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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8:15-18 / 베드로의 배반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18:15-18 / 베드로의 배반

정인순 2013. 12. 28. 22:54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3042391.WMA

 

 

베드로의 배반

2003년 4월 23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18:15-18

 

18: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 가고

18:16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18: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18:18 그 때가 추운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사람은 누구나 되고 싶어하는 미래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미래상을 누군가에 의해서 빼앗겼다고 한다면 참으로 참담한 기분이 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악이란 자신의 미래상이 타인에 의해서 훼손되는 것을 뜻합니다. 근근히 모은 공납금이 버스 안에서 소매치기 당했을 때, 그 사람의 미래상은 송두리째 다 빼앗긴 셈이 됩니다.

 

이 처럼 세상살이란 자신의 미래상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워 하면서 지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인물, 베드로는 자신의 미래상이 예수님에 의해서 다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엄연히 권력이 숨쉬고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멋대로, 함부로 자기 하고 싶은대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약자는 강자의 눈치를 봐야하고 그렇지 않으면 폭력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살아남고 싶다면 권력을 가진 자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은채 조심 조심 숨죽이며 살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원칙을 아는지 모르는지 막무가내로 자신이 해야 될 말씀을 다 하고 다녔습니다. 이러한 대범한 예수님을 뒤를 바짝 추종했던 베드로와 11제자들은, 예수님이 큰소리 치는 것은 배후에 그만한 막강한 힘이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인정하고 그들도 덩달아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께서 체포될 때, 그 막강한 힘이 나타날 그 어떤 징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세상 권력의 대단함을 실제로 충분히 느꼈던 순간이었습니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목숨바쳐 추종하겠다는 그 예수님보다 더 세었습니다.

 

하나님의 그 어떤 기적적인 구출 작전도 없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지도 않았고 옛날 민수기 때처럼 땅도 갈라지고 그 속에서 불길이 솟아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예전과 동일했고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각자 알아서 살 궁리를 찾아나서게 되었습니다. 누구하나 도와 줄 사람도 없고 자진해서 협조해 줄 사람조차 없습니다.

 

예수님 중심의 교단은 세상 힘에 의해서 해체되었습니다. 교주가 되는 예수님은 저만큼 제자들 눈앞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세상의 힘이 갖고 노는 노리개감이 되었습니다. 가해지는대로 순순히 그대로 당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의 남은 운명은 세상 권력자의 손에 의해서 처리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그 어떤 위협도, 권위도 느끼지 않습니다. 그저 그들이 마음대로 농락해도 아무 탈이 없는 그런 한 사람의 별 볼일 없는 죄수에 불과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고소한 안나스 무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그러자 그들은 빌라도 총독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배제하고 저희들끼리 예수님을 함부로 대하고 있습니다.

 

자, 과연 우리는 이런 예수에게 무슨 희망이 있다고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세상에서는 힘 가진 자가 큰소리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아무런 힘도 제공할 수 없는 예수님을 붙들고 세상에 향해 무슨 큰 소릴 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으로부터의 그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다고 한다면 과연 계속해서 예수님에게 미련가질 필요가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는 이 물음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해답을 얻고자 그는 몰래 예수님의 재판 자리까지 따라가게 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모두 세상 권세에 다 굴복할 때도, 제자들만큼 예수님 말씀만 믿고 감히 세상 권력에 도전하고자 하면서 뭉쳐 다녔습니다. 과연 세상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당을 겁내서 그들은 그동안 안건드리고 가만 놔 두었을까요?

 

과연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확실하게 뒤를 밀어주고 받혀주는 분인지 아니면 그냥 허풍에 불과한 것인지를 확실히 확인하게 위해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최후까지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그동안 예수라는 분이 말씀하신 것이 단지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베드로를 비롯한 12제자들은 모두 망상가요, 자신의 일생을 밑천으로 투자해서 객기를 부린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은 때로는 비현실적인 환상에 모험을 걸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현실이 너무나 현실다워서 변화를 구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현실성에서 오는 허탈감은 각오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에 와서 뭔가 다른 변화, 다른 현실을 구하는 것도 결국 이런 허탈감만 잔뜩 안겨주는 것이 아닐까요?

 

투자한 만큼 보람도 없고, 대가도 거의 건지지 못했다고 느낄 때면 너무 늦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이 베드로의 심정에 동참해 봐야 합니다. 기대한 것이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모든 것이 하룻밤의 낭만이요 꿈으로 날아가 버리게 만드는 이 현실의 위력을 새삼 수긍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가 밥먹여 주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돈 벌어주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합니다. 자신이 시도한 신앙생활을 스스로 접어버려야 합니다. 이미 꽝이 되어 버린 지나간 복권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듯이 자신의 신앙도 그런 식으로 갈기갈기 찢어버려야 합니다.

 

자신의 꿈을 담고 꿈을 싣는 신앙은 미신에 불과합니다. 결국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괜히 그동안 분투노력 했던 바가 아까워서 미련을 두고서 못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베드로는 화끈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계속 예수님과 그 말한 것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자기 쪽에서 예수를 버릴 것인가를 분명히 결정하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 가상합니다.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밥 먹여주지도 않고 돈도 안되는 하나님이나 예수를 붙들고 여전히 미련을 갖고 있는 것 자체가 자신을 속이는 혼란에 빠지는 짓이 됩니다. 사람이란 하나의 일이 깔끔하게 청산되지 아니하면 다음의 일을 제대로 못하는 법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이제 예수님도 무섭지 않습니다. 그저 그렇고 그런 자를 메시야로 추종한 자신의 경솔한 행동이 후회될 뻔도 할 것입니다. 정말이지 그동안 귀신에 잠시 홀렸다고 간주하고 베드로는 손털고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베드로가 잊고 있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베드로의 개인에 관한 예언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올 때, 예수님의 존재가 베드로에게 다시 부각이 된다는 점입니다. 예수를 잊으려고 하고, 예수님을 자기 쪽에서 먼저 버리고 싶어 했던 베드로, 그러나 그 베드로를 계속 꽉 잡고 있었던 것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던진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앙이 신앙답게 이어지는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려 줍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감정이 아니라 예수님쪽에서 나온 말씀의 약속이라는 겁니다. 성도는 말씀보고 믿지, 자신의 감정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정을 믿는 자는 결국 스스로 자기 감정의 노예가 될 뿐입니다.

 

믿는다고 해도 믿음이 아니요, 안믿어진다고 괴로워해도 그것이 과연 진정 불신앙의 증거인지 확실치 않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던져주신 그 말씀이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성도의 앞 일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성도의 미래가 성도의 행동이나 결심에 달려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구원은 애초부터 성사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나 성도가 자신의 느낌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그 순간만이라도 자신을 부인하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닭 우는 소리는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되어 자신을 부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건성으로 듣고 그저 교회 분위기만 살피고 두리번 거리면서 교회에서의 자신의 위상에 잔뜩 신경을 쓰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되면 항시 예수님마저 떠미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 사람 곁에서 닭들이 아무리 목청 높여 울고 또 울어도 그것이 말씀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평상시에 일어나는 자연스런 일로 간주할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신비로운 것이요 기적적인 선물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위력인지, 참된 신앙인은 그 어떤 상황이 온다 할지라도 자신의 미래를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예수님의 약속을 놓치는 법은 없습니다.

 

로마서 8:30의 말씀, 즉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는 말씀이 믿어지십니까? 심지어 온 교인들이 여러분을 욕하는 그런 상황에서도 나 자신을 향한 닭소리로 들려지십니까? 그렇다면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남들의 시선을 염두에 두지 말고 지금도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시는 예수님의 시선을 염두에 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