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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8, 9강 / 빌 2장 / 인간 배제 (허구인 자아의 구원계획)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빌립보서

8, 9강 / 빌 2장 / 인간 배제 (허구인 자아의 구원계획)

정인순 2014. 4. 7. 23:55

091211 빌2:6 인간 배제 (인간 구원 배제) 아버지와 아들의 계획 (인간 배제) vs 허구인 자아의 구원계획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서울/서울091211빌2장6절a.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서울/서울091211빌2장6절b.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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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서울/서울091211빌2장6절b.hwp

 

 

 

서울091211빌2장6절a

 

빌립보서 제8강

(이근호 목사 2009년 12월 11일 [1]) 서울의존교회

 

인간 배제 (허구인 자아의 구원계획)

 

빌립보서 2장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방금 보았던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7절, 8절 말씀을 4자로 간단히 이야기 하면 인간배제, 인간을 제쳐놓는 겁니다. 인간을 배제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방금 읽었던 이 본문이 사람을 배제해 버리고 사람하고 타협한다든지 사람하고 협상을 한다든지 의논을 한다든지 이게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하고 의논하지 않으면 누구하고 의논하는가? 이 빌립보서 2장6절에서 7절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문제입니다. 하늘에 있는 가족 문제예요.

 

여러분, 아파트 사시는 분 있습니까? 아파트에 사시는 분이 계시는데 옆 동에서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싸움이 일어나면 우리가 거기 옆집에 관여를 해야 되겠어요 안해야겠어요? 관여할 필요가 없지요? 옆집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심하게 다툰다고 우리가 싸움 말리려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쪽 사정이고 그 쪽 집안 문제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그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하하 호호 하고 웃으면서 사이좋게 지냈다. 그 때 옆집에 사는 우리가 옆집에 가서 “뭐가 그리 즐겁습니까?" 하고 문 열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 이 말이지요. 옆집에서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서로 사이좋게 재미나게 지냈는데 그 다음날 아침에 보니까 우리 집에 시루떡 한 접시가 나와 있다. 그것을 예를 들어서, 201호와 202호 산다고 합시다. 202호에서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아주 재미나게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었는데 밤에 웃음소리가 넘쳐나더니만 201호 우리 집 앞에 맛있는 시루떡 한 접시가 놓여 있었다.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냐면 은혜라고 하고 우리가 흔히 아는 이게 구원이예요. 구원이 접시에 담겨서 우리에게 온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어서 천국 가느냐. 지옥 가느냐 하는 그 문제는 201호 우리가 살고 있는 201호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고 어디서 다룰 문제입니까? 202호,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에게 하늘나라 가족의 그 쪽 사정이죠. 그 쪽 집안 문제다 이 말입니다. 이걸 제가 뭐라 본다고 했습니까? 이것을 가지고 인간을 배제한다. 인간을 철저하게 배제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거예요. 문제는 201호에서 굿을 벌리는 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아벨이라는 사람이 천국 갔겠습니까? 지옥 갔겠습니까? 아벨은 천국 갔습니다. 그 근거가 바로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이 가인, 가인 그 사람이 구원 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가인, 이 사람은 201호에 사는 사람이라 보면 되지요. 그러면 아벨은 202호에 사는 사람입니다. 가인이 201호에 살면 가인이 사는 사람의 집에 아침에 시루떡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구원 안 받으면 되지요. 천국 안가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201호에서 굿을 한다. “신이시여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옵소서” 아무리 201호에서 굿을 해도 이 사람은 구원됩니까? 안됩니까? 구원 안 되지요. 왜냐하면 구원문제, 은혜문제는 어디서 결정하는 겁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그 가족, 아버지와 아들이 가족이죠. 하나님 아버지란 분과 하나님 아들이라는 가족의 문제지 우리 인간의 문제, 제3자, 인간이 구원이 되고 말고 할 구원의 결정권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이게 방금 읽었던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8절의 내용입니다.

 

모든 구원의 관한 문제는 인간을 배제하고 시작했고 마무리도 인간을 배제하고 마무리 됩니다. 그래서 구원이 된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로 인하여 그냥 선물로 구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옆집에서 이루어진 일 때문에 우리 집이 선물로 그냥 받는 거예요. 참 줘도 못 먹는다 말이 있듯이 사람들이 이렇게 공짜라고 해도 사람들은 믿지를 않습니다. 공짜라고 해도…….

 

오늘 첫 번째, 두 번째 시간은 집중해서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겁니다. 왜 사람은 공짜로 구원하고 공짜로 천국 간다는 것을 왜 안 믿는가? 그걸 지금부터 이야기 하겠습니다. 왜 사람들은 공짜로 구원을 줘도 안 믿는가 하면 그 내막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여기 있는데 사람은 코, 귀, 입 이렇게 있습니다. 이게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마네킹이 사람입니까? 아니죠? 그러면 사람과 마네킹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뭐냐 하면 사람은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마네킹은 없는데 사람에게 있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자아, 쉽게 얘기해서 나, 자기 자신을 느낍니다. 자기 자신은 무엇을 느끼느냐? 여기서 나오는 게 있어요. 뭐가 나오느냐 하면 과거, 현재, 미래가 나에서 죽 나와요. 그런데 과거, 현재, 미래가 쭉 나오는데 사람들은 나(자아)에서 이게 나오기 때문에 이 과거는 어떤 과거냐 하면 지금에서 골라낸 과거가 되고 미래는 지금이 기대하는 미래가 돼요. 미래가 되어버리면 남는 것은 뭐가 남느냐 하면 과거라는 이름에 현재가 남고, 예측이란 이름에 현재가 남고 그리고 사람에게는 나이가 아무리 70이 되고 80이 되도 남는 것은 지금 내가 여기 있다. 이것만 남아요. 지금의 내가 있기 위해서는 과거의 어릴 때 내가 어떻고, 초등학교 때 어떻고, 중학교 때 내가 어떻고, 과거가 생각나고 있고 앞으로 내가 어떻게 이렇게 하고 싶고, 저렇게 하고 싶고 하는 자기 기대가 있고 어째든 현재 확실하게 있는 것은 지금 내가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만약에 어떤 것이 선물로 들어와 버리면 사람들은 이 선물은 내가 지금 과거에서 만들어낸 선물도 아니고 미래에서 기대하지 않는 선물이 와 버리면 이 선물은 지금 내가 받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 선물이 어디서 오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그 예수님의 현재가 선물로 들어와 버리면 지금, 예수님이 들어와 버리면 지금 현재에 있는 내가 무엇으로 바뀌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현재로 내가 교체가 되어야 돼요. 교체가 되어 버리면 과거에 초등학교 때 나는 키가 작았다. 초등학교 때 나는 왼손잡이였다 하는 말은 틀린 말이고 옛날 과거에 예수님께서 초등학교 때 나를 왼손잡이로 만들었다고 이야기해야 돼요. 만약에 예수님이 선물로 안 들어와 버리면 나는 7살 때 우리 골목에서 싸움 제일 잘했다. 비록 나는 여자지만 우리 골목에서 남자애들 항상 매일같이 때리고 대장을 했다고 하더라 하다가 이렇게 예수님의 현재가 내속에 침범해 버리면 내 7살 때 우리 주님께서 힘주셔서 우리골목에 있는 애들, 남자들 얻어맞았다 그렇게 되면 7살 때도 나라는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되지요. 역시 목사는 달라. 일반 평신도는 모른다고…….사람들이 이 선물을 왜 못받냐하면 지금 만약의 현재의 나를 고집해 버리면 어떻게 되냐면 현재 고집한 상태에서 내가 예수를 믿고자 한다면 7살 때 난 골목대장이었고 중학교 때 어떻게 했는데 지금 나이가 35살이다. 35살 때 나는 예수 믿기로 작정했다. 그 다음에 45살 때 나는 우리교회에서 장로가 되었다. 장로된 것, 예수 믿은 것, 다 누가 할 거예요? 누가 결정한 거예요? 내가 결정하지요. 내가 결정해 버리면, 천국의 주제는 뭡니까? 인간배제인데 이렇게 되면 누가 잘나서 구원받은 게 됩니까? 내가 잘나서 내가 알아서 내 구원 내가 알아서 내 공로로 내가 예수 믿는다는 행함으로 내가 받는 게 되 버려요 이러면 이 사람이 가는 나라는 어디냐 하면 내가 주인공이 되고 내가 현재가 되는 나라에 가는데, 그런 나라가 있어요. 그런 나라가 무슨 나라라 하냐면 지옥이라고 합니다. 그런 나라를 지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나온 유명한 공식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지옥 간다."는 공식, 예수 믿고 지옥 가는 거예요. 아무도 웃지를 안네……. 큰일 났네……. 나 혼자 실없는 인간 되 버렸는데, 여러분 예수 믿으면 지옥 갑니다.

 

예수 믿으면 지옥가요. 이 천기누설 아무나 얘기 해 주는 거 아닌데, 오늘 2009년 마지막을 기해서 드디어 내가 누설해야 겠어요. 예수를 믿으면 지옥 갑니다.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 회개하고 예수 믿으면 지옥 갑니다. 십일조하면 지옥가고, 교회 나오면 지옥가고, 예수 안 믿고 십일조 안 해도 지옥가고, 교회 안 나와도 지옥가고 나와도 지옥 갑니다. 왜냐하면 그 끝은 나의 세계, 자아의 세계, 내가 주인공이 된 세계이기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걸 불교에서 극락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불교에서 극락은 항상 중인공이 누구냐 하면 어린양의 보좌가 아니고 자기가 설치고 다녀야 되요. 자기가 극락 왔다고 온 다 돌아다니면서 자랑하고 떠벌리고 가끔은 지옥 가 가지고 지옥가 있는 자기 엄마 건져내려고 일거리 만들어 내냐고 바빠요. 파내서 엄마 건져내야하고, 지옥가도 왜 그리 할일이 많은지 몰라요. 여호와 증인도 지옥 갑서 할일 많아요. 골프채 들고 가 잔디밭에가 골프쳐야돼요. 이게 전부다 자기 세계에요. 그래서 지금 빌2:6절에서 구원이라 하는 것은 다시 이야기 해 드릴게요. 구원이란, 201호에 우리가 살고 있고 202호에 하나님이 살고 있다 이거예요. 구원이란 202호에 있는 아버지와 그 아들 사이에 의논해가지고 아침이 되니까 여기에 시루떡이 쟁반에 담겨져가지고 우리 집 앞에 있을 때 이것이 바로 선물이고 이것이 은혜고 이것이 바로 구원이고 이것이 천국이더란 말입니다. 여기에 가족,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두 분 사이의 일의 결과로 우리에게 거저 구원이 온 거예요. 문 열고 쟁반에 있는 것 맛있게 잡수시면 됩니다. 골라 먹을 필요도 없어요. 그냥 떠먹으면 됩니다. 주시는 사랑을 떠먹으면 됩니다. 떠먹던지, 사랑을 줄줄 시럽처럼 마시던지 요구르트처럼 퍼 먹던지, 마시던지 어쨋던지간에 퍼먹던지 마시던지 뭘 하든지 그 모든 것이 내가 만든 적이 없고 내가 생각 한 적도 없는 구원을 이렇게 거저 주셨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복음의 시작이고 처음이고 끝이고 끝나는 겁니다.

 

이렇게 들어오게 되면 현재 나의 현재 과거와 미래는 나의 현재로 고집되다가 나의 현재가 아니고 무슨 현재로 바뀌냐 하면 현재 내가 있는 곳은 주님의 현재로 바뀌겠지요. 그래서 과거의 있던 나도 주께서 미리 그렇게 태어나야 했기에 태어났고, 더 나가보면 내가 창세전부터 구원받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나는 구원이 되어야 했고 미래에 주님께서 가신 나라에, 안식의 나라에 우리도 나의 현재가 아니고 주님의 현재 속에 교체됐기 때문에 주님이 마련한 주님 자신이 마련한 세상이기때문에 주님 따라서 우리도 덩달아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가신 그곳이 우리가 영원이 기거할 곳이 됩니다. 어릴 때 여러분 이사 많이 안 해봤습니까? 부모님이 어떤 직업인지 주거변동이 되가지고 맨날 운동권도 아니고, 이사 다니고 주민등록 바뀌고 때로는 소멸될 때……. 아무것도 모르는 죄 없는 자식은 부모 따라 자꾸 이동을 해야 되겠죠. 그럴 때 그런 자식이 커서 나중에 너의 어릴 땐 어떠냐고 하면 "다 부모 때문에 부모로 인해 부모인생이지 내 인생 없었어." 라고 말한단 말이지요. 그 이야기가 부모로 인하여 지금 내가 나쁘게 말해서 이 모양 이골이 됐다. 좋게 말하면 내가 나 된 것은 부모님 은혜다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가 미처 몰랐을 때에도 주님의 현재 속에 빠져들어 가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이 제 말을 잘 이해못하는게, 눈치를 보니까 이것을 이해 못하는 것 같아요.

 

다시 해 봅시다. 사람이 현재, 과거 이게 어렵죠. 어려운데, 사람이 과거를 생각할 때 과거에 그 일이 있었던지 관계없이 다 잊어버리고요. 지금 현재 내가 원하는 과거를 내가 도달해 낸다. 그게 바로 우리의 과거란 거예요. 과거가 아무리 많다해도 현재 내가 원하는 과거가 아니면 나머지는 삭제하고 다 잊어버리게 돼요. 지금 필요한 과거만 나한테 과거가 돼요. 여러분들이 시시콜콜한 것 다 기억 못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 7월 6일 날 뭐 했어요? 알 필요 없죠. 그 때 공부 1등 했다면 기억날 수 있을 거예요. "아, 그때 7월 달 방학 전에 일등 했어요." 하지만 꼴등했으면 기억 안날꺼예요. 1등 했기 때문에, 지금 나란 현재를 삐까삐까 빛내기 위해서 지금 내가 얼마나 대단한 인간인가 증명할 수 있는 것들만 기억하는 거예요. 미래도 마찬가지 입니다. "너 커서 뭐할래?" "나, 커서 빌어먹을래……." 이런 아이는 없어요. 미래라고 하는 것은 항상 지금을 근거로 해서 지금 중에서 좋은 것만 골라서 미래 하는 거예요. 라면을 좋아하는 아이한테 물어보세요. “너 커서 뭐할래. “나 커서 라면 가게 할래요.” 무슨 뜻입니까? 지금 라면 먹고 싶다는 말입니다. “너 뭐할래?” “택시 운전할래요.” 택시타고싶다 이말 입니다. “너 뭐할래?” “옷 만드는 디자인하고 싶어요. 옷하나 해 달란 말입니다. “너 뭐할래?” “나는 축구선수 할래.” 지금 축구하고 싶다는 겁니다. 미래라는 것이 지금의 근거가 없는 미래는 없어요. 지금 하고 싶은 것이 미래에 꿈으로서 이루어지길, 꿈은 이루어진다. 꿈, 별표, 이루어진다. 88올림픽때 많이 했죠. 미래라는 것은 너무나 일방적입니다. 현재 나를 응원해 줄 수 있는 나를 빛내 줄 수 있는 미래만 미래지, 만약에 내가 기대하지 않은 예상하지 않은 미래가 오면 우리는 자기 인생을 저주하죠. “미워!, 미워!” 하는 …….

 

자기가 무슨 죄를 졌다고 자기를 칩니까? 인간의 죄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기 현재를 현재라고 우긴 것 그 죄 밖에 없어요. 자기 현재는 주님의 현재인데, 예수님의 현재를 내 현재라고 우긴 죄, 그 죄가 교체가 안 된 죄, 내 자리에 주님이 계셔서 나는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인데 그것을 인정안할 때 그게 바로 내 안에서 주님과 내가 막 싸우는 거예요. “내가 주인이다.” “아니, 제가 주인입니다.” “내가 주인이다.” “아니 제가 주인할랍니다.” “네가 주인 왜 하는데?” “나중에 라면 먹고 싶기 때문에 라면가게 차릴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쥐어박습니다. “너는 라면 먹고싶어서 하는 소리야,” “너는 나중에 삼성그룹처럼 재물이 되어야해” “싫어요. 재물 싫어요. 돈 많은 것 싫어요. 나는 라면만 먹으면 좋겠어요.” 이런 고집부리는 사람은 없겠지만…….하여튼 주님이 마련한 미래는 현재 우리가 원치 않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미래를 준비해 놨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직업에 관계없이 십자가에 죽으신 그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이 우리가 그토록 애타게 기다린 우리의 미래입니다. 십자가의 죽의심이. “그럼 피를 한 사발 흘린단 말이냐?, 그럼 옆구리에 창을 찔린단 말이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겠는데. 십자가 죽지 않고 구원받는 법은 없습니다. 십자가란 것이 우리가 생각한 예수님이 형틀에 달리신 그것은 이미 과거에 예수님이 했던 십자가이기 때문에 우리한테 해당이 안돼요. 우리의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인지 그것은 사람마다 주님께서 배치를 따로따로 다 합니다. 공통점이 있는데 결국은 구원받은 사람의 공통점은 “십자가에 주께서 함께 죽으심으로 제가 구원되었습니다.” 하는 고백을 어느 직업이든 죽을 때 금덩어리 안고 죽으면서 “주여 십자가 아니면 구원 못 받습니다.” 이런 소리 할 수도 있고, 쌀가마니 붙들고 하는 말이 “주님이 같이 죽으심으로 구원 받았어요.” 이렇게 할 수 도 있고, 심지어 자식 12명 낳아서 자식 12명 붙들고 “주여 십자가 아니면 구원 못 받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다는 이말 이죠. 그러니까 십자가로 구원받는 것은 예외가 없어요. 누구나 십자가로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내가 현재가 되어버리면 내가 십자가를 지어내기 때문에 그게 큰 문제가 됩니다. 내가 십자가라는 것을 지어내요. 일부러 불신자 집에 가서 핍박을 받아 본다든지 일부러 목사한테 대들어서 저주 한번 받아본다던지 일부러 나쁜 짓해서 교도서 가본 다든지 자기가 조작된 십자가를 십자가라고 우기면 그것은 또 주체가 뭐냐 하면 자기주체가 살아있어 인간배제란 원칙에 또 어긋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사람은 왜 예수님 하는 일을 안 믿는가를 하겠어요. 방금 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면 우리는 뭐만 보냐하면 예수님만 봐요. 그런데 예수님 뒤에 빌립보서2~8절에 보면 하나님이 계셔요. 우리는 하나님은 모르고 나를 구원하러 오셨군요. 하고 우리는 “예수님 고맙습니다.” 하고 우리는 예수님하고 상대하려고 해요.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믿으니까 구원해 주세요." 아까 얘기했죠. 예수 믿으면 지옥 간다고,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 우리 몸에 들어오시면 우리와 함께 동거하고 구원받고 감사합니다. 지금 한국교회 전부가 이렇게 예수님만 상대하려고 합니다. 무엇을 빠뜨린 게 있어요. 무엇을 빠뜨렸냐하면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빠뜨려버렸어요.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는 하나님은 자식을 잃었어요. 첫 번째, 잃어버린 자식이고, 두 번째 잃어버린 자식이 이기에 도로 건지신거예요. 자식을 잃어버리도록 방치를 했고 자식을 잃어버리도록 조치하셨고, 그 조치 그 다음에 그 잃어버린 자식을 도로 살리는 조치를 아버지가 하셨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만 보지 말고 그 뒤에 가서 예수님과 그리고 아버지가 하신 일을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시험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게 뭡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믿음 있는지 없는지 시험하기 위해서 1번 필기시험 치셨다. 2번 면접 봤다. 3번 고생시켰다. 4번 아브라함 자식 바치라고 했다. 몇 번입니까? 4번이죠. “아브라함 너 이리와봐 너 믿음 있나?” “믿음 있습니다.” “믿음 있으면 한번 보자, 1번 사도신경 외워봐.”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합격”, “주기도문 해봐” “합격” “20점” 그 다음에 예수님 “12제자 몇 명?” “12명” “옳지 잘했어요.” “천지창조는 며칠 만에?” “7일 만에” “아이고 40점” “어이고 100점 만점 믿음 있구나,” 이렇게 시험 쳐서 합격했습니까? 볼펜으로 넘어가는 시험이 아니었어요. 또 면접 봤습니까? “차렷, 열중쉬어 차렷 똑바로 한다. 앞으로 행동 똑바로 한다. 앞으로 말씀지킬거야 안지킬꺼야?” “지키겠습니다.” “복창소리봐라” “지키겠습니다.” “좋다, 합격” 이랬습니까? 오늘날 교회 하는 것처럼 손들고 회개하고 무릎 꿇고 손들고 나왔습니다. 우리 다 찬양합시다. 침례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자 합격 이랬습니까? 하나님께서 시험을 그렇게 쳤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험 치는 것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그 관계에 우리를 집어넣는 시험을 쳤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아버지께서 자식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사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사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성경을 보셨으면 알겠습니다만 성경은 뭐냐 하면 하나님 나라에 있는 사적인 가족문제, 하나님 가족문제가 그것이 그 결과로 우리에게 천국가게 되었다. 하나님 사적인 가족문제가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줬다. 이게 정답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족의 문제예요. 우리가 얼마나 구원을 받고싶어하고 우리가 얼마나 지옥을 피하고 싶고 우리가 얼마나 천국가고 싶어 하는가 이런 개인적인 열망은 전혀 구원에 필요치도 않고 도움도 안 되고 그런 것은 교회에서 위선자만 양산해요. “주여, 천국 가고 싶습니다.” 하면 목사가 “어이구 믿으면 좋습니다.” 자기들끼리 위로한답시고 “성도여 힘내세요, 십자가 지시기 바랍니다.” 져봐야 소용없습니다. 더, 더, 더 힘을 내고, 헌금 열심히 하고 충성해야지 구원받습니다. 예, 복 받습니다. 이것은 심심풀이 땅콩으로 심심해서 해보는 거고, 실제로 구원은 완전히 인간을 배제합니다.

 

인간을 배제해 버리고 하나님과 아버지 사이에 일어난 일에 그 구원받을 사람을 거기다가 참여 시키죠. 참여시킨다는 말은 결과로 그 일할 마당 장은 이미 주께서 마련하셨고 우리는 거기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이 말입니다. 들어가 보니까 거기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귀한 독생자 자식을 잃어버렸어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뭘 잃어버렸는가? 아브라함은 자기 이삭을 잡아야 되지요. 자식이 없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자식이 있는 사람은 알아요. 자식이 죽게 되면 죽은 자식을 부모가 잊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그 자식 죽음과 더불어 부모도 산자가 아니라 죽은 자가됩니다. 순간적으로 부모가 실성해요. 실성한다는 것은 신체가 있을 뿐이지 혼이 나간다는 거예요. 자식 죽었는데 부모도 같이 죽어요. 부모가 살아도 살고 싶지가 않아요. 자식을 시장 통에서 잃어버렸다는 지 자식이 없어버리면 자식뿐만 아니라 강아지도 마찬가지예요. 강아지 잃어버리면 애들 밥 안 먹잖아요. 고양이나 강아지 잃어버리면 밥 안 먹잖아요. 심지어 저 같은 경우에는 지우개를 잃어버려도 밥이 안 넘어가요. 볼펜잃어버고 지우개 잃어버려도 밥이 안 넘어가요. 자식이라 하는 것은 내 몸이 늘어난 것이 자식입니다. 자식이 따로 놀아도 자식이 밖에 있어도 자식이 안들어 오면 내가 안들어온거나 마찬가지예요. 내 일부가 아직 안 들어 온 거예요. 그러면 마음이 편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식이 죽는다는 것은 곧 내가 죽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죽어봤습니까? “내가 죽겠습니다." 하면 뭐도 같이 죽게되냐하면 나의 현재도 같이 없어져요. 죽는 마당에 나의 현재가 뭐가 있습니까? 죽는 마당에 내가 초등학교 때, 골목대장이었다는 그것은 소용 없는 거예요. 지금 내가 살아있을 현재일 경우에는 “야, 나 무시하지 마 나 7살 때, 골목대장이었어. 지금 살아있다는 폼을 내기 위해서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이 당당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7살 때, 골목 대장 한 이야기를 끄집어내는데 지금 내가 암이 걸려서 내일모레 죽는 마당에 “아이고 형제님 7살 때 골목대장이라면서요?” “지금 날 놀립니까?” 지금 내가 암으로 죽는데 골목대장하고 무슨관계가 있어요? 아무 관계가 없어요.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바치라는 말은 너와 너의 자식관계는 하나님과 하나님 자식관계에서 앞에서 아무가치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너의 과거와 현재와 연결고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현재 고리 앞에서 그것은 있으나 마나, 있어도 소용없고, 없어도 소용없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란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지금 여기 있는 나를 자꾸 천국에 보내려고해요. 나를 구원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 가겠다는 거예요? 네 마음대로 가라, 네 마음대로 가보시지 그곳이 천국인지, 누구 마음대로 넣어줘요. 천국의 주인이 누군데요? 천국은 하나님 아버지 나라인데 거기에 내가 구원받겠다고 설쳐봐야 거기에 자기세계에 따로 놀고 지옥가지요.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아들 사이에 확정되기 때문에 그 확정된 사이에 우리를 집어넣어주지 아니하면 다시 말해서 내가 이러한 세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나와 자식관계라든지 나와 내 아내관계라든지 그것은 별 볼일 없는 아주 무가치한 아무 의미 없는 무의미한 그러한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따로 우리의 구원을 또 고집하는 그런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2:6절을 다시 봅시다. “6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절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에 사람이 어디 나옵니까? 여기 사람 안 나오잖아요. 여기 누가 도와주고 협조하는 것 없지요? 여기서 구원받겠다고 설쳐 됐더니만 구원 주겠다, 없지요? 사람들이 ”예수님, 예수님이 죽어 줘야 구원받습니다." 라고 호소 하니까 예수님이 죽으셨습니까? 아니에요. 예수님 죽으라고 호소한 사람도 없고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끌고 간 사람도 없고 예수님이 순전히 자발적으로 죽으신 거예요. 자발적으로 십자가에 알아서 죽으신 거예요. 누가 날 죽이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스스로 죽는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내가 스스로 죽어요. 그것은 왜 그러냐하면 우리는 이미 사람한테 물어볼 필요 없이 아버지께서 이미 아버지와 아들이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약속된바 의해서 우리가 멍청히 있는 상태에서 이미 아버지와 아들이 이야기가 끝난 이야기입니다.”아버지여 저, 죽을게요. “ ”그래 너 죽어라 내 살려 줄게“ 그러면 천국 이루어집니까? 천국 이루어지지. 이야기가 끝난 이야기라니까요. 그러면 우리가 ”두 분 무슨이야기 하시는데요? 제가 좀 끼어들게요. “ ”저리가 네가 끼어들 이야기가 아니야“ 구원문제에 우리가 끼어들 게임이 아닙니다. 천국 가는 문제에 천국 가는 우리가 끼어들지 마세요.

 

천국가도 우리가 끼어들지 마세요. 여러분 참여한다는 얘기가 뭐냐 하면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그런 지시를 내리셨으면 이 관계 주께서 하나님의 본체시나 죽기까지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는 그 관계가 우리에게 덮쳐버리면 이 모습, 하나님같이 되신 분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신 이 노선에 다음에 이 노선이 남의 노선이 아니고 여기 참여된 오늘날 우리 성도가 가야할 이 코스로 이 결정적으로 말하는 겁니다. 우리 안에 이 코스가 길이 생겨요. 우리 안에 길이 생기는데 길이 생긴다니까 또 걱정하고 있네요. “목사님 우리가 십자가를 져야 됩니까?” 걱정하고 있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토지 보상금만 받으면 되고 우리 안에 토지공사가 길을 내도 우리는 소유권 이전만 하면 돼요. 십자가에 길을 하늘나라의 천사가 와서 불도저로 밀어붙일 때 "어 이거 내 땅인데 누가 불도저 갖고 미는데? 포클레인이 왜 왔어, 이거 내 땅인데" 이러지 말고 "이거 주님의 땅인데 앞으로 밀던지 뒤로 밀던지 십자가의 길만 쫙 내 주이소" "저는 내 안에 있는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아요." 그렇게 하면 됩니다. 오늘 너무 쉽게 얘기하네요. 표정들이 왜 그래요? 행복하지 않아요? 여러분들 이런 고속도로 없어요? 십자가의 길 없어요? 다들 하나씩 있잖아요. 개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성도의 인생길을 예수님 가신 십자가의 길을 되풀이 하는 용도로서 하나님께서 성도의 길을 빌려달라했어요. 너 가는 인생길에다가 내가 내 아들 죽었던 십자가의 길을 깔아 버린 겁니다. 깔아버리면 나의 역사, 나의 운명, 나의 미래, 나의 과거, 나의 현재는 날아가 버리고 그 자리에 뭐가깔리느냐하면 예수님의 과거와 예수님의 미래와 예수님의 현재가 우리의 역사를 대체 해 버립니다. 바꿔치기 해요. 바꿔치기 해버리면 우리 안에 고속도로가 놓이면 고속도로의 시공사가 어딥니까? 현대건설입니까? 어딥니까? 천국이죠. 천국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갑니까? 어디로 이어집니까? 천국까지 이어지지요. 그런데 여기에 누가 누워 있습니까? 내가 누워있는 겁니다. 고속도로에 깔리는 타일 아스팔트, 이걸 가지고 뭐라 하냐면 성경말씀 이라합니다. 성경말씀으로 쫙 깔아버려요. 성경말씀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리의 모든 출생부터 죽을 때까지 성경 말씀이 쫙 깔려버립니다. 깔려버리는데 이것을 수평적으로 여기는 창세기고 여기는 요한계시록이고 이렇게 깔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지금 예레미야를 통과하고 있는 게 아니고 우리 인생이 천으로 돼 있어가지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어느 순간을 폭 찔러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나오게 되어 있어요. 어느 순간을 찍어도 다 나오게 되어 있어요. 마치 목사님이 역대하 설교를 해도 역대하 천을 당겨버리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정신이 줄줄이 진주목걸이 구슬처럼 다 나와 있죠. 어느 부분을 폭 쑤셔도 2005년도의 내 인생은 어떤 인생이냐 교도소에 들어가 수감 중인데 그 수감 중인 데를 폭 쑤셔보면 그것은 말씀대로 수감되어야 해요. 1972년도에 나는 학교에서 엎어져서 무릎이 깨졌다. 왜 깨졌는가? 말씀대로 깨져야 된다. 그리고 2012년도에 말씀대로 되어야 돼요. 이것을 성경에 보면 모든 게 말씀대로 응하려 함이라. 그것을 제가 처음에 4자로 뭐라 했습니까? "인간배제" 철저히 모든지 인간배제 해 버립니다. 인간배제하면 누구도 배제된다.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나의 욕심도 같이 날아가 버려요. 지금까지는 아주 쉬운 이야기를 했어요. 여러분이 이제 출생부터 죽을 때까지 거기에 뭐가 깔린다? 고속도로 무슨 고속도로? 십자가라는 고속도로가 깔려 버려요. 그래서 모든 성경은 전부다 십자가로 이어져서 십자가 때문에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버리심으로 구원받은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우리가 아니고 자기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버리심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은 누가 받았어요? 우리가 받고 예수님 구원받고 다 같이 구원받은 거예요. 여기 고등어 그림 잊지 마세요.

 

그러면 무엇이 어려운 이야기인가 하면은 여기 우리 몸이 있잖아요. 우리 신체 있는데 우리 신체가 사람들은 나를 위한 신체예요. 자, 묻습니다. 목사님께 묻습니다. 김명현 목사님, 내가 신체부위에 어디에 있습니까? 머리에 있습니까? 엉덩이 있습니까? 손목에 있습니까? 내가 어디 있죠? 신체부위 가운데서? 없지요? 없습니다. "나"라는 게요 거짓말입니다. 없는 "나"를 사람들은 자꾸 만들어내요. 이것을 제가 안산 강의에서 오늘 했습니다. 자아와 나 사이에서 자아라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 따라서 자꾸 변하고 변하는 것을 "요기 있다" 딱 잡아서 요게 "나"다. 할 때 그게 나, 나는 자아가 마음에 안 들어서 자꾸 나도 잡았다가 또 마음에 안 들면 자아를 바꿨다가 마음에 들면 나로 만들었다 또 마음에 안 들면 또 자아로 왔다 바꾸고……. 혼자 왔다 갔다, 둘 다 거짓말 이예요. 둘 다 자아가 없어요. 성경은 나 소유자가 누구라고 하냐면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나 소유자가 거짓말쟁이인 나, 내가 내 것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내 신체에서 "나"를 떼어버리세요. 내 신체 아니고 누구신체냐하면 예수님 것이에요. "목사님 그거 성경에 나옵니까? 거짓말 하지 마세요." 이렇게 나오면 곤란해요. 왜냐하면 고린도전서에 보면 "우리는 주의 것이니" 우리는 주의 것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그것을 농담인줄 알았어요. 괜히 한소리 해 보는 구나로 알았어요. 내 몸은 내 몸이 아니고 주의 것이라는 것을 진담으로 듣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더 이상 네가, 더 이상 거짓말로 그동안 구라로 내 몸을 내 것이라고 하는 것에 손을 떼고 이제는 날 위해 살지 않고 날 위해 죽었다 살아나신 원래 주인인 예수님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해놓고 그 뒤에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이니라. 여러분, 내 것에서 주님의 것으로 소유권 바뀌는데 그렇게 교회에 돈 받치고 할 필요 없어요. 철야기도 할 필요 없습니다. 그냥 사시는 대로 사세요.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그냥 화장실에 가시고 떡이 먹고 싶으면 떡 그냥 잡수시고 잠이 오면 그냥 엎어져 주무시면 됩니다. 다만 주무실 때도 그 주무시는 것이 주님의 몸이 주무신다고 생각하시고 오줌 눌 때도 주님 몸에서 오줌이 나온다고 보시면 돼요. 소유권이 처음에는 잘 안 바꿔집니다. 왜냐하면 버릇이되 가지고 정말로 소유권이 바뀐 사람은 누가 한대 치면 "이게 어디 주님의 것을 치노" 이렇게 되어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보통 치면 "이게 당신이 왜 나를 때로노" 이렇게 되지요. 나는 없고 주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욥기에 보면 뭐라 했냐하면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가져 가신자도 하나님" 그런데 우리의 것을 가지고 만약의 음식 쓰레기라고 생각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제발 얼른 가져가기를 바라겠지요. 화, 목, 일 오후에 밤에 우리는 3차례씩 4리터짜리 내놓습니다. 내 놓으면 음식쓰레기 비워 갑니다. 저는 그때만 기다립니다. 왜 속이 다 시원합니다. 집에 음식 쓰레기 있으면 안돼요. 살림살이 하는 사람은 한결같은 마음 이예요. 집에 고기 뼈다귀 있으면 귀찮아요. 제발 치워줬으면 하는 것처럼 여러분들이 골치스럽습니까? 여러분들 마음대로 안 됩니까? 그러면 기도하세요. 치워달라고……. 내가 자살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주인이 아니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에게 자식이 태어났다. 자식이 왜 태어났는가? 왜 태어났냐하면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버리신 그 아픔과 고통을 이해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 또 자식이 태어났어요. 여러분에게 아내가 있습니다. 아내를 왜 줬습니까? 주님을 섬길 때는 아내처럼 섬기는 것이라고 보여주기 위해서 왜 그렇습니까? 모든 것이 내 몸, 상대방 몸 전부가 다 내 것이 아니고 상대방의 몸이 상대방 몸이 아니고 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간증하시기 위해서 배치된 배치물이고 증거물이기 때문입니다.

 

2010-01-02 10:07:46 녹취 : 김창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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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091211빌2장6절b

 

빌립보서 제9강

(이근호 목사 2009년 12월 11일 [2]) 서울의존교회

 

둘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천국에서는 시집도 안가고 장가도 아니 가고 천국에서는 모두 천사와 같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천국에 가는 사람들은 해와 같이 빛나리라 이 모든 것이 천사와 같다 해와 같이 빛난다. 천국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이게 다 어디서 나왔냐하면 이게 우리 몸이 아니고 우리 안에 주님의 요소가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 몸이 주님의 것으로 노골적으로 변화 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죽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으면서 우리의 품성 우리의 마음가짐부터 우리의 속에 역사부터 교체작업이 시작되는 겁니다. 제가 첫째시간 마지막에 뭐라했냐하면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누구 것이라고 했습니까? 내 몸은 예수님 것이에요. 그런데 사나 죽으나 우리는 누구의 것이다? 우리는 살아도 주의 것이요, 죽어도 주의 것이다. 사나 죽의나 누구 것이다? 주의 것인데 걱정을 왜 내가 합니까? 죽는 것을 내가 왜 걱정해요. 내가 쓸데없이 나의 어설픈 과거, 감추고 싶은 과거, 왜 자기가 걱정하고, 염려하고 두려워합니까? 우리가 죄를 져도 보통 죄 짓는 게 아녜요. 염려하는 것조차도 죄가 되는 겁니다. 착각하고 있어요. 내 몸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사서 고생해요. 제가 고등학교 때 얼마나 감수성이 심했는지 귤을 보고서도 “불쌍한 귤, 너의 피부는 갈기갈기 찢어졌구나, 이 나쁜 인간들 누가 널 찢었어,” 만약에 제가 귤보고 이렇게 얘기하면 귤이 뭐라 하겠습니까? “놀고 있네…….네 걱정이나 하세요, 남의 걱정하지 말고” 지금 우리가 우리 인생을 걱정을 하면 주님께서 뭐라하냐하면 “놀고 있네. 니걱정이나 하세요. 남의 걱정 하지 말고” 지금 우리가 우리 인생을 걱정하면 주님께서 뭐라하냐하면 “놀고 있네. 니몸은 없어. 없는 몸을 붙들고 지금 귀신 붙들고 얘기 하나? 니몸은 내가 알아서 관리하는데 니가 왜 주제넘게 걱정하는냐," 우리가 미래에 가서 어떻게 될지는 우리 속에 말씀이 들어오면 성경말씀대로 우리는 어디 가냐 하면 생명수 물가에서 자유형? 배형? 접형? 완전히 박태환처럼 박태환이 예수 믿는지 모르겠지만 생명수 강가에서 헤엄치고 있어요. 거기에 아마 사마리아 여인 만 날거예요. 물동이 벗은 사마리아 여인도 만날거고 거기에 같은 주님의 것들을 만날꺼예요. 베드로라는 주님의 것, 엘리야라는 주님의 것, 모세라는 주님의 것, 사도바울이라는 주님의 것, 그런 사람들을 다 만날꺼예요. 그런 사람들이 한결같이 무엇을 보느냐 하면 예수님의 창 자국, 못 자국을 보면서 거기서 나온 피와 물과 살이 우리를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것으로 다시 제조 했다는 사실을, 천사처럼 만들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될 거예요. 그래서 내 것을 내 것이라 하는 자가 일체 없을 거예요.

 

사도행전에 보면 바로 초대교회가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없다고 되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성령이 오게 되면 잠시 잠깐이지만 무슨 맛을 보냐하면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짧은 순간이지만 성령이 오게 되면 "아, 내 몸이 주님의 것이지"라는 스쳐지나가는 듯이 내 몸은 내 것이 아니야 내가 걱정할 필요 없어 짧은 순간이지만 그것을 경험하게 되요. 체험하게 돼요. 그걸 가지고 어려운 용어로 "파토스 [pathos]" 무슨 뜻이냐 하면 수동적 희열을 말해요. 쉽게 말해서 "어쩔 수 없다" 내 몸이 주님의 몸이라고 알게 된 것은 내가 어쩔 수 없어.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 되는 게 아니고 어쩔 수 없는 게 느껴져요. 이게 수동적인, 능동적인 감동이 아니고 내가 손뼉 쳐서 은혜 받는 게 아니고 내가 가만히 있는데, 설거지 하다가도 밀려와요. "설거지 하는 춘자야!" "예" "네 몸은 니몸이 아니고 내 몸이다." "아멘, 할렐루야" 설거지하면서 너무 좋아서 그릇이 깨져도, 접시가 깨져도 “춘자야, 접시 니꺼 아니지?" "아멘" "치워라 빨리 다친다, 네 새끼 학교에서 올 시간 됐다. 빨리 치워라 다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 있어서 귀신이 있어서 시키는 대로 움직여요. 내 몸은 내 몸이 아니기 때문에 목적이 있어요. 내 몸은 내 몸이 아니기에 목적이 있어요. 그 목적을 성경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복음이라 해요. 복음을 위하여 네 몸을 굴려라. 복음을 위하여 굴려라 했지만 사실 아까 그림, 우리 몸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우리 몸에 무슨 길이 나 있다고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자기 하나님과 동등 되심을 포기하시고 죽기까지 십자가에 죽으셨던 그 길이 어디에 카피가 되어 있다? 카피정도가 아니고 실제로 우리 몸에 그게 그대로 재현되지요. 되풀이되지요. 되풀이되면 고등어처럼 되풀이 되면 이거 하나 하나에 깔린 아스팔트가 뭐라 했습니다. 뭐하고 같다? "말씀" 말씀대로 되는 거예요. 말씀대로 되니까 사람의 육은 풀과 같이 다 쇠하여 지지만 무엇은 영원하다? 말씀은 영원하다.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무엇으로 산다? 말씀으로 산다. 우리가 살고 싶다고 사는 게 아녜요. 살려주는 이유가 있습니다. 뭐냐 복음을 위해서 살라고 하면 더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목사님 아버님도 복음을 위해서 살라면 더 살아야 돼요. 죽고 싶다고 해도 못 죽어요. 또 복음을 위해서 순교하라면 순교해야 되고 내가 내 마음대로 안 됩니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고 복음을 위해서 웃을 때도 있고, 복음을 위해서 울 때도 있는 거예요. 김성환 목사님은 복음 외치다가 교회에서 얼마 전에 쫓겨났어요. 십자가 마을에다 피 이야기 하고 그러니까 쫓겨났어요. 여러분들 안 쫓겨났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그것도 복음을 위하여 그럴 때 베드로전서 보면 "네가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을 때 얼씨구나 좋아해라, 왜?, 성령이 너희 머리 위에 머물러 있다." 무슨 말이야 하면 "이제 알았느냐? 네 몸이 니꺼 아닌걸.. 이제 알았어. 니몸은 이미 복음을 위하여 쓰인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느뇨?" 이 말입니다. 그거 한 5초갑니다. 그거 5초 지나고 나면 "하나님이여 제가 복음만 전했는데, 왜 쫓아냅니까? 가족들 길바닥에 나 앉았는데, 저 어떻게 삽니까? 아, 그 때 좀 참을 껄 복음이야기 하지 말걸, 그 때 눈치 봐 가며 살걸……." 그렇게 되지요. 마치 뭔가 실수한 것처럼 복음 전파한 것이 실수한 것처럼, 해선 안 될 것을 한 것처럼 그런 자책감도 들고 "이 바보 등신이야 복음이 밥 먹어 주나, 복음이 밥먹여 주지 않는데…….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나. 내가 왜 바보지, 바보지……." 이런 생각이 마구 들지요.

 

 

 

이제 그것을 설명차례가 왔습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대로 하니까 탄탄대로 알려 드렸지만 이게 탄탄대로가 아니고 다시 보겠습니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와요 어떻게 내려오냐하면 2층은 무슨나라? 하늘나라, 아랫층은 무슨나라? 십자가니까 십자가는 저주받는 거예요. 십자가는 저주받은 거라는 게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저주받아 죽으십니다. 실패죠,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하나님이시면서도 아무도 가지 않는 아무도 가지 않으려고 하는 십자가의 죽으심까지 복종하십니다. 이 코스를 그대로 우리에게 집어넣어 주면 우리는 실패하는 인생에서 뭐로 올라가느냐 하면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유명세를 띄우고 싶어요. 우리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예수님은 저 낮은 곳을 향하여 주님은 찬양을 부릅니다. "저 낮은 곳을 향하여~" 우리는 "저높은 곳을 향하여~" 주께서는 "눈깔아"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자기의 가치를 쓰레기가 아닌 쪽으로 천사처럼 여기려고 합니다. 어떤 분이 "목사님은 목사님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쓰레기라 생각합니다." "목사님 그 말에 책임지십니까? 성경에 나옵니까?" "나옵니다." "목사가 쓰레기란 말이 어디 나옵니까?" 고린도전서 4장에 나와요. 사도바울이 우리가 만물에 쓰레기같이 되었다라고 나옵니다. 이것을 시찰할 때 이 설교를 했어요. 밉상 받지요. 결국은 그들이 하는 말은 무엇이냐 "목사님, 목사님 우리들끼리만 이야기 하고 평신도들에게는 이야기 하지 마세요. 목사들끼리만 있을 때 이것을 이야기하고 평신도들에게 이야기하면 무시해서 목사권위가 팍 떨어지니까 이야기 하지 마세요." 아직도 자기관리해요. 자기 몸을 자기가 관리해서 관리된 인간을 천국에 집어넣으려고 해요. 그러면 뭐가 계시냐 하면 진짜 말씀이 계시가 아니고 자기가 과거에 했던 것 중에서 괜찮은 것, 앞으로 할 것 중에서 괜찮은 계획, 그런 것을 모아 모아서 현재의 자아를 이루는 자신의 계시를 신의 계시로 간주해 버립니다.

 

고등학생들이 일본 귀신을 보고 싶다고 볼펜 두 자루 들고 책상에 앉아서 분신사바사바 하죠. 왜 그렇게 하냐면 귀신이 보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오늘날 그거나 오늘날 교인들이 박수치고 떠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성령이 보고 싶어서 환장한 거예요. 저는 그런 사람에게 얘기합니다. "귀신보고 싶냐?" "보고 싶습니다. 저 뒤에 계신 분은 우리의 귀신이 아닙니다. 진짜 귀신이 보고 싶습니다." "네가 귀신이야, 네가 귀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이게 귀신 이예요. 이게 마귀의 실상입니다. 주님께서는 쉽게 얘기해서 이런 경우, 수학여행가서 선생님이 방을 배치해 주는데 애들이 욕심이 많아가지고 아주 좋은 쾌적하고 아주 좋은 방이 하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애들이 그 방을 차지하려고 막 들어가요. 그러면 선생님께서 "얘야 그 방 들어가지 말고 이리와 너는 이방에 들어가" 하고 집어 넣어줍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찾아오시면 우리로 하여금 그 출발점을 어디로 잡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지상에 있는 우리와 접촉한 지점으로 봐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가 바로 예수님께서 영과 육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십자가 죽으심,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지상생활을 뺑뺑이 도시다가 어디로 가셨습니까? 결국은 어디로 사라져 하늘나라에 갔습니까? 그 사라진 구멍이 뭡니까? 십자가지요. 그 십자가가 육에서 영으로 바뀌는 유일한 튜브가 됩니다. 튜브[tube]=관, 유일한 파이프가 뭐냐 하면 십자가예요. 십자가 통과하면 구원이요, 십자가 통과하지 못하면 저주스런 육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지점을 알려주고 안 알려 주고 그게 뭐냐 하면 성령이 임한 사람은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이 된 진리인줄 아는 사람이고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십자가에 피하지 않고 엉뚱한데 분신사바사바 이거, 은혜 받는 기도원에 기도하고 박수치고 있는 거, 이것은 십자가 없는 곳에서……. 그럼 목사님 십자가 통과한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십자가라는 것은 통과를 못해요 왜냐하면 십자가는 캡슐, 또는 버블(비눗방울) 같아서 십자가 안에서 우리가 들어가 있어서 십자가가 뜨면 같이 떠서 곱게 천국 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보는 대목이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보면 나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세상은 죽은자요 세상은 십자가 밖에서 죽은자라 하는 거죠. 세상은 사람들이 보기에 십자가 안에 사는 우리가 죽은자요 우리가 십자가 안에서 보니 세상이 죽은자요. 십자가라는 보호막이 우리를 천국으로 무사히 데려갑니다. 왜? 밖은 무슨 세계냐 하면 밖은 율법의 세계에요 율법의 세계이기 때문에 율법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거기서 심판이 있죠. 법대로 해서 성경말씀 지켜서 이거 했냐 말이야? 자꾸 따지게 되고 잔소리 하고 율법대로 안하면 저주를 받아요. 그럼 율법대로 지키면 될 것 아닙니까? 율법대로 지킬 위인이 이 세상에 없어요. 예수님 빼놓고 율법을 지킬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을 준 이유가 뭐냐 하면 원래 너 못 지킨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주신 겁니다. 로마서 3장 4절에 나옵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하나님은 참되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어요. 율법이 오기 전까지는 자기 딴에는 착하다고 자기 딴에는 깨끗하다고 여겼는데 막상 율법이 와서 보니까 율법이 들어오니까 내 속에 잠자고 있던 으르렁 거리던 멧돼지나 사자나 호랑이 같은 이 더러운 뱀, 일곱 마리 뱀, 이게 율법이 들어오니까 갑자기 이 뱀이 발작을 하면서 율법 때문에 내 안에 잠자고 있는 죄성 더욱더 노골화되고 구체화 되는 겁니다. 하지말라하면 더하고 싶은 거예요. "귤 껍질 만지지 마라" 이러면 더 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애들한테 공부하지 말라고 해야 돼요. 제발 좀 공부하지 마라. 공부 하면 막 패야되요. 내가 공부하지 말라 했지? 그럼 애가 뭐라 합니까? 공부할래, 공부할래, 그럼 공부해라. 사람이라 하는 것은 안에 율법을 반대하는 하나님의 법을 싫어하는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요소가 안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법이 안 들어오면 천하에 착한 사람 되지만 막상 하나님의 법을 들이대면 사람은 화를 왈칵 드러냅니다.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노숙자한테 "힘들지요?" "힘들어요." "입는 걸로 족한 줄 아시요" 라고 하면 그 노숙자는 죽일라고 달려 들 겁니다. 사업 부도난 사람에게 "사장님 부도났습니까?" "예" "먹는 걸로 족한 줄 아세요. 디모데전서 이야기입니다."하면 성경책 불태우려고 할 겁니다.

 

 

 

성경이 없는 사람은 다 훌륭한 사람들이예요. 그런데 성경이 있는 그 순간부터 바로 예수라도 죽일 사람으로 돌변해 버립니다. 그게 우리 모습 이예요. 이런 모습을 이런 율법의 저주를 우린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버블버블 십자가란 비눗방울로 해 버리니까 모든 저주가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녹아져 내려 버리죠. 오는 저주, 오는 화살, 어떤 저주가 오더라도 어린양의 피를 보고 저주가 다 되돌아 가버려요. 율법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율법이 막 쏘아 데는 겁니다. 백제군이 왔을 때 김유신 군대가 활을 막 쏩니다. 백제군의 계백장군은 놀라 돌아가 버리고 덕만이는 여왕이 되가지고 .. 비담이는 좋아서 옆에 있고...

 

예수님이 왕이시니까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이런관계가 예수님 공로인데 예수님 공로란 말은 그 안에 보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자식을 버린 그 댓가 로 우리에게 이런 혜택이 주어진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고등어같은 이 사이에 말씀이 들어가면 십자가 길, 여기서 우리는 무슨 경험을 해야 되느냐하면 우리 자신이 죽어 마땅하다는 경험을 말씀이 덮치면서 그때 순간 순간 느껴야 됩니다.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아직도 살려 주십니까? 고맙습니다. 죽어 마땅한데 왠 귤이십니까? 한개 더 먹고 죽겠습니다. 이런거예요. 모든지 나는 저주 받아 마땅한데 이렇게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복음이 나에게 덮쳤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해서 나는 십자가와 더불어 산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또 우리에게 귤 주시고, 또 하루를 살게 해 주시고... 이렇게 살아 가는 겁니다. 지금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여러분 영 도움이 안될꺼예요. 왜 도움이 안되냐면 목사님이 아무리 그렇게 이야기 하셔도 저는 태생이 이기주의입니다. 전 나밖에 몰라요. 나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예수님 이야기 해 봐야 그냥 발길로 차 버립니다. 이렇게 나올꺼예요. 그래도 과연 구원됩니까? 네, 구원 됩니다. 발길로 차는 것도 주님을 위해서 차기 때문이예요. 오늘 참 희한하게 책임 못질 이야기가 막 나오고 있죠... 여기 보세요. 십자가=비누방울(바블), 또는 풍선이 있는데, 밖에 예수님 십자가 있습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버렸다(잃어버렸다)가 주어집니다. 막상 우리는 우리의 습관은 뭐냐하면 나의 확장입니다. 내가 나를 계속해서 잃지 않고 키워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잃어버린 것이고 나는 잃어버린다의 정 반대로 나를 계속해서 키워 내는 거예요. 키워내면 나만 출세하고 나만 성공하기위해서 계속 나가게 되면 여기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나때문에 피해자들, 내 성공을 위해서 억울하게 눈물 흘려야 하고 나때문에 괴로움을 당해야 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등장하는 겁니다. 등장하게 되면 이사람들은 어느 노선이냐 하면 자기 아들을 버렸다는 이 노선에 해당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기주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뭐만 자꾸 생산하느냐 하면 나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만 나한테서 계속해서 늘어나는거예요. 그 억울한 사람들이 거기 모이게 되면 그게 뭐냐면 나는 십자가안에 둘러쌓인 샘이 되는 거예요. 아 십자가 안에 둘려 쌓였구나 제가 이런얘기 왜 하냐하면 저는 오늘 목사님 말씀듣고 은혜 받았습니다. 저는 십자가의 길을 가겠습니다.하고 나온다면 그 사람은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이예요. 왜냐하면 십자가라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가 착해지면 안돼요. 내가 이기주의를 유지해야돼요. 오늘 책임지지 못할 말들이 계속 나오고 이쓴데...

 

여러분 내가 착해져 버리면 나때문에 피해볼 사람이 없잖아요. 제가 아침에 산책을 하게 되면 종이떨어진 것을 줍는데 왕복 5키로 되는데... 재미난 사실은 제가 줍고 있으면 앞에서 버리고 있어요. 아주 재밌다. 참 재밌다. 제가 그걸 보면서 뭘 느끼느냐하면 한번 따라해 보세요. "짝" 세트, 작을 이루는 겁니다. 한쪽은 줍고 한쪽은 버린다. 버리는 사람이 있기때문에 줍는 사람이 착한 짓이 되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착한짓을 한 것을 위해서 우리는 나쁜짓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로마서 6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십자가 이야기 하니까 유대인들이 뭐라하냐면 "그렇다면 하나님을 더욱더 영광돌리고 은혜되기 위해서 우리는 더욱더 죄를 지어야 되겠네..." 라고 이야기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복음을 전하는데 그런얘기를 못들으면 복음을 잘못 전하는 거예요. 바로 육에 속한 사람은 기준이 뭡니까? 기준이 자기 행위에 대한 기준이기 때문에 제가 이대목 어렵다 했지요. 몰라도 아는척하세요. 사람이 자기 행위하는 것을 정당화 하기 때문에 "내가 나쁜짓을 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높아 지니까 앞으로 내가 나쁜짓 할꺼야" 라는 놈은 지옥가고, "주님의 십자가 때문에 내가 나쁜짓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천국가는 거예요. 이말이 어렵습니까? 안 어렵습니까? 그 차이점? 모르겠지요? 다시하겠습니다. 인간은 자기 행동을 정당화 하기 때문에 "나는 잘못이 없다. 왜? 나는 예수님의 공로를 높이기 위해서 나는 나쁜짓만 골라 할꺼야, 나쁜짓만 골라하는 나는 예수님의 공로를 높이기때문에 나는 정당하다"라고 말하고 "예수님의 공로때문에 나는 나쁜짓을 할 수 밖에 없어"하고 두 말의 문장의 차이점이 뭐냐하면 한쪽은 계속해서 자기 정당성을 고집하고 있고 진짜 성도는 나는 무슨 짓을 해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아무리 착한일을 해도 주님의 십자가를 더 높이기 위한 나쁜짓에 해당된다고 보는거예요. 내가 남을 위해서 신장을 떼어주고 내가 헌혈을 하고 내가 길에 나가 전도를 한다 할지라도 이것 마져도 예수님의 공로만 선하다는 것을 끌어내기 위한 내가 죄짓는 일을 주께서 시켰다는 겁니다. 그런데 똑같은 방금한 이야기를 불신자가 보고 하는 말이 "야, 그거 멋지다, 사도바울이 정말 그말 했지?" "했다" "그러면 내가 반박할께 잘 들어봐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계속해서 우리가 나쁜 짓을 해야 되겠네" 라고 로마서 3장 7절에서 했어요. 한번 봅시다. 7절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니까 은혜가 넘치는 곳에 죄가 넘친다고 하니까 "야 그거 참 멋진 말이다. 듣던 중 기쁜 소리다, 나 믿을게" 이런 식으로 하면서 자기의 행동하는 것을 자기 정당화 하는 그런 사람이 있더란 말이죠. 그건 정당화 되지 못하는데 그 이유가 뭐냐, 이미 성도는 죄에 죽은 자이기 때문에 뭐만 나온다? 죄가 나오죠. 달리 말하면 죄에 죽은 자이기 때문에 성도는 계속해서 죽어야 될 이유만 계속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결국은 성도는 죽잖아요. 성도는 죽어가면서 내가 죽어야 될 이유를 계속 보여주면서 죽어가고 있고 불신자는 죽어가면서도 곧잘 자기 잘났다고 하면서 죽어가고 있고……. 그런데 둘 다 그 몸은 예수님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는 진노의 그릇, 하나는 사랑의 그릇을 보여주기 위해서 둘 다 그렇게 만들어낸거예요. 그걸 세트 그것을 뭐라 했습니까? "짝" 다시 산책길 얘기하면 나는 귤껍데기를 줍고 있는데, 그 사람은 버리고 있어요. 그러면 저는 뒤에서 다시 그것을 줍고, 또 버리고 있다고요. 버리고 있고 줍고 있든 간에 다만 제가 느낀 것은 그렇게 해서 5km를 갔다 오니까 내가 운동이 되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뱃살이 들어갔어요. 이렇게 길에 휴지를 주으면 어떤 사람은 이래요 "아이고 수고하십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나는 줍기는 싫고 버리지도 않겠다는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제가 "지금 운동하는 중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운동을 시키냐면 우리로 하여금 나를 잃어버리면,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그 죗값을, 죄는 그 사람이 짓고 피해는 우리가 본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감사히 기꺼이 수용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죄짓고 내가 만약에 죄지은 것 때문에 피해를 본다고 내가 화를 낸다면 나는 죄에 죽은 자가 아니고 마치 내가 엄연히 아직도 펄펄 살아있는 사람이 되잖아요. 오늘 참 어렵다, 너무 어려워요,

 

정리합시다. 하나님께 고함친다고 될 문제가 아녜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심은 남이 죄를 지었는데 우리가 피해를 보므로 말미암아 내가 바로 예수님 앞에서 이처럼 죄 지어서 예수님을 아프게 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런 죄악된 세상에 그대로 집어넣는 일을 하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이미 죄에 죽은 자라는 것에도 불구하고 "억울합니다." 이렇게 나온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자기 정당성 때문에 구원 받은사람인줄 여기는 사람밖에 아니거든요. 자기 정당성이 있으면 누가 모독 받습니까? 나를 죄인이라고 간주하고 대신 피흘리신 그분의 희생이 모독 받잖아요. 그분이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요. 주님은 근호야, 나 니때문에 죽는다 했는데, 주님 저 잘났는데요. 이렇게 하면 주님의 피가 어떻게 돼요? "공연히 흘렸어, 억울해 공연히 흘렸어……." 그렇게 되잖아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에 집어넣은 것은 우리보고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 아니고 이미 십자가는 누가 졌다? 예수님이 졌는데 문제는 이세상의 환경이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수밖에 없는 환경인 것을 우리 가당치 않은 이 몸 가지고 체험해 보라 이말 이예요. 그 체험하면 앞에서는 휴지 버리고 나는 뒤에서는 줍고 하면 그 순간 주울 때마다 나는 무엇을 느낍니까? 내 정당성을 잃어버려야겠죠. "나는 무슨 죄를 이런 짓을 하니?"라고 우긴다면 자기 아집, 자기 정당화를 하는 거잖아요. 주님이시여 보시옵소서. 지금 복 받을 짓을 하고 있잖아요. 이런 것이 되잖아요. 이런 것, 자기 자랑도 잊어버려야 한다니까요. 그 잃어버림이 뭐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그 착하신 그 의인이신 자기 아들을 죄 많은 우리를 위해서 대신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이 선물로 주어진 거예요. 이게 복음, 기독교입니다. 인간을 배제해요. 인간을 배제하고 하나님께서 자기아들을 버리심으로 우리를 위해서 버려주심으로 그분 때문에 우리가 가만히 있는데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분이 오면 우리는 가만있지 못하죠. 그분의 자아 잃어버린 자존심 잃어버림 하늘나라 영광 잃어버림 모든 그런 경험을 우리가 이 땅에서 실제로 체험케하는 겁니다.

 

가까운 교회에서요, 목사님들 계시지만, 목회한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목사님의 말을 들어먹지를 못해요. 목사님이 무슨말을 하면 못 알아들어요. 목사님이 설교해서 딱 던지는 말이 뭐냐 하면 뒤에 뭐가 붙어있어요. "제발 희생해 주시고, 제발 양보해 주시고, 제발 참으세요."란 말이 모든 목사님 설교에 다 붙어 있어요. 그런데 교인들은 제발 희생해 주시고, 양보해 주시고, 참으세요. 이것을 떼어 버리고 나는 이만큼 기도했다, 이만큼 안다, 이만큼 헌금했다. 뒤에 그것을 빼 버려요. "이만큼 헌금하셨습니까?" "예" 그러면 "제발 참아주세요" "안 알아줘도, 봉사 많이 했습니까?" "예" "그럼 제발 계속 희생해 주세요."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면 이것을 떼어 버리면 "목사님 이 교회에서 헌금 제일 많이하고 봉사 제일 많이 하는데 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봅니까?" "나는 다른 교회 가렵니다." 그러면 뒤에 희생과 양보와 참으란 말은 결국은 그 사람은 내가 돈 냈다 이거예요. 복음을 아는 목사님은 헌금하면서 십자가를 한번 보세요. 헌금하는 당신의 희생이 센지, 그것 때문에 구원받았는지, 아니면 지금 당신이 헌금하게 하신 십자가에 지신, 피 흘리신 예수님께서 당신보고 예수님의 십자가 알라고 헌금을 했는지 그것을 예수님과 한번 연관을 시켜보세요. 그런 의미에서 목사님들이 설교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서는 봉사 많이 하고 희생 많이 하는 사람 상당히 위험해요. 얼마 전에 우리교회 교인들도 우르르 나간 것도 희생하고 봉사하다가 다 나갔어요. 그럼 그 다음 차례는 누가 나가냐 하면 그 다음에 봉사하고 희생한 사람들이 또 나갈꺼예요. 헌금 좀 하는 사람 또 나오고……. 이상해 아주 이상해 교회라는 것이 아주 이상해요. 주님이 계신 곳이 아니고 사람들끼리만 모였어요. 괜찮은 사람들만 다 모였어요. 한번 맞아야돼요. 십자가가 없어요. 그래서 오늘날 교회가 뭐냐 하면 돈 낸 사람, 감사헌금 내면 그것 불러서 보란 듯이 돈좀 내라는 듯이 "오늘 김 아무개 장로님 감사헌금 2천만원 냈습니다. 2천만원 냈습니다. 우리 김 집사님 이사했다고 20만원 냈습니다. 20만원, 최집사님 아들 고대 들어갔다고 50만원 냈는데 서울대 들어간 사람 뭐하고 있습니까?" 이게 무슨 교회이고 십자가 입니까? 그래서 제가 이야기 한 가지 우리교회 특징은 돈 있을 때는 다른 교회에 헌금 내면서 표 다 내다가 사업망해서 다 털어먹고 우리교회 와가지고 헌금 안 해도 된다하니까 우리교회 다 와요. 그런데 그분이 다시 사업 성공하면 다른 교회 또 갈꺼예요. 표내야죠 자기 잘난거…….그래서 나온 게 헌금해도 뭐다? 죄인인 것을 드러내 기위해서 왜? 우린 이미 죄에 대해서 죽은 자란 것을 끌어내기 위해서 주께서 헌금 시키신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거, 우리의 현재, 우리의 미래는 아예 없어요. 아예 없고, 이 신체 자체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신체입니다.

 

제가 식당에 들어갔는데 식당 주인이 뭐라고 써놨냐면 "신발 바꿔까지 마세요. CCTV 촬영" 이렇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말이 뭐냐 하면 지금 우리의 신발은 십자가에만 맞도록 되어 있어요. 십자가에 맞으면 그 신발이 우리를 버블버블 해서 구원받는데, 우린 십자가에다 신발 끼우는 것이 아니고 좋은 신발에다가 끼어 넣어 가지고 그것이 내 존재의 기반이 되어서 나를 천국 보내려고 기도 하고 있습니다. 왜 신발을 십자가에서 바꾸려고 하는가? 괜찮은 신발이 나를 더 괜찮게 만들어 버리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란 말이 이 십자가 속에 있을 때만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자 맞구나. 왜? 우리 죄때문에 예수님이 죽었으니까. 십자가에서 육인 내가 영과 유일하게 만나는 지점이 십자가입니다. 그 곳에서 나도 죽고, 예수님도 죽고 같이 죽는 입장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부활되는 거예요. 우리가 부활하고 싶어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신 분이 부활되니까 우리가 따라서 신발자체(십자가)가 내 신발이 아니라 예수님 신발이예요. 예수님 신발에 신으니까 우리가 예수님 신발 때문에 구원받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 신발을 원하는 게 아니고 내 신발을 원해요. 사람들은 내 신발을 원해요. 이렇게 합시다. 현재 우리가 이빨이 빠졌습니까? 눈이 침침합니까? 어쨌던간에 이 전체를 예수님의 신발로 간주합시다. 이 몸 전체를 그러면 이 몸 전체는 뭐냐?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여기에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것은 이 몸 가지고 뭘 느끼느냐하면 내가 이렇게 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게 왜 죄가 되느냐? 그것을 이제 살아가면서 파악하는 거죠. 그러면 목사님 너무 피해 망상적이고 염세주의고 허무주의가 안 됩니까? 이렇게 이야기 하실 분이 계시는데,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냐 하면 존재가 가벼울 때 제일 행복해요. 사람이 다이어트 하는 사람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 70kg, 80kg나가다가 저울이 잘못되어 50kg 나와 보세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습니다. "50이래 50, 나 그 목욕탕 또 가야지. 다른 목욕탕 가니까 70인데 그 목욕탕 50이래……." 기분 좋잖아요. 자기 존재에 모든 무게가 줄어들면 아예 처음부터 십자가 신발 신고 다니면 나는 원래 죄인이야 나는 원래 죄인이거든 이 한마디가 우리를 한 없이 가볍게 합니다. 우리 인생을 가볍게 만듭니다. 아내가 말하기를 "여보, 좀 일찍 들어와, 일찍 들어오란 말이야", 그런데 열심히 잔업하다 들어왔는데 잔소리하니까 "나는 잔업 냈어!" 이렇게 하지 말고 "그래, 나 같은 죄인에게 이렇게 잔소리하는 아내가 있으니 얼마나 감사하나" 이것도 바로 자기가 죄인일 때 그것도 감사가 되죠. 모든지 감사가 돼요. 그러면 가정이 행복 할 수밖에 없죠. 싸움이 될 수가 없어요. 그것도 모르고 만날 어디 명짧고 돈 많은 과부 없나 하고 찾아요. 팔자 고칠 생각만 하고, 돈 많고 명이 짧은지 명이 긴지를 어떻게 알아요. 그건 요양병원 가봐야 알아요. 그것도 계획적으로 요양병원 가서 "할머니, 어디가 편찮으신지요?" "세상에 이런 젊으니 처음 봤어. 내 유산 있는데 당신에게 유산을 맡기네." 그러면 그 상황부터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면 빨리 죽기를 바래요. 사람이 나는 죄 없다, 죄 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유산을 남긴다고 해보세요. 그 다음부터 여러분들은 그 사람이 빨리 죽기를 기다리는 그런 죄가 발생됩니다. 모든 인간이 아이큐 50이상은 다 그래요. 50이하는 그게 안 되지만 마라톤 했던 기봉이 빼놓고 다 그래요. 그 이상은 다 상속한다면 상속할 때부터 죽어라, 죽어라, 진짜 안 죽으면 목이라도 졸를참이예요. 이것이 인간의 자기도 모르는 인간의 마음이 그래요. 마음이 그런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젊은이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그런 소리 안합니다. 젊은이여, 인생을 살아봐라,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내 몸이 내 마음대로 안 되고 오직 주님께서 건전지 회수하듯이 자기 몸을 회수 하고 있다고요. 전도서에 마지막 때에 심판받기 전에 젊은 사람들이여, 마지막 날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되어 있습니다. 네 몸은 하나에 심판의 대상에 불과하다는 이 말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복음이 뭘 하면 성격이 뭐냐 하면 목사님 말씀만하시면 "제가 믿겠나이다. 십자가 믿을 게요." 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사람이 이중인격자 지식으로 많은 상식으로 "예수님 제자는?" "12명", 상식이 풍부하지만, "성경 끝은?" "요한계시록", 그런 것 아는 것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뭐냐 하면 그냥 사세요. 그냥 사시되 내가 사는 게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몸으로 오늘도 하루 살았다. 그렇게 사세요. 오늘 갈비탕 드셨습니까? 잘 드셨습니다. 고추가루쳤습니까? 그 고춧가루도 주님이 주신 고춧가루입니다. 갈비탕 먹었는데 갈비탕이 내려가는 내 위도 내 위가 아니고 내일아침 일어나면 소식올꺼예요. 꾸룩꾸룩 설사 나고, 그 똥도 내 것 아니고 주님의 것이고 그렇게 하면서 70살고 80 살아도 내 몸이 없어지는 게 아니고 주님의 흙이 부서지는 거고 내 안에 그렇게 하시는 분이 주님이기때문에 이것은 "믿고싶어"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믿어지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이게 믿어지게 되면 이 몸은 이미 살아있어도 천국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괜히 걱정했습니다. 우리가 괜히 두려워했습니다. 괜히 시험 들었습니다. 내 몸이 아닌 것을 가지고 남의 몸을 가지고 멋있게 해 보려고 쓸데없는 시도를 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날 때부터 죄인인 것을 아는 그런 평안한 마음을 주시고 우리의 정신적인 무기를 다 뺏어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서 날개 달린 듯이 편하게 가볍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0-01-02 10:13:42 녹취 : 김창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