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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이사야 50:4-9 / 메시아의모습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이사야

이사야 50:4-9 / 메시아의모습

정인순 2013. 11. 5. 17:05

 

135강-사50장,4-9,(메시아의모습)-isa080409메시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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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9일

이근호

 

본문 말씀: 이사야 50:4-9

(사 50:4)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사 50: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사 50: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사 50: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

(사 50: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뇨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뇨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사 50:9)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뇨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에게 먹히리라』

 

성경을 펴놓으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씀을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를 먼저 관심 갖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안 지켜도 된다고 여기면 아예 성경 자체를 안 봐도 된다는 식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지켜야 된다고 여기면 이 성경 말씀 지킨 만큼 자기 속에서 ‘자기 의로움’으로 소복히 쌓여나가게 됩니다.

 

로마서 10:2-3에 보면,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즉 사람들이란 하나님께 열심을 내면 그것을 잊지를 못하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자기를 부인해도 자신이 한 수고를 버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자는 결국 자기 열심만을 쥐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을 지키려는 것도 문제요 성경 말씀을 안 지키려고 아예 안 보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럴 때는 어떡하면 되겠습니까? 로마서 13:9에 보면,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경에 숱하게 많은 구절들이 있지만 그 구절들은 ‘사랑’으로 하나로 묶이는 내용입니다. 즉 사랑을 알면 모든 말씀을 지킨 것이 됩니다. 실제로는 ‘사랑을 알면’이 아니라 ‘사랑을 받으면’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면. 모든 율법을 다 이룬 것이 됩니다. 이렇게 볼 때에 성경을 지킬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고민할 것이 아니라 이 성경 전체가 사랑을 제공해 주시는 그 한분에게 쏠린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성경이라는 문자와 우리 자신 사이에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이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열심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서 사랑으로 우리에게 제공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을 입으면 모든 것을 받은 것입니다.

 

이웃집 사람들이 아무리 내 자식을 비난해도 내가 내 자식을 사랑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우리를 성경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주어진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만 받고 냅다 도망치면 그만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주는 가마솥 뚜껑과 같은 것입니다. 한 번 덮었다 하면 바람불어도 들썩거리지 않는 무게 있는 듬직한 그 사랑을 말입니다.

 

그런데 솥뚜껑 노릇하기 위해서 우리 예수님의 맨 몸은 무수한 수모과 조롱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행함과 열심은 잊어도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당하신 예수님의 고통을 잊으면 안됩니다. 사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 고생할 때에 나는 그 자리에 없기에 나로서는 책임질 필요없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도대체 어떤 식으로 수모와 조롱을 받았는지를 아신다면 결코 그 수모와 조롱과 우리 자신과 무관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천사가 나타나 도시의 멸망을 전했을 때, 같은 집안이었던 사위 둘이 그 소식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성경책을 펴놓고 설교를 해도 농담이요, 교인들이 성경책을 펴놓고 같이 봐도 농담입니다. 어디에도 진지함도 없고 진담으로 여기는 사람도 없다. 그저 교회가 놀자판입니다. 우리는 이 사위들의 농담을 한껏 비난하게 됩니다. 하지만 목사 생활을 오래하고 교인 생활 오래하면 어느새 우리 내부에서 성경의 모든 말씀을 농담으로 간주하고 싶은 충동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릴 때, 예수님을 때리고 놀리고 비난한 그들의 말을 들어오면, 어느새 타성에 젖은 우리들의 속에서도 그들의 행동을 동조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을 끝까지 조롱한 사람은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가지고 조롱했습니다. 한 가지는 예수님의 눈을 수건으로 가리고, 과연 예수님이 용한 점쟁이라도 되는 양 선지자 노릇을 해보라고 놀려대는 겁니다.

 

그들 인간들이 생각하는 선지자 개념은, 사람이 미처 알지 못하는 지혜나 신기한 것을 초능력으로 발휘하는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희한한 재주를 피우는 그런 선지자로 알기에 예수를 그런 식으로 놀려대는 겁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인들도 교회에 다니면서 은연중에 예수님의 신기한 솜씨를 구경해보고 경험해 보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이러이러한 것을 용하게 성취시켜 주시면 예수 잘 믿겠다고 나서기 일수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답답할 때는 이런 의도가 숨기지 못하고 튀어나와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짖 개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양적으로 신기한 일을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인간 자체를 질적으로 죄인으로 규정하는 그런 선지자이십니다.

 

즉 너희 인간들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이상 뭘해도 죄인이다는 점을 알려주시는 선지자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선지자 되시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질적인 정체가 탄로나야 합니다. 신기한 것을 얻을 자격이 마치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는 그 자체가 예수님 앞에서 죄악된 모습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조롱받은 것은, “자신도 구원 못하면서 어떻게 남을 구원하겠다고 나서느냐”하는 이유에서입니다. 사실 인간들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방식으로 자신이 구원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나 옆에 달린 강도 둘이나 모두 놀라운 기적으로 수갑이 저절로 풀린다든지, 못을 박아도 튀어나와버린다든지 하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즉 예수님의 구원방식은 항상 인간들에게 가능한 방식이 아니라 불가능한 방식을 사용해서 이루어집니다. 도저히 안 되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 인간의 머리로 가능할만한 방식을 얻고자 하는 그 자체가 예수님 보시기에 죄가 되는 겁니다.

 

이로서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죄인이 아닌 경우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죄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로 구원받습니다. 바로 이것이 불가능성이 평생 우리 속에 남아 있어야 될 이유입니다. 그래야 우리 속에 나의 의가 쌓이지 않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욕한 자들이 우리와 딴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