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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 6장 1-8) 완전한 것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 6장 1-8) 완전한 것

정인순 2010. 9. 5. 09:59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히브리서-2001/16강-히6장,1-8(완전한,것)-heb011014.mp3

 

 

 

이근호

완전한 것

2001년 10월 14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6:1-8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6: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6: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6: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6: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오늘날 사람들은 누구로부터 협박이나 위협을 받는 것을 대단히 싫어합니다. 모두들 알만큼 알고 모두들 누릴 권리들이 있다고 여깁니다. 이런 성질 때문에 하나님에게서도 협박 비슷한 소리를 들으면 기분 나빠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8절에 보니,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현대 사조하고 잘 안 맞는다는 느낌이 들지요. 그런데 6절을 봅시다.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이런 극단적인 발언을 하시는 이유가 명백하게 나와 있습니다. "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그러니 하나님의 이러한 생각이 오늘날 사람들에게 얼마나 먹혀들겠습니까? 다 각자 살기 바쁜데 말입니다. 자기 가족이나 심지어 제 한 몸 유지하기도 급급한 사람들이 언제 하나님의 아들까지 챙길 여지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막무가내로 하나님의 아들까지 안 섬겼다고 불사름이 시키겠다고 나서니 차라리 성경을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면 우리 인간들이 수긍할 만한 내용을 가지고 친절하게 부탁해도 우리 인간들이 할까 말까 인데 아예 협박, 공갈 조로 나오고 게다가 그 내용도 하나님의 아들 안 섬겼다고 나온다면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황당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를 공경하라", 라든지 "이웃을 사랑하라"라든지 "형제간에 우애 있으면 복을 받으리라"라는 것과 같이 우리가 납득할 만한 좋은 말 같으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 용의가 있지만 난데없이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을 가지고 우리 인간이 들이대면 우리들 어쩌란 말입니까? 마음 같았으면 그냥 성경을 덮고 싶을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아들을 욕보였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이 평소에 얼마나 선하게 살고 착하게 사는 것과 상관없이 불살라 버린다고 하니 이런 폭력적인 하나님의 비위 맞추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오로지 "내 아들 어떻게 했느냐?"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 나와 있는 우리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제발 자비의 얼굴을 우리에게로 돌려주옵소서. 제가 이처럼 힘들게 살아가는 것 왜 못 본 척 합니까? 저의 상처를 왜 외면하십니까? 저와 저의 가족에게도 관심을 좀 돌려주세요. 시킨 대로 다 할 테니 복만 주세요"에 있습니다. 즉 우리의 관심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교회에 나와서 기도를 하기도 하고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되레 손가락 가지고 우리 옆구리를 팍 팍 찔려대십니다. "너, 내 아들 어떻게 했어?" 하시면서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구박받으려고 옵니까? 하나님께 귀염받아서 작은 행운이라도 건지기 위해서 오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막무가내로 자기 아들을 가지고 우리에게 들이밉니다.

 

따라서 우리는 평소에 교회에서 다시 한 번 되새겨야 될 것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뭘 하셨지, 예수님은 누구시지?"라는 질문이 나오게 말입니다. 우리 내부에서 목을 타고 우리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는 이 자체가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관심사가 아직도 내게 남아있다는 이것이 말입니다. 이것이 신자로서의 확증입니다.

 

교회나 기독교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다고 해서 그것이 곧 신자됨은 아닙니다. 이런 저런 잡동사니 같은 것을 제쳐놓고 "예수님은 누구 신지?"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타인과 그 다른 점이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24시간 관심사가 '나'에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집착을 하면 할수록 그 집착이 자신을 망치게 합니다. 인간 망치는 것 간단합니다.

 

늘 자기에게 집착하면 곧장 망하게 됩니다. 사람의 모든 고민과 걱정은 자기 집착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단 2초라도 "예수님이 누구시지?"라고 하면서 관심을 돌리는 그 순간, 우리는 불신자가 감히 눌릴 수 없고 천사가 갖는 행복을 갖게 됩니다. 아주 간단한 차이입니다. 이 간단한 차이를 불신자들이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극복해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자신의 아들에게 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는 자기에게 가 있습니다. 이 관심사의 차이로 인해 어떤 이는 천국으로, 어떤 이는 지옥으로 갈라서게 됩니다. 정말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사람이라면, 가정 문제나 자식 문제나 미래 문제나 교회 문제보다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입니다.

 

정말 간단한 문제입니다. 돈 버는 생각으로 24시간을 살더라도 그 밑바탕에는, "나의 살고 죽는 것은 예수님에게 관심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는 점을 아는 자가 신자입니다. 하나님의 공식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욕보이면 멸망이다"입니다. 성경에 있어 다른 흐름을 찾지 마세요.

 

2절에 보면,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여기에 보면,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니, 완전한 데로 안 나가면 하나님이 어떻게 할 건데요? 완전한 데로 안 나가면 결국 불사름입니다. 그 예가 7-8절에 나옵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여기에 보면, 땅이 있고 거기에 채소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비가 내려옵니다. 만약 싱싱한 채소를 얻지 못하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본래 하나님이 원했던, 즉 비를 주신 목적에 부합되지 못하기에 그 끝은 불사름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숙제라도 던져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완전하다는 수준이 어떤 수준을 말하는 겁니까? 그 내용이 뭡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완전함의 반대말인 초보에 대해서 우선 알아야겠습니다. 1-2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합니까? 4-5절에 보면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 도의 초보마저 인간의 힘으로 안 된다는 겁니다. 초보자가 되는 그 수준도 감히 인간의 종교성으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초보라도 되려면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가 되어야 하고 내세의 능력을 맛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늘에서는 비를 내리고 땅에서는 채소를 가꾸는 식과 같다는 말입니다. 하늘에서 비가 오듯이 인간 세계 외부에서 능력이 임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초보되는 것이 전부입니까? 그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 일의 완전한 것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내세의 능력을 맛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사항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입은 사람들을 보고 하나님께서 따지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노력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는 아예 이 집단에서 해당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즉 "처음 믿을 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지만 그 후로는 우리 노력으로 완전한 데로 나아가서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전혀 엉터리입니다. 왜냐하면 시작과 끝의 원리가 틀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뜻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너희들을 어디까지 인도하는지 너희들이 알고 있으라" 이 말입니다. "이 정도 믿었으면 다 된 것 아닙니까?"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자기 구원용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나만 구원받았으면 그만이 아니냐" 하는 식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채소가 아닙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만약 네가 이 자리에 주저앉는다면 네 입장만 생각했기에 하나님의 아들을 현저히 욕보인 것에 해당된다는 말입니다. 욕을 보이시면서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의 사랑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처사입니다.

 

신앙 생활은 혼자서 가는 생활이 아닙니다. 사도 행전에 보면, 사도 바울이 전부 주님에 의해서 인도 받고 있습니다. 로마에 전도하려 가는 것도 자신의 뜻하고는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터키 쪽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럽 쪽으로 가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로마로 가는 것도 자유로운 몸이 아니라 죄수의 몸으로 가게 됩니다. 다 하나님이 앞서 인도하신 결과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점을 편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누가 옆에 붙어 있어 간섭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느끼십니까? 도리어 감사해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신앙에 대해서 매일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무엇을 안 해야 벌을 덜 받게 되나? 어떤 점을 조심하면 징벌이나 저주를 안 받게 되나?" 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 하나님이 이렇게도 내 인생을 인도하시네. 야 이런 환경 속에서도 이런 재미도 있는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구나"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동행해 주신다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든든하기만 합니다. 이런 마음이 바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 쉬지 말고 기도하게 되는 마음입니다. 매일 고기만 찾다가 맹물에 밥말고 오이를 장에 찍어 먹을 때,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더욱 느끼는 심정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늘 이런 식으로 성도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 분명한 예가 갈라디아서 6:12-14절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여러분, 이 사도 바울의 신앙 고백이 초보 수준의 고백입니까 아니면 완전한 데로 나간 수준의 고백입니까? 사도 바울은 십자가로 인한 핍박을 외면하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편리와 안일을 생각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함의 수준입니다. 오로지 주님의 사랑만 생각한다는 겁니다.

 

사실 완전함이란 예수님 그 자체를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처음 사랑으로 터를 잡고 그 터 잡은 사랑을 확대시켜 완전함에 이르게 하시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는 에베소서 3:17-19절에 나옵니다.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여기에 봐도 '터'라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 터는 사랑입니다. 하지만 성도를 향한 사도의 기도는 이것입니다. 그 사랑이 충만, 충만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오늘 본문 식으로 하면 "십자가에서 욕보이심을 받은 분"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충만 이란 딴 게 아니라 그 십자가의 서러움과 외로움과 괴로움에 더 깊이 관여하고 공감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끝으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 완전함에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요한 복음 14장에 보면 나옵니다. 거기에는 성령이 오셔서 하실 일에 대해서 나와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자신의 수준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알려 줍니다. 그것이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그런데 20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16-17절에 보면 그 내막이 나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바로 성령이 오시면 그 성령께서 우리 성도들을 완전함으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어느 수준으로 말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신 그 경지까지 말입니다. 바로 이런 경지에 있기에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사랑의 깊이와 충만을 말 할 수 있었고 십자가만을 자랑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도 바울은 자기 자랑이나 늘어놓았을 것입니다. 성령이 계시고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오로지 자기 아들의 희생과 거기서 나오는 사랑에 대해서 양보할 생각이 추호도 없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타락이란 무엇입니까? 타락이란 이 사랑을 거부하는 것을 뜻합니다. 마치 이순신 장군이 훌륭한 분이지만 오늘날 시점에서 봐서는 어디까지 지난 간 시대의 인물인 것처럼, 아무리 예수님이 좋은 분이고 훌륭한 분이지만 오늘날에 나와 함께 있지 않는 인물이라면 이런 사람은 바로 타락한 사람입니다.

 

하늘에서 비 내리듯이 주신 내세의 능력과 말씀의 능력과 하늘의 은사를 모독하고 결국 그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욕보이는 태도입니다. 시작도 하나님이 하셨듯이 끝맺음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바로 이 사랑만을 늘 자랑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완전한 분과 함께 신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구원만 챙기고 돌아서는 저희들이 되지 않게 해 주옵소서. 우리를 위해서 고생하기고 고난 당하신 그 아픔에 함께 참여 할 수 있기에 그 사랑을 더욱 깊이 아는 저희들 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구득영

 

16. 완전한 것(히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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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히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히 6: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히 6: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히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히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 6: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히 6: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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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현대인들은 누구로부터 협박이나 위협을 받는 것을 대단히 싫어하는데, 왜냐하면 이제는 알만큼은 알고 있기 때문에, 남들에게 간섭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성질 때문에, 하나님에게서도 정신적인 억압을 주는 듯한 소리를 들으면 매우 기분이 나쁘다는 말이죠.

너희들은 이제 다 죽었어 !!

그런데 오늘 본문 6절에 보니,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라고 하는데, 즉 타락한 자들은 다시 회개할 수도 없고, 그래서 모두가 멸망을 당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자체가 우리에게 아주 억압적으로 다가온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말씀이 현대사조와 맞지 않다는 느낌을 우리가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런 내용은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에나 통하던 것이고, 이제는 인간들이 성장을 할만큼 했고, 그래서 우리도 나름대로 열심히 해서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은 심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 인간에게 위협을 가하고 겁을 주는 이유가 다 있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오늘 본문 6절인데, 다시 보겠습니다.

(히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내 아들을 어떻게 했는가?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욕보였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이런 자들을 불사른다는 것인데,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먹고 살기에 바쁜 현대인들에게 과연 얼마나 먹혀들겠느냐는 겁니다. 자기 가족을 챙기는 것도, 심지어는 자기 몸 하나도 유지하기에 급급한데, 그런데 언제 하나님의 아들까지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있겠느냐는 말이죠.

요즘 젊은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시어른도 제대로 모시지를 못하는데, 그런데 그런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도 아닌,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신봉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까지 챙기라고 하니,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 과중한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막무가내로 자기 아들까지 섬기지 않았다고 해서 불사름을, 즉 멸망을 시키겠다고 협박과 공갈로 나오니, 우리는 차라리 성경을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아, 하나님의 종들아, 좋은 말만 해라” 라고 나오는데, 예를 들어서, “부모를 공경하라” 라고 하든지, “이웃을 사랑하라” 라고 하든지, “형제간에 우애가 있으면 복을 받으리라” 라는 것처럼, 우리가 납득할 만한 좋은 말이라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용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난데없이 자기 아들에 관한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마구 들이민다는 말이죠.

그래서 단지 하나님의 아들을 욕보였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이 평소에 얼마나 선하고 착하게 살았는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불살라 버린다고 하니 우리는 난처하기가 짝이 없는데, 이러한 폭력적인 하나님의 비위를 맞추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차라리 이런 성경말씀은 없었으면 좋을 뻔했다는 말이죠.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사는 오로지 무엇입니까? “내 아들을 어떻게 했는가?” 라는 것인데, 이 세상에 보낸 자기 아들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우했는지, 하나님은 여기에 온통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에 나와있는 우리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발 자비의 얼굴을 저에게로 돌려주옵소서. 제가 이처럼 힘들게 살아가는 것을 왜 외면하십니까? 저의 상처를 왜 외면하십니까? 저와 저의 가족에게도 관심을 좀 돌려주세요.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 복만 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관심은 자기 자신에게 있는데, 이것 때문에 우리는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관심사는 되레 손가락을 가지고 우리의 가슴을 팍팍 찔러대십니다. “너, 내 아들을 어떻게 했어?” 라고 하시면서 말이죠. 우리가 교회에 구박을 받으려고 옵니까? 그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귀염을 받아서 작은 행운이라도 건지기 위해서 나오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막무가내 식으로 자기 아들을 가지고 우리에게 들이민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에 와서 또 다시 그 누구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강요받고 있는데, 누구를 말인가요? 그것은 우리가 평소에 바쁘게 살아간다는 핑계로 잊어버리고 있는 분인데, 즉 “도대체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지? 예수님은 누구시지?” 라는 질문이 나오도록 하신다는 말이죠.

이러한 질문이 우리 내부에서 목을 타고 우리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는 것 자체가, 그게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운 일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관심사가 아직도 자기에게 남아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신문이나 TV에 그것이 나옵니까? 전혀 아닌데, 그러니 이것이 신자로서의 확증이라는 겁니다.

교회나 기독교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다고 해서, 그것이 곧 신자됨은 아닌데, 교회에 조그만 다니면 그런 것은 누구나 다 안다는 말이죠. 한국에 기독교가 언제 들어오고, 지금은 기독교 신자가 얼마나 되는지, 그런 것은 일종의 호기심로도 알 수 있는 것인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저런 잡동사니 같은 것을 제쳐놓고, “예수님은 누구시지? 예수님은 무엇을 하신 분이지?” 라는 것에 관심을 가진다면, 즉 교회를 20년이나 다녔지만 아직도 그 예수님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그 예수님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뛴다고 하면, 그것이 얼마나 타인과 다른 점이냐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하루 24시간 그 관심사가 언제나 ‘나’에 있는데, 하지만 인간은 자기에게 집착하면 할수록 그 집착이 그만 자신을 망치게 합니다. 인간을 망치는 것은 매우 간단한데, 자기에게 집착하면 곧장 망하게 된다는 말이죠.

사람의 모든 고민과 걱정은 자기 집착에서 비롯되는데, 그런데 단 2초라도 “예수님이 누구시지?‘ 라고 하면서 그분에게 관심을 돌리는 그 순간, 우리는 불신자가 감히 누릴 수 없는, 천사가 가지는 행복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살았다는 것이고, 하나님에게 속한 자라는 겁니다. 아주 간단한 차이인데, 이 간단한 차이를 불신자들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극복해낼 수가 없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관심사는 자신의 아들에게 가 있는데, “내 아들을 너희들이 어떻게 했는가?” 라는 것인데,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는 자기에게 가있다는 겁니다. 이 관심사의 차이로 인해서, 어떤 이는 천국으로, 또한 어떤 이는 지옥으로 갈라서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여러분이 이왕 교회에 나왔으니, 그 관심사를 자기 자신이 아닌 예수님에게, 그분에게만 국한해서 관심을 가져달라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런 사람은 아무리 교회에 나와와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데, 정말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사람이라면, 자기 문제, 가정 문제, 자식 문제, 교회 문제, 그런 것보다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평소에 그렇게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신자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정말 간단한 문제인데, 비록 이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24시간을 매달리더라도, 그 밑바탕에는 “나의 살고 죽는 것은 예수님에게 달려있다” 라고 하면서, 예수님에게 대한 관심사가 중요하다는 점을 아는 자가 곧 신자라는 겁니다. 자기가 새롭게 각오를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으로 인해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공식은 이러한데, 물론 다른 곳도 마찬가지만, 즉 “하나님의 아들을 욕보이면 멸망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8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히 6: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셨는가?

여러분, 성경에 있어서 다른 흐름을 상상하거나 찾지 마세요. 오직 하나님의 아들인데, 우리가 하루가 몇 끼를 먹고 살아가는지,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오늘 설교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셨는가?” 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오늘 본문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히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여기에 보면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라” 라고 하는데, 정말 우리를 부담스럽게 하는 말씀인데 말이죠. 그렇다면 완전한 데로 나가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신다는 겁니까? 완전한 것을 찾고 있는 하나님의 요구에 미흡하기 때문에, 마지막 결국은 ‘불사름’ 이라는 겁니다. 완전한 것에는 관심도 없고, 그런 것이 왜 필요하냐고 한다면, 그렇게 불사르게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7절과 8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히 6: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히 6: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여기에 보면, 땅이 있기에 거기에 채소를 심었고, 그리고 하늘에서는 비가 내려옵니다. 그런데 만약에 싱싱한 채소를 얻지 못하고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면, 그것은 본래 하나님께서 원했던, 즉 비를 주신 목적에 부합되지 못하기에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그 끝은 불사름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죠. 그래서 “그러니까 너희들은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된다” 라는 겁니다.

완전함과 초보 !!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숙제라도 던져 주는 것 같은데,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하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그 완전하다는 것은 어떤 수준이고, 그 내용은 무엇이냐는 겁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완전함의 반대말인 초보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하는데, 그게 1절과 2절에 나옵니다.

(히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히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이것을 쉽게 말하면, “너희들이 초보에 머무르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런 사람들만이 싱싱한 채소와 열매가 맺혔다고 할 수고, 그런 자들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왜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합니까? 그 이유가 4절과 5절에 보면 나옵니다.

(히 6: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히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자가 되는 그 수준도 감히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인간의 종교성으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초보라도 되려면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가 되어야 하고, 내세의 능력을 맛봐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하나의 보따리로 묶어보면 다음과 같은데, 즉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을 모두 다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은 따로 있는데, 그런데 그들도 자기들에게는 구원을 받을 재주가 없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늘의 은사를 주시고 성령에 참여하도록 하셔서, 그렇게 해서 그들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놓는다” 라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하늘에서는 비를 내리고 땅에서는 채소를 가꾸는 식과 같다는 것인데, 즉 하늘에서 비가 와야만 채소가 가꾸어지듯이, 인간 세계의 외부에서 능력이 임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우리가 초보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은 일을 시작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초보의 단계가 전부입니까? 그것은 아닌데, 그 일의 완전한 것이 따로 있고, 그쪽으로 나가야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내세의 능력을 맛보지 못한 자들에게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는데,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말이죠. 들으면 섭섭할지 몰라도 내놓은 자식인데, 즉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겁니다.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니고,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우리끼리 !!

그러니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자들만 모이라는 것인데, ‘우리끼리’ 말이죠. 그런 자들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완전한 데로 나아가고 있는가?” 라고 따지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철저히 우리 내부에서는 하는 이야기인데, 바깥 세상 사람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노력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완전한 데로 나갈 수 있습니까?” 라는 것은, 우리끼리의 집단에서 해당이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즉 “처음 믿을 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지만, 그 이후로는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완전한 데로 나가서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시작과 끝의 원리가 틀리기 때문에 말이죠.

오늘 본문의 뜻은 이것인데, 즉 “하나님의 능력이 너희들을 어떻게 인도하는지 너희들은 알고 있어라” 라는 겁니다. “하나님, 이 정도로 믿었으면 다 된 것이 아닙니까?” 라는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이죠. 우리가 왜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느냐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자기 구원용으로 삼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어쨌든 나만 구원을 받았으면 그만이 아니냐?” 라는 식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채소가 아닌데,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즉 “만약 너희가 이 자리에 주저앉는다면, 그것은 너희 입장만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현저히 욕보인 것에 해당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저는 이것을 이렇게 생각하고 싶은데, 욕을 보시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이 한 시라도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고 우리의 가슴을, “지금 니가 나를 십자가에서 욕을 보이고 있지?” 라고 하시면서 쑤시고 있는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이만하면 되었지 않았습니까? 이 정도로 하고 신앙생활은 그만 하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현저히 욕보이는 것이라는 말이죠.

이것은 마치 귀신이 딱 달라 붙어있는 것 같은데, “니가 아무리 서울대학을 나오고 유학을 갔다오고 해도 무당이 안 되면 안 된다” 라는 식으로 말이죠. 정말 하나님의 자녀는 그 팔자가 무슨 팔자인지 몰라도, 전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나 죽으나,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귀신처럼 달라붙어서, “너는 나에게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아나?” 라고 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마구 쑤시는 느낌이라는 말이죠. 실제로 그러한데, 그렇게 동반자가 우리에게 붙어서, 우리를 천국에 데리고 가신다는 겁니다.

너는 홀몸이 아니다 !!

그러니 신앙생활은 전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닌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마치 보디가드처럼 옆에 붙어서 우리를 천국에 데리고 가시는 것, 그게 바로 신앙생활이라는 겁니다. 이 긴 이야기를 간단하게 말하면, “너는 홀몸이 아니다” 라는 것인데, 즉 옆에 누군가가 계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바울이 모든 것을 주님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고 있는데, 자기가 감옥에 가더라도 재수가 없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곳에 가도 천사가 와서 깨우는데, “사도바울아, 빨리 나가자. 이미 문을 다 열어놓았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간수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러면 나는 죽은목숨인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라고 하니, 사도바울은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거리의 전봇대에도 보면 많이 붙어있는데 말이죠(ㅋㅋ).

(행 16: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행 16: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행 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행 16: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또한 사도바울이 로마에 전도하려고 가는 것도 자기의 뜻과는 다르다는 말이죠. 자기는 오히려 터키 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유럽 쪽으로 가야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은 자기가 가고 싶어도 마음대로 갈 수가 없는데, 옆에 보디가드가 따라붙어서 알아서 해준다는 겁니다.

그리고 로마로 가는 것도 자유로운 몸이 아니라 죄수의 몸으로 가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거기에서 전도를 한다는 말이죠.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결과들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런 점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누가 옆에 붙어있어서 간섭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느끼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도리어 감사해야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평소에 집에서 밥도 제대로 못하던 새댁이라면, 이제 교회에서 야유회를 나가면 당연히 걱정을 하게 되는데, 그런데 이 새댁은 전혀 걱정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집에서도 음식을 하지 못할 때 도와주던 시어머니가, 야유회를 가서도 당연하게 도와줄 줄로 믿기에 말이죠. 그러면 칭찬은 자기가 다 받고, 고생은 시어머니가 실컷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 옆에 붙어있다는 것에 대해서, 부활이고 생명이신 분이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다행스럽게 여겨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인데, 자기 기도의 힘으로, 자기 전도의 힘으로 하는 것이 전혀 아님을, 그렇다면 무엇인가요? 곁에 계시는 분이 인도하니 이끌려 간다는 겁니다.

전도란, ‘나는 이렇게 살아갑니다’ !!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자랑하고 소개한다는 겁니다. “나는 예수님 덕분에 이렇게 살아간다” 라고 말이죠. 이것을 두 글자로 ‘전도’ 라고 하는데, 그러니 전도는 사람을 꼬드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아가는 것을 고백하는 것, 그게 바로 전도라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힘든 것이 없는데, 부담도 되지 않고 말이죠.

이런 말을 하면, 또 어떤 분들은 “그러면 마음놓고 죄를 지어도 되겠네요” 라고 하는데, 하지만 죄를 지어보라는 겁니다. 과연 그것이 그렇게 되는지 말이죠. 과거에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지어지든 죄가, 이제는 부담이 되고 힘이 든다는 겁니다. 그리고 시시하게 여겨진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제는 술맛도 없어지고, 또한 담배도 별로 생각나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집사님, 참으로 성화가 되었네요”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성화가 아니고, 옆에 있던 누군가가 인도하니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 견인차가 생각하는데, 물론 성도의 견인과는 한자가 다르지만, 성도는 굳게 참는다는 의미의 ‘견인(堅忍)’ 인데 말이죠. 아무튼 견인차에 끌려가는 자동차를 보면, 자기는 가만히 있으면 앞에서 알아서 다 끌고 간다는 겁니다. 그것을 로마서 8장에서는 ‘성령의 인도함’ 이라고 하는데, 주의 영이 우리를 데리고 다니시는데, 대구를 가든, 광주를 가든, 부산을 가든, 그 어디를 가든 말이죠.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래서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은 항상 걱정을 하는데, “내가 무엇을 선택하면 하나님이 벌을 내리지 않을까? 내가 이런 일을 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저주를 내리면 어떻게 하지?”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자기와 하나님의 관계가 자꾸만 흥정하는 식으로 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신앙인은, 즉 완전한 데로 나가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 완전한 것이 곧 예수님이고, 그분이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이것도 되네. 이것도 은혜네. 사는 재미가 여기에도 있었네” 라고 하면서, 그 인도하심 속에서 살아가는 재미를 느낀다는 겁니다.

그러니 매일같이 고기를 먹다가 그만 돈이 없어서 물에 밥을 말아먹었다고 하면, 그 맛도 괜찮다는 말이죠. 반찬은 달랑 오이 하나밖에 없어도, 된장에 오이를 찍어먹는 것도 별미라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의 은혜를 다시 기억하면서 자꾸만 겸손해진다는 말이죠. 이것이 곧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마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늘 주님에게 묻게 되고, 자기도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4절과 5절을 다시 봅시다.

(히 6: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히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이것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획기적인 차이점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그러니까 초보의 경우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자기 구원’ 이라는 겁니다. 즉 “나는 죽으면 어떻게 될까? 나는 천당에 갈까? 지옥에 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그러면 이제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되겠네.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초보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오직 자기 생각밖에 하지 않는데,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그 고마움을 날로 날로 더 깨달아 가는 게 아니라, “이 정도면 되었잖아. 이 정도면 기독교에 대해서 알고, 조직신학을 아니까 말이야” 라고 하는데, 그렇게 항상 자기 생각만 한다는 겁니다. 이게 초보인데, 자기만 구원을 받으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도하시는 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인데, 마치 견인차에 끌려가면서 “나는 이제 운전을 하지 않아도 되네” 라고 하면서 자기 편한 것만 생각하는 것인데, 견인차를 운전하는 사람의 고통을 전혀 모르는 것과도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초보라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자들의 특징이라는 말이죠. 주님의 고통은 모르고 자기 편한 것만 생각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갈라디아서 6장 14절을 보겠습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사도바울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이 세상이 자기에 대해서 죽고, 자기도 이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초보라고 하는데, 이게 과연 초보입니까? 그런가요? 오히려 이것이 바로 완전함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초보라고 여기는 사람의 생각은 무엇인고 하니, “내가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는 더 이상 십자가가 필요치 않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완전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십자가로 인해서 이 세상에 대해서 나는 죽었다고 하는데, 내가 그 정도인가?” 라고 하면서, 그 완전함에 대해서 놀란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이죠.

초보와 완전함 !!

그러니 초보라는 것은 개인적인 자기 구원에 집착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완전함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께서 현저히 욕을 보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지를, 그 이유를, 그 아픔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완전함이란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고 욕된 것이고 고통스러운 것임을 알고, 이제는 그 완전한 고통과 아픔에 전적으로 자기가 빨려들어 간다는 겁니다. “주님이 이렇게 고생했기에, 주님이 이렇게 기도했기에,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구나” 라고 하면서,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알게 된다는 말이죠.

여기서 에베소서 3장 17절에서 19절을 보겠습니다.

(엡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엡 3: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엡 3: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의 충만이 우리 속에 들어온 충만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인데,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그 터가 있어야 하는데, 그 터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터가 되고, 바로 그 터로 인해서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서, 그것이 차고 넘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말씀도 역시 그러한데, 2절을 봅시다.

(히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여기에도 터가 나오는데, 이 터는 무엇인고 하니,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서 터를 닦았다고 하면, 이제는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주님이 도대체 어떤 일을 하셨기에 자기가 구원을 받았는지, 그 완전함으로 나아가야 하는 위치에 놓여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완전함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나오는데, 9절과 10절, 그리고 20절을 보겠습니다.

(요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여기 10절에 보면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 라고 하는데, 이게 바로 ‘완전함’ 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누구 차례인고 하니, 주님께서 택하신 자기 백성의 차례인데, 그래서 20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완전함’ 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하시는데, 성령, 즉 주님의 영이 오시게 되면 어떤 상태를 만들어주시는고 하니까,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있고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똑같이,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곧 성도의 완전함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이 있다” 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 6절에 나오는데, 제가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히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예수님을 무시하는 자는 회개치 못해 !!

그러니 타락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그 욕보이심에 대해서 완전히 무시하고 돌아서는 것, 그게 곧 타락이라는 말이죠. 간음하고 살인하는 것이 타락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고 나오는 것, 바로 그게 타락이라는 겁니다.

가수 조영남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 그래도 나름 신학공부를 했다고 하는데 말이죠. 예수가 죽은 것은 그 당시의 정치범으로서 죽었다는 겁니다. 정치 세계에 그만 겁도 없이 덤벼들다가 죽었다는 것인데, 그러니 그게 오늘날 21세기에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겁니다.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2,000전의 옛날 인물이라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이순신 장군이 존경스러운 것은 맞지만, 하지만 오늘 아침에도 그 이순신 장군을 위해서 살 필요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미친 짓인데, 아무리 훌륭해도 지나간 과거의 인물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예수님도 옛날에 돌아가셨는데, 지금 살아있어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 아닌데,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이 그때 베풀었던 그 이웃사랑을 본받아서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그런 교훈만 받으면 되는 것이지, 그런데 그게 아니고 “누구 안에 누가 있고, 누구 안에 누가 있다” 라고 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더 이상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것은 일종의 신비주의이고, 그야말로 광신도가 하는 짓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심판을 준비해서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 쪽에서는 무엇인고 하니까, 사다리 타기를 하시는데, 즉 “누가 나에게 골인을 하는지 보자. 아하, 저놈은 저리로 세는구나. 어라, 너는 나에게 오네”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6절 말씀의 의미인데, 즉 “타락한 자들은 다시 회개케 할 수가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보였기 때문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순신 장군은 아직 무덤에 있지만, 예수님을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겁니다. 물론 믿지 않는 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실례가 되는데,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지 어떻게 다시 살아나서 돌아다니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하는데,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럴 수가 없다는 겁니다.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분의 피가, 그 피가 지금도 살아있어서, 자기의 죄를 용서해주고 천국에 넣어준다고 하는, 만약에 그것을 믿는 자들이 있다고 한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그런 자들이 곧 성도이고 신자인데, 바로 그런 자들에게 호소하고 있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살기에 바빠서 예수님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그런데 이렇게 교회에 와서 성경말씀을 펼치니, 하나님의 아들을 현저히 욕보이는 자들은 결코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의 관심사가 하나님의 관심사와 일치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1,9 오후 4시에 마침. - 녹취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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