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호
29. 언약 (왕하 17:34-41)
17:34 저희가 오늘까지 이전 풍속대로 행하여 여호와를 경외치 아니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라 이름을 주신 야곱의 자손에게 명하신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는 도다 17:35 옛적에 여호와께서 야곱의 자손에게 언약을 세우시고 저희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다른 신을 경외하지 말며 그를 숭배하지 말며 그를 섬기지 말며 그에게 제사하지 말고 17:36 오직 큰 능력과 편 팔로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만 너희가 경외하여 그를 숭배하며 그에게 제사를 드릴 것이며 17:37 또 여호와가 너희를 위하여 기록한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너희가 지켜 영원히 행하고 다른 신들을 경외치 말며 17:38 또 내가 너희와 세운 언약을 잊지 말며 다른 신들을 경외치 말고 17:39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가 너희를 모든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리라 하셨으나 17:40 그러나 저희가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전 풍속대로 행하였느니라 17:41 그 여러 민족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또 그 아로새긴 우상을 섬기더니 그 자자 손손이 그 열조의 행한 것을 좇아 오늘까지 그대로 하니라
우리가 성경을 보고 또 교회에 나오는 것은 명예를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진짜 살기 위해서 나온 겁니다. 성경은 신앙 가진 것 자랑하기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뿐만 아니라 영원히 사느냐 아니면 영원히 죽느냐의 문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운영 문제나 신상에 관한 문제 같은 것은 성경의 관심이 아닙니다. 과연 인간은 영원히 살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성경은 그 중요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지나오면서 남기는 자국 자국마다 에는 인간의 손에 맡기면 분명히 망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이상스럽게도 하나님이 개입하셨기에 기적이 일어나면서 사는 일이 줄이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런 것을 통해서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하나님은 바로 우리에게 죽음보다 더 큰 생명을 주신 분이구나 하는 점을 깨닫게 하고 발견해야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을 죽음에서 건지시고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내가 지금 내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그분에게 몸을 바치리라" 바로 이런 고백을 두 자로 말해서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신앙을 갖게 되면 점점 자기가 자기에게로부터 멀어집니다. 자기 사정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어떤 문제가 생겨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든든한 분이 계시기에, 죽음보다 더 큰 영생 주신다는 분이 계시기에 마음이 너무나 든든해서 개인적인 사정은 큰 관심거리가 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증거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 그 분에 의해 보내지신 구세주를 증거해야 됩니다. 우리가 교회는 나왔다고 해서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 나오지 않고 그 시간에 사람을 만나고 돌아다니면 해결을 일찍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사람 만나서 해결하는 것과는 도저히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를 제대로 아는 자들은 자신이 잠시 살다가 죽을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이점을 믿고 교회에 다니게 됩니다.
사실 우리나라 민족은 어디가나 귀신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예뻐서 섬겼겠습니까, 사랑스러워서 섬겼겠습니까. 다만 혹시 내가 이 동네 귀신을 무시했다가 나에게 어떤 불행이 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유난히도 귀신을 알아서 섬겼지요. 우리가 하나님도 이런 관점에서 섬겨서는 아니 됩니다. 이 땅에 귀신에다가 더 보태어 하나님도 덧붙여 믿자 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대하면 정말 곤란합니다. 아직도 자기에게 매우 집착이 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지 하나님을 내 자신의 종으로 삼아서 그 동안 귀신과 흥정하듯이 하나님과 흥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또 다른 귀신을 섬겨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래서는 마음의 행복을 못 얻겠지요. 한평생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평가하시면서 그 동안 너희들이 믿는 귀신, 우상, 미신으로부터 너희들이 도리어 철저하게 눌려 있다고 보시는 거예요. 갇힌 상태에 있다는 거죠.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를 행하여 말씀하시기를 마음 푹 놓고 네가 번지 점프하듯이 공중에다 내 몸을 맡기듯이 말입니다 모든 것을 다 끊고 자유로워져 보아라 고 합니다. 그래도 과연 네가 죽는지 사는지 한번 해 보아라 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4절에 보면, "저희가 오늘까지 이전 풍속대로 행하여 여호와를 경외치 아니하며"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자, 이전의 식대로 산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미덥지 못하다는 뜻밖에 더 되겠어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에 하나님이 그렇게 든든하게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놓고 무시하고 내 편안한 대로 살았습니다. 이것이 이전 풍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시 말씀으로 압박을 가 합니다. 네가 나 하나님을 버리고 이 전 풍습대로 살아보았자 그것이 너에게 굴레다 라는 것입니다. 이전 풍습대로 사는 것을 벗어버리고 여호와 편에 서라는 겁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이쪽에 오면 이쪽 귀신을 섬기고 저쪽에 가면 여호와를 섬기고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즉 내가 내 인생을 결정한 선택의 주인공으로 계속 행세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내가 철저히 여호와 편에 서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아예 여호와의 사람, 혹은 여호와의 식구가 되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며칠 전에 현대 그룹 총수였던 정주영씨가 세상을 떴지요. 장례 식장에 현대 가족들이 즐비합니다. 그 가운데는 정주영 손자도 있습니다. 나이가 30대 초반밖에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현대 백화점 사장입니다. 자 여러분, 이 사람이 자기 능력으로 사장이 되었겠습니까? 아니겠지요? 현대 가족이기에 가능한 겁니다. 이건희 회장 아들도 자기 힘으로 그 큰 회사에 높은 자리에 들어간 것도 같은 집안 식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장례식 때 주최자로서 정주영 일가와 함께 활동하는 것도 다 한 식구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비록 내가 나이가 어려도, 그리고 나이가 어리다고 누가 뭐래도 나는 당당한 정주영의 가족의 한 일원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꾸만 자신을 자신의 주인으로 간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예 하나님의 가족으로 적을 옮기세요. 집에 있으나 교회에 가나 나는 어디서나 하나님의 사람이다 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걸어 다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잠도 자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밥도 먹고 일도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알아서 잘 믿고 있어라 정도가 아니라 아예 호적을 파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버리라는 거죠. 너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빌립보서 3장 2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거기에 보면 땅에 일을 생각하는 말하는 당부가 먼저 나옵니다. 너 인간은 통째로 하늘나라 사람되었음, 하늘나라 사람임, 천국의 백성임. 하나님 편에 속한 사람임 그것을 확정지어라, 그것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줍니까? 21절에 나옵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광채 나는 부활의 형체를 우리의 형체가 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 내려 줍니다. 이 약속은 이미 하나님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혜택입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 문제를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우리들의 개인적인 문제는 큰 문제로 되지 않습니다.
여름철이 오면 모기가 괴롭힙니다. 모기에 킬라 뿌렸다고 해서 모기가 전혀 오지 않던가요? 그렇지 않지요. 조금 있다보면 또 모기가 몰려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괴롭고 귀찮아서 이사를 간다거나 집에 불을 지른다거나 하지 않지요. 우리가 비록 여름만 되면 모기에게 물리고 뜯겨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이며 영생을 얻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기에게 물렸다고 자살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바보 중에 바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노라면 이처럼 모기같이 물어대는 일이 많이 겼습니다. 조금 뜸하고 싶으면 다시 우리를 무는 일들이 들이닥칩니다. 세상만사가 우리 뜻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좀 되는가 싶으면 또 나를 괴롭히고 이런 일이 자꾸 반복이 되지요. 문제 해결이 됐다싶어 안심하면 또 다른 문제가 연이어 일어납니다. 그렇다고 해서 산에 가서 목을 매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속한 사람인데 말입니다.
세상에서 늘 반복해서 당하는 일에 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화가 난다고 남까지 죽이고 말입니다.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우리들은 그런 사람들을 보고 '아이구 이 불쌍한 인간들아' 라고 한 적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나도 당신처럼 단박 죽고싶다 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이 사람들아 여호와가 살아 계신데 죽기는 왜 죽으며 자기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니까 그렇게 힘들지. 봐 나처럼 아예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버리면 그만이잖아"하고 자신 있게 남들에게 여호와를 소개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도 또한 우리의 모든 일을 자기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사니까 이건 믿음도 아니고 교회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어중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고 행동을 바르게 하라가 아니고 과거에 네가 어떤 인식을 진리 삼아 인생을 끌어왔느냐를 묻고 계십니다. 그리고 네가 과거에서 지금까지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던 간에 지금 훌떡 벗어버리라는 겁니다. 그것에서 한번 나와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있는가? 그곳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눈에 들어오는 세상입니다. 즉 세상만사가 돌아가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언약대로, 하나님의 약속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36-37절에 보면, "오직 큰 능력과 편 팔로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만 너희가 경외하여 그를 숭배하며 그에게 제사를 드릴 것이며 또 여호와가 너희를 위하여 기록한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너희가 지켜 영원히 행하고 다른 신들을 경외치 말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망가지게 되어있고 또 심판되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언약대로 영생 받을 사람은 영생 받게 되어 있고 천당 갈 사람 천당가게 되어있다 이 말입니다. 이런 약속을 우리에게 알려준 것도 고마운 이야기이고 또 그런 약속을 그대로 믿게 해 주신 하나님께도 감사를 올릴 일입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파리나 모기가 달려들어도 우리는 거기에 너무 예민하게 대처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옛날 풍속은 누구에 의해 조정되기에 거기를 끊으라고 하시는 걸까요? 그 이유가 39절에 나옵니다.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가 너희를 모든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리라 하셨으나" 여기에 보면 '원수'라는 적이 나옵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원인제공자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하셔서 괴롭히려고 교회에 나오너라, 예수를 믿어라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사정을 근원적으로 원초적으로 잘 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우리 인간은 태어나서 길면 100수요, 짧으면 60도 될 수 있습니다. 백년을 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백년 동안을 우리가 아무리 공부하고 연구하여도 나에 대해서나 세상 돌아가는 것에 어떻게 제대로 알겠습니까? 그냥 자기 체험을 정리해서 아마 이 정도 될 꺼야 하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진짜 세상, 자식, 부모, 친구에 대해서 모르는 겁니다. 우리가 정말 필요하고 우리의 영생을 우리들의 아이디어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겁니다. 왜 그러합니까? 정리가 안 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면 누가 이 우주의 진리를 원초적인 것부터 모두 다 아십니까? 우리 하나님이 아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 인간들이 마음 고생하면서 살아가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 가 하면 그 원인을 에덴동산에서부터 찾습니다. 우리는 그 때 그 사정을 모르지요. 사탄이 인간에게 어떤 작당을 했는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정말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진정 살려내는 방식을 알려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원수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방식이에요. 원수로부터 말입니다. 하나님의 원수, 악마가 개입되어서 우리가 이러한 고생을 늘어지게 하고 있는 거예요.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원수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 아직도 우리는 같이 합세하고 노닥거리고 있고 동조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기 가질 때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기저귀를 준비하고 학교 등록금을 준비하듯이 아이들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미리 아는 부모나 어른들이 철 없는 자식을 위하여 마련해 주잖아요. 그것을 가지고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으로서 자식이 무엇이 필요한지 장래에 어떤 길로 갈 것인지 교육을 시켜 줍니다. 자식 입장에서는 물론 때로 매로 맞을 때는 부모가 밉고 섭섭할 때도 있습니다. 간섭도 싫어하며 반항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너 좋을 대로 다 하라고 방치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이 우리의 부모라면 부모가 세상을 알겠습니까? 자식인 우리가 알아서 알기를 바라겠습니까? 누가 우주의 비밀을 알겠습니까? 역시 부모 쪽에서 다 하시지요.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으며 제대로 사는 지를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자존심은 어디 가서 찾지요? 찾을 가치도 없는 것이 우리의 명예입니다. 우리는 철이 없어서 하나님의 원수인 마귀가 시키는 대로 겁에 질린 채 그냥 죽지 못해 동행하며 사는 입장입니다.
여러분들도 학창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학교가 얼마나 무서운 집단인지 잘 알 겁니다. 부모와 지내는 시간이 점점 없어지고 상급학교에 갈수록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집니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는 것은 부모와 대화하는 것보다 친구와 대화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는 뜻이죠. 그만큼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역시 부모보다 친구가 더 친숙해집니다. 그런데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사랑하는 관계와 사랑 받는 관계이지만 친구와 친구의 관계는 힘과 힘에 의해서 이야기가 통하는 관계입니다. 힘에 의해서 눌리고 힘에 의해서 누르는 세계란 말입니다. 아주 냉정하고 냉혹하며 잔인한 사회입니다. 24시간 가운데 친구가 가장 가까이 있기에 부모보다도 더 힘으로 작용합니다. 친구의 말을 듣지 않을 때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을 때보다 시간상으로 더 불편한 시간을 오래 보내게 됩니다.
지금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논하고 예수님을 논하는 교회에 와 있어도 우리들의 대부분의 시간은 세상 사람들과 보냅니다. 세상 사람들의 논리가 무엇입니까? 사랑이던가요? 아닙니다. 힘입니다. 잔인한 힘의 논리예요. 학교에서부터 배웠던 그 힘에 의해 맺어지는 관계입니다. 힘있는 자에게 고개 숙이는 것을 배우고 힘있거든 없는 자를 마구 눌려 이용하라는 것을 배웠던 그 힘의 관계입니다. 이것이 바깥 세상에서는 진리처럼 통합니다. 이 원리에 우리들도 익숙하게 젖어 있습니다. 생존의 법칙처럼 익히고 사회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회는 교회 진리, 하나님 진리가 통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모으고 돈을 모으고 권력을 모으는데 총 집중을 하는 구습, 세상 관습만이 통합니다.
지금 우리는 그 속에 들어 가 있는 것입니다. 힘있는 자에게 고개 숙이고 힘없는 자에게 압박하고, 그러면서 그 속에서 은근히 자신의 출세를 노리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성공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고 또한 남들로부터 그 소리를 칭찬 삼아 듣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정신 아래서 우리 일과 대부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뭐라고 있던가요.
누가복음 16:15를 같이 찾아갑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저는 이 한마디로 모든 세상 정신이 다 들통났다고 믿습니다. '사람에게 높음 받는 것이 하나님께 미움받는 것'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 뒤에 보면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얼마나 세상이 주는 관습과 관행과 삶의 습관에 찌들어 졌는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서도 의아해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높음 받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 받는 것이 아닌가 라는 도식, 이 공식을 머리에 꽉 박아 놓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욕망과 욕심은 실은 악마가 시킨 것인데 말입니다. 이것이 원수가 우리에게 접근해 오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24시간 익히고 또 익힙니다. 심지어 교회 내에서도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인양 배워왔다는 거예요. 교회에 와서도 장로로 진급되어야 하고 신학교에 가서도 누가 더 큰 교회 목회를 하느냐에 포부를 걸고 졸업을 꿈꿉니다. 사람들에게 칭찬 받고 인기 얻는 그런 목사가 되어야 목회 성공인줄 알고 말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사람에게 높음 받는 것이 하나님께 미움받는 다는 이 말씀에 의해서 직접 공격당할 사고 방식입니다. 이것은 원초적인 악마성 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고 방식에 양보가 없습니다.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뒤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에 대해서 우리는 아예 사람 취급 안 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 동안 사람 취급받을 사람과 사람 취급 못 받을 사람을 악마의 기준에 의해서 분류해 온 것입니다. 이게 오늘날 학교 교육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 눈으로 보기에는 엉터리 축복이요 구원입니다.
사람에게 칭찬 받는 다는 것을 넓게 이야기하면 우리 가문이 칭찬 받는다 우리교회가 칭찬 받는다는 것에 기대를 거는 것입니다. 모든 가치를 남들의 칭찬에 의존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높음을 받는 것, 이것은 어느 집 어느 가훈이나 어느 교훈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면 된다' 이 말 속에 무슨 뜻이 담겨 있겠습니까? 이것은 물러서지 않고 달려 붙어 노력하면 결국 사람에게 높임 받는 결과가 주어질 것이니.. '성실 하라'는 교훈, 이것도 사람에게 높음 받는데 초점을 맞춘 겁니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 보세요. 사람에게 철저하게 무시당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에게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철저하게 짓밟힘을 당하는 그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겁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이 네가 예수를 믿느냐? 네가 예수를 사랑하느냐? 면서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은 길게 살아보아야 백년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세상 사람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세상사람들 보면서 그들을 모방하면서 살아갑니다. "아~ 저렇게 살아가니 인기 얻고 출세하고 등등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하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죠. 자기 속에 들어 있는 악마의 속성과 외부에서 오는 유혹이 합작이 되어서 그것이 바로 사는 것인 줄로 알고 살아가는 거예요.
제가 답답한 것이 뭐냐하면, 여러분들은 수시로 자기 기준을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 기준을 만들기에 저는 그것을 버리시고 포기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뭐라고 하는가를 관심을 갖기 바라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하나님과 보이지 않는 마찰과 충돌과 싸움이 생깁니다. 우리는 그런 기준을 만들 권리도 없으면서, 자기가 뭔지도 모르면서 수시로 우리들은 이렇게 살 거야 저렇게 살 거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원수가 노리는 바입니다. 이래서 점차 그 굴레 속으로 점점 빠져 들어가는 겁니다.
교회가 있는 이유는 자기 인생에 대해서 잘했다고 스스로 손뼉 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된 인식을 빼앗아 버리고 지워버리고 그 잘못된 방식 속에 말씀을 심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가 하면, 과연 나를 건져내시는 분이 믿을만한 분인가,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 한평생 내 목숨을 바쳐도 든든하신 분인가 라는 것입니다.
오늘 낮에 장로님이 강의하신 것처럼 다른 이름으로 우리를 구원할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들으면서, 그럼 그 예수라는 분이 내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셔야 합니다. "내 인생 기준이 따로 있는데 뭐 하나님 말은 완전히 무시하자" 이렇게 나오지 마시고, 예수 믿으면 영생을 주신다는 데 예수라는 분이 그렇데 대단한 분인가 진짜 내 평생을 바쳐도 괜찮은 분인가를 생각해 보시란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보신다면 그 다음부터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세상이 달리 보여요. 세상이 불쌍히 보여요. 과거에 자신이 살던 모습이 훤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세상법칙에 연연해서 살아가는 개미 군단에 속한 인생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지요. 저건 아닌데, 저렇게 살아가서 안 되는데 하고 말입니다.
이때부터 생기는 것이 전도입니다. 전도란 것은 부모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듯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한마디 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우주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사는 게 아니야 죽는 길이야, 지옥 가는 길이야" 라고 한마디 던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신신당부하시는 것은 옛날 풍습을 좀 끊어 달라, 네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세상을 살 때에 놀라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세상일에 놀라고 두려워한다면, 여러분 그때부터 악마 편에다 서는 겁니다. 악마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궁지 속에 몰아넣어서 우리에게서 예수님의 끈은 다 지워버리고자 하는 것이 최종 노리는 바입니다. 예수를 다시는 안 믿는 사람으로 만들고 하나님을 포기하게 만드는 존재가 될 때까지 악마는 우리를 농락할 것입니다. 하나님, 예수, 하나님의 약속을 빠져버리고 철저하게 이 세상의 사람으로 살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사람조차 바뀌게 만들어 세상의 힘의 논리로 인해 권력아래에 고개를 숙이는 법과 돈, 성공과 출세를 위해 신앙마저 내 팽개치게 만드는 법을 받아들이게 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으면 어떤 경우에라도 세상의 힘에 고개를 숙이면 안됩니다. 고개를 숙이게 된다면 여러분 속에 하나님과 예수님의 흔적이 사라지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세상의 어떤 일에도 놀라지 마시고 고개를 숙일 마음의 준비를 갖지 마시고 오히려 상대방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하나님의 영생을 기쁘게 수용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짧은 여름철에 모기는 늘 달려드는 법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다시 세상에 나갑니다. 세상이 우리를 반길 때 고개를 숙이는 법칙을 가르쳐 주고 우리를 반깁니다. 네가 원하는 성공과 출세는 내 말을 들어야 가능하다는 그러한 새로운 세상 약속들과 폭력에 의해서 우리는 깜짝 놀라면서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는 전도하기 위해서 세상을 나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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