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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6:20-27 / 하나님의 사랑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요한복음 16:20-27 / 하나님의 사랑

정인순 2013. 12. 28. 22:43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요한복음-2001/john03021982.WMA

 

 

이근호

 

하나님의 사랑

2003년 2월 19일

본문 말씀: 요한복음 16:20-27

 

16: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16: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16: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16:25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16: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16: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복음에 대한 소신과 사명감 상실은 결국 본인으로 하여금 비현실적인 인간으로 변모시켜 놓는 것입니다. 복음을 모른다는 것은 현실을 모른다는 말이요, 현실을 모른다는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 있으나 마나 하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복음은 여러 귀한 것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이 세상 전부하고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최고입니다. 복음을 알았다면 모두를 안 것이 됩니다. 반대로 복음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이미 모든 것을 잃은 사람입니다. 현실은 냉혹합니다. 현실을 제대로 모르는 자에게는 현실이 가만두지 않고 그 사람을 저주하게 됩니다.

 

저주를 받지 않으려거든, 즉 축복을 받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복음부터 챙기고 살아야 합니다. 이미 전부를 얻고 시작하는 것이라면 잃더라도 원래 진작 잃어버리도록 되어 있는 것을 떼내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복음을 제대로 아는 자는 세상에 대해서 크게 기대하지도 않고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이 세상의 구조와 속성을 제대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잃을 때가 반드시 옵니다. 갑자기 오든 아니면 서서히 오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복음을 아는 자는 세상과 격리되어 있기에 세상과의 이별을 크게 아쉬워하지 않습니다. 매일같이 새롭게 머리카락이 생겨나는 젊은이는 아침에 일어날 때 머리카락 몇 개가 빠져있는 것에 대해 슬퍼하거나 통곡하지 않습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성도에게는 잃어가는 것이 있는 반면에 매일 같이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제공하는 현실성입니다. 마태복음 10:30-31에 보면,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된 그 분이 현실성 있는 분으로 매일같이 느껴지는 겁니다. '아니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분이 함께 있다는 것으로 인해 우리가 어떤 식으로 현실을 읽어야 합니까? 그 분은 우리에게 복음을 제시했고 그 복음으로 인한 안심과 기쁨도 같이 주십니다.

 

오늘 본문 21-22에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임신한 여인에게 있어 현실성이란 다름아닌 아기를 가지고 있다는 감각입니다. 비록 아직 그 아기가 바깥으로 나올 때는 상상도 못해본 아픔을 주기는 하지만 그 아픔이란 그 아기가 실제로 나타나는 순간 모든 것이 잊혀지는 법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을 뺏을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복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안고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을 상대적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보는 것이기에 참으로 괴로운 이별을 날마다 하게 됩니다. 불신앙적 태도라는 것은 전적으로 세상 친화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고, 세상에서 부러움을 얻고 싶은 심정을 말합니다.

 

한편으로는 복음은 그것이 부질없는 공상이요 현실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라고 나무랍니다. 바로 이러한 갈등 속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실제로 다시 눈 앞에 현실성 있게 등장하면 긴가민가하는데서 오는 모든 불안감은 다 옛날 이야기가 되어 즐겁고도 그 때의 불신앙적 태도를 부끄러워하면서 말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23절과 2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또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이것이 바로 복음으로만 가득찬 실제 일어날 상황입니다. 그래서 복음만으로 충분히 기뻐하지 못하고 세상 것을 소유하는 것으로 영원한 기쁨을 갖겠다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 발상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배부른 것은 순간에 불과합니다. 곧장 배고픔으로 바뀌는 것이 인간사입니다. 식욕도 그러하고 명예욕도 그러하고 재물에 대한 욕심도 그러합니다.

 

심지어 '본인이 살아있는 생존성'도 곧장 죽음에 대한 가능성으로 바뀌는 법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의 것은 사람을 환장하고 미치게 만듭니다. 이는 곧 이 세상은 이미 낡은 세상이요 고장된 세상이요 삐걱거리는 세상이요 결코 새 세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실체에 대해서 잘 모를 때는 세상이 그저 아름답고 신비롭게만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정복할 가치가 있다고 믿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미리 세상의 실정을 다 보여주시고 몸소 보여주시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세상의 신비로움이란 곧 복음을 추방하려고 악마가 실시한 요술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요술이 실제인줄 말고 너무나 깊이 말려들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육은 무익하다. 육으로 난 것은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너무나도 세상 실정을 잘 알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비록 대부분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소리에 귀를 막았습니다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은 되풀이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잔소리를 계속 받게 되는 처지에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과연 모호한 잔소리인가 아니면 실제로 되어진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세상을 보시는 방식이 과연 제대로 보는 것입니까 아니면 오늘날까지 우리가 느끼며 보는 세상에 올바른 겁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태어남을 요구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 토대에 죄가 놓여 있습니다. 죄를 머금은 채 아무리 신비로움과 화려움을 위하여 달려가도 그런 것은 악마가 만들어놓은 모래성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가 죄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고 지적하시는 겁니까?

 

이 점을 명확히 보여주는 대목이 누가복음 13:1-5에 나옵니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분명히 예수님 당시에 실로암에 있는 망대가 무너지는 사고가 있었고 18명이나 되는 사람이 분명히 죽었습니다. 그냥 꿈속에서 무너지고 꿈 속에서나 죽은 것이 아닙니다. 실제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즉 이런 현실을 보는 그 현실이해가 죄로 인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예수님 보시기에 망대가 무너지는 것만이 현실이 아니라 현재 인간들이 자기 죄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그 죄도 또한 무서운 현실 상황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놓치면 안됩니다. 발라도 총독에 의해서 억울하게 죽은 갈릴리 사람들은,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분명 죄가 더 많을 것이라고 그 사고방식이 바로 잘못된 죄의 극치라는 겁니다. 또한 무너진 망대에 치어 죽은 18 사람은 그런 일을 당하지 않고 평안히 집에 쉬고 있던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큰 죄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 회개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망대에 치어 죽은 사람은 억울하게 죽었다'라는 식으로도 생각해서는 잘못입니다. 분명히 그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멈추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뜻은 망대에 치어 죽은 자나 그렇지 않는 자다 다 같이 언제든지 죽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죄인이다는 겁니다. 따라서 근본적인 인간의 죄란 다름이 아니라 자기 주제 파악도 못하고, 현실도 모르고,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에 귀담아 듣지도 않는 그 완악함, 그것이 곧 죄입니다.

 

복음이란 일종의 탐조등입니다. 깊은 바다 속을 샅샅히 비쳐 밝히는 탐조등 말입니다. 빛에 의해 비로소 보인다고 그 때 비로소 새로운 현실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벌써 바다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탐조등이 비칠 때까지 아직 발각이 안된 것 뿐입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라는 탐조등을 가지고 샅샅히 세상을 살펴나갔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돌아오는 댓가는 사형선고였습니다. 제자들도 잠시 의심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이 허풍이 아니었나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니 십자가 사건은 세상의 죄를 들추어내는 탐조등이었고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될 자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만 현실입니다. 다른 현실은 없습니다. 망대 무너진 사건이나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은 일회적 사건에 그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저주를 말해주는 사건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제발 죽기 전에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합시다. 우리는 이미 벌써 시체가 되어야 될 자로서 길을 걷고, 일을 하고, 장사를 하고 , 농사도 짓고, 혼인도 하고들 있습니다. 현실도 모르고, 자기 죄도, 모르고, 복음도 모르고, 세상 실정도 모르고, 하늘의 예비된 저주도 모르는채 말입니다.

 

예수님이 제시한 그 탐조등을 이제는 우리도 가집시다. 그래서 샅샅히 세상의 죄를 비쳐봅시다. 하루 하루 내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압시다. 그것도 영원히 말입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그 답답함을 우리도 가지게 하시고, 예수님의 그 기쁨도 우리가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