요한이나 사도바울이나 구원받은 사람이 나왔거든요. 이쪽 가던 사람이 어느 길로? 이쪽 길로 가는 사람이 있더라 이 말입니다.

 

 

이쪽으로 갈 때 반드시 주께서 십자가로 말려서 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십자가가 오늘날 의존교회나 우리교회나 성도들에게 뭐가 필요 합니까? 법이 필요한 게 아니고 십자가 필요합니다. 십자가의 뜻은 거기는 길이 아니야 라고 말리는 거예요 십자가 모습도 한번 보세요. 말리는 모습 아닙니까? (ㅎㅎ) 이것은 좀 오버다 (ㅎㅎ) 가면 안 돼. 

 

 

내가 너희들에게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 이 말은 지식을 보태라는 말이 아니고 네가 가는 길 자체가 엉터리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네가 법적으로 알고 있는 율법적으로 아는 길 말고 법이 없는 길로 가면 돼’ 라는 법이 사라진 길, 오랜만에 어려운 말 나오는 데......,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나의 그림자가 없는 길’ 아, 이것은 너무 문학적 이다. 나의 그림자가 없는 길, 사람이 자기가 있을 때는 그림자가 생기잖아요. 나의 그림자가 없다는 말은 뭐가 없다? 내가 이미 죽은 자가 돼서 없는 거예요

 

 

제가 안산에서 책을 보니까 관속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그림이 나와 있어요. 바라코시대 작품인데 관속에 들어 있는 그리스도 그림을 정말 잘 그렸는데 그 그림의 주제가 뭐냐 하면 일반인들의 죽음하고 똑같다는 겁니다. 그게 주제예요. 예수님의 죽음이 멋있는 죽음이 아니고 그 그림을 보니까 얼굴이 하얘졌어요. 얼굴이 하얘져서 그야말로 죽었어요. 죽었다는 말은 자기 힘으로 일어날 여력이 있다? 없다? 진짜 죽었어요. 보통 서울대학병원 영안실 관속에 있는 사람하고 똑같아요.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됐다면 역시 희망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우리는 희망이 없다 하면 다행인데 우리는 마치 희망 있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로 가냐 하면 자꾸만 남들이 찾아가는 법이 깔려있는 길, 법이 사라진 길이 아니고 법으로 법으로 계속 이어진 길을 좋아하는 겁니다. 어느 쪽이 나쁜 길이고 착한 길이고 자꾸 착하다 나쁘다 의롭다 악하다 그것이 구분되는 법적으로 아스팔트를 깔아놓은 법이 가득 찬 거기, 거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원하느냐 하면 자신의 존재감을 느낍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이렇게 가치 있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주님께서는 ‘웃기고 있네, 똥 폼을 잡는구먼! 성경 한 백독 했다고’ 성경 백독 한다고 구원받습니까? 성경백독이 법적으로 착한 일이 되어 버렸어요. ‘성경백독 했다.’와 ‘나는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 어느 것이 착합니까? 백독한 것이 착하죠. 벌써 생기잖아요. 법적으로 생긴다 말이죠. 한 달에 교회 한번 나온다와 열 번 나온다. 어느 것이 착해 보입니까? 열 번 나온 것이 착해 보인다고요. 벌써 법적으로 자기는 착하다는 거예요. 이런 인간 죽이면 하나님이 아깝다는 거예요. ‘나 같은 인간을 살려야지 누구를 살리나?’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사람이 법이 있을 때 흥미를 끕니다.

 

 

라카이라는 사람이 ‘인간은 없고 법만 안에 들어 있다’ 인간은 없고 그 안에 법만 들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언어만 들어 있다 이 말입니다. 욕망이 나올 때 꼭 말로 나옵니다. 죽은 사람은 뭐가 없습니까? 말이 없죠. 살았는데도 말이 없는 사람은 산 사람이에요? 죽은 사람이에요? 있으나 마나 한 인간이에요. 꼭 살았다고 표를 낼 때는 뭘 해야 합니까? 말을 해야 되죠. 대답이 없으면 죽은 거예요. 인터넷 하다가 인터넷 사이트 죽어버리면 그 사람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죽은 자가 되요. 그 사람이 어느 동네에 살아도 인터넷 안 떠오르면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가끔가다 인터넷하면 아, 이분 아직 살아 있구나! 아는 겁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복음전할 때는 복음에는 법이 사라진 길이죠. 복음전할 때는 교인들이 아무 소리 안 해요. 어느 정도냐 하면 우리교회 교인들에게 주일 오후에 기도 하라 하면 다 도망 가 버려요. 조용해요. 그런데 그런 교인들도 만약에 제직회 하라 하면 그 다음부터 말이 막 됩니다. ‘제직회 이번 결정 3분의 2로 할까요? 과반수로 할까요?’ 하면 전부다 ‘저요! 저요! 3분의 2로 해야 돼요’ 복음 아닌 이야기는 어떻게 서로 말하려고 달려드는지……. 우리교회는 그런 경우 없는데……. 다른 교회…….(ㅎ ㅎ)

 

 

복음 아닌 것에는 그렇게 말이 많아요. 복음적인 이야기는 입을 다물다가 기도 하라고 하면 기도 못합니다. 하다가 연속극 이야기하면 아내가 돌아왔다 하면 좔좔좔 이야기가 나오는지....... 그만큼 평소에 법으로 조직된 짚인형, 옛날에 장희빈할 때 인현왕후 죽으라고 장희빈이 짚으로 인형 만들어 바늘로 콕콕 찌르니까 몇 키로 떨어진 왕비가 윽윽 하고 죽잖아요. 말도 안 된 소리죠. 성질 같으면 한국교회 목사들 인형 만들어서 대구에서 푹푹 찔러서 강대상에서 피를 토하고 죽고(ㅎ ㅎ)

 

 

물에 빠진 병사들은 배 모형에다 누가 바늘 찔러 다 빠져죽었습니까? 원래 바늘 가지고 찌르는 것은 마귀에요. 마귀가 바늘을 찌르는데 문제는 왜 찔리나 이 말입니다. 안 찔리면 될 텐데. 왜 찔립니까? 왜 정죄함을 당합니까? 우리가 자꾸 법적으로 자기 의로움을 무장하려하니까 그것을 변호하려하니까 마귀가 장희빈이라는 마귀가 짚 만들어서 계속 찔러대는 거예요. ‘니 오른 눈으로 죄를 범했잖아 빼버려! 빼버려! 어제는 왼손이 잘못했잖아 잘라 버려!’ 계속해서 ‘니가 주님 말씀 들어 봐!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한 거잖아! 니 죽어버려!’ 계속해서 법적으로 찔러대는 거예요. 말씀가지고……. ‘하루에 성경 3장 보는데 어제 1장밖에 못 봤잖아! 바쁘다고’ 계속 정죄하잖아요.

 

 

여러분 그것을 알아야 돼요. 인간이 선악과에 관심 없었으면 인간은 죄지을 필요 없어요. 그런데 마귀는 인간을 선악과 쪽으로 눈 돌리게 만들어 버린 거예요 유혹은 그때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법을 안 봐도 구원받는데 법을 보게 하므로 말미암아 잠자고 있는 우리 속에 있는 법을 일깨우게 만들었어요. 탐내지 마라 하는 순간 그때부터 우리는 탐낼까? 말까? 갈등을 유발되는 겁니다. 구원은 법이 사라진 길을 통해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법이 사라진 그 길이 예수님이 가신 길입니다. 법이 없는 길에는 법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법에 대해서 묻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아무 것도 안 따집니까?’ 아무 것도 따지지는 않아요. 다른 것 가지고 따지죠. 뭐냐 하면 ‘너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법은 타인을 끌고 오지 않습니다. 법은 남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명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렇게 묻지 않습니다. 법은 나한테 문제에요. ‘너는 어제 얼마나 착했어? 너는 어제 얼마나 나빴어?’ 마귀가 내 문제에 대해서 따집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밖에 계신 예수님을 끌고 와서 ‘너는 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너는 너와 어떤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때 우리는 ‘법적으로 우리가 의롭다 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리다가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율법의 완성으로서 오신분입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 봅시다.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여기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죠. 그러면 예수 믿는 것은 율법의 행위입니까? 율법의 행위 아닙니까? 아니죠. 그러면 행위입니까? 행위 아닙니까? 아니죠. 예수 믿는 것은 완전하게 우리의 행위에서 나온 예수 믿는 것은 있다? 없다? 없다 왜? 율법은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율법 주신 것은 죽으라고 주신 것을 우리는 펄펄 살아서 율법을 지키기 때문에 문제가 되어 버려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자, 물이 있습니다. 물을 예수님도 바라보고 저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물을 마시고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 물을 마시고 ‘아 맛있다’ 살았습니다. 같은 물을 마셨는데 다른 결과가 나왔죠. 결국 우리는 이 물이란 율법을 지키지도 못한 거예요. 율법을 지키면 우리도 제대로 예수님처럼 죽어야 돼요. 그래서 성령이 아니고서는 율법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율법을 받으시고 저주받아 돌아가셨잖아요. 그러면 우리도 율법을 제대로 지키면 저주받아 죽어야 되는데 우리는 율법을 받아 더 위대해 지고 더 착해 진다고 생각했으니까 이것은 율법도 모르면서 율법을 지켰다고 우긴 샘이 되는 거예요. 율법의 요구는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율법을 행해서 살자는 용도로 사용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은 사람의 현재 형편은 율법을 지키므로 말미암아 의롭다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인 나를 봐라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 있는 자로 하여금 저주아래 있게 하기 위함이고 진짜 네가 사는 길은 내가 부활한 능력을 입어야 된다. 그것이 행함이 아니란 의미에서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율법에서는 반드시 행함이 따르게 되어 있어요. 율법이라는 것은 하라 하지 마라니까 행함에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믿으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복음 혼자 따로 등장한 법은 없습니다. 반드시 뭐와 짝을 이루느냐 하면 율법의 행위로서는 ‘아니오!’가 짝을 이룹니다. 왜 그러냐 하면 율법의 행위가 아니요 하는 것도 우리 힘으로 안 되고 복음 믿는 것도 우리 힘으로 안 되기 때문에 이 중간에 뭐로 연결시켰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연결시켜서 예수님의 복음을 믿게 하는 것은 너 안에 예수님이 살아있기 때문에 믿게 되는 거예요.

 

 

십자가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죽음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안에 누가 살아있습니까? 십자가에서는 나는 죽고 내안에 예수님이 살아있다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안에 십자가의 능력이 살아있다는 거예요. 십자가의 능력이 살아있으려면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율법이 주는 저주의 힘이 계속 있어야 해요. 저주의 힘이 계속 있어서 우리를 계속 죽여야 계속 산다는 것이 의미가 있어요. 가치가 있어요. 남들 보기에 평평한 장판인데 나는 계속 발을 구르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남들 보기에는 안보이지만 여기서 계속해서 구더기가 올라오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편하게 살고 있는 데 주님께서 계속 밟고 있는 겁니다. 율법의 저주가 주님의 십자가로 계속 밟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증인되는 겁니다.

 

 

성경 이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처음에 만든 인간은 선악과를 모르는 인간이었는데 선악과를 이미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사람이라 할 수 없고 그냥 흙인데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흙에서 사람 만들어 내는 몫은 우리 몫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 뜻과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 질 때 사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구원함에 있는 게 아니에요. 죽은 우리를 살리는 게 아니에요. 죽은 우리를 살리려면 아예 처음부터 우리를 죽이지 말아야 됐어요. 처음부터 ‘조금만 죽어줘 내 살려줄게’ 하는 이런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기독교의 신학은 ‘인간아 조금만 참아라. 내가 살려줄 게’ 이랬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런 거짓말을…….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살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구원이 아니고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하여 죽은 자를 이용하는 겁니다. 우리는 계속 죽어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안합니까? 우리의 그림자는 이미 사라졌어요. 우리는 예수 안에서 늘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거예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은 이미 주인공이 예수님이니까 결국은 나의 자아가 아니고 주님의 자아로 살아가는 겁니다.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니까 마태복음 10장 같은 경우에 “네가 말하는 것은 네가 아니요 네 속에 성령께서 이야기함이라” 라는 말이 성립되는 겁니다. 말한 이는 네 안에 성령님이라 이것은 죽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구원하자는 목적이 아니고 예수님이 그려져 있는 그런 도자기 하나 새로 굽었다고 보면 됩니다.

 

 

죄로 죽었던 도자기에 십자가 피로 덮음으로 말미암아 밑에는 죄, 위에는 십자가, 양쪽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그런 새로운 도자기 그릇으로서 우리가 이 땅에서 천국가게 되는 겁니다. 도자기가 천국에 입고되어야 천국에서는 어린양만 영화롭게 되는 어떤 인간도 서로 서로 자랑하지 않고 주님만 면류관 받고 주님만 영화롭게 되는 주님의 세계가 그래서 만기하고 꽉 차게 되는 겁니다.

 

 

더 이상 법이 없는 길을 가면서 법적으로 잘했다 못했다 두 번 다시 따지지 않기로 우리 약속을 하고서 떡을 먹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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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100402빌3장10절b

"참된 사람이란(왜 죽어야만 하는가?)"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기 위한 그의 죽음을 본받음

 

지난 시간에 율법이 주어지면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율법을 온전하게 이루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있는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 늘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죽은 자가 되는 것을 너무 섭섭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죽은 자가 되게 되면 우리는 어떤 점이 유리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준 것이 우리를 살리려고 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된 즐거움이 있어요.

 

우리는 모든 것을 나 잘 되라고 줬다고 생각하면 점점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율법 준 것은 우리를 구원함이 아니고 너희 구원자가 따로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우리를 염색처리 한다고 할까요, 우리를 탈색 시킨다 할까요, 우리 자신을 “비켜 선악과를 따먹은 너는 제발 좀 비켜” 라고 이것을 처리 하는 화학약품,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율법입니다.

 

율법이 오게 되면 우리가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우리는 저주가 계속 일어납니다. 결국은 저주의 끝은 죽음 아닙니까? 처리화학약품, 누구를 처리하느냐, 나를 처리하죠. 나를 처리하는데 결과는 무엇인가 하면 나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는데 죽음에 이르는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하자? ‘즐거워하자.’ 이 말입니다. “내가 죽었데, 내가 죽었데.” 이것을 좋아서 이야기 해요. “그럼 당신 죽으면 성경 말씀을 누가 지키는데요? 이것을 지켜야 구원 받는데 당신이 죽으면 어떻게 당신이 구원받아요?”

 

나를 죽이게 한 그 분이 나를 구원한데……. 그것이 바로 앞에 가로막고 있는 바바리맨과 같아요. 바바리맨처럼 우리 주님이 십자가 벌리고 “제발 내 앞에서 죽어줘” 이 말입니다. 잘난 체 하지 말고 법 지켰다 하지 말고 헌금했다 전도했다 하지 말고 내가 죽을 때 비로소 다 이루었다가 온 몸으로 뿌려져 나옵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할 때, 우리는 손가락, 발가락 온 몸으로 죄인중의 괴수를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뿜어져 나오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사람됨이라 하는 것은 사도바울이 사람 된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 안에 함께 계시는 분이 참 사람이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사람 된 겁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이유 때문에 증거해야 되기 때문에 주께서는 사도바울을 화학약품으로 처리해서, 율법으로 처리해서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3장 7절 봅시다.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이 말은 금에다가 구리를 입혀 놓으면 금인지 구리인지 모르잖아요. 그때는 구리를 벗겨 내야하죠. 그 구리를 벗겨내는 화학처리 약품이 율법입니다. 이것을 벗겨내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했다는 그 사실이, 그 현실이 우리에게 발게스레 하면서 튀어 나오는 겁니다. 들어나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즐겁습니까? 그래서 우리 안에 이런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을 드러낼 때 우리는 그것을 즐거워하자 이 말입니다.

 

제가 15년 전에 봤던 외화 드라마 중에서 'V' 라는 드라마가 있었어요. 얼마나 놀랍고 무서웠는지, 보고 싶기는 한데 겁이 났던, 그 드라마를 보면서 기억나는 게 있는데 사람인줄 알았는데 껍데기를 벗기니까 도롱뇽 같은 파충류, 개구리 같은 것이 튀어나옵니다. 징그러워서 기겁을 했죠. 사도바울이 인간인줄 알았는데 껍데기를 삭 벗기니까 그 안에 예수님이 들어 있어요. 하는 말이 ‘나는 날마다 죽고 내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그런 것 있으면 넌 'V' 너는 인간이고, 그것이 없으면 너는 인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을 제대로 풀이하면 두 번 다시 상종을 안 하는데 이 의존교회는 계속 상종을 하니까 이상합니다. 성경 뜻은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 아니라는 점이 그것이 그렇게 기분이 좋다는 겁니다. ‘나는 사람이야, 짐승이 아니고 반듯하게 살아야 돼’ 이럴 때는 우리가 너무 힘들었어요. 너무 괴로웠어요. 그런데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주께서 인도하는 것을 느낄 때 현재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의 용서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물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겁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 한 것을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내가’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온전함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리스도께 잡힌바 되는 거예요. 큰 손이 우리를 잡은 거예요. 잡을 때 우리를 무엇으로 잡느냐, ‘열심히 해!, 똑바로 해!’ 이렇게 잡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무엇으로 잡습니까? ‘너는 죽은 자야’ 왜? 내가 살아 있으면 자꾸 율법을 행하려고 율법적으로, 양심적으로 행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이만큼 열심히 했는데 안 받쳐줍니까?’ ‘이렇게 애를 썼는데도 기도 응답이 왜 없습니까?’ 자꾸 우리는 자기 스스로를 살아 있어서 독자적으로 가치 있는 존재이고 싶어 해요.

 

세례요한이 가브리엘에게 와서 이름 지어줄때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참 부럽죠. 하지만 세례요한이 죽을 때도 자기 원대로 죽지 않습니다. 자기가 시나리오 써서 ‘나는 목 잘렸는데’ 이런 인간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목 잘리듯이, 목 잘려 죽으나 물에 빠져 죽으나 중요한 것은 어디 가느냐가 중요하지 비참하게 죽는 것 가지고 축복이니 저주니 하는 것을 상대해서는 안 됩니다.

 

거지 나사로 같은 경우 자기가 시나리오 쓰면 그렇게 쓰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내 인생을 독자적으로 시나리오를 쓰면 ‘나는 예수를 잘 믿었다. 누가 교회 지으라고 250억을 줬는데 25억은 십일조하고 나머지는 내가 사업체 키워서 부자 되었다. 애는 공부를 잘해서 세계 최고의 연주자가 되고 교회는 부흥해서 비좁아서 밟혀죽고....... ’ 우리는 매일 같이 상상하는 것이 내가 만들어가는 나, 붙잡힌바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예수님을 붙잡고 부리려고 하는 이용하려는 그런 시나리오만 짜는데 오늘 본문에 보면 시나리오 짤 것도 없어요. 이미 우리는 붙잡힌바 되어 버렸어요.

 

화물열차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달리면 우리는 여기에 얹혀 있는 화물입니다. 앞에서 빨리 가면 빨리 가고 늦게 가면 늦게 가고 울퉁불퉁하면 울퉁불퉁하고 인생은 어차피 롤러코스트 아닙니까? 계속 롤러코스트 타는 거예요.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주님의 화물차에 타서 가는데 거기에 대해서 어떤 경우도 잘잘못을 따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보고 제발 죽어 있으라는 겁니다. ‘똑바로 해!’가 아니라 ‘너는 죽었어!’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성경말씀이 바로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너는 성경말씀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해 너는 이미 죽은 몸이니까’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우리는 성경을 못 알아듣고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렇게 합니다.

 

사람이 자기가 설치게 되면 주님이 설친 것이 눈에 안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꼭 밀림 나라에서 사자 앞에 가는 간사한 이리처럼 말이죠. 전부다 사자보고 충성한 것을 자기보고 절한 줄 알고 오해 하는 것처럼 항상 가제트 형사처럼 다른 사람이 일처리 다 했는데 모자 돌리면서 자기가 다 처리 한 것처럼 행세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이 독자적으로 생각해 버리면 사람이 자살합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하나님이여 나의 존재의 가치가 뭡니까? 만날 자기한테 묻는 거예요.

 

율법을 통해서는 우리는 이미 존재의 가치 없음이 확정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묻는 거예요. ‘내가 저 사람 보다 못한 게 뭐가 있는데, 저 사람보다 어떤 점이 낫습니까?’ 자꾸 남하고 비교하고 남하고 우위를 논하고 죽은 놈이 죽은 놈하고 비교해야 뭐합니까? 시체끼리 누워서 ‘아하, 빛깔 좋으네, 잘 먹었는지 모양이지’ ‘죽을 때 개고기 먹었는데’ ‘아이고 부러워라’ 이런 시체놀이는 하지 맙시다. 우리 인간적으로 그런 것은 하지 맙시다. 소용없는 겁니다.

 

시체가 부럽지 않아야 됩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 때문에 이근호라는 시체, 정주영이라는 시체, 부러워하지 맙시다. 인간의 가치는 성경에 보면 우리 몸에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의 가치는 어디 있느냐? 인간의 가치는 들어갔다 나가는데 가치가 있다는 겁니다. 들어갔다 나갔다 뭐합니까? 코에 있나니 코가 가치 있다는 말이 아니죠. 코에서 산소를 집어넣을까 말까, 그분이 집어넣어 주면 살고 산소호흡 안 되면 죽는 거예요. 인간의 가치는 인간에게 아예 없다는 말입니다. ‘호흡에 있나니’ 이 말은 없다는 말이에요. 오늘 살다 내일 죽으면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동안 산 것은 하나의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수증기 방울 같이 해 뜨면 녹아 버리는 마치 입속에 들어가는 솜사탕 같이 분명히 한 묶음 집어넣었는데 속은 것 같아요. 두 번 빠니까 살아져 버렸어요.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을 하나의 점으로 만듭니다. 점이 되어 보면 안개와 같아요. 점은 크기도 없고 면적도 없고 크기와 면적이 없으면 다른 점하고 비교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 네 점은 크네.’ 이럴 필요 없어요. 점이라는 것은 둘 다 점이죠. 우리가 점이 될 때 무엇이 크게 보이느냐 하면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모든 세계가 다 주님의 의해서 배치되어 있는 다 만들어진 예수님의 구조라는 것은 그 때 우리가 다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말씀의 시스템, 구조입니다. 성경 자체로 만들어진, 잠언서에 의하면 지혜로 만들어진 세계, 모든 구석구석이 하나님의 발길에 툭툭 치입니다.

 

“주여, 이 말씀이 이 뜻입니까? 이 뜻이 빌립보서의 이 말씀입니까? 고린도전서가 이 말씀입니까?” 전부 말씀으로 보이는 겁니다. 불신자가 담배 피다가 함부로 툭 던져 버리면 “주여, 저것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마귀 자식의 모습입니까?” 연속극을 보아도 모든 것이 말씀에 견주어서 ”저것이 말씀대로 되는 겁니까?” 라고 항상 말씀 안에서 주님과 교제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참 희한한 세계이죠. 사도바울이 이런 세계를 알았잖아요. 알고 나는 붙잡힌바 되어서 따라갔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시속 200km 하는 화물차 위에 나는 그저 실려 간다는 뜻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다 할 수 있다는 말은 자기가 한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를 싣고 가는 화물차가 가는 곳에 안 떨어지고 그냥 따라가면서 모든 일을 다 이루어 나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 믿지 않더라도 주의 뜻이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이야기 할 건데,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말씀이 깊숙이 들어와요. 아까 안산강의에서 했는데, 그것을 다시 한 번 해 보겠습니다.

 

“나는 ~이다.” 라고 할 때, 이 방정식에 ‘나’가 있죠. “나”를 주어라 하고 뒤에 “~이다”를 술어라고 하는데, 항상 우리는 생각하기를 내 중심으로 “나는 ~이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나를 버리고 예수님은 나에게 간접목적어 “예수님은 이런 일을 일으켰다.” 주인공이 예수님이고 나는 혜택을 입은,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항상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될 텐데, “나는 ~했다.” 이렇게 나와요. 항상 자기가 주인이 되는 겁니다.

 

교회에서 우리는 죄인입니다. 하니까 여기에 죄인을 집어넣어요. 나는 죄인인 것을 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내가 죄인인 것을 알았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나는” 이것을 버려야 해요. 이것이 깨져야 돼요.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날마다 죄인 되게 하신다.’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나는 죄인인 것 알거든요.’ 어떤 목사 설교를 들으니까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갑시다.” 이렇게 말하는 데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구원을 두렵고 떨림으로 할 것 같으면 그 사람 죄인이 아니에요. 그 사람, 독자적으로 구원 받겠다고 하는 겁니다. 자기 힘으로 자기를 구원 받는 사람 만들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천당 가면 “주여, 나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했습니다.” 하고 자기 자랑 할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까지 안 죽은 겁니다. 죄가 뭔지 모르고 죽음이 뭔지 모르고 말씀이 무엇인지 모르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 교인들이 아멘하고 동의를 하니까, 속이 터지지요. 그러니까 제가 묻는 거예요. 묻고 싶어요. 두렵고 떨릴 때, 어느 정도 해야 두렵고 떨리는 수준인가? 어느 정도 해야 안 떨리고 안 떠는 수준인가 기준을 제가 묻고 싶어요. 요만큼 떠느냐, 이~ 만큼 떠느냐, 어느 것이 두렵고 떨리는 겁니까?

 

두렵고 떨리는 것은 말씀대로 주께서 예상 못하게 우리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그 때, 주의 말씀에 붕붕 떨릴 때, ‘아, 이것이 주께서 빌립보서의 말씀대로 유발 시키느냐’하고 주님께 영광 돌리고 주님께 현재 붙잡힌바 된 것을 확인하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하는 일은 간단합니다. 너는 항상 어디 가더라도 나의 붙잡힌바 되기 위해서 두렵고 떨리는 일을 자꾸 발생 시킵니다. 우리는 벌벌 떨면 돼요. 그것도 즐겁게, 아주 즐겁게 그래서 제가 안산에서 얘기 했어요. 즐겁게 비참하게 되자고 얘기 했어요. 아주 즐겨 비참하게 됩시다. 화물차에 실려 가니까........

 

사람이 기대한 것이 있으면 “나는 무엇을 기대 한다.” 하면 이 안에 들어가는 것이 이것이 한도 끝도 없어요. 어느 정도 되어야 우리가 만족합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그 귀한 인생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께 따지다가 볼 일 다 보고 하나님께 대들다가 볼 일 다보고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나는 법대로 하는데 왜 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또 뭐 합니까? 누가 법대로 하라했습니까? 제가 아까 우리는 뭐가 없다 했습니까? 우리는 그림자가 없다고 이야기 했잖아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안아 버리면 이 복음 가는 길에 그림자가 있다면 이 그림자가 누구 그림자 입니까? 나의 그림자가 아니고 우리 주님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그림자는 없는 거예요.

 

우리가 가는 모든 인생의 그림자, 자국, 흔적들은 내 흔적이 아니고 주님께서 말씀대로 표면에 타일을 깔기 위한 촘촘히 말씀만 깔기 위한 그러한 콘크리트 작업을 하는데 죄인인 우리를 들고 그 작업을 해 나갔던 그 흔적들이 복음, 천국 가는 길에 흔적들이에요. 어느 것 하나 말씀대로 안 된 것이 없습니다. 돈 사랑하다가 깨진 이야기, 다 말씀대로 되었어요.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말씀대로 하니까 여러분들이 감이 잘 안 오는데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롬 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우리가 오늘 9시 넘어서 봤습니다. 분명히 봤습니다. 이것 기억납니다. 체험됩니까? 아니요, 체험은 안 되죠. 여기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 15년 후에 20년 후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문득 우리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던 로마서 14장 8절의 말씀,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는 이것이 여러분들이 이탈리아에 관광 하러 가서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이탈리아 관광 가서 소매치기 당해서 지갑, 여권 다 일어 버렸을 때,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또 운 좋으면 이 자리에서 느낄 수 있다 이 말이죠. 떡 먹다가 체해서 병원에 입원해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느낄 수 있는 문제라 이 말이죠.

 

말씀을 이렇게 집어넣을 때, 우리는 농담인줄 아는 거예요. ‘주여 이 말씀 압니다.’ 만날 우리는 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말씀이 어디까지 와야 하느냐 하면 말씀에 의해서 없는 우리가 새로 만들어져야 된다는 것이 사도바울이 말하는 새 인간의 가야될 길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 져야 돼요. 그 전에는 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을 무엇으로 가라 치웁니까?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지나온 모든 것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늘 느껴지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사람에게는 수준이 있다. 처음 할 때는 말씀을 잘 모르다가 나중에 크면 클수록 말씀을 많이 안다.’ 이 말이 맞습니까? 여러분 얼마나 많이 들어 왔었습니까? 의존교회 목사님은 말씀 안하시지만 다른 곳에서 말 합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말씀의 깊이가 얕다가 점점 깊어지면 그만큼 성화되어서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뭐가 잘 못 되었는지 제가 한번 적어 보겠습니다. ‘나는 처음에는 말씀의 깊이가 없다가 나중에는 말씀의 깊이가 있다’ 앞에 뭐가 들어갑니까? 나를 포기 했어요? 포기 안했어요? 나를 포기 안했죠? 나를 포기 안한 상태에서 내가 점점 더 성장하고 성숙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성화론인데, 성경에는 그것이 아니고 말씀의 은혜가 되어 버리면 내가 주님으로 바뀝니다. 처음에는 주님으로 바뀌었습니까? 안 바뀌었습니까? 처음부터 바뀌어 있었어요. 처음부터 바뀌어 있었는데 말씀이 우리에게 체험화 되지 않기 때문에 예상이 남아 있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어느 날 어떤 사건을 통해서 나는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라는 것을 알 경우에는 어떻게 돼요? ‘아, 이런 사건도 주께서 일으켰구나!’ 안다 이 말이죠. 아는데 이것이 무슨 시간이 필요합니까? 왜냐하면 이러다가 돌아서면 이 위에 뭐가 차지합니까? 또 ‘나는 지난번에 말씀이 체험화 되었어, 얼마나 좋은지 몰라’ 또 말씀 들어가는 거예요.

 

사건이 일어나니까 또 주님이 바뀌지요. 이것은 성숙의 문제가 아니고 그 때 그 때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서 돌출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예를 듭니다. 이 예를 듣고 이러한 헷갈림에서 영원히 벗어나길 바랍니다. 여기 바다입니다. 바다에서 파도가 칩니다. 여기 이 지점, 이 지점의 파도가 솟구쳐 있습니까? 아니죠. 파도 쳤다가 다시 파도가 내려가죠. 내려가서 옆에 파도가 치지요. 그런데 여기 있는 물 분자 이동을 합니까?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지요. 올라갔을 때만 바다고 내려가면 흙이 됩니까? 아니지요. 올라가면 파도가 되고 내려오면 그냥 바닷물이 되지요. 성도가 매일 제자리에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맥도날드 cf 아닙니까, 애가 그네 타면서 좋았다가 슬펐다가 하는 cf, 안에 간판보고 먹고 싶어서 좋아 했다가 그네가 내려가니까 안보여서 슬퍼하는 거예요. 프라다 놀이 게임이라는 게 있어요. 까꿍이라는 놀이 게임이 있어요. ‘엄마 없~다.’ 하면 ‘엥~’ 하고 울고, ‘엄마 있~다’ 하면 좋아 하면서 까붑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까꿍’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했다가 짐승 되었다가 증거했다가 짐승 되었다가, 늘 제자리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만약에 내가 성장을 한다고 한다면 성장한 만큼 우리는 무엇을 원하느냐 하면 돈으로 보상받기를 원해요. ‘하나님, 은혜 알았는데, 돈 좀 주시고 내가 원하는 것을 주셔야죠.’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을 이용해서 평소에 숨어 있던 내가 뭐가 되고 싶다는 본인의 야망과 야심을 은밀하게 복음을 알았다는 핑계를 삼아 어떤 대가를 요구할 때, 이것은 하나의 마귀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무슨 신학이라고 합니까? 개혁주의 신학이라 하죠.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은 말씀에 관심이 없어요. 뭐에 있느냐 하면 이런 인간들이 모여서 내가 기대하는 이상적인 아담한 교회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그러한 노림수가 있어요. 항상 말씀을 운운하지만 관심사는 거기에는 없고 엉뚱한데 있어요. 뭐냐 하면 내가 목회하는 내 교회가 아주 이상적으로 말씀대로 완벽한 교회되기를 원하는 것, 그것뿐입니다. 개혁주의 신학 하는 사람 들어보면 훅 찔려 있어요. 어떻게 알았을까? 그래서 목사님 그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간단해요. 모든 글에 복음이 안 나와요. 설교를 하나 강의를 하나 복음이 안 나오고 이렇게 하시면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계속 나를 포기 하지 말라는 거예요. 모든 초점이 여러분 말씀대로 사시면 훌륭한 자아를 건질 수 있습니다. 모든 초점이 거기에 있어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헛되게 한 겁니다.

 

주님이 죽으라고 하니까 아무소리 안하면 죽은 사람 되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죽었다’ 이렇게 하고 있어요. ‘죽으라.’ ‘죽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죽은 게 아니죠. 마치 군에서 ‘취침!’하면 자면 되는데 ‘취침!, 취침!’ 이것은 자고 있지 않고 딴소리 하는 거예요. 여러분, 말 안하는 게 조용합니까? ‘조용히 해!’ 하는 게 조용한 것입니까? 어느 것이 조용한 것입니까? 가만히 있는 게 조용합니다. 여러분, 주님 앞에서 싱긋이 웃으면서 가만히 있읍시다.

 

무엇을 해야 합니까? 또 입을 벌립니다. 무엇을 지켜야 합니까? 죽은 인간이 하긴 무엇을 합니까! 우리는 주께서 올려주면 하나의 돌출된 파도가 된 이것을 가지고 주체라고 합니다. 나오면서 나는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으로 돌출 되면 한 이틀 동안 있으면 갑자기 자기가 주의 종이 된 것처럼 착각하잖아요. 그러면 주께서 밟아 버려요. 푹 들어가 버리죠. 그 다음에 다시 은혜 입어서 뭔가 깨어지면 다시 올라와요. ‘주의 은혜입니다.’ 하다가 ‘역시 너는 모르지 나는 주의 은혜야’ 이렇게 까불다가 쑥 들어가 버려요.

 

한 때, ‘뭐 복음 전한다.’ ‘참 겸손하다.’ ‘한국 교회에 이런 개혁교회 없네.’ ‘세상에 자기 헌신 하는 목사는 처음 봤다.’ 이런 목사들, 몇 년 안지나 폐인들 생기고 추종자 생기면 다시 완전히 교주 다 됩니다. 자기보다 똑바로 잘 하면 전부다 잘라내고 힘이 되는 거예요. 한국 개혁주의 신학회라는 것을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 김영환 그 사람이 만들었어요. 한국 개혁해야 한다고……. 그런데 지금 완전히 오야 봉이 되었잖아요. 조폭 되었잖아요. 보세요. 마찬가지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죽 떨어져 나가니까 얼마나 다행스럽습니까! 이제는 푹 꺼질 차례입니다. 푹 기어 들어가서 오목사님 톡 튀어나와야 하는데, 오목사님 예배드리니까 탁 받쳐 줘야 톡 튀어나오는데……. 우리 한윤범 목사님도 튀어나오시고 지난주에 김영환 목사님 또 튀어나오고…….

 

항상 튀어 나올 때는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그냥이 아니고 기쁨으로 이론이 아니고 지식이 아니고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니, 너무 좋다.’ 할 경우 주의 증인이 하지 말라고 해도 막 나옵니다. 내 것이 없기 때문에 나의 생활고, 나를 누가 비난 한다는 것, 누가 나를 우습게 본다는 것, 나의 존재감, 이런 것도 나에게는 신경 쓸 문제도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중요하지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냐 하는 것은 성경에 안 나오고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빌 3: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참, 말 어려운데요. 우리가 어디쯤 되었던지 상관없이 그것도 주님의 화물객차위에 얹혀 있는 거예요. 내가 행할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이만큼 행해 왔던 거예요. 항상 여러분 밑바닥을 보세요. 주님이 바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것까지 해서 우리로 하여금 주의 증인이 되게 하신 겁니다. 그런데 밑바닥이 없어지면 갑자기 우리는 허전함을 느끼면서 나라도 나를 괜찮은 인간으로 만들어야 될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천국 가는 화물차위에 우리가 허수아비로 서 있어도 그 허수아비는 천당 가는 허수아비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럴싸하다 그 밑바닥이 지옥 간다면 아무리 훌륭한 목사라도 그 사람은 지금 지옥 가고 있는 거예요.

 

지옥 가는 사람의 특징은 밑바닥에 뭐가 없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이 없어요. 십자가라는 지식은 있는데 그 십자가가 자기를 안 죽여요. 그게 문제입니다. 그 밑에 있는 십자가가 늘 우리를 죽이면 다행인데 죽이면 우리는 주의 것이 되는데 나를 안 죽이면 오히려 주님이 나에게 죽어요. 주님이 나에게 죽어서 주님이 나에게서 없어져요. 사라져요. 우리교회 같은 경우를 보면 교회, 한번 나오다가 두 번 안 나오다 그 다음부터 안 나와요.

 

그러면 성경을 봤느냐, 성경은 보지도 않아요. 인터넷 듣지요. 처음에는 한번 듣다 두 번 듣다 나중에는 듣지도 않아요. 처음에는 정석으로 들어요. 두 번 째 들을 때는 딴 짓하면서 들어요. 세 번째는 나중에 들어요. 3주째 밀었다가 들어요. 자꾸 말씀과 점점 멀어져 갑니다. 멀어져 갈 때 그 빈자리가 무엇인가 하면, ‘이제부터 내 힘으로 살지!’ ‘주님 믿었어도 별 효과 없는데, 내 힘으로 사는 게 제일 편하다. 나 편한대로 살래.’ 자기 힘으로 사는 겁니다. ‘주여, 내 몸은 주의 것입니다.’ 할 때는 자기가 ~~이 되고 싶다는 기대가 왕창 다 무너져 내렸을 때 우리는 십자가가 등장하여 우리의 길을 가로 막는 겁니다. ‘그 길이 아니야!, 그 길이 아니야!’ 우리는 가로막는 십자가를 돌파할 능력이 고맙게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다시 우리 밑에 있는 천국 가는 화물차를 다시 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까지 왔던지 간에 주님께서 인도하신 그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8절 봅시다.

빌 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사도바울이 웁니다. 지금까지 앞에서 이야기한 것이 성화 이야기입니까, 십자가 바라보는 이야기 입니까? 어느 쪽 이야기 입니까? 십자가 바라보는 이야기예요. 모든 사도바울의 편지는 십자가 바라보는 이야기예요. 십자가 믿는 것은 이제 됐고, 그다음에 인간되어라 그 말이 아닙니다. 사람이 십자가를 이용해서 내가 괜찮은 인간이 되면 그것은 십자가 원수 입니까? 나의 원수 입니까? 나의 원수가 돼요. ‘내가 십자가 매는 일에 얼마나 공들였는데 이것을 반대해! 그렇다면 너는 나의 원수다.’ 우리는 나의 원수라는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의 싸울 적은 나의 원수가 아니고 예수님의 원수, 십자가 예수님의 공로의 원수 곧, 십자가의 원수만이 진정 우리의 원수로 보이려면 우리가 어디가 붙어 있어야 합니까? 독자적으로 있으면 안 되고 우리는 십자가에 딱 들러붙어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함께 십자가의 원수를 성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우리부터 먼저 십자가의 원수로서 체험되어야 합니다. ‘주여, 십자가의 원수는 접니다.’ 라고 체험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우리는 우리 안에서 주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 때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원수라는 말은 현재 영적인 전쟁을 하고 있다. 영적 전쟁이 너무 어려운 말이죠. 그러면 쉬운 말로 하겠습니다. 현실 제대로 파악하기, 사건이 일어나면 사건 덩어리가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십니다. 말씀을 주게 되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육으로 해석하는 것과 영으로 해석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서5장에서 나는 예수님을 그동안 육으로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을 영으로 안다는 겁니다. 그러면 육으로 알았을 때의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었는가? 목수의 아들이었고, 키가 몇이었고, 몸무게가 얼마였고......., 그렇고 그런 거예요. 우리하고 똑같은 인간입니다. 그러면 영으로 안다는 게 뭘까요? 바로 육으로 아는 것 때문에 육이라는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 그것 때문에 돌아가신 하나님, 이것이 영으로 아는 것이죠. 육으로 알 때는 반드시 육으로 아는 것이 뭐라는 것이라고 겸하여 알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영을 아는 사람이 육을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돼요. 육을 아는 사람은 영을 모르지만 영을 아는 사람은 육도 알고 영도 알고 양쪽 다를 아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을 볼 때에 육으로 보게 되면 국어 시간이 됩니다. 국어시간이 뭐하는 시간인가하면 문법 시간이거든요. 국어, 영어, 수학, 사회....... 이런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다 누구 잘 되라고 하는 거예요? 나 잘돼라 하는 거예요. 내가 영어 배워서 옆 사람이 통역하는 것은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내가 영어 배워놓고 벙어리 되고 이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알아버리면 우리는 죽은 자가 됩니다. 자꾸 우리가 십자가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살아도 산자가 아니고 죽은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죽은 자를 매일같이 주께서 영적으로 우리를 살려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동행이죠. 그래서 말씀이 들어오면 현실을 육적으로 생각합니다. 육적을 현실로 생각하면 여기에 바로 ‘힘, 생존의 힘’ 육적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 제가 아이들과 남편과 함께 이 땅에서 사는데 하나님께 기도 할 테니 어떤 응답으로 힘을 보태주시겠습니까?’ 생존의 힘, 항상 목적은 생존의 힘이에요. ‘제가 예수님이 저를 만드시고 구원하신 분으로 증거하겠습니다.’ 이것이 아니고 ‘나’ 마지막은 ‘나’에요. 예수님은 어떻고 어떤 분이고 십자가 어떻게 지고……. 만날 이야기해도 그 마지막에 그 미로의 마지막에는 뭐냐? ‘그러니까 제발 나를 좀 살려주세요.’ 이렇게 됩니다. 살려달라는 말은 ‘저는 죽어서는 안 되는 인간입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면 주님이 ‘어디에 근거해서 그런 소리를 하지?’ ‘저, 선악을 알잖아요.’ 그러면 주님께서 ‘선악을 알기 때문에 나는 너를 죽이고 싶다.’ 이렇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아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내가 너를 죽여줄게.’ 그래서 성도가 주님께 고마워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에요. 내가 나를 죽일 수 없는 나를 주께서 날마다 죽여주신다는 것에 고마운 거예요.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날마다 내가 죽어야 마땅한데 내 힘으로는 나를 죽일 수 없어요. 그래서 내가 안 되는 죽임을 주께서 날마다 우리 육을 죽게 해서 ‘V', 내 껍데기 싹 벗겨보니까 내 안에 파충류가 있는 것처럼 내 안에 그리스도가 등장하는 주님 안에 들어 있는 내가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우치게 하시는 그런 현실만 눈에 보이는 모든 현실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202동에 산다. 그런데 201동이 이사 왔다. 절에 열심이다. 하는 일마다 만사형통이다. 그래서 전도할까 싶어서 말을 꺼내는데 불교신자 하는 말이 ‘나는 교회 안가도 이렇게 부자 되었는데 뭘 더 바래. 나는 착해서 복 받았어.’ 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아하, 저게 육이구나.’ 저게 육인데 평소에 나도 예수 믿으면서 얼마나 육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고……. 주께서 옆집에 배치해 놓아서 나로 하여금 육이 무엇이고 영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도록 그런 일들만 계속해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죠. 네가 육을 위해 심는 자는 썩어진 것을 거두고, 영을 위해서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언제 이 말씀 들은 적 있지요? 우리 목사님 분명히 이야기 했을 거예요. 하지만 옆집에 잘된 불교신자가 이사 오므로 말미암아 잊어버렸던 갈라디아서 6장 8절 말씀, 너는 백날 해도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해서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두는 대상자가 됐다는 것, 다시 한 번 말씀이 새롭게 떠오르게 하는 겁니다. 제가 말을 안 해도 여러분 아시죠. 인간의 모든 육체는 들의 꽃 같아서 다 죽으면 없어지지만 말씀은 영원합니다.

 

우리 몸은 육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그 육조차도 말씀이 나로 하여금 아무개라는 몇 년도에 태어나서 몇 년도에 죽게 하는 그런 신체를 가지도록 누가 만들었다? 말씀이 그렇게 잠깐 만들어서 잠깐 뭉개 버린 겁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은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면 우리는 하늘의 형상, 예수님처럼 영광스런 몸으로 다시 만들어내기 위해서 뭉개 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말씀이 체험화 될 때는 느껴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격이 무엇인가? 율법을 찢어버려요. 율법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은 우리의 율법을 찢어버렸어요. 더 이상 율법을 인정하지 말라. 네 양심에 연연하지 마라. 정말 양심은 신앙의 양심밖에 없는데 율법이 없는 법적인 양심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그 마음씨가 너를 구원한다는 겁니다.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이 진정한 양심이죠. ‘신앙의 양심’

 

그래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거예요. 다시 하겠습니다. 영적전쟁이 뭐라고요? 육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냐, 아니면 말씀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냐의 마지막 최후의 전쟁에 우리가 참전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 하는 말이 우리는 공중권세 잡은 자와 싸우는데 우리의 무기는 칼이나 활이 아니고 우리의 모든 완전 무장은 말씀으로 복음으로 흉배도 붙이고 머리에 투구도 쓰고 이게 뭐냐 하면 십자가 말씀으로만 우리를 무장해서 하나님께서 군사로서 이 땅에 영적세계 보내 준 겁니다.

 

십자가 원수라 하는 것이 보이는데 여기서 우리가 하나 주의 할 것이 있어요. 자 제가 만약에 영적 군사로서 복음 들고 나갔다, 나가면 승리합니까? 마귀가 꼬꾸라져서 ‘잘못했습니다.’ 하고 회개 하고 돌아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이 권세를 주니까 마귀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병이 낫고 귀신이 떠나고 아주 신이 났어요. 신이 났을 때 무엇을 잊어버렸느냐 하면 바로 자기 자신이 무엇을 기뻐해야 되는지를 잊어버렸어요. 마귀가 떠나는 것은 우리보고 떠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안에 그리스도 보고 떠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는데 ‘내가 있다.’ 하니까 그 순간 내가 주님을 떠나 버리니까 그것을 촉구하기 위해서 마귀가 떨어지는 것을 좋아하지 말고 네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을 더 기뻐하라는 거예요.

 

그것을 말을 바꿔봅시다. 영적 전쟁을 어떻게 하라고요? 십자가 원수 어떻게 대적하라고요?

실적을 생각하지 말고 ‘주여, 제 이름이 어디 있지요?’ 라고 입을 주님이 조치한 나의 미래까지 조치한 주님의 약속을 즐거워 할 때 나머지 십자가의 적들은 저절로 우리의 실적 따질 필요 없이 우리에게 이미 시체로서 널리게 되어 있습니다. ‘죽여 야지.’ 하고 찌른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고 내가 십자가 가지고 나를 찔러야지요. 나를 찌를 때에 ‘죽으면 죽으리라’ 죽으면 죽으리라고 에스더가 누구를 죽입니까? 본인을 죽일 때에 패배는 하만이란 핍박자가 패배하잖아요. 아무튼 방법도 희한해요.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때, 그것을 자기 전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이었습니다. 그것처럼 십자가 원수와의 싸움 전쟁을 할 때, 우리가 정말 즐거워하는 것은 우리 앞에 얼마나 굴복했냐 하는 그것이 할 일이 아니라 나 같은 인간도 생명책에 기록 되었으니까 ‘아, 정말 기쁘다!’ 그러면 우리 미래가 완료된 겁니까? ‘아, 정말 기쁩니다.’ 옛날 교회 같으면 세례 받고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안다면 소를 잡았습니다. 요새 소한마리 얼마 합니까? 소 잡아 먹어봐야 나중에 배탈 나니까 현찰로 내세요. 소 잡는다 생각하지 마시고 최대 한 550만원, 또 송아지 하지 마시고 소, 그것도 수입산 말고 한우로(ㅎㅎ) 옛날에는 소를 잡았습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기쁨을 소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를 잡고 대접하는 것은 좋은데 그때부터 또 저 사람은 소를 잡을 정도로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팬들이 생기니까 갑자기 주님 생명책을 보고 즐거워 할 사람들이 팬들 관리한다고 즐거워하고 있어요.

 

파도가 올라갔다가 다시 싹 빠진 겁니다. 성화 아니죠.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또 내려갔다가 올라오고……. 주께서 그렇게 울렁울렁 자꾸 올라갔다 내려갔다 만날 이런 식으로 은혜 받았다가 좌절하다가 은혜 받았다가 낙심하다가 계속 이런 겁니다. 성화 되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조용하다고 영적전쟁 안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분주하게 복음 전한다고 영적전쟁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영적 전쟁은 외부에서가 아니라 내 내부에서 얼마나 생명책 이름이 기록되는 것이 얼마나 귀하냐 하는 본인 싸움이에요. 한 명도 전도 안 해도 혼자 좋아서 울면서 ‘주여 감사합니다.’ 할 때도 있고, 수천 명 회개한다 해도 그런 것 귀찮아 할 때도 있고, 이것은 목회 오래 많이 한다고 목회 사람 많다고 은혜 받는 것 아닙니다.

 

철저하게 본인 싸움입니다. 여러분 애들 공부 잘 안한다고 마귀 같다고 하지 마세요. 본인이 마귀인데…….(ㅎㅎ) 배타고 물에 빠지던지 서해안에 빠지던지 얻어터지던지 해야 돼요. 한번 물속에 빠져 들어가 봐야 내가 얼마나 교만한지 압니다.

 

그런데 십자가 원수 이야기를 하면서 사도바울이 웁니다. 십자가 원수를 보고 있다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파 웁니다. 이런 사도바울을 어떻게 하라? 본받아라.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사도바울을 본받는다는 것은 사도바울의 관심사가 내가 죄인의 괴수임에도 불구하고 생명책에 기록되어 이렇게 기쁜데 사람들은 왜 아직도 독자적으로 자기가 자기를 만들려고 하느냐! 주님이 다 만들어 줬다는데…….우리의 그림자가 필요 없다는 데……. 이제는 율법에 대해서 묻지도 않겠다는데……. 법이 사라진 곳으로 인도하고 있는데……. 왜 자꾸 법 따져서 잘했지요? 못했지요? 못했지요? 잘했지요? 만날 자기 잘 했는가, 나는 훌륭해 나는 죽고 싶어 나는 무가치해, 나는 죽어도 싸……. 왜 이렇게 사느냐 이 말이죠. 하지 말고……. 정말 우리가 내 감정, 내 기분에 휩싸이지 말고 십자가라는 사건 이미 우리의 감정과 관계없이 잊혀 있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운명은 이미 완전보장 되었다. 우리는 십자가라는 천국 가는 화물차에 실린 채로 가고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나를 제발 좀 본받는 자가 되어서 십자가 원수 나타나거든 가슴 아파하면서 울정도가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빌 3: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빌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 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19절에 ‘저희의 신은 배요’ 배(body:belly), 똥배요. 저의 신은 똥배요. 저의 하나님은 똥배요. 무슨 뜻입니까? 생존의 힘이죠. 저들은 살기위해서 사는 거예요. 저들의 생존이 하나님이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그것은 저희들이 영광스럽다 하는 것은 그것은 다 부끄러운 일이요, 땅의 일을 생각한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에 있는지라. 제가 아까 했죠. 우리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을 가지고 기뻐하라. 실적을 생각하지 말고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기뻐하자.

 

거기로서는 새로운 인간이 나와요. 새로운 인간이 뭐냐 하면 21절에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자기만 영광스럽지 않고, 십자가를 믿는 자에게 그렇게 영광스럽게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현실이 예수님 십자가 중심으로 다 쏠렸고 그 현실을 우리의 눈을 뜨게 해서 ‘아, 현실이라는 것이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는구나!’를 아는 사람은 바로 그것이 하늘나라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 이미 들어온 사람이에요. 하늘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고, 생존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기쁨이고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즐거움이 바라기는 늘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바랍니다. 세상 것 때문에 즐거운 것이 아니라 확실한 진리 때문에 길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생명을 얻은 것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했다는 그 사실을 저희들에게 깨닫게 했기 때문에 늘 행복하고 늘 즐겁고, 늘 기쁜 그런 생활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 5. 3 녹취:김창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