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호
28. 신의 법(왕하 17:24-28)
17:24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저희가 사마리아를 차지하여 그 여러 성읍에 거하니라 17:25 저희가 처음으로 거기 거할 때에 여호와를 경외치 아니한고로 여호와께서 사자들을 그 가운데 보내시매 몇 사람을 죽인지라 17:26 그러므로 혹이 앗수르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왕께서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옮겨 거하게 하신 열방 사람이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하므로 그 신이 사자들을 저희 가운데 보내매 저희를 죽였사오니 이는 저희가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17:27 앗수르 왕이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그곳에서 사로잡아 온 제사장 하나를 그곳으로 데려가되 저로 그곳에 가서 거하며 그 땅 신의 법으로 무리에게 가르치게 하라 17:28 이에 사마리아에서 사로잡혀간 제사장 중 하나가 와서 벧엘에 거하며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 것을 가르쳤더라
오늘 성경에 보니까 신의 법이라, 하나님이 만든 법이라는 내용이 연이어 나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하나님에 법에 관심이 없어도 또 하나님의 법을 생각하지 않고도 교회가 되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그런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우선하지 않더라도 교회가 부흥되고 성장되는 것에는 지장이 없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거론하면 오히려 교회가 폭삭 망하고 하나님의 법을 버리고 사람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면 교회라는 업소는 장사가 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성경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법을 우선하지 않는 교회가 교회이겠는가? 저는 그것을 교회라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관심도 없으면서 친하게 모임을 결성시키고자 만든 것도 교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교회라고 용납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법이 듣고 싶어서, 신의 법이 그리워서, 신의 법대로 살아 보겠다고 왔을 때만 교회이지, 신의 법은 버리고 한시간 때우면 벌은 안 받겠지 행운이 찾아오겠지, 이런 식으로 소원 풀이하는 식으로 교회 나오는 것은 참말로 곤란합니다. 이처럼 신의 법이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에게 거부당해도 신의 법은 다른 쪽에서도 도리어 거론하게 나서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 믿던 백성이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이방 민족의 왕 앗수르 왕이 신의 법을 거론하고 나섰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믿어야 할 백성들이 신의 법을 포기했을 때 하나님께서 징벌을 내리셔서 약속의 땅에서 다시 쫓겨나가게 했습니다.
24절에 보니까 앗수르 왕이 의도적으로 다른 민족의 피를 섞습니다. 추방된 빈자리에다가 민족과 민족의 피를 섞어서 혼혈아를 만들기 위해 다른 곳에 살던 다른 종족들을 이주시킵니다. 그래야 그들이 일치단결해서 앗수르 왕에게 반발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책상 이유 때문입니다.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저희가 사마리아를 차지하여 그 여러 성읍에 거하니라"
이렇게 뒤죽박죽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마리아 사람은 정통적인 유대인이 아니라서 구원을 못 받는다는 것이 옳은 생각처럼 유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없이 그들을 멸시하고 무시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 이런 앗수르 왕에 의한 이주 정책 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 이민 정책에 한 결과, 문제가 생겼습니다. 난데없이 맹수들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습니다. 그 맹수이름이 25절에 보니 사자였습니다. 사자가 등장해서 사람을 죽이니까 앗수르 왕이 양심에 가책이 되었든지 이런 아이디어를 냅니다.
이러한 예상치 못한 일은 그 땅을 지배하는 신이 일으킨 일인데 그 땅에 살아될 자들이 마땅히 지켜야 되는 법을 위반하니까 이런 재앙을 떨어졌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그 땅의 법을 잘 알고 있는 제사장을 보내어서 그 땅에서 맹수들에 의한 재앙이 일어나지 않도록 합니다. 이로서 27절에 보니까 앗수르 왕이 제사장을 파견근무 시켰는데 그 제사장의 임무는 신의 법을 가르치는 것이지요. 신의 법이 있을 때만 재앙이 떨어지지 않는 희한한 영토, 희한한 고장, 바로 이곳이 조금 전 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던 약속의 그 땅이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동창회나 계모임과는 달라야 됩니다. 뭐가 달라야 되는 가 하면 신의 법에 의해서 운영되어야 하고 신의 법에 의해서 존재해야 하고 그 신의 법이 구현되고 존중을 받는 그러한 특별한 모임으로서의 교회이어야 합니다. 교회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신의 법이 빠지면 그 교회는 환멸받을 교회입니다. 사람들은 주위에 숱한 교회가 있으니까 교회만 쳐다보고 오는 겁니다. 가슴속에 신의 법은 없고 교회 있음에 교회에 찾아가는 그것이 종교 관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단지 예배당이 세워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교회에 사람이 찾아드니 이 점을 고려해서 교회 관리와 운영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최우선 과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사랑할 만하니까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정작 신의 법은 사랑하지 않고 포기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신의 법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사람들에 의해 키워지고 사람들에 의해서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 신의 법입니까? 여러분, 여러분들이 기도했다고 해서 비로소 봄이 찾아왔습니까? 기도하면 봄이라도 여름이 되고 가을이 되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이 기도하나 안 하나 상관하지 않고 봄은 오게 되어있습니다. 봄은 봄대로 온다는 것이 신의 법의 속성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이 원하든 원치 않든 신의 법은 이 우주를 지배하고 있고 나의 운명을 심판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나의 인생을 만들어 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나 자신을 판단할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신의 법에 의해서 우리는 사람다우냐 아니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신의 법이 결정하는 겁니다. 내가 교회 다닌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신의 법에 저촉되느냐 아니면 부합되느냐에 구원되느냐 안 되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신의 법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의 법을 더 중요시해서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더란 말입니다. 신의 법만을 우선으로 소개하는 교회에서 사람들이 없어지더란 말입니다. 그건 곧 전에도 신의 법이 그립고 반가워서 교회 온 게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다니는 이유는 신의 법보다 다른 것에 우선된 채 교회가 운영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사람이 신의 법을 원치 않고 다른 것을 찾는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누군지를 놓쳐 버립니다. 내가 누군가는 오로지 하나님의 법으로만 파악해야 되는데 하늘의 법을 잃어버리니까 내가 누군가를 잃어버리는 거예요. 즉 교회에서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니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있습니다. 신의 법 앞에서 그런 것들이 하등 소용없다는 것을 그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애초부터 신의 법을 고려하지 않으니까 교회가 종교 환상을 만들어 내어 즐기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에 나오기 전에 인간들은 자기 즐거움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그런 인간들이 교회에 나와서도 여전히 또 다른 즐거움에 눈독들이고 나옵니다. 인생을 어떻게 하면서 즐길까, 인생을 어떻게 하면 풍족하게 재미나게 살아볼까, 여기에 정신을 빠져 버렸다는 겁니다.
지금 북쪽 이스라엘 나라가 앗수르라는 큰 나라에게 쫓겨서 나갔는데 앗수르라는 깡패가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환경이 얼마나 나에게 신앙생활을 좌우한다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그럼 뭐냐? 신의 법에 의해서 살아야만 신의 법이 작용하는 땅이 유지할 수 있는데 신의 법이 작용하는 고장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신의 법을 포기했으니까 그들은 쫓겨나야 당연하지 볼 것 뭐 있습니까? 하나님이 교회에 불러 준 것은 천국 시민답게 살아라고 교회에 불러 준겁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도 신의 법을 듣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지옥으로 직행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방금 이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 하고 있는 거예요. 특수한 법칙과 특수한 원칙이 엄연히 현존하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천국을 간다? 천국에 법이 있는데 그 법을 무시하고 천국에 간다? 이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들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은, 자기 힘으로 자기 기분에 맞는 법칙에 준해서 내 인생 내 식대로 살아보겠다고 살겠다는 데에 모든 문제가 발생되는 겁니다. 자기 욕망대로 살고자 하니까, 자기 머리에 생각나는 대로 살려고 하니, 하나님의 법이 오히려 자기 사는데 방해물이 되고 거추장스럽고 귀찮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에랴 모르겠다 신의 법마저 버리고 내 식대로 살련다로 나가니까 그것이 하나님 앞에 자기를 망하게 만든 지름길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옛날 이솝우화라는 것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2500년 전에 유명한 현인 이솝이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여우가 포도밭을 지나가다가 포도를 먹으려고 하지만 높은 곳에 달린 포도를 따먹을 수가 없거든요. 폴짝 폴짝 뛰면서 노력을 하지만 힘만 빠지고 포도는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여우가 화가 나서 그 자리를 떠나면서 말이 '그래 저 포도는 분명 시어서 못 먹는 포도 일거야' 합니다. 이를 보면서 많은 교훈을 느끼게 합니다. 사람들이 산다는 게 저 포도가 진짜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관한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못 따먹고 자기의 소유가 되지 못하면 진리가 아닌 것으로 스스로 자기를 달래며 살더라는 말입니다.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자기를 위로하기 위해서 살고 자기를 달래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다른 것은 없습니다. 매일 매일 자기를 달래는 식으로만 살고 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여우가 못 따먹으니까 그 포도는 못 먹는 포도라고 핑계를 대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기가 진리입니까? 내가 나 자신을 달래면 하나님이 천당 보내 줍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로를 하든 달래 주든 구원의 원칙과 법칙은 이미 신의 법에 포함이 되어 있고 믿든 안 믿든 엄연히 존재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교회 오는 이유는 엉터리 예수를 만들어 놓고 자기 소원 풀이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소원을 들어 달라고 오는 거예요. 그런 것은 갓바위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갓바위가 장사된다고 해서 교회마저 갓바위가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갓바위에서 소원풀이 하면 우상이라서 안 들어주고 교회 와서 빌면 교회는 진짜라서 소원을 들어주고. 이런 게 어디 있습니까? 왜 사람들은 소원을 찾는가요?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달래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내 영혼아 걱정하지 마라 교회에 가서 빌어 줄 테니까. 내 소원이 들어주겠지. 자꾸만 이런 식으로 자기가 자기를 달래는 쪽으로 나가니까 성경에 나타나 있는 신의 법에 준해서 지금 우리는 어디에 속해 있으며, 누구 아래에 있으며 하나님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 챙길 것만 챙기고 돌아가는, 이것이 오늘날의 교회 필요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소원풀이에 매료되어 있고 소원 풀이에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기꾼 목사들이 그 소원 우리 교회에 오면 성취된다고 사람들을 모집하게 되지요.
순교하려고 신학교 가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에게 종교 서비스하려고 신학에 가는 겁니다. 갓바위대신 교회오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당신 소원은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은 영혼 장사입니다. 이런 자들이 악마의 얼굴을 가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신의 법에 관심이 있어야 하면 하나님의 법에 관심을 두어야 됩니다. 자기가 자기를 달래는 식으로 인생사는 것은 그만 두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그 땅에서 제거시켜 버리는 것일까요? 왜 일소해버리고 그 땅에 살지 못하도록 조치를 하시는 가요? 여기에 깊은 신의 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이란 이처럼 잃어 버렸다가 되찾는 식으로 이루지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았다는 말은 잃어버림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잃어버림에 대해서 적절한 예가 누가복음 15장에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잃어버림'에 해당되는 몇 가지 나옵니다. 3절에 보면, 양 일 백 마리 있는데 그 가운데 잃어버린 한 마리를 주목하고 찾아갑니다. 그 한 마리 양은 그냥 양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양입니다. 그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서 목자가 춤을 추면서 하늘 나라에서 잔치를 벌립니다. 잃어버린 적이 있다는 그것 자체가 천국의 기쁨의 내용이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뒤에는 이런 예가 나옵니다. 어떤 처녀가 열 개의 동전을 갖고 있었는데 그 중에 나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 하나의 동전을 찾기 위해서 밤중까지 애를 씁니다. 찾고 난 뒤에 너무 기뻐서 친구를 불러다가 잔치를 벌립니다. 물론 비용 적으로 잃어버린 동전 보다 더 많이 썼겠지요. 하지만 기쁨은 그대로 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잃어 버렸다는 것을 먼저 전제되어야 구원이라는 것이 생성이 된다는 거죠. 진짜 구원이 말입니다. 그 뒤의 예는 유명한 탕자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 방탕하게 소비시킨 탕자와 대조적으로 충실하게 아버지 곁에서 말 잘 듣고 농사 잘 지은 큰아들과 극대극으로 대비가 됩니다. 그런데 이 두 아들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마음에 합당한가 하면은 잃어버린 경험을 가진 아들이 안 잃어버린 큰아들보다도 아버지의 마음의 기쁨을 더욱 더 증가시킨다는 이야기입니다. 참 이상한 이야기이죠. 세상적인 삶에 전혀 맞지 않는 엉뚱한 원리와 엉뚱한 원칙 가지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들이대고 있습니다. 자, 잃어 버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여러분들이 아셔야 본인들이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잃어버렸다는 것은 뭐냐? 오늘 본문에 봅시다. 무엇을 잃어 버렸다는 겁니까? 신의 법에 관심을 없다는 것을 잃어버렸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이 그저 자기가 자기를 달래고 자기를 지키고 자기를 위로하고 살아가는 상태가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저주받아도 마땅한 잃어버린 상태의 영혼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고 그 마음으로 종교생활 열심히 하지만 아무리 해도 구원된 상태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의 법에 대한 관심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마태복음 26:24에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번 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차라리 너라는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너 자신에게 훨씬 나을 번했다는 것입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가롯유다야! 뭐 이런 말씀이지요.
자, 여러분 가롯유다가 나쁜 짓을 많이 했습니까? 남을 속였던 인간입니까? 뭐가 잘못해서 이런 저주를 받습니까? 얼마나 저주스러운 인생입니까? 이런 저주스러운 인생이 되는데는 단 한 가지 이유뿐인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과 관계없다고 해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차라리 태어나지 안 했으면 오히려 좋을 뻔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저 사람은 비록 예수는 안 믿지 만도 검사되고 변호사 되고 얼마나 좋은가. 라는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 잃어버린 영혼들끼리의 대화 속에는 제가 방금 언급한 마태복음 26:24절의 대화는 끼어 있지 않습니다. 즉 " 네가 예수를 사랑하지 않으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구나"라는 대화는 없다는 말이에요. 왜? 관심사가 그게 아니기 때문이죠.
이렇듯 모든 가치 기준과 대화의 내용이, 내가 나를 살리는 식으로 우리가 우리를 살리는 식으로 나가기 때문에 신의 법에 의한 기준은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게 됩니다. 그저 서 아니라 내가 나를 살리는 대화를 하니 그런 것들을 오히려 부러워하지요. 너는 각자 자신이 자신을 살리는 식으로 생활하니까 오히려 이런 세상 것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야, 교회 안 나와도 돈을 더 많이 버는 구나 나도 교회 나가지 말까?"라는 마음이 신의 법에 무관심함에서 나오게 되고 바로 이런 상태가 구원되기 전의 '잃어버림' 상태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며 하나의 동전이며, 탕자의 모습이죠. 혹시 어떤 분이 저에게 묻기를 "그런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라고 하시겠지만 바로 이점을 알려 주기 위해 오늘 본문에는 북쪽 나라 앗수르가 맹수들이 활기를 치고 사람들이 잡혀 먹히고 등등의 사태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이 모든 것이 신의 법을 놓친 하나님의 백성이다 는 이유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자, 오늘날에 있어 꼭 이 박사리에 맹수가 설치고 다녀야 우리가 이 점을 깨닫게 됩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미리 당겨서 보자는 겁니다. 열왕기하 17장을 미리 읽어보면서 "아, 신의 법을 잃어버린 인간들은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혹은, 마태복음 26장을 읽으면서 "예수를 모르는 인간은 차라리 태어나지 말아야 할 정도로 누구나 저주스러운 인생을 살겠구나"라는 이런 것들을 미리 당겨서 읽고 그리고 믿자는 겁니다. 그걸 사실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자는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구원이란, 신의 법에 관심이 없던 사람이 구원받고 난 뒤에는 이제는 교회보다도 그리고 세상 일가 친척보다도 신의 법이 나를 살리게 된다는 것을 믿게 된다는 상태, 이 상태가 구원받은 상태인 것입니다. 신의 법에 관심이 있고 내가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신의 법이 나를 살리고 내가 나를 위로한다고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의 내용물에 의해서 내가 위로를 받고 내가 소망을 가지는 것, 이런 상태로 변화가 될 때 이것이 구원받은 겁니다. 소위 잃어버린 상태가 신의 법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잃어버림이 확정된 것처럼 구원받은 상태도 역시 신의 법과 연관되어서 구원되었다 안 되었다가 결정됩니다.
요즘 교회를 돌아보면 하나님의 법에 관심이 있는 자가 누구 있습니까? 그러면서도 자기를 어떻게 위로를 하는가 하면 '그래 나는 구원받았어,' 스스로 자기를 위로한다고 바쁩니다. 분주합니다. 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에 꾸준히 출석하면 구원된 상태입니까? 거기서 소원이란 달성되기를 노리는 정신 가지고 참석하는데도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신의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제사장을 보냈다고 했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와야했겠습니까?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산밑의 사람들이 기껏 하나님이라고 생각한 것이 금송아지였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영구히 산 위에 머물지 않고 왜 땅에 다시 내려와야 했을까요? 그것은 신의 법을 산밑에 있는 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40일간 산 위에 있었지만 그 나머지 시간은 신의 법을 모세가 전파해야 되는 겁니다. 모세의 이러한 모습은 장차 이 땅에 올 메시야의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얻고자 믿습니까? 예수한테 무엇을 배울 것이 있습니까? 우리들이 모르는 것, 내가 알지 못하는 것, 내가 한번도 천국에 가보지 못했던 것 등의 우리들이 궁금한 것들을 이미 천국을 만드신 원리 원칙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입니다.
신의 법의 최종 모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 오심'입니다. 주님께서 오심이 신의 법이 전부입니다. 과연 하늘에서 내려오신 그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내용물은 무엇일까? 그것에 궁금해야 구원받은 자입니다. 크리스마스 전날에 어린이들이 산타를 기다리지요. 그 애들은 잠을 자지 않고 산타를 기다립니다. 왜요? 그 선물 꾸러미에 어떤 선물을 내게 주실까 에 온 신경이 다 쓰여서 그런 겁니다. 아침에 깬 어린이들은 선물을 보고 기쁨을 느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면 이 세상에서 들어보지 못한 귀한 말씀이 그 속에서 선물처럼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것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선물처럼 재미납니다.
그것이 재미난다면 예수님이 좋고 재미가 난다면 꼭 구태여 내가 나를 위로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럴 필요가 없겠지요. 이 세상 것으로 끊임없이 자기를 위로한답시고 분주하게 움직여 보지만 여러분 성공했다는 그 순간에 예상치도 못한 허탈감이 더불어서 찾아옵니다. 내가 이것을 얻으려고 행동도 조심해야했고 양심도 버렸나? 등의 회의가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 헛되고 헛된 것을 위해서 내 목숨을 여기다 걸었나 하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허무해집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도 말입니다. 세상 것을 얻으면 잠시잠깐은 "내가 이겼다 나도 사람답게 사는구나" 하고 스스로 자기를 멋있게 여겨지겠지만 그러나 돌아서면 곧장 시들해 집니다.
사람들이 신의 법을 모르기에, 그리고 신의 법에 관심이 없기에 세상의 부귀영화는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나는 겁니다. 청량음료를 마셔 보세요. 그때뿐입니다. 또 마셔야 된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사는 것이 이런 식입니다. 그 청량음료나 채우려고 교회 나와야 됩니까? 그런 식으로 살지 말자는 겁니다. 잃어버린 인간들, 가롯유다,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인간들이 목마르듯이 채워 가는 그런 부귀영화를 우리는 생의 목표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거기에다 모든 인생을 거는 아주 어리석은 짓입니다.
신의 법을 지키면 지옥은 피할 수 있다든가 신의 법을 안 지키면 맹수들이 잡아먹기 때문에 마지못해 억지로 신의 법을 지키겠다고 새삼 나설 것이 아니라 여기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은 사람이 산다는 것은 스스로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 통치나 지배없이 사는 것이 인간에게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높은 자리에 간다고 해서 나의 행복을 보장 못합니다. 잃어버린 사람들이 마셔도 마셔도 갈증나는 삶을 산다면, 이제 구원받은 사람들은 "아, 그런 것들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며 인생의 해답이 아니구나"라고 그 해답을 이제 내다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이들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신의 법에 의해서 사는 것이지 세상 것 때문에 사는 것은 아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알자는 겁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신의 법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입니다. 왜 오셨는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신 겁니다. 주님 안에 신의 법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믿고 예수님께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 신의 법에 합한 참된 인간상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고마워하고 탕자가 오랜만에 집에 왔을 때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가락지를 끼워 주지요, 잔치 벌려주지요, 새 옷 입혀 주지요. 이런 아버지의 고마움을 아는 거예요. 하나님의 고마움을 아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여러분들이 기도한다고 봄이 왔습니까? 따뜻한 봄은 하나님의 신의 법에 의해서 여러분들께 선물로 주어진 겁니다. 거기에 대해 내가 한 것도 없는데 봄이 왔기에 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처럼 내가 한 것도 없는데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에 감사함으로, 그 십자가에 감사하는 것이 구원된 자의 특징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나가보세요. 예를 들면 은행이 요즘 구조 조정한다고 힘듭니다. 은행마다 우수고객을 모아라, 고객을 많이 확보한 지점이 우수한 지점이 되고 그 지점장은 보너스를 받습니다. 세상은 모두 그렇습니다. 지금은 경쟁시대입니다. 우리는 그 현실 속에 방치된 채 살아가는 것 아닙니다.
분명한 현실을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역시 제가 분명한 현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과연 우수 고객 확보한 그 지점장이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어떤 경우라도 신의 법을 대신해서 구원시켜 줄 것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인 수가 많은 교회가 신의 법이 아니에요. 교회는 교인 수 확보가 신의 법이 아닙니다. 교회는 교회를 믿지 말라는 것이 오히려 신의 법입니다. 교회를 절대로 믿지 말고 우리가 기뻐해야 하고 의지해야하는 것은 십자가의 법,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교회는 신의 법이 아닙니다. 교회가 언제 갓바위가 될지 절간이 될지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보인다고 교회 믿지 말고 내가 무엇을 듣기 위해 교회 왔으며 무엇을 믿기 위해 교회 왔는가 나는 어떻게 살려고 왔는가 자기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맹수를 이 땅에 보낸 것은 맹수가 겁나라고 보낸 것이 아니고 신의 법이 겁나는 것임을 알리려고 보낸 줄 압니다. 다시 한번 저희들 구원받기 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말고 누가 나를 구원했으며 어떤 식으로 구원했는가를 감사하고 고마워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했다고 봄이 오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기도와 관계없이 주신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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