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이사야 49:15-16 / 안 잊었다 본문
132강-사49장,15-16,(안잊었다)-isa08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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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잊었다
2008년 3월 19일 이근호
본문 말씀: 이사야 49:15-16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 49: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하나님은 알기 쉬운 말로 자기 백성과의 관계를 소개하십니다. 젖먹이 아이와 그를 낳은 어머니의 관계랍니다. 젖먹이 어린아이는 비록 자기 엄마를 잊을지라도 성인인 어머니는 결코 자기 자식을 잊지 않습니다. 여기서 젖먹이 수준의 안목과 어머니 수준의 안목의 차이를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언제 젖먹이 같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생각할까요? 13절 끝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이니라”. 즉 사람이란 고난 중에 있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알지 못합니다. 도리어 자립하려고 설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긍휼, 즉 불쌍히 여겨달라기 보다는 자기 하는 일에 협조하라고 기도할 것이 뻔합니다. 만약에 자기 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무응답이면, 인간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나는 하나님을 찾았지만 하나님은 매정하게도 나를 버렸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하고는 다른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이 어려워서 사람들이 성경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답변을 안 해주니 성경 말씀으로부터 눈을 돌려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토록 아쉬워 하는 것을 주시지 않고 긍휼이나 ‘십자가 피의 복음’이니 하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의 성격이 결국 우리로 하여금 죽음으로 몰아넣는 세상인 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남들보다 더 죄를 지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이 세상 자체가 우리를 죽이는 세상이고 우리는 그 세상 안에서 출생했습니다.
어떤 분이 암에 걸러서 우리보다 조금 일찍 세상을 하직하신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신은 더 좋은 나라에 먼저 가서 편히 쉬게 되었는데 남아 있는 여러분들을 여전히 세상에 남아 있으면서 고생을 계속해야 하니 참 미안하고 죄송스럽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이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건져주기 위함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대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저 한평생 아무렇게 살다가 죽어서 눈 감으면 편안히 쉬면 그만이지”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십니다. 그 죽음의 세계라는 것이 단순히 눈 감은 깜깜한 세계 정도가 아니라 말로 표현이 다 안 될 정도의 고통의 세계라는 겁니다.
마가복음 9:43-45에 보면,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생 손, 생 발을 톱으로 슬근슬근 잘라낸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진심으로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장차 인간들이 죽어서 들어가게 될 지옥은 이정도 고통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극심하게 고통스럽다는 겁니다. 따라서 차라리 범죄한 생 손과 범죄한 생 발을 톱으로 잘라내는 한이 있더라도 나머지 지체로서만으로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될 곳이 지옥이라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만드신 예수님께서 친히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참으로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는 곳은 예수님 본인이 더 잘 아시기에 예수님은 우리가 요구하는 것을 주시지 않고 도리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불쌍히 여겨주심’입니다.
빌립보서 1:29에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믿음이 생기게 되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단순히 믿음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도 옵션처럼 따라 붙습니다.
왜 우리가 그냥 천국에 가면 되는데 고난이 따라와야 하는 것일까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집의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당겨 챙기고서는 가출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는 아버지없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받은 유산을 몽땅 다 날려버리고 완전히 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상거지꼴로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고 여긴 이 탕자는 실은 가출하고 난 뒤에 많은 것을 들고 들어온 셈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빈 호주머니’입니다.
그는 자아가 비워있는 공간을 듬뿍 갖고 온 것입니다.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바로 ‘전혀 없음’이 많이 달고 그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제 탕자에게 남은 것은 그 비워있는 자리에 오로지 아버지 것으로만 가득가득 채워지는 시간만 남아 있습니다.
그가 자기 것이 있다고 할 때에는 결코 아버지 것이 들어올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것이 모두 상실했을 때, 비로소 아버지의 것이 들어오게 됩니다. 탕자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할 때는 아버지를 잊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아버지는 아들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이 지옥같은 세상에서 탕자같은 우리를 예수님께서 건지시는데 왜 우리로 하여금 고난의 길을 가게 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천국이란 오로지 주님의 것으로만 채워진 자에게 허락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완전히 탕자임을 알게 된 자에게만 예수님의 것이 들어갈 여지가 생기는 겁니다.
아버지는 탕자를 위하여 소를 잡고, 가락지를 끼우고, 좋은 옷으로 입혔습니다. 만약에 이 복장을 하고 탕자가 이웃 어른들을 만나면 그 탕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오직 아버지 자랑만 할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평생토록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를 지켜드렸다고 여긴 맏아들은 화가 잔뜩 나있습니다. 그는 자립형 인간입니다. 자기의 행함으로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칭찬받을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는 평소에 자기 생각만 한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는 고난을 모릅니다. 그저 자기를 위해 평생 고생만 했을 뿐입니다. 아버지의 기쁨이 되지 못하는 자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립하기 위해 고생하는 것으로서 성경에 나오는 은혜의 말씀을 모독하지 않게 하옵소서. 항상 은혜가 필요한 탕자임을 아는 고난 받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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