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8:10-11 / 쓴 잔 본문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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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잔 2003년 4월 16일 본문 말씀 : 요한복음 18:10-11
18: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18: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베드로는 도대체 무슨 세계를 염두에 두었으며 그와 반대로 예수님은 어떤 세계를 만들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행동이란 항상 목적한 바를 겨냥해서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동물학에서는 동물의 행동을 다음의 네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공격과 방어, 먹이 섭취, 번식, 그리고 도피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생물은 자연 환경에 적응합니다.
무엇을 위한 적응입니까? 자기 자신의 신체를 살리기 위한 적응입니다. 이 적응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본능이기에 죄를 물을 수 없는 것입니까? 모든 사람이 다 본능적으로 살아간다고 한다면 칼 가진 베드로에 의해서 말고 같은 사람들은 모조리 귀를 베여도 좋다는 말입니까?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벤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즉 "말고, 이녀석 너 지금 잘못하고 있는거야. 얼마나 큰 잘못인지 내가 보여주지. 이 칼로 너의 귀를 베고 말리라. 자 이제 너는 너의 죄를 알렸다!라는 취지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이것도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이요, 그 또한 환경에 대한 적응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펼치십니까? 혹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펼치지는 않습니까? 평소에 우리들이 나타내는 모든 행위가 이미 본능적으로 자기 몸뚱아리를 사수하겠다는 강력한 집착성을 가지고 오늘 성경 본문을 펼쳤다고 칩시다. 우리는 이 베드로의 행동을 보고 우리들의 행동과 처신을 정당화시킬 수 있습니까? 아마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나 생물이나 힘을 낭비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생물은 결코 환경과 투쟁하지 않으며, 환경에 둘러싸여 그것과 더불어 살아간다고 합니다. 어떤 생물도 강력한 바람에 대항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면 그냥 몸을 피해버립니다.
즉 최소한의 에너지를 사용하여 그 몸을 구성하며 이를 유지하며 기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효율성이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성경의 내용을 일단 경계하면서 자기에게 유리한 내용이 나오면 다가서다가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이 나오면 슬그머니 외면해 버립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의 행동은 우리 모두의 얼굴을 슬그머니 외면시키고도 남음이 있는 행동일 것입니다. 베드로의 격한 성격을 비난하고 싶어하면서도 만약 조금이라도 깊이 파악해 들어가게 되면 그 베드로의 태도가 우리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이며 우리는 매일 매일을 이런 식으로 대인관계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들통나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반면에 누가복음 22:51에 보면,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하신 행동까지 대신해서 처리해 주십니다. 하지만 어쩌면 예수님의 이런 태도가 우리를 못마땅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말고의 귀를 도로 붙여주시는 예수님의 행동은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우리들의 일상적인 행동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모습이기에 차라리 비실제적 일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슬그머니 예수님의 낯을 피할 생각부터 먼저 하지 마시고 9절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우리는 이 말씀 가운데, '잃어버림'이 어떤 상태를 말하며 '잃지 않음'이 무슨 상태를 말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말고에 대해서 순교자적 각오로 과감한 행동을 한 것은 나름대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이 조직의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애쓴 자그마한 노력이었습니다. 동물의 본능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자기 것 지킴'입니다.
어느 오랫동안 부부로서 살았던 노부부 사이의 다음과 같은 심각한 대화가 있습니다. 부인되시는 분은 남편되시는 분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자식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당신을 그냥두지 않겠어!" 즉 아내는 남편을 뭘로 보느냐 하면 아내가 친히 자기 배로 낳은 자기 새끼를 지켜줄 종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내 새끼리를 건드리면 어미인 내가 당신을 죽여버리겠다는 겁니다.
과연 부부가 한 몸입니까? 아니면 자식을 낳을 때까지만 짝 노릇한 것에 불과합니까? 물론 이것도 본능에 속합니다. 일부러 악한 감정을 가져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자연 발생적입니다. 누구에게도 다 이 본능을 한짐 껴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말고의 귀를 벤 베드로의 행동은 마치 '정방방위'의 표본 같습니다. "네가 우리 조직을 건드렸기에 너도 이 조직의 매서운 맛을 보아라" 얼마나 지극히 당연하게 발산되는 본심입니다. 누가 감히 탓하겠습니까.
대구 지하철 유족들이 무작위하게 사고 당하지 않는 나머지 대구 시민을 향하여 분노의 행동을 보이는 것도 이런 본심에서 나온 것이니다. "너네들은 뭐가 잘나서 너희들의 자식들은 생생하게 살아있고, 우리들은 뭐가 못나서 우리 자식이 불에 타 죽었느냐 말이야. 너네들이 자식 죽은 감정을 알아?"하고 말입니다.
제가 언젠가 강의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양심이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고귀한 것 같지만 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금까지 처해왔던 환경이 그 양심을 재구성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원한이 생길 만한 일이 있었다면 그 원한은 그 사람의 양심의 중심부에 내려가서 마음의 주도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슨 계기가 되면 말릴 사이도 없이 돌발적으로 한에 서린 태도가 나오게 마련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도 뭔가 원한에 사무쳐 있습니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자신이 믿는 세계와 조직이 와르르 와해되니 자신도 모르게 그동안 사무친 한이 그런 과격한 행동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가 이런 베드로보고 그 행동의 옳지 못함을 탓한다면 아마 베드로가 이렇게 대꾸할 것입니다.
"너네들이 남은 세월을 몽땅 예수님에게 바쳐봤어? 아무 것도 남김없이 전부 다 이 예수님에게 쓸어 넣어봤어? 그런데 하루 밤에 그 모든 판돈이 이 세상의 권세에게 다 빼앗겨 날아가 버린 기분을 너네들이 아느냐 말이야"
그렇다면 이런 베드로의 항변에 대해 우리는 아뭇 소리도 못해야 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베드로는 지금 자신이 진작 잃어버려야 될 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자신을 살려내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을 베드로는 모르고 있습니다.
물론 베드로의 기분은 이해합니다. 마치 날마다 우리들이 우리들의 행동을 자신만이 이해해주고 격려하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나 우리나 우리 정작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현재 잃어버림을 당할 입장에 놓여 있는 자라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 우리는 눈이 활짝 열려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힘이 모자라서 순순히 체포 당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대신 살려주시기 위해 순순히 잡히신 것입니다. 말고의 귀를 도로 붙여주신 예수님이 어디 말고의 귀가 이뻐서 붙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를 훈계하고 오늘날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하실 일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도로 붙여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는 검을 도로 꽂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행하시는 모든 일 다 '잔', 즉 하나님께서 마셔야 한다고 당부하신 '그 쓴 잔'에 주목하라고 하십니다.
이 잔은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께 권한 것이 아닙니다. 즉 "예수님 제발 우리가 드리는 이 잔을 마시시고 우리의 죄를 씻어주세요"해서 들이마시는 잔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인간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만의 사이에서 맺은 약속에 의해서 마셔야 될 잔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마실 잔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베드로처럼 우리 스스로 지키는 힘의 칼을 칼 집에 도로 꽂는 일입니다. 자신의 본능적 과오를 시인하는 것임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미 마셔버린 그 '그 쓴 잔'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가정에서 우리들은 너무나도 달콤한 잔들을 꿈꾸며 살다가 그것이 상황에 따라 방해받으면 동물적인 울부짖음으로 하나님에게 대들기 일쑤입니다. 이것은 동물이 본능이요 동물 왕국의 속성에 불과합니다. 공격하고, 먹이를 섭취하고, 생긱하고 도피하는 적응 생활은 곧 예수님과 전혀 무관한 '잃어버림'을 당한 자들의 나름대로의 자구 노력입니다.
이것을 정당화하거나 옳다고 내세울 것이 아니라 이런 태도로 인해 예수님께서 쓴 잔을 마셔야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맙시다. 그리고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겠다는 교만함을 우리는 걱정하면 아직도 한맺인 것이 많음에 대해 회개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누구 탓할 것도 없이 우리가 바로 잃어버림을 당한 자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자를 살리기 위해 아버지께서 내려주신 쓴 잔을 거침없이 삼켜버린 주님을 찬양하는 저희들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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