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7:23-26 / 아버지를 아는 것 본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3040288.WMA
|
이근호
아버지를 아는 것 2003년 4월 2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17:23-26
17: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17: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줄 알았삽나이다 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누구랑 같이 살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바램일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인간들이 하나님하고도 같이 살고 싶어할까요?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금방 시집온 새댁이라고 칩시다.
만약에 남편도 완전무결한 자이고 시집 부모들도 완벽 일변도로 나간다면 그 시집살이가 참으로 만족하고 행복이 넘칠까요 아니면 숨이 턱턱 막힐까요? 사람들이 같이 살고 싶어하는 대상은 자기하고 수준이 맞는 부류의 사람을 말합니다.
연배도 비슷하고, 취향도 맞고, 성격도 맞고, 학력이나 재력도 비슷한 사람을 원합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비슷한 자들끼리 무리를 짓는다는 말입니다. 격이 맞지 아니하면 만나는 것조차 겁나게 마련입니다. 깔끔떠는 사람과 지저분한 사람이 같이 산다는 것은 상상만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아예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 불가능한 일을 성사시키려고 하시는 겁니다. 물론 택한 자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일단 하나님은 성도가 마음 먹은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도록 조정하십니다. 그리고 성도가 스스로 원치 않는 쪽으로 그들의 인생을 몰아세우십니다. 그리고는 성도가 평소에 마음에 둔 꿈과 비젼과 소망을 무장해제 시켜버립니다. 있으나 마나 하는 식으로 묵살한다는 말입니다.
과연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능력한 성도 자신의 실체 뿐입니다. 만약 어떤 자가 스스로 힘으로 이런 지경까지 왔다고 한다면 그는 도로 그 상황을 벗어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주어지는 이런 지경은 다시 되돌아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꽉 잡혀 있는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식으로 자기 백성을 다루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됨'에 있어 표준이 되는 모델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하나됨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하나됨의 상황처럼 자신이 선택한 자에게는 이런 상황을 만들려고 하시는 겁니다.
마치 어설프기 짝이 없는 새댁이 시부모의 완벽한 관리 하에서 완벽한 남편과 살만한 신부로 변신되는 과정과 같습니다. 과거 구약 때에, 즉 예수님께서 아직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이 작업이 율법이라는 것을 매개로 하여 진행되었습니다.
즉 "이 율법이 완전하게 지키는 자에게는 나 하나님이 그를 거룩한 자로 간주하여 하늘의 끝없는 복을 내리겠노라"하시고 택한 백성들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았다는 그 사실만을 뿌듯한 자부심을 갖고 최고의 노력과 아이디를 다 짜내어 율법에 완전히 실천에 옮기겠노라 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그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전에 나타나지 않던 더 큰 죄가 율법 수행과정에서 새록새록 등장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갓 시집온 어설픈 새댁이 시부모 밑에서 시키시는대로 일하면 할수록 더욱 더 본인이 얼마나 그 지시에 따르기에 부족한 가를 절감하게 된다는 이치와 유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여호와의 계명을 무시하는 것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할 정도로 하나님에게 매달리고는 있지만 정작 그러한 선을 향한 집념보다 더 큰 능력으로 나타나는 게 있었으니 바로 악을 향해 곧장 내딛는 자신들의 품성이 말썽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왕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주위의 민족들로부터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선지자들의 질책은 더 거세지고 결국에는 바른 계시를 전달하는 선지자를 지독스럽게 미워서 살해해 버리는 경우가 하나 둘이 아닙니다. 선을 행해야 한다는 의식은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어느새 그 선을 도리어 미워하고 차라리 악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자신의 모습이 발견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그 어느 인간이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순종해서 그 의로써 구원될 수 위인이 아예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들 끼리 능력 차이에 의해서 거룩함에도 정도에 차이가 난다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모든 인간이 죄를 범했으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차원입니다.
그러니 이런 입장에 놓인 인간들이 마음 맞는 사람들 끼리 함께 사나 아니면 혼자 사나 하나님에게는 전혀 고려할 가치조차 없는 변화들일 뿐입니다. 진정한 변화는 인간들의 행함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은 전적 무능합니다. 바로 이러한 인간의 본질을 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전적 무능력한 지경까지 몰아세우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그 택한 자들을 어떻게 처리하겠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이유가 나옵니다. 아무리 제자들이지만 그들끼리 같이 몰려 다니며 과거의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기억하고 가르친다고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제자들이 자체적으로 한 행사가 무엇이 있습니까? 단결해서 복음을 전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고기 잡으려고 돌아다녔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확인시키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해 내려주신 그 사랑입니다.
과연 그 사랑이 여전히 남아 있는지를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자, 갓 시집을 온 새댁에게는 남편도 완벽하고 시부모도 완벽합니다. 따라서 새댁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도 완벽해야 이 집에서 무사히 신부로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각가지 지시를 따르려고 해보니 완벽은 커녕 도리어 없던 반발과 미움까지 새롭게 생겨나게 됩니다. 그 순간 이 새댁은 참으로 자신이 무능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때 남편은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처럼 나의 신부인 너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다"는 겁니다. 여기서 '사랑'에 대한 참되게 이해를 해야 합니다. 사랑의 특징은, 사랑받는 자가 사랑을 위해 뭔가 한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이 만약 율법이라면 그 율법을 이루기위해 애쓴 자에게 율법을 지킨 공로가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율법이 아닙니다. 일방적인 은총입니다. 조건없이 선사받은 선물일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따내어 성도가 된 위인은 이 세상에 어디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따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저 줄 때 그저 받은 식으로 받은 것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12를 택하여 세울 때는 이런 취지로 세우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6에 분명히 나오듯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는 말씀은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대로 세상에 알려져야만 합니다.
무엇으로 말입니까? 누구나 지키려고 달려드는 거룩한 율법으로 말입니까? 아닙니다. 오직 택한 자에게만 제공되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오늘 본문 24절에 보면,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과 하나되는데는 그 앞서 '하나 됨'의 모델이 따로 존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창세 전부터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영광스럽게 그 영광된 하늘로 도로 올라가시려는 겁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세상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기 얻기를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신에게는 아버지께서 주신 사랑과 그 영광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축복이 아닙니다.
이 축복은 성도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왜냐하면 다같은 사랑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모를까요?
오늘 본문 26절에 보니,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일부로 그렇게 조정했기 때문입니다. 즉 택하지도 않는 자들에게는 철저히 모르도록 일을 하시고, 반대로 택한 자들에게는 반드시 알게 되도록 일하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저 신의 완벽성만을 알고 거기에 도전하고 싶은 충동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오늘날도 택함 받지도 않은채 교회 다니는 수많은 교인들이 이런 정신 상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이 남긴 성경을 최선의 노력과 최선의 변명을 다 동원해서 지킴으로서 신의 경지에 가까이 다가가서 그 대가로 그토록 좋다는 천국을 쟁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행함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들은 압니다. 그들은 거룩에 의해서 얼마나 무능한 인간인가를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의 세상적인 소망과 꿈이 다 부질없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그저 예수님을 통해 주신 사랑만 의지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 > 요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요한복음 18:10-11 / 쓴 잔 (0) | 2013.12.28 |
|---|---|
| 요한복음 18:1-9 / 제자 사랑 (0) | 2013.12.28 |
| 요한복음 17:15-22 / 하나 됨 (0) | 2013.12.28 |
| 요한복음 17:11-14 / 제자들의 위상 (0) | 2013.12.28 |
| 요한복음 17: 4-10 / 하나님의 자녀 (0) | 2013.12.2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