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호
40. 거룩한 책과 저주 (왕하 22:14-20)
22:14 이에 제사장 힐기야와 또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가 여선지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저는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하였더라 저희가 더불어 말하매 22:15 훌다가 저희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에게 고하기를 22:16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의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하리니 22:17 이는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 손의 모든 소위로 나의 노를 격발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나의 이곳을 향하여 발한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22:18 너희를 보내어 여호와께 묻게 한 유다 왕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고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들은 말을 의논컨대 22:19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22:20 그러므로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 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사자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
성도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신 일이 무엇일까요? 구약 때는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만드셨습니다. 약속의 땅이란 보통 땅이 아닙니다. 약속이 담기게 되는 땅입니다. 그러니까 약속이 없으면 아예 생기지도 않는 땅입니다. 뿐만 아니라 약속의 사람도 만드셨습니다. 약속의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약속이 담겨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곧 하나님의 백성이지요. 약속이 없었으면 아예 생겨나지도 않을 사람들입니다. 자... 이렇게 보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전혀 다른 새로운 땅과 새로운 사람들을 만드는 일입니다. 왜 기존의 땅은 아니 되고 왜 기존의 인간은 하나님이 상대하지 않으실 까요?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하나님을 믿으면 우리에게 전에 보다 더욱 유익이 된다고 여기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제가 성경에 나오는 예를 들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뭔가 한 가지 중요한 경우를 당했습니다. 사람들이 고안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제안된 일입니다. 그것이 뭔가 하면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일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고 여긴다면 이렇게 생각할 공산이 큽니다. 즉 "애굽 가정에도 맏이가 있고 이스라엘 가정에도 맏이가 있는데 문설주로 발라놓은 어린양의 피를 기준으로 해서 애굽인의 집의 장자는 죽임을 당하고 우리 이스라엘 집의 맏이는 살아서 다시 부모 품으로 돌아왔다"라는 식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그게 아닙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스라엘 장자가 비록 어린양의 피로 인하여 살기는 살았지만 결코 이스라엘 가정의 소유로 되돌아오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애는 어떻게 됩니까? 그 장자는 하나님의 소유가 됩니다. 장자가 우리 가문에 속한 우리 소유의 것이라고만 주장한다면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으로 그 가문이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애굽인의 가정처럼 장자를 빼앗기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럴 때 이 장자는 바로 약속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원래 없었던 약속의 장자가 하나님이 개입하신 특별한 일을 통해 새로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약속의 사람은 기존 사람들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땅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여자 선지자를 통해서 이 약속의 땅에다 저주를 퍼붓겠다고 나서십니다. 오늘날 우리 같으면 이러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서 뭐라고 항변을 하겠습니까? 이렇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왜 여타의 다른 땅과 다른 민족들이 범죄 하는 것은 그냥 놔두시고 하필이면 우리에게 이런 징벌과 저주를 내리십니까. 이것 너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이 땅은 보통 땅이 아니다. 약속의 땅이다. 따라서 약속만이 그대로 적용될 뿐이 단다"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약속된 것이 그냥 무효로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그것을 실제로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소가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약속의 땅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에는 어느 장소가 하나님의 약속을 가감 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장소입니까? 베드로후서 3:4-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이 얼마나 대단하고 놀라운 위력이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불사름의 대상이 되는 곳은 어디 있습니까? 베드로후서 3:10에 보면 그 장소가 나옵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즉 지구 전체입니다. 신약 때는 이처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지구 전체가 하나님의 약속이 실행되는 공간이 되었지만 구약 때는 오늘 본문에 나와있는 것처럼 유다 나라가 살고 있는 약속의 땅에 국한됩니다. 즉 만약 이 땅에 살면서도 약속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어떤 저주가 주어지는가를 확실히 보임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전 인류에게 알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 자체가 책 속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같이 봅시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의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하리니" 유다 왕 요시야가 성전을 수리하다가 발견한 어떤 책을 보고 그 내용을 듣고서는 그 비싼 왕의 옷을 찢고 통곡하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니 책이 뭔데 그것이 통곡하고 애곡하고 옷을 찢을 정도가 됩니까?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책이 먼지가 부옇게 앉을 정도로 차 뒤쪽에 방치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과연 이 성경책을 보고서 옷을 찢고 애곡하고 통곡하고들 있습니까? 온 지구가 불바다 되다가 녹아 없어진다고 해서 옷을 찢고 통곡하고 애곡하고픈 심정이 드느냐 말입니다.
자... 제가 지금 신약 성경에 나오는 한 구절을 소개해 드릴텐데 이 본문을 보고 옷을 찢고 통곡하고 애곡 할 마음이 드는지 한 번 봅시다. 데후 1: 7-9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여기에 살펴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신다'고 되어 있는데 이 얼마나 겁나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의 인물과 직장과 수입과 재산과 전혀 무관하게 오직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예수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가치 없이 지옥 불에 던지시는 이 하나님의 일에 황당하고 당혹스럽고 두렵지 않습니까? 옷을 찢고 애곡하고 통곡하고 싶지 않습니까?
결국 이렇게 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시야 왕만 병신 되는 겁니다. 겁 많고 의지력 약하고 여자처럼 마음이 약한 자로 간주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요시야 왕은 무엇을 알고 이 성경책에 나오는 말씀에 대해서 이토록 과감한 반응을 나타내었을까요? 제가 로마서 10:6-9의 말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 말씀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겁니다.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제가 하나님 믿어서 천당 가보려고 합니다. 하늘에 계십니까? 그렇다면 거기 그대로 계십시오, 제가 친히 하늘로 가서 주님을 모셔다가 이 지장에 눈에 보이도록 조치하겠습니다. 혹은 음부에 계십니까? 그냥 그대로 계십시오. 제가 직접 음부에 가서 주님을 이 지상으로 모셔 올리겠습니다."라고 마음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가까이 있으니 그 가까이 있는 말씀만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이 얼마나 쉽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코앞에 성경책이 펴져 있습니다. 그 말씀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시야 왕은 책 속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울고불고 옷을 찢고 했겠습니까! 제발 환상이나 방언이나 신유니 하는 그런 것에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로지 성경책만 가지고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내용만을 가지고 그대로 심판과 구원을 실시하십니다. 다른 토대는 없습니다.
이러한 요시야 왕과 같은 태도를 성경에서는 '마음을 낮추었다'고 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 19절에도 나오지요? 요시야 왕이 마음이 연하여지고 겸비했다고 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약속의 땅에서 취할 태도는 이것뿐입니다. 약속의 땅은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천국입니다. 천국은 말씀만이 통하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인간의 태도는 오로지 마음을 낮추고 겸비한 것 뿐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하나님께서 일부러 먹을 양식도 없고 마실 물도 없는 곳으로 인도했습니다. 그것도 40년 동안을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마음을 낮추기 위함입니다. 신명기 8: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지금 물이 문제가 아니고 양식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어떤 마음 말입니까? 말씀 앞에서 옷 찢을 수 있을 정도로 말씀의 실제성에 푹 빠지는 그 낮은 마음이 시급한 문제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약속의 땅, 즉 천국에 들어갈 만한 사람들이 못되는 것입니다. 물 걱정, 양식 걱정이 우선되면 말씀이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천국은 재산과 재물로 만들어진 나라가 아닙니다. 아까 우리가 보았듯이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의 복음에 복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저주와 멸망을 퍼부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이고 여기에서 면제된 자들이 하늘 나라 백성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말씀 앞에서 옷을 찢을 수도 있고 통곡할 수도 있는 마음의 소지자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생각하시기를, "아니 책에 있는 말씀을 달랑 믿는데 이게 무슨 어려운 문제가 될 리가 있을까"하고 생각하시겠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던 어떤 분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다니엘 3:16-17을 봅시다. "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야기인즉 이렇습니다. 이 세 분은 요즈음 말로 하자면 고급 공무원입니다. 한평생 그런 자리가 올라가기가 쉽지가 않지요. 그런데 이 직위 유지하는데 위기가 왔습니다. 왕이 세운 금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맹렬히 타는 용광로 불에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 세 분은 책이 나와 있는 하나님이 약속을 알고 있습니다.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아니 된다. 다른 어떤 신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다"라는 사실에 마음을 낮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 말씀처럼 거기에 대해서는 어떠한 답변도 더 필요치 않다고 한 것입니다. 설사 하나님이 불타는 풀무 불 속에서 안 건져 주어도 개의치 않고 그냥 죽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도대체 말씀이 뭐기에 죽음보다 더 크게 여기는 겁니까?
결국 이들이 풀무 불 속에 들어갑니다. 그 뒤의 이야기를 미리 알고 있는 자들에게는 이들의 행동들이 그냥 죽는 척 한 걸로 여기겠지만 사실 그런 게 아니라 이들은 실제로 자기 목숨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이라면 얼마든지 통곡하고 애곡하고 옷을 찢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게 말씀 앞에 낮아진 마음 자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대할 때 여러분의 유익을 위하여 이용할 생각으로 믿지 마세요.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삼켜 여러분 일생을 좌지우지 하게 됩니다. 말씀을 동원해서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하지 마세요. 동원된 말씀 앞에 도리어 입고 있던 값비싼 옷도 찢어야 될 경우가 올 것입니다. 아예 우리 마음조차 찢어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겨있기를 저는 원합니다.
끝으로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지난 목요일 날 어떤 분으로부터 상담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우리 어머니는 무당이고 저는 늘 저가 작두를 타고 올라가서 춤추는 꿈을 꿉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라고 물어 왔습니다. 저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어머니가 무당이지 본인은 무당이 아니 됐고, 또한 꿈속에서 작두를 탄다지만 꿈은 현실이 아니니까, 그게 또 문제될 것이 없으니 무슨 걱정입니까"라고 했습니다. 아마 그 분이 상담한 취지는 이런 것일 겁니다. 어머니가 무당이나 교회 다니는 자기로서는 우세스러운 일이고 또 자기도 밤에 작두 타는 꿈을 꾸니 이렇게 나갔다가는 자신도 나중에 어머니처럼 무당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하나님께 도움 받고자 해서 전화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절대로 하나님 이용해서 자기 형편이 나아지기를 기대하지 마세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의 눈앞에, 코앞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믿으시면 그것으로 부활되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최고를 얻었으면 됐지 뭘 더 바라십니까! 궁극적인 것을 얻었으면 됐지 무얼 더 욕심내십니까?
약속이 아닌 것에는 아예 얻을 기대조차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었으면 문제될게 하나도 없으니 앞으로 걱정 없이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욕심이 많습니다. 구원의 말씀을 눈앞에 두고서도 세상 것을 탐낸 것을 용서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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