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호
38. 백성들의 저항 (왕하21:19-26)
"아몬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이세라 예루살렘에서 이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므술레멧이라 욧바 하루스의 딸이더라 아몬이 그 부친 므낫세의 행함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부친의 행한 모든 길로 행하여 그 부친의 섬기던 우상을 섬겨 경배하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그 길로 행치 아니하더니 그 신복들이 반역하여 왕을 궁중에서 죽이매 그 국민이 아몬왕을 반역한 사람들을 다 죽이고 그 아들 요시야로 대신하여 왕을 삼았더라 아몬의 행한바 남은 사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아몬의 행한바 남은 사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아몬이 웃시야의 동산 자기 묘실에 장사되고 그 아들 요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진정 내 주를 가까이 해야 될 이유에 대하여 말씀을 통해서 그 해답을 알게 하옵소서. 그래서 세상을 보는 눈이 정리가 되고 그로 인해 안심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늘 본문에 보면 아몬이라는 왕이 등장하지요. 그런데 19절에 보면 그가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마는 23절에 보면 그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신복들이 궁정에서 그를 죽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24절에 보면, 그 왕을 죽인 심복들도 또한 죽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러한 일련의 죽었다는 나오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면 20절에 보니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기 때문이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 여기서 사람이 죽는다는 것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지요? 관련성이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 감히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천하 독종이고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을 누가 건드릴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밝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괜히 계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죽이려고 계시다는 사실도 우리가 몰라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인간을 죽입니까? 단지 악을 행했다는 것만으로 인간을 왜 죽이시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인간을 죄짓고 난 뒤에 뭔가 상실한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상실'이라는 말은 뭔가 잃어버렸다는 말입니다. 뭘 잃어버렸을까요? 이빨이 부러졌을까요? 죄 짓고 난 뒤에 두 다리가 부러졌을까요? 영혼을 잃어버렸습니까?
그것은 인간에게 하나님이 없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이 없는 인간으로 달라졌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상실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하나님이 없는 그런 상태에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생각하기를 인간이란 원래 혼자서 태어나서 혼자서 죽는 것 인양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도 모든 생각의 시작을 뭐로 시작하느냐 하면 "사람은 혼자이다!"라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사람은 혼자서 태어나서 혼자 살다가 혼자서 죽습니다. "애초부터 인간은 혼자였다" 이 말입니다. '혼자였다'는 말은 애초부터 잃어버릴 것이 없다는 말도 됩니다. 더 이상 상실할 것도 없으니 나는 내 마음대로 살란다 하는 생각이 불쑥 들지요. "혼자니까!" 이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인간의 대표자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몬이라는 왕입니다.
20-21절에 보면, "아몬이 그 부친 므낫세의 행함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부친의 행한 모든 길로 행하여 그 부친의 섬기던 우상을 섬겨 경배하고"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우상을 섬긴다는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이런 겁니다.
우상이라는 신은 인간이 선택할 대상이 되는 신을 말합니다. 인간을 선택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혹은 약속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소개하는 대목이 나오지요. 이건 무얼 의미하는가 하면, "아브라함은 네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삭아, 네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야곱이 네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름대로 자기 속에 계획이 잡혀 있는 게 있기 때문에 그 계획을 실천하다보니 만나야하고 관계해야 될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이요 이삭이요 야곱이다 는 말입니다. 여러분 생각하기에 아브라함이 위대한 것 같지만, 아브라함은 실상 우상이나 만들어 팔던 제조업자였습니다.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내가 내 마음에 드는 신을 내가 고르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이미 내 안에 들어있는 나의 욕심과 희망사항과 비전과 그리고 내가 골랐던 그 신이 안고 있는 속성과 딱 일치가 된다는 뜻입니다. 흥정이 맞았다는 뜻입니다. "내 속에 부글부글 끓고 있는 내 욕심을 누가 이루어주지?"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는데, 누가 나를 위로해 주지? 옳다구나 그 신이 있구나 하고 그 신을 골라 섬길 때 바로 그것이 우상입니다.
현 기독교에 무슨 현상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가 하면, 소위 '가정 사역'이라는 것이 활개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교회는 가정 사역합니다. 많은 사람들 오세요"라고 한단 말입니다. 이 '가정 사역'이라는 것은 현대인들이 밖에 나아가 돈 번다고 바쁘다 보니 자연 가정에 소홀히 되겠지요. 여기서 가정 불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럴 때 '가정 사역'하는 자들이 쪼르르 달려가서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회복해 드리겠습니다, 라는 것이 바로 가정 사역의 취지입니다. "돈도 중요하지만 돈보다 가정이 더 중요합니다. 저는 목사로서 여러분의 가정 문제에 대해 상담해주고 친구처럼 돌보아 줄 만반의 기술과 방법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들 믿고 이 교회에 등록해서 훈련받으시기 바랍니다."라고 내세우는 것이 가정 사역입니다. 그런데 이게 뭔가 하면 바로 오늘날의 우상노름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돈 때문에 가정이라는 쪽을 등한시 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 한구석에 무슨 마음이 한처럼 박혀 있게 됩니까? "어떻게 가정의 행복을 되찾아야 될텐데"라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점을 목사들이 간파를 한 겁니다. 현대인이 스스로 생각해도 뭔가 상실했는데 그 상실된 내용물이 하나님은 아니고 예수님 그 자체만도 아니고 다만 내가 꿈꾸어 왔던 행복 된 가정, 그것을 상실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러 이러한 것을 누가 와서 좀 채워줄 수 없습니까? 아~ 교회에서 가정 사역을 한다 구요? 그렇다면 그 교회 등록해야지" 라는 행동을 노리는 것이 바로 우상 교회의 특징입니다. 이처럼 내가 원하는 종교를 내가 골라 선택하겠다는 것이 우상입니다. 하지만 구약에 나오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라는 분은 그는 원래 자기 쪽에 알아서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를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줄도 몰랐습니다. 심지어 내가 무엇이 상실되었으며 내가 무엇을 아쉬워하고 있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그냥 세상에 나가 돈 버는 재미에 흠뻑 빠져서 신도 필요 없이 이것으로 나는 만족스럽다고 지내던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이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다르지요? 정말 다릅니다.
제가 늘 말합니다. "'가정 사역'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니 그 쪽에서 반발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저는 고린도전서 7:29-31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 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라고 말입니다.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것같이 하라 얼마나 대범한 복음입니까. 즉 다른 더 큰 문제가 우리들에게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려서 상실된 마음으로 살아라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외침입니다. 바로 이것만이 우상 아닌 북음이요 우상 아닌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보는 세계와 사기꾼 같은 자기들이 보는 복음이 다릅니다.
지금 아몬이라는 자가 우상을 섬기는 것은 여호와를 몰라서 안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 전체가 여호와 나라이고 선지자들이 수두룩하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요모조모 따져 봐도 여호와 하나님만은 자기가 가지고 노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신 같으면 바치는 게 있으면 주는 게 있고 다 흥정이 되는 신인데 여호와 하나님만큼은 그게 안 통하더란 말입니다. 오히려 그 하나님은 자기를 삼키고 다루려고 하는 신이라니까 거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5계명부터 10계명 째까지 보면 그 내용이 다른 종교 있는 것과 별반 다를 점이 없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하는 내용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1계명을 보게 되면 크게 다릅니다. "이 여호와 하나님 좀 섬겨도 내 이렇게 사정 하께"가 아닙니다. 도리어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지금 인간들이 외롭잖아요 뭔가 상실했다는 겁니다. 이것을 메우기 위해 신도 골라 골라서 채택하고 싶은데 신들은, 마치 사창가에 예쁜 드레스 입고 손님이 골라주기를 기다리는 아가씨처럼 느껴진단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는 말씀하시기를,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나 가만 두지 않는다"는 투로 나오니 어디 겁나서 함부로 여호와 하나님 믿겠습니까. 거기에다 제 3계명을 보면,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러 인간은 저주를 받는다고 나오니 지금 사정사정해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어 줄까 말까 하는 판에 아니 그렇게 세게 나와 가지고 어느 누가 하나님 믿겠습니까? 그러나 아몬 같은 경우에 "에라 치워라 나는 내가 편한 대로 편한 신을 믿겠다"고 나선 겁니다.
오늘날 교회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소개해야 될 것을 여호와 이름을 앞장 세우고서는 가짜 우상적 여호와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배짱을 퉁겨야 될텐데 퉁길 배짱도 없고 장사 안 될까봐 걱정이 되어 가지고 사람들이 원하는 가정 사역, 제자 훈련, 사랑의 공동체, 생명 운동, 남북 통일 내세우면서 창녀처럼 구니 이게 오늘날 우상 집단이지 무슨 참 교회이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가정 교육 잘 받은 사람 같으면 구태여 교회 나올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좋은 아버지 좋은 어머니 잘 둔덕에 평소에 밥상 앞에서 늘 듣던 잔소리가 목사 입에서 그대로 나오니 일요일날 11시에 더운데 다 아는 소리 들으려고 교회 나와 앉아 있습니까. "음, 바르게 살면 천당은 가겠구나. 안녕히 계십시오"하고 그 다음 교회 다닐 이유가 없게 됩니다.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에 대하서 이야기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서 말입니다. 인간이 뭘 할 수 있는가가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 된 통으로 한 번 느껴 봐라 라는 것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가 두지 말라"는 말씀은 다른 말씀이 아니라 "너 지금 상실했어!"라는 말씀입니다. "너 지금 뭔가 잃어버린 채로 살아가는 거야"라는 말입니다. "너 지금 정상이 아니야. 외롭지? 자식새끼 다 있고 일가 친척, 부모 다 있어도 외롭지? 왜 외로운 줄 알아? 네 원래 인간 아니거든!"라는 뜻입니다. "네 지금 하나님 잃어버렸잖아"라는 점을 다그치고 추궁하시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쳐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건 좀 어려운 이야기가 됩니다마는,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어떤 이미지를 부여하느냐 하면 하나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둘을 만든 겁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남자만 만든 것이 아니라 여자도 만들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둘로 만든 이유가 뭔가 하면 남자 혼자 외롭다, 독처 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다고 해서 하나 대신 둘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인데 에베소서 5장에 보니까 이것은 부부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고 가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결국 장차 너희 성도들의 신랑이 따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성도들은 너희들은 나의 신부이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퉁명스럽게 대꾸하지요. "신부면 신부지 어쩌란 말입니까?" 그러면 신랑 되시는 예수님이 말씀하시지요. "너희들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아." "그래도 외로운데요" "그렇지, 그러나 그것은 신랑이 따로 있기 때문에 외로운 거야" "나중에 이 신랑을 만나면 너는 영원히 외롭지 않는 거야"라는 말씀입니다. 이점은 인간이 이 세상에 창조되었을 때부터 아예 확정되어진 원리입니다.
예수라는 신랑을 만나지 못하면 인간은 영원히 허무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아예 창세기 때부터 확정되어진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보면 죄짓고 난 뒤에 아담과 하와 사이에 부부 싸움이 일어납니다. 이런 가정이 정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죄를 남자는 아내에게 전가하고 아내는 뱀에게 전가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이 부부 사이를 통해 징벌을 내리십니다. 여자는 남자로부터 구박을 받는 괴로움과 그 가운데서 자식을 낳고 키우는 고통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여자를 버리고자 했던 남자는 가정을 위하여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수고를 하다가 결국에는 흙으로 허무하게 소멸되는 징벌을 받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징벌을 주면서도 그 징벌만 주신 게 아닙니다. 영생을 줄 수 있는 약속도 주었습니다. 약하고 구박받는 여자에게 말입니다. 그래서 여자 이름이 하와, 즉 생명입니다. 생명을 주는 분이 따로 있는 그 분이 바로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자.. 이제 여러분은 여호와 하나님이 중요하지 이제는 아시겠지요?
오늘 본문 24절에 보면, " 그 국민이 아몬 왕을 반역한 사람들을 다 죽이고 그 아들 요시야로 대신하여 왕을 삼았더라"라고 되어 있지요. 자, 지금 국민의 입장이 등장하고 왕을 죽인 신하의 입장이 등장하고, 그리고 우상을 제 마음대로 섬겼던 아몬 왕이 등장하면서 지금 세 가지 타입의 입장이 나오지요. 신하들이 왕을 죽인 것은 그 왕의 권력이 탐이 나서 왕을 죽인 것이고, 왕이 우상을 섬긴 것은 자기가 돛대니까 자기하고 싶은 대로,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 째 문제 왜 국민들은 그 왕을 죽인 신하들을 왜 또 죽입니까? 또 요시아를 왕을 삼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건 아직 제가 설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국민들도 아몬 왕처럼 자기가 원하는 왕을 제멋대로 골로 마음대로 섬기고 또 신하들처럼 왕 없이 살면 되는데 왜 구태여 그들은 왕을 또 세우게 됩니까? 그것은 그 국민들이 선지자로부터 배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란 여호와 하나님을 상실하면 곧 그것이 저주라는 것을 배웠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왕이 없는 채로 직접 자신들이 여호와를 섬기면 될 터인데 왜 왕을 구태여 세우려고 있을까요? 그리고 왕을 죽인 자를 왜 또 죽이려고 했습니까? 나쁜 왕을 없애 죽이는 것이 뭐가 나쁜 짓이겠습니까? 오히려 잘 한 짓이 아닙니까? 그런데 국민들은 비록 나쁜 왕이지만 신하가 그 나쁜 왕을 죽였다고 해서 그 신하들을 죽인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잠언 25:2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씀이냐 하면 세상 만사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지요. 그런데 그 세상만사를 관리하시는 하나님이 인간 세계 앞에 직접 나타난다면 인간은 다 죽습니다. 너무나도 거룩하고 무섭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대신해서 할 수 있는 자를 이스라엘 속에서 특별히 택하신 겁니다. 그 자가 바로 왕입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이지만 하나님을 뜻에 따라 백성들을 살피고 전달하고 실천에 옮기는 것은 왕의 몫이다 이 말입니다. 그 왕을 헬라말로 '그리스도'라고 하고 히브리말로 그 분을 '메시야'라고 합니다. 제가 지난 주일날 이야기했듯이 베드로가 고백하기를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그리스도'라는 말이 곧 왕이라는 말입니다. 이 왕의 뉘앙스가 뭐냐 하면. "나는 왕 없이는 못살겠는데 그것도 하늘에서 보내시는 왕을 고대합니다. 그런데 그 왕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라는 말이에요.
잠언 16:1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악을 행하는 것은 왕의 미워 할 바니 이는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 이스라엘 나라에서 왕에게 미움을 받는 자들은 감옥에 가든지 처벌을 받게 되는데 이는 왕이란 지위는 하늘에 있는 공의로움을 대변하고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자 여러분, 여러분은 왕을 원합니까. 지도자를 원하십니까?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듯이, 현대 교육은 스스로 서기 위한 기술과 기능을 가르치는 교육입니다. 자립을 할 수 있는 바탕을 키워주는 것이 교육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너는 상실했다는 겁니다. 너는 뭔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잃어버린 것을 모르고 내 스스로 살려고 아등바등 살다보니까 고통은 고통대로 모순은 모순대로 부조리는 부조리대로 외로움은 외로움대로, 욕심으로서 채워도, 채워도 찾아드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기의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이상하다, 나 정도만 되어도 대단히 성공한 인물인데 그런데 하루하루 사는 게 허무하냐. 남들 사는 것 봐도 그렇고 나 꼬락서니 사는 것을 봐도 고만고만하고 정말 사는 것이 허무하구나" 하는 실정에 있습니다.
옛날 아몬 왕 때 국민들은 이 해답을 어디서 얻었습니까? "그렇다, 그리스도이다. 우리에게 왕이 있어야 돼. 나에게는 신랑이 있어야 돼. 독처 하는 것이 외로우니까 외로운 것이 외로우니까"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이 어디서 어디에 살아도 저주받은 인생입니다. 창세기 4장 이야기를 하나 더 해 드리면 창세기 4장에서 동생을 죽인 형 가인이 받은 벌이 무어겠습니까? 교도소 10년형이었습니까? 노력 봉사 5년이었습니까? 무어였습니까?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없는 남은 여생이었습니다. 이게 징벌이었습니다. 이것이 살인범에 대한 징벌이었습니다.
요즈음 같으면 이 징벌을 받으면 아마 만세를 부를 것입니다. 마귀가 옆에서 말합니다. "됐다됐다 우리 친구 아이가, 이게 정상이야. 모든 굴레를 벗어나라."고 합니다. 이게 아몬 왕이요 신하들은 외로우니까 "이왕 사는 것 권력이나 쥐자"해서 왕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왕을 죽인 신하를 죽인 국민들의 심정을 무엇입니까? "우리는 원래로 돌아 갈란다. 본래로 돌아 갈란다. 아브라함 하나님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필요하다"해서 그들은 요시야 왕을 등극시켰습니다. 백성들은 진정으로 메시야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돈으로 이 허망함을 메울 생각을 마시고 우리의 구세주를 찾는 순수한 신앙인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정말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진정으로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고 무엇이 빠져 있는 지를 깨닫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줄 압니다. 저희에게 아브라함 하나님이 보내신 그 메시야가 있사오니 이 메시야가 귀한 줄 알아 이 메시야를 자랑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