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이사야 51:1-5 / 아브라함 가정 본문
136강-사51장,1-2,(아브라함가정)-isa08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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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가정 이근호
2008년 4월 16일 본문 말씀: 이사야 51:1-5
(사 51:1) 『의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나를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사 51:2)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생산한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혈혈 단신으로 있을 때에 내가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였느니라』 (사 51:3)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움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사 51:4)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발할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사 51:5) 『내 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아브라함이라는 분은 그냥 옛날 분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을 가리켜 ‘믿음의 조상’이라고 했습니다. 즉 믿는 자의 조상이지요. 이는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이 아니면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만이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아브라함 이후의 신앙인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신앙과 똑같은 신앙을 갖게 됩니다. 따라서 자신이 과연 신앙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떤 식으로 다루었느냐를 통해서 살펴봄으로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전에 다른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입니다. 그런데 이름이 바뀝니다.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전의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즉 신앙이란 사람 자체가 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람에 해당되는 사람이 전의 사람이라면 아브라함에 해당되는 사람은 새 사람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차이 나는 현상이 오늘날 신앙인에게 같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같은 신앙노선 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전에 그냥 평범하게 자기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본토 아비 집을 떠나게 했습니다. 이로서 아브라함은 ‘떠나온 동네’와 자신이 앞으로 들어갈 동네와의 격차를 똑똑하게 느끼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와같아야 합니다. 절대로 우리는 과거의 삶을 잊으면 안됩니다. 과거의 삶을 잃어버리면 새로운 삶과의 격차를 차악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블신자의 삶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과 점점 격차가 지는 색다른 삶의 방식이 발생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두개의 상반된 삶이 느껴지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공통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디로 데려가겠다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나가시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밝혀질 사항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결코 아브라함 본인이 자신이 가야할 곳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로 갈 것인지는 철저하게 비밀로 되어 있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 곳에 맞도록 아브라함 자신의 삶을 변경시켜 나간다는 사실을 느낄 뿐입니다. 흔히 말하는 성화론처럼 전의 생활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생생하게 전의 생활도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생활말고 다른 방식으로 생가가고 다른 방식으로 느끼는 그런 생활을 하나님에 의해서 주입되고 있습니다. 마치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대전까지는 나란히 운행한 두 자동차가 대전에서 갈라져 한 차는 전라도로 다른 한 차는 경상도로 들어서 점점 더 벌어지고 멀어지는 것과 같은 현상이 우리 성도 안에서 벌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라도로 접어든 차가 사라진다든지, 아니면 경상도로 간 차가 더 큰 차로 변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두 대의 자동차의 거리는 갈수록 확연하게 멀어짐을 본인이 알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생활 방식이 달라질까요? 갈라디아서 3:17-19에 보면,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거룩한 율법을 들이대신 것은 그 어느 인간도 이 하늘 나라의 하나님만 지킬 수 있는 이 법을 아무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율법은 하나라도 한 순간이라도 빼먹거나 잊거나 위반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참으로 하나님이 사는 것처럼 살지 않는 한 이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느 누가 이 율법이라는 지뢰밭을 무사히 통과해서 천국에 이르겠습니까? 그런데 이미 천국에 간 선배가 있었습니다. 그 분의 이름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과연 이 율법을 온전히 다 지켰을까요?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율법 말고 ‘약속’이라는 것이 주어졌습니다. 이 약속은 장차 오실 메시아가 자신의 인생을 책임져주신다는 내용인데, 그 메시아의 하신 일로 인하여 아브라함 자신은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이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 사실을 믿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 판정받은 ‘의’야말로 유일하게 천국에서도 통하는 의입니다.
사람이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멀리 있는 타인과도 다 연결되어 있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자기 딴에 자기 동네에서 반듯하게 산다고 자부해도 자신의 음식물 하나하나가 멀리 아프리카에 사는 어린이의 양식을 뺏는 결과를 초래하는 그런 관계망 속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 누구에게 신세지지 않고 지낼 수는 없습니다. 그 누구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하는 판정도 사실 모두 일방적입니다. 자기 행위에 대한 변명이 깔려있는 판정입니다. 이처럼 산다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에 추접스럽게 늙는 과정입니다.
어느 한 순간을 잡아서 “이게 나다”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젊은 20대가 나입니까 아니면 90대의 늙은 나가 진정 내 모습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쉬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완벽한 의가 마련되어 있는 천국 사람으로 만드는 과정에 있습니다. 전에 우리가 살던 사고방식을 분명히 인식케 하면서 말입니다.
하늘 나라의 질서는 완벽한 거룩이요 완벽한 의요 완벽한 선입니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그 수준에 도달될 수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도 이 안 됨을 아시고 아브라함처럼 은혜로 예수님의 공로를 믿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가 받을 복이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소나 양이나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움을 알았습니다. 그 의가 우리 안에서 늘 생생하게 활동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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