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성경중심사상 / 결론을 대신하여 쓰는 글 본문
성경중심사상 (이근호 목사)
34. 결론을 대신하여 쓰는 글
본서를 쓰게 된 동기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한마디로 축약해서 무엇인가를 알게 하기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그런데 다 쓰고 난 뒤의, 드러난 결론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봤을 때, 목회자를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면,
“하나님, 제가 위대한 목회자가 될까요?”
“NO!…”
“그러면 하나님, 이 한국 땅을 저에게 주옵소서!, 이 민족을 저에게 주옵소서. 제가 이 생명, 이 목숨 받쳐서 복음화 시키겠습니다.”
“NO!…”
“하나님, 그러면 한국교회가 이 20세기를 맞이해서 개혁이 돼야 되겠습니다. 저를 사용하여 이 한국교회를 정화하게 하옵소서! 공의가 하수같이, 정의가 강같이 흐르게 말입니다.”
“NO!…”
“그러면 하나님!, 오늘날 한국교회가 부흥이 되었다, 성장했다, 신자수가 천만 이라고 하는데, 사실상 어떤 열매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회가 그리스도의 향기로 충만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큰 목회를 하기보다는, 작은 교회라도 교회다운, 정말 예수님의 제자답게 성도들을 양육하는데 주력하겠습니다. 그런 목회를 할까요?”
“NO!…”
“그러면 하나님 뭔가 진리를 알았으면 실제로 적용이 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현실에 적용되지도 않을 진리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 왈(曰),
“그러니까 너 같은 목회자가 필요가 없지! 세상을 변화시키느냐, 아니시키느냐? 라는 것은, 내 소관이지 네 소관이 아니야! 네가 (목회자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예수님에게 행하신 사건의 증인으로서 세상에 나서다가 일찍 죽는 일 그것 뿐 이고, 네 같은 인간이 죽은 그 현장 위에서, 내가 또 알아서 네 같은 순교자를 증인으로 두고, 바로 그런 식으로 나는 일을 세상 끝날 까지 행할 것이다. 언제까지냐? 하면, 그 순교자의 숫자(T.O.)가 찰 때까지 이다.(요한 계시록 6:9~11)
쓸데없이 일이 잘 되느니, 못 되느니, 간섭하고 낙심하는 것은, 이미 예수님이 세상의 주(主) 되심을 모독하는 것이고 불신하는 마음이다. 자! 이러니 너는 이 시대에 아벨이 될 의사가 없느냐? 이유 없이 형에게 맞아 죽은 아벨 말이다! 기독교계의 Star가 되려고 하지 말고, 기독교계의 순교자가 될 의사가 없느냐? 이말이다. 믿음이란 너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일어난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목회자가 사람과 타협하면, 교회라고 하는 큰 종교조직은 만들 수도 있을지는 모르지만, 단 한 사람도 천국으로 인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 우리 목회자에게 부탁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달라는 것 뿐 입니다. 우리를 사용하여 심판을 하시든 구원을 하시든 그것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목회자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살기 위하여 애쓰는 동안, 그들만이 빨리 죽기 위해서 애쓰는 자들입니다. 만약 어떤 교회가 예수님을 목회자로 초빙했다고 한다면, 그 교회는 예수님께 기대할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나를 따라 같이 죽자! 라고 하는, 이 방침 이외에는 다른 방침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가 목회자를 선정할 때에는, 자기들보고 “같이 죽자!” 라고 할 사람이 누군가를 골라서 그 사람을 본 교회 목회자로 삼아야 됩니다. 위와 같은 사태는 교회 뿐 아니라, 목회자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시며, 교회를 맡긴 분이 예수님이라면, 만약에 행여나 교인들 가운데서 주님의 순교의 정신에 어긋나는 발언이나 혹은 방침을 강행을 했을 경우에는, 목회자는 사력을 다하여 그것을 저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목회자는 직무유기가 됩니다.
따라서 교인들이 100% 전부 순교의 정신과는 반대되는 주장을 할 때에라도 목회자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거부를 해야 되는 이유는, 교회가 그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에 목회자는 쫓겨나기가 일쑤인데, 바로 그 과정이 그 목회자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과정이 됩니다.
이처럼 교회나 목회자나 다 같이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로 가야 하는 것은, 오직 그 분만이 길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타협을 한다든지 다수의 의견이라고 따라 간다든지 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 운명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볼 때, 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과연 어느 것이 진리냐? 라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어떤 사실을 두고 진리가 일치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것이 진리 됨을 판정하는 기준이 무엇인고? 하면, 그것을 행하는 자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도록 인도하느냐, 아니면 자기 성취감에 빠질 것인가? 로 판정이 됩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의 부족과 죄인 됨을 고백하게 되어 하나님의 은혜가 부각되겠는가, 아니면 인간 노력의 효과와 그 대가가 부각 되었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바로 인간의 행위의 중요성을 부추기기 때문이며,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도록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모여서 아무리 큰 선교의 효과를 거두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업적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겸손 해 졌는가를 찾고자 합니다.
즉, 앞으로는 일을 겸손하게 해야지! 가 아니라, 사람의 삶의 목적이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바로 하나님의 지시(일)에 순종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 순종이 바로, 날마다 자기의 뜻을 버리고, 주님이 가신 그 쪽 나라에 관심을 두는 그것입니다. 그래서『목회자』는 일하는 자가 아니라, 단순한 증인 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전 생애를 통해서 보여 주는 목격자입니다. 따라서 목회자란, 전 교인들을 주님께서 역사 배후에서 사라진 그 최후의 자리, 즉 십자가로 안내하는 증인이며, 그럴 때 교인들도 그 목회자의 인도를 따라 구원을 받을 수가 있으며, 보고 싶었던 예수님의 얼굴도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가자! 주님을 따라, 우리도 이 세상으로부터 죽자! 이것이 목회 방침이 돼야 합니다. 성경 공부가 목회에 어떤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아니 됩니다. 성경공부가 지향하는 것이 목회자들의 소망하는 바를 이루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조직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조직이 진리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해서 있어야 하기에, 초대교회 처럼 유무상통에 지장을 주는 조직이 되면, 그 조직은 소용없는 조직이고, 조직을 위한 조직, 질서를 위한 질서, 법 자체를 위한 법이 됩니다. 이상적인 조직체계는 인간이면 누구나 유혹받는 시험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근본적인 바벨탑을 흠모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상적인 나라❜는 예수님께서 재림 하실 때, 예수님이 가져다주는 것 일뿐, 인간이 이 땅에서 건설하라고 명령하신 적은 없습니다.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데 방해되는 조직은, 비 진리적인 조직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 조직을 추구함으로써 진리에 도달되는 것이 유일한 방책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개개인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사랑에만 관심을 쏟고 있느냐? 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주되시는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될 때, 섬김과 낮아짐으로 흥청대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물론 죄인들이 모인 고로, 그것이 자동적으로 영구화 되지는 아니 할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방지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환상입니다. 그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목회자 입장에서는, 성도들이 자만에 빠져서 그리스도에 대한 첫사랑을 잃어 버렸을 때도, 홀로 자기의 주장을 펼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자가 가야 할 순교의 길입니다.
인간의 조직으로 악을 방지하고자 했을 때, 요한계시록에서 결국 국가가 우상이 되고 만 것처럼, 교회라는 조직도 우상이 되고 맙니다. 거기에는 자기가 투자한 돈이 모여 있는 곳이며, 자기의 성의와, 정성과, 철야 기도의 노력과, 전도의 열매들이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 대신, 자기의 현재까지의 실적에 감탄과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이 아까운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나도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보다도 말입니다. 목회자만큼은 그런 유혹들을 떨쳐 버려야 되는데, 그것 자체가 거룩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 아무 것도 없었던 시절에도,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많이 가진 자들이었으며, 후에 많은 것을 소유한 것 같았으나, 처음보다 조금도 더 가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국 그 자체를 상속받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교회에 발생되는 모든 비 복음적인 생각들은, 천국에 대한 가치가 그들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감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천국이 그들의 유일한 행복과 기쁨과 소망과 사랑의 원천이 되지는 못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에 미련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중보자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만약 교회조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구원의 방편이 된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곧 이단입니다. 교회 조직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목적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보여 주어야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 입니다. 치밀한 교회의 운영능력이 아니라, 또 교회를 섬기는 자가 많으냐, 적으냐? 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섬기고 있는 교회 이냐?에 교회의 사활을 걸어야 될 줄로 압니다. 교회에는 어른이나 높은 자가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누구의 종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자유자입니다.(고린도 전서 7:23) 조직 자체에 의미를 주면, 그것이 곧 종교의 이름하에 세워지는 바벨탑의 일종이요, 우상입니다. 우상이란, 세상의 것에다가 거룩함의 의미를 주입시킴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거룩함은 바로 새 언약 안의 거룩함이며, 그 이외 것 어느 것도 그 자체로서의 거룩함은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피와 땀의 결실이, 거룩함은 결코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내리신 그리스도만이 거룩한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한(韓)민족이 만들어낸 기독교라는 성격의 종교 단체에서, 그리스도만 빠져 있는 형식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몸부림치면서 부르고 있지만, 새 언약과는 상관없는, 인간의 행위가 결집되어 만들어낸, 인간의 이상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가짜 예수요 가짜 하나님입니다. 진리보다는, 작은 교회 정도라도 예배당과 모여든 군중 그 자체가 탐이 났기에, 그것을 보고 모여든 갖가지 경영가와, 행정가와, 사업가와, 종교 기능가들(일반인의 종교 심리를 이용하여 사람 모이게 하는데 전문인 자들) 이 모여서 만든 단체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언약은 십자가라는 걸림돌을 극복하지 아니하면 들어 올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선교나 전도❜란, 절에 다니는 사람을, 교회에 다니는 사람으로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장소나 취미 변경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교❜란 비 언약에 속에 있는 자를 언약 안으로 데려 오는 것입니다. 목회자나 그 어떤 인간도 이 작업에는 손 댈 수가 없고, 오직 성령님의 소관인 것입니다.(고린도 전서 2:4~5) 목회자는 오직 진리를 전하는 증인으로서만 만족을 해야합니다.(사도행전 1:8). 오늘날 한국교회는 신앙의 전투에서 진정한 적을 분간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적은, 공산주의 그 이전에, 또 자유주의적 사상 이 전에, 또 비민족적이고 비인간화된 사회 이 전에, 또 비민주적이고 비인간화된 사회 이전에, 교회의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것은 출애굽 때는, 어린 양의 정신의 쇠퇴가 이스라엘을 멸망케 했듯이, 오늘날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이 없는 것이, 교회를 스스로 교회되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단순한 인간들이 기독교라는 이름하에 모인 종교단체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비 십자가 정신이란 인간의 야망과 탐욕의 소산으로서 보다 크게, 보다 확산되게, 보다 뛰어나게, 보다 안정되게! 라는 구호 아래에, 예수와 성경을 동원한 사업을 벌이고 있는 작태입니다. 헌금을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에게 투자한 셈입니다.
보다 덜 희생적이고, 보다 더 뒤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 모습들은 영락없이 마귀의 노예 된 모습들입니다. 그렇게 한 노력을 고난이라고 자찬하지만, 사실은 자립하고 또 돋보이게 하기 위한 고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주님의 증인된다고 선교사를 보내지만, 복음, 즉 십자가 정신의 증인이 아니라, 보내는 쪽은 교세의 증인 노릇한 셈이 됩니다. 예수의 나라보다 교세 확장에 눈이 어두워 자기 PR 및 자기 과시 쪽으로의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도하다 보니까 자연 질서의 명목 하에 인간이 만든 법을 앞세우게 되었으며, 교인들로 하여금 진리를 알아 스스로 법으로부터 자유 함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에 굴복케 함으로 구원을 제공하려 듭니다. 여기에 인간에 의해 철저히 길들여진 교인들은, 마치 안일한 공무원처럼 사회에 대한 책임 회피와 무관심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유대교가 딴것이 아니라, 이리하여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유대교인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얼마나「아이러니컬」합니까? 그 안에 예수가 있으며, 성경이 있고, 예배와 선교가 있다고는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이 빠지면, 그것이 곧 사탄이 지배하는 종교가 됩니다. 사탄은 거룩한 것에 앞서 점령하고 있습니다. 거룩함을 빙자한 세속정신이 교회의 주류가 되고 말았고, 이 모든 것은 첫째로, 순교자로 부름 받은 자들이 진리를 모르고 있으며, 두 번째는, 따라서 순교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어느새 인지도 모르게 시류에 따라 거룩함을 이용하여 밥벌이하고 앉아있으며, 거룩함을 빙자하여 속된 것들을 가리면서 교묘하게 목회하는 천하의 위선자로 변신되어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속해 있는 교회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곧 우상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본 책의 의도였습니다.
본 책을 성의를 다해서 읽으신 독자 여러분에게 간곡히 당부하고 싶은 것은, 성경 자체가 성경을 대하여 우리를 고발하고 있음을 인식하시고 새로운 각오로 십자가의 길로 가 주시기 바랍니다.
『믿음이란 스스로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길로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목회 성공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지를 마시고, 어떻게 하면 내가 죽어가면서도 감사할 수 있는가?를 성경에서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본 책에서 제시하는 진리의 적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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