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14,15강 / 빌 2:12~13 / 구원의 증거 vs 멸망의 증거” 본문
100312 빌 2:12 구원의 증거 vs 멸망의 증거
가짜 하나님을 믿는것을 매일 지적당하는 성도
(너희속에 착한일을 시작하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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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100312빌2장12절a 서울100312 빌2:12a “구원의 증거 vs 멸망의 증거”
빌립보서 2:12~13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지난 시간에 한 것을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였느냐면 예수님은 하나님 이였습니다. 라고 말해요.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그렇게 보고 싶은 하나님이 사람들이 원하는 식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 하나님이 계시고 여기 인간들이 사는데 하나님이 여기에 방문했습니다.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시면 사람들이 무엇을 봤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것 하고 직접 사람 속에 들어오는 하나님하고 이것이 같았으면 그들이 예전에 하던 식으로 잘 믿으면 돼요. 자기가 생각했던 그 하나님하고 직접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하고 모든 것이 예측한 대로 딱 맞아 라고 예측한대로 오셨어 라고 한다면 우리사람들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만나 보지 못한 손님이 찾아온다면 그분이 자장면을 좋아하는 줄 모르고 자기는 무엇을 준비했냐하면 개고기를 준비 했는데 손님이 와서 “저 개고기 못 먹습니다.” 할 때 그 몰래 잡았던 개고기를 식구들도 아무도 못 먹습니다. 결국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개고기를 좋아 하니까 오는 손님도 좋아하는 줄 알았단 말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하나님 하니까 그 하나님은 내가 좋아 하는 하나님일 거야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하나님께서 오셔서 뭐라 했냐 하면 ‘너희들이 생각했던 하나님은 다 잘못된 하나님이다 원래 하나님이 아니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하나님이 아니였다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어렵습니다. “너희들이 믿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야 그것은 가짜야 엉터리야 그건 마귀야” 라고 지적 하시는 분을 만났으면 여러분들이 만났으면 여러분은 그것을 제대로 하나님을 만난 겁니다.
여러분들이 진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한번 알아서는 안 되고 두 번 알아야 되고 두 번 중에서 처음에 내가 알던 하나님이 나중에 새롭게 알게 된 하나님이 꾸중을 듣기를 “너는 하나님도 아니야 너는 가짜야 네가 지어낸 하나님이야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아니야 그것은 마귀야” 라고 여러분들이 지적을 받았다면 여러분들이 진짜 하나님을 만나 본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면 계속해서 지적 받으면 된 겁니다. “하나님 이것도 하나님 뜻입니까?” “그것도 아니거든” “그렇구나!” “그럼 이것도 하나님 뜻 인줄 알고 있는데....... 그것도 아니라고요 예 감사합니다.”
왜 모든 일에 있어서 잘못된 하나님이라고 지적을 당하고 또 당하고 또 당할 때 남는 게 뭘까요?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는 하나님의 뜻은 아무도 몰랐어요. 이것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아무도 몰랐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하나님을 가득알고 있어요. 많이 안다. 나는 성경 다 떼었다. 성경 다 외운다. 나는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안다. 하나님에 대해서 가득 알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 뜻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이야기하기를 이렇게 가득 알고 있는 성경내용, 성경 해석, 하나님 해석이 쭉 있는데 진짜 하나님이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그것은 바로 다 죄다. 그것은 진짜하나님이 아니야 그것은 악마야 그것은 거짓말이야 라고 지적을 하고 나물해 준다면 여러분들은 진짜하나님을 만나게 된다고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가짜 하나님 일만 가득 알고 있다 이 말이죠. 진짜 하나님이 오셔서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너 때문에 내가 죽어야 했었어, 너 때문에 내가 죽는다.” 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피를 흘리면서 너는 가짜 신을 믿었고 십자가 피를 흘리신 분이 진짜 이 땅에 오신 진짜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안 오신 게 아니고 왔어요. 왔는데 사람들은 진짜 하나님을 엉뚱한 데서 찾고 있고 진짜 오신 하나님을 안 믿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제부터 우리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하면 두 가지 일을 해야 되죠. 이 모든 성경 말씀이 나는 죄인입니다. 너는 죄인이야 하는 식으로 모든 성경말씀이 십자가를 통하기 때문에 너는 죄인이야 라는 식으로 접근해 나가는 한 가지 하고 두 번째는 도대체 내가 십자가를 보지 않고 성경을 보면 나오는 것, 이것이 뭘까? 내가 십자가를 안보고 지적 받지 않고 그냥 성경 보면서 볼 때마다 계속해서 내속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뭘까? 이 두 가지를 우리에게 주는 거예요.
주게 되면 빌립보서 1장 28절 봅시다. 빌 1:28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빙거는 쉬운 말로 증거입니다. 십자가가 저희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우리들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그러니까 십자가를 통해서 ‘나는 진짜 하나님을 만났는데 지금 까지 생각 했던 것은 다 엉터리래’ 라고 믿어지면 그것은 구원 받은 사람이고 ‘싫어, 싫어 나는 옛날식으로 믿을 거야. 십자가 같은 것 다 저리가 나는 내 식대로 믿을거야’ 라고 나온다면 그 사람은 멸망 받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를 가지고 구원의 증거물로 삼기위해서 우리를 사용했고 저 세상 사람들은 멸망 받아야 될 사람으로 남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 구원 받는 사람은 두 가지 다를 알고 있는데 십자가를 보지 않고 성경을 볼 때는 나에게서 뭐가 나오느냐를 끄집어 낼 때 마다 우리가 더욱더 구원받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정리 하면 내가 이런 성경을 보고 이런 오해들을 하고 있으니까 나는 구원받은 그것이 ‘맞는다고 할 때는 구원받은 사람이고 나는 성경을 볼 때 마다 이렇게 생각해 하고 그것을 옳다고 우기면 그것은 바로 저주받은 지옥 갈 사람이 되는 겁니다. 성경을 볼 때 십자가가 안 나오고 다른 게 나오면 그 사람은 지옥 갈 사람이고 성경을 보면서 십자가가 나오면 구원받은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왜? 그 사람은 구원받은 증거가 되기 때문에, 구원받은 증거물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콩하고 팥하고 가눌 때 콩, 팥 섞어 놓았습니다. 섞어놓았는데 이것은 콩, 이것은 팥, 콩, 팥, 콩콩콩, 팥팥팥 나누잖아요. 그렇게 나눌 때 십자가 아는 사람은 콩이 되고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은 팥이라고 할 때, 그렇게 구분하는 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일이 아닙니까?” “아니에요.” “그럼 봉사하는 거예요?” “그것도 아니에요.” “그럼 기도하는 거예요?” “그것도 아니에요.” “그럼 하나님 일이 뭐에요?”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알고 있던 하나님은 엉터리라고 하나님 앞에 지적 받는 일,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겁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 일 하기 쉽지요?
2장 13절 봅시다.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지금 십자가 아는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 제 고집대로 하다가 만날 하나님에게 얻어맞습니다. 나를 때리시는 그분이 지금 내안에서 행하고 있습니다.” 라고 자기 말고 자기 안에서 뭔가 일을 행하고 있는 분을 느끼는 거예요.
만약에 제가 혼자 있지 않고 제안에 주님이 함께 계시다면 자, 커피를 마십니다. 마시려고 하는 데 옆에서 “똑바로 마셔 흘리지 말고” “알겠습니다.” “빨리 마셔” “알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여러분들이 미쳤다 할 거예요. 분명히 이 앞에 목사님밖에 없는 데 누가 있다고 혼자서 “알겠습니다.” 이렇게 하느냐 말이죠. 예수 믿는 사람은 남들 보기에는 안 보이는 어떤 분이 계세서 자꾸 무엇인가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지시를 내리는 어떤 분이 함께 있는 거예요. 귀신이 함께 있는 것 같아요. 자꾸 우리 안에서 일을 시키는 거예요. 자꾸 나무라시는 겁니다. 잘 했다는 게 없어요. 그런데 안 믿는 사람은 “하나님 제가 컵을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놓습니다. 잘 했지요?” “예, 잘 했다고요, 알겠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에 지적을 안 받습니다. 지적을 안 받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제부터 나는 무엇을 해도 하나님께 사랑받는 그런 사람이다.” 라고 나서는 겁니다. 이게 바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내려왔습니다. 내려온 이유가 무엇인가 구원의 증거와 그리고 멸망의 증거를 결정짓기 위해서 내려 온 겁니다. 내려왔을 때 이미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섬기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무엇인가하면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은 엉터리라고 지적 하면서 죽으셨거든요. 그래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지적을 받는 사람은 구원의 증거를 가진 사람이고, 십자가를 가진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는 내 식대로 하나님 믿을 거야, 간섭하지 마세요.” 하는 것은 멸망의 증거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속 행하시면 우리는 한번이 아니고 두 번 아니고 계속 해서 구원 받은 증거물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구원받은 증거물이 되었을 때 우리는 남들에게 “나, 착하지요? 나, 훌륭하죠?” 이렇게 해서는 구원받은 증거물이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왜냐 하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착한 일이 뭐에요? 하면 우리 속에 착한 것이 뭐예요? 주님께서 오셔서 착한 일이 뭡니까? 오직 십자가에 죽으셨잖아요. 하나님이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는 데 그 착한 일이 뭡니까? 십자가에서 죽은 일입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구원의 증거와 멸망의 증거를 구분하잖아요. 그 구분하는 증거가 행함이 아니고 오직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 있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인데 그것이 하나님이 하신 착한 일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착한 일은 뭡니까? 우리 안에서 행하신 착한 일은 뭐예요? 우리로 하여금 구원받은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착한 일이 된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나는 십자가 아니면 구원 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라고 날마다 고백하게 하는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안 되고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훌륭하고 착해 보이려고 하기 때문에 매사에 십자가로 몰아가시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십자가 지신 그 착한 일을 지속적으로 우리 안에서 유발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남들 앞에 내세울 때 구원받은 증거가 되는 겁니다. 제가 강의 시작하면서 거의 20분 가까이 계속해서 구원받은 증거, 멸망의 증거를 자꾸 이야기 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오늘 봤던 13절인데 13절을 사람들은 앞뒤 다 잘라 버리고 뭐라 하느냐 하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렇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뭐라 하느냐 하면 이렇게 생각해요. 하나님께서 교회 왔더니만 이제는 하나님이 내안에 성령을 주셔서 내 소원을 하나님 소원으로 바꾸어서 이제는 나만의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줄꼬 이렇게 생각해서 이제는 내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내 소원까지 들어 주시는 그런 하나님이다. 내 속에 내 소원 들어 주기위해서 하나님이 일을 시작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하나님이다. 그러니까 나는 구원받은 증거물이 된다. 라고 구원받은 증거를 자기 소원대로 성취된 것을 가지고 구원받은 증거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의 태반입니다.
이 본문을 보면서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백 명이면 다 그럴 거예요. 목사님 저에게 소원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소원이 생겼어요. 그 소원이 뭔가 봤더니 이게 내 소원이 아니고 하나님 소원이었어요. 빌립보서를 보는 중에 13절에 너희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 소원을 두고 일한 다고해서 이제 라도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선교 하는 것이 하나님 뜻인 것 같아요. 또는 내가 좋은 대학가는 것이 뜻인 것 같습니다. 내가 의사 되는 것이 뜻인 것 같습니다. 이 소원은 목사님 제가 욕심 낸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자기 희망 사항이기 때문에 저는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 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구원받은 것 맞지요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백이면 다 그렇게 생각하더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전에 평소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이런 식으로 생각해 왔던 겁니다. 이런 생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게 했다는 말입니다. 그 못 박았던 십자가가 멸망 받을 사람들과 진짜 천국 갈 사람들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인간도 쓸모없는 인간이 하나도 없어요. 지옥 갈 사람도 다 쓸모 있습니다. 멸망의 증거로 구원받은 사람도 쓸모 있어요. 구원받은 사람은 이래서 구원받는 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보여주는 증거로 그래서 자꾸 제가 증거라는 말을 쓰는 것은 사적 인 것, 개인적은 소망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하나님에게 통했다? 안 통했다? 전혀 그런 것이 안 통하니까 오늘부터 일찌감치 개인, 사적인 소원은 아예 없었던 것으로 해 주세요. ‘우리 아이, 나중에 잘 크게 해 하옵소서’ 하는 이런 사적인 소원은 아예 악한 것으로 여러분 마음속에 접어두세요.
만약에 여러분 소원이 나온다면 이 소원은 반드시 무엇과 결부되어 있느냐 하면 진짜 하나님과 결부되는 것이 아니고 가짜 하나님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매우 가난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 합니다. “하나님, 소원이 있습니다. 10억 원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응답하겠죠. 10억 원 언제 쯤 주면 되냐 그렇게 하겠습니까? 뭐라 하셨습니까? 사람의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네가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고 나오잖아요. 이렇게 나오게 되면 예수님 보고 ‘저리 가라 사탄아’ 이렇게 합니다. 내가 10억 얻어서 1억은 교회에 십일조 떼어주고 평소에 십일조 안하다가 목돈생기면 떼어주고 9억 가지고 마음대로 굴려서 부자 되려고 하는데 그것을 못하게 하니까 사탄아 저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라고 예수님을 넘어뜨린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꽈당 넘어지면 누가 죽어요? 예수님이 죽지요. 예수님은 너무나 약하게 오셔서 밀면 할리우드 액션처럼 살짝 밀어도 으악 소리 치고 죽어버리는 거예요. 죽었을 때 ‘아, 나는 사탄을 물리쳤다’ 한다고 내가 10억 달라고 기도 하는데 기도 방해 하는 사탄을 물리쳤다 하면 그것은 멸망 받을 사람이고 내 이런 소원을 나는 순수한 소원이라고 여겼는데 나중에 성경 말씀 보니까 먹는 것, 입는 것 족한 줄 알라 그것이 맞는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바로 그 예수님을 죽인장본인이라고 여긴다면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 지적을 받은 진짜 하나님이 찾아온 구원받은 증거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은 세상에 나와서 복음을 전할 때 “김 집사 나도 옛날에 그렇게 기도 했는데 그것이 바로 죄였어” 라고 고백을 할 것 아니냐 이 말입니다. 그러면 김 집사가 또 떠밀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할리우드 액션 이라 또 떠밀려진다고 그러면 그 사람은 바로 멸망의 증거가 되고 그 떠밀린 우리는 구원받은 증거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 속에 행하신 착한 일, 선한일입니다. 하나님의 일관된 일이 되는 겁니다.
2장 15절에 보면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라고 되어 있는데 어린이들이 있어 쉽게 설명합니다.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있는데, 1번 자기 생각부터 할까요? 2번 자기 밖에 있는 세상을 생각할까요? 어느 것이 우선입니까? 이빨이 아프면 세상생각 먼저 합니까? 본인 생각 먼저 합니까? 본인 생각 먼저 하지요.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얘기 하냐 하면 1번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2번 밖에 세상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세상이 무슨 세상이냐 하면 성경대로 하면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반항하는 세대 , 누구에게 반항할까요? 진짜 하나님께 반항하지요. 2번을 색을 거스리는 것이 나쁜 거니까 붉은 색으로 바꾸겠어요.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볼 때 붉은 색 속에 너희들도 같이 붉은 거예요. 죄 많은 세계 속에, 비뚤어진 세계 속에서 비뚤어진 인간이 나온 겁니다. 하나님 이렇게 봅니다. 지금 어린 아이들도 참석하고 있습니다. 그 어린 아이들도 이 밖에 붉은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붉은 것입니다. 이 세대라는 것이 사람의 모임인데 사람들이 모였더니만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하나님께 반항하는 그런 세상이 된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자녀들도 둘만 모이고 셋만 모이면 결국 뭐가 됩니까? 거그러지고 하나님께 반항하는 그런 세대라 이 말이죠. 하나님의 관심은 거기에 있어요.
우리는 이빨 아프면 이빨에 관심 있고 내가 발이 아프면 발에 관심이 있고 내가 공부 좀 잘하면 그거 자랑하고 항상 관심사가 1번, 나에게 관심 있는 반면에 하나님은 무엇을 보냐 하면 세상이 더러운 것처럼 너도 그 속에 속하니까 너도 더럽다는 식으로 하나님은 그렇게 보시는 겁니다.
김길태라는 사람을 그 부모가 어디다가 버렸습니까? 교회 앞에 버렸다고 합니다. 교회 성령발 받으라 이 말입니다. 교회 앞에 버리지 말고 교회 안에 버렸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괜찮았을까요? 교회 앞에 놓지 말고 목사님 댁에 맡겨 놨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괜찮았을까요? 자기 자식을 못 키우고 교회 앞에 밀어놨다는 것은 관심이 1번에 있다는 겁니까? 2번에 있다는 겁니까? 자기는 나쁜 부모지만 교회 앞이니까 교회라는 것은 괜찮을 것이라고 버리는 거예요. 사람들은 자도가 못 키우니까 거기다 버리면 교회 앞이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하겠지 하지만 하나님은 갖다 버리는 너 자신도 이미 세상에 물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을 바꾸시겠습니까? 세상을 바꾸시겠습니까? 성경에서는 세상을 바꿔 놓고 거기에 자기백성을 끄집어내서 구원하는 겁니다. 세상을 바꾸어서 우리는 죄인이었는데 밖에 있는 예수님 때문에 의인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만드는 겁니다. 세상에서는 자기 편하면 최고지 남이야 죽던지 말든지 세상에서는 1번입니다. 하나님은 반대로 2번 고쳐놓고 2번안에 우리를 집어넣어서 2번의 혜택을 받는 새로운 세계에 혜택을 받는 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보고 “너 어떻게 구원됐어?” 하면 “잘 믿어서 구원받았어." 이러지 말고 우리는 주님 안에서 주님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감싸줘서 주님이 우리의 양부모가 돼서 주님의 환경 때문에 주님이 지신 십자가 환경 때문에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구원되었습니다. 하는 말을 입에서 나오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한 겁니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왜냐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누구 생각합니까? 1번 자기 밖에 생각하지 않는 인간을 뭐로 바꾼다? 2번 때문에 내가 살았습니다. 하고 자기는 1번부터 출발하지 않고 2번의 은혜, 2번의 덕택, 2번의 자비심으로 2번의 사랑으로 그분의 덕택으로 구원받았습니다. 하는 사람으로 바뀌려면 이것이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완전히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지 어떤 식으로 가능한지 제가 이야기하겠습니다. 1번, 사람은 자기 밖에 모른다. 2번은 나 몰라라 한다 하지만 1번 인간들이 모여서 이 세상이 하나님께 반항하는 반발하는 더러운 세상이 2번이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2번을 바꿈으로서 새로운 2번이 주어지면서 거기에 속해서 더러운 우리가 내 중심이 아니고 우리주님 덕분에 구원받았습니다. 하는 예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사람으로 바뀌어 지는 겁니다. 이것을 어떻게 바꾸는가? 1번을 바꾸는 것이 아니고 2번을 바꿔요. 이 악한 세대를 새로운 세대로 바꾸는 겁니다.
그 과정을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 혼자 왔습니까? 뒤에 다른 분이 따라 왔습니까? 성경에 보면 다른 분이 따라 왔죠. 그분이 누구죠? 성령이죠.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하늘이 열리면서 하늘에서 뭐가 내려왔죠? 성령이 내려왔죠. 성령 없이 예수님 잘해 봐라 힘내라! 힘! 하듯이 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늘이 갈라지면서 그 틈 사이에서 성령이 임해서 그때부터 예수님은 비록 홀로 있는 것 같지만 성령이 함께 있어요.
제가 고등학교 때 루이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했어요. 루이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하기 전에 미국에서 어떤 실험을 했냐 하면 우주공간에서 우주선 밖으로 튀어나오는 실험을 했어요. 튀어나올 때 아이의 탯줄 비슷한 선, 끈이 있어 가지고 우주비행사가 우주를 나는데 뒤에 끈이 있어서 떨어지겠어요? 안 떨어지겠어요? 안 떨어지죠. 이 세상은 예수님께 반항하는 세대에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 등 뒤에 성령님께서 함께 딸려 왔어요. 딸려 와서 다음에 무슨 일을 하셨느냐 하면 1번, 사람들을 도와주셨다. 2번, 사람들을 심판하셨다. 몇 번입니까? 성령께서 오셔서 사람들을 도와 주셨다. 사람들을 심판하셨다. 몇 번입니까? 심판 하십니다. 여러분 심판은 언제 합니까? 심판은 심판주가 뜨면 심판은 시작된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올 때, 왜 옵니까? 왜 오셨습니까? 하면 교회 복 받으러 왔습니다. 라고 합니다. 거짓말입니다. 진짜 성경대로 하면 우리는 심판받기위해서 교회에 옵니다.
“주여 저 어때요?” “저 어떤 사람입니까?” “저 어떤 존재입니까?”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심판의 기준을 제시해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 앞에 다 불러내서 예수님에게 심판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심판에 통과될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왜냐 하면 모든 세대가 하나님께 반항하는 세대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해요. 심판하실 때 심판의 기준이 워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율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산상설교하실 때, 산상설교의 주제가 뭐냐 하면 바리새인들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사람을 죽여라 살려라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명하노니 형제에게 욕하면 너희들은 곧 살인자가 된다. 이렇게 했죠. 사람이 오른손으로 죄짓거든 찍어버리라 나머지 가지고 지옥 불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낫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그런 것을 염려하는 것은 지옥 갈 사람들만 하는 짓이라 너희들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마라 염려하지 말고 오직 그 나라 그 의를 구하라 심판입니다. 남에게 비판하지 말고 네 속에 들보를 빼고 난 뒤에 남의 티를 봐라 심판이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대접받은 대로 남에게 대접하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씌어 져 있잖아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너희는 넓은 길로 가지 마라. 넓은 길로 가면 멸망으로 통한다. 하지만 너희들은 좁은 길로 가야 된다. 좁은 길의 특징은 찾는 사람들 이적을 것이다. 하지만 그 끝은 영생이 기다기고 있다 이것은 당시에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의 향한 심판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이 심판을 통과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그 심판을 예, 제가 지키겠습니다. 라고 아무도 할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그 세대가 하나님께 반항하는 세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반항하는 세대가 하나님을 반항한다는 말을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할 때 세상 사람들은 벌겋게 달려들어 예수님께 공격을 합니다. ‘죽여라.’ 강도를 풀어줄까? 예수를 풀어줄까? 하니까 사람들은 누구를 풀어주라 했습니까? 강도를 풀어주라 하죠. 왜? 강도를 풀어주어야 자기가 착하기 때문에 김길태를 풀어줄까? 예수를 풀어줄까? 할 때 예수님은 너무 착하다고 우기니까 죽여 버리고 김길태는 살려줘도 우리가 김길태보다 더 착해 지니까 김길태는 나보다 못난 인간이니까 살려둬야 자기가 착해 지고 자기 보다 더 훌륭한 예수님은 죽여 버려야 자기가 죄인이 안 되니까........ 결국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미 말씀을 주신 것 자체가 어떤 인간도 주님의 심판에서 합격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어떤 사람이 물었어요.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여 제가 어떻게 하면 제가 영생을 얻습니까?” 할 때 예수님께서 “네 모든 제산을 팔고 나를 따르라” 할 때 그 부자가 그냥 갔어요. 그렇게 하니까 제자들이 겁이 나서 예수님,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하니까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 하면 부자가 천국간줄 알라 했죠.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 못하면 부자가 천당 가기는 글렀다는 말입니다.
보통 문제가 아니잖아요. 한번 여러분 바늘 가지고 해 보시겠습니까? 머리가 안 들어가요. 통 아저씨도 안 들어가요. 이 말은 무엇이냐 하면 모든 사람은 천국 포기 하세요. 천국못갑니다. 이것을 제가 구원 불가능성이라 했는데 어떤 인간도 천국 못 갑니다. 천국을 가려면 낙타 데려오고 바늘구멍 가져와서 낙타가 바늘구멍을 낙타가 통과 하면 천당 보여 줄게 하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왜냐 하면 모든 인간은 부자가 되고 싶어 하기 때문에 부자가 안 되더라도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가지고 천국을 가요.......부자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런 천국은 없어요. 처음부터 하나님의 선악과를 따 먹었잖아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생명나무를 따먹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죠. 그러면 못가는 갑니다. 못가면 어떻게 하느냐 안가는 거예요. 안가면 됩니다. 안가면 어디가면 됩니까? 지옥가면 됩니다. 그런데 지옥에 가면 가기 싫어요. 왜냐? 불구덩이가 너무 뜨겁고 물 한 방울 없어서 애를 먹기 때문에 가기 싫어요.
제가 안산강의에서 그렇게 했죠. 사람이 제일 고역스러운 것이 죽는 것이 고통이 아니라 문제는 안 죽는다는 거예요. 죽어도 안 죽고 다시 호출 받는 다는 거예요. 매일 밟아도 안 죽어요. 계속 밟아도 안 죽으니까 문제된다는 거예요. 죽으면 다 잊어버리겠는데 안 죽으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한번 태어나면 두 번 다시 죽는 일이 없어요. 안 죽는 팔자가 더러운 팔자에요. 법정스님 죽었잖아요. 안 죽어요. 지옥에 호출당하고 있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왔는데 심판주를 왜 못 알아보냐 이 말입니다. 무소유하면 천당 간다고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정리합니다. 예수님이 심판할 때 아무도 천국 못 간다는 것을 네가 인정할 수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문제는 하나밖에 없죠. “네가 지옥 가는 것을 네가 아느냐?” 라고 묻는 물음입니다. 맞습니다. 없습니다. 저는 개입니다. 저는 지옥가도 마땅합니다. 라는 답변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 외에는 안돼요. “나는 교회 다녀서 천당하야 가야겠습니다.” 이런 사람들뿐이에요 정말 성령 받은 사람은 주여 처분대로 하시옵소서. 베드로가 이런 말을 했죠.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 같은 분은 저와 상대할 필요 없고 그냥 가세요. 그냥 저주받도록 그냥 내버려둬요 라고 베드로가 이야기했어요. 선악과 따먹은 사람이 생명나무 따먹지 못하는 것처럼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말씀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저주아래 있게 하신 거예요. 어떤 예외 없이 다 저주 아래, 저주 다 받는 사람 되게 하는 겁니다.
속이 다 시원해요 제가 어렸을 때 옛날에 제가 살던 옆집에서 아주 난폭한 아저씨가 살고 있었는데 그 아저씨가 얼마나 난폭한 지 밤에 들어오면 술을 잔뜩 먹고 와서 자기 부인이 정성껏 상을 차려주면 밥상을 발로차고 위를 확 헤쳐 버렸어요. 이 나쁜 여자 하면서 밥상을 다 헤쳐 버렸어요. 밥상에 있던 밥하고 반찬이 내 팽겨 쳐서 밥상이 깨끗하게 아무것도 없어요. 예수님이 술꾼입니다. 주여 충성했습니다. 주여 십일조 했습니다. 주님께서 술을 잡수지는 않았지만 성령에 취해서 다 휘저어요. 안에 자기의 자기 공로를 완전히 다 나갑니다.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구원 누가 받습니까?
구원을 누가 받느냐를 설명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고급 중국집, 허름한 중국집 말고, 자장면 3,500원 하는 데 말고 5천원 이상 하는 고급 중국집에 가면 둥글한 테이블인데 손으로 테이블을 치면 테이블이 돌아요. 만약에 테이블에 탕수육을 놓고 돌리면 돌아가면서 여러 사람이 그 탕수육을 먹을 수 있습니다. 나미의 노래에 빙글빙글 이란 노래가 있는데 빙글빙글 돌면 난 그저 바라보기만 하지요. 주님께서 생명나무입니다. 생명나무가 이 땅에 오실 때는 이 땅에서는 무엇을 따먹었어요?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에는 저주가 있죠. 여기는 하나의 빙글빙글 도는 중국집의 턴테이블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 주님께서 오시는 겁니다. 오시게 되면 여기에 하나님의 생명나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냐하면 창세전에 구원받기로 작정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의 씨앗을 가지고 여기에 뿌립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이란 사람이 뿌려 놓습니다. 노아도 있습니다. 다윗도, 예레미야, 이사야도 있습니다. 이 테이블이 빙글빙글 돌면 판이 있고 이 밑에 판이 또 있어요. 위에 판이 돌고 밑에 판이 하나 또 돌거든요. 저주받은 세상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것을 돌려버리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예레미야……. 같이 도는 겁니다. 같이 돌게 되면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들이 주님의 성령을 받게 되면 여기 아브라함, 이삭, 야곱, 예레미야처럼 구원될 수 없었던 예수님의 거저 주는 용서로 말미암아 구원된 사람들이 여기등장하게 된 거에요.
아브라함은 아무도 것도 한 것도 없이 행한 것도 없이 의롭다함을 얻었어요. 노아도 은혜를 받았어요. 예레미야도 이사야도 마찬가지로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 되어서 이 테이블을 돌리면 이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노아에게 역사하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여기서 이해하게 됩니다. 내 심정하고 내 십자가 하고 똑같네. 라고 믿어지게 돼요. 하나님께서 약속의 사람들을 미리 보게 되면 만약에 의존교회 교인이 이 테이블 위에 있다 합시다. 쭉 도는 데 돌면서 아브라함을 딱 만나면 “어, 아브라함은 아무도 것도 행한 것도 없이 의인이 되었네.” “어, 나도 그런데” 그러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네. 그 다음에 이삭이 옵니다. 이삭은 없는데서 구원받았다. “우리도 없는 데서 생겨났잖아. 야곱도 하나님의 은혜 받아서 이스라엘 됐구나. 우리하고 똑같네.”
성경말씀이 이렇게 오게 될 때 성경말씀에 의해서 일치된 생각을 가지게 될 때, 그때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점찍어 놓은 사람들입니다. 점찍어 놓았는지 않았는지 성경 이야기를 해 보는 거예요. 이야기를 해 보면 나는 저주 받아 마땅한 데 하나님의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이 기 때문에 우리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가 나한 테 믿어지고 납득이 됩니다.
특별히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가 아브라함과 노아가 다 믿어졌거든요. 이 성경의 말씀들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역사하게 되는 겁니다. 말씀이 내게들어 오면 나는 제2의 제3의 아브라함처럼 느껴지고 이사야처럼 느껴지고 노아처럼 느껴지고 야곱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일치감을 느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성경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느냐 “아, 이런 사람들은 저주받아야 마땅하고 자기 힘으로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는데 하나님의 약속에 의 해서 된 사람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구원되는구나.” 하고 믿어지는 사람은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 자기백성만 골라 가는 겁니다. 그런 사람만 구원받은 증거물이 되는 겁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서울100312빌2장12절b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상위에 술주정하는 아빠가 와서 콩나물국이고 간장이고 다 엎어 버렸듯이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는 참 속 시원하게 일해요. 자기 것 내세우는 모든 것을 다 치워버립니다. 거기에 어떤 것도 남기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것만 탁탁 뿌립니다. 이것이 둥글둥글 돌아가는 상인데, 이 중심에서 무엇이 나오느냐하면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제일 먼저 나온 사람은 아벨,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그리고 선지자들이 나와서 밤하늘에 뿌려진 별처럼 도는 겁니다.
우리가 여기 있다면 어떤 때는 우리가 아브라함이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벨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사야 되기도 하고 그들과 같은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이 아벨, 노아, 아브라함....... 이 사람들이 갔던 길이 오늘 본문 말씀대로 하면 15절(빌 2:15)에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이 사람들이 갔던 길이 바로 어두운 세상에서 빛이 되는 겁니다. 빛이라는 것은 그만큼 어둡다는 거예요.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된다는 말은 이 빛은 아브라함과 노아, 아벨 등과 같은 사람이 등장한 것은 그들 속에 하나님이 행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출성형 이라는 것을 들어보셨나요? 사출은 쏘는 것, 성형은 형틀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사출성형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 집에 바가지나 안경테 등의 모든 플라스틱 제품을 만들 때 원재료 석유에서 나온 합성수지를 가지고 사출기에 집어넣고 온도를 높이 올려서 쏘면 액체처럼 쏟아진 것이 어디로 들어가느냐 하면 금형으로 들어갑니다. 금속으로 만든 형틀을 금형이라 하는데 160도에서 220도 사이에 집어넣었다가 식으면 바가지 하나가 나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플라스틱의 원재료인 말랑말랑한 녹아버린 수지라는 것에 색깔을 입혀요. 빨간색 바가지를 만들려면 빨간색을 입혀서 금형에 쏘면 빨간 바가지가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빛들로 만들기 위해서는 금형을 만드는데 때로는 아브라함 또는 이삭, 야곱, 노아, 모세, 아벨....... 등과 같은 식으로 금형들을 만들어서 그 선배들은 그런 식으로 한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야고보, 어떤 사람들은 요한처럼 이렇게 된 겁니다. 그들이 다 어두운 세계의 빛들로 된 거예요. 그렇다면 그러한 금형이 사람마다 다 달라요. 여기 김 집사, 최 집사....... 사람들은 그 때 그 때 마다, 사람마다 다 달라요. 그런데 안에 들어가는 플라스틱 제품은 바가지가 되었든 뭐가 되든지 간에 색깔은 달라도 똑같은 플라스틱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 플라스틱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님,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틀을 만들었어요. 어떤 사람은 키가 크게 만들고 어떤 사람은 작게 만들고 어떤 사람은 여자로 만들고, 어떤 사람은 남자로 만들고....... 이런 것들은 껍데기입니다. 껍데기는 별 볼일 없습니다. 껍데기 안에 뭐가 들어가는가가 중요합니다. 쏘세요! 해서 우리 안에 예수님이라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수지, 원재료가 들어가서 굳어버리면 우리는 예수님의 복제판이 되는 겁니다. 마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그렇게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는 거예요. 플라스틱 공장에 가면 사출기가 다 있어요.
제가 이야기 하려하는 것은 수지, 이 원재료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것은 아까 이야기 했죠. 성령을 다시 얘기 해 봅시다. 중국집 돌아가는 재료 원판 한 가운데 예수님이 있는데 이 뒤에 뭐가 달렸다 했지요?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면 예수님이 여기 계십니다. 그러면 악하고 어두운 세계에서 예수님께 달려듭니다. 예수님께 달려들면 예수님은 예수님이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어서 쏙 들어갔는데 예수님이 며 칠 만에 부활했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셔서 우리에게 성령주시잖아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게 되면 바로 예수님이 들어간 이 자리에 우리가 등장하게 되요. 그런데 이 수지라는 것, 우리는 껍데기에 불과하니까 여자라든지 남자라든지 금형의 틀에 불과 하니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머리 작은 사람도 있고 큰사람도 있는데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여기에 쏘세요! 해서 예수님의 형상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또 하나의 이 시대에 십자가에 죽었다 부활한 능력이 우리 안에 들어온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죽어도 사는 거예요. 이미 생명에서 사망으로 옮겨 간 겁니다. 우리는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우리 대신 죽었다가 사셨다는 것, 우리의 죄가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겁니다. 형상은 ‘죽었다가 사셨다’ 사건의 힘이 들어옵니다. 성령을 통해서 죽었다가 사신 분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 껍데기는 죽어 있고 그 안에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신 것 때문에 우리는 껍데기와 더불어서 죽음에서 산자가 되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성경에서 이미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하고 있습니다.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빌립보서, 데살로니가 전후서, 로마서가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안보고 그냥 빌립보서를 보니까 하는 말이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 말을 들으니까 이쪽에 나오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평소에 내가 생각했던 그런 하나님인줄 알고 그렇게 오해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 저에게 소원이 생긴 것은 하나님 뜻입니다. 뭐 제 뜻입니까, 하나님 뜻이니까 이루어 주옵소서.”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예수님의 형상이 들어온 것이 아니고 악마의 형상이 우리 속에 차지하고 있으면서 껍데기는 하나님 믿는 사람인척 행세를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악하고 거스리는 세대의 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악하고 거스리는 세대가 그 사람 속에 몰려 들어오게 된 겁니다.
16절 봅시다. 빌 2: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빌 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빌 2: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방금 제가 설명해서 그렇지 그냥 보게 되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하나님 돈 벌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돈 벌게 해줬어” 이런 일이 생깁니까? 이건 아니에요.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 금형 된 우리 틀 속에 들어와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형상이 들어와야 하고 그 예수님의 형상은 죽었다가 사신분이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겁니다. 죽었다가 사신 분이 들어오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이 세상에 겁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여기 본문 기뻐하고 기뻐하라 라고 되어 있는 겁니다. 그 때부터 우리는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이 된 것처럼 이제는 예수님뿐만 아니고 우리 성도들, 예수님의 형상을 입은 우리도 이 악하고 거스린 세대에서 죽임을 당하는 하나의 제물이 되는 겁니다. 제물은 항상 죽임을 당하죠. 당하지만 죽임을 당하는 여기 보자기 푹 꺼진 이것이 뭐냐 하면 생명을 낄 수 있는 유일한 자리, 장소가 되는 겁니다. 부활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자만이 예수님의 형상을 지닌 자가 되어서 솟아올라 갈 수 있는 겁니다. 부활의 나라로 떠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도 이 자리, 노아도 이 자리, 이사야도 이 자리 모든 선배들의 별들이 여기서 핑 하고 날아갔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 갈 때에 엘리야 하고 모세가 나타났잖아요. 엘리야 모세가 서울대학 나왔습니까? 돈 벌었어요? 엘리야하고 모세가 뭐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가 있습니까? 엘리야와 모세는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해요. 그 껍데기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우리와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자녀로서 천국에 갈 수 있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빌립보서에 써 놓은 겁니다.
다시 보게 되면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아, 이제 죽었다’ 이렇게 생각 안돼요. 너라는 껍데기 안에 하나님이 일 하시는데 그 하나님은 이 땅에 와서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게 했던 하나님이 너희 안에 역사하사 너로 하여금 예수님이 기뻐하는 아들인 것처럼 너희들도 너희 안에 일하는 주님 때문에 너희도 기뻐하는 사람으로 주께서 영접해 주신다 이 말입니다. 그것이 원래 누구 소원입니까? 하나님 소원인데 어느 날부터 하나님 소원도 되고 우리들의 소원이 된 겁니다. 빌 2: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우리가 죽어도 살게 된다는 것에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13절에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원이 이제는 나의 소원이 되어서 여러분 기쁘지 아니 하십니까? 라고 우리에게 묻는 거예요. 여러분 기쁘지요? 라고 묻는 거예요. 저, 사도바울은 너무 기뻐요. 여러분들이 죽는다면, 제물이라면 그 위에 합류하겠다는 말입니다. 관제라는 것은 술 뿌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멸망의 증거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하고 기뻐합시다.
여러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무엇을 감안해야 하느냐 하면 “아, 세상이 더럽기는 더럽구나.” 세상이 오죽 더러웠으면 구원 받는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구원받을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이 참 더럽긴 더럽게 자기밖에 모르는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주님께서 말 할 것은 십자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 했듯이 굉장히 우리는 1번 태어날 때부터 나밖에 몰라요. 2번 이 세상은 나 몰라라 에요. 아이 낳으면 교회 앞에 버리고 성질 더러우면 사람 죽이고 아무튼 내 편한 대로 살면 된다 이 말이죠.
제가 지난 수요일에 이런 설교 했죠. 김길태란 사람이 경기도에서 한 달간 이삿짐센터에서 일했다는 거예요. 일 했는데 한 달만 일하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어요. 왜 내려 왔겠는가? 저 스스로 물었어요. 여러분 이삿짐센터 직원이 얼마나 힘든 줄 아세요? 아마 본인 생각으로 이거 계속하다가는 죽겠다 싶어서 내려왔던 것 같습니다. 힘드니까, 이삿짐센터가 연봉 1억 되지 않거든요. 힘들잖아요. 그래서 내려가지 않겠습니까, 김길태라는 사람이 한 달간 일하고 힘들다고 때려치우고 그냥 부산으로 가서 노는 것이나, 오늘 우리가 직장 그만 두고 노는 것이 똑같은 것입니다.
힘들면 때려치우고 편하면 좋아하고....... 그게 우리 모습이에요. 우리는 나만 편하면 최고에요. 남이 죽던지 말든지 나만 편하면 최고라 말이죠. 이것이 우리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하나의 저주 받은 모습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 인간을 구원하려는 거예요. 어떻게 구원하는가? 이 껍데기를, 우리는 껍데기 밖에 없습니다. 의사, 판사 중요하지 않아요. 이 껍데기 속에 무엇을 집어넣는다? 이런 인간을 위해서 죽었다 부활한 분을 사출시켜서 우리 껍데기를 금형삼아서 새로운 인간이 나오는데 껍데기는 똑같아요. 예수 믿으나, 안 믿으나, 머리 굵기 똑같고 예수 믿는 다고 학력이 더 나아 지는 것 아니고 돈 잘 버는 것도 아닌데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하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 점에 있어서, 나는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그 기쁨을 여러분, 기쁘지 않습니까? 라고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묻는 겁니다. 여러분 속에 하나님이 계셔서 죽은 여러분을 살리니 기쁘지 않습니까? 나는 너무 기쁜데, 여러분들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됩니다. 여러분 때문에 일한 보람이 있어요. 라고 이 본문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봐야 하는데……. 뭐, 소원이 어떠니, 하나님이 소원 주셔가지고 이번 소원은 이루어진다고 이런 식으로 여러분들도 소원 구하시면 하나님이 들어주십니다. 그런 식으로 이것을 해석하면 그것은 여전히 1번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 편한 것만 생각하는 인간밖에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죽어도 사는 겁니다. 얼마나 기쁜지 여러분들은 한번 죽어봐야 합니다. 돈 없어 죽어봐야 돼. 친구 떨어져 나가 죽어 봐야 돼, 교회 와서 자존심 상하는 목사님에게 소리를 들어봐야 “야, 교회 와서도 인간 대우 못 받는구나.” 하는 것을 느껴 봐야 합니다.
애들이 애 먹여 보고, 의존교회 아이들이 다 착해서 애 먹이는 애들 없죠? 그런데 의존교회 말고 저 밖의 교회 애들은 애를 먹입니다. 애를 많이 먹어 봐야 심지어 애 붙들어 놓고 소화제 같다놓고 “야, 이거 약이다. 둘이 먹고 죽자!, 이렇게 엄마 애 먹일 것 같으면 엄마도 죽고 너도 죽고, 같이 죽자” 아이가 놀라서 “엄마, 다시는 안 그럴게요.” 붙들고 나오면 다행인데 “엄마, 이거 소화제지?” 이렇게 나오면 계획이 다 깨지는 겁니다. 자식이 마음대로 안 됩니다.
남편 마음대로 안 되고 아내 마음대로 안돼요. 그렇게 마음대로 안 되어 봐야 “야, 내가 지금까지 꿈꾸고 있는 세상,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하구나!” 그 껍데기가 뭡니까? 주님의 영, 주님의 십자가가 안 오면 그냥 저주 받을 수밖에 없는 그 껍데기를 주께서 죽으심과 부활의 새로운 그것은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직접 우리 안에서 만들어 내는 기쁨,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생겨나는 그 기쁨, 이제는 누가 죽여도 겁나지 않는 그 기쁨이 여러분들에게 있잖아요? 확인하듯이 자꾸 다그치는 것이 바로 빌립보서 이야기입니다.
빌립보서 4장 4절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뒤에 13절에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내가 어떤 형편에 처했던지 간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겁이 없는 겁니다. 이미 저주받았고 주님이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었는데 주님이 내 안에서 행하기 때문에……. 무엇을 행한다고요? 구원 받은 사람은 이렇다하는 구원의 증거물로서 우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매사에 더 이상 어두운 그림자는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이미 사라진 겁니다. 우리는 오직 감사와 기쁨의 그리스도의 그날만 고대하면 된다 하는 겁니다. 여러분 행복하지 않습니까? 왜 그래요? 주님의 성령이 없는 사람처럼……. (하하)
성경 자체가 얼마나 우리의 기본 욕구, 근본적으로 숨겨놓은 은근히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원하는 은근한 이 어두운 속성을 성경은 기쁘지요? 라는 식으로 우리를 까발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 숨길 생각 하지 마시고 인간적으로 다 털어 놓읍시다. 세상 적으로 소원 빌었다가 낭패 당했지요? 잘 하신 겁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의 일은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는, 사흘 만에 다시 사는 그 능력이 진짜 주님의 기쁨이지 그것 외에 다른 것, 헌금하고 봉사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을 아예 먹지 마세요. 그것은 하나의 자기 자랑거리고 위선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껍데기로 사용하도록 맡기세요. 맡긴다는 이야기, 그 비슷한 이야기가 30절에 나옵니다. 빌 2:30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이런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일이라고 하니까 자기 목숨 안돌아보고 도와주니까 정말 그 일이 하나님이 너희들 속에 일한 증거 맞습니다. 하는 뜻입니다.
어떤 때는 책망하는 식으로 나온 것이 있습니다.
빌 2:20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빌 2:21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빌 2: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너희들은 자기 일만 생각하는 그 때에도 디모데는 오직 그리스도의 일을 했다. 25절에 보면 빌 2: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이 모든 것은 오직 우리 안에 우리보다 더 센 힘이 있다. 부활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죽어도 죽지 않는 인간으로 죄 많은 우리를 금형 삼아서 그 안에 너희 같은 죄인도 살 수 있다는 주님의 형상을 우리가 집어넣어서 우리를 새로운 플라스틱 바가지로 찍어 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볼 때, 노아를 보면 “노아가 내 이야기이네”, 아브라함을 보면 “아브라함이 내 이야기이네” 다 같은 플라스틱이거든요. 이사야를 보면 “이사야가 딱 내 이야기이네” 에스겔을 보면 “에스겔이 내 이야기이네” 다 같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들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성경이 통하는 겁니다. 그와 같이 통하는 것처럼 그 시대에 빌립보 교인들끼리 서로 뭔가 통하자 이 말입니다.
빌 3: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여기 보면 중요한 것이 나옵니다. 빌 3: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빌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무엇과 무엇이 대조 되는가 하면 여기 개 같은 인간이 있죠. 개 같은 인간입니까? 개입니까? 아, 개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약하게 봐서 개인데 쉽게 하면 개 같은 인간들 대표적인 사람 중에 하나가 법정스님이죠. 아니면 김수환 추기경 같은 사람들, 이 개 같은 인간들을 무엇을 기준으로 개 같은 인간으로 보는 겁니까? 여기 보면 그들은 한마디로 육으로 자기를 종교적으로 치장한 사람들이죠. 그러니까 육이라 하는 것은 할 수 있는 것,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것 이야기해 보세요. 교회 나오기 찬양하기 성경보기 교사하기 헌금하기 예배참석하기 기도하기 다할 수 있죠.
눈 있으면 성경보고 강의 참석하기 필기하기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할 수 없는 게 뭡니까? 할 수 없는 것을 누가 합니까? 우리 속에 누가 합니까? 하나님이 행하시죠. 그것을 내 놓으란 말입니다. 할 수 있는 것 말고 여러분 육으로 할 수 있는 것 말고 여러분이 육으로 도저히 안 되는데 안 되기는 안 되는 데 나오기는 나오는 것 도저히 내 힘으로 할 수는 없는 데 계속 뭔가 나오는 게 있어요. 세상에 죽어도 구원받는다니 너무 기뻐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까? 이것은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있으니까 나오는 거잖아요.
개 같은 인간과 진짜 하나님의 성도를 비교하는데 육과 영을 비교합니다. 영이라 하는 것은 육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영입니다. 사람이 육으로 태어나면 지옥가고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늘나라 갑니다. 할 수 없는 것 교회 나와서 술 담배 끊는 것 그것은 할 수 있습니다. 신학교 가서 신학 공부 하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그것 말고 도저히 나 같은 인간에서는 이런 일이 나올 수 없다는 것 나밖에 모르는 그런 죄인에게서 이런 일이 나오다니 하는 게 있을 거예요. 그것이 뭐냐 그것이 뭘까요? 그것이 바로 성령이 하는 것인데 구원에 대한 감사, 기쁨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개 같은 인간과 영적인 사람을 비교하는 데 그 비교의 중심에 누가 서 있냐 하면 바로 놀랍게도 그렇게 얘기 하는 본인이 서있죠.
5절에 보면 내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자기가 해 낸 거예요. 양심적으로 자기가 이스라엘족속이고 베냐민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 바리새인요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자로다 율법으로 흠이 없는 것은 육입니까? 영입니까? 육입니다 '십계명을 지킵시다.' 이것 육입니까? 영입니까? 이것이 육입니다. 사도바울의 명령과 지시를 지킵시다. 이것이 다 육입니다. 사도바울의 명령이나 율법이나 마찬가지로 다 하나님의 법 아닙니까? 하나님의 법을 내가 지켰다고 여겼다는 것은 육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근호 목사님은 말씀을 못 지킨다 하는 데 나는 지금도 말씀을 지킨다고 말합니다. 그럼 한번 내 놓아 보라는 말입니다. 말씀을 지키고 있다면 그것은 가능한 겁니다. 가능한 것은 육에서 나오는 겁니다. 나는 못 지키는 데 무슨 수로 지켰지? 한번 지킨 것 보세요. 오른 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하죠.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를 매일 생각합니까? 못합니까? 다 생각하죠. 그 나라 의를 매일 생각한 것 아니잖아요. 이방인들이 원하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생각하고 지금도 먹고 있잖아요. 우리는 늘 배고프면 아무 것도 안 되잖아요.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육에서 나올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2초 내지 3초 그 나라 의를 구한다. 이것은 우리가 평소에 하는 게 아니고 전혀 나답지 않은 이상한 것 이라는 말입니다.
주여 주님의 나라에 빨리 가게 하옵소서. 이것이 어떻게 나옵니까? 주님보고 싶어 환장했을 때 2초 나오지 어찌 나옵니까? 주여, 우리 애 공부 못해도 그냥 예수 잘 믿게 해 하옵소서. 이런 놀라운 기적이 성령이 아니고서야 여러분 속에 하나님이 행하지 않고 나올 수 없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구분했으면 우리도 구분합시다. 사도바울은 아주 날카롭게 구분하고 예리하게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옛날에 나도 너희들 못지않았어. 너희들 행하는 것 나는 더 높은 위치에서 다 행했어. 너희들 5개하면 나는 10개했어. 나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고 율법에서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나님 보시기에 흠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너희들이 볼 때 저 사람은 완벽해 라고 하는 수준까지 이른 사람이다.
인간이 육으로 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은 없었다. 완벽했다 하지만 지금은 똥, 오줌이다. 배설물이다. 그것은 내 안의 똥, 오줌이다. 나는 더러워서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 왜? 여러분 똥, 오줌 그리워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빨리 처리 하고 튀어나오기 바쁘죠.
나의 기쁨은 율법을 다 지켰기 때문이 아니고 나의 기쁨은 껍데기 같은 내속에 주님의 십자가 부활의 능력이 들어 있는 것은 나의 영원한 기쁨이지 내 힘으로 율법 지킨 다고 십계명을 다 지켰다고 우쭐되는 것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프다. 그런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긴다. 그래서 이것을 보고 하는 말이 형제들아 그런 의미에서 같이 기뻐하자. 내 힘으로 하지 않는 것을 내안에서 주께서 행하신 것에 대해 우리 같이 기뻐합시다! 라고 빌립보서에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7절에 봅시다.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나에게 이익된 것의 같은 말은 그리스도에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방해 했던 것이다. 역시 나는 나에게 이익이야 라는 말은 곧 그리스도 에게는 손해라는 말입니다.
제가 강의 처음에 뭐라 했냐 하면 사람들이 찾고 있는 하나님하고 진짜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오는 것하고 완전히 다르다고 했지요. 그리고 제가 먼저 강조한 것이 실제로 하나님이 이 땅에 왔습니다. 조용필만 온 것이 아닙니다. 나훈아만 온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이명박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명박이 있는 것 이상으로 이순신장군이 세종대왕이 있었던 것 이상으로 하나님이 이 땅에 왔었습니다. 왔는데 코드가 안 맞았어요. 사람이 잡고 있는 하나님하고 실지로 왔던 하나님하고 안 맞았어요. 그래서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사흘 만에 부활했어요. 이야기 끝났어요.
다시 말해서 내가 나에게 이익이라고 여기는 그것은 그리스도를 해 방하는데 적절하지 하나님께 전혀 보탬이 안 돼요.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해로 여길 뿐 더러 또 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여기 두 군데 있죠. 내가 자랑했던 것도 주님에게 해로운 것이고 또 자랑하려고 시도하는 그것도 두 번 다시 난 모든 것이 해롭다가 단정한 것이고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기는 이유는 내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가장 결정적입니다.
내 인생을 결정한 것은 십자가 이었지 내 착함이 아니었다. 내 인생의 가치를 너는 확실히 구원 받았어 라고 결정 진 것은 내 행함이 아니었고 예수님이 내안에서 행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것이 나를 결정적으로 구원했다 이 말입니다.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겁니다. 이러한 기쁨을 방해하는 것들이 뭔가 옛날에 내가 내 이익을 위해서 추구했던 모든 것이 이 기쁨을 앗아가는 해로운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겨 버리면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게 합니다. 이것 때문에 제가 아까부터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증거물이라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이제부터 개인적으로 얼마나 이익이냐 손해냐 그런 것을 생각 하지 않습니다.
주여 저 구원의 증거물로 쓰여 질 수 있어요? 그것만 묻는 겁니다. 주님 제가 구원이란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증거물로 활용된다면 활용해 줘요 이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멸망의 증거물인데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의 증거물로 상대했으니 내가 이 세상에 어디 가더라도 구원 있구나! 보여줄 수 있는 증거물로 사용 해 달라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이익이냐 내가 한 달 수입이 얼마인가 그런 것은 따질 것이 아니에요 그런 것을 따지면 다시 배설물 똥, 오줌을 얼굴에 처바르는 것밖에 안 되는 겁니다. 나는 껍데기 이니까 껍데기 안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능력이 있어서 예수그리스도가 최고고 나머지는 아무 문젯거리도 되지 않는 겁니다. 애가 공부를 못한다. 잘한다. 교회는 숫자가 적다 늘었다. 아무 문제꺼리도 안됩니다. 김길태가 잡히나 안 잡히나 아무 문제꺼리가 안됩니다.
그 다음에 내가 가지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사도바울은 건방지게 자기를 의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겠습니까?
“네가 무슨 의인이야”할 때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의인이거든 분명히 의인이거든 그런데 내가 의인된 것은 내가 하나님말씀, 율법을 순종해서 의인이 아니라 내안에 행하신분 때문에 의인 되었어 라고 하니까 구원의 증거물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선교를 하거나 전도를 하거나 무엇을 하거나 항상 자기 의를 버리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나와야 됩니다. 자기 의를 똥오줌으로 여기는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당신이 나쁜 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구원받습니까? 그것은 바로 내안에 그리스도의 의가 내가 행한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된 것이에요.
행함과 믿음의 차이가 뭡니까? 행함은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내 속에서 나오는 것이 행함이겠죠. 믿음은 어디서 주어지는 겁니까? 내속입니까? 내 밖에서 오는 겁니까? 밖에서 오는 겁니다. 나는 하나의 금형입니다. 나는 틀이고 틀 안에 하나님의가 들어가 버린 겁니다. 죽으심과 십자가가 나에게 들어오게 되면 이분이 내안에 자리 잡게 되면 내안에 하나님의 행하심이 계시면 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의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내가 의롭다는 게 아니고 주님의 의가 내안에 있다 이 말입니다. 내 자체가 주님의 의로 사용되어 지는 겁니다.
빌립보서 1장21절을 봅시다.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이런 말을 부모 앞에서 함부로 이야기하면 호래자식소리 듣습니다. “어머니,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이놈의 자식이 부모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어 그게 늙은 부모 앞에서 할 말이냐 이 불효자식, 이 호래자식 젊은 놈이 벌써 죽는 소리 한다. 그래 가지고 무슨 큰 일하겠는가!” 밥그릇 날아가죠. 세상은 1번, 자기 밖에 몰라요. 너는 내 자식이라 이 말입니다. 2번을 몰라요. 우리가 얼마나 이 세상이 하나님께 반항하는 세상인지 몰라요.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았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는 것을 보고 알았어요. 아 세상이 더럽구나 하나님 아들을 죽이는 구나 강도 바나바를 살리고 예수를 죽이는 그 세상이 우리를 만들어 냈구나. 우리가 저주받아 마땅한데 껍데기 같은 우리 속에 예수님의 형상을 성령을 통해 집어넣으니까 그때부터 내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니라 여러분 기뻐합시다! 라는 것이 빌립보서입니다.
강의 하면서도 제가 미안한 느낌이 들어요. 왜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안사는 데 이런 이야기하면 중간에 튀어나갈 수 있어요 못 듣겠다고 그렇지 않습니까?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처럼 들리는 데 절대 여러분 들으라고 하는 소리 아닙니다. 제가 하지 않더라도 주께서 성경을 보라 성경 속에 있다 이 말입니다.
성경을 덮어버리면 중국집 요리 판이 안보이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아브라함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요. 결국은 나는 나다. 자기만 남아요. 성경을 안보니까 자기가 1번밖에 없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던 뭘 하든 자기 밖에 몰라요 그래서 법정스님이든 뭐든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자기 밖에 몰라요 자기는 무소유라고 했죠. 그렇게 놀리는 혀는 누구 겁니까? 처음부터 하나님 소유인데 무소유라고 남에게 해를 안 끼쳤다고요? 그 사람 죽고 난 뒤에 병원비 6천만 원 나왔어요. 그 6천만 원 홍뭐라는 사람이 다 갚아줬어요 6천만 원 빚지고 간 겁니다. 빚은 소유 아닙니까? 그게 무소유입니까? 사람이 산다는 것 자체가 남자에게 짐이 되는 겁니다.
본인이 먼저 화장실가 있으면 다른 사람이 화장실가고 싶어도 못가요. 자기가 점령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못 차지해요. 인간은 산다는 것 자체가 남에게 짐이 되어 살아가기 때문에 남을 밀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엘리베이터 탈 때 자기가 탔는데 그 다음 사람 탔는데 삑소리 났어요. 자기가 안탔으면 그 사람 탔을 것 아닙니까? 인생이라는 것이 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자체가 남에게 그만큼 피해를 주고 있다는 겁니다. 왜 죄인이니까 자기 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래 놓고 죄가 없다고요. 그래서 구원받는다고 처음부터 우리는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는 지옥 갈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찾아와서 십자가에서 네 대신 죽었다는 소식을 들려주면 그때부터 우리 안에 주님께서 행하십니다. 그 때부터 우리는 새로운 기쁨을 느껴요. 내가 이익 되는 기쁨이 아니라 주께서 나와 함께 있다는 기쁨이 세상에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 빼앗기지 않는 그런 기쁨으로 우리에게 작용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내게 성령이 계시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죽을 수도 있다 이 말입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난 의, 믿음은 행함입니까? 아닙니까? 믿음은 외부에서 믿을 수 있는 요소가 다가왔을 때 생기는 게 믿음입니다. 외부요소가 찾아오지 않으면 이 안에서 발생하지 된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어떤 사람이 유에프오를 안 믿었어요. 비행접시를 안 믿었는데 어떤 아이가 비행접시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비행접시가 와서 “안드로메다에서 왔다 너를 데려가야겠다!” “엄마!” 하고 놀래버렸단 말입니다. 그 엄마가 왔을 때 “엄마는 안 데려가니까 나는 빨리 가야겠다.”돌아 가버렸어요. “엄마, 나 외계인 봤어.” 그 애가 왜 그런 새소리 합니까? 뭘 봤어요. 외계인 봤죠. 엄마는 “외계인이 어디 있어.” “엄마, 나봤어.” 이게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석에서 누구를 봤어요? 예수님 만났어요. 예수님 만나서 예수님 부활했다고 소식 전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은 우리 죄 때문이라고 소식전합니다. 사도바울 보고 미쳤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이 내가 미쳐도 주를 위해 미쳤다고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왔다면 사도바울 말이 맞아요. 왔다가 재림하는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오신 적도 없고 죽은 적도 없고 부활한 적도 없다면 내가 사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라고 하는 것은 기도해서 복 받는 곳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이 오시느냐 안 오셨느냐 그것을 결정 내는 것이 교회입니다. 기도 하면 복 받는 다고 하는 것은 절간입니다.
빌립보서 3장9절 봅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1번을 2번 때문에 새로운 상황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있는1번 옛날에는 악한 세상 안에서 1번인데 주님의 세상 안에 있는 주님께서 행하시는 안에 있는 새로운 1번 그리고 2번은 내가 주님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 나는 졸지에 죄만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의가 되는 겁니다. 왜냐 하면 내 자체가 주님의 금형에 다가 주님께서 사출기로서 형상을 쏘았기 때문에 내 자체가 하나의 의가 되는 겁니다.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이미 우리 속에 행하시는 분이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에 이르기 때문에 똑같은 일을 우리에게 일으키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다 같은 플라스틱입니다. 우리도 플라스틱입니다. 같은 재질입니다. 특징이 뭐냐 하면 누구나 죽었다가 예수님 때문에 부활했다는 점에서는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마찬가지이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누구 때문에 의인입니까? 저는 예수님 때문에 의인입니다. 누구 때문에 부활되고 천국 가죠? 예수님 때문에 천국 갑니다.
이런 고백을 하신다면 다 같이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로운 주님 환경 속에 놓여있는 성도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일 하시는 이 기쁨을 저는 대구고 여러분들은 서울이지만 어떤 처소에 있던지 다 같이 예수님께서는 같은 기쁨을 주신다는 것을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우리가 세상이 주지 않는 그런 기쁨 속에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도바울은 그렇게 살았고 아브라함과 예레미야도 이사야도 그렇게 살았는데 어찌되었는지 오늘 날 우리 교인들은 세상적인 복을 탐하고 있고 주님주신 그 기쁨은 상실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찌 구원받은 증거물이 되겠습니까? 어찌 세상이 멸망의 증거물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저희 속에 행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저희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증거물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2010. 4. 6. 녹취:김창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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