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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7:1-3 / 예수님의 권세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17:1-3 / 예수님의 권세

정인순 2013. 12. 28. 22:45

이근호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3030584.WMA

 

 

예수님의 권세

2003년 3월 5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17:1-3

 

1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어떤 내용을 가지고 기도하셨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알아 보기 전에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 자세부터 우리가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6에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기도하려면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들은 모든 일을 번잡한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노동의 대가가 타인들로부터 오기에 될 수 있는 한 주위에 많은 다른 사람들이 있다면 그만큼 도움받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것도 일종의 노동이요 그것도 거룩한 노동이라고 간주하면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거룩한 노동의 대가를 은근히 기대하고픈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즉 기도 많이 하는 저를 좀 후원해 달라는 겁니다.

 

목사들이 기도할 때도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즉 "저는 기도 많이 하는 목사이니까 교인들이여, 제발 저를 무시하지 말고 제가 갖고 있는 주의 종으로서 권위를 인정해주십시오"라는 유혹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부하기를 타인을 의식하는 기도는 기도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기도란 일시적으로나마 자신의 주위에 자신을 도와주고 보호해 주고 후원해 줄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꾸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람이 그립고 사람을 찾아다니고 싶어한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해도 올바른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물론 교회에서 벌리는 단체 기도 모임에는 참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들 열나게 기도하는 그 집단 최면 분위기에 잠깐이나마 흡수되어 자신도 모르고 기도 비슷한 모양새를 흉내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도 모임은 진정 기도하고 할 수없습니다. 기도란 기도 시작부터 혼자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외톨이가 되어야 합니다. 쓸쓸함으로 충만해야 하고 고독에서 헤어나오지 말아야 합니다, 그야말로 믿을 분은 오직 하늘에 계신 주님밖에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었다고 알려진 사람들의 특징은 한결같이 세상 친구가 많지 않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너무 서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로소 제대로 기도다운 기도를 할 채비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기회라고 여기시기 바랍니다.

 

기도란 외롭지 않고서는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할 일이 많은 사람은 기도하고픈 마음가짐이 장만되지 않는 법입니다. 군중들 속에 같이 뒤섞여 있다할지라도 그것을 아무도 주목하지 아니하는 골방이라고 여기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쨌든 기도란, 사람들의 도움을 뿌리치는 겁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기를 다짐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타성이나 근성이나 학습에 의해 배운대로 기도하는 것은 그 기도이 목적이 엉뚱하게도 기도하는 당사자에게 최종 귀착되기 십상입니다.

 

지난 월요일 저는 대구 팔공산 갓바위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벌써 몇 번째 올라가지만 이번에 특히 제 눈에 하나 띄이는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소원성취 봉투'였습니다. 소원성취 봉투에 재물을 담아 '약사여래불상' 앞에 놓고 지극 정성을 다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겸손과 몸짓을 총동원하여 소원 성취를 위해 울면서 절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들을 보면서 옛날 처음 교회 나올 때 기도원 올라가서 부흥 목사가 시키는대로 헌금하고 삼위 일체 하나님을 삼창하면서 간절히 통성기도하는 것이 생각나서 저도 모르게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한국 교회는 사기다! 정말 사기단체다. 한국 교회는 사람을 천당보내는 곳이 아니라 천당가고 싶어하는 자들을 한데 모아 완벽하게 사기를 쳐서 모조리 지옥으로 데려가는 임시 처소이다"는 확신과 더불어 말입니다.

 

하나님도 모르면서 냅다 하나님에게 열성으로 매달리는 집단도 지옥가기는 마찬가지인 것을 시범조로 보여주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왜 사람들은 소원성취를 원할까요? 그것은 다음이 아니라 살 가치도 없는 것들이 기어이 살아남아야겠다고 고집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더러운 속성들을 인정해 달라고 교회에 출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치없는 것들은 어떻게하든 가치없는 것들입니다.

 

판사가 되고 의사가 되고 대통령이 되고 목사, 장로가 되어도 그런 인간들은 살 가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살 가치도 없는 존재들이 그렇게 유별나게 "살고 싶어라, 살고 싶어라"라고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갓바위나 교회 금요철야 기도회나 사람들이 벅적벅적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다음과 묻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너는 왜 살려 하는가? 네가 살아야 될 가치가 있음을 나 하나님에게 이야기해 봐라"라고 요구했다면 그들은 유구무언일 것입니다.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왜 삽니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계속 살아야 된다고 우깁니까? 거기에 대한 근거라도 있습니까? 우리가 살만한 가치가 있음을 증명해주는 것을 찾을 수가 있습니까?

 

여기서 우선 예수님의 경우를 봅시다. 예수님은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날 정도로 가치가 있는 분입니다. 어째서 그러합니까? 그 분의 어떤 점 때문에 부활시켜서까지 영원히 살아남아야 될 분입니까?

 

1절에 보니,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즉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그 관계성이 유지되기 때문에 그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아드님 맞습니다.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는 이런 영광이라는 가치로서 이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이외는 아무도 이런 분이 없습니다. 엣날 아담과 하와는 생명나무가 있어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아니라서 그런 식으로 계속 살아갈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드리는 기도는 단지 예수님 자신의 구원만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제대로 영생을 주시기 위한 중보기도합니다. 중보기도는 중보자되시는 분만 드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안됩니다.

 

다른 사람은 중보기도 드릴 자격이 못됩니다. 왜냐하면 본인의 기도조차 남에게 혜택을 주기는커녕 자신의 죄성만 더 들추어내는 계기만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중보기도 형식은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중보의 기능을 담당하시기 위해 예수님에게 권세가 실질적으로 주어졌음을 분명히 하는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데 있어 다음과 같은 방식을 채택하셨습니다. 즉 (1)모든 이가 죄인이다. 그래서 그 어떤 이의 그 어떤 행위로도 구원되지 못하고 죄가 생산된다. (2)하나님은 아들되시는 예수님을 보내시어 그 아드님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시한 모든 중보적 역할을 완수하시기를 원하셨다.

 

(3)과연 예수님은 중보성을 완료해서 이제 그 아들을 인정하고 영화롭게 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능력이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4)이런 중보적 기능을 일체의 허점없이 마무리하기 위해 예수님에게는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라는 논리로 진행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중보자다웁게 영광돌리느냐 아니돌리느냐를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냐 어둠의 자식이냐가 판명이 되는데 바로 어두움의 자녀 중에서 얼마를 하나님의 자녀로 드러나게 하시는데 전적으로 권세를 쓰여집니다.

 

자식들이 용돈을 달라고해도 그 사용목적을 꼭 물어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으신 권세와 능력은 예수님의 중보기능만을 높이고 영광스럽게 하는 곳에만 사용됩니다. 다른 데는 절대로 쓰여진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권세와 계획에는 낭비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기도 내용이 이 원리에 따라 이미 확정되어 버렸습니다. "주여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게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0:31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세상 것들을 달라고해도 우리 주님은 주시지 않습니다.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능력자는 따로 있습니다. 갓바위에서 절하는 사람들의 신, 곧 악마가 그런 소원을 성취시켜 줍니다.

 

"오로지 너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라 내가 도와줄께"라는 격려와 함께 말입니다. 로마서 14:8에 보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이런 생활을 해낼 수 있을까요?

 

사도행전 13:48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여기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 되도록 하시는 그 권세와 능력이 바로 예수님이 지니신 중보자만의 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바로 이런 식으로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중보성과 그 권세를 바로 아는 자가 곧 영생이 얻게 되는 자가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쓸데없는 자신의 영광성을 위하여 기도하고 고민하고 몸부림 칠것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의 원하시고 기다리시는 그 영광을 위해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