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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7:11-14 / 제자들의 위상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17:11-14 / 제자들의 위상

정인순 2013. 12. 28. 22:47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3031986.WMA

 

이근호

 

제자들의 위상

2003년 3월 19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17:11-14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7: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7: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하려 함이니이다

17: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구원은 어떻게 성도에게 주어질까요? 돈으로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자체내에서 나오는 능력으로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 구약을 들추어 봐야 합니다.

 

열왕기하 2장에 보면, 거기에 엘리야와 엘리사가 나옵니다. 엘리야는 막 불수레 타고 하늘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땅에서는 엘리사가 그것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벗어놓고 간 겉옷을 가지고 요단강 물을 치니 원 세상에 강물이 갈라지는게 아니겠어요! 즉 엘리야의 능력이 엘리사에게 임했다는 표시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보면서 은근히 시기심이 날 것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끼리는 능력을 주고 받는데 오늘날 우리는 우리 주님으로부터 무엇을 받았는가 하고 내심 섭섭해 하면서 말입니다.

 

또 민수기 20:28에 보면, 아론이 죽습니다. 그리고 다음 대제사장은 엘르아살입니다. 어떤 식으로 능력이 전달되었음을 표시합니까? 모세는 아론의, 겉옷을 벗어 차기 대제사장에게 입히는 것으로 표시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는 어떤 식으로 능력이 임하게 됩니까?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은 옛날 엘리사처럼 그저 몇 가지 능력을 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나되게 하신답니다. 이 '하나 됨'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14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과 같이 미움을 받을 정도로 '하나됨'을 돈독히 하시겠다는 겁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자... 그렇다면 이 위력이 어느 정도일까요?

 

예수님은 먼저 세상에 떠나버리시고 자기 사람은 아직 안데려 가십니다. 그래도 그들이 제대로 신앙적으로 버틸까요? 걱정할 필요없습니다. 예수님과 자기 사람들의 결속은 죽음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하나됨'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 세상을 이렇게 보십니다. 영원히 있을 곳이 못되어서 황급히 본래의 처소로 되돌아갈 정도랍니다. 사실 제자들이라고 하지만 천성적으로 이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아니, 이 땅이 어때서, 이 땅에 무슨 문제라도 있단 말입니까? 물론 혹시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더라도 그런 문제라면 개선해 나가고 수정해 나가면 될 것이지 아예 이 세상을 뿌리채 뽑아 버리겠다고 나서시는 것은 너무 심한 행동이 아닙니까 정말 못마땅합니다."

 

하고 우리들은 인상을 찌푸리게 됩니다. 사실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한 뭉큼의 자리를 장만하고자 하는데도 실로 눈물겨운 노력을 다 기울리게 됩니다. 죽기 살기로 살아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세상이 마음 먹은대로 안 될 때마다 줄줄 쏟아진 눈물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럴때마다 다시 용기를 내고, 마음을 가다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집어넣어 한번 버텨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다보니 그동안 고생한 것을 생각해도 이 세상을 떨쳐 버리기에는 너무 정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어쨌든 그냥 놔 버리기에는 애착이 가는 구석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너무 고생하고 수고하고 있습니다. 그저 힘든 노동 때문에 고생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남을 안면 몰수하고 밀쳐 내어야 한다는 현실이 그저 야속하기만 합니다. 즉 양심조차 접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 괴로운 것이지요.

 

정말 어떤 때는 꼭 내가 이런 식이라고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한 두 번 드는 것이 아닐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하늘 나라보다 땅의 나라, 인간의 나라를 더 사모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이란 자신이 애쓰고 노력하고 땀을 흘린 것이 그냥 허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하나 둘 씩이 모이고 쌓이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어느날 그것은 나의 분신으로서 나만의 찬란한 영광을 발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수능점수가 그러하고, 나의 직장이 그러하고 내가 제대로 선택한 잘난 나의 신랑이 그러하고, 내가 잘 교육시킨 잘난 내 자식이 그러하고, 윤기나는 나의 새 아파트가 그러합니다.

 

내가 피 땀 흘린 대가로 다가온 나만의 영광스러운 공간은 그저 이쁘기 한량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이쁘고 사랑스러운 나만의 공간이 어디에 뿌리박고 자리잡고 있는가 하면, 바로 예수님이 저주하시는 이 지상에서 한 구획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니다.

 

만약 예수님의 기도대로 모든 것이 철수되어야 한다면 그 애지중지 아끼는 나의 세계마저 여지없이 사정없이 파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찌 이를 수가! 안돼 안된다 말이야! 꿈에라도 그런 일이 생기면 정말 안돼!"라고 발악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성도라면 다음과 같은 경험을 갖게 됩니다. 예를 들면, 어떤 교인이 오로지 하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만 자기가 출석한 교회에서 열심히 충성, 봉사를 다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 교회가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 특히 목사나 장로들로부터 칭찬이 늘어집니다. 다른 집사들의 부러움도 사게 됩니다. 하지만 그 성도는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일했는데 남들은 교회 커진 것보고 좋아들하고 기뻐하니까 이것은 결과적으로 그 성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나타내지 못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점이 중요합니다. 즉 이 성도는, 이런 경우를 당해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해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 안에서 무엇을 보셨고, 그것이 얼마나 더럽고 추한 것인 가를 알아내었듯이 그와 동일한 체험을 이 성도는 하게 된 것입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너희들도 사실은 이 세상을 떠나야 될 자들이다. 물론 아직은 모르겠지만 너희들이 이 세상에서 나처럼 오로지 하나님 나라만을 사모하게 된다면 그 주변에 깔려 있는 악의 윤곽이 점점 크게 다가올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들이 새벽녘에 학교 운동장이나 산에 조깅을 하게 되면 처음에는 차가운 공기 속에서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먼동이 트면서 가까이 있는 물체부터 보이기 시작해서 얼마 안 있어 멀리 있는 물체까지 희멀거니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그동안 어떤 것들이 나의 주위를 장식하고 있는지를 점차 알게 되지요.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고 관심도 없을 때는,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친절한 시민이요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분들로 생각이 들 것입니다. 사귀면 사귈수록 정이 깊어지고 어느듯 그들 없이는 '나'라는 존재도 더 이상 홀로 설 수 없을 것처럼 사회 의존적으로 사람으로 달라져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이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즉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접근하십니다. 사람들이 이 말씀은 어떤 취지로 주어지는 지를 전혀 모르게 됩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정을 너무 주어서 세상 사는 재미 푹 빠져 있으니 오늘 본문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길이 막막하지요.

 

세상에 대해서 그만큼 친숙하니 주위에 세상 사람들도 많이 따르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슬그머니 세상 자체에 대해서 자신감이 생기게 됩니다. 세상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말은 다른 사람과 경쟁해도 이길 것 같은 감이 잡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위 아는 사람들의 연줄을 이용해서 최대한 힘을 키우게 되면 어지간 사람들보다 세상에서 더 우위에 설 것 같은 희망과 비젼을 내비치게 됩니다. 그런데 막상 그 의도로 밀고 나가다 보니 때로는 위기가 찾아들곤 합니다.

 

그럴 적마다. "평소에 내가 교회에 잘다니고 하나님께 잘 보인 것이 다 이 때를 위함이 아니겠는가. 그래, 그동안 하나님에게 바친 충성스러움이 있으니 그것을 근거로 하여 내가 어려움을 처할 때 약간의 도움을 구해보자"라는 식으로 밀어 붙이게 됩니다.

 

여기서 '참된 성도'와 오늘 본문 12절에 나오는 '멸망의 자식'으로 갈라지게 되는 시점이 온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멸망의 자식'은 바로 가롯 유다를 말합니다. 기롯 유다가 결코 불교 신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못들어 본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을 본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 즉 물고기 두 마리와 떡 5개로 5000명의 군중을 먹여 살린 그 기적의 현상에서 다른 제자들과 더불어 같이 떡과 고기를 나누어주었던 장본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의 권세로 귀신까지 쫓아낸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멸망의 자식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이 세상 권력과 힘을 더 쟁취하기 위한 이용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제자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비로소 알게 된 자들이었습니다. 즉 문제는 '죄'문제입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인간이라면 모든 인간은 다 원래부터 죄악된 세상 자체의 속해서 탄생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이 땅의 세상에 친숙해 질 수 밖에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공을 해도 이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싶어하고, 출세를 해도 이 세상에서 최고가 되고 싶은 겁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늘 이 점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이 세상 최고의 분과 운명을 같이 한다면 자신도 최고의 사람들 중에 속해질 것이라고 항상 기대하고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고생스러운 제자의 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는 멸망의 자식으로 예수님에 의해 붙여진 자입니다. 요한복음 6:70-71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가롯 유다는 선택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다른 제자들의 위상이 얼머나 놀랍게 대단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즉 사실 다른 제자들도 가롯 유다 못지 않고 세속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망의 자녀가 아니라 구원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요소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특별한 자비와 사랑으로 그들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장악됨을 사실을 전하는 임무를 계속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모두 오래 이 땅에 남아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때는 훌쩍 죽고 싶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뜨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우리에게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에 허락되지 않는 사항입니다. 물론 우리도 이 땅에서 미움을 받게 되고 그동안 우리들이 기대를 잔뜩했던 주위 사람들로부터 매몰찬 냉대와 서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럴수록 새벽녘에 사물들이 점차 그 정체를 드러내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세상의 악함을 점차 인식하게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개입했고 또 그 사랑 안에서 지내고 있음을 세상 살아가면서 보다 크게 밝히 알도록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