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호
39. 성전과 책 (왕하 22:3-13)
22:3 요시야왕 십 팔년에 왕이 므술람의 손자 아살리야의 아들 서기관 사반을 여호와의 전에 보내며 가로되 22:4 너는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올라가서 백성이 여호와의 전에 드린 은 곧 문 지킨 자가 수납한 은을 계수하여 22:5 여호와의 전 역사 감독자의 손에 붙여 저희로 여호와의 전에 있는 공장에게 주어 전의 퇴락한 것을 수리하게 하되 22:6 곧 목수와 건축자와 미장이에게 주게 하고 또 재목과 다듬은 돌을 사서 그 전을 수리하게 하라 하니라 22:7 그러나 저희 손에 붙인 은을 회계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 행하는 것이 진실함이었더라 22:8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 22:9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돌아가서 복명하여 가로되 왕의 신복들이 전에 있던 돈을 쏟아 여호와의 전 역사 감독자의 손에 붙였나이다 하고 22:10 또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왕의 앞에서 읽으매 22:11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 옷을 찢으니라 22:12 왕이 제사장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야의 아들 악볼과 서기관 사반과 왕의 시신 아사야에게 명하여 가로되 22:13 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발하신 진노가 크도다
『주님이 맡은 죄짐이 어떤 짐이며 그 고통과 아픔이 얼마나 큰지 우리가 동참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인간들이 교회 와서 저지르는 제일 큰 오류 중의 하나가, 자기가 자기를 관리함으로서 구원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다스리고 내가 나의 행동을 조절함으로서 얻어진 나로 인하여 천국을 간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전혀 엉뚱한 동네에서 나오는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에서는 간단하게 말씀합니다. 즉 말씀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가 말씀의 사람이 되므로 구원받는다는 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조절하고 정신 차리게 하고 나를 치고 때리므로 말미암아 내가 새 사람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을 더 간단히 말씀드리면, '값없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값없이' 구원받는 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시장에 장보러 갔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자, 값없이 드립니다"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아마 우리는 눈이 휘둥그래지고 놀랄 것입니다. "아니, 세상에, 값없이 주는 것도 다 있나?" "과연 그럴까?" 휴대폰 선전 문구에 보면 대문짝 하게 나붙은 말이 있습니다. "공짜!" 하지만 이것은 장사 속이고 진정한 공짜는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배당 앞에다가 '공짜!'라는 구호를 붙여놓았을 때에 아마도 좋아라 찾아오는 사람 별로 없을 것입니다. "아니, 저기에도 뭐가 있을 거야. 저 말 믿으면 안 돼, 뒤에 뭔가가 있을 거야…"하면서 교회 안으로 안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씀하시기를, "정말 공짜! 아멘 공짜!"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안 들어올 것입니다. 예수님이 또 말씀하시기를 "나는 공짜의 원조! 공짜는 여기 밖에 없다. 자, 값없이 구원이다"라고 해도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노아가 방주 만들어놓고 방주 입장료로서 얼마를 받아 챙겼습니까? 5만원? 10만원? 원가로 들어간 방주 목재 값으로 받던가요? 정말 방주 들어가는데 돈 들던가요? 공짜, 공짜입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의 공짜'를 거부하느냐?
그것은 교회 오기 전에 사람들이 나름대로 선입감이 있습니다. 그 선입감이 뭔가 하면은, 내가 나를 통제하고 관리하고 내가 나를 인간 만들고 아주 제대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가지고 그렇게 해서 교회 나와 앉을 때에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서 안면 부끄럽지 않게 드릴 때 그 때 하나님도 아마 이 나의 성의를 받아주시지 않겠느냐는 선입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평소에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 손에 잡히는 것 우리 눈에 띄는 것은 내 손에 의해서 관리되고 조정되어야만 안심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잘못된 생각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공짜'라는 것도 거부하게 만들고 맙니다. 고민을 끙끙하고, 술을 끊고 교회 가는가 아니면 안 끊고 가느냐 혹은 두 갑 피우는 담배를 한 갑으로 줄여놓고 교회 나가느냐 마느냐 라는 이런 쓸데없는 것에 신경을 씁니다. 여러분, 그러지 마세요.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요시야라는 왕이 등장하는데 한 가지 일을 전개하면서 결국 두 가지의 상반된 마음 태도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가지는 무엇인가 하면, 3-7절부터 보면, 요시야 왕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르게 살아서 예루살렘에 있는 형편없이 무너져 내린 성전을 기금 모아놓은 것을 가지고 수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러니까 성전 수리는 어디까지나 요시야 왕의 관리와 통제 아래에 있지요. 자기 통제 아래에 있는 이 일을 요시야 왕은 첫 번째로 한 것입니다. "저건 내가 손대야 되겠다. 저것은 내가 왕으로서 한 도리를 다 해야겠다"하면서 성전을 깨끗하게 수리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뿌듯한 느낌이 들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저 굉장히 착하지요. 저 성전 그냥 두면 형편없이 무너질 건데 제가 나서서 깨끗하게 수리했습니다. 저 괜찮은 사람이지요"라고 나올텐데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왕이 율법 책의 말을 듣자 곧 그 옷을 찢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옷을 찢는다는 것은 마음을 찢는다는 말입니다. 우리 같으면 왕이 자기가 나서서 성전 수리했다면 얼마나 기쁘고 흐뭇하겠느냐 말입니다. 그런데 11절에 와서는 옷을 찢으면서 "아하 통재라, 이럴 수가!"하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마음입니다. 자 이런 변화가 웬 변화입니까?
사실 성전이 무너질 때 우리 인간들이 나서서 마땅히 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과연 성전은 우리 인간 관리 하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수리하다가 제사장이 뭘 발견했는가 하면 율법 책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 말씀 책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들어있는 말씀을 탁 듣는 순간, 옷을 찢고 마음을 찢지 않을 수 없었더라 이 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고 내가 할 수 없는 따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성전을 수리하고 지도 감독하고 식당에 에어컨 달고 그런 것은 우리 집사님 들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일입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겁니까? 그러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교회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소박하고 조용히 차분하게 일 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천당 가게 하는 것입니까? 방금 이 질문을 요시야 왕에게 한 번 물어보세요. "요시야 왕이시여, 당신이 무너진 성전을 수리했다면서요?" 요시야 왕이 말하기를 "예" 우리 계속 묻기를 "그러면 임금님은 하늘 나라 중에서 좋은데 가겠네요?"라고 한다면 왕은 무슨 답변을 내놓겠습니까? "웃기는 소리하지 마세요. 내가 성전 수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책을 발견했는데 그 안의 내용을 듣고 부터 나는 옷을 찢어야 마땅한 죄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록 성전 수리한 수고다 손치더라도 말입니다. 내가 천당 가고 안 가고는 내가 임의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깨닫는가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핵심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태만해졌습니다. 태만한 이유가 무얼까? 그것은 사람이 두 가지 일을 다 잘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나가 돈도 벌어야겠고 예배당에 와서 예배 참석도 해야되니 이 두 가지 일을 어떻게 다 충실하게 할 수 있습니까. 할 수가 없지요. 우리가 슈퍼맨입니까? 그래서 어떻게 일을 처리하느냐 하면, 손님 오고, 장사하고, 물건 팔고,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의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 손으로 합니다. 그리고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하의 일입니다. 이렇게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두 가지인데 이 두 가지의 일을 다 하려니 시간이 모자라고 바쁘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일을 가르는 것입니다. 뭐가 우선인가? 입에 풀칠하는 게 우선이잖아요. 밥도 못 먹는 입장에 종교는 무슨 종교입니까. 사치이지요. 그러니까 우선 돈버는 열중하다가 짬이 나면 교회 와주는 거예요. 교회 와서 예배드리다가 휴대폰에서 삐리~ 삐리 하고 상사가 호출하면 얼른 돈 버는 장소로 뛰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을 누가 아느냐 하면 본인이 알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미안스럽잖아요. 미안스러운 마음을 가지니까 그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을 멀찍히 방치하려고 시도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든지 우리가 방치하면 방치될 수 있는 항목 속에 포함 시킵니다. 또 예수님도 내가 불러주기 전에는 아무런 활동에 가하지 못하는 분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즉 내가 손을 내 밀어주면 거기에 예수님도 비로소 딸려오고 내가 손을 거두면 예수님도 그냥 닭 쫓는 개처럼 처량하게 우리만 쳐다 볼 수밖에 없다는 이런 사고구조를 지니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요시야 왕 본인이 성전을 수리하고 안하고 전혀 상관이 없이 요시야 왕의 구원은 하나님 말씀 자체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 말입니다. 즉 내가 이 세상에 하는 행동과 내가 구원받는 것 하고는 절대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이것을 요시야 왕 본인은 몰랐던 것입니다. 모를 수밖에 없었지요. 그 율법 책이 성전 안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헛수고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옷을 찢고 통곡한 것입니다. 우리는 만사가 내가 내민 나의 손에 의해서 뜻대로 이루어진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가슴속에 손을 대어야 구원받습니다.
유명한 신학자 불트만 이것을 가지고 '처분불가능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내 손안에서 처분 가능하지만 단 한가지 내 손에서 처리될 수 없고 처분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말씀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활동은 인간의 활동 권한 밖에서 일어납니다. 우리의 손을 떠난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은총을 아는 것이 신자라는 말입니다. 제가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마태복음 7: 14에 보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은 길이라고 결정할 때에 하나님께서 박사교회 여러분한테 물어보고 마태복음에 올려놓았습니까?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좁게 만들지 말고 넓게 해 달라"고 우리가 함부로 항의하거나 의견을 개진 할 수 있습니까?
날씨가 더우니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감이 안 잡히시는 모양인데, 그러면 마태복음 24:40에 보면,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 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 둠을 당할 것이니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하나님이 우리보고 물어보고 결정했습니까? 일방적으로 하나님 마음대로 정한 겁니다. 우리가 성전을 수리하던 우리가 교회를 봉사하던, 헌금을 하던 무엇을 하던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은 문이구나. 아, 믿어지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천당 가는 사람입니다. "아, 나는 교회 봉사 많이 하고 있는데 이것 가지고 천당 안 넣어주나?" 죄송합니다. 못 갑니다. 왜냐하면 그런 결정은 하나님이 하신 적이 없습니다.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해 봅시다. 우리는 어떤 버릇이 있는가 하면, 내가 손대어야 뭔가 일이 되는 양 여기고 있습니다. 직장에 가서도 내가 열심히 일을 해주어야 월급을 듬뿍 받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내 손으로 일을 일구어 낸 거잖아요. 내가 열심히 공부해야 좋은 대학에 가는 겁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내가, 내가, 내가"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아니 이것 밖에 모릅니다. 모든 것이 나의 처분 안에서 내 하기 나름이다. 이 말입니다. 모든 것이 내 손이 움직임에 따라 좋은 결과가 맺어지는 겁니다. 우리는 이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것이 버릇이 되었고 관행이 된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천국 가는 것도 내가 교회에서 하는 활동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처럼 오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바빠서 제대로 못하니까 세상에 나가서는 당당한데 교회에서는 조금 미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미안함이 무슨 천국과 관련이 있느냐. 네가 갖는 그 사고방식이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내가 처리할 수 없는, 내가 손 댈 수 없는 일로 인해 내가 구원받는다는 생생한 고백이 안 비쳐 나온다는 바로 그 점이 문제 거리이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내 속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안나오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 변명만 늘어놓고 있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목사님, 제가 오래 간 만에 성경을 받거든요. 제가 놀라서 옷을 찢었습니다. 세상에 영생으로 가는 길이 좁대요. 원 세상에. 그래서 저는 놀랐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하지요. "교회 나오는 어린애도 다 아는 이야기를 가지고 …" 그 사람이 또 이야기 할 것입니다. "목사님, 세상에 어떤 아주머니 둘이 밭을 가는데 예수님 재림하게 되면 한 아주머니는 그 자리에서 하늘 나라 가고 다른 한 여자는 지옥 갔답니다. 밭가는 그 행위하고 상관이 없이 말입니다. 태만하게 밭 갈았느냐 열심히 밭 갈고 있느냐와 전혀 상관없이 말입니다. 저는 놀랬습니다. 성경에 이런 내용이 있을 줄이야! 그래서 저는 옷을 찢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뭐든지 내 손에서 처리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정작 중요한 것은 자연스럽게 멀리하고 방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손에서 처리되는 것만 귀하고 귀한 것이고 공짜로 거저 주시는 것은 시시하게 여기는 편견, 이것보다 더 큰 문제점이 또 있을까요? 교회 목사가 목회하면서 교인들의 움직임 모든 것을 목사 본인의 목회 술의 결과물로 여긴다면 그 목사는 구원받기 글렀습니다. 목회는 목회고 구원받는 것은 따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세상만사가 제 하기 나름이고 제 솜씨 부리기 나름이라면 아마 예수님도 '값없이'라는 말씀을 안 했을 것입니다. 아마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애들아, 너희 능력껏 해봐라 엘리트만 뽑을 거야"라고 했을 것입니다.
요시야 왕을 옷 찢게 만든 이 성경책을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로마서 10:11-1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 하시도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차별이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능력별로 자기 두뇌별로 노력별로 따진다면 이 세상은 차별과 차별의 바다요 물결로 출렁이게 됩니다. 그 어떤 구석에 가고 차별성을 강조하지 않는 구역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시야로 하여금 옷 찢게 만든 이 성경에 보니 '차별이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차별이 없다는 것은 공짜만이 진리로 통하는 세계라는 뜻입니다. 값없이 주었고 받았기 때문에 차별이 없는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차별 없음' 자체를 참으로 사랑하신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여러분의 손수 행한 일만을 사랑하려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정신 상태가 글러먹은 것이 아닙니까? 차별이 발생되어야 내가 존재하는 즐거움을 갖겠다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성질 더러운 인간입니다. 차별이 생겨야 승리했다는 쾌감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차별 없다는 그 상태를 사랑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10장에 왜 차별 없음이 등장하느냐 하면 그것은 '말씀' 때문에 생겨난 현상입니다.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라고 8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 말씀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구원을 받으니 차별이 있을 리 없지요. 구원의 내용은 동일하니까 말입니다. 한 예수라면 누가 불러도 같은 예수입니다. 로마서 3:22에 보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라는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3:19에는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시야 왕이 율법 책을 보고 옷을 찢은 것은 자기뿐만 아니라' 그 어떤 인간이라도 하나님 앞에 온전한 인간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죄인의 의식이 느껴져서 가만있지 못해 회개한다는 뜻에서 옷을 찢은 것입니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라는 바로 그런 차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차원은 잘난 체 하는 자들을 완전히 바닥에 깔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모든 자가 죄를 법했기에 하나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차별을 발생시키는 율법말고 차별이 없는 한 의가 있으니 그것이 곧 예수 믿음으로 얻어지는 의인데 이로 인하여 믿는 자에게는 차별이 없다 하는 이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 앞에서 '왜 차별이 없을까'를 알아야 합니다. 다니엘 5장에 보면 벨사살이라는 왕이 있었는데 그 왕이 까불락 대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져온 제사 기구를 가지로 술을 퍼먹고 있으니까 갑자기 손가락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을 씁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란 이 책에 문자로 박혀 꼼짝달싹 못하고 있다고 여겼는데 성경책에 그냥 딱딱하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공중에 활동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껏 우리가 성경책을 보고 그 문자를 읽어 줄 때만 의미가 생기고 우리에게 은혜를 준다는 그런 식으로 생각한 것이 얼마나 무식한 생각인 가를 우리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어주든 읽어주지 않던 우리 바깥에서 우리 처분 활동 외곽에서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말씀이다는 것입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을 손가락의 취지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부족하다 부족하다. 끝났다 그리고 페르샤"라는 것입니다. "네 끝장났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4:12절에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생하게 살아있고 그 살아있는 말씀이 우리가 찌르는데 어느 정도까지냐 하면 그 어떤 생각도 숨기지 못할 정도로 벌거벗은 것 같이 낱낱이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생각도 감추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 말씀의 운동력이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우리 행동 여하에 따라 구원되는 줄로 알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은 "아니야, 아니야. 지금도 공중에서 일하시는 그 말씀으로 인하여 너의 죄가 지적 받고 모든 것을 드러나서 깨닫게 되어야 비로소 구원된다"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이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어떤 신학을 갖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나옵니다. 19-20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여기서 '예'라는 말은 '아니요'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지켜 주느냐 아니 주느냐와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은 자기 맹세하신 대로 그대로 실천해 가버리는 겁니다. '영생으로 가는 길은 좁다'는 결정을 누구한테 물어보고 결정한 것입니까? 또 "부자가 천국 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낙타가 바늘 구멍를 지나는 것만큼 어렵다"라는 말씀을 우리가 부탁한다고 조정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으로 끝나도록 실천해 옮겨버립니다. 이게 바로 "예"입니다. 그러니까 말씀대로 믿은 사람은 세상에 걱정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 행동 여하에 따라서 말씀이 안 지켜지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제가 교회를 안나와도 밭을 가는 한 아주머니는 하늘 나라로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을 두 자로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그 믿음의 내용에 나의 행동의 결과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겁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자신의 능력으로서 우리 자신에게 공짜로 주어졌다는 겁니다.
끝으로 고린도전서 1장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옛날 헬라인들이나 유대인들이 무엇을 가지고 천당을 가려고 애를 썼는가 하면 헬라인들은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 천당을 뚫어볼 까 애를 섰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내려 주신 기적을 모아 모아서 천당을 뚫어볼까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2:9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이 내려주신 구원의 지혜는 사람의 귀를 동원해서도 알 수 없고 눈을 동원해도 알 수 없고 심지어 인간의 종교성과 경건 성과 양심과 마음을 총동원해서도 깨닫지 못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내신 겁니다. 이 말은 인간이 자기 의사에 따라 천국 가고 지옥 가고 하는 것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적으로 안되고 지혜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분이 따지기를 "그면 이 목사 당신이 말하는 기적은 무엇이며 지혜는 무엇인고?"하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2-24에 보니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내 능력으로 믿어주는 십자가가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믿도록 하신 저 능력은 십자가 자체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만이 지혜요 기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어느 집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십자가로부터 매일 용서받는다"고 말입니다. 좁은 길이든, 넓은 길이든, 밭을 갈든 아니 갈든 상관없이 십자가에서 저절로 나오는 그 능력으로만 구원받게 됩니다. 그냥 그대로 사세요. 내가 통제하고 관리하고 내가 조정하고 내가 다듬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중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받는 것은 내가 하는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단이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예수님의 피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이게 지혜이고 이것이 기적입니다. 이것이 값없이 주시는 은총입니다. 칼 들고 자기 피 짜 내지 마세요. 하늘나라는 더러운 우리 피는 안 받습니다. 하나님은 보혈의 피만 받습니다. 그런데 그 피 값이 1리터에 얼마입니까? 50만원? 60만원? 아닙니다. 공짜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공짜이기에 사람들은 이 복음을 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미안스러워하는데 주력하지 마시고 "내가 미쳐 생각하지 못한 구석이 또 있었네, 어떤 질서가 따로 있었네 놀라워라!"라고 이런 놀라움을 가지고 교회와야 합니다. 세상에 이런 놀라운 일이! 나는 죄밖에 지은 것이 없는데 천당에는 공짜로 가다니! 어느 인간이 부자를 마다하고 천당 갈 자가 누가 있습니까. 이 공짜를 여러분들이 영원히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쓸데없이 구원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도 교만한 것이고 자기 사랑인 줄 압니다. 이제는 놀라운 일에 감탄하면서 당당하면서 예수님만 앞장세우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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