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이사야 49:24-26 / 여호와의힘 본문
133강-사49장,24-26,(여호와의힘)-isa080326여호와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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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26일 이근호
본문 말씀: 이사야 49:24-26
(사 49:24) 『용사의 빼앗은 것을 어떻게 도로 빼앗으며 승리자에게 사로잡힌 자를 어떻게 건져낼 수 있으랴마는』 (사 49:2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용사의 포로도 빼앗을 것이요 강포자의 빼앗은 것도 건져낼 것이니 이는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네 자녀를 구원할 것임이라』 (사 49:26) 『내가 너를 학대하는 자로 자기의 고기를 먹게 하며 새 술에 취함 같이 자기의 피에 취하게 하리니 모든 육체가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요 네 구속자요 야곱의 전능자인줄 알리라』
하나님의 구원이 고요하고 태평스럽게 이루어지기를 우리 인간들이 은근히 바라게 됩니다. 즉 구원은 구원대로 성취되되 그 과정이 분잡스럽지 않게 간편하게 이루어지를 원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뭐든지 편한 것을 좋아하는 성질 때문입니다. 강태공이 낚시하듯이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구원은 치열하고 답답한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 세상에서 빠져나오는 것만이 구원의 전부가 아니라 들어가야 하는 세계가 따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던 행세를 천국가서도 해서는 아니됩니다. 그렇게 되려면 아예 이 땅에서부터 인간 자체가 달라지고 바뀌어져야 합니다.
우리 성도가 들어가야 될 세계는 예수님이 사시던 세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처럼 거룩하지 아니하면 그 세계에 합류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에 예수님 몸에서 전혀 냄새가 나지 않는다면, 천국에 들어가야 될 성도 또한 몸에서 전혀 냄새가 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이 세상에 출생할 때부터 온갖 더러운 냄새를 피우게 됩니다. 따라서 완전히 달라질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을 하시는 하나님께서 바로 이런 점을 고려해서 천국 입성 스케줄이 짜여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들로 하여금 꽉쪼이는 삶을 살게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구원되어야 될 자기 백성들이 현 실정에서 패배자로 전락해있고 강포자에게 형편없이 당하기만 하는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하나님 백성들이 자체적으로 갖고 있는 그 어떤 힘으로도 자신을 형편을 변경시킬 가능성이 전무합니다. 도저히 자력으로 되는게 없는 그런 지경으로 하나님은 철저하게 몰아가십니다. 이런 일도 다 구원을 위함입니다. 이런 험악한 환경에서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 믿게 됩니다. 절대로 자기 자신을 안 믿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는. ‘예수 믿으면 구원된다’입니다. 분명히 이 말씀을 옳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옳다고 해서 우리 인간이 지킬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느 인간치고 예수 믿는 인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극한 상황에서도 오로지 자기 자신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자기 목숨이 떨어져 나가는 죽음의 순간이 찾아와도 거기서도 장렬하게 죽는 자기 자신을 아름답게 미화하기 마련입니다. 순교를 하든지 남을 도와준다든지 아니면 금식과 회개의 기도시간에서도 인간들은 한시로 자기 자신 생각을 떨쳐버리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어야 될 그 순간이 와서, 예수 믿는 자기 자신을 대견스럽게 여기게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구원되는 자는 반드시 십자가 안에서 구원된다고 말입니다. 왜 하나님은 십자가를 고집할까요? 그것은 십자가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가차없는 저주가 주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도가 십자가 속으로 들어오려면 십자가를 올려다보면서 '왜 내가 저토록 저주받아야 될 죄인이란 말인가?‘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평소에 사람들은 좀 살만하고 여유 있으면 불쌍한 이웃과 어려운 사람들을 동정하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자신의 품성이 평소보다 더 고상하리라고 여깁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에서 말씀하시는 저주받을 죄인으로서의 자아가 영 실감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착하디 착한 내가 저주받을 죄인까지는 될 리가 없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타고서 왜 성도가 죄인일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을 실감나게 해주는 작업에 나서십니다. 사람들이 죄인으로 느껴지는 경우란, 자기 자신에게 지독하고 실망했을 때입니다. 즉 자기 자신을 개보다 못한 존재라는 점을 확신시키는 경우에만 자기 자신을 믿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 구원의 과제는 자기에게서 예수님에게로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좀더 분명하게 알기 위하여 마가복음 11장에 나오는 한 가지 사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시장기가 있어 무화과 나무에게 과실을 따먹으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 과실 맺을 시기가 되지 않아서 그 무화과 나무에는 예수님의 시장기를 채워줄 과실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무화과 나무를 저주해버렸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제자들은 그 무화과 나무가 뿌리부터 바짝 말라죽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로 그 무화과 나무가 저주받은 것입니다.
제자들은 혼돈이 되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평소에 예수님의 결정은 모두 옳은 결정이라고 자신들이 자 이해하리라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주받은 무화과 나무의 입장에 서보면 이번 예수님의 저주는 도무지 이해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주란 나쁜 짓을 했을 경우에 그 징벌로 주어지는 법입니다. 그런데 저 불쌍하고 억울한 무화과 나무는 참으로 아무 짓도 안했습니다.
시기가 아직 아니라서 예수님이 흡족할만한 열매를 맺지 못한 것 뿐입니다. 무화과나무가 성질이 더러워서 과실 맺을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 대들기 위해서 과실을 부실하게 맺은 게 결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화과나무는 여지없이 예수님에게 저주받았습니다.
이것은 곧 무화과나무 입장에서 서서 예수님을 이해해서는 아니된다는 말이 되는 동시에, 우리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즉 우리 인간들이 예수님을 이해할 때, 자기 구원받을 입장에 서서 예수님을 이해해서는 아니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에게만 오직 저주든 축복이든 줄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겁니다. 성도들이 결코 구원받을 만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예수님의 선언에 의해서 복받은 것입니다.
지붕 뚫은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은 것도 그의 열성이 아닙니다. 오로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예수님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뿐입니다. 앉은뱅이를 걷게 한 것은 그에게 직접 주님의 명령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성도를 향한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거역될 수 없다는 점이 성도에게 복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원리가 .여호와는 구원자요‘라는 문장에 담긴 뜻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입장에서 예수 믿지 말고 주님이 하신 숙제의 결과로 우리가 구원되었음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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