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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성경중심사상 / 요한계시록 해석에 있어서의 묵시 문학적 접근 본문

저서 & 기타(이근호)/성경중심사상

성경중심사상 / 요한계시록 해석에 있어서의 묵시 문학적 접근

정인순 2014. 3. 27. 20:17

성경중심사상 (이근호 목사)

 

31. 요한계시록 해석에 있어서의 묵시 문학적 접근

 

I. 서 론

성경 해석에 있어서는, 시대성을 감안한 역사적 해석방법은 필수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 성경본문은 역사가 흐르는 방향에 비추어서 내용상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해본다. 내용의 변천은 일목요연하게 시간의 진행방향에 따라 순차적으로 흐름을 이어가리라는 선입감이 작용하는 이상, 이러한 생각은 하등 이상할 것은 못된다.

나중에 기록된 사실이 먼저 기록된 사실보다 앞설 수가 있는 가능성이 많다는 것은 쉽게 이해된다. 하지만 늘 그렇게 된다는 것을 자신 있게 보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시대적으로 뒤의 것이 앞의 것보다 앞선다, 뒤선다. 라는 것을 어떤 기준에 의해서 결정하는 것은 큰 장애물로 등장한다.

분명히 시대적 순서대로 기록한 것임이 드러난 것 이 이외의 다른 것에서는, 그 문화양식에 맞는 해석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아진다. 예를 들면, 잠언에 나오는 사실이 시대적인 순서로 볼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묵시 문학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요한계시록에 관해서도 특별한 안목이 요구된다.

그러나 시대적 순서로 나열되었다라고 요한계시록을 보는데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이러한 시도가 의외로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래가지고서는 누가 요한계시록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라고 불평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평은 자신의 시대적 해석을 포기할 만큼 마음에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 사람에게만 적용이 된다.

오히려 묵시적인 책을 묵시적으로 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시대적 해석이 너무나 엉터리이고 앞뒤가 맞지 않으며, 본문을 정직하게 일관성을 가지고 보지 않고 있다고 불평을 가질 수밖에는 없다. 어떤 한 해석 법칙을 내세울 때, 어지간한 본문들은 그 법칙과 일치되어 있어야 한다.

물론 이 작업이 어렵고 모험에 비유 될 수도 있기는 하지만, 가설을 내세우면서까지도 지속적인 작업을 또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성경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목회자에게는 당연히 해야 될 일이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에 대하여 묵시적 해석방법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또 그 해석이 누구나 쉽게 납득이 될 만큼 속 시원한 해결방법인가?

II. 본 론

1) 문제해결을 위한 본문 선정에 관해서

요한계시록 전 구절을 주석적으로 해설을 해 놓았다고 할지라도, 그 해석의 전제 때문에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가 일쑤이다. 따라서 비록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해석의 전제라는 싸움에서 첨예하게 대립이 되는 본문을 끄집어내어, 거기에 대한 각자 나름대로의 해석을 제시해보면, 그 제시된 해석의 성향을 통하여, 계시록 전체에 대한 그 사람의 입장을 대변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본문이 어디인가? 여러 가지 적당한 곳에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로, 소위『천년왕국』이 나오는 부분도 될 수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이견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전 천년❜이요, 다른 하나는 무 천년❜이다.

전 천년이란, 어쨌든 이 시대가 아닌, 예수님의 최후심판 직전의 천년이라는 고정된 기간을 통하여, 성도가 직접 왕 노릇하는 통치형식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고, 무 천년이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대가 아니라 따로 최후심판 이전에『천년 통치』라는 특정형식의 통치방식이 개입 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계시록에서 언급하는천년 통치는 지금 이 시대, 즉 예수님 승천 이후 재림 이전까지를 말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전 천년❜주창자들은, 그 천년왕국이 들어 있다고 해서 기독교 진리가 파괴될 것도 아니며, 그냥 성경에 적혀있는 대로 있다고 하는 것이, 보다 안전한 학설이 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 천년❜주창자들은, 그러한 안일한 주장은 계시록 전체에 대한 일목요연한 해석의 포기 인 것이며, 차라리 천년왕국 부분만 아니라 계시록 전체에 대하여 뭐가 뭔지 모르겠고 하는 것이 훨씬 더 솔직한 표현이 아니냐? 라고 항변을 한다. 그러면 어디서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19장이 끝나고 20장에 넘어오면서, 그동안 잡히지 않고서 만국을 미혹한 사단, 즉 뱀의 체포 사실이 나타난다. 이는 계시록에 나타난 다섯의 적대세력 인데, 이것을 여기서 나열해 봅시다.

1) 짐승에게 인 맞은 자에게 저주가 내려짐.(멸망이 아님, 16:2)

2) 음녀(큰 성 바벨론)의 멸망.(18:2)

3)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산채로 불 못에 던져짐.(19:20)

4) 땅에 있는 짐승(거짓 선지자)도 산채로 불 못에 던져짐.(19:20)

이렇게 해서 다섯 원수 중 넷은 멸망당했으니, 이제 남은 원수 인, 5) 용의 체포-멸망이 아님-가 연이어 나온 것을 봐서는 앞의 것과 시대적으로 연속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20장이 19장과 확실히 연속성이 있는 사건 나열이라면, 20장 안에 들어 있는 천년왕국 이야기도 마지막 때 하나님이 특별히 설정한 기간으로 남을 것이 아니냐? 라는 것이다. 만약 위의 이론이 맞는다고 한다면, -맞지는 않지만- 요한계시록의 구성상 또 다른 혼란을 야기한다.

예를 들면, 성 바벨론의 멸망이 분명 18:2절에 나오지만, 이미 그 전 14:8절에서는 큰 성 바벨론이 망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것은, 그 가운데 끼어 있는 15, 16, 17장의 내용은 어느 시대에 해당되는가? 또 16:2절에서 보면, 짐승에게 표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떨어지지만, 결코 그들이 멸망한 것이 아닌데, 그것은 그 뒤 도리어 하나님을 훼방하고 있는 것을 봐서도 알 수가 있다.(16:11)

뿐만 아니라 12:7절에 보면, 용이 땅으로 내어 쫓기고 있다. 그 때 하늘에서 찬양하기를 마귀가 자기 때가 얼마나 못 남아 있음을 알고는 내려갔다고 한다. 그러면 여기서 자기 때가 얼마 남지 못했❜는 기간은, 요한계시록 20장에서 천년 이전에 적당할까? 아니면 천년이 지나, 다시 놓음을 받는 기간(20:7)에 적합한 사실일까? 만약 얼마 남지 못한 기간이 천 년 전이라면, 천년이라는 기간은 너무나도 길다.

반면, 천년 후라면 다시 놓임 받은 기간은, 어쨌든 천 년 보다는 짧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해답은 즉시 나온다. 용이 하늘 전쟁에서 쫓겨난 기간은(12: 9~12) 천 년 후가 분명하다. 그렇다면, 12장과 20장 이외의 기록은 시대적으로 어디에 놓여야 하는가? 그 뿐만 아니라, 용이 이 땅에 내려오기 이전에,(12:9, 시대적 순서로 해석한다면…)11:7절에서 보면 이미 짐승이 무저갱에서 나오고 있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누가 무저갱에서 그 짐승을 보내었는가 하면, 무저갱에 이미 들어있는 어떤 존재로부터 나온다.(9:11) 그런데 그 무저갱에 있는 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다.(9:1)

자! 이렇게 보면, 20:1~4절에 나오는 무저갱 이야기는, 19장 이후의 사건이 아니라, 이미 9:1절의 사건을, 보다 근원적으로 추적한 이야기임이 드러난다. 어째서 이것이 시대적으로 연속적인 이야기인가? 물론 무저갱 열쇠를 허락한 것은 하나님이다.

위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봐서, 계시록에 나타난 것을 순차적인 사건으로 보는 것은 여러모로 무리가 있다. 이러한 해석은,「요한계시록」이, 묵시문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전혀 고려하지 아니한 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을 묵시 문학적으로 해석하면 어떻게 되는가?

2) 묵시문학에 있어서의 의미 전달

묵시라는 말』, 항상 역사 안에서 되는 일에 대하여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고, 역사 끝에 나타나서 역사를 종결지을 그 일에 기대를 거는 내용의 계시전달 형태이다.

는 역사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역사는 하나님 보시기에 종결 될 수밖에는 없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있어 역사가 부정 당하는 경우는,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을 위배했을 때 주어지는 당연한 귀결이다. 따라서 묵시적으로 묵시적 언어를 해석할 때,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느냐? 라는 것에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 흐르는 어떠한 원리가, 하나님에게 미움을 받을 수밖에는 없는 원리인가를 밝혀내는 수단으로 쓰인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즉, 이다음에는 이런 사건이 있으며, 저 다음에는 저런 사건이 일어날 것이므로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대비를 하자. 라고 여기는 것은, 묵시를 오해한 소치이다. 대비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성질의 사건을 나열하지를 않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그런 식으로 종결짓게 한 그 원인과 이유가 이미 역사 안에서 발생되었기에, 묵시를 통해서 그것을 파악해야 한다.

첫째,『묵시문학 안에 있는 사건 하나하나』가 그 이유와 원인을 찾도록 도와준다. 그 이유와 원인을 알게 되면, 그 다음에 거기서 고정된 세계관이 나온다. 필연적이며, 아무리 인간들이 몸부림치고 철회를 요구해도 어쩔 수 없는 하나님의 결정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묵시문학의 세계관은 이원적(二元的)인 구성을 하고 있다. 하늘은 끊임없이 땅과 연관을 갖는다. 그리고 관여한다. 하늘의 판단에 의해서 땅의 세상은 둘로 나눠지게 되고, 한편은 하늘로부터 위로를 받는 반면, 둘째로, 다른 한편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저주의 상대가 된다. 이러한 판단은 현재에 대한 미래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미래가 앞당겨 현재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는 현재를 파멸시킨다. 이미 이 일은 하늘의 계획 속에 들어 있어 취소나 수정이 되지 않는다. 하늘이 현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 라는 점은, 묵시적 징조들의 발생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 징조들은 다방면으로 또는 여러 가지 자료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각종 징조들도 한 인격을 중심으로 하여 벌어진다. 다니엘에서는 그 분이 바로「인자요, 요한계시록에서는「어린양」으로 나타난다. 그 인자가 활동하는 것에 대하여 세상의 악은 갖가지 방법으로 거부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거기에 대한 반응으로 확대된 징조들이 다시 주어진다. 그러는 가운데서 궁극적인 것이 지휘하는 세상의 참 모습이 드러나게 되고, 이때쯤 되면, 왜 하나님은 역사를 종결지을 수밖에는 없었는가를 알 수가 있다. 심판의 그 정당성이 주어진다.

그리고 묵시의 세계는, 역사적 세상의 모순을 극복한 형태가 될 것이다. 단순히 역사 안의 세상에서 악을 제거하고 수리한 다음의 모습은 아닌 것이다. 외형이 문제가 아닌, 그 묵시적 세계의 원리 안에서는, 다시는 역사 속의 세상에서 일어난 그런 악의 원리들을 방지하고 남음이 있는 원리로 유지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역사의 세상이 없는 한, 묵시의 세상도 없는 것이다. 묵시의 세상은 역사의 세상을 토대로 하여 주어지는 세계이다. 이러한 미래의 세계가 묵시문학에서는 역사의 언어로 묘사되고 있으며, 이점을 이해하기란 매우 난해하다.

즉, 묵시의 세계(미래의 세계)에서의 이긴 ❜는 현 역사의 세계 안에서는 역설적으로 죽임을 당한 ❜가 된다. 따라서 현 역사 안에서의 승리자를 찾으려면, 역사의 영원한 지속을 주창하며 번영을 외치는 자로부터 애매하고 억울한 죽임을 당한 자가 누구냐를 찾으면 된다. 이처럼 묵시와 역사는, 역사 안에서 미리부터 대립된 모습을 띠고 등장된다. 이러한 이유는, 구약 예언서에 의하여 최후의 남은 자가 되는 그리스도가 묵시의 신분을 지니고 이 역사 안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느냐? 로 결정 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린 양이라고 하는「순교자 모습」으로 등장되는 것은, 그 분 때문에「역사는 비로소 그 정체가 탄로되었기 때문」이다.

그 분에 의해서 남은 역사가, 봉인 되었다가 이제는 개봉 된다. 그 개봉된 내용은, 역사와 묵시의 세계간의 갈등 이었다. 이제 이러한 안목에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어린 양이 뗀, 그 묵시의 내용으로 인해서, 역사의 세계는 심층적으로 그 배후의 조종자가 등장 할 때까지 그 정체의 두꺼운 껍질이 벗겨진다. 그 내용이 보다 구체화된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그러한 작업을, 이 역사의 세계에 할 수 있게 하는 동기는,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는 순교자들의 발생사건이다. 역사 세계의 심판은, 언약의 법칙에 의해 심판받을 만한 잘못이 있을 때만 주어진다. 그 언약의 법칙이란, 구약 예언서에 나와 있는 다윗 언약의 절차를 따른다.

그 절차를 여기 기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 죄악에 대한 경고.

2) 그 경고에 합당한 심판인데, 이는 이방인을 막대기로 동원시킨다.

3) 이방나라가 그 심판과정 속에서 과도한 행동을 한 것에 대한 이방나라에 대한 심판.

4)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언약대로 남은자만 회복된다.

그런데 역사적 종말론에 있어서는, 다윗언약에 의해서 옛 역사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 역사가 시작되지만, 예수님이 세운 새 언약에 의하면, 역사 자체가 사라지고 거기에는 묵시의 세상이 전개된다. 이 점을 감안해서 앞의 순서를 다시 써 보면, 다음과 같다.

1) 교회 중심의 현 역사의 모습 (1장~3장)

2) 역사에 대한 묵시세계의 침투.(7인의 계시나열, 4장~7장)

3) 역사의 죄악에 대한 경고.(7 나팔의 계시나열, 8장~11장)

4) 남은 자(교회)의 등장과 그들의 순교 - 여기서 서서히 등장하는 본래 원수의 정체.(12~14장)

5) 죄악 된 역사에 대한 저주(7 대접 계시 나열, 15장~19장)

6) 역사가 종결되다. - 언약대로 심판이 주어짐. (20장)

7) 묵시세계의 전개.

이상의 7개의 계시의 모음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시가 중첩되는 것을 보여준다.

III. 결 론

결국 요한계시록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의 피의 언약은 역사의 세계에서 묵시로 전환시키기 위한 언약이었으며, 여기에 대한 언약적인 정당성은, 그 분의 신분이 묵시적이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1:13,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끝으로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거의 모든 수치와 구절들은, 구약 예언서에 이미 등장한 것을 봐서는, 요한은 말하기를, 예수님이야말로 진정 구약의 완성자로서, 구약에서는 그것이 역사적 언어였지만, 신약에서는 역사적 언어로 표현된, 묵시적 언어로 사용하고 있다. 라고 하였다.

이점을 유의해서 해석 해보면, 그 구절구절마다 언약적인 내용을 담아두는 것으로 족해야 한다. 결코 묵시적 내용역사적 내용으로 분해해서 유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예를 들면 1000년, 144,000, 용, 짐승 같은 것은 묵시적 세계가 바로 지금의 역사 속에서는 언약적인 내용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등장된 말과 수치들 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