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히 5장 6-14) 아들의 순종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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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아들의 순종 2001년 10월 7일
본문말씀: 히브리서 5:6-14
"또한 이와 같이 다른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세상을 살다보면 이 세상이 아무 것도 아니다는 것을 압니다. 만약 내가 죽는다고 한다면 교회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대한민국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하나님 믿는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일단 내가 없다면 이 세상은 무엇이 되었던 아무 의미도 없이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내가 사는 이 시대가 그 어떤 과거나 미래보다 중요하게 간주됩니다. 그리고 내가 있는 이 공간이 그 어떤 멋진 풍경이 드리워서 세상보다 고귀하게 간주됩니다.
그런데 그토록 중요한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고 만다면 결국 그 모든 것도 같이 소용없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과연 그럴까? 하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보면,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가 아니면 생겨나는 것이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내가 있기 전에, 우리 인간이 있기 전에 먼저 말씀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온 우주는 허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중심적으로 매사를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을 보고 허무를 느끼겠지만 그러나 말씀되시는 분의 입장에서 보면, 그 분이 우리를 또 만들어내면 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나 중심으로 생각해서 모든 일을 허무로 끝낼 것이 아니라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을 포착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이 올바른 생각입니다.
나 자신이 없어진다고 해도 말씀되시는 분이 엄연히 살아 계신 겁니다. 내가 우선이 아니라 말씀이 우선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내가 있으나 없어지나 진리는 진리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게 됩니다. 내가 중요해서 교회와 버리면 하나님이나 예수님도 애완견과 같은 가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존재와 상관없이 세상에 툭 툭 던져 준 것이 있습니다. 과연 무엇을 던져 주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제사장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눈물과 통곡으로서 아버지께 순종하여 제사장 위치를 고수했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왜 우리 인간 세계에 제사장직 이라는 것이 꼭 있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장에 나가 찬거리 사듯이 제사장을 찾고 싶어 환장합니까? "아, 정말 나는 제사장 없이는 못살겠다. 어디 제사장 없나?"하고 간구하고 아쉬워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꼭 필요해서 제사장을 주셨는데 정말 제사장이 필요한 우리는 별로 라고 여기는데서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삶이 잘 안 맞고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허무하다. 그러니까 나는 내 멋대로 살거야"라고 외치면 하나님이 제사장을 주신 이유가 들어 있지 않는 사람입니다.
부화가 났다고 해서 숙소에 불을 질러 사람을 죽인 아주머니의 이야기가 어제 뉴스에 나왔습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부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죽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그러나 이럴수록 우리는 우리에게 꼭 제사장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사야 53:4-5에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여기서 생각할 것은, 이 일을 해야하는 분을 왜 하나님께서 꼭 보내셨을까요? 이 일이 완수되지 못하면 우리에게 제사장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라는 분이 이 일을 완수하므로 서 우리는 영원한 제사장과 더불어 있는 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자신들의 방식으로 우리의 울분과 괴로움을 해결하라고 방치하시지 않고 일부러 제사장을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와 아픔을 친히 아십니다. 철저히 아시기에 제사장을 보내신 겁니다. 우리는 그 의미를 포착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벌리신 어떤 일에 관여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사장 되심과 나는 상관 있음"을 수납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대상은 보편적입니다. 열심 따라서 변하는 대상은 온전한 믿음의 대상이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행동의 차이와 상관없이 같이 믿음으로 같은 결과가 쏟아지는 그 대상이 바로 올바른 믿음의 대상입니다. 너 나 할 것이 죄인 되었는데 그 대책으로 내놓은 것이 바로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제사장직입니다. 따라서 정말 믿는 자 끼리라면 이 제사장 되시는 분의 제사장 직을 한결같이 제시하게 됩니다. 만약에 자신의 행함이나 거기에 따라 성과를 내놓는다면 그것은 보편적인 믿음의 대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 제사장직을 가지고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직이라는 겁니다. 반차라는 말은 그 족보 계열이라는 말입니다. 멜기세덱적인 제사장직이란 만고 불변적인 제사장이라는 말입니다. 허무하고 변화무쌍한 이 세상과는 달리 영원히 고정적으로 믿을 만한 제사장직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흔들림이 없는 제사장직과 연계되는 신앙을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장성한 자의 신앙이라고 보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어린 아이의 신앙과 장성한 자의 신앙을 구분합니다. 이 신앙의 차이가 뭡니까? 딴 게 아니라 신앙의 내용이라고 내놓는 것이 멜기세덱적인 제사장을 내놓으면 장성한 자의 신앙이요 그렇지 않고 변화무쌍한 것을 내놓으면 어린 아이 신앙이라는 겁니다. 스스로 믿음 좋다고 광고해 봤자 믿음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독약을 마시고 물 위를 걷고 안수해서 병을 고쳤다고 해봐도 역시 믿음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남이 못하는 종교 주특기, 기도 주특기 발휘하는 것이 믿음이 좋은 사람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사장직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가져야 장성한 자의 믿음입니다.
여러분들이 학교 다니면서 멋도 모르고 산수를 배웠을 것입니다. 어디에 써먹을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편리한 일인지를 전혀 감 잡지 못한 채로 맹목적으로 익혔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직접 시장 바닥에 전 펴놓고 앉아 장사하면서 5% 깍는다는 것이 어느 정도 깍는 것인가를 실감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메시야의 제사장 기능에서, 과연 우리가 우리의 허물과 죄악에 대해서 얼마나 실감하고 있습니까? 이사야 53:5절을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장성한 자의 신앙은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제사장직에 대해서 실제적으로 경험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젖을 먹는 자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라면 반대로 의의 말씀을 경험한 자는 장성한 자입니다. 이런 장성한 자에게 있어 예수님의 제사장직이 전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제사장직은 인간의 행함과는 달리 멜기세덱의 계열이기에 만고 불변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제사장직 앞에 선 인간은 영원히 자기 죄를 아는 자입니다.
이런 자가 자기 간증거리나 품고 다니겠습니까? 물론 이 이야기를 유치부 아이들에게 이야기하고 어른들에게 이야기하면, 그들은 지식으로 알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정말 이 의의 말씀에 체험이 되어야 진정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알게 됩니다.
멜기세덱의 위치처럼 우리의 죄인 됨도 불변한 겁니다. 우리가 사람을 네 명을 죽였던 한 명을 죽였던 전혀 죽이지 않았던 간에 우리의 죄인 됨은 불변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같은 성령을 마신 자들이 교회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현상을 보이느냐 하면, 논이 발더러 "쓸데없다"라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더 비천한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을 마셨기 때문에 동일하고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이처럼 보편적인 것을 공통적으로 믿게 되면 믿음의 대상은 한결 같이 오직 한 분에게 쏠리게 됩니다. 물론 내 중심으로 보면 세상을 살면서 죽고 싶은 충동도 생길 겁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정신 자세가 바로 어린 아이와 같은 자기 중심적 생활입니다.
11절에 보면, 사도가 안타까워서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그러니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아니 된다는 말입니다.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초보적 신앙이 아니라면, 그 어렵다는 멜기세덱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예수님의 제사장직이 멜기세덱적이야 할까요? 최초로 멜기세덱을 만난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이 아브라함에게 있어 멜기세덱이 어떤 관계에 있는 사람인가를 알면 다 해답은 다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4: 13-14을 잠시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여기에 보면, 구원이란 하나님이 사전에 스스로 맹세하신 언약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 구원받을 인간이 율법을 행하고 실천함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도 폐하여지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 속에 있었기에 아브라함은 행한 것도 경건함도 없이 의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언약의 복을 쥐고 계신 분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그 분이 누구인가 말입니다. 그 내용은 창세기 14장에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아브라함 어떤 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조카 롯이 체포되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318명밖에 안 되는 사병을 가지고 5종족의 군대들을 쳐부수고 갇혀 있던 조카 롯을 무사히 구출하고 그것뿐만 아니라 막대한 전리품과 함께 챙겨서 옵니다. 그런데 길에서 누구를 만났는가 하면, 바로 살렘이라는 도성의 왕이요 제사장으로 있는 멜기세덱이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분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입니다. 그와의 만남에서 비로소 아브라함은 실상을 알게 됩니다.
즉 자신의 노력과 힘씀으로 이번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이라는 분이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해 주었기에 승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얻은 전리품에서 10분지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칩니다. 그리고 또한 그는 소돔 왕을 만나게 되는데 그 소돔왕은 아브라함에게 많은 재물을 바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공로로서 이번 전쟁에서 승리자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만남을 통해서보면 로마서 4장에 나온 말씀처럼, 구원은 언약의 은혜로운 이루어짐이지 결코 율법을 지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도 헛것이 되고 약속도 폐하여 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아브라함이야말로 모든 믿는 자의 모델 하우스가 됩니다. 즉 누가 되었던 구원되는데는 이 구원 방식 외에는 없다는 겁니다.
자, 오늘날 이 시대에는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멜기세덱에 자리에 예수님이 들어서시는 겁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얻는 식이 됩니다. 오늘 본문 5:8절에서는 이 예수님의 '구원의 근원'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구원할 수 있는 토대, 근거가 된다는 말입니다.
제가 어릴 때에 두 가지 서로 대조가 된 동화를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는 '삼천갑자 동방삭이'라는 동화이요 다른 동화는 '생명의 샘물'에 관한 동화였습니다. '삼천갑자 동방삭이' 라는 동화에 보면, 어떤 사람이 고개를 넘다가 자빠졌습니다. 그런데 그 고개는 한 번 넘어지면 3년 밖에 살지 못한다는 고개입니다. 이 사람은 고민이 되었습니다. 3년 밖에 못사니 보통 걱정이 아니겠지요. 그런데 어떤 지혜로운 사람이 충고해 주기를 몇 번씩이고 자꾸 넘어지라는 겁니다. 3×1=3, 3×2=6, 3×3=9, 라는 식으로 자꾸만 넘어지면 그 햇수가 다 보여서 오랫동안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일종의 행함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샘물'이라는 동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나그네가 한 마을을 방문했는데 그 마음에는 노인이 없고 전부 어린애나 아니라 젊은이 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마을 한 가운데에 분수가 있는데 그 샘물을 떠 마시면 다시 어린 아이처럼 젊어지게 되니 샘물이었습니다.
값없이 공짜로 주는 생명수는 제 이야기가 아니고 요한계시록 22:17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근원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생긴 아이디어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다 압니다. 그런데 어린아이와 같이 압니다. "그래 좋다. 이제부터 내 멋대로 살거야"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장성한 자는, 채찍의 의미를 압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징계의 수위를 압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으면 예수님이 그토록 당했을까"를 절감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내 중심으로 봐버리면, 그러면 내가 죽으면 하나님도, 교회도, 예수님도 소용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감각으로 사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입니다. 모든 것이 헛되다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겁니까? 예수님 홀로 영원한 생명의 근원, 샘물이 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은 고생은 안 하는데 홀로 고생하시고 순종하셔서 모든 일을 마무리지었습니다. 그 분이 채찍에 맞아서 멜기세덱의 반차에 들어서신 것 때문에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겁니다.
우리가 더 이상 뭐가 더 중요한 것이 남아 있습니까? 우리가 단순지 살아남자고 하는 이야기 아니라 태초에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꾸미셨는가를 포착하자는 말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어린아이, 젖먹이의 특징이 뭔가 하면, 밖의 일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로 여긴다는데 있습니다. 죽자고 자기 일 밖에 모릅니다. 예수님 십자가 진 것을 철없게도 남의 일처럼 느낍니다. 이제는 거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사건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얼마나 철이 없는지 하나님이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의 샘을 친히 마련하신 하나님, 어디가도 이 사실을 잊지 말고 놓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녹취:구득영 15. 아들의 순종(히 5: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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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이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니구나” 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래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을 두고 헛되다고 합니다. 만약 자기가 죽는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교회가 무슨 소용이 있고, 대한민국이 무슨 소용이 있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겁니다.
만약에 자기 자신이 없다고 하면, 그런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은,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시대고, 자기가 있는 이 공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토록 중요한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서 없어지면, 결국 그 모든 것도 소용이 없게 된다는 말이죠.
연세가 많은 분들은 살아가면서 자기가 없어지는 연습을 하기는 하는데, 결국은 자기가 없어진다는 것은, 자기가 깊이 골몰했던 이 세상도 같이 날아가 버리게 되고, 그래서 나이가 들면 다들 이 세상을 허무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말씀도 과연 여기에 대해서 동의를 해줄까요? 우리 인간의 이런 생각에 말이죠.
과연 그럴까?
성경말씀은 “과연 그럴까?” 라고 하는데,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가 아니면 생겨나는 것이 전혀 없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 인간이 있기 이전에 먼저 말씀이라는 분이 계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이 말씀이라는 분으로 인해서 생겨났다는 말이죠.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러니 자기가 없어져도 무엇이 남아있습니까? 말씀이라는 분이 엄연히 살아있기에, 그러니 말씀이 되시는 분이 자기를 다시 창조하시고 부활을 시키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허무하지가 않는데,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니, 모든 것이 없어진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하지만 요한복음은 이것을 거부하는데, 태초에 이미 말씀이 되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전혀 우선이 아니라, 우리보다도 더 우선하시는 분이 계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분이 이 세상을 다시 만들어내면 되는데, 그러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우리는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면 허무할 수밖에 없지만, 절대적인 진리라고 하면, 자기 자신이 사라지거나 말거나,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모든 것이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죠. 그럴 때 우리는 “아하, 나 자신은 그 전체에 있어서 조그마한 하나의 부분에 지나지 않구나” 라고 하면서, 그렇게 깨달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살아있을 때 복을 받기 위해서, 자기 소원풀이를 하기 위해서 나오는데,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런 사람이라면, 만약에 자기가 없어진다고 하면, 가정도 필요치 않고, 또한 하나님도 필요가 없고, 이 세상의 모든 가치가 다 사라져버린다는 겁니다.
자기가 그렇게 중요해서 교회에 나오면, 하나님이나 예수님도 애완견 정도의 가치 밖에 되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생각을 두고 믿음이라 억지를 부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오기이고, 종교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러한 오기에 기초를 둔 종교생활은 과감하게 청산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가 있다고 하는 이유 때문에 생겨난 것인데, 그래서 생겨난 교회이고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다 엉터리라는 겁니다. 이제는 자기 자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무엇을 남겼는지, 그것을 포착해야 한다는 말이죠.
우리가 죽거나 말거나,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의 존재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툭툭 던져준 것이 있는데, 하나님은 과연 무엇을 던져 주셨습니까? 그것을 우리가 포착해야 하는데, 물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기 것을 챙기기 위해서 서로 싸우면서 살아가지만 말이죠.
하지만 이런 시대에서도 하나님은 거기에 전혀 개의치 않고 던져준 흔적이 있는데, 진리의 조각들이 말이죠. 우리는 그것을 붙잡아야만 하는데, 그럴 때 그 사람은 진리의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놓치지 말고 붙잡으라고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주셨다는 말이죠.
왜 ‘제사장’이 필요한가?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 주셨습니까? 그것이 바로 ‘제사장’ 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예수님은 눈물과 통곡으로서 아버지께 순종하여 제사장의 위치를 고수했다” 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서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왜 우리 인간세계에 ‘제사장직’ 이라는 것이 꼭 있어야 하느냐는 겁니다.
(히 5: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우리가 시장에 나가서 반찬거리를 사듯이 제사장을 찾고 싶어서 환장합니까? “아, 정말 나는 제사장 없이는 못살겠다. 어디 제사장이 없나?” 라고 하면서 아쉬워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제사장을 그리워했으면, 꿈속에서라도 제사장이 나타나서 “내가 제사장이다” 라고 하는,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느냐는 말이죠. 우리는 꿈속에서 돼지를 그리워하지(ㅋㅋ), 제사장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해서 제사장을 주셨는데, 하지만 정작 제사장이 필요한 우리는 어떻게 나옵니까? 제사장을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데, 그러니 여기서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과 우리의 삶이 전혀 맞지 않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참 허무하다. 믿는 사람이든 아니면 이 세상은 그렇게 흘러간다. 그러니까 나는 내 멋대로 살겠어” 라고 외친다면, 그런 사람의 머릿속에는 하나님이 제사장을 주신 이유가 전혀 들어있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죠.
죽여버리고 말겠어 !!
어제 뉴스를 보니까, 자기에게 솟구치는 화를 이기지 못해서 숙소에 불을 질러서 사람을 죽인 아주머니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처음에는 유리창을 깨다가 그것도 모자라서 불까지 냈다는 겁니다. 사실상 우리도 살다보면 화가 날 때가 있고, 그때마다 상대방을 죽인다든지, 혹은 자기가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이죠. 그게 살인충동인데 말이죠.
그것이 횟수의 문제이지 결코 없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하루에 7번을 내는 사람이 있고, 반면에 7일에 한 번만 내는 사람도 있고, 혹은 일년에 한 번만 내는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우리는 그렇게 화를 내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러면서도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고 하니까, 왜 하나님은 제사장을 우리에게 주셨는지, 그것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진리의 조각이고 진리의 흔적이라는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해서 제사장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놓치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이사야서 53장 4절에서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왜 이런 분이 오셔야만 하는가?
여기에 보면,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징벌을 당하시는 분이 나오는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왜 이러한 일을 해야하는 분을 우리에게 보내셨는가?” 라는 겁니다. 이 일이 완수되지 못하면 우리에게 제사장이라는 것은 없는데, 그런데 예수님이란 분이 오셔서 이 일을 완수함으로서, 우리는 영원한 제사장과 더불어서 있는 셈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죠. 자살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고, 남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고, 그래도 기독교 신자라면 즐겨하면 안 되는 소주라도 한 병을 까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자신의 방식으로 우리의 울분과 괴로움을 해결하라고 방치하시지 않고, 그래서 일부러 제사장을 보내신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와 아픔을 친히 아시는데, 너무 철저히 아시기 때문에 제사장을 보내셨다는 말이죠. 우리는 그 의미를 포착해야 하는데, 그게 곧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자기가 만든 어떤 종교적인 열매를 손에 쥐는 것이 아닌데, 못나고 못난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일을 벌리셨는데, 바로 그 일에 관여하는 것이 곧 믿음이란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즉 “예수님의 제사장이 되심과 나는 상관이 있다” 라는 것을 수납하는 게 믿음이란 말이죠.
그래서 믿음이 있다고 할 때는 자기의 감정을 끄집어내면 안 되는데, 자기의 기도를 끄집어내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가 기도해서 만든 결과인데, 남이 기도해서 만든 것은 그 사람의 결과이고 말이죠. 믿음의 대상은 보편적이어야만 하는데, 자기의 열심을 따라서 변하는 대상은 온전한 믿음의 대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기도를 많이 하고 헌금을 많이 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랑이지, 그게 무슨 믿음의 대상이냐는 말이죠. 다같이 인간이었는데, ‘너’ ‘나’ 할 것이 우리가 모두가 죄인이 되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죄인이 됨을 충분히 숙지하시고, 그 대책으로서 내놓은 그 무엇, 그것을 우리가 공통적으로 내놓을 때, 그게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의 직분이나 직책을 내놓으면, 그런 것은 믿음이 아니란 말이죠. 믿음이 있다고 하면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데,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13절과 14절입니다.
(히 5: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히 5: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여기에 보면, “젖을 먹는 수준에서 벗어나서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장성한 자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단단하지 못하고 물렁물렁하고 유동적인, 여기서 끌면 여기로 가고, 저기서 끌면 저리로 가는, 즉 구체화되지 못하고 희미한 것을 두고서 어린아이의 믿음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반면에 확실한 것, 즉 “나는 이것을 믿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을 두고서 장성한 자의 믿음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구분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 장성자의 믿음을 오늘 본문에 보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6절을 보겠습니다.
(히 5: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 !!
여기에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 진짜 장성한 자의 믿음은 그 내용이 무엇이야 하는고 하니, 멜기세덱의 반차, 혹은 그 반차를 좇는 제사장과 같은 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상당히 어려운 내용인데, “나는 믿음이 좋다” 라고 광고를 해봐야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닌데, 물 위를 걷고, 안수해서 병을 고치는, 그런 것이 믿음은 아니라는 말이죠.
오늘 본문에 의하면, 믿음이 좋다고 하는 것은, 남들이 하지 못하는 자기만의 주특기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너’ ‘나’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믿어야 하는 것을 소개해주어야 믿음이 좋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린아이의 믿음, 즉 자기는 예수님을 믿기는 믿는데,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거기에 대해서 희미하다는 겁니다. 어린아이이니 말이죠.
우리가 교육을 받았으니 알겠지만, 초등학교 때 산수를 배우는데, 제가 산수를 배울 때는 우악스럽게 반복하는 시험만 쳤는데, 줄기차게 반복만 하면 뭔가가 뚫려도 뚫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계산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빨리빨리 계산을 하고 했다는 말이죠.
그때는 중학교에 갈 때도 시험을 쳤는데, 계산을 빨리 하지 못하면 문제를 다 풀지 못하니까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그렇게 배웠던 것을 언제 써먹는고 하니까, 나중에 서문시장에서 장사를 할 때 그 위력을 발휘한다는 말이죠. 손님이 5%를 깎아달라고 하면, 그 5%를 깎는다고 하는 게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나게 안다는 것이죠(ㅋㅋ).
그런데 아까 살펴본 이사야서 53장 5절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라고 했는데, 즉 예수님이 대신 우리의 죄를 담담하심으로서 우리가 우리의 죄에서 용서함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말로만 가르쳐준 것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말씀 자체가 체험이 되어서, “그래,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주님이 아니라면 어떻게 죄를 용서받을 수가 있을까?” 라고 하는 것과, 그게 바로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이점이라는 겁니다.
그런 어린아이들의 대표적인 자들이 바로 목사들인데, 그래서 “내가 신학교를 다닐 때, 어느 권사가 공납금을 대주어서 졸업을 했고, 그러니 나야말로 주의 종이 아닙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신학교를 다녔다고 하면 대부분이 그런 경험이 있는데, 집사님들이나 권사님들이 가끔 신학생들에게 당회장 목사도 모르게 학비를 대주곤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부흥사들이 흔히 뭐라고 합니까? “6.25 전쟁 때 포탄이 터졌는데, 옆에 있던 사람들은 다 죽었는데, 그런데 나만 기적적으로 살아서 지금 이렇게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주의 뜻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러니 여러분, 이 시간에 주의 종에게 병도 나으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는데, 이게 좋게 말해서 어린아이의 믿음이고, 나쁘게 말하면 이단인데 말이죠.
이런 어린아이의 믿음이 왜 문제인고 하니까, 자기 죄를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개척교회의 목사가 오토바이를 타고 심방을 가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면,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1번은 순교, 2번은 운전미숙, 3번은 운명, 4번은 죄의 대가” 라고 한다면, 여기서 몇 번일까요? 4번인데, 자기의 죗값으로 죽는 것이지, 순교가 아니라는 겁니다.
장성한 자의 믿음은?
설교를 다시 하겠는데, 진짜로 믿음이 장성한 자라고 하면, 그 믿음이 무엇과 관련이 있는고 하니까, 그게 바로 ‘제사장직’ 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제사장직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중요한데, 그러면 성경말씀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게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그대로인데, 즉 “우리 죄로 인해서 그분이 채찍에 맞았다” 라는 것인데,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어떤 경우에는 남을 죽이고 싶고, 혹은 자살도 하고 싶지만, 그런 가운데 주님은 우리에게 제사장직이라는 것을, 즉 십자가 사건을 우리에게 출현시키고 집어넣었다는 겁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 이것을 지식적으로는 다들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합니까? 어린아이인데, 즉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히 5: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영원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는 제사장이신 예수님 !!
그렇다면 의의 말씀을 진정으로 경험한 사람은 어떻다는 겁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분이라고 하는, 그런 제사장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변할 수밖에 없는데, 그분은 불변하다는 것인데, 그렇게 불변하다는 것이 바로 ‘멜기세덱의 반차’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멜기세덱은 불변한데, 즉 변화되는 이 세상과 같이 휘둘리지 않는다는 말인데, 영원한 하늘에 예속되어있는 존재라는 겁니다. 그러니 변화되는 이 세상과는 상관이 없는 위치에 있는 분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니 신앙이 좋다. 내 신앙이 좋다” 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보편적인 분, 우리가 다같이 믿을 수 있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분 앞에서는 “니가 사람을 두 명을 죽였나? 세 명을 죽였나? 나는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 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런 것과 아무 상관이 없이, 그 누구라도 믿으면 공히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분, 그분 바로 영원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는 제사장이신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나와있는데, “한 성령을 마신 자들이 교회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을 벌어집니까? “손이 발더러 쓸데없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가 교회에서 직책이 높다고 해서 폼을 잡는다고 하면, 그 사람은 목사든 장로든 한 성령을 마신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죠. 즉 성령을 받지 못한 자라는 겁니다.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 (고전 12: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그렇게 보니 이 세상이 어떻습니까? 이 세상이 허무하지 않지요. 물론 자기 중심으로 보면, 이 세상은 자기에게 협조를 해주지 않는데, 그러니 친구가 아무리 많아도 도움도 되지 않고, 그래서 죽고 싶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 그야말로 젖먹이와 어린아이의 믿음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는 말이죠.
그것은 이 세상의 실상을 몰라서 그러한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어디로 몰고 가십니까? 여기서 오늘 본문 11절과 12절을 보겠습니다.
(히 5: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히 5: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여기서 사도바울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아주 답답해하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말이죠. “너희들이 듣기 것이 둔해서 내가 아무리 이야기를 해주어도 체험을 하지 못해서,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너희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때가 오래 되었는데도, 그래서 이제는 선생이 되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저는 여러분이 초보가 아니라고 여기고 감히 말씀을 드리겠는데, 우리교회는 장로님을 빼고는 가까운 곳에서 나오시는 분들이 없는데 말이죠. 그것은 이미 젖먹이가 아니라는 의미인데, 젖먹이는 그렇게 멀리서는 올 수 없다는 겁니다. 장로님은 여러분의 상상에 맞기겠습니다(ㅋㅋ).
그러면 단단한 멜기세덱에 대해서 !!
그렇다면 이제 ‘멜기세덱’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는데,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서 오셨는데, 여기서 반차는 반찬이 아니라 족보를 의미하는데(ㅋㅋ), 그러면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족보와 관련성이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물론 어렵지만, 제가 설명해볼 테니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라는 것은 아브라함과 관련이 있는데, 멜기세덱을 만난 사람은 아브라함밖에 없어요. 그러니 이 멜기세덱이라는 제사장을 직접 만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했는지, 먼저 그것을 우리가 안다고 하면, 이 문제는 해결되지 싶다는 겁니다.
여기서 로마서 4장 13절을 보겠습니다.
(롬 4: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셔서 그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된다고 하는 언약이 있는데, 그 언약은 다행스럽고 고맙게도 율법을 지키는 행함이 아니라, 거기에다 관계만 하고 믿으면, 그것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멜기세덱 !!
여러분이 초보가 아니기에 이해가 되었지 싶은데, 그렇다고 여기고 창세기 14장을 보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게 무슨 내용인고 하니까, 아브라함이 어떤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는데, 그래서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서 개인용병 318명을 데리고 가서, 그 나라의 장군들을 다 물리치고 롯을 건져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막대한 전리품을 챙겨서 돌아오는데, 그 돌아오는 길에서 누구를 만났는고 하니까, 오늘의 주인공인 멜기세덱를 만났는데, 그가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무엇을 알았는고 하니, “이번 전쟁은 내가 잘해서 이긴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즉 전혀 자기의 노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자기 배후에 있는, 즉 하늘과 자기를 이어주는, 그 중간에 있는 멜기세덱, 즉 살렘의 왕, 영원한 하늘의 예루살렘의 왕인 제사장이 자기를 축복해주어서 이런 승리를 얻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번 승리는 하나님의 몫이고 멜기세덱의 몫이라는 것의 증표로서, 자기가 취한 것의 십분의 일을 십일조로 바쳤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뒤에 누가 나오는고 하니, 소돔 왕이 와서 아부를 하는데, “아브라함, 당신은 정말로 싸움을 잘하는데, 인간이 아니라 신의 나라에 속한 사람 같았어요. 그러니 제가 취한 것의 일부를 당신에게 드릴 테니, 이것을 받아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어떻게 합니까? 그것을 거절한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만약에 자기가 세상 적인 힘으로 전쟁에서 승리를 했다고 하면 소돔 왕이 주는 것을 받았을 텐데, “그럼, 내가 잘해서 이겼어”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가 취한 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쳤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가 승리한 그 모든 공로는 오직 하늘의 축복, 즉 멜기세덱에 의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무엇인고 하니,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의 모델하우스가 되는데, 이 모델하우스가 무엇입니까? 아파트를 짓기 이전에 미리 지어놓고 전시를 하는데, 즉 “여기 보이는 그대로 아파트를 짓겠습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을 만나게 해줌으로 말미암아서, “너희들이 천국에 가게 되면, 이것 말고 다른 방식은 없다” 라는 것을 알려주신다는 말이죠.
(창 14: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창 14: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창 14: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창 14: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 14:21)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창 14:22)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창 14:23)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조금 전에 보았던 로마서 4장을 계속해서 보겠는데, 14절과 15절입니다.
(롬 4: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롬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구원을 받은 것이 만약에 율법의 행함으로 받았다고 하면, 그러면 아브라함의 믿음도 다 헛것이다” 라는 겁니다. 즉 멜기세덱이고 뭐고 다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즉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은 것은 자기가 행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전혀 그것이 아니라 오직 누구를 의지함으로서 얻어진 것인데, 그게 곧 구원이고 영생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애초부터 말씀이 되시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있었는데, 그러면 이것이 오늘날의 이 시대에는 어떤 식으로 나타납니까? 그게 바로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듯이,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얻는다” 라는 식이 된다는 겁니다.
구원의 근원 !!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오늘날 누군가를 이 땅에 보내셨는데, 그것을 오늘 본문 9절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구원의 근원’ 이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라고 말이죠. 즉 구원할 수 있는 토대와 근거가 된다는 말이죠.
(히 5: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제가 어릴 시절에 두 가지 서로 대조가 된 동화를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는 중국의 ‘삼천갑자 동방삭이’ 라는 동화이고, 다른 동화는 독일의 ‘생명의 샘물’ 이라는 동화입니다. 처음 동화에 보면, 동방삭이가 고개를 넘다가 자빠졌는데, 그런데 그 고개는 한 번 넘어지면 3년 밖에 살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민이 되었는데, 3년 밖에 살지를 못하니 보통 걱정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어떤 지혜로운 사람이 충고해 주기를, “바보야, 왜 고민을 하나? 몇 번이고 자꾸만 넘어져라” 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3×1=3, 3×2=6, 3×3=9” 라고 되니, 자꾸만 넘어지면 그 횟수가 다 모여서 오랫동안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아마 모르기는 해도, 동방삭이가 그 말을 듣고 자꾸만 넘어져서 정강이가 그만 박살이 났지 싶은데 말이죠(ㅋㅋ).
공짜로 주어지는 생명수 !!
이것은 일종의 행함의 종교인데, 그런데 독일의 동화는 무엇인고 하니, 어떤 나그네가 한 마을을 방문했는데 그 마음에는 노인이 없고, 전부가 어린아이나 젊은이들뿐이었다는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마을 한 가운데에 샘이 있는데, 그 물을 떠서 마시면 다시 어린아이처럼 젊어진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값없이 공짜로 주어지는 생명수인데, 이게 요한계시록 22장 17절에 나온다는 말이죠.
(계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무릎이 박살나는 것보다는 이것이 훨씬 더 낫지 싶은데, 이것이 바로 구원의 근원인데, 아브라함부터 생긴 아이디어라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이 사실을 다 아는데, 그런데 어린아이와 같이 압니다. “그래 좋다. 이제부터 내 멋대로 살겠어” 라는 식으로 말이죠. 자기가 얼마나 못났으며, 얼마나 죄인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인이고 하니, 아무리 소중한 생명수라도 퍼마시지 아니하면 되지 안 될 정도로 죄인인데, 그렇지 않으면 구원이 안 된다는 말이죠. 그 정도로 우리는 개판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가 체험해야 하는데, 그러네 이 세상을 살면서 돈을 좀 벌었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우리의 최후의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왜 그것을 깨닫지를 못합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중심으로 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왜 국회의원들이 자기가 당선되면 천하의 돗대가 되어서 까불다가, 그런데 그 다음 번에 낙선이라도 되면 자살을 생각한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국회의원만의 이야기일까요? 그게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젖먹이고 어린아이인데, 이 세상을 자기 중심으로 보게 되면 그렇게 된다는 말죠. 그러면 자기가 죽으면 하나님도 소용이 없고, 예수님도 소용이 없고, 교회도 소용이 없는 겁니까? 그냥 허무하다고 하면서 끝내면 되는 겁니까? 그러니 이런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영원한 생명의 샘이 되기 위해서 모두가 고생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분만 고생을 하셨는데, 오직 예수님만이 고생을 하셨다는 겁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 7절을 보겠습니다.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여기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라고 하는데, 이것이 아무나 할 수 있는 겁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인데, 그 누가 자기 죽음을 엄연한 현실로 맞이할 수 있습니까? 제발 살려달라고 하지 말이죠. 그러니 그 죽음을 꾸준하게 자기 현실로 여기면서 살아가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라고 하는데, 오직 예수님만이 택한 자를 위해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혼자 고생을 하신 덕분에, 예수님이 대신해서 채찍에 맞은 덕분에 우리는 나음을 입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에게 이것보다 더 이상 무엇이 중요한 것이 무엇이 남아있습니까? 교회, 목사, 장로,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죠. 이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그게 우리가 살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무슨 일을 꾸미셨는지를 포착하자는 것이죠. 이게 곧 진리인데, 진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오직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말이죠.
이제는 어린아이를 벗어나서 !!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어린아이는 자기를 벗어난 몇 미터 바깥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그냥 자기 눈 앞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그것이 자기에는 전부라는 말이죠.
요즘 탈레반과 미국과의 싸움 때문에 시끄러운데, 그런데 그게 유치부 아이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직접 체험을 하는 미국과 아프간 사람들에게는 심각하겠지만 말이죠. 탈레반의 테러로 인해서 미국의 빌딩이 그만 무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는데, 아이들은 그것을 가지고 장난을 친다는 겁니다. 장난감 비행기를 들고 말이죠.
그것은 우리도 역시나 마찬가지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하네. 그것 참 안타깝네” 라고 하면서 말이죠. 빌딩이 폭파된 것이 남의 일이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역시 그렇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젖먹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얼마나 철이 없는지 하나님은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는 줄로 압니다. 하지만 우리가 철이 있던 없던 간에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영원한 생명의 샘물을 친히 마련하신 줄 압니다. 그러니 그 어디를 가도 이 사실을 잊지 말고 붙잡고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1,2 오후 8시에 마침. - 녹취 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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