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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이사야 51:9-12 / 여호와의 팔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이사야

이사야 51:9-12 / 여호와의 팔

정인순 2013. 11. 5. 17:35

 

138강-사51장,9-11,(여호와의팔)-isa08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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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팔

2008년 4월 30일

이근호

 

본문 말씀: 이사야 51:9-12

(사 51:9)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사 51:10)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얻은 자들로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사 51:11) 『여호와께 구속된 자들이 돌아와서 노래하며 시온으로 들어와서 그 머리 위에 영영한 기쁨을 쓰고 즐거움과 기쁨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사 51:12) 『가라사대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나여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

 

오늘 본문에서 인생이란 슬픔과 탄식 뿐임을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시다는 겁니다. 그것을 즐거움과 기쁨으로 바꾸어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성경을 안보려고 합니다. 우리 자신의 욕망이 자꾸만 하나님의 말씀을 밀쳐내는 속성을 발휘합니다. 즉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여깁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펄펄 살아있다고 여깁니다. 살아있는 인간들은 그냥 곱게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쉬지도 않고 타인과 비교하고 우열을 따집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시기와 낭패와 좌절을 수시로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피곤한 인생입니다. 자신이 자초한 겁니다. 이런 분들에게 성경 말씀을 읽으라고 권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분들이 아무리 성경을 곁에 두고 읽는다 할지라도 전혀 위로가 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서 세상에 뛰어들어서 타인과의 경쟁에서 승리해서 자신이 과연 제대로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경의 말씀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사람에게 죽는 순간이 찾아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자신이 펄펄 살아있다고 여기니 하나님을 거들떠 보지도 않지만 중병에 걸려 오늘 내일 하는 처지라면 더 이상 자신이 자신에게 취한 조치는 전혀 없어진 상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팔이 실감나고 효능이 있는 것은 인간이 죽음을 느낄 때입니다. 즉 더 이상 자신이 자신을 위하여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가 없게 된 상황이 찾아들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런 상황을 유발시키십니다.

 

왜 하나님의 구원의 팔이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주님께서는 전에 자기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주신 그 주님이십니다. 즉 자기 백성들이 죽음 직전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로서는 감히 상상도 안가는 일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깊은 홍해 바다 가운데 길을 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다는 것은 바로 이런 능력을 일관성있게 적용시키는 일입니다. 즉 인간이 죽음에 직면하지 않고서는 정작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구원의 능력을 알 길이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들이 하나님과 관계한다는 것은 죽은 자로서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다루어주시기를 바라는 관계입니다. 다 맡겨버리는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때는 본래의 인간의 자리로 되돌아가서 그 죽음의 자리에게 일방적으로 건져내시는 방식을 취하십니다.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자신을 죽은 자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을 의식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남들처럼 살고 싶어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성경을 보려고도 하지를 않습니다. 남들처럼 되지 못하면 인생 실패한 것으로 취급해 버립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12절이나 7절-8절에 보면, 인간의 실상이 나옵니다.

 

“가라사대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나여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나를 듣고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 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그들은 옷 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며 그들은 양털 같이 벌레에게 먹힐 것이로되 나의 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

 

즉 인간들이란 구멍 뚫린 존재라는 겁니다. 썩어가고 있고 죽어가는 있는 유령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풀과 같이 곧 지상에서 소멸될 존재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허깨비같은 존재가 인갑니다. 있다고 여겨지지만 실은 없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겁니다. 있어도 곧 없어질 존재라는 겁니다.

 

그런 허깨비를 부러워하고 있으니 슬픔과 탄식이 인간에게 찾아들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주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산 사람’입니다.

 

‘예수 믿으면 산다’라는 문제에서 앞의 부분을 빼버리면 뒤에 ‘산다’만 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산 사람입니다. 그 어떠한 환경 속에서는 변함없이 산 사람 맞습니다. 개인 신상에 그 어떠한 변화가 주어져도 이미 ‘산 사람’ 맞습니다. 변동이 되지를 않습니다. 사도나 선지자들의 특징을 보면, 그들이 자신을 이미 ‘산 사람’의 자격으로 온 세계를 향하여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저주저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려준 것이 아니기에 더 이상 사람을 의식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만약 사도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 우열을 따졌다면 그는 낙심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일관된 일을 믿었습니다. 죽음에서도 살릴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뿐임을 알고 기뻐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자기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겁낼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적으로 봐서 사도 바울은 재벌도 아니요 고관대작도 아닙니다. 하지만 로마서 1:16에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은 죽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죄가 무섭기 때문입니다. 죄가 남아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무서울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 무서운 죄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것도 행함이 아니라 십자가 피를 믿음으로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그 어떤 경우에도 ‘산 사람’ 맞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사도가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세상의 금력과 권력으로 자신을 대조하지 않습니다. 마치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같이 죽었던 강도와의 관계와 같습니다. 십자가 밑에 있는 일반인이 보기에 예수님이나 강도나 모두 이 사회에서 하등 쓸모 짝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그 두 분 사이에는 낙원의 이야기가 오고갔습니다. 우리도 이 두 분의 사이에 끼어들어야 합니다. 자신을 세상적으로 아무 쓸모짝이 없다고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세상적으로 쓸모있는 존재로 보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